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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직업노동 그리고 시민정치 / 박세일
[9호] 2001년 12월 10일 (월) 박세일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
    이 글은 불교 사회사상 토론광장 ‘둘 아님(不二)의 사회철학적 의미(2001. 11. 19)’에서 발표된 것임.

1. 들어가는 말

불교는 깨달음(覺)의 종교이다. 깨달음이란 미망(迷妄)이나 미신(迷信)을 깨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잘못된 생각과 어리석은 믿음을 깨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깨는가? 사물(事物)을 있는 그대로 여실히 관찰함을 통하여 한다. 이를 통하여 잘못되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찾아내고 이를 바로잡는 것이 불교이다. 여기서 여실히 관찰한다 함은 아무런 사전(事前)의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또는 자신의 선호나 남들의 평가에 개의하지 않고 오로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크게 잘못된 미신이 하나 있다. 크게 잘못된 생각인데 그것이 잘 지적되지 않고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그 큰 미신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부처의 세계’를 ‘세속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이해하는 미신이다. 세법(世法)과 불법(佛法)을 둘로 보는 견해이다. 그리하여 깨달음이란 어떠한 특정한 정신적 경지(境地) 내지 마음의 상태(狀態)로서 이해한다. 일상생활 속에서는 전혀 도달하기 어려운 정신 내지 마음의 세계로서 일상생활의 일(세속노동, 가정생활 등)을 떠나서 특별한 다른 노력을 하여야만 도달될 수 있는 세계로 이해한다.

그 결과 자연히 생활과 수양을, 노동과 구도(기도·염불·참선)를, 종교와 사회를 둘로 나누는 견해가 등장한다. 그리하여 부처가 되기 위한 노력과 일반인들의 가정생활이나 직업노동 등 사회활동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가정생활이나 직업노동은 도(道)를 이룸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아니 오히려 진리를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요컨대 가정생활이나 직업노동은 비종교적이고 반(反)구도적인 것으로 본다.

물론 불교인들에게 “중생과 부처가 둘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이 둘이 아니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의 깊은 속을 헤아려 보면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잘 관찰하면 역시 대부분이 중생과 부처를 둘로 보고 직업생활과 구도를 둘로 생각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옳은 견해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바른 깨달음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견해이고, 이 시대 우리가 고쳐야 할 큰 미망이고, 큰 미신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실은 이 잘못된 생각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바세계가 더욱 혼탁하고 어지러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땅에 불국정토가 건설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의 세법과 불법을 둘로 보는, 세속적 직업노동과 구도생활을 둘로 보는 잘못된 견해 때문이다. 잘못되고 어리석은 생각은 반드시 잘못되고 어리석은 행(行)과 과(果)를 낳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는 이 ‘세속의 세계’에는 이미 수많은 ‘중생보살’들이 있고 이들이 열심히 보살도를 행하고 있으며 불국정토를 건설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지금의 인간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라는 사실, 즉 ‘세속의 세계’〓‘보살의 세계’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단순한 당위적 희망적 모습이 아니라 실재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세속(중생)의 세계’〓‘보살의 세계’라 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세계이다. 이 ‘보살의 세계’인 ‘세속의 세계’를 ‘부처의 세계’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환언하면 불국정토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보살은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노동선(勞動禪)의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정치(市民政治)의 활성화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이 그대로 보살도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요, 불국정토의 건설이다.

