[특집] 서양철학과 불교, 그 접점과 경계

1. 비교: 불가능한 가능성

많은 사람들은 서양 철학자들 중에서 화이트헤드만큼 불교철학과 유사한 철학을 전개한 이가 드물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지적은 일견 옳은 지적이다. 비교한다는 행위는 비교의 대상이 되는 둘 사이에 어떤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양자를 대화시키는 것이다.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아무리 다른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상이한 철학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무엇인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며 이제까지 이런 가정이 성공적인 결과로 드러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1) 1) 화이트헤드 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한 저작들은 꽤 있어 왔다. 앞으로 진행되는 토론에서 그들 중 몇몇 책이 인용될 것이다. 인용되지 않은 것들 중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John B. Cobb Jr., Beyond Dialogu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Robert C. Neville, The Tao and The Daimon (New York: SUNY Press, 1982). 필자가 1991년에 클레어몬트 대학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도 화이트헤드와 원효를 비교한 것이다. 원제목은 “Wonhyo’s Doctrine of Ultimate Reality and Faith: A Whiteheadian Evaluation.”이다.

또한 혹시 나중에 양자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괴리만이 존재한다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의 작업은 그것 자체로서 유익한 경우가 많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양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본 글도 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 사이에는 유사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단 전제하고 비교를 시도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전제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난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른바 토마스 쿤(Thomas Kuhn)이 말하는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의 이론, 즉 서로 다른 통상적인 학문들 사이에는 비교 가능한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불교와 화이트헤드 양자를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불교철학은 하나의 종교철학이고, 반면에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하나의 과학철학에 근거한 형이상학이다.

종교철학과 과학철학적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적 장르가 서로 전혀 비교가 불가능한 분야들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 비교는 대개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양자를 비교하려 시도하면, 그 두 장르는 마치 예를 들어 말하면, 오렌지와 그릇을 비교하는 것처럼 힘들고 무익한 작업이 될 확률이 크다.

다시 말해서 비록 서로 종류가 다르지만 오렌지와 귤을 비교하는 것은 그나마 비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오렌지와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을 비교하는 것은 무익한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와 불교를 비교할 때 그것을 오렌지와 그릇의 관계처럼 이질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오렌지와 귤의 관계처럼 비슷한 것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필자는 이 소논문에서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철학이라는 같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며 이 범주 안에서 서로 비교가 가능하다고 가정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불교와 화이트헤드 사이에는 공통점보다 상이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상호 다른 점을 지적해 내는 것도 본 논문의 한 과제로 삼겠다. 본 논문의 제목을 ‘불교와 화이트헤드 철학의 동이점(同異點)’이라고 잡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차이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 무조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양자 사이를 이간질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단견이다. 이미 말한 바대로 차이를 지적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하면서 서로 배운 후, 상호 모자란 점을 보충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식으로 차이를 강조하면서 비교를 시도하는 본 글의 입장은 본 글이 불교와 화이트헤드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함께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은 그것이 종교든 철학이든 모두 생성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은, 불교나 화이트헤드나 모두 고정되고 완성된 종교나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성과정 속에서 앞을 향해서 발전되어 나간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우리는 양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지적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매우 추천할 만한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와 화이트헤드를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업처럼 보이면서도 결국 가능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불교와 화이트헤드만큼 자신들의 철학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는 철학들도 드물다. 불교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각종 이론들을 흡수 병합하면서 발전되어 왔기에 좀처럼 흠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는 화이트헤드도 마찬가지다. 서양 철학자 중에서 화이트헤드에 비견할 만큼 정교하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직적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한 철학자를 만나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양자의 장점은 오히려 서로를 비교하는 데 부정적인 점으로 작용하기 쉽다.

비교를 하다 보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우열을 따지게 되는 수가 많은데, 그럴 경우 상대방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 철학의 완벽함을 합리화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대화는 유익함보다는 서로 상처만 입은 채 무익하게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대로 적어도 불교와 화이트헤드만큼은 이런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체계를 자신들 안에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고정 불변하는 완벽한 철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생성과정 속에 있는 발전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은 화이트헤드와 불교철학을 비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한편으로 서로 철학적인 공통점들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논의를 전개하면서 동시에 상호 다른 점들도 솔직히 지적해 내는 것을 또 하나의 목적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은 여러 각도에서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철학과 과학철학을 비교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는 양자의 우주론을 비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우주론으로 필자가 지칭하는 것은 일종의 세계관이다. 과학철학은 물론이고 어느 종교이건 세계관이 없는 종교는 없을 것이며, 이것이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표현될 때는 일종의 우주론이 된다.

