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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바닷다, 그는 정말 악인이었는가 / 원필성
[ 기획 ] 이단 불교도들의 또 다른 초상
[10호] 2002년 03월 10일 (일) 원필성 위덕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데바닷타(Devadatta)라는 이름은 범어의 음역이며, 한역(漢譯)으로는 제바달다(提婆達多) 제바달도(提婆達兜) 지바달도(地婆達兜) 제바달도(諦婆達兜) 등등이 있고, 또 간략히 조달(調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이름 전체는 천신(혹은 하늘)이 내려 주다라는 의미가 있어 한역 불교경전에서는 이를 천수(天授)라고도 번역하고 있다.

데바닷타와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실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데바닷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며, 같은 석가(s첺kya) 족의 왕자이다. 데바닷타의 할아버지는 바로 이 종족의 역대 왕들 가운데 활 잘 쏘기로 유명한 사자협왕(師子頰王, Sim?ahanu)이다. 사자협왕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순서는 정반왕(淨飯王), 백반왕(白飯王), 곡반왕(斛飯王), 감로반왕(甘露飯王)이며, 데바닷타는 바로 감로반왕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은 바로 데바닷타의 큰 아버지가 되며, 부처님 또한 데바닷타의 사촌형이 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데바닷타의 친형제로서는 출가 후 20여 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로써 지낸 아난(阿難)이 있다.1)

불교사에서 데바닷타만큼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고 제자이며, 이와 동시에 부처님을 배반하고 승단을 분열시키려 하였던 불교사 초유의 악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 혹은 전설의 내용과는 달리 간혹 몇몇 경전들이 그를 위해 해명하고 있고, 심지어 그에 대해 숭고한 찬탄을 내놓기도 한다.

아래의 글은 데바닷타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 혹은 전설에 대하여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렸다는 판단을 내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각종 문헌 속에 나타나는 그에 대한 상반된 내용들을 소개하고 설명을 첨가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데바닷타의 면모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다른 시대의 불교경전에 서로 다른 각도의 견해와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현대인들의 불교 신앙 혹은 연구에 더욱 넓은 시야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전통 불교 사료 중에 보이는 데바닷타의 악행

이미 앞에서 잠시 거론한 바와 같이 현존하는 불교문헌 속의 데바닷타에 대한 평가 혹은 전설은 일치되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전통 불교 사료(원시불교 경전 내지 대부분의 부파불교 율전)에서는 대부분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2) 중요한 테마를 중심으로 서술하면 아래와 같다.

1) 신통력의 남용
부처님은 성불 이후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돌아갔었는데 그때 부처님의 품행에 감화받고, 게다가 정반왕 역시 백성들이 자기 아들을 따라 출가하기를 장려함으로써 당시 그곳은 한바탕 출가 수행의 열기가 일어났었다. 석가 왕족 가운데 아난, 아나율(阿那律), 내지 데바닷타 등이 바로 이 열풍 때 출가하여 승려가 된 자들이다.

출가 후 처음 12년 동안 데바닷타는 매우 열심히 수행하였다 한다. 그는 경을 읽고 암송하며,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으며 좌선하는 데 전심전력으로 몰두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표면상으로는 대체적으로 받아들였는데, 특히 선정의 수행과 두타행(頭陀行)3)의 실천 내지 가르침을 널리 수학하는 방면에 그는 두드러지는 성적을 보였다.4)

그러나 그는 12년이라는 힘든 수행에도 불구하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지 못하였으며,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탐욕의 씨앗이 잠복하고 있었다. 데바닷타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오염된 씨앗이 악행의 도화선이 된 것은 그의 신통력을 향한 욕구였다. 당시 몇몇의 비구들은 이미 하늘을 나르거나(神足飛行), 자유자재로 천상과 인간계를 왕래하는 신통을 닦았다. 데바닷타는 동문 형제들의 이러한 초능력을 보았을 때 자신도 그것을 가지고 싶었고, 그래서 신통의 방법을 배우기를 부처님에게 간절히 애걸하였다.

부처님은 데바닷타가 신통력을 가지려고 하는 동기가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탐욕에부터 온 것이지 수행의 참된 목표인 해탈 경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거절하였다. 그는 부처님에게 거절당한 후 방향을 바꾸어 신통제일인 목건련과 지혜제일로 불리는 사리불 등 많은 동문들에게 가르침을 구하였으나, 그들의 대답은 역시 부처님과 똑같았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 후, 그는 마지막으로 친동생인 아난을 생각하게 되었고, 아난은 깊은 생각 없이 데바닷타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얻어 들은 신통력의 수행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데바닷타는 아난에게서 신통 수행법을 배우고 난 후 산야를 돌아다니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수행하여, 마침내 몇 명의 동문과 같이 자유자재로 변화하고 비행하며 천상과 인간계를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5)

신통 행위는 원래 불교문헌 속에서 상당히 자주 보이는 것으로, 사실상 《아함경》 속에는 부처님 역시 여러 가지 신비한 능력을 보여 중생을 교화한 일은 자주 보이는 것이어서 특별한 일은 아니다.6) 그것은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속을 초월한 특수능력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적절하게 수행하면 신통을 가지게 되었다. 불법 속에서 신통이 비교적 중요하게 혹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대체적으로 6가지로 귀결된다. 즉 신여의통(身如意通)·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타심통(他心通)·숙명통(宿命通)·누진통(漏盡通) 등으로 불리는 육통(六通)7)이다.

