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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 찬술의 배경과 과정 / 안성두
[ 특집 ] 대승불교의 경전 찬술 어떻게 볼것인가
[11호] 2002년 09월 10일 (화) 안성두 pratipaksa@hanmail.net
1. 서론

대승경전은 석가모니불의 입멸 후 보살들과 신들에 의해 은밀히 보관되어 왔던 것이 사오백년 후에 세상에 출현한 것, 또는 삼매 속에서 붓다에 의해 직접적으로 설시되었던 것이 문자로 표현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승경전이 대승의 특별한 종교체험과 연관되어 나왔고 따라서 대승경전은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역사적’ 붓다가 설한 내용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대승의 이러한 경전관은 그들의 붓다관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부파불교도에게 있어 대승경전의 ‘불설(佛說)’로서의 권위는 인정되고 있지 않다.

부파불교의 ‘대승비불설’이라는 비판에 대해 세친은 《석궤론(釋軌論, Vya?hya?ukti)》에서 일종의 대승경전 해석학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이 문제는 여기서 깊이 다루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일체법 무자성을 설하는 반야경 계통의 대승경전을 언어에 대한 직설적 의미(yatha?uta?tha)로서가 아니라 밀의(密意, abhipra?a)에 기초한 것으로 해석하는 그의 입장이다. 부파불교가 초기경전, 즉 니카야(nika?a)나 아함에 나타난 법상(法相)의 분류에 치중했다면 대승경전은 설자(說者)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불설’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든 대승경은 부파불교도들이 주장하듯 석가모니불에 의해 설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경(僞經, apocryphal)이다. 그러나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대승경이 ‘불설’이라는 주장을 훼손하지는 못할 것이다. 불교에서 해탈 체험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기에 만일 누가 반야바라밀이나 진실재로서의 진여에 대한 불가언설적 인식을 통해 석가모니불과 동일한 해탈적 인식을 얻고 또 이를 스스로 자각했다고 한다면, 삼매 속에서 획득된 자신의 ‘해석’의 확실성을 ‘불설’과 동일시하고 ‘불설’로서 선언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다른 ‘체험’의 체계로서의 대승경전이 어떤 역사적 사회적 교리적 배경과 과정을 통해 찬술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고 이에 관한 연구도 아직 초보 단계에 있을 뿐이다. 인도인의 비연대기적 사고방식은 실로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대승경전 찬술의 배경과 과정’이라는 주제를 서술함에 있어 우리는 이를 두 단계로 나누어 서술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찬술의 배경이다. 그 사회적 배경 및 이란 종교와의 관련성은 바샴(Basham)의 설명을 중심으로 서술될 것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의 성립은 먼저 대승불교를 믿던 집단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 순서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 문제는 곧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논의로 수렴될 수 있다. 인도 대승불교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연구는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1)에 의해 선구적으로 수행되었다. 그의 설명은 많은 일본학자에 의해 수용되고 있지만 몇 가지 전제는 쇼펜(Gregory Schopen)과 해리슨(Paul Harrison)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우리는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이들의 논의를 몇 가지 점으로 요약해 교단적 배경이라는 항목에서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 경전 내에서 발견되는 사상적 단서로부터 어떻게 대승의 주요 관념이 생겨나왔는가를 ‘보살’ 관념을 중심으로 간략히 서술할 것이다.

두번째는 찬술의 과정이다. 우리는 대승경전이 문자화된 후 어떻게 전승 내에서 기본 관념이 변천했는지를 몇 가지 예를 제시함으로써 찬술의 과정을 서술할 것이다.

