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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요승'이름뒤에 숨은 개혁자의 모습 / 정선용
[ 기획 ] 이단 불교도들의 또 다른 초상
[10호] 2002년 03월 10일 (일) 정선용 wanjang@yawoo.com

1.문제제기

고려는 흔히 불교국가라고 한다.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았다는 뜻이다. 왕사(王師)·국사(國師) 등의 제도를 두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그 지위에 있는 승려들이 불교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나아가 국왕의 자문에 응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교사상에 충실한 승려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정치에 직접 관여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고려의 정치이념이 기본적으로 유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대체로 유교사상에 투철한 국왕과 그 신료들에 의해 통치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고급관리를 배출하는 과거제도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자들을 선발하는 데 치중하였다는 점은 그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김속명(金續命: ?∼1386)은 공민왕에게 “치국(治國)하는 도(道)는 경사(經史)에 쓰여 있습니다. 불서(佛書)로써 치국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1)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신돈(?∼1371)은 독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승려였던 그가 공민왕(1351∼1374)을 대신하여 한때 조정을 좌지우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그를 권왕(權王)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2) 그리고 그는 결국 모반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죽어갔다. 그는 집권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요승(妖僧)·사승(邪僧) 등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가 공민왕대의 정치를 망쳤고 성도덕을 문란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신승(神僧) 혹은 성인(聖人)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승려로서 정권을 잡은 신돈은 이처럼 당대에 이미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상반된 평가는 공존하고 있다. 그러면 신돈은 왜 이처럼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아야 했을까. 이 점에 주목하여, 신돈의 생애와 그가 정치적으로 지향한 바를 다루어볼까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신돈이 불교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공민왕의 지원을 받으며 개혁을 표방하다 제거되기까지의 사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2. 신돈은 누구인가

신돈은 오늘날 경상남도 창녕 지역에 해당하는 영산(靈山) 출신이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편조(遍照)였으며, 자(字)는 요공(耀空)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영산의 유력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에서는 인종 13년(1135)에 노비로 승려가 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만들었다.3) 그런데 신돈의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에 소재한 옥천사(玉川寺)의 노비였다.4) 따라서 신돈이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신분에 의존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씨(辛氏)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영산 지역의 토성(土姓)이었다.5)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산 지역에 분묘를 두었던 신돈의 아버지는 이곳의 유력자였을 가능성이 있다.6)

이처럼 영산 지역의 유력자로 추측되는아버지와 계성현 옥천사의 노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신돈은 어려서부터 승려가 되었다. 그가 승려로서 일찍이 인연을 맺은 사찰은 그 어머니가 종노릇을 한 계성현의 옥천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창녕 화왕산 남쪽에 있었던 이 사찰은 신돈이 죽임을 당한 뒤 곧 폐쇄되었다. 그 뒤 다시 고쳐지어졌지만, 완성되기 직전에 다시 헐리고 말았다. 신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7) 이런 점에서 볼 때, 옥천사를 단순히 신돈의 어머니가 종노릇 한 곳으로만 볼 수는 없다. 옥천사가 그만큼 신돈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뜻이다.

일찍부터 옥천사와 인연을 맺은 신돈이 어느 계통의 승려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옥천사는 신라 화엄종의 개조(開祖)였던 의상(義湘: 625∼702)의 화엄전교(華嚴傳敎) 10찰 가운데 하나였다.8)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신돈은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본래 이름이 편조였다는 점도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편조는 ‘무한한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을 가진 광명편조(光明遍照)를 줄인 말이다. 광명편조는 화엄종에서 주존불로 모시는 비로자나불을 일컫는 산스크리트어 ‘비로카나(Vairocana)’를 의역한 것이다. 편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신돈이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9)