2. 이미 ‘보살(菩薩)의 세계’이다

1) 사회적 분업과 자리이타(自利利他)
본래 인간의 삶의 모습이 사회과학적(특히 경제학적)으로 분석하여 볼 때 하나의 거대한 연기(緣起) 덩어리이고 그 속에서 우리 모두가 실은 이미 보살이고 엄청난 보살행을 하고 있다고 본다. 무슨 소리인가? 보살이란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는 매일 매일의 그의 삶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 혹은 표현을 바꾸면, 6바라밀의 행을 실천하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의 마음에 자비심(慈悲心)이 충만하고 있어야 한다. 생각건대 오늘날 인간 세계의 모든 중생들은 이미 매일 매일 자리이타의 행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으며,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 자비의 마음이 충만해 있다고 본다.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우선 이 인간 사회가 오늘날과 같은 물질적 정신적 풍요를 누리면서 존재할 수 있게 된 근거는 인간이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망’을 통하여 서로 상의상생(相依相生)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망이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연기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 상의상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 수단 내지 방법이 바로 ‘직업노동’이다.

인간은 최소한의 의식주, 이를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재화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기 위한 기구가 바로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망이고 그 속에서 인간은 각자 맡은 직업노동을 한다. 그리고 그 직업노동의 결과를 서로 교환하면서 서로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킨다. 그런데 이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망이 일반적으로 시장(市場)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시장에서의 각자의 직업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고 교환하고 소비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최소한의 생물학적 생존만이 목적일 수 없다. 좀더 물질적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서는 경제가 성장하여야 한다. 그러면 경제성장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노동자 한 사람이 생산하는 노동생산물의 가치가 매년 증대함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생산성의 지속적 향상이다. 그런데 이 생산성의 향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정도, 즉 분업과 협업의 세분화(細分化)·전문화(專門化)·특화(特化)의 정도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세분화와 전문화 내지 특화의 정도는 ‘시장의 크기’에 의존한다. 시장이 클수록 분업과 협업은 보다 세분화·전문화·특화될 수 있고, 그 결과는 생산성의 향상이고 경제성장이고 인간 사회의 물질적 풍요의 증대이다. 인간 삶의 물질적 조건의 향상이다.

시장이 커진다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분업과 협업의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분업과 협업을 통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상의상생의 관계를 만들어가면 갈수록 시장은 커지고 생산성은 올라가고 경제는 성장한다. 상의상생의 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그 정도가 높아질수록(보다 세분화, 전문화 그리고 특화될수록) 인간 사회는 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 왔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 역사의 발전은 시장의 성장 내지 확대를 수반하여 왔다. 작은 지역시장에서 보다 큰 지방시장으로, 그리고 더 큰 국가 단위의 시장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세계시장으로 인간의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정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고 그에 수반하여 물질적 풍요가 높아져 왔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사회적 분업을 물질적 생산(경제재)에 국한하여 논의를 진행하여 오고 있으나 실은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원리는 정신적 생산물(종교·예술·학문 등)에도 해당된다. 정신적 생산물의 가치도 사회적 분업의 특화의 정도, 세분화와 전문화의 정도에 의존하여 발전하여 오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망을 통하여 인간의 물질적 생활뿐 아니라 정신적 생활도 함께 크게 윤택해지고 발전하여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내가 입고 있는 옷 한 벌도 수많은 사람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분업의 산물들이 모여서 시장을 통하여 나에게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읽고 있는 책 한 권도 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서 작가의 생각을 형성하였고, 그 작가의 생각이 시장을 통하여 나에게 전달된 것이다. 실로 엄청난 연기의 세계이다. 이 연기의 세계가 사회과학에서는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인 시장질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분업과 협업의 질서를 구성하는 요소가 우리 각자의 직업노동이다. 우리는 각자의 세속적 직업노동을 통하여 이 연기의 망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의 망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질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은(受恩)과 보은(報恩)의 질서라는 것이다.
시장질서에서의 직업노동은 기본적으로 자리적(自利的) 내지는 자애적(自愛的: self-love) 행위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타적(利他的)이다.1)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가 가장 잘하는 분야에 특화하여 사회적 분업노동을 한다. 그 주관적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1) 이 문제를 처음 지적한 학자는 경제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이다. 그 이후 시장질서의 기본성격, 전제, 장점과 한계 등을 체계적으로 잘 발전시키고 이론화한 학자는 하이에크(F.A. Hayek)이다. 시장질서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관심이 있는 경우는 F.A. Hayek, Law Legislation and Liberty(Routledge & Kegan Paul, 1982)를 일독할 것을 권한다.