2. 대승불교 성립의 외적 조건

1) 정치 사회적 배경
기원전 180년 마우리아 왕조가 멸하고 쿠샨 왕조가 쇠퇴했던 2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북인도는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겪는다. 마우리아 왕조를 멸망시킨 슝가 왕조 역시 기원전 70년경에 멸망하고 그 후 북인도는 중앙아시아에서 침입해 온 여러 이민족들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러한 계속된 침입과 이에 따른 전쟁의 결과 북인도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빠졌고 전통적인 사회적 제도와 관습 등은 거의 해체 단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혼란상을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는 선인(仙人) 나르칸데야(Na?kan.d.eya)의 입을 빌려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그의 시대가 마지막 칼리유가의 시대로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강탈하고 아비는 자식을, 자식은 아비를 속이고 죽인다.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로부터 재물을 빼앗고 다른 사람의 처를 강탈하며 소년은 7∼8세에 아비가 되고 소녀는 5∼6세에 아이를 낳는다.

사람들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시대에는 야만인들이 성스런 땅을 침범해 살육하고 약탈하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따라서 가정과 사회적 규범이 파괴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베다 전통의 의례와 희생 제의는 더 이상 준수되지 않고 오직 죽은 자의 유골을 보존하는 분총(墳塚, ed.u?a) 숭배를 권장하는 이교도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음을 한탄하고 있다.2)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분총 숭배가 불교의 탑(stu?a) 숭배를 가리키고 이교도가 불교도를 지시한다는 사실이다. 이 구절은 사회적 혼란기에 새로운 형태의 종교 운동이 기존의 종교를 대신해 고통받는 민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물론 이것은 전통주의자인 선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규범이나 질서의 해체 과정으로 보이겠지만 이 혼란의 시대는 실로 새로운 종교 운동, 즉 불탑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믿어지는 대승불교나 인도의 비쉬누 신앙, 시바 신앙 등의 종교적 헌신 운동의 시작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기도 했다.

불교의 측면에서 볼 때 당시 불교교단은 아소카 왕 이후 왕실과 부유한 상인으로부터 후원받아 넓은 사원에서 공동생활을 했고, 바르훗(Bharhut), 싼치(Sanchi), 나가르쥬나콘다(Naa?a?junakon.d.a)의 유적이 보여주듯 번성했다. 재정적 문제뿐 아니라 다른 사회적 의무로부터 해방되어 그들은 선정(禪定) 수행과 교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분석적 탐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재가신자와 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부파불교는 전문화되어 갔고 이런 경향을 지닌 부파불교로부터 민중들이 그들의 고통을 현실적으로 경감시켜 줄 수 있는 위로를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부파불교는 윤회와 업보, 보시와 선정의 공덕을 강조했지만 민중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보다 쉽고도 실천적인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가르침을 갈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2) 이란 종교의 영향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타적 존재로서의 보살의 이상이다. 이때 ‘보살’ 사상은 어떤 하나의 요인의 일면적인 압도적 영향하에 발생되고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보다는 여러 내적, 외적 요인의 결합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외적 요인을 고려할 경우 우리는 ‘보살’ 사상이 가진 특성이 어디서 유래했고 어떤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동기를 부여받게 되었는지 묻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바샴은 이란 종교와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보살사상의 형성에 있어 이란 종교와의 관련성은 이 사상이 생겨났던 지역적 상황과 시대적 맥락을 고려해 볼 때 그 개연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샤카 왕조와 큐샨 왕조 사이의 시기에 북서부 인도에 있어 이민족의 침입과 지배를 통해 다문화적 접촉이 이루어졌고 많은 새로운 관념들이 소개되었다. 이런 접촉을 통해 생겨난 아미타불(amita?ha), 보살 등의 사상에 있어 이란 종교의 영향은 명백하다고 보인다. 또한 지역적 맥락을 보더라도 간다라 지역과 인더스 강 유역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화단(火壇)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교리면에서 조로아스터교는 민중들에게 현실적 도움을 약속한다. 천상의 구제자는 지상의 핍박받는 민중을 돕고 보호하려고 한다. 비록 그들은 전능한 존재는 아니고 거짓과 싸우는 데 있어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민중을 돕기 위해 그들은 필요한 곳에 언제나 있다. 최후의 심판일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구세주로서의 조로아스터교의 샤오샨트(Shaoshyant)가 미래불인 미륵불과 유사하며, 무량광으로서의 아미타불이 관세음, 대세지의 두 협시보살을 대동하는 삼위일체적 신(神) 관념은 초기의 조로아스터교와 공통된다는 사실이 널리 지적되고 있다. 북서부 인도에 있어 이란 종교의 영향은 분명 새로운 종교적 표현을 갈구하던 민중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었을 것이고 이런 방향으로 대승불교의 보살 사상이 발전하는 데 일조를 했을 것이다. 바샴은 보살 사상의 형성에 있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아래의 4가지 점으로 요약하고 있다.3)