신돈이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을 가능성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신돈은 집권하고 있는 동안 8회에 걸쳐 문수회(文殊會)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이 화엄법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화엄경》에 따르면,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더불어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이 되어 삼존불을 이루고 있다.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이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돈이 개설한 문수회는 화엄법회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돈은 당시에 문수의 후신으로 칭송을 받기도 하였는데,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칭송된 경우는 중국 화엄종의 제1조인 두순(杜順: 556∼640), 신라말의 화엄종 승려인 희랑(希郞)처럼 화엄종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돈이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를 왕사에서 축출하고 천희(千熙: 1307∼1382)를 국사로 추대한 점도 신돈이 화엄종 계열의 승려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보우가 선종 승려였던 데 반해, 천희는 화엄종 승려였기 때문이다.10)

신돈은 이처럼 화엄종 계열에 가까운 승려였다. 그런데 그는 보우에 의해 사승(邪僧)으로 몰렸다. 보우가 공민왕에게 신돈에 대해 논하면서,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승(眞僧)이 뜻을 얻게 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왕께서 잘 살피시어 신돈을 멀리하시면 종사(宗社)에 다행함을 얻을까 합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11) 신돈과 보우가 단순히 종파만 달랐다면, 보우가 신돈을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신돈은 왜 보우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았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사상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서로 다른 신돈과 보우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보우는 공민왕의 왕사가 되어 원융부(圓融府)를 세우고 선·교 종문 사사(寺社)의 주지 임명을 마음대로 했던12)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민왕의 친모인 명덕태후(明德太后: ?∼1380)와 같은 남양 홍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보우가 권문세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일찍부터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 신돈은 어머니가 미천하였기 때문에 그 무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하였다고 한다. 신돈이 자신의 미천한 신분 때문에 그 무리들과 어울리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신돈이 보우와 달리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보우가 신돈을 사승으로 깎아 내린 것은 신돈이 자신의 입장과 그 출신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돈은 이처럼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 세력과 입장을 달리한 인물이었다. 그가 집권한 뒤 보우를 왕사의 자리에서 축출했던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보우가 권문세족 중심인 당시의 불교계를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신돈에 의해 국사로 추대된 천희가 권문세족과 거리가 먼 지방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3)

3. 신돈의 집권과 개혁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계에 불만을 가진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던 신돈이 공민왕과 결탁하여 정권을 맡은 것은 공민왕 14년이었다. 공민왕은 즉위한 이래 오래도록 개혁을 추구하면서 신돈과 같은 인물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려왔다. 공민왕은 “세신대족(世臣大族)은 친당(親黨)이 뿌리를 이어 서로 감추고 있으며, 초야신진(草野新進)은 정(情)을 속이고 행(行)을 꾸며서 명예를 탐하다가 귀하게 현달하게 되면 문지(門地)가 한미함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과 혼인해서 모두 그 처음을 버리고 있으며, 유생(儒生)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門生)·좌주(座主)·동년(同年)을 칭하고 당(黨)을 이루어 서로 의를 두터이 하면서 정(情)에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세 부류는 모두 쓰기에 부족하다.”라고 하여, 기존의 정치집단들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을 떠나 홀로 서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인순(因循)의 폐단을 고치려고 하였다.

이러한 때에 공민왕은 기이한 꿈을 하나 꾸었다. 어떤 사람이 칼을 빼어 자신을 찌르려고 하는데, 승려 한 사람이 이를 구해주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이튿날 태후에게 그 꿈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태후의 외척인 김원명(金元命: ?∼1370)이 꿈에 본 승려의 용모와 닮은 신돈을 소개해 주었다. 공민왕이 기이하게 여겨 신돈과 더불어 담론하였는데, 그 총명하고 말 잘함 등이 자신의 뜻에 맞았다.

공민왕은 이로 말미암아 신돈을 비밀리에 자주 궁중으로 불러들여 공리(空理)를 논하였다. 그 뒤, 공민왕은 마침내 신돈이 도를 얻어 욕심도 적고 또 미천하여 친당도 없기 때문에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리라.”라고 맹세한 뒤, 공민왕은 신돈에게 국정을 맡겼던 것이다.