단순한 경제적 수입을 위하여 하기도 하고, 혹은 자기가 좋아서 취미로 하기도 하고, 혹은 자아실현이라는 적극적 목표를 가지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그 결과는 이웃을 위하는, 이웃의 이익에 봉사하는 결과가 나온다. 예컨대 내가 만든 물건을 시장에서 잘 팔리게 하기 위해서는 나는 가능한 좋은 물건을 가능한 싼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기술개발이고 품질개선이고 생산성 향상이다. 나는 나의 소득을 위하여 한 노력이지만 그 결과는 소비자들에게 양질(良質)의 물건의 저가(低價) 공급으로 나타난다. 그 만큼 소비자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시장에서의 사회적 분업과 협업질서는 기본적으로 자리이타의 행을 하게 만드는 질서이다. 곧 우리는 사회적 분업과 협업을 통하여 보살도인 자리이타행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 시장질서는 내가 수많은 삶(중생)들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받는 장이 된다. 내가 일일이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재화와 서비스를 나는 앉아서 쉽게 받아 소비한다. 엄청난 수은(受恩)의 과정이다. 그리고 나도 이러한 중생 은혜를 갚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땀과 눈물로 만든 나의 생산물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중생은(衆生恩)에 대한 보은(報恩)의 과정이다. 이와 같이 시장질서란 수은과 보은의 질서이다. 따라서 사회적 분업에의 참여 자체가 그대로 보살도가 된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지적하여야 할 것은 이상과 같은 자리이타의 장이나 수은·보은의 장인 시장질서를 통하여 인간들은 이미 현실세계에서 보살의 6바라밀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 속에서의 세속적 직업노동이 그대로 6바라밀의 실천행이 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보시(布施)바라밀을 보면 음식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음식을 주고, 의복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의복을 주고, 아픈 자에게는 병을 고쳐주고, 진리를 구하는 자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이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직업노동을 통하여 이 분업과 협업의 질서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한없는 보시행이 된다.

다음 지계(持戒)와 인욕(忍辱)바라밀을 보면 우리의 직업노동과정 그 자체가 그대로 지계와 인욕의 과정이 된다. 우선 어느 직업노동이든 작업장에는 상세한 작업규칙이 있어 일정한 룰을 따라야 한다. 좀더 높은 수준의 기술과 기능을 배우기 위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고도로 복잡다기한 분업구조 속에서 한 부문의 잘못은 여타 부문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어 작업장에서의 계율은 예외 없이 엄격하고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 동시에 직업노동에서는 항상 일상적 욕구를 억제하여야 노동생산성도 오르고 기술도 숙달된다. 그리고 그 결과 많은 중생들에게 보다 잘 이타와 보은을 할 수 있다.

정진(精進)바라밀은 어느 직업노동에서나 정성을 다하여 성실하고 근면하게 맡은 바에 노력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이 신정진(身精進)이든 심정진(心精進)이든 정진이 있어야 직업노동에서 성취와 발전이 있고 이 성취와 발전은 모두 소비자들의 이익이 되어 나타난다. 즉 이타(利他)가 되어 나타난다.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바라밀은 새로운 상품과 기술의 개발, 신시장의 개척, 새로운 경영원리의 발견 등등 소위 생산과 경영활동에서의 혁신(innovation)의 문제와 관련되는 바라밀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새로운 아이디어라는 지혜는 직업노동과정에서의 선정에서 온다. 선정이란 무엇인가?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직업노동과정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상품개발이나 기술개발의 새로운 아이디어나 새로운 발상이 일어난다. 직업노동과정에 우리의 마음이 혼침에 빠져 있거나 산란에 빠지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짐은 물론이고 혁신적 아이디어나 발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선정과 지혜는 직업노동을 수행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 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중생보살들은 직업노동 속에 이미 6바라밀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동감(同感)의 원리와 대자대비(大慈大悲)
다음은 인간은 직업노동을 통하여 자리이타의 행과 6바라밀을 실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는 소위 동감(同感: sympathy)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모두가 이미 마음속에 대자대비의 자비심의 씨앗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들은, 중생들은 이미 모두가 보살이다.