① 현실적 궁핍 속에서 천상의 구제자에 대한 기대.
② 정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 굳건한 결단의 중요성.
③ 천상의 구제자가 도래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
④ 모든 중생의 궁극적 구원.

불교가 북서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점차 세력을 확대해 감에 따라 민중들의 이런 요구를 교의 내에 수용했을 것이다. ①은 천상의 보살 관념으로, ②는 보살의 확고한 결단으로, ③은 세간의 정신적 발전을 촉진시키려는 미륵보살 등의 보살의 이타행으로, ④는 자기구제 대신에 중생구제를 지향하는 보살의 원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샴은 보살 사상의 여러 측면에 걸쳐 이란 종교의 영향이 인정될 뿐 아니라 보살 사상 자체도 그 출발점은 부분적으로 이란 종교와의 접촉을 통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보살 사상의 형성에 기여했던 다른 외적 요소로 당시 인도 내에 있어서의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를 거론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판테온은 힌두교 내의 새로운 형태의 유신론의 대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바가바드 기타(Bha?avad G沖ta?》와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인격신에 대한 헌신적 경향은 우주의 궁극적 토대로서 모든 중생을 사랑하는 인격신에 대한 관념이 그 당시 신앙관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초기불교에는 등장하지 않는 아미타불 숭배와 믿음을 통한 구제라는 대승불교 교의는 힌두교의 이런 헌신적 유신론에 대응하면서 생겨났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힌두 종교의 여러 요소를 흡수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3) 제도적 요인
히라카와는 대승불교의 기원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초기 대승교단의 제도적 측면의 고찰이 필수적이라고 간주하고 특히 재가신자의 ‘사리’ 공양과 부파불교와 병행해 존재했던 불탑 신앙집단의 찬불 신앙이 대승의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대승경전에 빈번히 언급되는 선남자, 선여인을 대승불교의 후원자라고 간주한다.

교단적 측면에서 볼 때 《아함경》이 4부 대중을 청자로 지칭하는 데 비해 대승경의 특징은 도입부에서 청중들을 언급할 때 먼저 성문승가(s쳑a?aka-san?ha)를 언급한 후 보살중(bodhisattva-gan.a) 또는 보살승가(bodhisattva-san?ha)를 덧붙인다는 데 있다. 이런 사실은 구분된 상가로서의 대승의 집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초기 대승불교의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승려와 보살은 서로 독립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만일 두 집단이 같은 사찰 내에 공주(共住)했다면 아마 별도로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이 여러 곳에서 보살중과 성문승가를 구별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정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법화경》 《십지경》 등의 오래된 대승경에서 보살은 성문승가와는 구별되는 집단으로서 독립된 조직을 가진 무리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보살중은 단순히 대승을 따르는 비조직화된 단순한 무리가 아니라 잘 조직된 집단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문승가와는 완전히 독립된 집단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대승에 귀의시키기 위해 성문승가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설명된다. 따라서 보살중 속에 대승으로 귀의한 성문승가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교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차원에서 양 집단이 상호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고 간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아비달마 논서에서 대승에 대한 소승의 비판은 매우 희소하기 때문이다.