그러나 비록 신통이 원시불교교단 중에서 자주 보였던 현상이고, 또 몇몇 불교 수행자들의 종교생활 가운데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신통을 응용 혹은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신통은 만능이 아니며, 신통은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불교도들이 신통을 이용하여 세속의 이익을 취하게 되면 특히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8)

《파승사》(권13) 등에 의하면 데바닷타의 승단분열 사건의 전체 과정 중에서 신통은 그를 점점 사악한 길로 빠지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즉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의 신분에 대하여 우월감을 강하게 가졌던 데바닷타는 자기와 모든 면에서 비슷한 환경을 가진 부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를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신통력을 가진 후 그의 자신감은 더욱 팽창하게 되었고, 권력욕 역시 그에 따라서 더욱 커졌다. 그는 부처님이 제자들로부터 받는 폭 넓은 지지에 대하여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부처님이 널리 존경과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신통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신통을 얻은 그 역시 부처님과 같이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공양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난 후 그는 점점 신통을 이용하여 교단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였고,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실천에 옮긴 것은 신통을 이용하여 아사세(阿?世, Aja?as첺tru) 태자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아사세는 마갈타국의 국왕인 빈비사라(頻婆娑羅, Bimbisa?a) 왕의 태자이다. 그의 부왕인 빈비사라는 경건하고 성실한 부처님의 신도였으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 등 여러 가지 환경적 원인에 의해 부처님을 그다지 신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천성적으로 권력욕이 매우 강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데바닷타는 아사세의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가 만약 군중들의 지지를 얻고자 한다면 정치세력과의 결합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사세 태자와 결탁하였다.

아사세의 신임과 지지를 얻기 위해서 그가 연출한 신통력은 당연히 할 수 있는 바의 모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십송률》(권36)에 의하면 그는 아사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온갖 모습으로 자신을 변신해 보였고, 특히 어린아이로 변하여 아사세의 무릎 위에 앉아 같이 장난치며 놀면서 심지어 아사세가 그의 입 속으로 뱉은 침을 삼켜 버리기도 하였다 한다.

바로 이와 같이 하였기에 데바닷타는 아사세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이런 정도의 신통력이라면 이미 부처님을 뛰어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케 하였다. 그리하여 아사세는 정말로 그의 열렬한 보호 지지자가 되었으며, 그의 승단 분열 행위 역시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점차 확대 발전하게 되었다.9)

2) 승단 분열의 책동
데바닷타 사건이 원시불교교단 내부에서 큰 사건이 되었던 원인은 그의 승단 분열 행동이 하마터면 부처님이 살아 있을 때 교단을 둘로 분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이 행동이 목표를 달성하였다면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불교 발전의 모습은 지금 우리들이 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미래 통치자인 아사세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된 데바닷타가 가장 먼저 질서를 파괴하고 인륜에 벗어나는 행동을 한 것은 바로 부처님으로부터 교단의 영도권을 계승하여 통괄하는 것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그가 승단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였을 때 승단 쪽으로 한 무리의 대중들(최소 500명 이상)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 가운데에 네 사람이 그를 도와주는 핵심 인물이었는데, 이 네 사람은 구가리(俱伽梨), 건타표(乾陀驃), 가유라데사(迦留羅提舍)와 삼문달다(三聞達多)이다. 그들과 데바닷타는 모두가 석가족 출신의 비구였다. 그들의 부추김이 있은 다음 승단에서는 적지 않은 출가인들이 잇달아 부처님으로부터 빠져 나와 데바닷타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끝내 부처님이 살아 있을 때 승단은 잠시나마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10)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였을 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그 중의 옳고 그릇됨을 분석하여 주었으며, 사리불과 목건련을 파견하여 부처님의 의견을 설명하였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당시 승단 구성원 가운데 부처님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는 제자였다. 이 같은 제자가 자기 진영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데바닷타로서는 확실히 자기의 대중들에 사기를 최고로 북돋울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데바닷타는 별 의심 없이 뛸듯이 기뻐하며 그들 두 사람이 들어온 것을 환영하였다.

데바닷타 진영으로 들어간 사리불과 목건련은 데바닷타가 등이 아파 쉬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목건련은 신통제일의 장점을 발휘하여 여러 가지 신비로운 변화로써 대중들의 주의를 끌었고, 사리불 또한 기회를 틈타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잘 설명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둘의 노력에 의해 500명의 비구가 그들을 따라서 원래의 승단으로 돌아갔고, 동시에 데바닷타 진영의 기세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11)

3) 부처님과 다른 계율의 주장: 오법(五法)
데바닷타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와 새 교단을 세우려고 하였을 때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교법과는 다른 새로운 주장을 들고 나왔다. 율전에 의하면 그가 내놓은 새로운 주장이란 고행의 성향을 가진 것으로 5가지를 평생 동안 수지하며 수행하는 것인바, 그것을 오법이라 부른다. 이 오법은 각종 율전에 기록된 내용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모두 고행이라는 기본정신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들 가운데 《오분율》과 《파승사》에 기재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분율》 권25(T22, p.164a∼b):

    ①소금을 먹지 않는다.
    ②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③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다.
    ④걸식한다.
    ⑤봄∼여름, 8개월은 태양 아래에 앉아 있고, 겨울 4개월은 초가집에서 머문다.

《파승사》 권10(T24, p.149b):

    ①버터를 먹지 않는다.
    ②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다.
    ③소금을 먹지 않는다.
    ④옷을 받을 때 옷감 그대로 꿰매어 입는다
    ⑤촌락의 집에서 살아야지, 아란야12)에서 살지 않는다 .


