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이단 불교도들의 또 다른 초상

1. 머리말

신행(信行, 540∼594)은 지금으로부터 1천4백 년 전, 삼계교(三階敎)라는 민중불교를 개창한 종교인의 이름이다. 삼계교는 일명 보법종(普法宗)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남북조 시대 말기와 수(隋)왕조 무렵에 처음 일어난 뒤로, 수·당·송 3대에 걸쳐 전후 약 4백여 년 간 명멸을 거듭하며 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는 기이하리만치 그 뒤로는 영영 역사 속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중국불교 13개 종파 가운데에도 삼계교는 들어가 있지 않다.1) 그만큼 삼계교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낯설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동안 교사(敎史)나 교의(敎義) 등 삼계교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던 데에서도 기인한다. 4백여 년을 지속해 온 교단으로서 여타 종파와는 달리 자료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은 곧 삼계교 자신이 역사적으로 처한 기구한 운명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삼계교는 실로 중국불교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혁신불교였다. 당시 중국불교계를 주도하던 전통적 흐름을 완전히 뒤엎고, 자신의 새로운 독창적 경지를 거리낌 없이 펼쳐 내었으며, 그 결과 불교계 내부나 정치세력권으로부터 이단시되고 위험시되어 멸절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보법(普法)·보불(普佛)·보행(普行)의 깃발을 들고 출발한 신행의 삼계교는 말법(末法) 불교사상에 호응하여 철저한 실천적 민간불교를 표방하였으며, 이러한 실천적 교의에 필연적으로 수반된 무소유사상에 입각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무진장행(無盡藏行)을 펼쳐 나감에 있어, 다른 종파와의 타협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절복하는 준엄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항상 사면초가의 형세에 처하면서 비난과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급기야는 외부의 핍박과 압력에 의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비록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 흥륭하는 세운(世運)을 만난 적도 없진 않았으나, 그것도 잠시뿐 대세는 언제나 삼계교를 외면하는 쪽이었으며, 거듭되는 칙금(勅禁)과 각 파의 비난으로 교적(敎籍)은 위서(僞書)로 몰리고 간행·유포마저 금지당하는 상황 속에서 자료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삼계교에 대해서는 약간의 금석문과 다른 종파의 저술 가운데 인용된 단편적 기록들에서 그 편린을 부분적으로 추측할 수 있었을 뿐, 삼계교의 전모를 밝히려는 노력은 차라리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학계로부터도 별다른 주의를 야기시키지 못한 것이 저간의 실정이었고, 따라서 삼계교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겨진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돈황(敦煌) 유물의 발굴이 시작되고, 이와 함께 전해지지 않던 불교 서적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게 됨에 따라,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신행의 삼계교에 대해서도 서서히 그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서광을 얻게 되었다.

1916년과 1922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인 학자 야부키 게이키(矢吹慶輝, 1879∼1939)는 영국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파리 국민도서관에 건너가 각각 스타인(Aurel Stein)과 펠리오(P. Pelliot)가 수집한 돈황 출토 고사본을 탐색중,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삼계교 관계 고문헌 30여 점을 발견해 내고, 이어 일본 내에 산재해 있던 《삼계불법(三階佛法)》 4권 및 기타 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하여, 1927년에 마침내 《삼계교지연구(三階敎之硏究)》라는 저술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는 실로 마멸된 단비(斷碑)에나 비유될 수 있었던 삼계교의 면모에 대해서 그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 전인미답의 연구로서, 삼계교에 관한 한 지금까지도 불멸의 업적으로 꼽혀 오고 있는 터이다. 특히 그 책의 끝에 수록된 방대한 자료집 ‘삼계교 잔권(三階敎殘卷)’은 앞으로 이 부문의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일차적 근본 자료로서, 야부키(矢吹)씨의 이에 대한 노고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시대가 거듭될수록 더욱 짙은 안개에 가리워져 마냥 치지도외된 채 불교학자들의 뇌리에서도 거의 사라져가고 있을 즈음,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천불동 막고굴의 돈황 유적 유물이 서구 학자들의 손에 의해 전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고, 이에 힘입어 깊숙이 묻혀 있던 신행의 삼계교 역시 새로운 현대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차라리 기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류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종교는 어디까지나 이론보다는 실천에 그 주안점이 있다고 하겠다. 비단 인류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 즉 중생(衆生) 일체를 제도(濟度)의 대상으로 삼는 불교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실천 불교에 대한 문제는 현재 한국 불교계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요 절실한 요청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행의 삼계교는 앞으로 실천 불교를 지향해 나아가야 할 한국 불교계에 하나의 암시를 던져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지금까지도 신행의 삼계교와 관련된 연구에 대해서만은 거의 백지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원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불교평론》의 기획을 계기로 신행과 그의 삼계교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어 보다 심화된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 신행의 생애