여기에서 공민왕이 신돈에게 국정을 맡긴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그가 권문세족을 비롯한 기존의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신돈이 공민왕의 개혁구상을 실현할 만한 능력을 갖춘 데다가 권문세족을 비롯하여 개혁의 대상이 되는 기득권 세력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신돈 집권기에 정비된 많은 제도 개혁은 실제로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계에 대한 그의 불만이 집권 이후의 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신돈의 개혁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그 하나는 인적 쇄신을 통한 기득권 세력의 견제와 개혁 세력의 양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를 바탕으로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14) 신돈이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현량을 등용하여 삼한(三韓)의 백성이 조금은 편안함을 얻게 한 뒤에 장차 산림(山林)으로 돌아가고자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먼저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인적 쇄신은 그가 집권한 지 30일 만에 친훈(親勳)과 명망 있는 자를 파면시켜 내쫓으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이 모두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신돈은 관리를 승진시킬 때 근무연한을 고려하는 순자격식(循資格式)을 실시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권세가의 자제들이 남보다 빨리 승진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고 평가된다.15) 그리고 신돈은 현량(賢良)의 등용을 강조하면서 개혁 세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신돈이 전선(銓選)을 하면서 현량을 천거한다고 스스로 칭하였으나 제목(除目)이 발표되고 보니 천거된 사람들이 모두 평소에 그가 마음에 둔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보이는 현량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신돈은 이들을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중수하려고 하였는데, “문선왕(文宣王: 孔子)은 천하 만세의 스승인데 어찌 적은 비용을 아끼어 전대(前代)의 규모에 이지러지게 하리요.”라고 하였다. 현량 양성에 대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제의 개혁을 통해 권문세가뿐만 아니라 유생들까지 견제하였다. 신돈은 공민왕 17년에 시험관인 좌주를 없애고 친시(親試)로 과거시험을 치렀고, 이듬해에 원나라의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제도를 도입하여 좌주의 실권을 회시에서만 갖게 하였다.16) 신돈은 이를 통해 좌주·문생·동년 등을 칭하면서 당을 이루는 유생에 대해 견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진 세력이 과거를 통해 등용될 수 있는 길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신돈이 추구했던 개혁의 또 다른 방향은 민생안정의 도모였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의 설치가 주목된다. 원종(元宗) 10년과 충렬왕(忠烈王) 14년 및 27년, 그리고 공민왕 원년에 각각 설치된 바 있는17) 이 기구는 토지의 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신돈은 이 기구의 판사(判事)가 되어, “호강(豪强)의 무리들이 종묘·학교·창고·사사·녹전·군수전 및 국인이 세업(世業)으로 삼는 전민을 거의 다 탈점하더니, 전주(田主)에게 돌려줄 것을 판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들이 양민을 노비로 삼아 주현·역리·관노와 백성의 역(役)에서 도피한 자들을 모두 다 농장(農莊)에 묶어 두니, 백성들은 병들고 나라는 여위게 되었다.

이제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이를 추정케 하여 서울은 15일, 각 도는 40일을 기한으로 한다.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나, 기한이 지나 일이 발각되는 자는 규찰하여 다스릴 것이다. 다만 망령되이 고소하는 자는 또한 죄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넓은 토지를 차지하여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권세가들이 힘없는 양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국가의 땅을 몰래 차지하고 나아가 일반 양민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신돈은 권세가들이 이처럼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본래대로 되돌려 놓고자 했던 것이다. 신돈은 이를 위해 전민변정도감의 판사를 맡아 이틀에 한 번씩 업무를 직접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권세가들이 빼앗았던 전민들을 그 주인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외(中外)가 크게 기뻐하였고, 당시에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심지어 성인이 나왔다고 신돈을 떠받들었다고 한다.

