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미래문명’인가?

오늘날 인류는 심각한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다. 인류와 지구 자체의 생존을 위협할 지경에 이른 생태계의 파괴, 아직도 여전한 세계 곳곳의 기아와 점점 심화되는 빈부격차 및 실업 등의 경제적 어려움, 갈수록 흉포해져 가는 폭력과 범죄의 증가, 격화되는 경쟁체제 속에서 쌓여 가는 스트레스와 긴장 그리고 소외감, 천박한 유물주의와 소비문화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느끼는 공허함과 무의미성 등등.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의 목록은 무수히 많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 문명이 제공하는 달콤한 사탕발림에 현혹되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타자의 고통을 도외시하고 타자의 희생 위에서 자기만의 이득을 누리고 있는 소수의 기득권 세력의 일원이거나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고통의 해결은 고통을 느끼고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물질주의적 쾌락이나 이기적 관심에 사로잡혀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고통의 신음소리에 대해 귀를 막는 한, 고통의 해결은 요원하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는, 귀 먼 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수많은 고통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오늘날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태계 전체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은 맹목적인 성장제일주의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흔히 인간의 몸이 땅, 물, 불(에너지), 바람(공기)이라는 사대(四大)로 되어있다고 하는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 치고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날에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이들 사대(四大) 모두가 오염되거나 고갈되어 죽어가고 있으며, 그 때문에 결국 지구상의 모든 존재도 죽어가고 있다. 땅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삶의 터전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급격한 인구증가와 무분별한 개발에 따라 토지를 과도하게 이용하는 과정에서 이 소중한 토양이 급격하게 유실되어 가고 있으며 남아 있는 토양도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는 물이 마르고 오염되어 더 이상 마실 물이 없어 인간을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60억 인구 중 40억 명 가까이가 물이 모자라 고통을 겪고 있으며1) 수질오염의 폐해도 심각하다. 지구상의 인류는 지금까지 줄곧 불(에너지)을 사용해 왔다. 1) 〈한겨레 신문〉 2000년 3월 14일 보도 참조.

특히 석탄과 석유 에너지를 발견해 사용하면서 인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해 왔다. 그런데 현대 문명이 기초하고 있는 이 화석연료가 급속도로 바닥나고 있다. 결국 지금과 같은 엄청난 인구와 소비생활을 지탱하기에는 지구의 에너지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기 오염으로 인한 심각한 피해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산업화 이래 인류는 스스로가 오염시킨 공기로 인해 도처에서 고통을 당해 왔다. 구체적인 수치를 들이대지 않더라고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공기의 오염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처럼 지구상의 모든 존재의 존재 근거인 땅, 물, 불, 바람을 비롯한 지구 환경의 총체적인 오염과 파괴, 그리고 계속되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지구상에서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이미 멸종했고 지금도 멸종해 가고 있다.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지구의 모든 생물 종 가운데 50%가 멸종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2) 2) 〈연합뉴스〉 2000년 3월 3일 참조.

한편 사회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 1980년대 말에 세계 인구 가운데 가장 부유한 20%가 전 세계 재화의 82%을 차지한 반면 가장 가난한 20%는 1.4%만을 소유하고 있어 지구상에는 이미 20 : 80의 사회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3) 3) 톰 하트만,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 아름드리미디어, 1999, 106쪽 참조.

이처럼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현재 전 세계에서 8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연간 1천 2백여 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4)
4) http//www.buddhapia.co.kr의 내용 등을 참조.

전 세계에 만성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실업문제도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발달한 선진제국들이 몰려 있는 유럽만 하더라도 지난 10여 년 가까이 평균 10%가 넘는 구조적인 만성 실업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오늘날 전 세계에는 오직 승자(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지배하여, 모든 사람을 무한 경쟁체제 속으로 몰아대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무능력한 인간으로 매도하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냉혹하고 각박한 현실 속에서 현대인들은 인간적인 삶의 의미와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상실한 채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로 택하는 것은 낭비적인 소비문화이다. 오늘날의 총체적 난국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과 맞서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간다운 삶의 양식과 방향을 모색하기보다는 지극히 낭비적인 소비문화가 제공하는 중독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면서 현실의 괴로움이나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성을 잊어버리려는 헛된 시도에 몰두하게 된다.5) 5) 현대의 소비문화와 현대인의 삶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졸고, <현대 대중문화와 주체성>(대동철학, 제 11집, 137∼162쪽)의 내용을 참조로 할 것.

소비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현대인들은 진정한 주체성과 창조성을 상실하고 점점 더 소비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표면적인 이미지와 스타일 중심의 자아상과 자기 도취적 자아에 사로잡히고, 순간적인 쾌락을 쫓아 끊임없이 전전하는 파편화된 분열증적 삶을 살아간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모든 위기(생태계의 위기, 사회적 위기, 인간 삶과 주체성의 위기)는 결국 우리의 현대문명이 낳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껏 우리가 추구해온 논리와 가치가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장 근본적인 논리는 나와 타자를 분리하여 나와 타자는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내가 어떻게 타자를 누르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뿐이라는 분리와 경쟁과 정복과 지배의 논리이다.

우리의 현대문명을 막다른 위기 상황으로 몰아온 것은 바로 이러한 현대문명의 논리와 가치관이다. 현대문명의 건설과정에서 인류는 자연과 타인을 자신과 동떨어져 있고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한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서 다뤄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러한 현대문명이 파국에 이르렀음을 보고 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대의 위기는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으며, 우리가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극적인 문명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러한 극적 전환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문명은 지구상에서 아니 어쩌면 지구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의 문명이 가능할 것인가의 여부는 우리가 파국으로 이끌어온 현대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이 우리가 ‘미래문명’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 이유이다.

2. 새로운 문명을 위한 패러다임 : 불이(不二)사상

1) 일다불이(一多不二, 不一不二, 不一不異)
현대문명을 파국으로 몰아온 분리와 경쟁과 정복과 지배의 논리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우리는 불이(不二)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불이사상은 이 우주 속의 모든 것들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동서고금의 수많은 심원한 철학적, 종교적인 사상이나 가치관 또는 많은 현자들의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을 어느 곳에서보다도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불교나 도교와 같은 동양의 사상 속에서이다.