히라카와는 대승불교 성립의 직접적인 사회적 배경은 불탑 숭배라고 말한다. 대승불교는 붓다 중심의 종교로 대승의 기원은 불탑 신앙과 관련되어 있고 그 중심은 재가신자의 활동이다. 대승의 기원에 관한 그의 설명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이 부분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로 그는 《대반열반경》(장부 니카야, No. 16)의 기술을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붓다의 열반 후에 어떻게 사리를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 아난다가 물었을 때 붓다는 출가자들은 그런 문제에 관여하지 말고 자신의 해탈의 문제에 몰두해야 한다고 답하고 있다. 붓다의 유물을 보관하는 탑의 건축이나 다비의식은 재가신자에게 위임되어야 한다고 설시하고 있다. 붓다는 어떻게 그의 육신을 화장하고 탑을 건축하고 그것을 꽃, 향, 산(傘) 등을 갖고 숭배해야 하는지에 관해 상세히 설하고 있다.
근본설일체유부와 법장부의 율장에 따르면 탑에서 의례가 벌어질 때 많은 상인들이 모여 장을 열고 금, 은, 진주 등의 보석과 의복을 탑을 유지하기 위해 보시했다고 한다. 보석 등의 사용이 율에 따라 승려에게 금지되었다고 본다면 탑의 유지나 관리 등의 임무는 재가신자의 몫이었다고 보인다. 또한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것을 본다든가 꽃을 꺾고, 시장에 들어가는 것은 승려에게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재가신자와 함께 불탑 숭배를 주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역된 율장에 따르면 탑은 재가신자의 관리하에 있었고 반면 팔리 율장에 따르면 탑에서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매우 초기부터 재가신자들이 불탑 주위에 모여 사원 속에서 주장된 ‘법의 불교’ 대신에 ‘믿음의 불교’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개연적이다.

또 《대아미타경》은 일반적으로 《8천송 반야바라밀경》보다 오래된, 소위 원시 대승경에 속한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법장비구의 24대원이 나타나는데 그 중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제6 서원과 제7 서원이다. 제6 서원에서 그는 불상을 숭배하는 선남자 선여인을 극락정토로 받아들이길 서원하고, 제7 서원에서 6바라밀을 수행하는 사문을 그의 정토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불퇴전보살로 만들 것이라고 서원한다. 재가신자와 승려들에 대한 각각의 서원은 이 경전이 편찬될 무렵 아미타불을 믿는 재가신자들이 그들의 그룹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전통적 소승불교에서는 아미타불과 같은 현재불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제7 서원에서 언급된 사문은 사찰 밖에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출가보살의 종교활동의 중심지로 탑과 아란야가 언급되고 있다. 전자가 대승경전 낭독과 병의 치료 등을 위한 장소라면 후자는 선정 수행의 장소로서 생각된다.

상좌부와 유부 등은 석가모니불을 포함해 모두 7분의 붓다가 존재했다고 믿는다. 현재 석존의 시기는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이다. 이들에 의해 불탑 숭배는 경시되어 왔고 또 붓다에 대한 공양보다 승가에 대한 공양이 더 큰 공덕을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진보적인 대중부 계열의 학파는 현재에도 시방에 무수한 붓다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차이티카(Caitika, 制多部)파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 불탑 숭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불탑 숭배는 살아 있는 붓다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 불탑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는 재가신자들은 아마 불탑 속에 계신 붓다가 오래 전에 반열반했고 지금 생존해 있지 않다는 붓다관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에도 아축불(aks.obhya)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붓다 신앙이 재가신자들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은 《8천송 반야바라밀경》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불탑을 숭배하는 재가와 승려들은 《8천송 반야바라밀경》이 편찬된 1세기 이후부터 아마 ‘선남자 선여인’으로 불려졌고 ‘보살’로 칭해졌을 것이다.