그러면 동감의 원리란 무엇인가? 동감의 원리란 한마디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이다. 자기를 타인의 입장에 놓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즉 소위 상상상(想像上)의 지위전환(imaginary change of situation)을 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타인의 슬픔을 보면 함께 슬픔을 느끼고 타인의 기쁨을 보면 함께 기쁨을 느끼는 감정을 의미한다.2) 2) 동감의 원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아담 스미스(Adam Smith) 저(著), 박세일·민경국 공역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비봉출판사 1996, pp.27∼40.

이웃의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도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므로 단순한 동정(pity)과는 다르다.이러한 동감의 원리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유덕(有德)하냐 아니냐, 교육을 많이 받았느냐 아니냐 등에 관계없이 인간이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주요 특징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 동감의 원리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불법을 공부하였느냐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인간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이 동감의 원리야말로 바로 모든 인간이 본래 다 자비심을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동감(同感)의 원리〓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동고동락(同苦同樂) 내지 동고동비(同苦同悲)의 마음〓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이기 때문이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신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에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발견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기가 사랑스러움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3) 부처님께서는 당위(當爲)로 이야기하셨지만 실은 이는 실재(實在)의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인간에게 본래 역지사지의 마음이 있기에 비로소 이웃에 대한 불해(不害)의 마음 내지는 대비(大悲)의 마음이 가능한 것이다. 3)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현암사 개정2판, 2001, p.175 .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인간들은 이 ‘세속의 세계’에서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 속에서 각자의 직업노동을 통하여 이미 자리이타의 보살행과 6바라밀의 보살도를 행하고 있고, 또한 마음속에 역지사지의 동감의 원리, 환언하면 이웃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느끼는 보살의 대자비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세속의 세계’가 그대로 ‘보살의 세계’인 것이다.

3. 더 나은 ‘불국정토’를 만들기 위하여

이미 앞에서 중생들이 사는 세속의 세계가 그대로 보살의 세계임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중생들이 하기 나름으로는, 환언하면 보살도를 잘 닦느냐 아니냐에 따라 더 나은 불국정토를 더 빨리 만들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불국정토를 더 빨리 건설할 수 있는가 그 방법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불국정토 건설의 방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이미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하나는 노동선의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정치에의 참여이다. 각각에 대하여 상론하기로 한다.

1) 노동행선(勞動行禪)의 실천
선(禪)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성성(惺惺)함을 의미한다.4) 4) 보통 선(禪)이라 하면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적적함보다는 성성함에 선의 중심을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본래 적적함은 마음의 적적함이어야 하는데 보통 주위환경의 적적함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6식(識)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적적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시끄러운 환경에서는 물론이고 마음에 6근(根)의 온갖 경계가 일어난다고 하여도 성성할 수 있는 것이 선이고 그것이 바른 선법이라고 생각한다.

성성은 매(昧)하지 않고, 즉 어둡지 않고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을 하든 어둡지 아니한 것이 선의 생명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선에 대하여 한 가지 잘못된 견해가 있다. 즉 선이란 마음에 한 생각도 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하여 몸을 고요한 데 두고 일체의 신변잡사를 떠나 마음의 고요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선이란 일체의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6근(根)을 가지고 있는데 아무 생각과 느낌이 없어서야 목석이지 살아 있는 인간이겠는가?

