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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불교논단] 동물에게도 공민권이 있다 / 폴 왈도
폴 왈도 / 박서연 옮김
[10호] 2002년 03월 10일 (일) 폴 왈도 박서연 옮김

‘동물 공민권’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의 본성과 상태에 중점을 둔, 다양하고 때로는 매우 논란의 여지가 있는 현안문제에 관한 복잡한 분류개념이다. 이러한 현안문제들에 대한 불교도들의 요구와 통찰, 그리고 접근법들의 관련성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몇몇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동물 공민권’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②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적 전통의 견해는 어떠한가?
③ 우리는 어떻게 불교적인 통찰력을 ‘동물 공민권’에 대한 많은 해석들을 논의할 때 사용되는 일반적으로 공인된 현대적 개념들과 전문용어와 연관시킬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 각각에 대해 역점을 두어 다루려고 할 때 발생하는 최초의 몇몇 복잡한 일들을 고려해 보자.

1. ‘동물 공민권’은 실제로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동시대 사회에서 ‘동물 공민권’은 많은 서로 다른 사항들이자 운동이며, 이러한 것들은 결코 내부적으로 지속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 용어 자체는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대략 두 개의 축 주위로 작동한다. 첫째로, ‘동물 공민권’은 ‘다른 동물들’에 대한 광대한 우주적인 관심을 기술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작용한다. 그러한 관심들은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 속에서 많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으며, 18세기 말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제한적이나마 현저해졌다. 그러나 골드(Gold)가 주목했듯이, “정확히 사회변혁을 위한 대중운동으로 기술될 수 있는 것이 존재한 것은 겨우 마지막 20년 동안이다.”1)

다른 동물들에 대한 관심은, 종종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보다 중요한 종교적인 전통들과 약간의 철학적인 전통들에 있어서 존경할 만한 전통이었다.2) 더욱이 다른 동물들에 대한 관심은 또한 많은 토착 사회의 한 특색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 공민권’이란 용어는 이제 18세기 말 이래로 다른 동물들에 대한 진지하고도 철학적인, 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관심이 다소 일정치 않게 발전하는 것을 보아온, 그러한 사회에서 관점의 범위를 명시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진다.

‘동물 공민권’이란 용어의 이러한 가장 광범위한 사용에 있어서, ‘동물’이란 단어는 실제로 ‘인간 이외의 동물들’을 뜻한다. 물론, ‘동물’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한 가지 용도는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동물들’이다. 이것은 ‘사람은 본성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금언을 읽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단어의 의미이다.4)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인 의미는 오늘날 영어 단어인 ‘동물’의 일차적인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일반적인 사용은 보다 더 배타적이다. ‘동물들을 위해 식물을 사용하거나 또는 그 자신을 위해 동물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잘못된 것은 없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의 해석에서처럼, 그것은 매우 폭넓게 나타난다.5)

물론, 여기서 ‘동물들’은 ‘인간이 아닌 모든 동물들’을 뜻한다. ‘동물 공민권’의 가장 포괄적인 사용은 이러한 의미에 의거하며, 따라서 다른 동물들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뜻한다. 광범위한 ‘동물 해방 운동’의 ‘보다 급진적인 진영’과 연관된, 훨씬 더 제한적인 의미의 ‘동물 공민권’이 있다.6)

이러한 의미는 인간 이외의 개개의 동물들이 ‘공민권’을 소유한다는 주장과 관련되어 있다. 이 주장에서의 ‘공민권’은 종종 개개의 동물들이, 도의심에서나 대안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에게 할 수 있는 것에 도덕적인 본성의 한계가 있다는 그러한 특색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동시대인의 발언은 레간(Regan)의 《동물 공민권을 위한 사례》이다.7)

레간의 논의는 종(種)의 이익, 즉 ‘공민권’을 진전시키는 동물 옹호론자들은 그들이 개개의 동물들의 ‘공민권’을 무시하기 때문에 ‘환경적 파시즘’의 죄를 범한다는 주장 속에서 ‘동물 공민권’의 보다 더 급진적인 의미를 반영한다.8)

그러나, 실로 ‘공민권’이란 말이 다른 인간들에게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어떠한 의견의 일치도 없듯이, 심지어 ‘공민권’이란 말은 다른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많은 20세기 말 인간들의 증가하는 관심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언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도 ‘공민권’이 다른 동물들에게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어떠한 의견의 일치도 없다.9)

그렇게 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공민권’이란 개념이나 말에 의지하기를 거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동물들의 복지를 위해 활약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있다.10)

그러므로 ‘동물 공민권’이란 용어는 때로는 고작 왜 다른 동물들이 중요한가에 관한 일련의 다양한 견해들에 대한 모호한 언급으로서, 그리고 다른 때에는 개체들의 상태와 중요성에 관한 아주 구체적인 주장에 대한 언급으로서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것에 있어서, 보다 광범위한 사용에 대한 언급들은 ‘가장 광범위한 동물 공민권 견해’로 간주될 것이며, 보다 좁은 사용에 대한 언급들은 ‘더 급진적인 동물 공민권 견해’라고 명명될 것이다. 이러한 대안들은 정말 꽉 찬 연속체의 정반대 되는 양끝단이다.

가장 광범위한 동물 공민권 견해는 공민권 소지자로서의 다른 동물들을 위한 완전한 자유로부터 단순히 그들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도살자에게 운송되거나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개선하는 데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의 대안들에 대한 옹호와 관련될 수 있다.11)

보다 급진적인 동물 공민권 견해는 전형적으로 다른 동물들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중지하기 위한, (인간에게 있어) 훨씬 더 성가신 요구들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 동물들은 괴로워하는 능력, 커다란 두뇌, 비교적 복잡한 성질의 가족을 이루는 그리고 /또는 사회적인 능력들, 의사소통, 또는 비교적 높은 지적 수준 같은 그러한 어떤 일정한 특색들을 소유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견해에 있어서 공통적인 요소는 적어도 몇몇 다른 동물들이 전통적인 윤리 시스템이 허용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게 간주된다는 것이다.

2.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적 전통의 견해는 어떠한가?

팔리 경전은 수백 가지의 동물들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인간들이 빈번하게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 커다란 물질체를 포함하는 다양한 텍스트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렬된 다른 동물들에 대한 언급들을 내포하고 있다. 심지어 오랜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에 있는 몇몇 더욱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텍스트들은 다른 동물들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자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푸드갈라 판냐띠(Puggala Pan??tti)》에서만 적어도 15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을 언급하고 있다.12)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 언급된 수는 율장(律藏, Vinaya Pit.aka)과 경장(經藏, Sutta Pit.aka)에서 발견되는 다른 동물들에 관한 빈번한 언급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다. 예를 들면, 짧은 《숫타니파타(Suttanipa?a)》에서도 26가지나 되는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이 언급된다.13)

다른 불교 전통들로부터 온 최초의 텍스트들은 유사하게도 다른 동물들에 관한 빈번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들의 빈도수로 가정해 볼 때, 다른 동물들이 초기와 후기 불교도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이 확실하다. 이것이 최초의 가르침에 주어진 위대한 탁월함, 붓다 가르침의 특징인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을 삼가기 위한 기본적인 착수와 연결될 때, 다른 동물들이 ‘불교적 전통’에 의해 가치 있게 된 것은 명백하다.14)

보통 지적되듯이 불교적 전통은 내부적으로 아주 다양하며, 곰브리치(Gombrich)가 논평한 것처럼, “모든 불교도들에 대해 약간의 타당한 일반화가 가능하다.”15) 그러나 다른 동물들에 대한 태도는 일반화가 가능한 몇몇 영역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위에서도 주목했듯이, 테라바다(Therava?a) 전통은 분명히 다른 살아있는 것들의 본성, 상태, 그리고 취급과 관계가 있다. 마하야나(Maha?a?a) 전통의 서로 다른 부파들도 이것을 반영하고 있는데, 아마도 비교적 보다 강한 채식주의의 의무에 대한 강조에서뿐만 아니라 보살의 역할과 여러 종류의 자비심의 고양의 면에서 가장 독특하다.16)

그러나 목전의 의문에 대해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불교적인 요소들 또한 다른 동물들에 대해 훨씬 덜 적극적인 태도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동물들의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는 전통 속에서의 견해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훼손하는 견해 사이의 긴장은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적인 견해에 관한 의문점들에 어떠한 간단한 해답도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17)

덜 적극적인 태도는 이하에서 검토되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동물들에게 해가 되는 도구적인 사용에서 불교적인 전통의 암묵적 동의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용에 대한 그 전통의 미묘한 조장까지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특히 코끼리에게 해로운, 도구적인 사용을 수용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 장(章)의 마지막에서 검토되겠지만, 다른 동물들에 대한 그 전통의 덜 적극적인 태도에의 솔직한 평가가 다른 동물들의 가치에 대한 그 전통의 통찰력은 그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높은 질서의 성취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은 다른 동물들에 대한 심각한 해로움이 애초부터 그 전통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복잡하고도 논쟁의 여지 있게 모순되는 태도를 수반하고, 참으로 종종 그러한 태도와 뒤섞이기도 한다.

3. 불교적 통찰과 동물 공민권을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

만약 불교적 전통이 중요한 통찰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그 견해 속에 섞여 있고, 아마도 심지어 내부적으로는 다른 동물들의 중요성에 모순되며, 그리고 만약 왜 다른 동물들은 중요해야 하는가에 대한 현대적 통찰 역시 극히 다양하고 근본적으로 불일치하기 쉽다면, 일반적으로 ‘동물 공민권’이란 꼬리표가 달린 현대적 개념의 복합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떻게 불교적 통찰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

현대적 동물 공민권 견해들의 개관 속에서 불교적 통찰을 서로 다른 견해들과 관련시키는 하나의 동기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점에서 현대적 운동의 중핵적 통찰이 정신적으로 최초 설법에서 구현된 생명에 대한 붓다의 경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지의 사실을 추정하려는 시도는 심각한, 즉 시대착오적 사고의 위험들을 수반하게 된다. 공평하게 말해, 몇몇 다른 동물들의 복잡성에 관한 최근의 연구작업으로 인해 지금은 이용 가능한 다른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통찰’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였다고 해서 불교적 전통을 비판하는 것은 고지식한 일일 것이다.