신돈은 이처럼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인적 쇄신과 민생의 안정에 역점을 두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신돈의 개혁 조치는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 세력과 입장을 달리하며 성장했던 그가 선택한 당연한 길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신돈의 등장은 즉위 초부터 시도했던 개혁의 성과에 만족하지 못했던 공민왕에게 기대감을 심어 주었다. 공민왕은 신돈의 원찰(願刹)인 낙산사(洛山寺)에 행차하여 “불초한 내가 나라에 임한 지 15년 동안 홍수와 가뭄의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금년에 풍작이 들었으니, 이는 실로 첨의(僉議)의 선치(善治)로 말미암은 것이리라.”라고 말하였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그런 기대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반민의 경우는 신돈을 일컬어 ‘신승(神僧)’이라 하거나 ‘성인(聖人)이 세상에 났다’고 하였으며, 혹은 ‘문수의 후신’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신돈이 추진한 개혁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4.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무너진 개혁의 꿈

권문세족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과 입장을 달리한 신돈의 개혁은 국왕과 일반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권문세족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신돈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몰린 이들은 그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불만은 불교계 내부에서도 나타났다. 먼저 권문세족적 기반을 가진 보우는 공민왕에게 신돈을 사승(邪僧)으로 깎아 내리면서 멀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윤소종(尹紹宗: 1345∼1393) 집안의 승려인 부일(夫日)은 “신돈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이 개·돼지만도 못하여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인데, 선현(禪顯)이 그에게 붙어서 따르고 있으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도망하여 산으로 들어갔다.

사실, 신돈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불만은 그가 공민왕에 의해 정치적으로 주목받을 때부터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일찍이 “신돈은 골법(骨法)이 옛 흉인(凶人)과 같으니 가까이 하지 마옵소서.”라고 공민왕에게 말한 바 있었다. 이제현은 공민왕이 즉위한 이래 추구해온 개혁을 담당한 인물이었다.18) 그렇지만 그는 공민왕이 말한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좌주·동년을 칭하고 당을 이루어 서로 의를 두터이 하면서 정에 따르는’ 유생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신돈이 그를 지목하여 “문생과 그 문하의 문생들이 나라의 도둑이 되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이제현이 신돈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신돈의 집권 전부터였다. 신돈이 이 점을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해를 가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그렇다.

또한 이승경(李承慶: ?∼1360)은 신돈을 가리켜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이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벼슬하다가 공민왕 6년에 그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고려에 돌아온 인물이다.19) 그리고 문하시랑평장사와 홍건적을 평정하기 위한 도원수가 되기도 했던 그는 공민왕 9년 3월에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謀威遠功臣)이 되었다가 윤5월 계유(癸酉)에 죽었다.20) 따라서 이승경이 신돈을 접한 것은 공민왕 9년 윤5월 이전이었다. 신돈이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을 만난 것이 공민왕 9년 이전이었다는 뜻이다.21)

신돈은 이처럼 집권하기 전부터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죽음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였다. 정세운(鄭世雲: ?∼1363)은 신돈을 요승이라 하여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신돈은 왕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피해 다녔다. 그는 이 때문에 다시 머리를 깎고 두타(頭陀)가 되었다. 그가 다시 궐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승경과 정세운이 죽은 뒤였다. 그는 이때부터 왕의 사부(師傅)를 칭하며 국사(國事)에 자문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세운은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가 공신에 책록되었던 인물이다.22) 기철(奇徹: ?∼1356)을 주살한 공으로 지문하성사에 오르고, 다시 20만 대군의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탈환한 공을 세워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오른 그는 공민왕 11년 3월에 죽었다.23) 신돈이 왕의 사부가 된 것은 정세운이 죽은 공민왕 11년 3월 이후였다는 뜻이다.24)