신행은 동위(東魏) 흥화(興和) 2년(540), 우리 나라로 보면 신라 진흥왕 원년에 위군(魏郡)의 명문 세족인 왕씨(王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척 총명하고 품성이 어질었다고 전하는데, 4세 때에는 소가 수레를 끌다가 진흙탕에 빠진 것을 보고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는 소년 시절에 출가한 이래, 선지식을 두루 찾아 다니고 불경을 빠짐없이 섭렵하였다. 그러나 신행은 경문을 해석하고 실행하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병에 따라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침도 때에 맞게 베풀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하근기가 상근기의 법을 수행하면, 당근(當根)이 아닌 까닭에 오히려 전도된다고 하였으며, 감로도 독약으로 변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중생 제도에 역점을 두어 실천을 중히 여기면서, 성문승 대신 보살도를 높이 치켜 들었다.

신행은 다른 사람의 시주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여, 구족계를 버리고 직접 노역에 종사하였으며, 오히려 빈한한 대중들에게 보시를 행하였다. 또 두타행(頭陀行)과 걸식을 행하면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탑이 있는 곳이면 모두 가서 예배를 드렸으며, 길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절을 하여 《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의 행동을 본받으려 했다고 제전(諸傳)은 전한다.

신행의 이러한 소문이 차츰 퍼지면서 사방에서 그를 찾아와 힐문하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알기 쉽게 곧장 깨우쳐 주고 알아 듣지 못할 말로 호도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간명한 말과 고결한 인품을 접하고서는 누구든 받들어 모시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개황(開皇) 9년(589)에 신행은 수 문제(隋文帝)의 조칙을 받고 제자 승옹(僧邕)과 함께 경사(京師)에 들어갔다. 신행의 입경을 주선했던 당대의 실력자 복야(僕射) 고영(高潁)은 자신의 저택을 희사하여 세운 진적사(眞寂寺) 안에 삼계원(三階院)을 세우고 그를 머무르게 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신행의 삼계교단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다. 각처에서 신행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자 경사에 삼계교도를 위한 5개 사찰을 두었으며, 다른 사원들도 그 법도를 본받아 육시예선(六時禮旋)2)과 걸식을 행하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 신행이 좌선하거나 설법할 때마다 푸른 옷을 입은 동자 4인이 꽃을 들고 시봉을 했다든지, 화불(化佛)이 내려와서 수기(授記)를 내렸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는 신행을 너무나도 경모한 나머지 그를 신격화하려 했던 대중의 분위기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신행은 말년에 접어들면서 병이 더욱 심해졌다. 아마도 육신의 학대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그의 엄격한 두타행이 그의 몸을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을 것인데, 그럴수록 신행은 더욱 힘써 불당에 출입하며 날짜별로 불상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다가, 나중에 출입할 기력조차 없어지자 불상을 방 안에 들여 놓고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경사에 들어온 지 6년 만인 개황 14년(594) 정월 4일, 신행은 누워서 불상을 바라보다가 입적하였다. 향년 55세였다. 그 달 7일 신행의 유해를 종남산(終南山) 치명부(?鳴阜)의 시다림소(屍陀林所)에 보내 임장법(林葬法)으로 장례를 치른 뒤에, 사리를 수습하여 탑을 세웠다. 여기서 말하는 임장법은 시신을 산야에 방치하여 조수(鳥獸)의 먹이로 보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물론 삼계교 독자의 것이 아니고 당시에 뜻있는 승려들 사이에서 즐겨 행해지던 장법(葬法)이긴 하지만, 이후 삼계교의 승려나 신도들은 거의 모두가 신행의 이 임장법을 좇았다. 그리고 신행의 탑이 세워진 이 일대는, 잇따라 삼계교 금단의 재난을 당하면서도 교조(敎祖)의 탑 옆에 묻히려고 갈망하는 숱한 삼계교도의 탑과 묘원으로 조성되어, 급기야는 백탑사(百塔寺)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까지 하였다.

신행의 저술은 현존하는 《삼계불법(三階佛法)》 4권을 위시해서 무려 40권에 이르고 있다. 각종 경록(經錄)에 나오는 신행의 저술 목록들을 살펴 보노라면 그가 얼마나 장경(藏經)에 박학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신행 생전의 문도는 대략 3백여 인으로 전해진다.