이 세계 속에 오직 하나의 것만이 존재한다면 아무런 사건도, 아무런 문제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문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나와 타인들의 관계처럼 이것과 저것들의 관계, 이 하나와 다른 여럿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과 저것의 관계, 하나와 여럿의 관계를 일다불이(一多不二), 불일불이(不一不二), 불일불이(不一不異)라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을 한마디로 불이(不二)라 할 수 있다. 불이(不二)라는 말은 ‘둘이 아님’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관계, 이것과 저것, 이것과 다른 것들의 관계는 그것들을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둘이라고 할 수도 없으므로 불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관계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상호의존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연기적 세계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떤 것들이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서로 다르지 않으면서 동시에 또한 같지도 않아야 한다. 만약 그것들이 전혀 다른 것들이라면 서로 관계를 맺고 상호 연관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서로 전혀 다른 둘이 아니다. 만약 둘이라고 하면 그것들이 다르지 않음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서로 완전히 같은 것이라면 애당초 이것과 저것의 구분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완전히 똑같은 하나도 아니다. 만약 하나라고 하면 그것들이 같지 않음을 표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의 관계는 불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불이관계에 있는 세상 만물은, 그 각각이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존재(天上天下 唯我獨尊)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포섭하고 서로에게 포섭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를 반영하는(同時頓起, 同時互入, 同時互攝) 총체성의 세계,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장엄한 화엄세계를 이룬다. 신라의 의상대사는 화엄사상의 정수를 간추린 〈법성게〉에서 이러한 화엄세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법의 성품 둥글어 두 모습 없고, 모든 것은 움직임 없이 본래 고요해.
    이름과 모양 다 끊어버리니, 깨달아 안 바 다른 경지 아닐세.
    참 성품은 깊고도 미묘해. 자성이 어디 있나, 연 따라 이뤄지지.
    하나 안에 일체 있고, 여럿 안에 하나 있네.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일세.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들어 있고, 모든 티끌 역시 그러해.
    한없이 먼 시간도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없는 시간이라.
    구세와 십세가 서로 부합하지만, 뒤섞이는 일 없이 떨어져 서 있네.6)

    6) 동국대학교 출판부 발행, 《한국불교전서》(1979) 제2책, 1쪽에 실려 있는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 참조.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법성게〉의 이 구절은 세상 만물이 공간 시간적으로 서로 걸림이 없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 사물이 공간적으로 걸림이 없이 다른 모든 사물을 포섭하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사물에 포섭되는 관계를 여기서는 “하나 안에 일체 있고, 여럿 안에 하나 있네.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일세.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들어 있고, 모든 티끌 역시 그러해(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고 표현하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불이적 존재이며, 다른 모든 것 또한 그러하다. 또한 의상은 한 순간이 시간적으로 영원한 시간을 포섭하는 동시에 영원 속에 포섭됨을 “한없이 먼 시간도 곧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없는 시간이라. 구세와 십세가 서로 부합하지만, 뒤섞이는 일 없이 떨어져 서 있네(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라고 표현하였다.

영원한 시간 속의 매 순간의 현재는 무한한 과거의 시간들을 담고 있으며, 또한 미래에 펼쳐질 무한한 시간도 그 속에 품고 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은 다른 순간들과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매 순간이 똑같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의 관계도 역시 서로 부합하면서도 뒤섞이지는 않는 불이적 관계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 이것을 의상은 이토록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공간적으로 서로 상즉상입하면서 장엄한 화엄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법장이 제시한 예를 통해 더욱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법장은 모든 존재가 융통 융섭하는 법계의 신비를 드러내 줄 실례를 들어 달라는 측천무후를 거울로 도배된 방으로 데려간 다음 불상을 하나 꺼내서 횃불과 함께 방의 한 가운데 놓은 다음 방 안에 있는 모든 거울들이 다른 모든 거울들 속의 불상을 무한히 반사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세상 만물이 서로 융통, 융섭하는 원리, 다중일(多中一), 일중다(一中多)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그는 작은 수정 공을 꺼내어 방안의 온 세계가 그 수정 공 속에 들어 있음을 보임으로써 큰 것이 작은 것을 포함하고 작은 것이 큰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뚜렷하게 제시해 주었다.7) 7) 까르마 C.C 츠앙 지음, 《화엄철학》, 경서원, 1998, 67∼68쪽 참조.

불이적 연관성 속에 있는 이 세계 속의 모든 존재는 거울의 방 속에 있는 수정공과 같다. 그것은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 담아 비추고 있으며, 이 우주는 다시 그 모습을 자신 속에 담아 비추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사과정은 일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되풀이해 반사하는 무한한 과정이다. 세상 만물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면서 서로를 무한히 반사하는 상즉상입의 불이 세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순간들이 다른 모든 시간들(영원)과 걸림 없이 상즉상입하면서 영원한 현재를 이루고 있음(同時頓起)을 한 순간의 생각 속에 무한한 시간을 담을 수 있다는 체험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거울의 방’처럼 생생한 예를 통해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서양의 매우 영적인 저자 중의 한 사람인 닐 도날드 월쉬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바위와 시디 롬(CD-ROM)의 비유로 이것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바위의 비유에 따르면,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지금 현재 눈앞에 있는 바위는 하나이고 아무런 변화도 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의 미립자들의 활동을 고려한다면 바위는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는 무한한 미립자들의 무한한 움직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위를 의식하는 찰나의 순간에도 바위 속에서는 수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8) 8) 닐 도날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아름드리, 2000) 3권, 105∼106쪽 참조.

이와 비슷한 생각을 그는 시디 롬의 비유로도 표현한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시디 롬은 그 속에 수많은 선택지가 있는 오랜 과정의 복잡한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사건들을 따라가노라면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사실 그것들은 이미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9) 한 순간의 존재가 이전의 모든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을 함축하고 있고, 한 순간의 생각이 무한한 시간과 사건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한 장의 시디 롬이 엄청나게 긴 시간의 복잡한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예를 통해서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9) 닐 도날드 월쉬, 173∼174쪽 참조.