특히 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이 일견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르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우주론적인 전제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주론을 비교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우주론을 비교하다 보면 서로가 만물의 실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른바 철학 용어로 존재론, 혹은 실재론의 문제가 될 것이다. 불교철학이나 화이트헤드 철학이나 동일한 실재관, 즉 사물의 본질을 생성과 과정으로 보는 실재관을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를 주제로 놓고서 비교하는 작업은 언제나 흥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대개 실재론을 비교하다 보면 일반적인 비교에 그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약점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는 양자를 보다 구체적으로 비교하는 사례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한 사례의 일환으로 필자는 역사와 시간에 대한 양자의 이론을 소개하겠다. 역사와 시간에 대한 양측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들은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어떻게 매우 다른 장르에 속해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2. 우주론

우주론을 통해서 불교와 화이트헤드를 비교한다고 말할 때, 혹자는 도대체 불교에 우주론다운 우주론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먼저 던질 수 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우주론을 생각하면서 대개 자연과학과 그것에 근거한 우주론을 염두에 두고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화이트헤디안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우주론은 현대적이지 않기에 어쩌면 초보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화이트헤드는 17세기 이래 발전된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을 두루 섭렵한 후에, 그것에 근거하여 플라톤 이후 진행되어온 서구 철학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는 철학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전근대적인 과학관에 기초하여 단지 종교적인 세계관 하나에만 주로 관심하여 온 불교철학의 우주론이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불교의 우주론은 그토록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역부족이기만 할까?

물론 불교는 주로 종교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자연과학적 우주론을 전개하지 않는다. 불교의 수많은 경전들이 전혀 과학적 우주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우주론이 현대의 자연과학이 말하는 우주관에 대응될 만한 정교한 과학적 이론을 펼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불교에 우주론다운 우주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주론이란 자연과학적 우주론도 있지만 철학적 우주론도 있으며, 때로는 철학적 우주론이 보다 더 심오하고 폭이 넓은 우주의 의미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의 자연과학적 우주론은 철학적인 우주론의 배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모든 학문은 대개 철학적 우주론을 배경으로 해서 탄생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2) 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그 반대의 경우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철학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분석하고 종합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철학은 사회과학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서양에 있어서 플라톤과 그 이전의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의 철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의 철학은 대부분 법정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학을 만들어 내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최근에 이런 문제를 다룬 고전이 우리말로 번역된 바 있다. 콘포드의 책, 《종교에서 철학으로》를 참조하라.

즉 하나의 철학은 경험과학의 근거와 배경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철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탄생되었건, 그것이 일단 탄생된 이후에는 여러 가지 경험과학의 근간이 되곤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요즈음 유행하는 양자물리학의 경우, 동양철학의 우주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그 이론이 더욱 정교하게 정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양자물리학의 경우 역학(力學)에 관한 물리적 실험을 거듭하다 보니 나온 가설이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지만, 한편으로 그런 가설이 하나의 이론으로서 정립되는 과정에서, 만일 양자이론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이전에 존재하던 사건(event)이나 관계에 대한 이론에 전혀 어두웠다면, 그런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데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과학이론에는 언제나 철학적 이론이 하나의 근거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길게 다룰 지면을 갖고 있지 않다. 필자가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단지 불교철학이라고 해서 과학적 우주론이 약하다든지, 혹은 정교하지 못하다는 주장을 펼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불교철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의 자연과학이 주장하는 가설들을 예측하고 있었다.

요즈음 들어 속속들이 발견되듯이 현대의 물리학이 발견한 세계관은 불교철학이 전제하고 있는 우주관에 매우 비슷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프리조프 카프라(Frijof Capra) 같은 이들의 주장을 보면 불교적 우주관은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양자역학의 세계나 상대성 원리의 세계에 매우 가까운 세계관을 오래 전부터 전제하고 있었다. 이는 앞에서 말한바 철학이 자연과학의 근간이 되면서 그것을 예견하는 전형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논자가 화이트헤드 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하면서 우주론을 비교의 도구로 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주론이라는 개념으로서 논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자연 및 지구의 외부환경으로서의 거대 우주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루고 있는 미시적 우주 및 그런 우주에 대해서 사유하고 있는 인간세계의 삶의 원리를 지배하는 일반적인 거대이론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한마디로 세계관이 지칭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을 말한다.

단지 세계관이라는 개념과 우주론이라는 개념에 다른 점이 있다면, 세계관은 주로 정치 경제적이고, 사회 철학적인 면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말하는 것임에 반해, 우주론은 세계를 주로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상정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경우 그의 철학은 철저히 우주론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가 펼치려는 과정 형이상학이나 사변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은 한결같이 올바른 의미의 우주론을 형성하려는 목표로 가득 차 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이렇게 우주론을 형성하는 데 집중되는 것은 그의 철학이 단순히 하나의 과학철학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거대한 형이상학을 건설하는 것을 타깃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의 철학이 온전한 의미의 철학이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우선 철저하게 현대과학의 결과에 기초해서 합리성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연과학적인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런 것을 넘어서는 단계, 한마디로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세계를 탐구할 수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즉 “사변철학이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이다.”3)(강조는 필자의 것) 이 주장은 바로 철학이 하나의 우주론으로서 존재하면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요소들, 즉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까지도 설명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기능을 할 수 있어야 이상적인 철학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3)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오영환 역(서울: 민음사), p.49.