1960년대 이후로, 넓은 범위에 걸치는 연구가 매우 전문화된 서구의 생물 과학분야(특히 행동생물학, 인지 과학, 비교 발달 심리학, 영장류 동물학, 행동 생태학, 생물 인류학, 진화 생물학, 신경 과학, 유전학)에서 행해졌는데, 그것은 몇몇 다른 동물들이, 심지어 이번 세기의 중반쯤에서조차 서구의 철학자, 신학자, 과학자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적 복잡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오직 최근에야 얻은 정보에 기초한 동시대 견해들을 고대의 종교적 전통에 무감각하게 적용하는 것은 확실히 시대착오적이다. 게다가, 고대의 전통에서 동시대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동시대 한 개인에 의한 어떠한 시도는 위험을 불러일으킨다. 때문에 ① 우리와 문화적으로 별개인 환경에서 생겨났고 ② 우리와 문화적으로 별개인 논의 속에서 틀 지워진 관심들을 전달하기 위해 보다 오래된 견해의 지혜를 이용하려는 바로 그 노력에 의해서 몇몇 시대착오적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존재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그렇지만, 항상 불교적 전통의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이용하려는, 혹은 그것에 의해 계발되려는 시도들은 다른, 훨씬 더 현대적인 문제(그 가운데 몇몇은 이 책의 다른 장들에서 제시될 것이다)들에 관한 그 전통의 핵심적 통찰을 이용하려고 시도할 때 직면하게 되는 시대착오의 똑같은 위험들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더욱이, 불교적 통찰을 그들의 근원적인 문화적 옷차림 속에 남겨두고서 차후의 변화들에 대한 어떠한 조정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골동품 수집가적 사고와는 정반대 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시대착오와 골동품 수집가적 사고와 개념적으로 관련된 문제들은 오랫동안 지속된 전통들의 통찰을 연구대상으로 삼기를 원한다면 감수해야만 하는 단지 피할 수 없는 위험들이다.

그러므로 비록 ‘동물 공민권’에 대한 관심과 개념들을 그에 대한 접근법들과 교차 관련시키려는 시도와 관계되는 몇몇 위험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적 전통의 통찰과 견해들, 즉 다른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그 시도를 이해할 수 있고, 아래에서 제시되겠지만, 가치 있는 통찰을 가져오는 그러한 양쪽의 경우 모두에 공통된다.

외삽의 문제들을 눈에 안 띄고 마치는 것―최초 가르침에의 호소

살생과 상해의 도덕적인 본성에 관한 불교적 전통의 핵심적 통찰력이 동시대의 동물 공민권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는 정확히 그런 성질의 관심인 것으로 보인 이래, 이 고대의 전통이 다른 동물들을 위한 관심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를 물을 만한 가치는 있다. 그 전통의 본질에 있어서 심오한 윤리적인 통찰이 비본질적인 인간의 목적을 위해 모든 다른 동물들에 대한 도구적 사용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어떠한 입장에도 도전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18)

위에서 주목했듯이, 다른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불교적 전통에 있어 기본적인데, 왜냐하면 최초 설법(다양한 형식화를 취하고 있지만 그 모두가 살생에는 반대되는)은 그 전통의 근본적이면서도 아마 틀림없이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19) 이 도덕적인 언명은 몇 가지 의미에 있어서 첫번째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 주요한 도덕적인 언명, 즉 일반적으로 ‘5계(戒)’라고 알려진 ‘최초의 사람에게 표현된, 약속들’20) 가운데 첫번째로서 정식으로 목록에 실려 있다.

그것은 또한 매달 4번의 재일(uposatha; 포살일)에 불교 신자들에 의해 지켜진 8계의 목록에서도 첫번째이고, 신참 비구와 구족계를 받은 비구들에 의해 준수된 10계에서도 그러하며, 나아가 10선업(善業)의 목록에서도 첫번째 것으로서 포함되고 있다.21) 불살생은 그 전통의 메시지 가운데 서론적이면서 대표적인 부분이라는 의미에서도 첫번째이다. 예를 들면, 디가 니카야(D沖gha, 長部阿含)에서는 승리를 거둔 장군이 정복된 왕들에게 붓다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 메시지는 ‘그대들은 어떠한 생명도 죽여서는 안 된다’로 시작한다.22) 결국, 첫번째 계는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들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부분에서 나타나며, 아마도 심지어는 그것들 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수 있으므로 때에 맞춰보더라도 첫번째이다.23)

서력 기원 전 3세기를 통치했던 전륜성왕인 아쇼카(As쳍ka)는 전체 전통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인물들 중 한 사람인데, 이는 바로 아마도 틀림없이 그가 첫번째 계를 그의 통치규정 속에 통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아쇼카 왕이 그의 방대한 통치영역 주위에 붙인 칙령문들은 재삼 다른 동물들의 생명에 대한 존엄을 증명한다.24)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한 주목할 만한 일에 착수했던 탁월함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에 대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는 애정, 영웅적 행위, 자기 희생에 관한 동물의 잠재적인 능력을 최대한 고려한다. 불교에는 서구의 종교 사상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의 동물세계에 대한 친족관계와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의 더욱 친밀한 공동체적 감정이 있다. …… 그래서 불교 텍스트에서는 동물들이 항상 많은 연민과 이해를 가지고 다루어진다.25)

① 다른 동물들의 중요한 능력을 ‘최대한 참작’하고, ② ‘더 많은 의미의 친족관계와, 살아 있는 모든 것과의 보다 더 친밀한 공동체적 감정’을 가지며, ③ ‘항상’ 다른 동물들을 ‘많은 연민과 이해를 가지고’ 다루는 불교적 전통의 이러한 주제에 의한 변형들은 신봉자와 학자들 양쪽의 주장에서 볼수 있다.

실천적인 불교도인 아리야트네(A. T. Ariyaratne)와 조안나 매시(Joanna Macy)는 “끝없는 자비심이 강조되는 동식물과 인간 사이의 건전한 관계는 불교도적 삶의 기반이었다.”고 주장한다.26) 마찬가지로, 마틴 배챌러(Martine Batchelor) 비구니도 “불교도들은…… 인류가 자연계의 나머지 존재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었던 적이 결코 없다.”고 말한다.27)

학자인 데미언 키온(Damien Keown)은 “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중은 불교 윤리학의 현저한 특색”이라는 것과 같은 불교의 보다 넓은 도덕적인 영역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28) 이상주의 역사가인 존 패스모어(John Passmore)는 조금 다른 주장을 하는데, 즉 불교적 전통은 ‘서구’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생태계를 포함하는 윤리학의 확장을 위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29)

패스모어는 또한 자연을 향한 기독교 사상의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한 역사가인 린 화이트(Lynn White)가 새로운 인간/자연 친족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원천으로서 선불교(禪佛敎)에 대해 찬성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주목한다.30) 결국, 종교적인 전통의 어떠한 주창자도 아닌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불교적 전통을 “우리 자신의 전통보다 동물들에게 더 친절하다.”고 기술하고 있다.31)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장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첫번째 계(戒)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교적 전통 또한 인간과 모든 다른 동물들간의 중요한 연속성을 역설하고 있고, 윤리적인 절대로서 우주적 자비를 증진시키며,32) 〔본생담(Ja?akas)이라고 알려진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Buddha) 이전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서처럼〕일반적으로 동물들에게 매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불교적 전통에서 개체들을 강조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계와 자비심의 덕용(德用)에 관한 다양한 공식화는 확실하게 종(種)이나 생태계보다는 오히려 각 개체들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33)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도의 태도―첫번째 측면

이러한 예비적인 관찰은 불교적인 전통이 우리가 ‘동물 공민권’에 의해 제기된 현안문제들을 고려할 때 제공해 줄 중요한 전망들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에 대한 관심이 어떤 이유에서든 불교 신앙과 윤리학의 현저한 특징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교 텍스트에 언급된 내용들은 다른 동물들에 관한 기초적인 개념상의 것이 ‘동물 공민권’의 몇몇 관심사와는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을 설명하는 한 방법은 팔리 성전에,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을 향한 불교도의 태도에 두 가지 서로 다른 ‘면들’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미 제시된 측면―첫번째 계와 동물들의 생명의 중요성에 대한 그 외 다른 언명들이 있다. 이것은 그 전통의 너무나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불교는 모든 종류의 ‘동물 공민권’ 옹호자를 위한 혼합된 근원이 될 것이다. 지금, 동물에 대한 계획적인 살생은 18세기 말기 영국에 그 근원을 둔,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서구 사회로 빠르게 확산된 착상인 공장방식 축산의 증가로 인해 동시대 서구사회의 두드러진 특색이 된다.34)

요컨대, 공장방식 축산은 기술적으로는 진보되었지만 과연 도살장에 도착하기 전과 그 다음에 도살장에서 겪게 되는 많은 고통의 근원인 매우 잔혹한 상태의 감금과 취급에 관련된다.35) 붓다는 의도적인 동물 살생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비타협적이었으며, 사슴 사냥꾼들, 돼지 도살자들, 양 도살자들, 그리고 들새 사냥꾼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운명에 대해 반복해서 묘사하고 있다.36)

비록 주석서에는 방법 면에서 잔인한 조련사에게만 지옥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얼버무리지만, 동물 조련사도 똑같은 운명을 가진다고 기술되어 있다.37) 아마 틀림없이, 이러한 좀더 좁은 의미의 해석까지도 공장방식 축산과 동물 실험의 본질인 감금에 의해 야기된 의도적인 상해에 적용될 것이다.
그 전통에는 다른 동물들을 죽이는 것을 삼가기 위한 다양한 이유들이 주어져 있다. 슈미타우젠(Schmithausen)은 불살생(不殺生) 계는 “보다 초기의 문화적 단층의 유산이며―그 단층 속에서는 동물들도 가능하다면 저쪽 세상에서 그 살해자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동물을 죽이는 것이(심지어는 식물과 흙과 물까지도)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물론 그 자신의 종족 집단이 아닌)을 죽이는 것만큼 심각했다.”라고 추측한다.38) 살생에 대한 금지로서 주어진 또 다른 이유는 모든 다른 존재들은 동시에 그 자신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였다는 되풀이되는 말이다.39)

이러한 확신은 다시 태어남과 존재들이 윤회(Sam?a?a)를 통해 순환하는 동안에 걸치는 매우 긴 시간의 개념에 의지한다. 키온(Keown)은 어떤 형태의 생명이 가치 있으며, 왜 불교도들은 윤회 속에 있는 다른 ‘숙명적인’ 또는 ‘목적을 나타내는’〔궁극의 목적(telos), 즉 목표를 가지는〕 생명 형태들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에 관한 어떠한 결정적인 말도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토대는 아마 단순히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은 살아 있는 존재인 것에 의해 ‘내재적’ 가치를 가진다고 말한다.