그리고 도(道)라는 것이 마음의 어떠한 특이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6식(識)을 통하여 인간에게 여러 가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꽃을 보면 꽃으로 보여야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음을 추구하여서야 어찌 바른 도라 하겠는가? 괴로워하는 이웃을 보면 고통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이웃의 괴로움을 보도고 마음이 고요하여서야 어디 보살이라 아니 그 이전에 어디 인간이라 하겠는가? 따라서 살아 있는 한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번뇌가 일어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번뇌가 일어나도 이에 매하지 않음, 즉 어둡지 않음이 중요하고 이것이 바로 선의 진수라 하겠다. 그래서 선의 생명은 성성함에 있다고 본다.

본인은 화두좌선(話頭坐禪)보다는 노동행선(勞動行禪)이 보다 많은 장점이 있는 바람직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노동행선이 화두좌선보다 좋은 점은 우선 노동을 통하여 사회적 경제적 가치창조 활동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 특히 직업노동을 통하여 중생에게 이로운 새로운 가치를 계속 창조할 수 있다. 새로운 물건을 만든다든가, 새로운 예술품을 구상한다든가, 새로운 책을 저술한다든가 등등을 할 수 있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도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도 모두 노동행선의 결과이지 화두좌선의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 즉 상의상생의 대연기(大緣起)의 질서를 외면하고 자리이타의 기회, 즉 보살도를 행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위험이 있다.

물론 화두좌선을 통하여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고 있다고, 혹은 새로운 정신적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조용한 시간이 때때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항상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따라서 대중의 일상의 수행법은 결코 아닌 것이다. 또한 한용운 선생께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지적한 대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한다고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염세(厭世)가 될 가능성이 높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독선(獨善)에 빠질 위험도 높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염세와 독선은 불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구세(救世)와 자비(慈悲)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화두좌선보다는 노동행선이 보다 대중적인 수양법이고 보다 일상적인 수양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노동행선은 인간들의 일상의 가정·직업·사회생활과 양립시킬 수 있으며 보다 많은 사회경제적 가치(富)나 정신문화적 가치(美·善)를 창조해낼 수 있다. 그만큼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면 노동행선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직업노동에 성심성의로 혼신의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집중과정에 자신이 매하지 않고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치 불경을 사경(寫經)하듯이 지극한 정성으로 직업노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일에 빠지지 아니하고 항상 깨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노동대상에 정신적 육체적 정성을 집중하다 보면 저절로 적적(寂寂)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매하지 않고 항상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노동행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노동행선에는 어떠한 효과가 있는가? 어떠한 효과가 있어 불국정토의 완성을 앞당길 수 있는가?
두 가지 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물이 좀더 제대로 보일 것이다. 지혜의 달이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연기의 세계’를 보다 더 확연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상의상생의 관계에 있고 수은과 보은의 관계에 있는 우리의 존재의 세계를 보다 잘 이해하고 각자가 맡은 가정에서의 역할, 직업노동에서의 역할,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정치사회적 역할 등을 수행함에 있어 더욱 성실하고 정직하게 임할 것이다. 그 과정이 바로 우리 개개인과 사회를 보다 훌륭하게 완성시키는 과정이 된다.

다른 하나는 노동행선은 외부의 세계를 보다 정확히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인간의 내부의 세계,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성의 하나인 동감의 원리, 환언하면 자비심을 일으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인간이 누구나 동감의 능력, 즉 자비심의 씨앗이라는 선인(善因)을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음은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산란하거나 혼침에 빠져 있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인도 선한 과(果)를 결과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성성함을 통하여 산란과 혼침이 줄어들면 성성함이 선연(善緣)이 되어 선과(善果)를 만들 수 있다. 우리 사회를 보다 자비심이 충만하는 사회로, 환언하면 불국정토로 만들 수 있다.

