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왜 종교 다원주의 인가

1. 한국, 다종교 사회

1) 종교의 백화점
다종교 사회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어느 하나의 종교가 압도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여타의 종교는 있으나마나한 경우라면 다종교 사회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의 충분 조건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1)

한국의 경우 정부에 등록된 종교 단체만 해도 수백여 개에 이르고 스스로 종교 공동체라고 표방하고 활동하는 단체들은 수천여 개가 넘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공신력 있는 가장 최근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의 50.7%가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종교 인구 중에서 불교 신자가 23.2%로 제일 많고, 19.7%의 개신교, 6.6%의 가톨릭이 차례로 그 뒤를 잇는다.2)

유교 신자의 수가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사 방법의 한계 때문이다. 종교에는 다른 사회 조직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조직을 가지는 불교·기독교3)·이슬람교와 같은 제도종교가 있는 반면에, 그런 조직을 갖지 못하지만 사회 생활과 문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교·무속·아프리카 종교 등의 확산종교가 있다. 확산종교는 발휘하는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종교 소속감은 훨씬 낮게 나타난다. 일부 보수적 개신교도를 제외한 한국 사람들 대다수가 유교식 조상제사를 모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인의 종교적 열정은 조사 수치로 나타난 50.7%보다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한다.

여하튼 한국의 종교 인구 50.7% 중에서 불자와 기독자가 49.5%를 차지함으로써 한국의 종교인들은 대체로 불교 신자가 아니면 기독교 신자임을 알 수 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 4명 중에 한 명은 불교 신자이고 나머지 3명 중에 한 명은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소수이지만 원불교나 증산교 같은 한국 종교를 비롯해서 그 밖에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신흥 종교의 신자들이 있다. 심지어 한국과 인연이 먼 듯 여겨지는 이슬람교 신자들도 수 만 명에 이른다. 그래서 흔히 종교학자들은 한국을 두고서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국가 사회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친족 등의 소규모 단위 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모두 다종교 현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인간 사회의 최소 기초 공동체인 가정마저도 다종교 상황에 놓여 있다. 부모와 자식은 물론 형제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요즈음은 부부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주말이면 서로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사찰이나 교회로 따로 가거나 아니면 격주로 번갈아 다닌다고 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다종교 현상은 우리들에게는 이미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특별한 정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의 사람들에게 한국 가정의 이러한 다종교 현상은 지금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대교 사회나 이슬람교 사회에서는 개인 각자가 주체적으로 종교를 선택하기 어렵다. 그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그 사회의 종교에 의해 선택당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다종교 사회가 된 오늘날에도 가정의 기성 종교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종교 선택에 거의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가정이 핵가족화되면서 이마저도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다종교 상황은 한국에서 더욱더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다.4)

2) 한국 종교사회의 필연적 문제
이처럼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존재하는 다종교 사회는 단일 종교 사회에 비해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모든 종교인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라고 한다. 제국주의는 자기 민족이나 국가를 최고로 여기는 반면, 타민족이나 국가를 열등하게 여겨서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따라서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란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 혹은 최고시하는 반면, 남의 신앙은 오류 혹은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신앙을 강요하거나 설득하려는 성격을 말한다.5)

종교는 신앙을 결코 기호의 문제로 남겨 두지 않는다. 음식의 경우라면 된장을 좋아할 수도 있고 치즈를 좋아할 수도 있다. 또한 상대방의 기호품에 대한 우열을 논할 일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렇지 않다. 신앙이란 기호가 아니라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신앙이란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배타적 독선주의는 모든 종교의 본질적 요소이다. 따라서 종교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남녀간의 애정 관계처럼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은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자신의 것을 절대시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남달리 더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는 기독교가 소개되면서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심각하게 겪어 왔다. 한국에서 다종교 상황이 야기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 엇비슷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지 못한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해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 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든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서면 대체로 점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6)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官給)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 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 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 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한국불교의 기독교관 : 선망과 우려