이 밖에도 우리는 불교에서 하나와 여럿, 개별과 전체가 불이임을 나타내는 수많은 표현들을 만날 수 있다.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니며, 이치와 사물, 사물과 사물들이 서로 둘이 아님을 말하는 법계삼관(眞空觀, 理事無碍觀, 周遍含容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둘이 아니라는 사사무애를 표현하는 십무애 또는 십현문(그중에서도 특히 同時具足相應門, 一多相容不同門, 十世隔法異成門, 廣狹自在無碍門 등), 무릇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다른 것들과의 인연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서로 불이적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삼성(遍計所執性, 依他起性, 圓成實性)과 삼무성(相無性, 生無性, 勝義無性), 개별적인 것과 전체가 서로 불이적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육상(總中別, 別中總, 總卽別, 別卽總. 同中異, 異中同, 同卽異, 異卽同. 成中壞, 壞中成, 成卽壞, 壞卽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불이사상은 불교에만 한정된 사상이 아니다. 동양의 심원한 사상 중 하나인 도가철학도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노자는 곳곳에서 유와 무,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앞과 뒤, 화와 복, 바른 것과 기이한 것과 같이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세상 만물이 근원적으로 불이적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0) 10) 《도덕경》 2장, 58장 등을 참고할 것. 왕필 지음, 《왕필의 노자》, 예문서원, 1997, 52∼53쪽, 212쪽 등.

《장자》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통찰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은 상대 대립하는 이 세상 만물이 근원적으로 불이적 관계임을 ‘이것과 저것’의 불이 관계를 통해 훌륭히 설명하고 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 이것 아닌 것도 없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생겨나고, 이것 또한 저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또 저것도 하나의 시비이고 이것도 하나의 시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다는 말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저것과 이것의 대립은 없는 셈이 된다) (이렇듯) 저것과 이것이 그 대립을 없애 버린(대립을 초월한 절대적인) 경지, 이를 도추(道樞, 도의 지도리)라고 한다.”11) 11) 物无非彼,物无非是……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无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안동림 역주, 《장자》, 현암사, 1992, 59쪽에서 인용.

〈제물론〉에 나오는 유명한 ‘나비의 꿈’ 얘기12)도 매우 상징적인 방식으로 주객불이(主客不二)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세상 만물의 불이, 주객불이라는 통찰을 바탕으로 장자는 이 커다란 하나의 세계와의 융합, 만물과 하나됨, 위대한 도와 하나되는 것을 으뜸가는 도의 경지로 간주하고 있다.13) 12) 안동림 역주, 《장자》, 87쪽 참조. 13) 《장자》의 ‘재유’편에 보면 이러한 경지를 좌망(坐忘)이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안동림 역주, 《장자》, 303∼304쪽, 215∼216쪽 참조.

어찌 동양뿐이겠는가? 서양에서도 이 세상 만물이 서로 불이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지배와 정복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의 구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불이적 관점을 체득하여 자연스럽게 생활로 실천하고 있었다. 이것은 자연을 대하는 구문화인들의 태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구문화는 예외 없이 우리 인간은 자연과 다르지도 않고, 자연에서 분리되지도 않으며, 우리가 자연을 책임지는 것도 자연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라는 믿음을 가장 기본개념으로 지닌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여서, 우리가 자연에게 하는 모든 행위가 결국 우리 자신에게 하는 행위이고, 우리가 자신에게 저지르는 모든 행동이 세상에게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연이란 개념이 따로 없다. 그 모두가 우리고, 우리가 그 모두다.”14) 14) 톰 하트만, 260쪽.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필두로 해서 발달한 서양의 현대 물리학은 종래의 데카르트-뉴튼의 요소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상으로부터 벗어나 우주가 분해될 수 없고 역동적인 전체이며, 이 전체의 각 부분은 본질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는 우주적 과정의 모형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관점을 정립하였다.15) 15) F. 카프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범양사출판부, 1985, 88쪽 참고.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는 서로 독립적인 물질들 사이의 우연적인 관계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의 모든 부분은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각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을 포함하고 있고, 모든 부분 속에 각 부분이 들어 있는 일다불이(一多不二)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봄은 세계를 전체가 각 부분에 내포되어 있는 홀로그램과 같은 일반 원칙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16) 16) 카프라, 같은 책, 91쪽.

현대 물리학의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자라난 시스템 이론은 세계를 관계와 통합의 견지에서 보는 불이적 견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론 중 하나이다. 이 이론은 세계를 모든 현상의 상호 연관성과 상호 의존성에 의해 파악하며, 이 기본 구조에서는 그 특성이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부분으로 환원될 수 없는 통합된 전체를 시스템이라고 부른다.17) 17) 카프라, 같은 책, 42쪽.

이 관점에서는 우주 전체를 여럿의 중층적 체계로 결합되어 있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세포는 복잡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체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상위 체계인 어떤 조직의 일부이며, 그 조직은 다시 어떤 기관이라는 또 다른 체계의 부분이다. 인간 유기체는 그러한 기관들의 유기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고도의 시스템이다.

또한 그런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한 체계인 사회의 일부이다. 더 나아가 보면 인간 사회는 지구상의 다른 생물들이나 무생물들도 포함하는 지구 생태계라는 더 큰 시스템의 일부이며, 이 지구도 태양계라는 거대한 체계의 일부이고, 이 태양계는 더 큰 은하계의 일부이고, 그 은하계도 결국은 그것을 포섭하는 더 큰 우주 체계의 일부이다. 이처럼 온 우주는 각각의 하위 체계들이 점선으로 이루어진 원과 같이 열려 있는 체계를 이루면서 그것을 포섭하는 상위의 체계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장엄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 서양의 저자들에게서도 세상 만물이 일다불이(一多不二)적 관계에 있다는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월쉬는 이러한 통찰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우주의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궁극의 진리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만물은 애초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돌이킬 수 없게 서로 의존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삶 전체라는 직물 속으로 짜 넣어진다.”18) 18) 닐 도날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283쪽.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것들이면서도, 다른 모든 것들과 상호 연관성과 상호 의존성 속에서 조화 있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월쉬는 불교나 도가사상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존재 전체와 하나가 되는 체험”19)이라고 말하고 있다. 19) 닐 도날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1권, 139쪽 참조.

지금까지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의 관계는 불이적 관계라는 것과 이런 사태에 대한 통찰은 불교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경우 불이사상의 핵심은 일(一)과 다(多), 개별과 총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것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같다는 것을 중시하고 그 총체성만을 강조한다면 만물이 서로 같지 않음을 무시하는 잘못, 즉 만물이 갖고 있는 독특성을 무시하고 개별적인 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저지를 염려가 있다.

반면에 각 사물이 서로 다름을 중시하고 그 개별성만을 강조한다면 만물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무시하는 잘못, 즉 개별에 집착해 전체성(총체성)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잘못을 저지를 염려가 있다. 불이사상의 핵심은 이 양극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에 있다. 이것을 원효대사의 말로 표현하자면 “둘이 아니되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不二而不守一).”20)라고 할 수 있다. 20) 원효, 《금강삼매경론》(《한국불교전서》 제1책), 659쪽 상.