신돈의 정치적 등장은 이처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의 이러한 반발은 그가 집권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공민왕 16년 10월에는 오인택(吳仁澤)·경천흥(慶千興)·목인길(睦仁吉)·김원명(金元命)·안우경(安遇慶)·조희고(趙希古)·이희비(李希泌)·한휘(韓暉)·조린(趙璘)·윤승순(尹承順)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으며, 17년 10월에도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 등이 신돈을 죽이려고 계획하다가 적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득권 세력의 이러한 반발에는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가 개입되어 있었다.25) 앞에서 본 것처럼 신돈은 명덕태후의 외척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돈과 태후는 서로를 꺼려하고 있었다. 태후는 공민왕 15년 8월에 있었던 연회석에서 “미망인이 어찌 감히 외부의 중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신돈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26) 뿐만 아니라 18년 5월에는 “어찌 신하에게 정사(政事)를 맡겨서 공(功)이 있고 죄(罪)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켜 화기(和氣)를 손상케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거나 “왕은 나이가 어리지도 않는데 어찌 나라의 권력(國柄)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태후는 신돈에게 정권을 맡긴 공민왕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돈은 공경(公卿)과 구신(舊臣)으로 표현된 기득권 세력들을 쫓아낸 뒤 오직 태후만을 꺼렸다고 한다. 특히 15년 8월의 연회석에서 수모를 당한 뒤, 그는 태후에게 깊이 감정을 품어 여러모로 해치려고 하기도 하였다.

명덕태후가 이처럼 신돈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후가 신돈에 의해 제거된 이들을 옹호하여 공이 있고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해주고 있다. 그리고 태후의 조카사위였던 경천흥(?∼1380)과27) 외척이었던 김원명 등이 16년 10월에 오인택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던 모의에 가담한 것도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15년 3월에 상소를 올려 신돈을 공격하다 쫓겨난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도 경천흥과 친척관계에 있었던 인물이다.28) 신돈과 대립했던 사람들이 명덕태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김원명은 신돈을 공민왕에게 직접 소개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신돈이 집권한 뒤, 그는 삼사좌사·응양군상호군(三司左使鷹揚軍上護軍)이 되어 8위 42도부병을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원명이 태도를 바꾸어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에 가담한 사실도 그와 태후와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기득권 세력은 왕의 모후인 명덕태후를 중심으로 해서 신돈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누구보다도 공민왕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민왕은 “모후(母后)께서는 어찌 자식의 허물 드러내기를 이와 같이 하나이까?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신(臣)의 죄(罪)가 아니라 다만 난신(亂臣)을 금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면서, 신돈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신돈이 제거되기 3개월 전까지 명덕태후와 접촉을 끊기까지 하였다.29)

신돈은 이처럼 왕의 모후인 명덕태후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공민왕의 보호로 다행히 두 차례의 모반 사건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반발을 억누른 것은 아니었다. 신돈으로서는 당연히 이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방안 가운데 하나가 5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의 부활이었다. 신돈은 스스로 5도도사심관이 되어 각 지방을 직접 통제하려고 하였다. 신돈은 이를 통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공민왕이 5도도사심관제도의 회복을 청하는 상서(上書)를 불사르면서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돈이 각 도·주·현의 사심주목(事審奏目)을 가지고 제도의 회복을 다시 청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신돈이 제기한 5도도사심관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심관 제도를 파한 충숙왕(忠肅王: 1313∼1339)의 뜻을 내세워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민왕이 이를 거절한 실제 이유는 ‘각 주의 사심관 만큼 큰 도둑은 없다’는 그의 사심관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권문세족의 세력화에 불만을 가지고 개혁을 추구해온 공민왕이 신돈의 세력화 역시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공민왕은 조일신(趙日新: ?∼1352)·기철(奇轍: ?∼1356)·최유(崔濡: ?∼1364)·김용(金鏞: ?∼1363) 등 친원파 세력과 대립하면서 권문세족 등의 세력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공민왕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신대족·초야신진·유생 등 기존의 정치집단을 불신하고, 세상을 떠나 홀로 서 있는 신돈을 중용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자신의 심복에 가까운 대신(大臣)이라도 그 권세가 커지면 제거하고 말았다.30) 공민왕이 5도도사심관의 부활을 거절한 것은 신돈의 세력화에 의혹을 제기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기현(奇顯)·최사원(崔思遠) 등이 복심이 되고 이춘부(李春富)·김란(金蘭) 등이 우익이 되어 신돈의 당파가 조정에 가득 차게 되자 왕도 스스로 불안해 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점이 공민왕과 신돈의 협력관계가 갖는 한계였고, 신돈 정권이 갖는 한계였다.

