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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 사회와 종교자유 / 조성택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ㆍ본지 주간)
[26호] 2006년 03월 12일 (일)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ㆍ본지 주간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ㆍ본지 주간)

다원성은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다양한 문화, 종교, 가치관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객관적 척도나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객관’이란 관점 자체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전통사회에서는 하나의 주류 종교가 있었다.

주류 종교는 그 자체로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삶의 척도가 되었으며 비주류에 속하는 소수의 종교를 동화시켜 상위의 보편개념으로 포섭, 환원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애초에 국교라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주류라는 개념조차도 의문시 되는 현대 사회에서 다원성, 그리고 그 다원성을 실천하고자 하는 다원주의는 단순히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인식론적 관점이 아니라 현대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하나의 실천 명제이기도 하다.

정치적 자유주의가 원칙적으로 모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자유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처럼 하나의 객관적 관점이나 척도를 부정하고 다양한 기준과 관점을 용인하는 것이 다원주의라 하더라도 다원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관점을 다원성의 이름으로 용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다원주의의 현실적 마지노선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관점, 나의 종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원주의이지만 그렇다고 나의 종교를 부정하고 나의 관점을 부정하는 그런 독단적인 관점마저 포용하는 것을 종교다원주의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다원주의가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황금율은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할 뿐 아니라,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남을 대해서는 안된다”는 호혜성이다. 이것이 바로 다원주의의 출발점이다.

다원주의라고 해서 모든 종교를 상대적 진리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원주의라 해도 모두 동일한 진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원주의적 태도에는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고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과하여 다양한 색채로 분광되는 현상을 다종교적 상황에 대한 비유로 활용하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다원주의라 해도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론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고 나와 다른 것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하는 실천적 덕목이다. 불교적 입장의 다원주의는 이른바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서 드러나는 개시개비(皆是皆非)의 입장이다. 코끼리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옳고, 코끼리 전체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틀렸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가능하고 그래서 화쟁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시개비의 입장일 때이다.

현대 한국사회는 분명 다종교 사회이며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파의 종교인들에게 당연히 요청되는 태도일 것이다. 최근 언론을 통해 소개된 ‘삼소회’ 같은 것은 종교다원주의가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모범적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종교 다원주의와는 여전히 거리가 먼 행태들도 많이 눈에 띈다. 훼불이라든지 단군상 파괴 등의 경우와 같은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은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져 새삼 여기서 재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그러한 행위에 대해 불교계는 ‘점잖게’ 대하고 용서하는 것이 자비의 실천이라는 입장에서 다소 소극적인 대응을 해왔으나, 더 이상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불교인들이 수호해야 하는 정법은 불교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법은 ‘옳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원주의적 정신과 실천은 범종교적인 덕목으로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정법이기 때문이다. 비록 타종교인들 가운데 일부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따끔하게 비판하고 더 이상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다원주의’라는 정법을 수호해야하는 불자들의 의무일 것이다.

종교자유와 다원주의

고전적 의미의 종교자유는 억압적인 정치, 종교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고 신앙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의미의 종교자유가 오늘날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자유의 남용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자유주의는 원칙적으로 누구에 의해서도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지 않도록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유까지 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이다.

다원성이라는 현실 인식과 함께 종교자유의 문제를 생각할 때 한국사회는 아직도 종교자유가 보장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인 강의석 군의 일인시위로 사학에서의 종교교육의 문제가 비로소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고 사회적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지만 한국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개인의 종교자유 침해문제는 이미 그 도가 지나쳐 문제를 거론하는 일 자체가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학교에서만이 아니다.

군대 조직의 부대장이나 서울시와 같은 공공기관의 기관장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은 며칠간 뉴스거리도 안 될 만큼 일상화 된 것이 한국사회이다. 지하철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명동과 같은 시내 한 복판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고 타 종교인을 “악마”라 해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라 구경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 한국사회이다.

최근 강남대학교에서 ‘기독교와 현대사회’를 지난 6년간 강의해온 이찬수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 탈락의 이유는 “반기독교적 우상 숭배”이다. 이 교수는 다원주의와 종교 간의 대화를 주제로 한 EBS의 ‘똘레랑스’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불상에 절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재임용을 거부하는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이라고 한다. 재임용 탈락의 이유도 놀라운 것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종교계를 비롯한 학계,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무반응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교계로서야 남의 집안일에 개입하는 것이라 침묵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기독교에서 설립한 한 대학’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보다 근본적으로 종교자유의 문제이다.

기독교에서 설립한 대학이 기독교 이념을 창학이념으로 삼고 실천하는 것은 당연하며 보장되어야할 종교자유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그 자유는 다원성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이다.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신만의 종교자유는 독선과 독단을 넘어서 타종교의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다.

본지는 불교계와 불교학계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한다. 이는 타종교에 대한 월권이 아니라 종교자유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며 불교적 용례로 말하자면 정법수호의 차원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다.

이와 동시에 불교사학내에서도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사례가 없는지 돌아보고 고칠 것은 고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관용과 용서도 지나치면 해가 된다. 스스로를 반성하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이 진정한 정법수호일 것이다. 단순히 불교적 가치와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소극적인 정법수호가 아니라 범종교적으로 옳은 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법수호이다.

다종교적 상황은 비단 현대사회만의 특징은 아니다. 부처님 당시도 다종교 사회였다. 초기경전에 언급되어있는 시하 장군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바이샬리의 한 자이나교도인 시하 장군이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조금은 의심을 가지고 부처님을 만난다. 부처님과의 토론 끝에 시하장군은 불교로 개종하고자 결심하고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거절을 한다.

거절의 이유는 시하장군이 자이나교의 큰 후원자였기 때문에 그가 불교로 개종을 할 경우 자이나교가 입을 정신적 경제적 타격 때문이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부처님은 시하 장군이 계속 자이나교 승려들과 재가자들을 잘 대해주고 물질적으로 후원할 것을 다짐받고서 그의 개종을 허락한다. 불교적 입장에서 자이나교는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외도(外道)의 종교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외도들을 없애고자 한 것이 아니라 외도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상황을 인정하였던 것이다.고대 인도의 다종교 상황은 부처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아쇼카왕의 제12석주의 비문은 오늘날 한국의 다종교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종교와 공존하고 그것을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열렬한 불교도로 잘 알려진 아쇼카왕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불교에로의 개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의 상호 이해와 공존이다. 그 비문의 내용을 현대적 어법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는 자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합니다. ···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 이건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2006년 봄

조성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석사 : 인도철학), 미국 UC버클리대학원 졸업(박사 : 불교학), 전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현대불교학의 합리주의적 경향」「무아 : 불교의 정의관을 향하여」 등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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