또한 십현문의 얘기로 하자면 이것은 “하나와 여럿이 서로를 받아들이되 같지는 않다(一多相容不同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유무불이(有無不二, 不常不斷)

무릇 존재하는 것은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그만의 고정적인 독립적 성질(自性)을 갖고 있지 않다. 즉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모든 존재는 결국 공(空)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이라고 함은 유무불이(有無不二)인 상태를 의미한다. 유무불이는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세상 만물은 고정된 자성이 없고 여러 가지 관계(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성립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존재하고 있음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머물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사실 모든 것들이 고정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만약 있음(有)은 있음(有)이고 없음(無)은 없음(無)에 불과하다면 어떠한 사건이나 변화도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있던 것(有)이 없어지고(無), 없던 것(無)이 있게(有) 되는 것이 변화인데, 이것은 유(有)와 무(無)가 상통하는 불이이어야만 가능하다. 유무불이인 공(空)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건은 성립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만물이 모두 유무불이적인 것일 뿐 아니라 만물의 근원 그 자체도 유무불이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만물이 그로부터 나올 수 없다. 만약 만물의 근원이 한정된 성질을 지닌 유(有)라면 무한한 만물을 낳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무(無)라면 아무것도 낳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물의 근원은 유무불이(空)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 역시 불교 등의 동양사상뿐만 아니라 서양의 심원한 사상 속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유와 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않는 불이사상은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한 것이며(五蘊皆空), 그것의 실상은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은 곧 공이요, 공은 곧 색이다(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라고 한다. 또한 공 속에는 무명(無明)에서 늙음과 죽음(老死)에 이르는 모든 연기하는 것들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있는(다함이 없는) 것이라고도 얘기하고 있다.21) 21) 大正藏, 제8권, 848쪽, 하 참조.

또한 반야공 사상의 대표적 논서인 용수의 《중론》도 유견(有見)이나 무견(無見)에 치우친 부파불교의 잘못된 견해를 격파하고 공사상을 선양하는 것을 근본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중론》은 유무불이라는 공의 입장에서 유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유(有)나 무(無)를 보거나 자성(自性)이나 타성(他姓)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불법의 참된 의의를 보지 못한다.”22) 22)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용수보살 지음, 김성철 역주, 《중론》, 경서원, 1993, 253쪽.

불교의 화엄철학(법장의 〈華嚴五敎止觀〉)에서 말하는 차정(遮情)과 표덕(表德)에 관한 얘기도 유무불이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차정이라고 하는 것은 연기하는 존재의 유무를 무조건 부정하는 입장이며, 반면에 표덕은 연기법의 존재 유무에 대한 물음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유무에 관한 올바른 관점은 이 둘을 포괄하는 차표원융(遮表圓融)의 입장이다. 차표원융의 입장은 이러한 것이다. “연기하기 때문에 유요, 연기하기 때문에 무요, 연기하기 때문에 유이기도 하고 또한 무이기도 하며, 연기하기 때문에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이처럼 부정과 긍정이 원융무애한 것은 연기가 자재한 까닭이다.”23) 그리고 이러한 차표원융의 입장은 곧 유무불이의 입장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23) “又以緣起故是有. 以緣起故是無. 以緣起故是亦有亦無. 以緣起故是非有非無…… 遮表圓融無碍皆由緣起自在故也.” 大正藏, 제45권, 512쪽, 하.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서도 유무불이 사상은 기본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금강삼매경론》에서는 유무불이임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내가 있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자라면 존재한다는 견해, 즉 유견(有見)을 없애게 하라. 또 내가 없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 즉 무견(無見)을 없애게 하라.”24) 그리고 원효는 이러한 생각의 핵심을 찔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유무의 두 치우침(二邊)을 떠났으되 중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25) 24) 若有我者, 令滅有見. 若無我者, 令滅無見. 원효, 《금강삼매경론》(《한국불교전서》 제1책, 613쪽 상). 25) 離二邊而不着中. 같은 책, 614쪽 상.

유무불이 사상이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임은 수많은 선사들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뜻을 물을 때 유를 물으면 무로써 대하고, 무를 물으면 유로써 대답하며, 평범을 물으면 성스러움으로써 대답하고, 성스러움을 물으면 평범으로 대답하라. 두 도는 서로 원인이 돼서 중도가 성립한다. 한 번 물으면 한 번 대답하고, 나머지 물음도 한결같이 이렇게만 하면 곧 이치를 잃지 않으리라.”26) 이처럼 있음과 없음 어느 쪽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그 중간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진정한 불법의 경지라는 유무불이적 관점은 선종의 공통적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26) “若有人問汝義問有將無對. 問無將有對. 問凡以聖對. 問聖以凡對. 二道相因中道義. 如一問一對. 餘問一依此作 卽不失理也.” <육조대사법보단경> (大正藏, 제48권, 360쪽, 하)

만물의 근원에 대한 심원한 동서양의 사상들은 그 근원의 본질이 유무불이라는 데 대해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역시 동양의 도가철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노자에 따르면 만물의 근원인 도는 아무런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은 뭐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27)이며, 그래서 오히려 무라고 하는 쪽이 더 알맞다. 27) 《도덕경》, 25장, 吾不知其名. 《왕필의 노자》, 115쪽.

그러므로 노자는 《도덕경》의 제일 첫머리에서 도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며(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한정할 수 없는 무명(또는 무)이 천지의 시작이고, 그것을 한정하는 어떤 것이 만물을 낳는 것(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라고 말하고 있다.28) 또 《도덕경》 6장에서는 만물의 근원의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하여,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것을 현빈이라고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뿌리라고 하는데 겨우겨우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쓰는 데 힘들이지 않는다.”29)고 하는데, 이에 대한 왕필의 해석은 그 본질이 유무불이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물이 그것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되 그 형상을 보이지 않으니 이는 지극한 존재이다. …… 있다고 말하려고 하면 그 형상을 볼 수 없고, 없다고 말하려고 하면 만물이 그것으로 인해 생겨난다. 그러므로 겨우겨우 끊임없이 이어진다고 했다.”30) 28) 《왕필의 노자》, 49쪽. 29)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왕필의 노자》, 63쪽.
30) <物>以之成而不見其形, 此至物也……欲言存邪, 則不見其形, 欲言亡邪, 萬物以之生. 故綿綿若存也. 같은 곳.