이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비교하여 불교철학이 가지고 있는 우주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불교철학은 모든 우주론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취급한다는 특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불교 우주론에 있어서 철학은 단지 종교적인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인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왜냐하면 불교도들이 철학을 한다면 그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일 뿐이다.

불교 우주론의 특성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보여져야만 한다. 즉 불교 우주론은 어떤 때에는 논리적인 일관성조차도 요구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아무리 논리가 좋아도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안에 철학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존재 목적이 불교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구원을 획득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은 불교철학에서 왜 과학철학이 사용하는 사변 이성이 선호되지 않고 직관이 선호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물론 사변 이성은 대개 인간 인식의 꽃으로 간주되지만, 동시에 인간이 우주를 통전적으로 조망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데는 오히려 방해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변 이성을 피하고 그것보다 더 깊은 인식의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우주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토론을 종합해 보면, 불교도들이 단지 종교적인 각도에서 우주론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그것의 한계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여기서 과학적인 우주론과 종교적인 우주론 중에서 어느 것이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전자는 전자의 방식대로 우주에 공헌하고 있고 후자는 후자의 방식을 따라서 우주에 공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적인 우주론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반면에 불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세계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3. 존재에 대한 분석

화이트헤드와 불교는 서양철학적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존재론적으로 비주류의 입장에 서왔다. 서구 사조의 주류 존재론은 실체론(sub-stantialism)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실체론이 어떻게 서구에서 주류 존재론으로 자리잡게 되었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합리주의를 이해해야만 한다. 서구의 주류 인식론이었던 합리주의가 실체론을 주류 존재론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구에서 합리주의란 어떻게 태동하였는가?

인간은 인식론적으로 불합리한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서구적 사고가 발아된 그리스 철학만 보더라도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모두 불합리성을 싫어했다. 서구철학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탈레스는 물론이고 존재론의 아버지라 명명되는 파르메니데스도 불합리를 싫어했다. 따라서 그들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나 생성하고 있는 것이면 안 되고,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것이란 무질서와 변화하는 것에서 불변하고 질서가 잡혀 있는 것을 찾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아르케(arche) 즉 원리를 추구했는데, 원리란 변화하는 것 속에서 고정된 원칙을 찾아내는 도구이었다. 그런 것이 있어야 세계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리를 찾는 것은 카오스의 혼돈에서 질서의 우주를 찾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우주’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cosmos(질서)’로 번역되는 것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서구인들이 왜 합리주의를 선호했으며, 또한 어떤 이유에서 합리주의가 실체론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코스모스, 즉 인간을 둘러싼 자연세계가 질서가 잡혀 있는 우주라고 보았으며, 이런 우주는 인간의 합리정신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원리에 따라 질서 있게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아르케(arche), 즉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를 불로 보든지 물로 보든지, 혹은 존재로 보든지, 모든 사물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實體, sub-stance)로서 이루어져야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것은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실체론적 존재론이 주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서구적 입장에서 볼 때 비주류의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불교와 화이트헤드는 생성, 변화, 과정 등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참 실재이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연기(緣起)와 공(空)의 이론으로 설명되었다. 본래 만물이 고통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불교의 심리학적인 분석은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존재론적인 분석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다시, 모든 존재는 오온(五蘊)의 합에 지나지 않기에, 존재를 해체하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공뿐이라는 철학적인 실재론으로 발전했다. 엄밀히 말하면 실재는 없다는 실재론이므로 불교의 실재론은 비실재론(non-realism)이다. 한편 이런 이론은 연기론으로 강화되었는데, 만일 삼라만상의 만물들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이런 상호적 의존관계가 없다면 존재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삼라만상의 모든 만물은 무상하다는 것이 연기론의 핵심이다. 서구에서 ‘연기’를 ‘의존적 상호 발생(dependent co-origination)’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번역이다.

관계와 상호 생성의 입장에서 실재를 바라다보는 점에서는 화이트헤드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연기이론이 화이트헤드 철학에서는 ‘상대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relativity)’로 나타난다.4) 여기서 상대성의 원리란 세상에 고정되고 문이 닫힌 채 홀로 존재하는 실체 같은 것은 없고,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상대성 이론은 그저 단순한 종류의 ‘관계 이론’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의 존재는 다른 존재 안에 내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그것 안으로 들어간다는 이론이 화이트헤드의 ‘상대성의 원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체는 다른 존재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전통적 주류 서양철학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었다. 4) 《과정과 실재》의 p.80을 참조하라.

한마디로 화이트헤드는 실체라는 개념이 서구철학의 모든 문제점을 담고 있다고 보았기에, 실체 개념을 극복하는 철학을 세우는 것을 평생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고정되어 홀로 존재한다는 실체(substance)라는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며, 우리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것은 과정과 순간적인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런 존재를 그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라고 불렀는데, 이런 현실적 존재는 그것이 생성하자마자 곧 소멸되는 특성을 갖는다.