3. 삼계교의 성립 배경

신행이 살았던 시대는 제2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불릴 만큼 혼란했던 남북조시대 말기로부터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 초기에 이르고 있다. 그야말로 분열과 통일의 와중에서 일생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조시대 140년간은 대체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색적인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살벌한 시대였다. 남조(南朝) 24명의 임금 가운데 온전히 목숨을 마친 자는 10명, 북조 역시 24명 가운데 14명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준다 할 것이다.

특히 남북조 말기는 정치적으로는 신구(新舊)·남북(南北)·호한(胡漢) 세력의 교체가 극심한 가운데 피 흘리는 전투와 정치 테러가 끊이지 않았으며, 각종 부패와 타락에 경제적 파탄까지 겹쳐서, 이에 기인한 사회 불안이나 빈궁한 생활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와 함께 때마침 대두한 불교의 말법(末法) 사상은 당시의 불교도들에게 말법의 시대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 아니냐는 반성과 감회를 안겨 주기에 충분하였다.

신행은 그의 생전에 5개의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았고, 두 차례에 걸쳐 단행된 주무(周武)의 파불(破佛)에 대해서도 직접 체험하며 그 진상을 똑똑히 목도했을 것이다.3)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뚜렷한 가치관이나 인생관도 없이 아노미 상태에 빠져 부유하고 있었고, 지식 계급의 인사들 중에는 당시 유행하던 청담(淸談) 사상에 몸을 맡기고 현실 도피의 분위기로 빠져드는 경향마저 없지 않았다. 이렇듯 복잡다기하고 혼란이 극심했던 시대의 정세야말로 신행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를 말법시대라고 단정하고, 이런 시대에는 모두 사견(邪見)에 사로잡힌 중생들뿐으로서 왕자(王者)도 없고 정법(正法)을 고수하는 승보(僧寶)도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당대에 대한 신행의 준엄한 시대 비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신적 법시(法施) 이외에 물질적 구제도 함께 베풀어져야 한다는 그의 무진장법(無盡藏法) 사상은, 당시 곤궁에 허덕이던 일반 서민 대중들의 참상을 목도한 데에서 발로된 현실적 사회사업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아가 산중불교에서부터 촌락불교로, 개인 수도 중심에서 민간 대중불교로 전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신행의 삼계 보법 사상 역시 단적으로 말해서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배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또한 중국불교사적 측면으로 보면, 교단 내적으로는 부패의 극을 치달리는 양상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뛰어난 불교 사상가들이 허다하게 출현하여 이른바 군웅할거 시대를 이루면서, 각각 신불교운동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바야흐로 진정한 중국불교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 기간은 중국불교가 인도에서 수입한 외래종교를 일차적으로 수용하는 단계를 지나서, 이제 독자적인 중국화 과정을 밟으며 현란한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던 때였다.

난세가 충신을 낳고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바로 이러한 시대의 기운을 타고 천태지의(天台智확, 538∼597)·정영혜원(淨影慧遠, 523∼592)·가상길장(嘉祥吉藏, 549∼623)·도작(道綽, 562∼645)·두순(杜順, 557∼640)을 위시해서, 진제(眞諦, 499∼569)·혜사(慧思, 514∼577)·법랑(法郞, 517∼581)·담연(曇延, 515∼588)·혜가(慧可, 487∼593)·영우(靈祐, 518∼605)·담천(曇遷, 542∼607) 등 중국불교사상 실로 천재들이라 할 기라성 같은 철인들이 배출되어 섭론(攝論)·지론(地論)·천태(天台)·화엄(華嚴)·삼론(三論)·정토(淨土)·선(禪) 등의 종파를 이미 형성하거나, 아니면 앞으로 그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행 역시 이 시대적 토양 위에 솟아난 한 그루 우람한 거목이었다. 그 나무는 바로 삼계교였다.