불탑 숭배가 발전하고 이것이 점차 제도화되어 감에 따라 탑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집단이 생겨나고 이들에 의해 불탑 숭배의 공덕과 탑에 모신 붓다의 살아 계심과 위대함이 강조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부파불교의 엘리트주의적 구제론에서 어떤 종교적 위안도 발견할 수 없었던 민중들에게 강렬히 어필했을 것이다. 히라카와는 이런 과정이 수세기 지속되면서 새로운 구제의 교의가 발전되고 이를 설하는 《법화경》 《아미타경》 《화엄경》 등의 경전도 찬술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러한 인도 대승불교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히라카와의 선구적 업적은 근래 서구에서 쇼펜(Gregory Schopen)4)과 해리슨(Paul Harrison) 등에 의해 몇 가지 점에서 비판되고 있다.

쇼펜의 연구의 중심자료는 비문의 명문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이다. 그는 이것이 민중적 차원에서 실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관한 정보를 주는 반면 문헌적 정보는 제2차적 추론을 위한 근거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인도의 비문에 대한 그의 연구는 주로 문헌에 의거해서 결론을 추출해 내는 히라카와의 해석과 다른 차이를 보여 준다. 그는 아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비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대승불교적 증거는 매우 희귀하다. 그는 비문적 증거에서 대승적 경향을 보여주는 용어가 4세기 이후 나타나긴 하지만 대승이란 용어는 5세기 이후에 비로소 명시적으로 사용된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기원전 2세기부터 발견되는 문헌에서의 대승불교의 기원설과는 달리 일반사회에서 대승은 비로소 이 무렵에 굳건한 토양을 내렸다고 추론한다.

따라서 대승은 독립된 집단으로서 4세기까지는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추정하고 있다. 5세기 동안 대승은 일반 민중들에 의해 어떤 독립된 제도화된 집단으로서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예외는 1977년 발견된 2세기 무렵의 비문에 나타난 아미타불에 대한 언급이다. 대승불교 속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수많은 언급이 있지만 비문적 증거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희귀한 이유는 대승불교도 사이에 그들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추정한다. 대승불교는 아마 이 시대에 극소수의 승려들에 의해 진행된 불교운동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이에 무관심했을 것이다.

대승의 기원이 탑과 ‘사리’ 숭배로부터 기원했고 이는 재가신자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보는 히라카와와는 달리 쇼펜은 초기의 비문적 증거로부터 승려들이 불탑 숭배에 있어 주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간주한다. 또한 대승으로서 확인될 수 있는 비문과 관련해 다수가 승려라고 하는 사실로부터 쇼펜은 대승불교가 승려 중심적 불교였다고 간주한다. 대승불교의 기원과 발전에서 재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는 ‘널리 인정된’ 기존의 학설에 대한 쇼펜의 이런 반론은 주목을 요한다. 원시 대승경에 포함되는 《반주삼매경》에 있어 재가신자의 역할이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쇼펜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대승불교의 성립에 있어 재가신자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평가는 대승경전의 주요한 대변자들로 재가신자를 상정한 《유마경》과 같은 몇몇 경전에 대한 일면적 강조의 결과로 보인다. 고대 인도에서 지속적인 종교적 개혁은 제도적으로 뒷받침된 집단에 의해서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재가신자가 개혁을 지속적으로 가능케 하는 그런 제도적 장치를 가졌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대승경전의 성립과 관련해 곰브리치는 대승이 문자로 쓰여진 경전 없이 생겨났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대승의 성립과 대승경전의 편찬은 밀접히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쇼펜도 경전 숭배에 대한 초기 대승의 언급을 지적한다. 불경의 필사는 기원전 1세기에 주로 일어났고, 따라서 대승은 문자화된 경전이 생겨나기 전에 기원했으리라 보여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훼터는 초기 대승경전이 구전되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구전의 주체가 되고 이를 보존하는 집단, 즉 승가 내에서 이런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대승은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승가에 반대하는 재가신자 운동에 뿌리를 둔 텍스트를 승가가 보존했다고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로카크세마(支婁迦讖)에 의해 2세기경 한역된 초기 대승경전에 대한 해리슨의 연구는 이러한 쇼펜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해리슨은 이들 초기 대승문헌 속에서 비록 재가 여신자들이 언급되고는 있지만 주로 승려들이 중심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인들의 지위는 매우 낮다고 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여기서 사찰에 대한 어떤 반감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중심적인 요소는 완전한 붓다를 향한 추구, 즉 보살의 서원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후기에서처럼 신성화된 존재로서의 보살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초기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붓다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만의 구제를 위해 아라한이 되려는 열등한 해탈도에 대한 반감으로 특징지워진다.