위 조항 가운데 《파승사》의 ‘⑤촌락에서 살고 아란야에서 살지 않는다’는 항목은 다른 율전에는 이와 반대로 아란야에서 산다(《파승사》권11, 《선견율비바사》 권13)라고 적고 있어 비교적 이상한 부분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들 조항들이 고행에 대한 강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의·식·주 방면에서 출가인들이 최대한 어려움을 참고 욕망을 억제하기를 요구하며, 평생 이러한 수행 기풍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파승사》(권10)에서는 이들 규정에 대하여 이유를 들고 있는데, 대략 아래와 같다.

①왜 버터를 먹지 않는가? 왜냐하면 소젖을 송아지에게 먹이기 위해서이다.
②왜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가? 왜냐하면 차마 중생들이 생명을 없애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③왜 소금을 먹지 않는가? 왜냐하면 소금 속에 먼지가 많기 때문이다.
④왜 옷을 받을 때 옷감 그대로 꿰매어 입는가? 왜냐하면 사문 고타마는 옷을 받을 때 옷감을 찢는다(즉 얻은 옷감을 찢은 다음 다시 꿰매어 승복으로 만든다). 이 같은 짓은 옷 만드는 장인의 노고를 훼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원래 옷감 모양대로 꿰매야 한다.
⑤왜 촌락의 집에서 살고, 아란야에서 살지 않는가? 왜냐하면 촌락의 집은 시주(施主)가 보시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곳에서 살지 않는다면 시주의 보시를 버리는 것과 같다.

데바닷타는 또 위와 같은 고행 생활방식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에 관하여 몇 가지 견해를 말하였는데, 각종 율전의 기록들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종합해 보면 아래와 같다.

①이 오법은 출가인들을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을 알게 하고, 욕망을 억제하며, 두타행과 멸루(滅漏) 등 정진에 뛰어난 법문을 훈련시키며,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기쁘게 믿고 따른다. ②출가인이 이 오법을 받아 들이게 되면 비교적 빨리 열반성과(涅槃聖果)를 증득할 수 있다. ③이 오법과 부처님이 칭찬하고 알리는 두타행과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얻는 대로 만족하는, 욕락을 떠난 자의 뛰어난 법문이다. ④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고, 걸식하고, 봄 여름 8개월은 길바닥에 앉아 지내며, 겨울에는 초가집에서 머무는 것은 선법(善法)을 증장시킨다. ⑤이 오법과 마갈타·앙가(鴦伽, An.ga? 두 나라 사람들이 기꺼이 믿고 있는 고행은 그 성질이 일치한다. 현재 많은 수행자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데바닷타는 수행자가 만약 빨리 성과를 보고 싶다면 생활상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은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제안한 오법은 물론 당시 고행을 존중하던 기류에 상당히 영합할 수 있었거니와, 그리고 또 군중의 입맛을 당기는 효과도 얻었다.13)

데바닷타는 수행 방면에서 바로 이 오법(五法)을 평생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부처님의 팔정도가 그가 주장하는 오법보다 못하다고 대중들을 책동하였다.14)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것들을 살펴보면 데바닷타의 오법은 단지 고행 경향을 지닌 수행방식일 뿐이지, 어느 한 종교의 교의체계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상사의 각도에서 볼 때 그것의 의의는 크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의 종교 혹은 종파의 사상체계에서 비추어 본다면 이런 문제는 단지 실천상의 태도 혹은 기술방면의 문제일 뿐이지, 교의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부처님은 비록 고행을 유일한 수행법으로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가 가르쳤던 많은 법문 가운데에서 고행 방법 역시 한 자리를 남겨두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고행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하가섭이 부처님께 건의하여 실천한 12두타행이 오법과 비슷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해탈도론》(권2)의 해석에 따르면, 두타행이 불교 수행자에 대하여 확실히 탐욕을 끊고, 얻는 대로 만족하는, 의심을 없애주는, 수행에 있어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는 등등을 배양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즉 12두타행 역시 출가인이 의·식·주 세 방면에서 고통을 참는 수행에 중심을 두고 있어 이것의 수행 방향과 이념이 데바닷타 오법과 상당히 비슷하다. 비교적 뚜렷이 나타나는 다른 점은 오법 가운데의 채식주의(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는 것)가 두타행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밖에 오법 중의 소금을 먹지 않는다, 버터를 먹지 않는다 등의 규정은 두타행보다 더욱 엄격하다. 물론 두타행 중의 총간주(塚間住 ; 무덤 옆에서 지내는 것) 역시 오법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둘 사이에 정도가 서로 다른 점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경향은 고행의 가치에 대하여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15)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데바닷타의 오법에 반대하였는가?

오법의 기본 특질을 보면, 엄격한 고행 규정의 주요한 작용은 역시 탐욕의 절제이다. 그러나 단지 단순한 욕망의 절제는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리고 만약 보고 아는 것이 정확하지 못한데 무턱대고 하는 고행이 정말로 철저히 탐욕을 절제할 수 있는지도 역시 문제이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부처님은 누구보다도 절실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수행방법이 가지고 오는 병폐를 잘 알고 있었다. 즉 부처님은 네란자라(Neran?ar, 尼連禪河) 근처의 고행림에서 6년 고행을 수행한 적이 있었고, 그는 하루에 오직 한 알의 보리씨앗 혹은 쌀 혹은 마(麻) 한 톨만을 먹었다 한다. 부처님은 또 자기 스스로 고행을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고행림의 다른 외도 수행자들에 대하여 자세히 관찰하였다. 이들 고행자들은 비록 갖가지 기괴한 고행을 실천하였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여전히 탐욕이 있었고, 어떤 이들은 비록 탐욕은 없었지만 여전히 깊은 아집이 있었다. 또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보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비록 정말 열심히 고행을 실천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구경열반을 얻을 수가 없었다.