4. 신행의 사상

1) 삼계불법(三階佛法)의 대강

(1) 보(普) 개념에 의한 불교 체계의 정립
신행 당시에 중국불교계가 안고 있던 중심 문제의 하나는 약 6천 권에 달하는 대장경을 어떻게 정리하고 통일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즉 어느 경설이 최고의 가르침이며 불교 궁극의 목적이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있어서는 오늘날과 같은 경전성립사적 고찰이 있었을 리 만무하고, 따라서 온통 ‘불설(佛說)’의 관사가 붙어 있는 허다한 경전들을 모두 부처님 일대의 설법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노력은 이 가운데 최고의 교설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경전을 중심으로 일체의 경전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향으로 작업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교상판석(敎相判釋) 즉 교판론(敎判論)인데, 교판의 집대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천태지의의 오시팔교(五時八敎)의 주장이 나온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만약 우리가 각 종파를 표방할 수 있는 하나의 글자를 상정한다고 한다면, 비담(毘曇)은 유(有), 성실(成實)은 공(空), 천태(天台)는 구(具), 화엄(華嚴)은 기(起), 유식(唯識)은 식(識), 삼론(三論)은 불(不), 진언(眞言)은 밀(密), 정토(淨土)는 신(信), 선(禪)은 각(覺)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삼계교는 보불(普佛)·보법(普法)·보행(普行)이라는 그들의 용어가 보여 주는 것처럼 역시 보(普)라는 하나의 글자로 귀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신행의 이 보(普)의 사상은 당시의 학풍과는 출발점에서부터 완전히 그 태도를 달리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어떤 특정한 경이나 논을 선택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일체의 경론을 정리하려고 했던 데 반해, 신행은 처음부터 소의(所依)경전이라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신행에 있어서는 경설(經說)의 높고 낮음이나 깊고 얕음보다는 현재 고난을 받고 있는 중생의 구원이 선결 문제였다. 부처님의 설법은 기교상응(機敎相應)이요 응병여약(應病與藥), 즉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고 병세에 따라 치료약을 처방하는 교설이라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당시에 최고의 교설로 떠받들고 있는 경설들이 신행 당시에 있어서도 꼭 부처님 생존시와 마찬가지로 중생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똑같은 효력을 발휘하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 신행의 지론이었다.

오히려 환경이 바뀌고 환자의 병세가 달라지게 되면, 좋은 약도 독약으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불법 역시 각각 시대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적절하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내용의 심천(深淺)보다는 적부(適否)의 문제가 일차적으로 대두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신행의 상투어라 할 수 있는 ‘대근기행법(對根起行法)’의 근본 개념이기도 하였는데, 일체 경설에 우열을 인정치 않고 중생의 근기에 맞춰 두루 풀어 쓴다는 신행의 이러한 입장은 중국불교사상 획기적인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서, 당시 교학계로부터는 무교판(無敎判)의 교판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생소한 교리 하나만 가지고도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2) 삼계(三階)의 분류
이러한 입장 위에서 신행의 사상은 일단 당시의 제반 환경에 대한 심각한 반성으로부터 출발점을 삼는다. 신행은 환경적 요소로 시(時)·처(處)·인(人)의 세 가지 요소를 축으로 삼고, 이들에 대해 각각 삼계라는 독특한 도식을 적용함으로써 그 특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일찍이 부처님은 사회 인심이 시대와 함께 점차 혼탁해지면서 자신의 법이 단계적으로 쇠퇴할 것을 예언한 바 있다. 즉 자신의 정법(正法)은 오래지 않아 비슷한 거짓 법 즉 상법(像法)으로 대체되어 한 동안 세상에 유행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것마저 없어져 멸법(滅法)의 시기가 가까워진다는 것으로, 이 시기를 말법(末法) 시대라 하였다. 이러한 교설은 당시에 대체로 《대집월장분경(大集月藏分經)》의 정상말 삼시(三時)의 설로 대표되었는데, 신행이 시도한 삼계의 분류 역시 이와 같은 말법관에 기초하여 우러나온 것이라 하겠다.