이와 관련해 해리슨은 대승의 시원적 발전에 있어 그 추진력은 인가에서 떨어져 아란야에서 수행하는 승려로부터 왔다고 본다.5) 대승은 도시에 기반을 둔 재가신자의 헌신적 종교운동과는 거리가 먼, 엄격한 고행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것이 대승경전의 시원적 동기이고 이는 아마 불교의 원래의 성격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승은 불교에 있어 엄격한 고행 전통에의 회복이라는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쇼펜은 1세기경의 큐샨 왕조, 즉 대승불교의 초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보적경》 중의 〈마하가섭회〉에 나오는 경향을 언급하고 있다. 이 경은 보수적인 사찰 중심적 관점을 옹호하고 있고 재가의 열등성과 외진 곳에서의 고행의 이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6)

대승불교 문헌의 기원에 있어 붓다가 계속 살아 있다고 하는 관념의 중요성은 쇼펜과 해리슨에 의해서도 수용되고 한층 강조되었다. 쇼펜은 고고학적 자료에 의거해 고대 인도에서 불교집단은 돌아가신 붓다가 우리 주위에 살아 계시다는 관념에 보다 친밀해 있음을 보여 주었다. 탑에 보관된 붓다의 사리는 붓다 자신이라고 간주되었다. 붓다는 그의 사리 속에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리를 통해 붓다는 마치 사찰 속에 현존해 있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승려들 사이에 현존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받아들여졌을 때 불교는 붓다의 지속하는 현전 속에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가 우리 주위에 살아 계신다고 하는 것은 ‘붓다에 대한 상기(buddha-anusmr.ti)’라고 하는 어떤 특정 선정과 관련될 수 있다. 이런 수행법은 초기부터 매우 잘 알려져 왔고 그것이 주는 효과는 수행자가 마치 지금 붓다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반주삼매경》에서 수행자는 정토에 계신 아미타불을 하루 종일 나아가 일주일 내내 관하는 관법을 상세히 배우게 된다. 그 이후 수행자는 삼매 속에서 아미타불의 영상을 얻게 되고 그를 통해 아직 듣지 못했던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

‘붓다에 대한 상기’라는 이런 공통된 선정 수행에 의해 자극받은 승려들은 아마 그들의 비전의 진실성을 주장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경을 찬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몇 학파에서 붓다의 우월성에 근거한 새로운 종교적 이념이 등장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항시 현존하는 붓다의 대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붓다가 됨으로써 이런 불멸성을 얻으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선정 속에서 살아 있는 붓다를 친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받거나 대승경전을 받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3. 보살 관념 등장의 내적 배경

대승의 성립은 부파들의 분열처럼 분파로서 설명되지는 않는다. 베헤르트(Heinz Bechert)가 보여 주었듯이 불교에서 분열로 이끈 것은 교리적 차이의 여부가 아니라 사찰 내의 실생활을 규정하는 율의 공유 여부라면 대승이 부파와 같은 사원에 거주하는 데 하등의 문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사찰 내의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계를 공유하고 있기에7) 일상생활 속에서 양자의 구별을 이끌어 내기는 힘들다.