우리는 여기서 현실적 존재라는 전문적 용어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개념이나, 혹은 ‘존재’라는 철학 용어 때문에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본래의 의도를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 비록 현실적 존재를 존재의 최종단위로 명명할지라도 그것의 본질이 ‘사건(event)’이요 ‘생성(becoming)’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현실적 존재라는 어휘의 ‘존재’는 이미 보았듯이 ‘being’의 번역이 아니다. 그것은 ‘entity’의 번역으로서 우리말의 ‘것’에 가깝다. 좋은 것, 나쁜 것 등에서 사용되는 ‘것’이라는 단어는 고정된 실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 철학에는 존재론이 없다. 존재론은 과정론으로 대체되고 있다.5) 존재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을 굳이 찾자면 사건, 혹은 계기(occasion)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독자가 자주 듣게 되는 단어인 ‘현실적 존재’도, 엄밀히 말해서는 ‘현실적 사건’이요, ‘현실적 계기’라고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건이나 계기는 분명히 실체라는 개념을 피하기 위해 선택된 말이며, 관계와 생성으로서의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선택된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분명히 불교의 연기론이나 공의 철학과 흡사하므로 필자는 여기서 그것이 얼마나 유사한지 좀더 분석해 보겠다. 5) 여기서 말하는 과정론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여러 가지 다른 용어로 나타난다. 우선 과정은 ‘합생(concrescence)’ 이론으로 나타나는데 ‘합생’은 사물이 자신의 것을 갖는 과정을 말한다. 한편 과정은 ‘전이(transition)’의 이론으로도 나타나는데, ‘전이’는 사물이 타자를 위해서 먹이가 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과정론은 화이트헤드 철학의 인식론이자 동시에 존재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합생과 전이에 관한 이론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과정과 실재》의 3부를 참조하라.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실재로 명명되는 현실적 존재는 느낌(feeling)과 파악(prehens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갑자기 전문적인 용어가 등장해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불교 개념과 비교하면서 쉬운 용어로 표현해 보자. 불교의 오온(五蘊)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거니와, 이를 잘 분석해 보면 느낌이나 파악과 다르지 않다. 우선 색·수·상·행·식 중에서 ‘색’은 원어에서는 ‘ru?a’인데 이는 잘 알다시피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세계란 이런 물질뿐만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수(受)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 즉 원어의 ‘vedana阪??영어로는 ‘feeling’으로 번역되고 있다. 거기에 나머지 상·행·식은 영어로는 perception·impulse·consciousness로 번역되고 있는데, 화이트헤드의 인식론을 공부한 사람은 이런 불교의 오온 이론을 들으면서 적지 않게 놀라게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인식론을 구성하고 있는 파악이론과 명제이론을 공부해 보면 방금 우리가 말한 색·수·상·행·식과 같은 개념들이 거의 순서까지 비슷하게 등장하면서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이나 인식론이 불교에서 차용되었다거나, 혹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불교적 개념들을 현대 물리학과 철학을 동원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주장들에 대해서 그 진위 여부를 토론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흥미 있게 관심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적 존재라는 최종적 실재는 언제나 다른 것과의 관련 하에서만 생성되어 가는 과정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미 말한 대로 이런 현실적 존재는 또다시 ‘느낌’이나 ‘파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느낌이나 파악의 이론은 현대 물리학의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양자(量子)나 미립자 차원까지 내려가 보면 모든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극미한 원소(元素)들은 물질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사건이나 해프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상황이 이렇다면 이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서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성이나 의식과 같이 고도로 발달된 인간의 인지방법을 동원할 수는 없고, 단지 ‘느낌’이나 ‘파악’ 같은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가 ‘느낌’이라는 다소 넓은 의미의 인지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보다 하위에 있는 존재들, 즉 원소들이나 미생물들이 타자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런 배경을 감안한다면, ‘느낌’이라는 개념은 인식론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들과 자신이 합치되어 존재를 구성할 때의 단위를 말하기도 하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이 미물이든 인간이든 혹은 그것을 구성하는 미립자이든 모두 느낌과 같은 기본단위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이 해체되면 남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관계를 연기로 표현하고 실재를 공으로 표시한 것이나, 한편 화이트헤드가 관계를 과정으로 표현하고 실재를 생성으로 표시한 것은 관점의 차이뿐이지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자연과학적으로 영향받은 관점이기에 존재를 분석하면서 그것들의 관계를 볼 때, 그것을 시간 위상 위에서 보게 된 것이다. 즉 존재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국면을 통과하면서 생성하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아야만 자연과학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존재, 즉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현실적 존재는 사실은 엄밀히 말해 과거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그 현실적 존재를 ‘나’라고 가정한다면, 그런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나의 경험들, 즉 방금 전에 내가 경험한 것들이 하나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현재는 과거의 종합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종합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무’요 ‘공’이다. 결국 화이트헤드가 불교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는 말은 이런 뜻에서 다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와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전혀 차이가 없는가? 이제까지 우리는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면을 주로 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을 보도록 하자. 앞으로 보면 알겠지만, 존재론에 관한 한 어떤 면에서 양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차이도 별 것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를 최종단위로 말했을 때, ‘현실적’이라는 말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현실존재가 과거의 종합으로 이루어졌어도 그 과거의 존재는 어쨌든 현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존재뿐이다. 과거는 지나갔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현재의 존재, 즉 현실적 존재에 입각하지 않은 모든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은 추상일 뿐이다. 구체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현재의 경험에서 출발해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존재론적으로 볼 때, ‘현실적 존재’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현실존재가 과거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것이 종합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의 수많은 경험들이 통합될 때에, 거기에는 누군가 통합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입각점이 있어야 통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의 수많은 경험들을 통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나의 자아가 있다고 가정하자.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그런 자아는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생성하는 과정에 있고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그런 하나의 자아가 있어야 나의 과거의 경험을 통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아가 없이는 나는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고 회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여기 지금 존재하는 것, 즉 현실적 존재가 최종 실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런 것 없이는 느낌도 파악도 발생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느낌도 파악도 현실적 존재가 있기에, 느낌과 파악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말이다.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이 보여주는 이런 특성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과정 실재론이 마치 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실재론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실재가 전혀 무(無)요 공(空)이라는 입장, 즉 대승의 화엄과 선(禪)이 주장하는 입장과는 상당히 다르게, 화이트헤드는 현실존재라는 최종적 존재 단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대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파악과 느낌이 단지 현실적 존재 안에 있어야 실재적이라고 말했으니, 이는 결국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최종 실재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는 결국 실체론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일 화이트헤드가 설일체유부와 비슷하다면, 과연 그는 화엄이나 선이 말하는 과정 존재론에 미칠 수 있을까? 이에 답변하는 것은 사실 많은 지면을 요한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간단하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해 보기로 하겠다.