대개 삼계라고 하는 것은 불멸(佛滅) 후 정법과 상법이 머무는 시기(時), 중생의 근기(人), 그 처소(處) 등이 같지 않게 된 결과, 각 단계마다 상응하는 법이 달라지게 됨을 의미한다. 즉 신행은 시(時)에는 정(正)·상(像)·말(末), 인(人)에는 일승(一乘)의 불보살·삼승(三乘)의 이근(利根) 중생·세간의 둔근(鈍根) 중생, 처(處)에는 일승을 설하는 정토(淨土)·삼승을 설하는 예토(穢土)·부처님도 구하지 못하는 예토 등이 있다고 분류하고, 이들 모두를 각각 제1계·제2계·제3계에 배당시켰다. 그리하여 현재는 제3계, 즉 시는 말법, 인은 부처님도 구할 수 없는 파계(破戒) 사견(邪見) 근기의 중생, 처는 예토에 속하는 만큼, 어디까지나 이에 해당하는 삼계불법(三階佛法)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도그마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3) 보법(普法)
그러면 신행의 소위 제3계 불법이란 어떤 것인가. 제3계 중생의 근기는 일승의 그릇이나 삼승의 그릇도 못 되고, 교법의 옳고 그름이나 깊고 얕음을 식별할 능력이 없는 생맹(生盲)의 중생인 만큼, 그들에게 일승이나 삼승과 같은 별법(別法)을 배우게 하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소경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전적으로 무익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부처님을 비방하고 불법을 비방하는 죄만 더하여 아비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사(正邪)를 식별할 능력이 없는 제3계인, 즉 현세인은 일승이나 삼승을 간별하거나 유견(有見)·공견(空見)4)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며, 특수한 일행(一行)에 의지하지 말고, 널리 일체선(一切善)을 닦아야만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된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제3계의 근기에 해당하는 당근불법(當根佛法)으로서, 제1·제2계의 별진별정불법(別眞別正佛法) 즉 별법(別法)에 대한 보진보정불법(普眞普正佛法) 즉 보법(普法)이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신행은 이러한 보법의 실행에 의해서만 제불(諸佛)도 구할 수 없다고 한 제3계의 중생에게 강한 자극을 촉발시켜, 제경(諸經)에 설해져 있는 여래장(如來藏) 및 불성(佛性)이라는 중생 본구(本具)의 궁극적 경지에 유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 보법의 수행법으로 7개 항의 조목을 제시한다. 귀일체불(歸一切佛)·귀일체법(歸一切法)·귀일체승(歸一切僧)·도일체중생(度一切衆生)·단일체악(斷一切惡)·수일체선(修一切善)·구일체선지식(求一切善知識)이 그것으로, 이를 대근기행(對根起行) 7법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이 대근기행의 수행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적막한 산 속보다는 대중이 모여 사는 곳이 훨씬 낫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산림(山林)을 버리고 촌락으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되는데, 여기에서 신행 불교의 하나의 특징을 이루는 민간 대중 위주의 생활 실천 불교가 형성되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4) 보불(普佛)
보법을 불타론(佛陀論)에 응용한 것이 중생 일체를 부처로 보는 보불설(普佛說)이다. 제3계인은 사견에 집착하고 교만하며 탐진치 삼독에 물든 최악의 중생이지만, 그 속에 구비한 불성으로 보면 엄연히 여래장불(如來藏佛)이고 불성불(佛性佛)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어느 땐가 인연이 성숙하면 성불하게 될 당래불(當來佛)이며, 현재도 부처의 가능성을 엄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불상불(佛想佛)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행이 말하는 보진보정(普眞普正)의 4불(佛)이다.

신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4불 외에도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모든 형상불(形像佛)과 심지어는 사마불(邪魔佛)의 개념까지 도입하면서, 이들 모두를 제3계인이 귀의해야 할 불(佛)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중 특히 사마불은 불교 이외의 이단의 신(神)까지 총망라한 것으로, 이들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귀의하며 경배할 것을 교시하고 있는데, 이 역시 대근기행법의 일환으로서 보불관에 입각하는 한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논리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신행이 만약 현대에 태어났다면, 예수나 여호와·알라 등 세계의 각종 종교나 샤마니즘에서 행해지는 귀의 대상에 대해서도 모두 사마불로 인정하여 귀의하고 경배할 것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신행의 이와 같은 보불 사상은 일견 천태(天台)가 육즉(六卽)의 설을 세워서, 불교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추호도 신심이 없는 자에게까지도 실상(實相)의 이(理)는 구족되어 있다고 보아 ‘이즉불(理卽佛)’이라고 명명한 것이라든가, 밀교(密敎)에서 일체 현실상을 만다라계회(曼茶羅界會)의 장엄(莊嚴)으로 보아 대일여래(大日如來)의 권속이라 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다만 신행의 삼계교는 치밀한 논리를 앞세우기보다는 실천 수행을 주로 했기 때문에, 그 사상이 소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차이가 있을 따름이라고 하겠다.