이처럼 공민왕과 신돈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직면하여 이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을 키우는 것과 관련하여 서로 입장을 달리하였다. 신돈이 정치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공민왕이 의혹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양자의 이러한 입장 차이는 머지않아 기득권 세력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김원명의 동생이자 태후의 외척인 김속명이31) 당시 선부의랑(選部議郞)을 지낸 이인(李靭)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투고를 가지고 공민왕에게 신돈의 모반을 거론한 것이다. 공민왕은 이를 계기로 마침내 신돈과 그 추종세력을 일거에 제거하였다.32) 그리하여 신돈은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죽임을 당하였고, 그 추종세력들도 대부분 죽거나 유배되었다. 기득권 세력의 폐해를 바로잡으려던 신돈이 좌절을 겪은 것이다. 이때가 공민왕 20년 7월의 일이었다.

5.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돈은 권문세족 중심의 불교계에 불만을 가진 화엄종 계통의 승려였다. 신돈이 집권한 뒤 추구한 개혁에는 그의 이러한 입장이 반영되어 나타났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견제와 민생의 안정을 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 민들은 성인이니 신승이니 혹은 문수의 후신이니 하며 그를 추종하였다. 그러나 신돈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몰린 기득권 세력은 사승이니 요승이니 하면서 그를 깎아 내리고 공격하였다.

그런데 신돈은 모반죄로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그에 의해 개혁의 대상으로 몰렸던 세신대족·초야신진·유생 등의 기득권 세력은 다시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신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이들에 의해 덧칠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신돈을 깎아 내림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이들에 의해 그것이 확대·재생산되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禑王: 1374∼1388)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만 해도 그렇다.

《고려사》에서는 우왕과 그 아들인 창왕(1388∼1389)의 기록을 〈열전〉 반역조(條)로 분류하고 있다. 두 왕이 신돈의 자손으로서 왕위를 도둑질하였기 때문에, 다른 왕들의 기록과 같이 〈세가〉에 모아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왕의 출생이 그와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제거하면서 이전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신돈의 집에서 데려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민왕이 당시 일곱 살이었던 우를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책봉할 때에 어느 누구도 우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우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그를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제기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왕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함께 폐위될 때에도 그의 정통성이 부정되지는 않았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은 창왕 1년(1389) 11월에 우왕이 이성계를 죽이고 복위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었을 때 비로소 제기되었다. 이성계 일파가 공양왕(1389∼1392)을 즉위시키면서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33) 다시 말해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은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성계는 공양왕도 쫓아내고 결국 고려까지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고려사》가 이성계를 창업군주로 하는 조선시대에 그 신료들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던가!34)

백보를 양보하여 신돈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개인적 행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승려였던 그가 끊임없이 성 추문을 일으키고 있었고, 아들까지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유교에서 치국의 도를 구하는 고려에서 그가 도덕적 결백이 요구되어지는 승려였기 때문에 지워진 부담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적 행태 때문에 민생의 안정을 위해 그가 추구한 개혁까지 부정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들마저도 신돈이 추구했던 개혁에서 그 개혁의 방향을 찾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 그렇다. ■

정선용
전남대학교 사학과 및 서강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논문으로 <궁예의 세력 형성과정과 도읍선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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