2) 시민정치에의 참여
우리는 앞에서 불국정토의 건설을 앞당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시민정치에의 활성화라고 하였다. 우리가 모두 시민정치에 참여하여야 하고 이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우선 왜 시민정치의 활성화가 필요한가부터 논하도록 한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은 혼자 성불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인간에게는 동감이란 생래적 원리가 있어서, 환언하면 동고동비(同苦同悲)의 마음이 있어서 모든 이웃 중생들이 괴로워하는 가운데 혼자 성불하는 것이 어렵다. 이웃 중생들의 고통 속에서 ‘과정으로서의 보살’은 될 수 있지만 ‘완성으로서 부처’는 되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중생의 고(苦)는 ① 자신의 마음가짐과 더불어 ② 주변 환경(사회환경 및 자연환경)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또한 불이(不二)이기 때문에 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위하여서는 본인들 각자가 개별적으로 마음가짐을 바꾸는 노력도 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사는 삶의 환경(질서)을 바꾸어 주는 집단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중에서 중생의 삶의 환경을 바꾸고 삶의 질서를 바로잡는 집단적 노력이 바로 ‘시민정치의 활성화’이다. 여기서 바로잡는다는 것은 우리 삶의 질서(정치, 경제질서 등)가 자리해타(自利害他)의 질서가 아니라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질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공정’ 그리고 ‘환경적 친화’ 등의 질서를 만드는 것이 시민정치의 목표이다.

중생이 처한 질서와 외부환경을 자리해타가 되도록 만들어 놓고 중생들에게 보살행을 기대하는 것은 중생들을 버리는 것이 된다.
시민정치의 주체로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그룹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시민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전문가 집단의 정책운동(민간 싱크탱크 운동)이다. 시민운동이란 체제 내 운동으로서 개체의 이익 추구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 실현을 위한 사회 계몽성이 강한 운동으로서 기본적으로 개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 자원봉사형 운동이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의 정책운동은 국가정책을 국익과 공익의 입장에서 연구, 비판, 토론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민간 싱크탱크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국토의 건설을 앞당기기 위하여 이러한 시민운동(계몽운동)이나 전문가 운동(정책운동)으로 대표되는 시민정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시민정치가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국가에 대한 감시와 견제이다. 민주주의의 형식화 내지 형해화를 막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내실화 내지 토착화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서는 국민들의 기본권의 보장과 법치주의의 건설이 핵심이 된다. 자유주의·법치주의·민주주의는 모두 불국정토 건설의 큰 기둥들이다.

둘째는 시장에 대한 감시와 견제이다. 우선 시장질서를 자유·공정·경쟁적으로 만드는 노력, 즉 질서정책(ordo-policy)이 중요하다. 앞에서 사회적 분업과 협업이 자리이타의 질서라고 하였다. 이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가 자리이타의 질서가 되려면 그 질서가 반드시 자유스럽고 공정하며 경쟁적이어야 한다.
시장질서가 자유·공정·경쟁적일 때 한하여 자리적 행위가 이타적 결과를 가져온다.

시장이 독과점적일 때는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되지 않고 자리해타(自利害他)가 된다. 독과점시장에서는 자유, 공정, 경쟁의 압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자를 위하여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나쁜 물건을 비싸게 팔아도 독과점 이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는 자유, 공정, 경쟁적일 때 한하여 보살도를 실천할 수 있는 자리이타의 질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질서정책이 중요하고 이를 시민정치가 끊임없이 감시하고 감독하여야 한다.

셋째는 시장에 대한 보완이다. 시장경쟁에서 탈락되었거나 시장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계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을 확대하는 노력이다. 경쟁은 결코 최선의 질서는 아니다. 다만 인간이 습관의 동물이고 쉽게 게을러질 수 있기 때문에 경쟁은 사회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일종의 정신적 육체적 긴장과 규율을 주는 역할을 한다.5) 5) 이 점을 명쾌히 밝힌 학자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경쟁이 그 나름의 폐해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더 큰 폐해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아니 된다. ……경쟁은 진보를 취한 최선의 자극제는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아니 가까운 장래에도 진보를 위한 불가결한 자극제이다.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한 자신의 습관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생산방식을 도입하려 하지 않는다…….” John Stuart Mill, Principle of Political Economy,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65, pp.794∼795.