사실 대승의 화엄과 선과 비교할 때, 화이트헤드의 실재론이 서구의 실체론적인 이론처럼 보이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만 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불교와 화이트헤드, 특히 화엄과 선의 공관(空觀)에 입각한 무(無)의 존재론과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론은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그런가?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현실적 존재는 과정적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실재를 성취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주체성을 잃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화이트헤드에 있어서는 하나의 실재가 있더라도 그것이 고정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실체가 아니라, 과정과 생성으로서의 실재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을 획득하자마자 곧 자신을 잃는다. 흐르면서 생성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는 언제나 자성(自性)을 얻더라도 곧 잃게 된다.

자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사건이 타자와의 관련 하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를 만들어냈고, 그런 다른 것이 새로이 생성되었으니 자성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자성이 있다고 가정하게 된 것은 타자에 의해서 그렇게 인정된 것이지 자성이 참으로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획득하는 생성으로서의 자성적 과정과 다른 것에게 자신을 주는 과정, 즉 소멸적 과정이 있을 뿐이다.6) 한마디로 생성과 소멸이 있을 뿐이지, 존재(being)는 그 안에 없는 셈이 된다. 6) 여기서 필자가 생성이라고 사용하는 용어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대로, 화이트헤드 전문용어로서는 합생(concrescence)이라고 명명되며, 소멸이라고 번역되는 과정은 전이(transition)라고 명명된다. 즉 과정 안에 두 가지 양상이 있으니 하나는 합생이고, 또 하나는 전이라는 말이다.

존재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생성하고 소멸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과정 안에서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양상을 생성이라 하고, 존재를 잃는 것처럼 보이는 양상을 소멸이라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전문용어로 말하면, 현실적 존재는 객관적 실재를 얻자마자 자신의 ‘주체적 직접성(subjective immediacy)’을 잃는다. 한마디로 모든 현실적 존재는 자성(自性)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과거의 존재로 사라진다. 따라서 여기서 단지 주체성이라고 명명될 사건이 있다면 과거를 모으는 생성과정으로서의 사건뿐이다.7) 7) 화이트헤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주체-객체(subject-object)의 이론을 거부하고, 주체-초주체(subject-superject) 이론을 정립했다. 하나의 존재는 주체인 것처럼 간주되자 마차 그것을 넘어서는 초주체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체성은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성과는 다른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과정이 어떻게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을 가질 수 없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즉 하나의 과정은 물론 자신의 주체적 직접성(subjective immediacy)을 통해서 결단하면서 과거 사건들을 통합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과거 사건을 통합하는 주체의 결단이 없이는 그 현실적 존재, 혹은 현실적 사건들은 아직 불확정적이다. 한 사건이 존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으려면 그것이 한정된 형태를 갖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결단이 있기까지는 그 해당 사건은 존재를 갖지 않는다.

단지 생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단이 있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의 존재를 얻은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결단은 존재가 아니다. 존재를 욕망할 뿐이다. 이것은 하나의 행위이자, 의지에 불과하지 아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화이트헤드가 존재는 하나의 켜가 아니라 연장되는 지속이라고 보는 이유이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갖는 적이 없다. 생성 속에 있을 때 그것은 아직 존재가 아니다. 한편, 존재를 완성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주체적 직접성을 소멸했다. 도대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존재를 갖는 사건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여기서 단지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타자를 위한 먹이로서만 있을 뿐이다. 물론 결단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 결단의 주인공으로서의 그 무엇은 주체가 되더라도 단지 생성으로서 다른 속성들을 통합하는 것일 뿐이고, 이것마저도 타자의 먹이가 되었을 때만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떻게 보면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사건은 타자를 위해서만 주체이지 자기 자신을 위한 주체는 될 수 없다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적 존재론이 불교의 공의 존재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물론 이런 식으로 보지 않고 상호의 차이를 드러내는 분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은 다음절에서 다룰 역사와 시간에 관한 분석에서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에 그곳으로 넘기도록 하자.