다른 고행자들에 대한 관찰에다 자신의 6년 고행이 합쳐져서, 부처님은 쓸데없이 덮어놓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해탈의 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호히 고행을 버리고 공양을 받아들였으며, 얼마 후 곧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하였다.

부처님이 데바닷타의 오법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고행으로서 원만하지 못하며, 중도의 원칙에 벗어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16) 그리고 일방적인 고행(혹은 낙행)이 중생들을 교화할 때 모든 중생들의 근기에 잘 맞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신축성 또한 없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고행 방식이 비록 상당히 하기 힘들다 할지라도 반드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고행에 대한 경직된 규정 혹은 지나친 과장 역시 일종의 편견이며, 불법의 중도정신에 부합되지 못한다.17)

비록 위와 같다 하더라도 부처님 당시에 불교도들이 모두가 불법의 정수와 부처님의 중도정신을 잘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오법의 잘못을 꾸짖었을 때, 부처님이 데바닷타의 재능을 질투하여 반대의 태도를 가진다고 오해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았다.18) 그래서 당시 아사세의 보호와 지지로 인하여 데바닷타의 기세는 점점 높아 갔고,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많은 젊은 비구들이 계속하여 데바닷타의 고행 구호에 끌리어 그의 진영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4) 그 밖의 악행
데바닷타가 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불교 경전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 외에도 다양한 악행을 소개하고 있다. 악행은 크게 금생에 저지른 것과 과거세에 저지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데바닷타가 금생에 저지른 악행으로는 승단을 분열시킨 사건 외에, 아사세를 책동하여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탄하게 한 일을 들 수 있다. 아사세는 아버지인 빈비사라 왕을 가두고 끝내 부왕을 자살하여 죽게 하였다.19) 궁궐에서 벌어진 이 인륜을 배반하는 참극의 살인범은 비록 아사세였지만, 그러나 데바닷타 역시 범죄를 교사하였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금생에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던 사건으로서, 불교 경전 속에 있는 몇 가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20)

① 포악한 코끼리를 이용하여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다. 아사세 왕은 흉폭하고 참을성이 없는 포악한 큰 코끼리 한 마리를 길렀는데,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살해하기 위하여 아사세에게 허락을 받고서, 코끼리 훈련사에게 부처님이 공양받으러 성에 들어 올 때 포악한 코끼리를 풀어 부처님을 모살하라고 명령하였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왕사성으로 들어오자 포악한 코끼리는 바로 부처님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왔다. 이때 다른 제자들은 놀라서 사방으로 도망갔으나, 포악한 코끼리는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인해 사람을 해치지 않는 훈련된 코끼리로 변하여 온순하게 부처님의 뒤를 따랐으며, 부처님 역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이 위험의 순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② 건장한 청년을 돈으로 매수하여 부처님을 살해하려 하였다. 포악한 코끼리를 이용하여 부처님을 살해하려던 것이 실패로 돌아간 후, 데바닷타는 또 많은 돈을 주고 건장한 청년을 사서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계획하였다. 이 건장한 청년이 칼을 들고 부처님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한가로이 걷고 있던 부처님은 자비의 힘으로 청년을 불렀다. 원래 자객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 청년은 부처님의 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버리고 부처님을 향해 예의를 다하였으며, 진실로 참회하여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불교도가 되었다.

③ 돌을 굴러 떨어뜨려 부처님을 살해하려 하였다. 이 일은 왕사성 밖의 기사굴산(耆?챍山)에 있는 흠파라야차(欽婆羅夜叉) 석굴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데바닷타는 4명의 자객을 고용하여 석굴 근처를 지키게 하고, 부처님이 석굴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일 때 바로 준비하였던 아주 커다란 바위를 굴러 떨어뜨려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계획하였다.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질 때 돌 조각이 부처님의 다리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피를 흘렸다. 이것이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하였던 과정 가운데 유일하게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사건이었다.

④ 손톱 속에 독을 묻혀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다. 데바닷타는 여러 번에 거쳐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으나 모두가 뜻대로 되지 않자 매우 괴로웠다. 이때 석가족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참회하기를 그에게 권유하자, 데바닷타는 영감이 떠올라 자기의 열 개 손톱 속에 강한 독을 숨기고서 부처님을 배알하였다. 그의 계획은 만약 용서받을 수 있다면 곧바로 카필라 성으로 돌아가서 왕이 되는 것이고, 만약 용서받지 못한다면 석가족 사람들이 그를 옹호하여 왕이 되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에는 다시 나쁜 짓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처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용서를 구걸하였으나, 부처님은 그의 나쁜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데바닷타는 부처님이 침묵으로써 그의 용서를 거절하는 것을 보자 마음 속에서 분노가 끓어 올라 독을 바른 손톱으로 부처님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처님을 해치려는 것이 성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손가락을 스쳐 지나가 몸에 독이 퍼지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데바닷타는 이 때문에 목숨을 잃고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위에서 열거한 것은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던 행동들이다. 이 밖에도 그는 몇 가지 부도덕한 못된 짓이 있는데, 간단히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① 연화색(蓮華色) 비구니를 살해하였다. 승단 분열 사건이 끝날 때쯤 아사세 왕은 부처님의 감화를 받고 부처님에게 귀의하게 되자 데바닷타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데바닷타가 찾아왔을 때 수위는 그를 못 들어오게 하였고, 아사세 왕이 이후로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전하였다. 이 일로 인해 데바닷타는 마음이 매우 울적해 있을 때 마침 연화색 비구니가 궁중에서 탁발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수치심으로 화가 나있던 데바닷타는 아사세가 그를 멀리하는 것이 연화색의 이간질 때문이라고 의심하여 앞으로 다가가 그를 질책하고, 또 다짜고짜 때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연화색은 이로 인해 세상을 달리하였다고 한다.