(5) 보행(普行)
보법 보불관에 기초하여 실행 방면으로 유도되어 나온 것이 보행 사상이다. 여기에는 크게 나눠서 보경(普敬)과 인악(認惡)의 두 조목이 있다. 사람 가운데 보불이 아닌 자는 하나도 없는 만큼 사람들이 서로 타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 보경 사상이요, 이와 반대로 자신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반성하여 모든 악을 인정하고서 두타행 등을 통하여 이 일체악을 소멸시키도록 노력함으로써 끝없는 선근(善根)을 심어야 한다는 것이 인악 사상이다. 신행을 위시해서 삼계교도들이 《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보살을 본받아 도로에서 사람들을 예배하고 다닌 것은 보행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견 위악적인 행동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이 보경·인악의 필연성이라 할까 그 당위성에 대해서 ‘대근기행법(對根起行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신의 악에 철저한 자만이 타인의 선에 철저할 수 있다. 만약 자타(自他) 공히 선을 보면 스스로 악을 보는 것이 투철하지 못하게 된다. 또 자타 공히 악을 인정하게 되면 타인의 선을 공경하는 데에 철저하지 못하게 된다.”

지옥을 체험한 자가 천국의 열락을 누리고, 중병에 걸리고 나서야 건강을 실감하게 된다는 말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어찌 보면 보법, 보불과 같은 신앙은 자칫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현실안주론에 빠져 스스로 뼈를 깎는 수도에의 정진을 등한히 하기가 쉬운 법인데, 신행의 삼계교가 그 신앙에 입각한 실제적인 수행으로서 타인을 공경하고 자신을 문책할 것을 가르친 것은, 부단(不斷)의 정진도(精進道)를 걷게 하는 불교 본연의 뜻과 그대로 합치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2) 말법(末法) 의식의 고취
신행은 삼계불법을 천명하면서 자신의 시대가 이미 별법이 통하지 않는 말법시대로 돌입했다고 선언하였다. 당시에 물론 말법사상이 점차 중국불교 내부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고, 특히 주무(周武)의 파불(破佛) 이후로는 말법이 도래하지 않았나 하는 감상이 불교도들 사이에 퍼져 있기는 하였지만, 당시 교계에서 모두 말법시대로 인정한 것도 아니었고, 나아가서는 아예 이를 무시해 버리는 경향 또한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정영사(淨影寺)의 혜원(慧遠)은 아직 상법시대라고 하였고,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의 저자 비장방(費長房)도 수나라 개황 17년을 기준으로 불멸(佛滅) 후 1천2백5년이라 하면서 아직 말법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확언하였으며, 신행과 동시대 사람인 천태지의의 경우에는 말법 의식이 투철했던 남악혜사(南岳慧思)에게 입문했으면서도 말법에 대한 고찰이나 언급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소위 정·상·말 삼시설(三時說)은 불교의 대표적 역사관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종교의 역사관에도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것이지만, 불교의 이 삼시설 역시 이상적인 사회를 과거에 둔 복고적 역사관으로서, 말법 또한 어쩔 수 없이 도래하고야 만다는 기계론적 운명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법이 언제부터 시작되느냐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다. 우선 정법과 상법 두 시대의 기간에 대해서도 이설이 구구하거니와, 그 시발점이 되는 불멸(佛滅)의 연대에 대해서도 이론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신행의 시대에는 아직 말법시대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신행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시대가 말법이라고 과감하게 선언을 했던 것일까.