즉 각 존재는 “어떤 다른 것(즉, 그것의 가치는 도구적이지 않다)에 대한 수단으로서라기보다는 그 자신을 위해 단정적으로 가치 있다.”는 가정일 것이라고 지적한다.40)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비경(Metta Sutta)》는 자비에 관한 놀라운 구절을 담고 있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그녀 자신의 아들, 그녀의 유일한 아들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사람도 모든 존재들을 향한 무한한 마음과 모든 세계에 대한 애정 깊은 친절을 계발해야 할 것이다.41)

만약 다른 생명을 위한 관심이 무시된다면, 초기 불교 사원 생활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그림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호너(Horner)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의심할 바 없이 혼합적 동기가 작용했다. 그러한 옹호는 승려들의 도덕적인 복지를 증가시키기 위한 한 방법인 불상해(不傷害)에서 보았을 것이며; 그것은 사욕이 없는 사회 개혁 운동의 일부분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희생의 경우에서처럼 사실상 논쟁적이고 반 브라만교적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동물도 인간이 갖는 만큼의 그들 생명에 대한, 그리고 자비심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추정 때문이었을 것이다.42)

어떤 특별한 이유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계의 기능은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존재들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슈미타우젠(Schmithausen)이 말했듯이, “첫번째 계에서, 지금부터도 불교 재가신자를 위해 사회는 좁은 의미의 인간 사회에 갖다 놓을 수는 없지만, 모든 살아 있거나 지각력 있는 존재들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공동체에는 갖다 놓을 수 있다.”43)

이러한 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은 위로 아치형을 이루는 도덕적인 질서가 있다는 고타마의 확신과 관련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붓다의 가르침은 별도로 치더라도,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존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도덕적인 질서이다. 이러한 확신은 특히 그것이 발생시키는 자비심을 통하여 어떤 동물 공민권 옹호자도 매우 기뻐할, 다른 동물들을 향한 불교적 태도의 첫번째 면을 만들어낸다.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도의 태도―두번째 측면

그러나 첫번째 면에서만큼 그 전통의 오래되고 중심적인 부분인 또 다른 면이 있다. 이것은 보다 더 호의적인 면(다시 말해 다른 동물들과 그 결과로서 동물 공민권 활동가에 대해 호의적인)과 공존하는 훨씬 덜 ‘우호적’인 면이다. 이러한 덜 호의적인 면은 몇 가지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다.

첫째, 초기 불교도들이 다른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한 방법은 그들이 동물들을 보다 급진적인 동물 공민권 견해에 관한 관심사와 조금도 동질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했음을 나타낸다. 다음 절(節)에서 이것은 살아 있는 것들과 그 밖의 다른 동물들에 대한 초기 불교도들의 일반화라는 견지에서 검토될 것이다. 둘째로, 다른 동물들의 도구적인 사용에 대한 불교적 전통의 태도는 불교적 사유를 지배하는 생명에 대한 승려계급의 개념이 다시 현대적인 동물 공민권 견해들과 긴장상태에 있음을 드러낸다.

초기의 불교도들은 다른 동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말했는가?

다른 동물들에 대한 일반화의 몇 가지 표준들은 가장 초기의 불교 자료에서 확인될 수 있다. 이 자료들을 한번 보면, 가장 초기층의 전통은 살생에 관한 중대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현대 동물 공민권 운동의 몇몇 핵심적인 관심사와는 정반대 되는 견해들을 담고 있음이 드러난다. (인간만이 도덕적으로 대단한 존재라는 인식인) 윤리적 인간 중심주의와 (종종 사실상은 매우 작은데도 오로지 종의 구성원이라는 무관한 이유로 모든 다른 동물들의 심지어 보다 중요한 이익에 대하여 인간의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호의) 인종차별이 그 예이다.44)

팔리 성전에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가장 폭넓은 일반화는 삿토(satto), 지보(j沖vo), 부토(bhu?o), 파노(pa?.o)라는 명사들에서 보여질 수 있다. 이들은 매우 총괄적인 뜻으로 쓰이는데, 그것들은 엄격하게 규정되지 않고 많은 방식에 있어서 다소 느슨하게, 중복적으로 사용된다. 삿토45)는 때때로 ‘존재들’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로 번역되지만, 대부분은 종종 ‘생물들’로 번역되며,46) 이 폭넓은 용어는 명확하게 다른 동물들을 포함한다. 부토는 종종 ‘생물들’ 혹은 ‘존재들’로 번역되는 또 다른 일반적인 용어이다.47) 삿토처럼 다른 동물들을 포함할 수 있지만,48) 그것은 또한 현대적인 의미에서 단지 ‘살아 있는 것들’ 이상을 망라하고 있다. 그 용어는 또한 ‘귀신들’ 혹은 ‘도깨비들’과 같은 보다 특정한 지시대상을 가질 수 있다.49) 지보(복수는 j沖va?는 비록 삿타(satta?와 부타(bhu?a?보다는 훨씬 덜 종종이지만, 팔리 성전에 나타나는 동물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세번째 일반화이다. 지바는 ‘살아 있는 것들’ ‘살아 있는 모든 것’, 혹은 ‘(식물에 깃든) 영혼들’, 혹은 ‘모든 영혼들’로 번역될 수 있다.

다른 동물들에게 가장 잘 들어맞는 일반화는 파노(pa?.o)이다. 이것은 ‘호흡’ 혹은 ‘호흡함’에 해당하는 단어와 관계되며, 때로는 ‘숨쉬는 것들’로 번역된다.50) 그것은 자주 나온다는 의미에 있어 경전에서 그리고 아주 중요한 구절들에서 중심적인 용어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에 대한 승려들의 의무를 다루는 율장 구절에 나온다.

고의로 살아 있는 것(pa?.am.)에서 생명(j沖vita?을 빼앗는 어떤 승려도 속죄의 위범이 있다.51)

그 다음 줄에서는 그 용어에 의해 망라되는 그러한 ‘살아 있는 것들’의 범위를 좁히고 있다. ‘살아 있는 것(pa?.o)은, 그것이 동물인 살아 있는 것으로 불려지는 것을 의미한다〔tiraccha?agatapa?.o〕’.52) 그 단어는 생명의 탈취에 대한 매우 일반적인 명령들의 일부분으로서 나타난다.53) 그것은 또한 첫번째 계에 관한 말들54) 밖에서 빈번히 나타나며, 보통 단지 ‘살아 있는 생물들’,55) ‘생명’ 혹은 ‘살아 있는 것들’로 번역된다.56)

일반화의 두번째 표준―‘동물들’

직접적으로 다른 동물들에 적용할 수 있는 보다 좁은 표준의 또 다른 일반화가 있다. 이러한 두 번째 표준의 일반화 가운데 가장 평범한 것은 티랏차노(tiraccha?o)이며, 복합어와 관계된다. 율장으로부터의 한 가지 예는 이미 주어졌는데, ‘살아 있는 것(pa?.o)은, 그것이 동물인 살아 있는 것으로 불려지는 것을 의미한다〔tiraccha?agatapa?.o〕’는 것이다. 티랏차나가타파노는 불교도들이 명확하게 알아챈, 지구상의 많은 다양한 생명을 포함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57)

그 복합어의 가타(-gata) 부분은 글자 그대로 ‘가버린, 도달한’을 뜻하는 과거분사형이며, 응용된 의미에서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간, 다시 말해 영향을 받은, 움직인, 지내는, 운명 지워진, 어떤 상태나 형편에 있는 혹은 그 속으로 들어간’을 뜻한다.58) 그러므로 티랏차나가타(tiraccha?agata)는 ‘동물들의 상태 혹은 영역’을 뜻한다. 중요하게도 인간들은 이 영역의 일부분이 아닌데, 왜냐하면 인간 종(種)의 구성원들은 불교적 전통에 의하면 완전히 분리된 영역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티랏차노(tiraccha?o)는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들’을 뜻하며, 현대 영어에서 ‘동물’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에 상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티랏차나가타(tiraccha?agata)의 해석에서 보여질 수 있는데, 냐나몰리(Na?.amoli)는 ‘동물 영역’으로, 리즈 데이비스(Mrs. Rhys Davids)와 우드워드(Woodward)는 ‘잔인한 동물들’로, 그리고 우드워드는 ‘동물 세계’로 번역하였다.59)

중요하게도 이 ‘다른 동물들의 영역’은 불교도들에 의해 세 가지 ‘고뇌의 상태들(duggati)’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이시가미(Ishigami)는 “짐승들이란 구분은 동물들을 가리키며, 세 가지 악도(惡道)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이 집단에 있는 존재들은 어리석고, 지혜가 전혀 없으며, 항상 서로 서로를 죽인다. 그것은 고통은 많고 행복은 적은 영역이다. 거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그의 악행들로 인해 태어나는 곳이다.”라고 지적한다.60) 따라서 동물계의 구성원임에 의해 어떤 다른 동물도 “빈약하고, 행복하지 못한, 나쁜 운명의, 불행의 영역으로 간 가엾은 존재”임에 틀림없다.61)

그래서 불교도의 마음에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에서 다른 동물들의 존재는 불쌍한 것임에 틀림없다. 앙굿타라 니카야에 쓰여져 있듯이, 인간과 그 외 다른 존재들(satta?은 다음과 같이 된다.