초기 대승경전에는 성문승과 독각승에 대한 훼폄이 자주 발견되며, 후기의 대승경들은 그들을 ‘소승’ 즉 열등한 해탈도로서 경멸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자신들의 가르침을 우월한 길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소승’에 대한 대승경전의 비판으로부터 양 집단 사이에 일상생활에서 실질상의 대립이 있었다고 하는 결론을 성급히 이끌어 내서는 안 된다. 대승의 관점을 취하지 않은 승려들은 대승의 승려를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으며 소위 대승경을 일종의 ‘허구’라고 간주했던 듯 하다. 대승의 논서에서 대승의 입장을 강력히 옹호하는 대승정법설이 많이 보이는 반면 부파불교의 입장에서 대승에 대한 체계적 논박의 글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대승경전의 양적인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승이 부파불교와 명백히 구별되는 점은 부파가 아라한이라는 자리적(自利的) 목표를 추구하는 데 비해 대승은 보살이라는 이타적 종교성을 지향하는 데 있다고 보인다. 숭배 대상의 차이를 통해 대, 소승이 구별된다는 것은 “부파가 사리불탑이나 아난탑 또는 목련탑을 숭배하는 데 비해 대승은 반야바라밀, 문수사리 등을 공양한다”는 법현의 《불국기》 기록에서 시사되고 있고,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명시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 소승은 함께 율에 따른 생활을 하고 사성제를 수행하지만 그들의 차이는 대승이 대승경을 낭송하고 보살숭배를 하는 반면 소승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불교사상 내부의 어떤 교의가 ‘보살’관념의 발전으로 이끌었을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대승의 어떤 관념이 특정 부파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해서 대승의 기원을 그 부파라고 성급히 단언하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 대중부로부터 대승이 기원했다는 주장은 교의적 면에서 볼 때 매우 유사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개연적일 수도 있지만 양자의 유사성이 너무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의 주요 논서는 오히려 근본설일체유부와 더 많은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통설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상좌부 계열에서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불의 전생에 적용되고 있다. 바샴에 따르면 그들의 ‘보살’관념은 외부의 영향 없이 순전히 불교적 테두리 내에서 발전되었던 반면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자로서의 대승의 보살은 미륵불과 같은 미래불에 대한 믿음에서 유래했을 것이다.8) 미륵불은 이미 기원전 200년경에 문헌 속에 나타나며 ‘미륵불’ 교의가 수용되었을 때, 현세에서의 보살의 활동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마련되었을 것이다. 《전생담》에서 보살은 지상에서의 활동 후에 천상에서 오래 거주한다.

따라서 미륵불도 지상에 나오기 전까지 천상에 거주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대승의 보살관의 전개는 적어도 이론적으로 초기 상좌부의 붓다관으로부터 연역해 낼 수 있고, 보살사상의 연원과 관련해 붓다와 천상의 보살이라는 교의는 이미 초기불교의 순환론적 시간개념 속에 이미 함축되고 있고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살’ 사상의 시원과 발전에 있어 《전생담》의 역할은 지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생담》이 ‘보살’ 사상의 형성에 있어 최초의 단계라고 한다면 보살사상이 발전과정 중에서 그것에 의해 영향받았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대승 보살사상의 중요한 전거인 《보살장경》에서도 14군데에서 붓다의 전생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의해서도 방증된다.

바샴은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의 불상, 탁실라 지방의 비문, 《대아미타경》과 《법화경》의 기술을 근거로 보살에 대한 교의가 1세기경에 이르러 완연히 발전했고, 공덕의 회향이라는 사고도 ‘천상의 보살’의 관념에 영향받아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4. 대승경전 찬술 과정

인도에 있어 대승경전의 찬술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알기 어렵다. 따라서 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의 방법을 사용했다. 첫째, 여러 차례 한역된 동일 텍스트의 비교를 통해 이 텍스트의 내적 발전과정을 고찰해 보았다. 둘째, 대승경전은 종종 경전 모음의 형태로 편집되었다. 이 모음집을 이루는 각각의 경전은 여러 역사적 발전 단계를 보여 주며, 이를 추적함으로써 대승의 중심 관념의 발전이 보다 용이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를 위해 《대보적경(大寶積經, maha?atnaku?.a)》에서의 보살사상의 발전을 도식화시켜 나타낼 것이다. 이것은 간텍스트적 연구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셋째, 대승경전의 찬술 과정에서 비교적 후기에 속하는 유가행파 경전의 찬술상의 특징을 《능가경》을 중심으로 간략히 언급하겠다.