구도에 있어 계율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나 시장이란 경쟁질서에 참여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있다. 환언하면 사회적 분업과 협업에 참여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있다. 병약자라든가 노약자라든가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분들에 대하여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적절한 수준의 생활보장과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공동체의 의무이다. 그러나 이들은 ‘제도권 정치’에서는 큰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복지문제는 흔히 간과되기가 쉽다. 따라서 시민정치가 이 문제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여야 한다.

이상을 요약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즉 이 ‘세속의 세계’를 자세히 관찰하면 이미 많은 중생보살들이 사회적 분업과 협업의 질서를 통하여 자리이타의 보살도를 행하고 있고, 직업노동을 통하여 이미 보살의 6바라밀을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속의 세계’가 그대로 이미 ‘보살의 세계’이다. 그러나 보살의 세계는 완성된 세계라기보다는 완성을 향하여 가는 세계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완성의 세계, 즉 ‘부처의 세계’를 앞당길 수 있을까? 그 앞당기는 방법은 두 가지, 즉 노동행선의 실천과 시민정치에의 참여다. 이 둘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속의 세계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보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불국정토로 만들 수 있다.

4. 맺는 말 : 제법무아(諸法無我)

앞에서 우리는 이미 보살의 세계에 살고 있고 우리가 노력함에 따라 부처의 세계를 앞당길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우리의 의지가 문제이고 우리의 원력이 문제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자유의지와 자유원력을 가지고 있는가? 진정으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 세상을, 우리 역사와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그렇다” 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인간의 대자유를, 역사창조와 신사회 건설의 대자유를 긍정하는 많은 말씀이 있었으나 여기서는 한 가지 가르침만 보도록 한다. 즉 3법인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가 그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제법무아의 가르침이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제법무아를 모든 것이 무상하고 허망하니 나(我)라는 주체도 마찬가지로 무상하고 허망하다, 따라서 실은 나라는 존재가 없다, 원리적 이치적으로 보아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허무감과 염세에 빠지는 경향이 생긴다. 이는 크게 잘못된 해석이다. 제법무아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무주체(無主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혹은 영구불멸의) 자기 이미지(我相: self-image)를 가지지 말 것을, 즉 인간이란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동태적 주체로서 이해할 것을 의미한다.

혹자는 더 나아가 나라는 존재가 원리적 이치적으로 보아 없을 뿐 아니라 일상적 경험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혼란과 허망에 빠지게 한다. 이는 큰 잘못이다. 부처님은 결코 일상적 경험적 존재로서 나를 부정한 적이 없다. 아니 그 누구가 일상적 경험적 존재로서의 나를 부정할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나라는 주체의 중요성을 대단히 중시하셨다. 부처님은 평상시에 항상 “나는 자기에게 귀의하고 남에게 귀의하지 않으며 스스로 귀의하고 스스로 존중할 것이다.”라고 하셨고6) 열반시에도 제자들에게 이제는 법과 네 자신에만 의지할 것(法燈明 自燈明)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던가?
6) 만해 한용운 편찬, 이원섭 역주, 《불교대전》, 현암사, 1980, p.563.

부처님은 인간의 자기 주체를 부정하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원리적이든 경험적이든 인간의 자기 주체를 부정하신 것이 결코 아니라 인간들이 자기 주체를 올바로 세울 것을 가르치셨다. 고정되고 불변하는 과거적 닫힌 주체(業力)로서가 아니라 발전과 변화의 주체,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한 열린 미래적 주체(願力)로서 자신들을 세울 것을 가르치셨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인간의 대자유(大自由)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자, 이제 우리가 어떠한 원력을 세우느냐,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에 우리 자신과 우리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세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 경제학부·미국 코넬대학 대학원 졸업. 경제학 박사. 서울법대 교수·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사회복지 수석비서관 역임.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지역원 법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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