장자도 유무가 불이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것을 〈소요유〉 편은 분명히 보여준다. “시작이 있으면 그 앞에 ‘아직 시작되지 않음’이 있고, 또 그 앞에 ‘아직 시작되지 않음의 이전’이 있다. ‘있다(有)’가 있고 ‘없다(無)’가 있으면, 그 앞에 ‘있다 없다의 이전’이 있고, 또 그 앞에 ‘있다 없다 이전의 이전’이 있다. (사물의 기원을 좇으면 끝이 없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갑자기 ‘있다 없다’의 대립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있다 없다’의 대립은 (결국 상대적이므로) 어느 쪽이 ‘있다’이고 어느 쪽이 ‘없다’인지 알 수 없다.”31) 이러한 생각은 무에서 만물이 나옴을 설명하는 다음 글귀에도 잘 드러나 있다. 31) 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有有也者,有无也者,有未始有无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无也者. 俄而有无矣,而未知有无之果孰有孰无也. 안동림 역주, 《장자》, 69쪽.

“천지의 시초(태초)에는 무가 있었다. 존재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여기서 일이 생겨났는데, 일은 있어도 아직 형체가 없었다. 만물은 이 일을 얻음으로써 생겨나는데 그것을 덕이라 한다. 아직 형체는 없지만 (내부에서) 구분이 생겨 차례로 만물에 깃들면서 조금도 틈이 없다. 이것을 운명이라 한다. 일은 유동하여 사물을 낳는데 사물이 이루어져 사리가 생긴다. 이를 형체라 한다. 형체는 정신을 지키고 각기 고요한 법칙이 있다. 이것을 본성이라 한다.”32) 32) 泰初有无无有无名.,一之所起,有一而未形. 物得以生,謂之德. 未形者有分,且然无間,謂之命.,留動而生物,物成生理.謂之形.,形體保神,各有儀則,謂之性. 안동림 역주, 《장자》, 321∼322쪽.

서양의 여러 철학자들도 만물의 근원이 본질적으로 유무불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만물의 원질을 탐구했던 그리스 자연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은 한정된 성질의 것일 수 없기 때문에 그 형상이나 성질을 전혀 규정할 수 없는 것(무한정자)임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만물의 시원에 대한 불교와 도가 철학의 생각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낙시만드로스의 스승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물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하는 견해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세상 만물 중에는 물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띠고 있어서 도저히 물로부터 나왔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만물의 근원을 물 아닌 다른 특정한 것, 예를 들어 불이라든가 흙이라든가 하는 것들로 생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무한히 다양한 성질의 만물을 낳은 근원을 한정하려는 데서 오는 문제이다. 이러한 난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만물의 근원을 무한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인데, 아낙시만드로스는 이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형상이나 성질을 전혀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사실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떤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일정한 형상이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무한정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으므로 있다고조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무한정자는 무한히 다양한 만물을 낳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정자는 결국 유무불이다. 마찬가지로 근대 서양철학의 태두이자 현대철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헤겔도 《논리학》에서 세상 만물의 시원을 설명하면서 순수유와 순수무의 대립적이면서도 통일적인 모순적 관계에 의해서 생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세상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은 유무불이적이라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33) 33) G.W.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Gesammelte Werke, 21, Felix Meiner Verlag1985, 제1부, 제1장 참조).

이처럼 동서양의 심원한 사상들이 말해주듯이 만물과 만물의 근원의 본질이 유무불이이므로 우리는 유와 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들에 사로잡혀 유만을 보고 그것이 근원적으로는 무상한 것(무)임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집착함으로써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에 우리가 무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그저 허망한 것이라고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짐으로써 생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상실해 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와 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유무불이라는 확고한 중도의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금강삼매경》의 대의를 표현하면서 “무릇 일심(一心)의 원천은 유무를 떠나서 홀로 청정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속(眞俗)을 융합하여 깊고 그윽하도다. 깊고 그윽하므로, 둘을 융합하였으되 하나가 아니요, 홀로 청정하므로 양극을 떠났으되 중간도 아니로다. 중간이 아니나 양극을 떠났으므로 있지 않은 것이라고 곧 무에 머물지 않으며, 없지 않는 모양이라고 곧 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로다.”34)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둘을 융합하였으되 하나가 아니요(融二而不一)”나 “양극을 떠났으되 중간도 아니다(離邊而非中)”라는 말이야말로 우리가 유무를 대해야만 하는 올바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4) 夫一心之源 離有無而獨淨 三空之海 融眞俗而湛然 湛然 融二而不一 獨淨 離邊而非中 非中而離邊 故不有之法 不卽住無 不無之相 不卽住有. 《한국불교전서》, 1권, 604쪽, 중.

유무에 대한 이와 비슷한 태도를 천태지의의 《마하지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지의는 유무불이를 보는 올바른 관점과 태도로 삼지삼관(三止三觀)을 논하고 있다. 연기에 의존하고 있는 무상한 존재들은 가상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 가(假)에서 공(空)으로 들어가야(從假入空) 한다. 그러나 공이란 실체적인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에 들어가도 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도 역시 공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공도 역시 공이라고 관찰하고, 공의 진실도 역시 진실이 아니라고 하여, 공으로부터 가로 거꾸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공으로부터 가로 들어가는 종공입가(從空入假)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여기서 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는 종가입공에 머물러서도 안 되며, 종공입가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공과 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항상 공가상즉(空假相卽)의 중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유무에 대한 올바른 관점인 삼관(三觀)이다.35) 이러한 관점을 체득하여 실천하는 방법을 지의는 삼지(三止)라고 하고 있다. 삼지란 체진지(體眞止),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를 말한다. 여기서 체진지(體眞止)란 공인 진리를 체득하여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란 교묘한 방편으로써 현실(假)의 모든 모습에 따르며,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란 공과 가의 양변을 분별하는 것을 멈추고, 어느 것에도 집착하거나 치우치지 않는 중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36) 35) 이상 지의의 삼관에 대한 해석에 관해서는 다무라 시로 외, 《천태법화의 사상》, 63∼65쪽을 참조. 36) 삼지에 대한 해석에 관해서는 같은 책, 66쪽 참조.

3. 불이사상의 문명사적 의미

1) 범아불이, 자타불이(梵我不二, 自他不二)

우리는 현대문명이 처한 총체적 난국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미래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불이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간주하면서, 이 세계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존재론적 견해로 불이사상을 설명해왔다.