② 법시(法施) 비구니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 역시 아사세 왕이 데바닷타를 멀리하기 시작하였을 때 발생하였다. 어느 날 데바닷타가 왕사성에서 나올 때 법시 비구니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법시 비구니는 그를 보자 다시는 승단 분열 내지 부처님을 해치려는 일을 하지 말 것을 권유하면서 하루 빨리 참회하지 않으면 응보가 다가왔을 때 참회하여 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등등의 말을 하였다. 데바닷타는 이런 말을 듣고 나서 법시 비구니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때려 죽게 만들었다.

③ 야소다라(Yas쳍dhara? 耶輸陀羅)를 아내로 삼으려 하였다. 데바닷타는 여러 번에 거쳐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던 계획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즉시 카필라 성으로 돌아가 부처님의 세속 때 부인 야소다라를 자기 부인으로 삼고, 또 고국의 새로운 왕이 되고자 하였다고 전한다. 《유부비나야》(권18)에 의하면 부처님은 출가 전에 야소다라, 고피카(Gopika, 瞿比迦)와 미가자(Migaja, 密伽?) 등 모두 3명의 부인을 두었다고 한다. 데바닷타가 궁궐로 들어가 야소다라에게 구혼을 하려고 하였을 때 먼저 고피카를 만났다. 야소다라와 고피카 두 사람은 모두 힘이 무척 세었기 때문에 데바닷타는 먼저 고피카에게 밀리어 궁궐에 있던 연못 속으로 빠져 버렸고, 얼마 후 그는 또 야소다라에게 두 손을 삐어 버렸다. 결국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채 궁궐을 빠져 나갔다.

다음은 과거세의 악행이다. 이 악행에 대한 묘사는 통상 데바닷타가 나쁜 짓을 하였고,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묻자, 부처님은 단지 오늘의 인연뿐만 아니라 과거세에도 역시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말한 다음 과거세에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고 승단을 분열시킨 이야기를 하였다는 형식을 취한다. 이와 같은 본생이야기는 《파승사》 중에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대략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우언(寓言) 혹은 신화와 같다. 그러므로 그곳에 기록된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믿게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3. 데바닷타에 대한 다른 평가

현존하는 불교문헌 중에는 데바닷타의 본생 이야기도 있고, 금생의 언행에 관해서도 적고 있지만, 전통 경전 혹은 율장에 기록된 일반적인 공통 특징은 데바닷타의 악행에 대하여 많이 적고 있는 반면, 그의 선행 혹은 부처님 승단 쪽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아주 적게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들 기록들이 데바닷타의 금생의 악행의 원인을 인과응보의 방식으로 묘사할 때 가장 많이 보이는 형식은, 먼저 그의 과거세 악행을 서술하고, 그런 다음 과거세에도 그는 역시 악한 짓을 하였고 부처님을 해치려 하였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이와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서술된 기록도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후세에 나타난 대승경전뿐만 아니라, 원시 혹은 부파불교의 문헌들 가운데에서도 주류 승단의 소리와는 약간 다른 소리를 가끔씩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비치는 내용들은 부처님 열반 후 인도불교계에 확실히 데바닷타의 명예회복을 위한 한 줄기 물밑 흐름이 어렴풋이나마 존재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다음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전통사료 가운데 전통적인 목소리와는 다른 사례들이다.

1) 전통사료 속의 다른 목소리
먼저, 《사분율》에 기재된 몇몇 이야기들은 데바닷타가 확실히 일반 제자들이 얻기 어려운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21)

① 사리불의 찬탄:데바닷타가 승단을 분열시키고 부처님을 해하려는 행동을 하기 시작할 때, 부처님은 사리불을 파견하여 데바닷타의 행위들이 삼보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군중들에게 설명하고, 데바닷타의 악행을 밝히려고 하였다. 이때 사리불은 매우 난처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줄곧 데바닷타는 훌륭한 집안에서 출가하였고, 총명하고, 큰 신통력을 가졌으며, 용모가 단정하다고 찬탄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데바닷타의 사람됨에 대해서 사리불은 줄곧 찬탄하고 찬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가 신도들에게로 나아가 데바닷타의 여법하지 못한 악행을 발표한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다른 불순한 동기가 있지 않나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당히 당황하였다 한다.