1) 근대적 종교
한국의 불자들은 선망과 우려라는 다분히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두 가지 시각으로 기독교를 바라본다. 한국의 불자들은 누구나 기독교를 일단 선망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의 시각을 버리지 못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불교는 옛 것이고 기독교는 새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불교와 기독교를 새 것과 옛 것으로 나누어 보는 기준은 일차적으로 물리적 시간이겠지만, 그보다 더 주요한 기준은 근대적 합리성이다. 물론 근대적 합리성이란 교리적 차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한국의 불자들은 기독교는 교리적인 면에서는 초과학적이거나 심지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7) 그러나 불자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교회의 조직, 운영, 교육, 선교, 봉사 등의 다양한 활동에서 불교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근대적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불자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특히 공동체의 조직과 활동 면에서 매우 과학적이다. 한국의 불자들은 기독교는 교리적인 면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교회의 운영과 활동 면에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조선왕조가 통치 이데올로기를 불교에서 유교로 바꾸기 전까지는 문화창조의 기수이자 원동력이었다.8) 그러나 유교에게 이러한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한 불교는 기독교가 근대문명이라는 옷을 입고 들어온 이후로 문화창조의 주역을 기독교에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 지도자들은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개혁보다 전통의 계승에 익숙한 불교는 사회 전반의 재빠른 근대화로의 이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근대성에 자극받은 불교가 끊임없이 근대적 개혁을 외치지만,9) 자신들의 교리가 갖는 합리성에 대한 자부심에 비해 불교 공동체가 갖는 비효율적 저생산성 탓에 상대적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면에서 불자들은 기독교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입장에서만 보면 기독교는 분명 근대적 종교일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근대문명의 서세동점과 함께 아시아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아시아 사람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근대문명과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거지였던 유럽의 시각은 이와 상반된다. 유럽의 근대인들의 눈으로 본 기독교는 전근대적인 종교로서 기독교는 근대성의 가장 큰 특징인 합리성과 과학성에 배치되는 종교였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정신의 핵심인 계몽주의 사조가 등장하면서부터 유럽의 기독교는 역사의 주도권을 잃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한편 최근 들어 이러한 한국불교의 기독교 이해는 변모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근대성을 축적하면서 비로소 기독교를 바라보는 불자들의 시각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유럽의 근대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축적되면서 기독교가 근대성과는 거리가 먼 종교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2) 역사적 종교
불교의 몰역사성에 대한 비판과 논의는 오늘도 유효하다.10) 불교는 사회로부터 일탈하여 숲속의 한가로운 곳으로 도피하는 종교라는 비난은 인도와 중국11)을 거쳐 한국까지12) 이어졌으며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13)

지혜와 함께 불교의 두 기둥으로 간주되는 자비의 이념은 불교가 사회적 종교이며 역사적 종교임을 부인하지 못하게 한다. 불교가 전성기였던 시대에는 의료, 교육, 복지, 문화 등 모든 사회적 활동들이 불교의 이름으로 베풀어졌었다.14)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불교는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후 기독교가 이 모든 것들의 대부분을 대신하고 있다.

고려시대 말기부터 성리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조선시대 이후 불교는 유교의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불교의 사회적 입지와 역할과 기능은 거의 정지되다시피 했다. 특히 해방 이후 기독교가 교육과 의료 및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불교가 비워둔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하자 불교의 사회적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어떤 불자들은 대 국민적 홍보활동이 미약한 탓에 불교의 사회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기독교보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로 덜 사회적이지는 않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자들은 불교가 역사적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기독교는 각급 학교와 병원을 통한 교육과 의료, 독재정치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 인권운동, 노동운동이나 소비자운동 등을 통한 경제성의 확립운동, 이 밖에도 환경운동, 사회복지 사업, 여성운동, 통일운동 등 제반 사회문제에서 항상 불교보다 앞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고15) 불자들은 이를 분명히 인정한다.

결국 한국의 불자들은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종교임을 인정하며, 한국에서 불교가 예전에 누리던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이러한 활동을 배워야 한다는 선망의 눈초리를 갖는다.