그러나 불이사상은 이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문명으로 우리를 이끌 구원론적인 실천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불이라는 것이 우주의 궁극적 진리이다. 모든 것은 그 나름의 독특성을 지니면서도 다른 모든 존재들을 포섭하고 또한 그것들에 포섭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우주 전체라고도 할 수 있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은 서로 한 울타리 속에 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감싸안고 있는 한울님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 하나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이런 불이적 관점에 서면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 하나 하나를 하늘처럼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개별성에만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 존재에 고착하고 집착하는 성질은 자기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자기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나누고 자기 아닌 모든 것을 자기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이것을 자기 필요를 위해 이용하고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자연과 타인에 대한 지배와 정복을 추구해온 현대문명의 병폐 속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의식적이고 자기의식적인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은 이 우주 전체의 진리를 깨칠 수 있는 위대한 영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존재보다도 진리에 가까이 도달해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하는 위대한 진리는 바로 우리와 이 세계가 불이(梵我不二)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은 세계와 우리를 분리시키고 세계를 지배하는 도구가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들과 화해하고 협력하는 공생과 상생을 위한 방편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의식적 존재인 인간은 가장 위대하기는커녕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위험하고 흉측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본래 우주와 불이적 존재인 인간의 기본 본능은 사랑이다. 본질적으로 불이적인 존재들이 서로 갈라서 경쟁하고 서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합쳐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이적인 우주의 모든 존재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 성향은 사랑이다. 그러나 의식과 자기의식으로 인해 다른 존재들과 분리를 느끼는 인간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 존재의 저 깊숙한 본능 속에서 우주와의 본래적 통일상태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사랑)이 클 수밖에 없다.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다른 존재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인간의 상황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더 사랑을 추구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렬하고 고귀하며 완벽한 느낌은 사랑의 느낌,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우리는 연인과의 사랑 속에서, 친구와의 우정 속에서, 운동 경기를 통해 우리가 속한 집단과 하나됨으로써 종종 이러한 느낌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들은 자칫 잘못하면 그들만의 배타성을 띠고 다른 것들과의 분리를 조장하는 편협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완벽한 사랑의 체험은 존재 전체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다. 그리고 이러한 완벽한 사랑의 체험, 도의 체험은 우리가 우주 전체와 불이임(梵我不二)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하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현대문명은 불이적 관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현대문명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동떨어지고 자연 위에 군림하여 자연을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위한 무제한적 성장만을 추구해 왔다. 우리는 그 파국적 결과를 이미 보았다. 이제 우리에게는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를 지도해야 할 원리는 우리 모두가 불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야만 한다. 자연을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협력하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자연과의 화해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장과 확대만을 지상의 가치로 여겨온 경제적 관념들을 다시 검토해야만 한다. 양적 성장과 확대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거대숭배는 자기 과시욕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의 관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지 않고 자연 앞에서 겸허할 줄 아는 것, 그리고 무한정한 물질적 욕망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작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럿셀이 노자의 핵심사상으로 얘기한 ‘소유 없는 생산(生而不有)’, ‘자기주장 없는 행동(爲而不恃)’, ‘지배 없는 발전(長而不宰)’37)과 상통하는 것이다. 37) 《도덕경》 51장에 나오는 말. 여기서는 김용옥, 《노자와 21세기》, 상권, 134∼135쪽에서 인용.

또한 이것은 장자가 <소요유> 편에서 “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짓는다 해도 불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 데 불과하오”38)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족할 줄 아는 태도와 상통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인간이 갖는 특수성, 인간이 갖는 필요와 욕망을 무시하고 자연만을 중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간의 욕망 충족만을 내세우는 인간 중심주의 역시 우리 생명의 모체이자 기반인 자연을 파괴하는 잘못된 이기적 관점이다. 우리에게는 인간과 자연의 불이적 관계의 인식에 기초한 대자연적 태도와 행위가 절실히 요구된다. 38) 巢於深林,不過一枝.,偃鼠飮河,不過滿腹. 안동림 역주, 《장자》, 35∼36쪽.

불이적 세계관, 불이적 문명으로의 전환은 인간간의 관계에서도 필요하다. 공동체적 구문화가 붕괴되고 현대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들은 타인을 지배 착취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경쟁과 투쟁에 몰두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 체계에서 높은 가치를 가진 태도와 능력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 남들과 잘 협력하고 남을 도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해서 우리 사회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뒤덮인 살벌한 경쟁 사회이자, 위험에 가득찬 ‘위험사회’가 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는 지극히 낭비적인 소비문화 속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타인에 대한 우위와 지배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세계의 이상은 크게 왜곡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참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거나, 고결한 인품을 도야하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보다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현란한 몸짓이나 노래 등으로 남의 이목을 끌거나, 그저 푸른 잔디 위에서 자그마한 공이나 구멍 속에 처넣으면서 돈도 벌고 갈채도 받는 삶을 더 존경하고 선망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교육자나 성직자들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맨들을 더 존경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이는 분명히 왜곡되고 전도된 가치관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남들과의 분리와 경쟁의식에서 벗어나 나와 남이 불이임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분야에서 무조건 남들보다 뛰어나게 보이려는 헛된 이상을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현대 사회 속에서 그러는 것처럼 남들보다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갖고, 남들보다 더 좋은 소비용품들을 소유하고 소비하면서, 남들보다 우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더 나은 삶으로 정의하는 한, 우리는 우리 문명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물질의 소유와 소비에서 찾는 한 우리는 결코 진정한 만족과 평안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바깥에 있는 물질을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매달릴수록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혀 물질과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만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대자유의 경지가 열린다.

또한 우리는 서로 불이적 존재라는(自他不二) 궁극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가 남들에게 한 짓이 자신에게 한 짓이며, 우리가 남들을 위해 하지 못한 것이 자신을 위해 하지 못한 짓이고, 남들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이고, 남들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어서, 우리가 그 중 일부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고 명백하게 하지 않는다면, 또 그렇게 할 때까지는, 여태껏 갈망해왔고 언제나 꿈꿔왔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을 것이다.’39) 타인과의 분리와 경쟁 의식에 기초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타불이라는 의식에 기초한 인간관계만이 새로운 공생과 상생의 공동체적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39)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2권, 389쪽 참조.