4. 역사와 시간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가장 극명하게 대조되는 사상으로서 우리는 역사와 시간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꼽을 수 있다. 더구나 이제까지 앞에서 이미 우주론과 존재론을 다루어 왔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역사와 시간에 대한 대조적 시각을 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특히 화이트헤드와 불교의 실재론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양자의 실재론은 고정된 실체를 거부하고 그 대신 실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과 과정, 관계와 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런 실재가 불교에서는 ‘무’와 ‘공’으로 표현되는 반면에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사건’과 ‘계기’로 표현된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무와 공으로 표현되는 실재론과 사건과 계기로 표현되는 실재론이 역사를 규정할 때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우선 불교철학에서는 ‘공’과 ‘무’의 이론이 비이원론적(非二元論的)인 우주론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비이원론적이라는 말로서 필자가 무엇을 의미하려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직접 불교철학의 핵심주장을 인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불교의 핵심주장을 압축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반야심경》에 따르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동시에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즉 열반이 생멸이고, 생멸이 열반이라는 말이며, 이 말을 보다 철학적인 의미의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절대와 상대가 하나이고 성과 속이 하나이며, 초월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가 하나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이원론적인 우주론이 역사와 시간 이해에 적용되었을 때는 어떤 것이 결과될까?

잘 알다시피 이런 비이원론적 불교의 우주론은 시간관과 역사관에서 인류에게 신선하고도 파격적인 이해를 제공해 왔다. 특히 화엄사상이 말하는 바,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득도한 자에게 나타나는 우주는 소위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로서, 여기서 나타나는 우주는 방금 위에서 말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사상이 말하는 우주보다 더욱 정교하게 펼쳐진 우주다. 즉 사사무애보다 저급한 단계인 이사무애(理事無碍)에서 나타나는 우주가 초월(理)과 세속(事)이 하나가 되는 우주라고 한다면, 불교도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인 사사무애의 경지에서 나타나는 우주는 세속의 사사건건 하나(事) 하나(事)가 모두 막힘이 없이 무애(無碍)하고 원융회통(圓融會通)하며 서로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사사무애의 이론은 매우 새로우면서도 파격적인 역사관과 시간관을 제공하게 된다. 미국의 불교철학자이면서 일본과 한국불교에 비교적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하와이 대학의 스티브 오딘(Steve Odin)은 이런 화엄의 사사무애가 전제하는 시간과 역사 이해를 가지고 재미있게 분석한 책을 출간한 바 있다.8) 오딘에 따르면, 한마디로 말해서 사사무애의 교설이 우주 내의 사건과 사건이 막힘 없이 원융회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철학적으로 말해서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물론 현재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막힘 없이 원융회통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8) 스티브 오딘의 책 Whitehead’s Metaphysics and Hua-yen Buddhism(New York: SUNY Press, 1982)을 참조하라.

의상대사가 한마디로 요약한 화엄사상, 즉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이론과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이론은 삼라만상의 모든 사건들이 서로 침투하되, 사방, 팔방, 시방(十方)으로 막힘 없이 서로 들어가고 나온다는 말이다. 여기서 시방이라는 개념을 시간에 적용하여 해석한다면, 모든 사건들이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방향으로도 서로 막힘 없이 침투하고 회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철학적으로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직선적인 사관과 순환적인 사관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9) 잘 알다시피 서양철학이 의존하고 있는 역사관은 직선적이거나 혹은 선상적인 역사관으로 불리거니와 그것은 주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창조에서 시작해서 종말에서 역사가 끝난다고 강조하는 기독교의 역사관은, 서구인들로 하여금 역사가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하여 진행되며 또한 그 미래의 끝에는 종말과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의 끝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이 신(God)과 더불어 역사를 진보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9) 필자는 여기서 니시타니 게이지의 책 Religion and Nothingness(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2)에 의존하고 있다. 이 책은 정병조 교수에 의해서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대원정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런 직선적 역사관의 장점은 한마디로 진보사관의 장점과 연결되어 있어서, 서구인들이 그들의 기술문명을 진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보사관은 한편으로 치명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으니, 예를 들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자신의 진보를 위한 도구로 생각하게 하면서 생태계의 파괴와 같은 문제점도 노출해 왔던 것이다.

한편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알려진 순환사관은 이를테면 인도에서 발견되는 모델로서 여기서는 역사가 반복되며 돌고 도는 것으로 기술된다. 이런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서구의 장단점을 역으로 적용해 보면 될 것이다.