나쁜 행위들, 악한 말들, 나쁜 생각들…… 정도에서 벗어난 견해와 그 사견의 결과로 거둬들인 것을 실행하는 데에 빠지면―이러한 존재들은 몸이 부서질 때, 죽음 너머 황무지, 나쁜 목적지, 추락하는 곳, 연옥 속에 다시 떠오르게 된다.62)

이러한 장소들―‘황무지, 나쁜 목적지, 추락하는 곳, 연옥’―은 모든 동물 영역을 포함하며, 영어 번역에서는 또 다른 동물로서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불교적 전통에 의해 높이 평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종(種)에서의 구성원의 그것보다 하위인 처벌 받는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이상적인 세계에는 인간 이외의 ……어떠한 동물도 없다.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들이 한 영역에 속한다는 이러한 견해는 고타마가 “동물들이 단순한 것인 반면에 인간들은 참으로 혼란덩어리이다.”고 말했을 때 보여질 수 있는 일종의 ‘개념적인 총괄’이다.63) ‘보다 낮고’ ‘보다 단순한’ 모든 다른 동물들의 존재는 그 전통에서 비범한 주장들의 주제인데, 그것은 고타마가 한 다음의 언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나는…… 동물로 태어남과 동물로 태어남으로 이끄는 길과 동물로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과정을 완전히 알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가 죽은 뒤 몸이 부서져서는 동물로 다시 태어나게 됨을 확실하게 안다.”64) 불교적 전통은 명백히 다른 동물들의 현실 모습을 탐구하는 것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비범한’ 주장들인 것이다.65)

고타마의 말은 아마도 인간이란 소우주와 대우주의 등가성을 확신한 흔적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며―다시 말해, 인간이 그 또는 그녀 자신에 대해 앎으로써 우주의 의미심장한 현실태가 잘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코끼리에 관한 언급을 통해 암시되듯이, 불교도들은 다른 동물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숙명적으로 가장 단일한 형태들에서부터 큰 두뇌를 가진 사회생활을 하는 포유동물들(코끼리, 다른 유인원들,66)

그리고 ‘고래나 돌고래’ 처럼 우리가 아는 해양 생물들) 같은 가장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이 아닌 동물들은 티랏차나(tiraccha?a?이며, 기본적으로 어떤 인간보다도 하열하다고 여겼다. 이것은 오로지 불교인의 주장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단일하고 하열한 모든 다른 동물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범인도적인 추정이기 때문이다.67)

따라서 글자 그대로는 ‘수평으로 가는 자’68)를 뜻하는 티랏차노(tiraccha?o)는 비록 그들이 ‘수평으로 가는 자들’이 아닐지라도, 모든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작용한다. 여기서의 경멸적인 암시는 모든 동물들은 ‘단순한 것’이라는 주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물계는 처벌과 비애와 악덕의 장소라는 견해에 필적한다. 다른 동물들을 경시하는 것과 관계 있는 한 예가 복합어인 티랏차나카타(tiraccha?akatha?; 축어적으로는 ‘동물의 지껄임’69)을 뜻하지만, ‘낮은 대화’ 혹은 ‘비계발적인 대화’70)로 번역된다)와 타랏차나-빗자(tiraccha?a-vijja?; Rhys Davids는 ‘낮은 예술’로, 그리고 Walshe는 ‘저열한 예술’로 번역했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71)

실제로 티랏차노(tiraccha?o)의 영역은 아주 다양하며, 위에서 주목했듯이 확실히 고타마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부연 구절에서 고타마가 기술한 동물 배치들을 고려해 보라. 그의 분석은 민간 분류법에 대한 분류들, 세분과 분류에 관한 불교도의 경향, 그리고 서로 다른 동물들의 자연계에서의 역사에 관한 인식을 포함하여 몇 가지 다른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풀을 먹는 것에는 승려들, 동물들(tiraccha?agata?, 숨쉬는 생물들(pa?.a?이 있다. 이들은 축축하거나 마른 풀들을 이빨로 씹어서 먹는다…… 말·소·당나귀·양·사슴, 그 외 무엇이든지……(또한)……똥을 먹는 생물들도 있다……수탉·돼지·개·자칼, 그 외 무엇이든지…… 투구벌레·구더기·지렁이, 그 외 무엇이든지(처럼)어둠 속에서 늙어가고 어둠 속에서 죽는(생물들도 있다)……(또한)……물 속에서 태어나 물 속에서 늙어가고 물 속에서 죽는 생물들도 있다……물고기·바다거북·악어, 그 외 무엇이든지……(또한)오물 속에서 태어나 오물 속에서 늙어가고 오물 속에서 죽는 생물들도 있다.(이것은 썩어 가는 물고기나 시체와 벼 그리고 마을 근처의 웅덩이 속에서 사는 동물들을 기술하고 있다.)72)

다른 동물들의 다양성에 대한 불교도들의 자각은 또한 ‘살아 있는 것들의 종류(ja?i)에 대한 구분’을 인용하는 놀랄 만한 구절 속에도 반영되어 있다.73) 고타마는 많은 종류의 살아 있는 것들 속에는 다양성이 있으며 그들 각각은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만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한다. 많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살아 있는 존재들(pa?.a?을 목록으로 만든 후에, 고타마는 그들 각각이 그 집단, 종 또는 종류의 기본적인 특색이나 성질을 공유한다고 지적한다.

그 종류의 뒤를 잇는 각각은 그의 특징을 지닌다…….74)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로 어떤 다른 동물들과도 구별된다.

…… 사람에게는 다양성(다시 말해, ‘어떤 다양한 특징들’75))이 없다.
머리카락·머리·귀·눈에도 없다……(긴 목록의 신체적인 특성들)
……(피부)색 혹은 목소리는,

다른 모든 것들(즉, 모든 다른 동물들)에서처럼 그의 종류를 형성하는 특징이다.
인간의 신체에서 어떠한 독특한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인간에 있어서 차이점은 명목뿐이다.

그 구절은 풀어 놓을 만한 몇몇 읽을 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모든 다른 동물 종류들처럼 인간은 그 종을 구별짓는 신체적인 특색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아주 명백하게 주장한다. 이는 서구에서 종에 대한 다윈의 학설 이전 사유의 관념적으로 생각되었던 ‘본질’과도 같이 작용하는 ‘특징’이다.76)

그러나 그 구절 또한 ‘인간 종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추정된 차이점들은 단지 명목뿐’이라는 논의를 통해 인간 종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마지막 줄에 대한 냐나몰리(N??.amoli)의 번역은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다. “인간 존재들 사이에서의 구별은 순전히 말의 명명일 뿐이다.”77) 냐나몰리는 주석서의 해석을 부연 설명한다.

……(다른)동물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신체적인 부분으로서의 다양성이 그들 종(yogi)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것(종 구분)이 브라만이나 다른 계급 사람들의 개별적인 신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이므로 브라만, 크샤트리아 등의 구별은 순전히 말에 의한 명칭일 뿐이다. 그것은 단지 관습적인 명칭으로서 말해질 뿐이다.78)

인간 종의 단일성에 대한 고타마의 단언은, 그것이 네 가지 바르나스(varn.as), 즉 신분계급(때때로 잘못 이해되어 ‘카스트 제도’라고 언급되지만) 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점들이 존재한다는 문화적으로 의미심장한 가설에 도전했기 때문에 중요한 주장이었다.79) 따라서 고타마의 주장은 인간 계급 내에서의 보편주의에 의거한다. 그것은 또한 두 가지 다른 가정에 의거한다.

첫째, 그 주장은 각기 다른 종의 구성원들이 신체적인(형태학상) 특색의 유일하고도 한정적인 모습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들이 뚜렷이 구별되는 종 내에서는 서로 서로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다른 종의 일원들은 그들 각자 종의 구성원으로서 일종의 독특함을 가지지만, 그러나 이것은 인간 종의 구성원을 특징 지우는 것과는 서로 다른 종류이거나 수준의 독특함이다.

이 구절에서 작용하는 또 다른 가정은, 인간 종의 구성원들이 그 구성원이라는 것 덕분에 단지 신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어떤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기는 하지만, 모든 다른 동물들은 그들의 신체적인 특징에 의해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다른 동물들을 똑같이 오로지 신체적인 ‘특징’에 의해서만 특색 지워진 성질들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위에서 언급된 총괄하는 경향의 산물이다. 고타마는 한 인간과 다른 것을 구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설명한다.

나는 어떠한 사람도 단순히 혈통으로부터 브라흐마나라고 부르지 않는다.
……움켜쥐지 않는 자…… 그를 나는 브라만이라고 부른다.80)

오직 인간만이 그들의 ‘움켜쥠’(여기서는 불교적인 특징답게 욕망, 갈망 또는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의 의미를 가지는)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주장은 결코 동물 공민권 지위를 위한 문제가 아니다. 몇몇 다른 종의 구성원들이 특이한 정신적인 삶이나 특징들을 소유했다는 발견과 마찬가지로 인간 종의 구성원들이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나 능력들을 가진다는 사실은 더 이상 난처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인간만이 소유한다고 말해지는 특색이 도덕적인 감각이라는 것도 다시 동물 공민권 옹호자를 위한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의 소유가 반드시 독점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한 특색을 소유하는 것은 동물 공민권 옹호자들이 다른 인간들에게서 계발하려고 하는 감수성을 가지기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은 유일하다는 주장이 오직 인간만이 정신적인, 사회적인 그리고 지성과 관련된 복잡성을 가진다는 논리적으로 명확한 주장으로 변형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복잡성은 뚜렷이 구별되는 ‘개체성’, 즉 ‘개성’의 계발에 기여하며, 이는 어떤 존재의 도덕적인 중요성을 더해준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역사를 통해 다른 개체들과 연결된 한 유일한 개체의 삶의 종료는 인간에게 아주 익숙한, 명확하게 구별되는 종류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뚜렷이 다른 종류의 지능과 개체성을 가진다는 것이 다른 동물들은 이러한 특색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포피리(Porphyry)의 말을 부연해서 설명해보면, 인간이 그런 능력들을 보다 많이 가지고 있거나 혹은 특별할 정도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은 중요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논하는 것은, 매가 더 높이 날기 때문에 매추라기는 난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81)

불교적인 전통에 있어 이러한 변형(다시 말해, 인간은 다르다고 하는 주장이 오직 인간만이 특별한 능력이나 개체성을 가진다는 상이한 주장으로의 변질) 또는 그것과 매우 유사한 어떤 것이 아마 틀림없이 생겼을 것이다. 티랏차나(tiraccha?a?와는 다르면서 종의 구성원이라는 것에 의해 서로 같다고 여겨진 인간만이 유일하고도 중요한 정신적 차원들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지각하고, 그리고 나서 우주 안의 ‘규범적인 것’과 조화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과 관련된다.