② 투란난타(偸蘭難陀)의 찬미:사위성의 어느 거사(居士)가 사리불과 목건련을 초대하여 집에서 식사 공양 받기를 청하였는데, 이 모습이 투란난타 비구니에게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거사를 향해 당신이 초대한 이 두 사람은 비열한 사람들이다. 만약 나의 기준에 의거한다면 데바닷타 내지 그의 4명의 동반자와 같은 사람이어야 비로소 공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용(龍) 중에서 가장 뛰어난 용이라고 말하였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데바닷타가 확실히 세속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몇 가지 뛰어난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리불의 찬탄에서 데바닷타가 출신과 재능 그리고 용모 면에서 모두 찬탄할 가치가 있음을 엿볼 수 있고, 투란난타의 말에서는 또 데바닷타가 몇몇 사람들 마음 속에서 범부와는 다른 뛰어난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파승사》에서는 몇몇 신도들이 데바닷타를 반격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한 의도가 신도들에게 알려진 후 몇몇의 재가신도들은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힐 수 없어 데바닷타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의견들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바로 데바닷타의 진영으로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데바닷타는 철저히 방어하거나 숨지 않을 뿐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숲속으로 가서 조용히 참선을 하였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를 살해하려 하였던 사람들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였고, 이로부터 데바닷타는 큰 위덕(威德)을 가졌다고 생각이 들자, 각자 흩어져 돌아갔으며, 원래 살인하려고 하였던 의도를 없애버렸다.22)

위의 이야기는 데바닷타와 부처님 두 사람이 각자 거느리던 군중들은 서로 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대립하였으며, 몇몇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데바닷타가 큰 스승의 도량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대승불교 경전 속의 데바닷타
위에서 언급한 율전들이 데바닷타를 암시적으로 옹호하려는 움직임으로 본다면, 기원 전후에 출현하기 시작한 대승경전 가운데, 특히 데바닷타와 관련이 있는 몇몇 경전들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 옹호하고 있다.

먼저 소개하려 하는 것은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계 지역에 전해진 《미란타왕문경》이다. 경 속에서는 미란타 왕과 나선(那先) 비구 사이의 몇몇 가지 문답을 통해 당시 불교계에서 관심을 가졌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경전과 비록 북방 한역의 《나선비구경》과는 동본이역이지만, 그러나 한역본의 분량이 남방 것보다 훨씬 적으며, 여기에서 소개하려 하는 데바닷타의 문제에 대하여 한역본에서는 단 한글자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서 데바닷타에 대하여 거론되어진 몇몇 견해들은 남방불교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란타왕문경》 제5품에서는 미란타 왕이 알고 있는 데바닷타와 관계 있는 몇 가지 견해를 나선 비구에게 제기하고 있다. 즉, 데바닷타와 부처님은 과거세 때 자주 같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 많은 생사윤회 속에서 데바닷타의 명성과 지위가 부처님보다 높았을 때도 있었고, 혹은 두 사람이 비슷하였을 때도 있었다 한다. 예를 들면, 어떤 때는 데바닷타가 인간이었고, 부처님은 그때 코끼리·사슴·원숭이·돼지 등이었으며, 어떤 때는 부처님이 데바닷타의 아들이었으며, 또 데바닷타가 과거세에 왕이었을 때, 교량과 집들을 지어 사문이나 가난한 자들에게 보시하였기 때문에 대대손손 복덕을 받았다는 등등의 이야기들이다.

초기 불교경전 가운데 데바닷타의 전생은 항상 극악무도한 악인이었지만, 《미란타왕문경》 속에서는 이 같은 가치판단을 뒤집어서 과거세에 부처님보다 뛰어났으며, 많은 선행을 하였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본생담 혹은 인과응보 이야기로써 어떤 사람의 선악 형상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은 초기불교 경율의 방식과 같다. 그러나 크게 다른 것은 원시불교 경율이 부처님을 선과 존경의 대상으로 삼은 가치판단 공식이라면, 이 경에서는 데바닷타 역시 부처님보다 더 존귀한 적이 있었다는 새로운 관점이 이미 출현하고 있다.23)

다음으로 중국 후한(後漢) 때 전래된 한역경전 《흥기행경》은 과거세 에 부처님이 데바닷타를 해치려 하였던 인연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즉,《흥기행경》의 일곱번째 이야기인 《지바달도척석연경(地婆達兜擲石綠經)》에는 데바닷타가 왜 돌을 밀어 부처님의 발가락을 다치게 하였는지 하는 인과의 유래에 대해서 적고 있다. 경에 따르면 과거세 때 왕사성에 수단(須檀)이라는 장자(長者)가 있었는데, 재산이 아주 많았으며, 그에게는 장남 수마제(須摩提)와 둘째 수야사(須耶舍)라는 서로 어머니가 다른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수단의 임종 때 수마제가 부모의 재산을 혼자 다 차지하기 위하여 동생인 수야사를 살해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래서 그는 동생을 기사굴산으로 유인하여 산 위의 위험한 벼랑에서 그를 밀쳐 죽이고서 재산을 독차지하였다.

이 경에서는 수마제가 전생의 부처님이었고, 당시의 수야사가 오늘의 데바닷타의 전생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 악업 인연으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져 몇천 년 동안 고통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악업의 잔재가 여전히 조금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가 금생에 이미 성불하였다 하더라도 이 과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금생의 부처님이 데바닷타에 의해 발가락을 다치는 결과를 받는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흥기행경》을 《십연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에는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 외에 부처님이 과거세 때 지었던 10가지 악연을 기록하여, 늘 보아온 본생경전 종류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부처님이 항상 선한 업을 지었다는 줄거리와는 완전히 반대의 내용을 적고 있다.24)

그리고 이 밖에 《대방광선교방편경》(권4)에서도 부처님이 과거세에 보살도를 닦을 때, 데바닷타가 항상 그와 같이 있었다 한다. 이때 데바닷타가 맡았던 역할은 갖가지 방법으로 부처님의 육바라밀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 보시바라밀이 부족할 때는 데바닷타가 즉시 그에게 보시물을 구걸하였고, 지계(持戒)와 인욕(忍辱) 등의 덕목을 훈련할 때는 데바닷타가 갖가지 방법으로 괴롭히고 시험하였으며, 부처님은 바로 이러한 수련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보살도인 육바라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경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5)

저 데바닷타는 비록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이해 득실을 따지고 괴롭히지만, 나를 원만하게 육바라밀을 할 수 있게 하고, 중생들에게 큰 이익을 얻게 한다.