교토학파의 니시타니에 따르면 선불교에서 말하는 역사관은 직선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순환적인 것도 아니다.10) 물론 이런 주장은 대개 불교가 인도의 순환사관, 즉 까르마(業) 사상이나 윤회이론의 영향 하에 있다는 통상적인 이해를 감안한다면 매우 이례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교토학파의 주장은 쉽게 이해될 수도 있으니, 즉 선불교의 핵심에는 앞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 ‘공’과 ‘무’, 그리고 ‘사사무애’가 놓여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윤회설과 까르마 사상에 입각한 순환적 역사관이 불교의 중심사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불교의 최종적인 교리라 할 수 있는 공관과 사사무애의 사상에 입각한 시간관을 능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0) Religion and Nothingness, ch. 6를 참조할 것.

그렇다면 직선적이지도 않고 순환적이지도 않은 이런 불교의 시간관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니시타니에 따르면 그것은 수직적이라 한다. 불교에서의 시간은 순환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직선적이지도 않으며, 단지 수직적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이미 필자가 앞에서 소개한 사사무애의 교리를 좀더 곰곰이 분석해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사사무애의 교리가 과거와 현재의 사건의 막힘 없는 융합뿐만 아니라, 현재 사건과 미래 사건의 융합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여기서 어떤 사건이 현재와 미래의 막힘 없는 융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결국 이것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현재의 인간이 자신의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미래를 현재의 결단 속에서 미리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사무애의 경지에 다다른 불자에게 있어서 현재와 미래는 언제든지 막힘 없이 융합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미래는 현재의 순간에 얼마든지 돌파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니시타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 내고 있다.

불교의 공 개념은 그저 무(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무(絶對無)를 말하기 때문에 시간이 다중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우주 어느 곳에서도, 어느 시간대에서도 막힘이 일어나는 장소도 없고, 그렇게 만드는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재의 사건이나 미래의 사건이나 절대적인 무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 말은 현재는 영원성의 단자(單子, monad)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된다. 막힘이 없이 다방향으로 열려져 있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 시간이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홈그라운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사가 수직적이지 수평적이 아니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에서 하는 말이다.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과거와 미래가 돌파될 수 있다면, 영원과 초월이 단숨에 현재 안에서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시타니에 따르면, 이런 불교의 역사관에서는 종전의 직선적인 사관이 가지고 있는 약점으로서의 목적론적인 사관이 극복된다. 이 역사관에서는 절대자로서의 신(God)이 없기에 신의 의지에 의해서 역사가 좌우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향할 목표가 신에 의해서 미리 디자인되고 예정되었다는 기독교의 역사관과는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결단은 언제나 역사의 드라마를 엮어 가는 데 있어서 자유로울 수 있고 따라서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불교의 역사관은 다른 한편으로 순환사관이 가지고 있는 역사 결정론과 허무주의도 극복한다고 니시타니는 주장한다. 현재의 실존적인 결단이 영원을 획득하게 만든다면 역사는 이미 과거의 힘에 의해서 결정된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결정론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불교의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더 이상 길게 토론할 지면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단지 필자는 이 자리에서 화이트헤드의 역사철학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불교철학의 특징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우선 불교의 역사관과 시간관은 매우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화이트헤디안과 같은 과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히 제한된 언명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불교적 시간관이 허락하는 입장은 지극히 종교적인 언명이기에 이를 액면 그대로 과학에 적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큰 제한점은 불교의 시간관은 인과율을 부정하게 된다는 데 있다. 불교의 사사무애의 시간관이 어떻게 해서 인과율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가를 보자.

사사무애의 차원에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모두 막힘 없이 원융회통한다는 말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은 물론, 미래의 사건마저도 과거 및 현재의 사건과 막힘 없이 통한다는 말이 된다. 이런 식이 아니면 사사무애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현재가 과거와 막힘 없이 융통한다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를 들어 과거의 유전인자는 현재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그대로 내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는 과거의 내적인 영향 하에 있으며, 과거는 현재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다. 현재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체의 특성과 정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은 30분 후나 1년 후에도 약간의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에서 현재의 방향,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의 방향으로의 시간의 이동과 거기에 근거한 인과율의 법칙을 말하는 데에는 불교의 사사무애 시간관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을 생각해 보자.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사사무애의 다중적 시간관은 막힘 없이 모든 방향의 사건들이 서로 상즉상입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미래도 현재에 막힘 없이 들어온다는 뜻이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교의 시간관에서는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과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이러하다면 인과율은 무너진다. 왜냐하면 과거가 현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의 인과율은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미래가 현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과거가 현재에게 끼치는 방식과 동일한 인과작용을 한다면 이는 무슨 뜻일까? 우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가 도대체 현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나의 잠재성과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는 미래가 과연 현재에 내적(內的)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물론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에게 가능태의 모습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미래에 내가 어떠 어떠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꿈과 소망이 현재의 소년인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으로서만 현재에게 영향을 끼칠 뿐이다. 만일 현실성으로서 영향을 끼친다면 그렇게 소망을 갖는 사람은 모두 그런 소망과 꿈을 이룬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미래가 언제나 반드시 현재를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만일 한 소년이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무조건 박사학위를 미리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가능성으로 현재에 들어와 있지 현실성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도, 엄밀히 말해서 미래가 현재를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 즉 현재 안에 들어 있는 미래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현재의 미래, 더욱 정확히 말해서 현재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칠 때, 단지 가능성으로 영향을 끼쳐야지 현실태로서 영향을 끼친다면 논리적인 사고와 과학적 인과율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현실과 미래를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의 사사무애에 근거한 시간관은 과학적 인과율을 무시한 인과율을 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도들도 이런 식의 분석에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잘 알다시피 불교의 사사무애가 자연과학이나 수학적인 인과율을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사무애는 고급 수준의 높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깨달은 진리로서, 즉 깨달은 자는 타자와 나의 관계를 분석할 때, 그 양자를 별개의 분리된 인간들로 취급하지 아니하고, 서로 막힘 없이 통하고 상호 생성되는 연기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인과율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과율이 단지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요청된 것이지, 자연과학과 수학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요청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다시 앞에서 확인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 된다.