신행의 교의는 무엇보다도 당시를 말법 제3계라고 단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제3계의 설정이야말로 삼계교 교리의 키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신행은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도무지 밝히고 있지 않다. 당시 삼계교 개창 이후 뭇 사람들로부터 이에 대한 질문을 숱하게 받았을 텐데도 신행이 구체적인 답변을 피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만인이 납득할 수 있는 근거와 논리를 제시하지 않은 채, 무작정 말법에 대해서 서술하는 경설(經說)만 모아 놓고는 지금이 말법 제3계라고 하니,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난감한 주장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신행 또한 이러한 자신의 이론적 약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이런 주장을 선포하게 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신행은 사실 제3계의 시발점을 어디에서 잡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에 유행했던 정·상·말 삼시설이나 불멸연대론 등도 신행에게는 별로 중요한 의미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였다. 그는 제2의 춘추전국시대라고 불리는 남북조 말기의 혼란했던 시대상, 불교 교단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목불인견의 타락상, 그리고 이에 따른 두 차례의 거듭된 대규모 파불 사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실로 여러 불경에 묘사된 말법의 실상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이제까지의 불교로는 애닯은 민생을 구제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기약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유행했던 삼시설을 도입하여 삼계의 설을 확립한 뒤에, 말법의 위기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의 불교 신도 및 일반 대중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당대를 제3계 말법시대라고 단호하게 선포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신행은 야부키(矢吹)씨 이래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스스로 말법 의식에 젖어들어 감동한 나머지 삼계교를 창설했다고 하기보다는, 당시 시대상에 환멸을 느끼며 말법 사상에 경도된 민중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악한 위에, 짐짓 말법 불교의 기치를 방편으로 내걸고 자신이 평소에 구상했던 종교의 이념과 체계를 선포했다고 필자는 보고 싶은 것이다. 즉 말법 불교로서의 삼계교가 아닌, 삼계교 안에 구비된 여러 특성 중의 하나로서 말법 사상을 자리매김하려는 것으로서, 말법 사상을 어디까지나 삼계교의 주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종속개념으로 소속시키고 싶은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신행의 이러한 사상과 교의는 비단 말법시대에만 국한되어 통용될 성질의 것이 아니요, 그가 별법시대라고 단정한 제1·제2계는 물론이요, 앞으로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떠한 시대에 당도하든 간에, 그 효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유통시킬 수 있는 포괄성을 그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실상 환자를 그 병세에 따라 각각 알맞게 치료해야 한다는 그의 대근기행 사상, 여기에서 비롯된 보법·보불·보행 등 그의 각종 치료 방편들은 이미 말법이니 정법이니 하는 한정된 테두리를 멀리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3) 무진장행(無盡藏行)의 시현
신행이 사용하는 무진장이라는 용어는 《화엄경》과 《유마경》 《대집경》 등을 인용한 것으로서, 종으로 삼세(三世)를 관통하고 횡으로 시방(十方)에 걸쳐 실로 중생이 있는 곳이면 모두 그 공덕 회향이 끝나는 곳이 없는 법계(法界) 원행(圓行)을 의미한다. 신행의 유문(遺文)을 보면, “목숨과 재물을 모두 놓아버리면 곧바로 부처를 이룬다(頓捨身命財 直到成佛).”라는 말과 “아낌없이 베푸는 것을 한시라도 멈추지 않으면 곧 부처를 이룬다(願施無盡 日日不斷 乃至成佛).”라는 말이 무수히 나오는데, 이 또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진장행을 펼침으로써 삼계교의 이상행을 삼겠다는 그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무진장행을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진장행과 고공무상(苦空無常) 무진장행의 둘로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데, 그가 제시한 상락아정 무진장행의 16개 조목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인간 생활에 필요한 정신적 요소뿐만 아니라 의식주 등 모든 물질적 요소를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신행은 “생시(生施)·사시(死施)와 내재(內財)·외재(外財)를 베풀었다.”고 한 비문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삼계교 신도들에게 이 16종 무진장행을 몸소 구현했던 사람, 즉 상락아정 무진장행을 일으킬 수 있는 이른바 유일한 ‘능행인(能行人)’으로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계교 전적을 보면, “무진장법을 행하면 무시(無始) 이래의 묵은 빚이 일시에 소멸되니 이제는 빚쟁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 일체의 업장(業障)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부모 형제 육친 권속이 삼도(三途)에서 벗어나게 되니, 이 어찌 큰 이익이 아니겠는가.”라는 기록과 “빚진 사람이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비록 적은 돈일지라도 성의껏 바칠 때, 빚을 준 장자도 흔연히 탕감해 줄 것”이라는 비유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무진장행에 대한 삼계교도들의 신심은 대단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신행이 “이 16종 상락아정 무진장행을 같이 행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그 무진장행을 보거나 듣거나 기쁜 마음을 내거나 공양을 받는 자 모두가 상락아정 무진장행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신행의 이러한 선언이야말로 이후 삼계교라는 신흥 종단의 신앙을 구축하는 데에 하나의 큰 받침돌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신행의 이러한 선언은 삼계교도들에게 더 할 수 없는 희망과 의욕을 고취시켜 주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찌하여 이들이 모두 무진장행의 과보를 얻게 되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설명이 또 후대 삼계교의 교적에 보인다. 그것은 즉 “신행 선사 등 일체 보살이 바르기 때문에 단지 동참을 하고 보고 듣기만 해도 모두 바르게 된다. 마치 죽통(竹筒) 속으로 뱀이 들어가면 뱀도 통처럼 곧게 되는 것과 같다. 즉 소동(所同)이 바른 연유로 능동(能同)도 바르게 된다.”고 하는 것이었으며, 또 “신행 선사와 그 행(行)을 함께 하여 득도 인연을 지은 까닭에, 설령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이 무진장행에 동참했던 연고로 여러 불보살과 인연이 있게 되어 가호를 받고 삼도(三途)에서 구출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신행 당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무진장행을 중심으로 하여 삼계교단 내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결속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과, 일승보살(一乘菩薩) 이상으로 존숭의 대상이 되었던 신행의 이 무진장행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여 인연을 맺고자 했던 당시 삼계교도들의 염원이 어떠했을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그리하여 이 신행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는 화도사(化度寺)의 무진장원(無盡藏院)5)이 천하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성황을 이루고, 신행의 묘원(墓院)이 신도들의 묘와 탑으로 뒤덮이게 되었던 까닭도 또한 충분히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5. 맺음말