2) 생사불이(生死不二)

현대문명의 온갖 병폐는 나만을 위하고 내 것만 챙기려는 의식,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관계들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는 공(空)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존재들과 같이 내 몸도 공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내 몸의 무상함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다. 《유마경》에는 이러한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여러분, 이 몸은 무상하여 강하지 못하고 힘도 없으며, 견고하지도 못합니다. 재빠르게 시들어 가는 것이므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괴로움이며, 근심이며, 온갖 병이 모이는 곳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밝은 사람은 이와 같은 몸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 몸은 물방울과 같아서 잡을 수도 문지를 수도 없습니다. 또 이 몸은 물거품과 같아서 오래도록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몸은 불꽃과 같아서 사랑의 탐욕으로부터 생깁니다. 이 몸은 파초와 같아서 속에 굳은 것이 있지 아니하며, 이 몸은 환영과 같아서 미혹으로 해서 일어납니다. 이 몸은 꿈과 같아서 허망한 것이 진실인 양 보이는 것이며, 이 몸은 그림자와 같아서 업연으로 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몸은 메아리와 같아서 온갖 인연을 따라서 생기며, 이 몸은 뜬구름과 같아서 잠깐 사이에 변하고 소멸합니다. 또 이 몸은 번뇌와 같아서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몸은 땅과 같아서 실체로서의 주체가 없으며, 이 몸은 불과 같아서 자아가 없으며, 이 몸은 바람과 같아서 생명으로서의 개체가 없고, 이 몸은 물과 같아서 실체로서의 개아가 없습니다. 이 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네 가지 구성요소로 되어 있어 이를 집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몸은 자아와 자아에 소속하는 것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공한 것입니다.”40) 40) 諸仁者是身無常無强無力無堅 速朽之法不可信也 爲苦爲惱衆病所集 諸仁者如此身明智者所不 是身如聚水不可撮摩 是身如泡不得久立 是身如炎從渴愛生 是身如芭蕉中無有堅 是身如幻從顚倒起 是身如夢爲虛妄見 是身如影從業緣現 是身如響屬諸因緣 是身如浮雲須曳變滅 是身如電念念不住 是身無主爲如地 是身無我爲如火 是身無壽爲如風 是身無人爲如水 是身不實四大爲家 是身爲空離我我所. 《고려대장경》 제9권, 980쪽, 중-하. 번역은 김달진 역, 《유마경 외》(한글대장경)(동국역경원, 1990) 41-42쪽에서 인용.

이러한 인식은 도가철학도 공유하고 있다. 장자는 인생은 덧없는 한바탕 꿈과 같은 것이라고 보고,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므로 이 세상의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41) 그가 볼 때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단지 천지의 기가 합쳐 생겨났다가 때가 되면 다시 흩어져 천지의 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42) 41) 안동림 역주, 《장자》(<제물론>), 81∼82쪽 참조. 42) 안동림 역주, 《장자》(<지북유>), 540쪽 참조.

이처럼 본디 내가 공한 것임을 깨달으면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져 다른 온갖 집착도 없어지고, 생사를 초월하고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대자유의 경지가 열린다. 일찍이 동양의 현자들은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생사를 초월한 생사불이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개체가 태어나기 전의 근원적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생사에 초탈한 태도를 보인다. 실제로 불가의 많은 고승들은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통찰을 바탕으로 임종시에 생에 집착하지 않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허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조의 부휴 선사는 임종게를 통해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칠십 년 꿈과 같은 바다에 놀다가
    오늘 이 몸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네.
    원래 본성에 걸림이 없으니
    어찌 깨달음과 나고 죽음이 따로 있겠는가.
    七十餘年遊幻海 今朝脫却返初源
    廓然空寂本無物 何有菩提生死根 43)


    43) 정휴 지음, 《적멸의 즐거움》, 우리출판사, 2000, 49쪽에서 인용.

장자는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초연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삶과 죽음은 단지 기와 형체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자연스런 흐름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면서, 삶과 죽음을 대립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불이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함을 보여주었다.44) 이런 장자가 자신의 죽음에 임박해서 제자들이 자신의 장례 문제로 걱정을 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로 본 것은 당연했다.45) 44) 안동림 역주, 《장자》(<지락>), 450∼451쪽을 참고로 할 것. 45) 이에 대해서는 안동림 역주, 《장자》(열어구), 772∼773쪽을 참고로 할 것.

우리는 생사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악착같이 생만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이며, 자연스럽게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올바르며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의 경지라는 통찰을 《장자》의 수많은 글귀들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그가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그가 어쩌다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죽을 운명을 따랐을 뿐이야. 때에 편안히 머물러 자연의 도리를 따라간다면 기쁨이나 슬픔 따위 감정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걸세. 이런 경지를 옛날 사람은 ‘하늘의 묶어 매닮에서 풀림’이라고 불렀다네.”46)46) 適來,夫子時也.,適去,夫子順也. 安時而處順,哀樂不能入也,古者謂是帝之懸解. 안동림 역주, 《장자》(<양생주>), 98쪽.

옛 현인들의 생사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인류와 생태계 전체의 존립을 위험에 빠뜨리는 온갖 생명조작 기술들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생명을 연장하려는 현대인들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현대인들의 생에 대한 집착은 가히 광적이다. 그동안 비약적 발전을 이룩한 현대 의료기술도, 인간이 진정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보다는 죽어 가는 사람의 생을 연장하는 데에 대부분 집중해 왔을 뿐이다. 광적으로 생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는 나에 대한 집착과 생사불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다. 이러한 집착과 무지 때문에 현대인들은 죽음을 단지 고통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존재의 무상성, 모든 존재의 공함을 깨닫는다면 죽음은 고통스럽지 않다. 삶에 대립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일 뿐이다.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똑같지 않은 유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지극히 아름다운 생명체를 죽이는 일보다 더 큰 악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태어난 생명체가 그 생을 다하고 다시 그 근원 속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모든 개체의 생은 영원할 수 없으며, 단지 죽음을 통한 초월적 재생산을 통해서 더 큰 우주적 생의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영원한 생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도 장엄한 전체 우주적 생명의 광대한 전개과정의 일부로 보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4. 불이적 대동세계를 위하여

범아불이(梵我不二), 자타불이(自他不二), 생사불이(生死不二)라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살의 경지와 같다.