데바닷타에 대한 경전의 이와 같은 묘사는 한편으로 그 의도가 부처님이 좌절과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에 대응하였던 방편을 나타내는 것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데바닷타의 역할과 능력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며, 그의 행위에 대한 해석이 아함과 율장 등 문헌에 모든 악이 그의 한 몸에 다 모여 있다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앞의 《흥기행경》의 내용이 데바닷타가 현세에 부처님을 살해하였던 악행에 대하여 전생담으로써 그 원인을 해석한 것이라면, 《대방광선교방편경》은 그가 과거세에 지었던 죄에 대하여 면죄부를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바닷타에 대한 이러한 평가의 변화는 《법화경》 〈데바닷타품〉이 출현할 때에 이르러서는 데바닷타의 악행에 대하여 한 자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더 나아가 부처님에게 《법화경》의 중심사상을 가르치고, 부처님의 성불을 돕는 훌륭한 지자(智者)로 되어 있고, 또 그의 미래 성불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26)

이상과 같이 과거세의 인연으로써 현세 행위의 의문을 풀어가는 방식은 비록 불교경전 속에서 자주 보이는 방식이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마치 신화와 같은 이런 종류의 해석을 쉽게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해석은, 만약 데바닷타가 악인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가 범하였던 악행에 대하여 반드시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이유로써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 《대방등무상경》(권4)에서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이 경에서는 선덕(善德)이라는 바라문이 줄곧 데바닷타의 행위에 대하여 매우 싫어하여, 일체지자(一切智者)라 불리어지는 부처님이 어떻게 이런 악인을 출가하게 허락하였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부처님에게 의문을 던졌을 때, 대운밀장보살(大雲密藏菩薩)이 선덕바라문에게 아주 명확한 직접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그의 해답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27)

    ① 데바닷타는 악인이 아니며, 또한 부처님에 대해 배은망덕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데바닷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따랐기에 조금도 성지(聖旨)에 어긋남이 없었다.

    ② 데바닷타가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힌 것(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한 행위)과 승단 파괴(분열) 등의 악행은 일종의 중생들을 위한 방편이고, 불가사이한 경계이다. 또 석가족 사람들은 악행을 저지를 줄 모른다. 데바닷타는 착실한 석가족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악행을 저지를 줄 모른다. 만약 악행을 하였다면 그것 역시 석가여래의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③ 데바닷타는 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지 않았다. 그가 한 행위는 사실 보살행으로써 중생교화를 위해 지옥에 머무르는 것이므로 정말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④ 데바닷타는 일념(一念)의 잘못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결코 악업을 지을 수 없다.

    ⑤ 데바닷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질문자(즉 선덕바라문)는 마땅히 그를 향하여 참회·공경·공양·존중·찬탄하여야 한다. 모든 제자들이 만약 데바닷타의 공덕에 대하여 확신하여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제자이다.

경문에서는 또 부처님이 위에서 서술한 내용들을 모두 칭찬하였을 뿐 아니라, 데바닷타가 성취한 경계는 아주 높기 때문에 성문이나 연각 등이 헤아릴 수 있는 경계 따위가 아니다라고 다시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몇몇 대승경전 속에 나타나는 데바닷타에 대한 새로운 평가 혹은 전설은 초기불교에서 데바닷타를 악업이 아주 무거운 혹은 털끝 만치의 선함도 볼 수 없는 자(《증일아함경》 권5, T2, p.567a) 등으로 비난하고 질책하는 상황과는 그 의도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비록 이와 같은 새로운 관점이 불교계의 주류사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새로운 관점들이 경전 속에 출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불교계에 이미 몇몇 혹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전통의 일면인 데바닷타를 강하게 비난하는 태도에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3) 후세 문헌에서 묘사되고 있은 데바닷타의 신도들
데바닷타의 신도에 관한 기록은 현존하는 한역 인도 문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자료는 모두가 고대 중국에서 인도로 법을 구하기 위해 갔던 승려들이 지은 저술들이다. 그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 동진(東晋) 법현(法顯)의 《불국기》:5세기 초에 인도로 간 법현은 그의 《불국기》에서 코살라국의 사위성에 도착하였을 때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데바닷타와 관련된 몇 마디 말을 적고 있다. 즉,28) “조달(즉 데바닷타)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항상 과거 삼불에게 공양하였으나, 오직 석가문불(釋迦文佛)에게는 공양하지 않았다.”

법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사위성에는 18곳에 불교의 절이 있었고, 96종의 외도가 있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데바닷타 신도가 당시 사위성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의 삼불은 불교경전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구류손불(拘留孫佛)·구나함모니불(俱那含牟尼佛)·가섭불(迦葉佛)을 가리켜 일컫는 말일 것이다.