삼계교는 개황 20년에 처음 이단시되어 조칙으로 포교를 금지당하였으나, 신도만은 계속 증가 추세를 보였다. 그러다가 당나라 무측천(武則天) 증성(證聖) 2년(696)에는 걸식과 장재(長齋)와 지계(持戒)·좌선 이외의 행법이 금지되었으며, 현종 개원 13년(725)에는 삼계교도에게 칙령을 내려 여러 사원에 설치한 삼계원(三階院)의 담장을 허물고 대원(大院)과 상통하게 하여 중승(衆僧)이 뒤섞여 거주하게 하면서 삼계교도만 단독으로 한 곳에 머무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안사(安史)의 난 뒤에는 점차 소멸의 길로 접어들다가 송대에 이르러서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 권10의 기재에 의하면, 당 덕종(德宗) 정원(貞元) 16년(800) 4월에 이 삼계교의 전적을 입장(入藏)하게 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이 종의 교전이 다시 대장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송대(宋代)에 와서는 완전히 인멸되어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삼계교는 무슨 이유로 이단시되었으며 국가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을까. 신행은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견(我見)과 변견(邊見)에 사로잡힌 가운데, 혹은 일승(一乘)만을 추구하거나 삼승(三乘)만을 배우는가 하면, 미타(彌陀) 염불만 하거나 법화(法華) 염송만 하거나 한다. 그리고는 오직 자기의 것만 좋아하고 남의 것은 증오하면서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여기에서 온갖 병폐가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보진보정(普眞普正)의 종지를 개창하여, 법의 대소를 분별하지 않고 두루 믿고 두루 귀의하게 하였나니, 이것이 바로 나의 보법이다.”라고.

그러나 교의(敎義)의 고하(高下) 심천(深淺)을 따지는 일에 몰두했던 그 시대에, 이러한 일을 무익한 일이라고 배척하고, 나아가서는 방불(謗佛) 방법(謗法)의 중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매도했던 것은, 불교 각파로부터 증오심을 유발하기에 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도 이처럼 시대에 상응하지 못하는 불교 종파를 보호하는 것은 간접적인 방법(謗法)과 법멸(法滅)의 연유가 되어 갖가지 국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한 것은, 국가의 외호(外護)나 권세가의 공명(共鳴)을 잃는 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된 직접적 원인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정신적인 위안만으로 그치지 않고 물질적인 시혜까지 베푼 결과,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가운데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해 가는 삼계교 교단에 대해서, 봉건 왕조의 입장에서는 국가 체제에 대항하는 하나의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며 일종의 위기 의식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수당 시대에는 국가의 치국이념이 불교였던 점과, 다른 불교 종단들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여타의 불교 종파를 별법으로 규정한 삼계교에 대해서 그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요, 이와 함께 당시에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권승(權僧)들 역시 어디까지나 삼계교 출신이 아닌 다른 교파의 승려들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등으로 해서 중국 최초의 민중불교요 혁신불교였던 삼계교는 끝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채 중국불교사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신행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여러분, 종교인들과 사회 운동가 여러분. 그리고 지구촌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서원하신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날이 과연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나의 시대를 내가 규정했던 대로 오늘날도 꼭 말법시대라고 단정짓지는 않겠습니다. 사람의 심성이 바뀌지 않는 한 어느 때나 말법시대는 존재하는 법이고, 또 정법이나 상법시대도 있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가 혹시 내가 처했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증오와 적개심과 갈등이 엄존하고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고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식의 편견이 지배하는 시대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시대에 처하여 내가 나름대로 제시한 처방이 지금 이 시대에도 혹 유효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보법을 주장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주장이 별법으로 전락하여 쇠퇴의 길을 걷게 된 나의 전철을 밟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미처 이루지 못한 상락아정의 무진장행을 완수하여 중생들 모두가 본래 갖추고 있는 원만한 불성이 환히 밝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부디 여러분들이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

이상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현재 민족문화추진회 상임국역위원. 논저서로 <신행의 사상에 관한 연구> <추사의 불교관> ≪역사의 고향≫, 역서로 ≪조선왕조실록≫(총 20여 권) ≪상촌집(象村集)≫ 등 15여 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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