즉 불교의 우주론이 설하고 있는 인과율이나 법칙들은 과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가 말하고 있는 이론들과는 다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불교와 화이트헤드는 우주론을 전개하는 방식이 철저히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느 누구의 우주론이 더 우월한가 하는 판단을 내리는 어리석은 작업은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5. 결론 : 철학의 역할에 대한 상이한 입장

필자는 이제까지 불교와 화이트헤드를 비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점에서 가능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양자에 대한 비교를 시도해 보았다. 이제까지 본 바대로 불교와 화이트헤드를 갈라놓는 근본적인 차이점은 철학을 사용하는 목적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교는 구원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철학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화이트헤드는 우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이 문명의 발전을 달성해 낼 수 있게 하기 위해 철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도들은 구원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철학을 사용하기 때문에 때때로 그 철학은 비합리적인 것을 용인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불교철학의 비합리성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이러한 불교의 합리성에 대한 태도를 초합리적인 태도라고 일컬었었다. 이미 살펴본 바대로 초합리적인 것도 합리적인 것이다. 그것이 비록 과학적인 시각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종교적으로는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초합리주의에 입각한 종교적 합리주의가 화이트헤드 철학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아무리 과학철학도라고 해도 화이트헤드라고 해서 무조건 합리주의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일찍이 합리주의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책 《관념의 모험(Adventures of Ideas)》을 보면, 그는 합리주의가 가지고 있는 우주론과 문명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종의 미학적 합리주의를 제안하고 있다.11)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합리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담아내는 데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오영환 역(서울: 한길사, 1996)

그의 유명한 명제 즉, “의식은 경험을 전제하지만, 경험은 의식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인간 이성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의식은 언제나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경험은 너무나 깊고 넓기 때문에 의식만으로 경험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12) 12) 《과정과 실재》> pp.133∼134.

이 말은 인간의 이성보다 더 넓고 깊은 경험의 세계, 다시 말해서 감각경험 이전의 세계와,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를 의식의 세계보다 중요시한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이성은 단지 인간 경험 중의 빙산의 일각을 담아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비록 과학철학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 종교와 형이상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서 그가 미학적 경험을 중시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에 연유한다고 하겠다.13) 13) 화이트헤드의 미학적 관심과 동양철학과의 비교에 대해서는 필자의 졸고, “화이트헤드 철학과 동서 문명론,” 《화이트헤드 연구》, 한국화이트헤드 학회 편(서울: 동과서, 1999)을 보라.

여기서 미학적 경험이란 합리적 경험보다 우위에 놓여지는 경험 세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는 마치 불교가 인간의 합리 이성의 세계를 넘어서는 초합리적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단지 양자가 다른 점이 있다면 불교는 합리주의를 방편으로 용인하되 그것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우선적으로 초합리주의를 중시한다고 한다면, 이에 반해 화이트헤드는 초합리주의를 중시하기는 하되 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합리주의의 선상에서 떠나지 않기에, 합리주의와 초합리주의를 동시에 강조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화이트헤드와 불교철학이 어떻게 비슷하면서도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비록 유사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토론을 진행하는 도중에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유사점 하나를 발견한 것이 있었다. 즉 화이트헤드와 불교 양자가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핵심주장이 있으니, 바로 모든 만물은 생성하고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불교철학이나 화이트헤드 철학이나 모두 생성과정에 있는 미완의 철학으로 볼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이 말은 아마 불교와 화이트헤드 양자가 아직 서로 대화를 나눌 것이 많다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호 폭넓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양자가 보다 완벽한 학문적 체계를 갖출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왕식
감리교신학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게렛신학대학원 및 클레어몬트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수. 국제과정사상연합회(International Process Network) 부회장. 한국화이트헤드학회 국제교류이사. 논문으로 <찰스 하이쯔혼의 신고전유신론과 그 신학적 평가> <생태학적 해방신학을 지향하여> <원효와 화이트헤드에 나타난 궁극적 실재와 신앙 : 종교철학적 평가> <관계의 신학과 과정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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