3) 믿음과 선교의 종교
불자들은 불교가 수행의 종교임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불자들도 믿음으로 불교에 발을 들여놓지만, 그들은 믿음보다는 깨달음을 선교보다는 수행을 중요시한다. 반면에 한국의 불자들은 기독교가 믿음과 선교를 가장 주요한 종교생활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갖는다.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자의 57.5%는 믿음만이 구원의 궁극적 조건이라고 믿는다. 믿음을 구원의 절대적 조건으로 믿는 기독자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결국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천당 대신에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16) 한국의 불자들은 개신교인들이 기독교를 믿으면 천당에 가고 불교를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선교하는 행위를 심각한 문제로 간주한다.

반면에 불자들은 선한 사람은 믿음이 없어도 천당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17) 한국 사람들의 조상들 중에는 기독교를 믿지 않았지만 훌륭하다고 존경받는 많은 사람들이 많다. 불자들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은 이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에 죽어서 좋은 곳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개신교의 주장에 당혹한다.

한국의 불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제1차적 신앙활동을 선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반면에 수행을 중시하는 전통 속에서 살아온 불자들은 선교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한국불교는 비신자를 위한 선교 프로그램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의 불교가 포교를 전혀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포교 프로그램들은 자기 발로 절을 찾아온 초심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레지오 마리에 같은 군대식 용어로 조직된 가톨릭의 신도조직은 불자들로 하여금 선교에 임하는 기독자들의 전투적 태도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불자들은 개신교의 ‘신자 배로 불리기 운동’이 기성 불교신자들을 겨냥한 개종운동임을 알고서 살벌한 전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불자들은 기독교의 이러한 불도저식 선교활동이 개인적 차원의 불화를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불안요소로 작용하여 민족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고 우려하고 있다.

4) 배타적 종교
한국불자들이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은 기독교가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혀 폭력까지도 불사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일부 원리주의 기독교 신자들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불교를 파괴하려 시도하고 있다.

최근 불교계에서 발행된 한 잡지에는 기독교가 불교에 가한 폭력적 파괴행위에 대한 최근 7년간의 주요사건 일지가 게재되어 있다.18) 총 20여 쪽에 걸쳐 빼곡하게 실려 있는 이들 기사는 비방, 오물투척, 폭행, 파괴, 방화 등은 다반사이고 심지어 사찰마당에서 당회를 열고자 하던 교회신자들이 실랑이 끝에 스님을 밀쳐 넘어뜨려 죽게 하는 일까지 보고하고 있다.

한국의 불자들이 보기에 기독자들은 편견과 독선과 오만에 사로잡혀 있다. 기독자들은 자신의 신앙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유일한 참 종교라고 여긴다.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면 자신 이외의 것은 모두 허위가 아니면 오류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앙만이 참이이라면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종교뿐이다. 즉, 자신의 종교밖에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다른 종교들은 허위나 오류일 뿐이기 때문에 혹세무민의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혹세무민의 미신은 척결이나 처단의 대상이다. 한국불자들의 눈에 기독교는 철저한 배타주의이다.

배타주의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개종주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처단해버리고 마는 성전주의(聖戰主義)이다. 한국의 불자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주의가 자신들에게 적용했던 독선적 가치관을 자신이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타종교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토록 혹독하게 자신들을 박해했던 정치적 제국주의를 그대로 원용하여 종교적 제국주의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러한 배타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현대사조와 평화적 공존이라는 절체절명의 전제 앞에서 양식 있는 지성들에 의해 차츰 외면당하고 있다.