“보살이 환희지에 이르면 온갖 두려움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니, 이른바 살아가기 어려운 두려움, 나쁜 이름들을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악도에 떨어질 두려움, 대중의 위세에 대한 두려움 등인데, 이런 두려움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나에 대한 집착에서 떠났기 때문에 내 몸도 아끼지 않는데 하물며 재산이겠는가. 그러므로 살아가는 데 두려움이 없다. 남의 공양을 바라지 않고 모든 중생에게 베풀기만 하므로 나쁜 이름을 들을 두려움이 없다. 나에 대한 집착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에 나의 존재도 없는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는가. 자기가 죽더라도 부처님이나 보살을 떠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악도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47) 47) 《화엄경》 <십지품>에서 ‘환희지’에 대해 설명하는 곳에 나오는 말. 此菩薩.得歡喜地已.所有怖畏.悉得遠離.所謂不活畏.惡名畏.死畏.惡道畏.大衆威德畏.如是怖畏.皆得永離.何以故.此菩薩.離我想故.尙不愛自身.何 資財.是故無有不活畏.不於他所.希求供養.唯專給施一切衆生.是故無有惡名畏.遠離我見.無有我想.是故無有死畏.自知死已.決定不離諸佛菩薩.是故無有惡道畏.《大正藏》 제10권, 181쪽 중. 번역은 법정 옮김, 《신역 화엄경》, 동국대학교 역경원, 1988, 100쪽에서 인용.

그런데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고 그럼으로써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람은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자연스런 느낌에 따라 생활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이나 그 밖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속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자연스런 생의 표현인 욕망과 감정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다. 감각과 감정과 욕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것들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만족시키는 것은 자연스런 삶의 과정일 수 있다. 단지 그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그것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우리가 음식의 맛을 느끼고 그것을 즐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지만, 그러한 맛과 음식에 집착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고 고통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형상을 보아도 장님과 같이 대해야 하며, 소리를 들으면 메아리를 듣는 듯, 향내음을 맡아도 바람과 같이 맡고, 먹고도 맛을 분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온갖 감촉을 받아도 번뇌를 끊어버린 깨달음의 경계에서 느끼듯 해야 합니다.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환영과 같이 알며, 법에는 자성과 타성도 없으므로 그 자체로서는 생기지 않으므로 지금도 멸하는 일이 없습니다.”48) 48) 所見色與盲等 所聞聲與響等 所 香與風等 所食味不分別 受諸觸如智證 知諸法如幻相 無自性 無他性 本自不然今則無滅 《고려대장경》 제9권, 981쪽, 하. 번역은 김달진 역, 《유마경 외》(한글대장경)(동국역경원, 1990) 52쪽에서 인용.

우리의 감정과 욕망도 그것이 자연스러울 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그것이 억압이나 집착에 의해 왜곡될 때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어떤 상실과 아픔을 겪었을 때 슬픔과 서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곧 털어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우울병에 걸리게 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타자와 본래 둘이 아닌 우리의 본능의 자연스런 발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관심을 갖고 그를 아끼고 배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계속해서 내 수중에 두려고 집착하게 되면, 사랑은 금새 왜곡된 소유욕이 된다.49) 49)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과 그것의 왜곡에 대해서는 닐 도날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3권, 47∼49쪽을 참고.

생사의 온갖 집착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람은 자연스러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면서도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의 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나와 내 것, 나의 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그럼으로써 온갖 두려움에서 벗어나 무애행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은 자연히 타자(중생)를 위하는 지극한 보살행을 행하게 된다. 《화엄경》의 〈정행품(淨行品)〉에는 출가해서 법을 구하는 수행에서부터 밥 먹고, 잠자고, 배설하는 것과 같은 모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디서나 중생을 위하는 한없이 자비로운 보살의 마음을 아름다운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예컨대 보살이 밥을 먹을 때면, 모든 중생들도 진리를 깨달아 언제나 하늘과 사람의 공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잠을 잘 때면, 모든 중생들의 몸과 마음이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하기를 바라고, 대소변을 볼 때면, 모든 중생들이 노폐물을 버리듯이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 같은 것들과 온갖 죄를 버리고 편안해지기를 바란다.50) 50) 이같은 보살의 마음에 대해서는 《화엄경》 <정행품>(大正藏 제10권, 69∼72쪽)을 참고로 할 것.

이런 마음을 지닌 보살은 온갖 것들로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가엾게 여겨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하려 한다. 보살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므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두려움이나 자만심도 없이 중생을 구하려 하며,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한다.51) 51) 이러한 보살의 자세에 대해서는 大正藏 제10, 102쪽, 하- 103쪽 중 참조.

이렇게 해서 우리는 결국 범아불이, 자타불이, 생사불이라는 관점에 설 때 비로소 나와 나의 것, 나의 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두려움을 떨쳐내어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무애의 경지에서 노닐면서도 또한 자신만의 세계 속에 빠져 있지 않고 중생들을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보살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 모두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면 이 세계는 그야말로 모든 존재가 각자의 특성을 간직하면서도 서로서로 조화와 협동을 이루는 대동세계, 아름답고 장엄한 화엄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생각과 논리에서,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우리의 문화에서 생긴다. 앞서 보았듯이 오늘날 우리가 생태계와 공동체의 파괴, 인간다운 삶의 상실이라는 파국적인 상황을 맞은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결과를 초래할 논리와 가치관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과 제도를 분리와 경쟁과 지배와 정복의 논리가 아니라 불이의 논리에 기초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 삶의 방식을 바꾸자. 지금부터 불이적 관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떠나자. 우리 각자가 곧 우주이며 우리는 우주를 우주는 우리를 포섭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의 변화는 곧 우주의 변화다. 우리가 변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변한다. 우주적 그물망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실천은 우주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 반대도 역시 참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모습과 변화를 반영한다. 잘못된 사회 현실을 그대로 놔둔 채 나만 변할 수는 없다. 우리 바깥의 현실을 바꾸어야 우리도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개인적 변혁과 사회적 변혁은 분리될 수 없는 불이적 관계이다. 그러나 시작은 역시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밖에는 없다. 우리 자신을 변혁하고 다른 사람들을 그 변혁의 방향으로 끌어들이면서 모두의 힘을 모아 사회 전체의 변혁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총체적 파국의 위기에 다다른 현대문명으로부터 새로운 불이적 미래문명으로의 거대한 전환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찬훈
부산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인제대학교 인문문화학부 교수. 저역서로 《상생의 철학》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 논문으로 〈욕망과 현대 대중문화〉 〈현대 대중문화와 주체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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