물론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장 속에는, 다른 동물들이 결국엔 티랏차노(tiraccha?o) 범주에서 이동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이러한 규범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암시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중의 논지, 즉 인간이 아닌 동물도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이것이 불교적인 전통에서는 강조되지도, 탐구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의 삶의 현실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으로서라기보다는 배경적인 가정으로서 더 많이 나타난다.

도덕규범에 순응하고 그것에 의해 계급위계에 있어서 인간의 지위로 진보하는 다른 동물들의 능력은 외관상으로는 오직 보다 낮은 능력과 보다 낮은 가능성의 일치만 수반했지만, 만일 어떤 동물이 적절하게 행동한다면(그 기준은 명백히 검증되지 않았음), 그 결과 계급위계를 ‘위로’ 이동시키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말해주듯이, “동물들은 도덕적인 판별력이 없기 때문에 과거의 나쁜 업의 결과들에 대해 다소 수동적으로 고통받는 자들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선천적인 바보나 천치같이 도덕적으로 책임능력이 없는 인간 존재들과 똑 같은 지위에 있다.”82) 우주 안에서의 규범적인 것에 순응하는 인간은, 불교도의 생각에는 생물학상으로 동일함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존재와도 완전히 관계없는 방식으로 도덕성, 주의 깊음, 그리고 판냐(pan?? ; 본질적으로 인식력이 있으며, 관습적으로는 ‘지혜’83)라고 번역되는 복합개념)와의 약속에 따르거나 그것을 요구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근본적인 구분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몇몇 인간이 아닌 개체들이 인간과 공유되지는 않지만 도덕적으로는 대단한 능력이나 특색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래서 존재들의 질서라는 불교적 개념 속에서 ‘계급위계로 질서 지워진 층’이 있는 우주의 ‘한가운데 어딘가에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기는 하지만,84)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최고이며 모든 다른 살아 있는 것들보다 질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주목하는 것도 정확한 일이다.

슈미타우젠(Schmithausen)은 그의 논평에서, 관습적으로 “불교적 전통의 ‘교화 찬성의 가닥’에 의해 강화된 어떤 타고난 인간 중심주의”가 있다는 관련된 주장을 한다.85) 이러한 논평들을 뒷받침하는 현실은―어떤 다른 동물들의 보다 중요한 이익의 배제에 대해 사소한 인간의 이익까지도 증진시키는 인간들―그 전통에서 주장된 종차별이다.

총괄적인 문제

모든 다른 동물들이 ‘같은 종류’라고 여겨지는 것, 즉 그들 모두 똑같은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동물 공민권 입장에서 볼 때, 다만 모든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철학자인 스테펜 클락(Stephen Clark)은 우주(존재론)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한 어떤 사람의 이론뿐만 아니라 윤리관까지도 “그가 어떤 존재들을 인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지적했다.86) 실제로 동물 공민권 의제 부분은 어떤 살아 있는 것들이 어떤 특색들을 갖는가를 식별하는 것이며, 그러한 특색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고통에 대한 의미 있는 평가가 행해지는 것을 허용한다. 반면에 총괄하는 정신구조에서는 모든 다른 동물들이 서로 서로 같아져 버려서 하나의 예(이를테면 추종하도록 길러진 가축)가 모든 다른 동물들의 가능성을 대표하기에 충분하도록 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보다 더 복잡한 동물들을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러한 기능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친숙한 종류의 커다란 뇌, 가족적이고 사회적인 차원들, 지성, 그리고 개체성을 가진 동물들의 고통은 어떤 동물 공민권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특색을 가지지 않은 다른 동물들의 고통과는 서로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동물 공민권’은 매우 종종 모든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한 ‘공민권’을 추구하는 입장이 아니다―날마다의 세면에 의해 죽어 가는 피부 위의 살아 있는 유기체들이나 식용식물들, 혹은 악성 질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죽어지는 바이러스들을 생각해 보라. 오히려, 동물 공민권은 가장 넓은 형식에서조차 오직 몇몇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한 관심과 관계된다. 이러한 살아 있는 것들은 전형적으로 계통 발생적 단계에 있어 ‘보다 고등한 것’으로 묘사되는 더 크고 더 ‘복잡한’ 동물들이며, 일반적으로 보다 나중이고 보다 복잡한 진화의 산물이다.87)

이에 대한 또 다른 간단한 예는 한편으로는 포유류와 조류 사이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포유류와 곤충 사이에서 행해진 통상적 구별이다. 3천만 종이나 되는 곤충들이 있는 반면에 포유류는 고작해야 대략 4,400종일 뿐이다.88) 따라서 ‘동물 공민권’ 주창자인 인간은 가장 전형적으로 오직 몇몇 형태의 생명을 위한 공민권의 옹호자들이며, 전형적으로 이들은 ‘감성’(동물 공민권 활동가들은 그것에 의해 괴로워하거나, 보다 더 솔직히 말해, 고통을 체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과 같은 판단기준을 토대로 하여 동일시된다. 그 문제에 대한 모범적인 발언은 “그 질문은 ‘그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도 아니고 ‘그들이 말할 수 있는가?’도 아닌 ‘그들은 괴로워할 수 있는가?’이다.”라는 벤담(Bentham)의 금언이다.

89) 도덕적인 상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사용된 지성, 자기 인식, 그리고 뚜렷이 구별되는 개체성이나 인격성과 같은 다른 판단기준들이 있지만, 어떤 형식의 동물 공민권이든 오직 몇몇 종류의 도덕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만 나타낸다는 점은 남아 있다.

불교적 전통은 다른 동물들 사이에 (즉, tiraccha?a?가운데서) 모호한 계급위계 같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코끼리들은 불교도들에 의해 ‘기어다니는 것들(sirim.sapa?’ 보다 더 존중받는다. 곰브리치(Gombrich)는 스리랑카 싱할라 족(Sinhalese)의 가치에 대해 말하면서, “동물들은 오직 몇 개의 단어들만 필요로 한다. 그들도 신할라족 민속의 영웅인 코끼리를 맨 위에 둔 몇몇 종류의 계급위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애매하게 간주되고 있다.”고 지적한다.90)

스피로(Spiro) 역시 “일반적으로, 생명을 빼앗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인들은 살생으로부터 얻은 죄과를 다음과 같은 도덕적인 경사도(신성한 남자, 신성하지 못한 남자, 포유류, 척추동물, 무척추동물)를 따라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한다.91) 몇몇 동물들에 대한 다른 동물 이상의 이러한 가치평가와 일치하는 것은 코끼리·말·개·뱀·사자·호랑이·표범·곰 또는 하이에나 등 오직 특정한 동물들의 고기에 대한 금지이다.92)

그러나 다른 동물들의 본질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경우라면 (즉, 삶에 있어 그들의 이익이 충족되고, 사로잡힘과 고통 또는 다른 괴로움을 위한 의도적인 가해로부터 자유로운 것),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의 모호한 계급위계는 불교적 전통에서 비교적 거의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많은 종류의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의 차이점에 대한 윤리적인 통찰들이 체계적으로 잘 되어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 붓다고샤(Buddhaghosa, 佛音)는, 비나야(Vinaya, 律)에 따르면 승려가 작거나 혹은 큰 동물을 죽일 때 위범에 있어 어떠한 차이도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동물을 죽이는 것은 더 많은 의도와 노력, 그리고 공격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더 나쁘다고 지적했다.93)

중요하게도 그것은 탈취된 생명에 있어서는 상이함을 만드는 차이점들이 아니다. 대신에 중대한 윤리적 금령들은 살아 있는 희생물들의 다양하고 선천적인 특색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이외의) 파나(pa?.a?와 티랏차나(tiraccha?a?의 수준에서 공식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윤리적인 규칙들의 수준에서 모든 다른 동물들은 함께 ‘총괄’된다. 이것은 율에 의해 제공된 처벌들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한쪽에는 인간, 다른 쪽에는 모든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이란 구분을 명확하게 반영한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어떤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위범이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승려에 대한 처벌은 가능한 가장 엄했던 반면,94) 어떤 다른 동물을 의도적으로 살생한 것에 대한 처벌은 훨씬 덜 극렬했다. 이것은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확실히 율장은 고의로, 그리고 심지어는 부주의하여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는 것은 위범이라고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① 야채나 지렁이들을 고의로 죽이거나 혹은 ② ‘살아 있는 것들’을 함유하고 있는 물을 뿌림으로써 발생한 부주의로 인한 생명의 파괴와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코끼리를 죽이는 것도 벌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살아 있는 것의 생명을 빼앗기 위해 행동할 때의 고의의 수준에 대해 논하는 구절에서도 또한 처벌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만약에 구멍 하나가 파졌는데 사람이 그 안에 떨어져서 죽는다면 그 위범은 질서체제로부터의 추방을 요구하는 가장 높은 유형(pa?a?ika, 즉 파기)의 것이며, 만약 ‘인간 형태의 동물(tiraccha?agata-manussaviggaho)’인 상상의 약카(yakkha)나 페타(peta) 존재들 가운데 하나가 살해된다면, 이는 툴랏차야(thullaccaya)라고 알려진, 덜한 편이긴 하지만 여전히 심각한 위범이다. 만일 몇몇 다른, 실제 세계의 동물(tiraccha?agato)이 그 안에 떨어져서 죽는다면, 위범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단지 참회만 요구하는 훨씬 낮은 수준의 위범이다.95)

‘동물들’에 대한 비하

불교적 계급위계의 관점에서 어떤 존재의 현재 위치는 바로 과거 행위들의 결과이며, 바꿔 말해서 업(業) 체계는 정확하고 도덕적이다. 낮은 지위의 존재는 나쁜 행위들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고, 높은 지위의 존재는 선한 행위들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는 계급위계에서 더 낮다고 간주되는 그런 존재들의 부정적인 견해들에 대한 합리화를 제공한다. 이러한 비하는 불교 텍스트 도처에서 발생하는 개념적인 총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연을 향한 그 전통의 태도에서 지배적인 ‘교화 찬성의’ 가닥(자연에 대해 더 긍정적인, 중요하지만 덜 영향력 있는 ‘수행자적’ 요소와 관계 있는)을 확인한 슈미타우젠(Schmithausen)은 지배적인, 교화 찬성의 태도에는 “동물들과 야생 자연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쳐서 경시하는 견해”가 있다고 결론짓는다.96) 따라서 비하와 총괄하기 둘 다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도들의 사유와 가치평가의 일반적인 특징들에서 반영된 것임이 드러난다.