5) 냉전
그러나 한국에서의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아직 열전의 수준으로까지 전개되지는 않았다.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는 중동이나 아일랜드에서처럼 피를 흘리며 싸우는 열전을 벌이지는 않는다. 한국의 불자들은 내심으로는 기독교에 잔뜩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불교가 기독교를 바라보는 태도를 묘사하는 말로서는 냉전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 한국불교는 철저하게 냉담한 시선으로 기독교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불교에게 기독교는 전혀 상대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 상대다. 한국의 불자들은 기독교를 무조건 외면하고 기피한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만남도 갖지 않는다. 불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정부에서 주도하는 행사에 동시에 초대되었을 때 수인사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다. 아직은 두 종교가 서로 만나서 공통의 관심사를 함께 논의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기껏해야 개인적인 차원에서 몇몇 만남들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크리스마스와 부처님 오신 날에 한두 명의 양교 지도자들이 개인적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교환했다. 크리스마스날 불교방송에서 캐럴을 방송한 것이 최근에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관심에도 장애요소들이 작용한다. 양쪽의 보수주의자들, 특히 기독교의 원리주의자들이 이러한 해빙무드에 사사건건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몇 년 전에는 개신교 감리교회의 신학대학장으로서 종교다원주의 신학자였던 변선환 목사가 종교재판을 받고 평신자 자격까지 박탈당하는 파문을 당했다.

파문의 가장 큰 이유는 불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 탓이었다. 이처럼 아직도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나 이해는 아직 멀어 보인다. 한국의 불자들은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냉전상태가 다른 나라에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처럼 열전으로 폭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안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개신교 쪽의 훼불사건들을 보면서 이러한 갈등요인들이 갖는 인화성에 우려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3. 종교간의 대화 : 냉전을 넘어서

다종교 사회는 필연적으로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을 낳는다.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종교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은 해소되기 어렵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는 불가피하고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화합과 협력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독교측의 자세변화가 요구된다. 특히 개신교회는 파괴적 행위는 물론이고 공격적 선교를 지양해야만 한다. 계속되는 개신교회의 이러한 행위는 불자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못하고 기피하도록 만들었다. 한국의 불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은 아무것도 함께 할 만한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여긴다. 심지어 선의를 가진 기독교인들에게조차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불자들은 불교가 종교간의 대화에 생래적(生來的)으로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믿는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데에 기독교와 달리 별로 어려움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가 종교간의 대화에서 실제로 적극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현실에 소극적인 불자들 자신의 태도 탓도 있으려니와 대화 상대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종교간의 화해와 대화는 한국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제 논의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가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며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보고자 한다.19)

첫째, 자기 신앙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필요하다. 대화의 당사자는 해당 종교 전통 안에서 인정을 받는 대표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신앙이 없는 비신자가 종교간의 대화상대로 나서는 것은 대화의 본질을 흐려놓을 우려가 크다.

둘째, 그와 동시에 철저한 개방 정신이 필요하다.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게 임하는 사람은 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개종을 결단할 수 있을 만큼 열려 있어야 한다.
셋째, 대화의 목적을 자신의 변혁과 쇄신, 즉 배움에 두어야 한다. 상대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면 대화를 기만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이라면 차라리 정직하게 개종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낫다.
넷째, 상대의 신앙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드라마 한 편도 공감적 이해 없이는 온전한 감상이 불가능하다. 공감적 이해 없이 타종교의 이해는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다섯째, 진리 추구에 끝까지 성실해야 한다.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공유할 수 있는 진리의 추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나 상대를 너무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 손쉽게 서로를 인정해 버리는 절충주의는 이러한 목적의 포기를 의미한다.

여섯째, 교리적인 간격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교육·문화·복지·인권·정의·평화·환경·통일 등 공통의 이상적 현안들을 위해 다같이 실천에 참여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교리적 간격은 동일한 목적의 실천 안에서 무기력하게 와해될 수 있다.

일곱째, 대화에 임하는 당사자간의 인간적인 신뢰와 유대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신앙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 요소들은 인격 안에 융해(融解)되어 있다. 대화 상대의 인격에 대한 감동은 모든 관계를 긍정적으로 이끈다.

한국의 다종교 사회는 불교와 기독교 모두에게 위기인 동시에 기회이다. 다종교 사회를 기회로 삼을 것이냐 위기로 만들 것이냐는 순전히 불자와 기독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만일 이것을 기회로 삼는다면 그것은 그들만의 기회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온 세상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국가적 반목 세력들에게 화해와 일치, 공존과 공영의 모범이 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윤영해
동국대학교 선학과 및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종교학 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교수. 논저서로 〈불교와 기독교의 자기부정의 의미〉 《주자의 선불교비판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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