데바닷타의 무리들이 오직 삼불에게만 공양하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공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데바닷타가 살아 있는 동안 부처님을 배반하고 승단을 분열시켜 형성된 역사의 그림자를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게 한다. 이 밖에 주의할 만한 한 가지는 그들이 부처님을 대신하여 데바닷타를 네번째 부처님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또 데바닷타를 현겁의 다섯번째 부처님으로 받들어 공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써 데바닷타가 생전에 스스로를 새로운 부처로 세우려던 것이 최소한 공개적으로는 후세 신도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② 당(唐) 현장의 《대당서역기》:동진의 법현 외에도 7세기경 인도로 나아갔던 현장 역시 데바닷타의 신도들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대당서역기》(권10)의 갈라나소벌자나국(즼羅拏蘇伐刺那國) 부분에서 이 나라에 절이 10여 곳 있고, 천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 50여 곳 있었으며, 그리고 다른 3가람(伽藍)이 있었는데, 버터를 먹지 않았고, 데바닷타의 가르침을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서기 640년 전후의 인도에서는 데바닷타의 오법을 준수하였던(최소한 그 가운데 한 가지라도) 신도들이 여전히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29)

③ 당 의정(義淨)의 《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당대(唐代) 때 인도에서 데바닷타의 신도를 보았던 승려로서 현장 외에 또 의정(義淨)이 있었다. 의정은 대략 현장보다 40여 년 늦게 인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후 상당히 많은 번역을 하였는데, 그가 번역한 《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권9)에는 데바닷타 종파에 대하여 주석를 붙여 설명한 것이 있다. 이 주석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당시 인도 데바닷타 신도들의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30)

현재 서방에는 곳곳마다 천수(天授, 즉 데바닷타)종족의 출가가 유행하고 있다.
모든 의례의 대부분이 불교와 같으며, 오도윤회(五道輪廻)·생천해탈(生天解脫)·삼장(三藏) 학습 등에 관해서도 대체로 같다.큰 절이 없이 한적한 촌락에 머물었고, 걸식하며 정행(淨行)을 많이 닦았다. 갈대를 바릿대로 하였고 옷가지는 오직 세 벌만 가졌다.

(이 종파의 신도들은) 대부분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경전 강의를 들었다.

이상의 주석을 정리해 보면, 7세기 하반기의 인도에서는 데바닷타 무리들(혹은 신앙)이 상당히 유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또 이들은 항상 당시 불교학의 중심인 나란타사에 가서 불교 강의를 들었다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과 불교 신앙과의 동질성은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신도들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인정하였을 것이다. 즉 그들의 의례·교의·수행 목표와 사상 근거(삼장) 방면에서 불교와 작은 차이(아마도 의식주 방면과 관련 있는 오법일 것이다)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비슷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4. 마치는 말

이상의 본문을 통해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었던 점은 사상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불교 경전에 서로 다른 각도의 견해와 전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데바닷타라는 동일한 인물에 대한 각종 불교 문헌의 평가와 전설은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시불교 경전 내지 대부분의 부파불교 율전에서는 확실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그 속에서 전하는 모든 전설들 가운데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상당히 허황되고 유치한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데바닷타의 여러 악행 중에서 승단 분열 이 한 가지 사건은 여러 가지 정황들을 고려해 볼 때 분명 존재하였을 것이다.

즉 당시 부처님의 교단에 불만을 품고 그와 대립하려 하였던 세력들이 존재하였고, 또 데바닷타가 소유하였던 여러 가지 조건들(인성, 출신, 재능 등등)은 그러한 반발을 표면적으로 들고 일어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야소다라를 아내로 삼으려 하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벗어날 뿐 아니라, 그 전개과정이 상당히 유치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80세에 열반하였을 때는 대략 아사세 왕의 즉위 8년이 되며, 데바닷타가 이 악행을 저지른 것이 문헌에 기술되어 있는 것과 같이 승단 분열 사건 이후였다면, 이 악행의 시기는 분명 부처님의 노년(최소 70살 이후) 때의 일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데바닷타와 야소다라 역시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고령이었을 것이고, 그리고 이때 야소다라는 벌써 출가한 지 20여 년이 지났을 시기이다. 결국 이 이야기의 편찬자는 전혀 시간 관념 없이 억지로 갖다 붙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에 모두 다 사실로 믿기는 힘들다.

이와 같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허황된 이야기들을 추려내고 각종 불교 경전 속의 전설 내지 우리들의 추측을 종합하여 보면, 데바닷타라는 인물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석가족 출신의 재능이 뛰어난 우수한 인재였으며, 그는 성격이 완강하고 노력적이어서 추구하는 목표에 대하여 강한 성취욕을 가졌다. 그의 이러한 요소들은 기존의 교단과 다른 주장과 반발을 일으키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수행 방면에 주장한 오법은 강렬한 고행의 경향을 지니는데, 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인도 종교의 주류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가 부처님의 중도행(中道行) 방향에 반대하여 부처님의 교단을 나왔다는 것 역시 당시 전통 종교사상의 흐름과 부처님의 개혁사상의 충돌을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가지 후세 불교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그가 죽은 후 그의 신도들은 여전히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점은 그가 생전에 일으켰던 승단 분열 사건이 부처님 만년에 머물었던 왕사성에서 확실히 상당한 불교 분열 바람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데바닷타가 죽은 후에도 이 사건은 인도종교사에 여전히 1천여 년 동안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세 데바닷타를 추종한 무리들이 비록 부처님을 공양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불(삼불), 그들의 법(오법), 그들의 승단 구조 등의 거의 대부분은 부처님의 가르침 내지 정통 불교교단에서 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파의 신앙 내용과 실천 방식으로 볼 때 다른 외도와는 달리 사실상 불법의 한 지류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이다.31) ■

 

원필성
동국대 불교학과 및 대만 문화대학교 철학연구소 졸업. 철학박사. 현재 위덕대 강사. 논문으로<승조의 이제의와 그 영향><불교의 언어사상발전으로 본 승조의 가명관><의상의 화엄사상 --- 화엄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아함에서 본 불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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