① (다른) 동물로 태어남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있다.

② 악행의 결과는 (다른) 동물로서의 존재이다. 부도덕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동물계에 태어날 위험이 있다. 현저한 실례는 동물들을 죽이는 사냥꾼의 운명인데, 얄궂게도 그의 운명은 동물의 자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97) 적절하게 산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영역은 “극도의 행복이 있는 천상계이거나” (인간 이외에는 어떤 동물도 포함하지 않는다) 또는 “귀족이나 브라만 가문, 혹은 위대한 가정의 사감…… 같은 모든 고귀한 (인간의)가문”에 다시 태어난다.98) 따라서 비하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 뿐만 아니라 ‘표준’에 맞지 않는, 다시 말해 곤궁하고 추하거나 또는 어떤 식으로든 불리한 입장에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몇몇 다른 인간들에 대한 이러한 경시에 기초하여 비록 인간과 모든 다른 동물들 사이에 분기점이 주어진 종(種)과 관련된 함의와 가장 낮은 인간조차도 최상의 다른 동물들보다는 낫다고 하는 암시가 남아 있을지라도, 그 전통에 의해 주장된 업/재탄생의 현실태들이 종과 관련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99)

③ 또 다른 동물이라는 것은 이전에 적절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련의 삶이나 존재양식을 영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관점에서는 어떤 다른 동물이라는 것에 있어 일종의 유죄가 있다고 하겠다.

④ 다른 동물들은 단순하고 인간에 의해 쉽게 이해된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고타마는 비록 “인류는 엉켜 있지만, ……동물은 충분히 열려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100) 여기서의 총괄하기는 보다 더 복잡한 동물들을 불리하게 만든다.

⑤ 다른 동물들은 율장의 살생에 대한 처벌에서 반영되듯이 우주의 도덕적인 설계에 있어 덜 중요하다. 그 두 집단의 상대적인 가치는―한편으로는 종(種) 라인 안쪽의 생물들(인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함께 총괄된, 모든 다른 실제 세계의 살아 있는 생물들―또한 고타마가 아난다에게 말할 때 분명해진다.

……어떤 재능이 동물(tiraccha?agato)에게 주어진다면, 그 제공은 백 배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빈약한 도덕적인 습관을 가진 보통의 사람에게 재능이 주어진다면……1천 배가 될 것이다. 도덕적인 습관을 가진 보통의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십만 배가 될 것이다. 감각적인 즐거움을 넘어서 있거나 거기에 집착함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면(1십만 배의 십만 배가 될 것이다).101)

재능들이 깨달음으로의 길을 따라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승려에게 주어질수록 이익은 계속 증가한다. 요점은, 어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주는 것이 비도덕적인 가장 ‘낮은’ 인간에게 주는 것만큼 가치 면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에게 주는 것이 비록 인간에게 주는 것에 의해 작아 보일지라도 도덕적 우주 내에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또다시 그것은 말하자면, 본질적인 불연속성에의 깊은 확신에 의해 압도된다.

이 모든 요소들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다른 동물들에 대한 묘사로 이끈다. 물론 그러한 묘사들은 자타카(Ja?akas)에서처럼 가르치는 장치들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다른 동물의 상대적인 지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 의존한다.

게다가 자타카에서는 몇몇 동물들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려지는데, 다른 것이 아닌 보통의 동물들로 그려진 것은 거의 항상 어떤 동물 집단의 왕으로 다시 태어난 보살이다. 이러한 특징은 미묘하게도 자타카에서 긍정적으로 그려진 것은 실제 세계의 동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반영한다. 이 점과 일치하는 것은 불교도의 생각에 다른 동물들 상태의 하위적인 측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심각한 결과들을 초래한다는 방식이다. 이는 개나 암소로 사는 것이 천신들 사이에 다시 태어남으로 이끈다고 생각한 고행자들의 이야기에서 분명해지는데, 이와는 반대로 고타마는 이것은 “잘못된 견해들”이며 “……하나의 잘못된 견해에 대한 두 개의 도달점이 있는데, 니라야(Niraya) 지옥이거나 동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102)

총괄하기나 비하의 또 다른 귀결은 다른 동물들의 능력이나 특색이 일률적으로(코끼리에 관한 실례가 아래에 주어질 것이다.) 무시된다는 것이다. 자연계에 있는 다른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의 지배는 이따금씩의 긍정적인 모습에 의해, 그리고 자연적인 주거환경, 인간의 활동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그들이 명상할 수 있는 곳에 잘 가는 승려들에 대한 고타마의 권계들에 나오는 것과 같은 자연계에 대한 암시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된다.103)

이 권계에 대해 가능한 하나의 암시는 인간들과 떨어져 있는 자연적인 장소들은 인간과 그들의 장소가 괴롭혀지고 괴롭히는 그런 방식으로는 괴롭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황무지는 안전하지 못하며 문명은 인간들이 속하는 곳이라고 암시하는 그러한 것들과 같은, 자연적인 장소에 대한 많은 부정적인 견해들이 있다.104) 그러나 결국 이러한 이따끔씩의 긍정적인 암시들은 일반적으로 인간들의 특권 받은 영역보다 ‘더 낮은’ 영역으로서의 다른 동물들에 대해 되풀이하여 발생하는 부정적인 견해들에 효과적으로 도전하지는 못한다.

두번째 측면과 초기 불교도들이 다른 동물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한 논평

불교도의 ‘두번째 측면’은 다른 동물들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정치 못하다고 주장될 수 있다. 초기의 불교도들이 다른 동물들의 실제적인 현실 모습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다른 동물들에 대한 그들의 논평은 단지 모든 다른 동물들의 완전한 열등성에 관한 그 시대의 지배적인 ‘관념형태’105)를 반영할 뿐이다. 코끼리에 관한 예는 비록 큰 원숭이들(즉, 다른 커다란 유인원들)이나 고래류(고래와 돌고래들) 같은 다른 ‘좀더 복잡한’ 동물들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위해 똑같은 것이 행해질 수 있을지라도, 정말 어떻게 이것이 그러한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해야만 할 것이다.

코끼리의 예는 실제로 놀랄만한 실수이다.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코끼리들의 존재에 대한 가장 중요한 특징, 즉 가족적이고 사회적인 무리짓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 전통에 풍부한 동물 이야기들에서 심각하게 잘못 전해지고 있다. 요약하면, 불교의 이야기꾼들은 단순히 코끼리 사회의 구조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현실을 잘못 이해했을 뿐이다. 잘못 전해진 사실은 코끼리 집단에서 수컷들이 지배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코끼리들은 그들의 사회적인 무리짓기에서 현저하게 암컷이 가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백한 현실이 불교 설화들에는 결여되어 있으며, 아마도 가부장적 가치의 산물이겠지만,106) 그것은 너무 잘못된 것이어서 단정적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사실, 암컷이 가장인 것은 코끼리들의 삶에는 중심적인 것 이상인데, 그것은 구성성분이다. 형성적인 경험들이 창조되고, 보여지며, 조절되고, 세대에서 세대로 옮겨지는 것은 암컷이 가장인 것을 통해서이다. 한 집단 내에서 가장인 암컷들은 그 집단을 이끌어나가고, 결정을 내리며, 그 나머지 성원들에 의해 이해되는 신호들 속에서 그들을 의사소통시키고, 지식과 경험의 전통들을 넘겨주며, 다른 개체들을 지킨다. 성숙한 황소들은 고독하며, 다른 집단의 안으로 밖으로 어슬렁거리며 다니는데, 그들은 결코 리더가 아니다.

비록 황소들 사이에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교섭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단지 암컷이 가장인 집단에서의 코끼리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적이지는 않을 뿐이다. 가장인 암컷들은 그 전체 집단의 움직임들을 개시하고 통제하는 결정적인 신호들을 주는데, 이것들은 어떤 호의적인 관찰자에게도 명백하다. 현실적으로 지도자로서의 짐을 운반하는 것은 가장인 암컷이며, 인도의 암코끼리들은 전형적으로 엄니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프리카 수컷과 아프리카 암컷을 구별하는 것보다 인도의 수컷과 인도의 암코끼리를 식별해내기가 더 쉽다.

그런데도 불교도들이 항상 코끼리 집단들을 주로 왕인 수컷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 바꿔 말하면, 암컷이 가장인 것은 인도의 코끼리들 사이에서는 특히 명백한 현상이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많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서구사회도 그 이후로 슬프게도 이러한 특징을 모르고 있었으며,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안 더글라스 해밀톤(Iain Douglas Hamilton)이 그에 대해 관찰하고서는 세부적인 것을 발표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107)

그러므로 “정전(正典)이나 주석서들에 묘사된 동물에 관한 일화들은 종종 그들이 다루고 있는 짐승들의 본성에 매우 충실하다.”108)고 하는 주장이 몇몇 경우에는 진실일 수도 있겠지만, 코끼리에 관해서는 옳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코끼리에 관한 불교도의 언급들은 실제 세계 코끼리들의 현실 모습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복잡하고 커다란 뇌를 가진 지성적인 개체들인 다른 동물들에 관해서도 똑같은 종류의 논의가 행해질 수 있겠지만,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적인 가치평가의 덜 친절한 측면에 관한 두번째 논의가 주어진다면, 이는 실로 필수적이지는 않다.

두번째 논의는 불교도가 모든 다른 동물들은 인간보다 열등하며, 한정되고 단순한 본성이 고타마 자신에 의해 역설된 근거 위에서는 불필요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경쟁적인 종교적 전통들의 현존하는 요구들에 대한 불교도의 비평에서 그들이 영향 받게 한 바로 그 몇몇 원칙들을 위반한다. 예를 들어, 불교도들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주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한 남자의 요구와 유사함을 나타내면서 신성한 브라만에 관한 요구들을 한다고 바라문들을 비웃었다.

이것은 압파티라카타-바시타(appa?ih沖rakata-bha?ita)로 불려졌는데, 즉 ‘무책임한 이야기’ 또는 ‘마땅한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109) 우주에 대해 ‘알려고 하는’ 인간의 요구들을 제한하는 이러한 종류의 관찰은 또한 실제적인 지식의 소유에 대한 인간의 해방에 작용하는 우선권을 예증하는 그 전통에서의 많은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 전통에서 하나의 잘 알려진 일련의 질문들은 열 가지 무기(無記, avyakata?i), 즉 ‘불확실한 것들, 결정되지 않은 사항들’이다.110)

리즈 데이비즈(Rhys Davids)는 그에 대해 “이러한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서 최초의 불교도들이 받아들인 지위는 너무 자주 언급되므로 그것은 틀림없이 붓다의 실제적인 신념에 있어 중요한 항목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111)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동물들과 관계가 없지만(그 대신에 세계의 결정되어 있음과 유한성, 영혼과 육체의 상호관계, 그리고 죽음 뒤의 존재에 대해 다루고 있음), 그것은 정말 우리 주위의 현실모습들에 관한 무의미하고 증명할 수 없는 주장들이 아닌, 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해방이라는 원칙을 예시하고 있다.

중대한 문제인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비하하는 논법은 또한 ① 다른 동물들과 관계 있는 인간들의 지위와 ② 다른 동물들의 현실모습들 양쪽 모두에 관한 주장에 적용된다. 논의의 여지는 있겠지만, 모든 다른 동물들의 이야기에 대한 불교도들의 주장은 덕성의 함양이나 해방으로 향하지 않고, 그 대신에 그렇게 많은 다른 불교적인 통찰들이 거부하는 그러한 종류의 자아확인과 자만심의 경향을 반영하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실례를 제공한다.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적 이야기는 종종 ‘좋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따라서 개인적인 해방을 위해 보통 다른 동물들의 능력에 대해 요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의도적인 행위들의 영향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럴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린 코끼리를 암컷이 가장인 사회집단으로부터 옮겨 놓는다면, 그 영향은 어떤 것일까? 그 영향은 개를 길들여진 애완동물로 기르는 것과는 서로 다를까? 물고기를 바다에서 떼어내놓은 결과는 다른 종류의 사회적 복잡성을 가진 사회집단의 일원인 돌고래를 떼어내놓은 것과는 서로 다를까? 책임 있게 행동하기 위해 정보를 받고자 하는 욕구는 그의 행위들의 결과를 평가하도록 이끌며, 이는 차례로 어떤 인간의 행동에 의해 영향 받는 살아 있는 존재들의 본성과 복잡성에 관한 질문들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교도의 지위는 비교적 그것을 살아 있는 존재들의 다양한 우주 속에서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개체들에게 인간의 행동들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분별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추천하는 것과 거의 관계가 없다. 이 점에 관해 불교는 현대의 동물 공민권 운동이 기초가 되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서 다른 동물들의 실제 세계의 삶에 대한 현실 모습들을 이해하는 위임을 가진다는 면에서 현대의 동물 공민권 운동과는 아주 다르다.

다른 동물들에 대한 도구적 사용의 허용―코끼리의 경우

코끼리에 대한 도구적 사용의 불교적 전통에서의 허용에 관한 조사는 불교적 전통 내에서 수행된 동물 공민권 운동과의 몇몇 이러한 긴장들을 드러내보이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한 허용의 중대성은 처음에는 납득하기가 어려운데, 왜냐하면 코끼리의 포획은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한 코끼리의 이용을 불교적 전통에서 허용하는 것에 도전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코끼리들의 삶에 관한 두 가지 양상을 지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코끼리들은 그들 삶의 본질적인 부분들인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체계 속에서 느리면서도 풍부하게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매우 복잡한 개체들이다. 그들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서로 서로에 비해,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다른 종류의 동물들에 비해) 가진다. 그들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용량이 매우 큰 뇌와, ‘동물들이’ 오직 인간 종(種) 개개의 성원들에게만 일치하는 인간 중심적인 견해들에 의해 윤리적인 중대성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화화하여 묘사된 그것과는 아주 다른 놀랄 만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특색들은 단순하지도 않고 놀이나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에 의해 꾸며지지 않은 것도 아닌 삶을 만들어내는 데 협력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진실로 복잡한 개체들의 삶이다. 둘째로, 그러한 크고 힘있는 복잡한 생물들을 사로잡은 채로 유지하는 것은 그들을 ‘소유하는’ 인간의 편에서는 매우 많은 일을 필요로 한다. 왜 코끼리에 대한 도구적 이용의 허용이 보다 급진적인 동물 공민권 견해와, 나아가 논의의 여지는 있겠지만 보다 더 광범위한 견해에까지 반하는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로잡힘이 필연적으로 무엇을 불러일으키는지 숙고해 보라.

부유한 코끼리의 사회적인 덮개가 각 집단의 개체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엄청난 연결관계의 축소는 차치하더라도, 사로잡힘은 인간의 목적에 맞춰진 삶을 살아가는 코끼리들을 수반한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이익을 위해 코끼리들 자신의 이익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로잡힘이 코끼리 사회의 잠재적인 성원에서부터 인간이나 코끼리 사회 어느 한쪽에 부적당한 생물에 이르기까지 코끼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채드윅(Chadwick)은 한 사람에 의한 한 마리 코끼리의 소유가 어떻게 비사교적이고 심리적으로 부적응하게 만드는지를 주목했는데,112) 이것은 인간의 간섭이 어떻게 동물의 현실을 왜곡시키는가―그들의 이익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엄폐되는가를 보여준다. 코끼리의 정신적 복잡성을 가지고, 어린 야생 코끼리를 길들이는 동시대 타이 사람들에 대한 다음의 묘사를 고려해보라.

야생 코끼리를 나무에 묶은 뒤에 남자들은 막대기를 가지고―그것을 괴롭히는 동안 내내 전통적인 노래들을 부르면서―젊은이가 코끼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때리는 것을 그만두고서 어찔하고 기진하여 완전히 차분해진 채로 서 있을 때까지,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코끼리를 쿡쿡 찌르고 쑤시고 때리곤 하였다. 일단 그 동물이 반항하는 것을 멈추면, 남자들은 막대기보다는 오히려 손으로 그것을 어루만지기 시작하곤 했는데, 다소 재빠르게 그 동물은 그들의 지배를 수락했고 그들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코끼리는 목에 상처를 입거나 목 안에 소금이 비벼 넣어지며, 그리고 나서는 그 동물을 더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해 가시가 깊숙이 끼워진 등나무 줄기의 깃을 목 주위에 씌울 지도 모른다.113)

그 고통과 고문은 일단 지배가 확립되어도 멈추지 않는데, 왜냐하면 다음 설명이 아주 사실적으로 보여주듯이, 그 지배는 계속 진행되는 의도적인 고통의 가해에 의해 지속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코끼리를 다루는 전통적인 방법들 가운데 몇몇은 대단히 거칠다. 새로 잡힌, 제멋대로이거나 광포한 동물을 제지하기 위해 그것의 다리를 안쪽으로 뾰족한 대못이 박힌 쇠테 속에 꺽쇠로 조일지도 모른다. 그 동물이 그 장치를 심하게 잡아당기면 당길수록 뾰족한 못 끝이 더 깊이 맞물려 죈다.

발리아 콜레(valia kole)라고 불리는 긴 장대는 다루는 사람이 코끼리의 코와 엄니들에 닿는 것을 피하는 동안 그 거대한 동물의 감각적으로 예민한 발목과 손목관절을 쑤시기 위해 사용된다. 이러한 몇몇 몰이막대기들은 양끝이 무디며, 아래쪽 발 등 근처에 비어져 나온 작은 뼈들을 부러뜨리기 위해 밀어 넣어진다. 그 외 다른 것들은 실제로 투창들인데, 관통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 날 위에 손잡이가 있다.

인도의 코끼리 조련사들은 보통 금속을 입힌 무딘 끝을 가진 짧은 장대인 체랴 콜레(cherya kole)를 가지고 다니는데, 그것 또한 관절이나 올라탔을 때 머리꼭대기를 강타하기 위해 사용된다. 나는 네팔 국경 가까이에서 그 나라의 남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커다랗고 구부러진 쿠크리(kukri) 단도의 무딘 모서리로 코끼리의 머리 꼭대기를 철썩 때리는 코끼리 조련사 뒤에 탄 적이 몇 번 있다. 아직도 더 잔혹한 것은 내가 본, 코끼리의 머리 꼭대기에 상처를 찢고는 그 동물을 순하게 하기 위해 나이프의 날로 그것을 잡아당기던 수법이다. 한 네팔의 코끼리 조련사는 코끼리의 머리를 탕탕 때리기 위해 망치를 갖고 다녔다. 그 무기가 망치든 나이프든 혹은 체랴 콜레든 간에 그 거대한 동물은 맞을 때 커다란 신음소리를 내며 비틀거렸을 것이다.114)

따라서 코끼리의 포획은 적어도 두 가지 윤리적으로 중대한 문제들과 관련되는데, 그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또 다른 존재의 이익에 대한 의도적인 축소와, 똑같은 자기 본위적인(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인간 본위의) 이유들 때문에 고의로 상해(고통)를 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불교 자료들에 잘 나타난다. 예를 들면, 자타카에는 ① 코끼리들은 이익을 소유하고 있으며 도덕적인 차원들을 가지는 치명적이지 않은 상해를 당할 수 있고, ② 코끼리들은 인간에게 사로잡히는 것보다 자유로운 것을 더 좋아하며, ③ 코끼리들은 사로잡혀 있을 때 괴로워한다는 인식이 있다. 예를 들어, 조련사들로부터 도망친 한 코끼리에 대한 묘사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들은 코끼리를 기둥에 단단히 묶고는 몰이막대기를 손에 들고 그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조련사의 명령대로 하도록 만들어지는 동안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 코끼리는 기둥을 부수고 조련사를 날려버리고는 히말라야산으로 도망쳤다……(그)코끼리는 히말라야산에서 계속되는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았다. 한 줄기 바람으로도 그를 공포에 가득 차게 하고 그의 코를 앞뒤로 흔들면서 전속력으로 달아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치 길들여지기 위해 여전히 기둥에 묶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공포는 코끼리와 함께 있었다. 몸과 마음의 모든 행복이 지나가 버렸으며, 그는 계속되는 두려움 속에서 위 아래로 헤매고 다녔다.115)

그 외에도 사로잡힌 코끼리들에 대한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취급이 명백하게 인정되었다. 한 이야기 속에 이러한 묘사가 나오는데, “……몰이막대로 두들겨 맞은 불쌍하고 가엾은 코끼리처럼 철저하게 괴롭힘을 당하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울부짖는다.”116) 게다가 포획에 대한 다른 부정적인 결과들은 사로잡힌 코끼리들의 위험을 포함하여 죽음과117) 몇몇 코끼리들이 음식과 은신처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번성하는 데 실패하는 것을 야기하는, 야생 코끼리들과는 대조적인 것으로서 인식되었다.118) 자타카에서의 몇몇 구절들은 개개의 코끼리들의 이익이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무시되거나 심지어는 가리워졌다는 인식을 반영한다.119)

인간의 목적을 위해 코끼리의 이익이 무시된 또 다른 예는 붓다가 이전 생에 그의 아버지의 직업을 배우는 한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야기 속에 나타난다. 전투에서 코끼리가 두려워할 때, 붓다의 말들은 코끼리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데, 그리고 나서 그들은 싸워 이긴다. 여기서, 아마도 전투에서의 인간의 두려움과 유사한 그 동물의 감정은 오로지 인간의 목적들을 위해 인정되거나 무시되어진다.120) 사실상 코끼리들을 인간의 전투를 위한 도구로 받아들이는 이러한 것은 팔리 성전에서는 보통이다.121)

의도적인 상해의 문제

불교적인 전통은 어떤 행위의 선이나 악은 타당한 형식(그때 당시의 브라만교에 의해 강조되었듯이) 속에서 행동들을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고타마의 혁신적인 이해로부터 시작되었다. 곰브리치(Gombrich)가 지적했듯이, 고타마는 의식의 정확함보다는 오히려 의도를 문제시하면서 업의 개념을 윤리적이라 생각했다.122) 고타마의 통찰은 인간들의 보다 사소한 권익(본질적이지 않은 필요), 단순한 이득을 위해 다른 동물들의 보다 중요한 이익을 무시하는 인간의 선택에 도전하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라고 하는 동물 공민권 주장들과 관련이 있다.

다양한 동물 공민권 입장들은 현대의 소비자들이 다른 동물들에 대한 가장 많은 해로움과 관련되는 많은 생산품들에의 대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초점을 맞춘다. 공장방식 농장 경영의 불행을 조장하는 소비자의 선택은 불필요한 해로움을 증장시키는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것이 종종 논의된다. 더욱이 동물원은 교육이나 보존을 위해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다른 수단들이 이용 가능함),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장려하는 것이 죄 없는 생물들에게 불필요한 해를 의도적으로 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23)

마찬가지로 많은 동물 실험들이 본질적이지 않은 품목들(화장품 같은)을 테스트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그런 생산품들을 만들고 거래하는 사업을 장려하는 것은 비록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불필요한 해를 의도적으로 가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비록 그러한 행동들이 본질적인 인간의 필요를 증진시킬 것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에 의해 행해질지라도 동물 실험들에서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은 그 실험들의 개개의 대상들은 고타마가 꾸짖은 사냥꾼이나 푸주한들의 희생물 만큼이나 죄없다는 이유로 도전받을 수 있다.

이러한 실습들을 장려하고 지원하거나 또는 심지어 합법화하는 행동들은 의도적인 것들이다. 그것이 무지에 기초하고 있을 때조차도, 공장방식 농장 경영의 공정과 동물 실험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정보가 널리 이용 가능하다는 사실이 주어지면 그것은 여전히 비난할 만한 도덕적인 맹목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통찰은 다른 동물들의 도구적인 사용에 대한 불교도들의 허용에 도전하기 위해 그 전통 자체의 핵심 가치들 내부로부터 토대를 제공한다. 코끼리의 포획은 명백히 해로움과 관련되는 현저하게 의도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해로움들이 불교도들에 의해 인지되어졌으므로 왜 도구적인 사용이 고타마가 확실하게 가졌던 비범한 통찰력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비난받지 않았는가가 처음에는 당황스럽게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 해답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다른 동물들의 상대적인 가치에 대한 불교적인 견해에 있다.

도구적인 사용에 대한 허용이 팔리 성전에서는 너무 만연되어 있어서 단순히 가정된 ‘배경적’ 견해라고 불려져도 괜찮을 정도였는데, 바로 그 정도로 많은 교육받은 서구인들은 오늘날 어떤 다른 동물도 서구의 전통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들의 독점적인 소유(이성적인 영혼들, 언어, 문화, 도구를 만드는 능력 그리고 도덕성 같은)로 주장해 온 특색들의 어느 것도 도저히 가질 수 없었다고 무의식적으로 추정한다. 사실 팔리 성전에는 단순한 도구적인 사용의 허용 이상의 어떤 것이 때때로 나타난다.

고타마가 물고기를 잡아서 파는 어부들을 본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그는 승려들에게 “그러한 행위들의, 그러한 삶의 방식(다시 말해, 물고기를 죽이는 것)의 결과”, 어부들이 그 다음에 “코끼리 위에, 혹은 말 등에 타고 돌아다니거나…… 또는 아주 부유하게 사는지 묻는다.”124) 그는 분명히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는 것을 비난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도적인 행동들에 대해 부정적인 업의 결과들이 있음을 지적한다. 하긴 그의 비유가 사로잡힌 코끼리 위에 타고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결과들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것은 착한 행동들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진다.

“참으로 승려들이여, 도살된 생물들을 사악하게 흡족한 듯이 바라보는 자는…… 코끼리들 위에 타고 돌아다니지 못할 것이다…….”125) 코끼리들에 대한 도구적인 사용의 타당성에 관한 어떤 가정의 실제가 더 명확할 수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이야기가 때때로 인간들이 코끼리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용서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 전통이 그렇게 귀에 거슬리게 단언하는 도덕적 우주의 직물처럼 짜여진 구조의 일부분으로 보여졌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끼리에게 해가 되는 이러한 도구적인 사용의 허용은 코끼리가 중요하게 간주되었음을 명백히 하는 불교 경전들 속의 많은 구절에 의해 부인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초월적 존재들인 것으로 또는 적어도 붓다가 비유될 수 있었던 그리고 인간의 왕에게 적합한 소유물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이미지들인 것으로 이해되는 나가스(na?as)라는 이름으로 존중되었다. 게다가 그것은 일곱 가지 보배들 가운데 하나였다.126) 그러나 명백하게 코끼리들은 그들 개개의 자아나 그들 삶의 복잡성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산으로서, 그리하여 가치 있는 소유물로서 평가되었다.

동물 공민권 견지에서 중요한 것은 ‘소중히 여기는’ 코끼리에 대한 불교도들의 특이한 방식이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여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도의 윤리적인 감각이 때로는 다른 동물들을 위해 쓰여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코끼리 개개의 이익을 종속시킴에 의해 입증된 것과 같이 동물들의 도구적인 사용일 경우에는 윤리적인 무감각으로 조건 지워졌다. 동물 공민권의 어떤 견해에서도 해결점을 형성하는 것은 정확히 그러한 다른 동물들의 이익의 무시라는 윤리적인 차원들이다.

4. 결론

그 전통이 보다 더 친절한 첫번째 면과, 보다 더 가혹하고 계급위계에 기초한 두번째 면 모두를 가진다고 한다면, 그리고 동물 공민권 문제가 현대적인 담론 속에서 표현된다고 가정하면, 그 전통이 활동가들을 동시대의 동물 공민권 운동으로 내모는 목적과 개념들과의 어떤 긴장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 아마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장(章)에서는 두번째 면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는데, 이것이 자비, 윤리관에 있어서 의도의 중요성, 그리고 생명 그 자체의 본래적 가치에 관한 그 전통의 첫번째 면과, 관계 있는 핵심 통찰들이 현대의 동물 공민권 운동과 관련되는 통찰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적인 전통은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 윤리적인 인간 중심주의에의 경향에 의해 그 외의 다른 보다 중요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전통들에서 지배적이었던 관심에 대한 예로부터의 본질을 확고히 한다. 비록 모든 다른 동물들의 ‘단순하고’ 제한된 능력에 관한 그 전통의 주장들이 몇몇 다른 동물들의 유일하면서도 인간의 것이 아닌 특색들에 관해 특별히 지각력 있지는 않을지라도, 불교가 다른 동물들을 인간의 간섭 없이 삶의 특권 자격이 있는 실제 세계의 존재들로서 존중하기 위해 제공하는 통찰과 접근법들은, 정말로 그 전통과 다른 동물들에 관하여 행해진 몇몇 낙관적인 발언들을 정당화한다.

예를 들면, 그 전통은 제한된 공민권 또는 다른 유인원들(침팬지, 고릴라, 그리고 오랑우탄)과, 기능적으로 동등한 것을 추구하는 비교적 보수적인 ‘대 원숭이 계획(Great Ape Project)’에서부터127) 커다란 뇌를 가진 사회적인 동물들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생물들에 대한 피할 수 있는 해악들을 비난하는 야심 있는 창조 신학에 이르기까지 동물 옹호자론들의 급진적인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다.128)

불교적 전통은 또한 인간들의 삶의 양상과는 서로 다르고 독립적이며 심지어는 경쟁 관계에 있는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몇몇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존중할 여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또한 환경 윤리학에 기여하고, 다른 동물들의 삶을 위한 환경적 자각의 필연적인 결과들을 증가시킨 이익에 기여하는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다른 동물들에 관한 어떤 부정적인 가정들을 그 전통에서 허용한 것과, 그들 삶의 현실태들에 대한 그 전통의 주장들에서 결과적으로 야기된 결점들에 관한 중요한 경고들이 질서정연하게 있다.

그러나 요약하면 불교적 전통은 인간의 의도적인 행동에 대한 도덕적 작인(作因)의 책임에 관한 심오한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동물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대안을 선택하는 인간의 능력에 적절한 것이다. 불교 전통에 철저하게 널리 퍼진 자비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다른 동물들과 관련된 많은 현대의 동물실습의 결함과 부도덕성에 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

폴 왈도 / 박서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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