첫째 방식의 연구는 어떤 하나의 대승경전에 대한 다양한 번역이 존재할 경우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 《8천송 반야바라밀경》은 여러 시기에 걸쳐 많은 역경가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본인 로카크세마의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179년)과 두번째로 오래된 지겸(支謙)의 《대명도경(大明道經)》(222∼228년)에서 반야바라밀은 보살에게 설시된 것으로 나오지만 후대의 다른 역에서 이 문장은 생락되어 있다. 이 경우 전자는 경전 편찬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고 다른 역본들은 보다 넓은 맥락에서 다룰 필요성에서 이를 결락시켰을 것이다.9)

둘째 방식의 연구는 한 개념이 여러 경전 속에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탐구함으로써 경전의 찬술 과정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보살장(bodhisattvapit.aka)’이란 보살사상의 핵심적 개념이 각 대승경전에서 어떤 뉴앙스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파겔(Ulrich Pagel)의 최근 연구는 이런 방향의 좋은 예를 보여 준다. 또한 그가 제시하듯 《대보적경》을 구성하는 49경을 보살 관념의 문헌적 발전에 따라 4 단계로 나누는 것은 비록 각각의 경들의 연대기적 재구성의 불확실성 때문에 확정적이지는 않다고 해도 각각의 경들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좋은 기준을 줄 수 있다고 보인다.10)

① 가장 오래된 층은 〈보명보살회(普明菩薩會, Ka?쳙apaparivarta)〉, 〈욱가장자회(郁伽長者會, Ugraparipr.ccha?〉로서 2세기 경에 번역되었고 그것들이 보살사상의 고층에 속한다고 간주된다.
② 〈보살장회(菩薩藏會, Bodhisattvapit.akasu?ra)〉는 초기 경들에 나타난 자료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보여 준다.
③ 〈정거천자회(淨居天子會, Svapnanirdes첺)〉, 〈무진혜보살회(無盡慧菩薩會, Aks.ayamatiparipr.ccha?〉는 보살에 관한 논의에 있어 매우 발전된 조직화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10지(地)의 도식이 사용되고 있다.
④ 〈승만부인회〉, 〈보살견실회(菩薩見實會, Pita?utrasama?ama)〉에서는 보살 수행의 실천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고 교의적 문제에 주안점이 놓여지고 있다.

셋째, 반야경 계열의 경전이 대부분 용수의 논서에 비해 성립 연대가앞서는 반면 유가행파의 경들은 《유가사지론》의 성립 후에 편찬되었다고 보인다. 《능가경》의 찬술상의 특징은 현전하는 형태로서의 이 경의 편찬이 유가행파의 주요 논서에 비해 성립 연대가 후대라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경이 세친의 《유식30송》에서도 두 개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11) 이것은 경에서 론으로의 일반적 발전 과정이 항시 타당하지 않다는 예를 보여 주는 것으로 흥미롭다고 하겠다.

대승경전의 찬술과 전파 과정에서 우리의 흥미를 자아내는 경우는 혹시 중국에서 찬술된 대승경전이 인도로 역수입된 경우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장이 인도에서 《대승기신론》을 산스크리트로 번역해 그곳의 학장(學匠)들에게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는 이 점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기신론》이 그 후 인도에서 유행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것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혹시 다른 경우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와 관련해 최근 《반야심경》이 쿠마라지바(羅什)에 의한 《대품반야바라밀경》(대정, No. 223)의 한역(404년 번역)에 의거해 중국에서 편찬되었고 이것이 (아마 현장에 의해) 다시 산스크리트로 역번역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논지를 전개한 나티에르(Jan Nattier)의 논문12)은 매우 관심을 끈다. 더욱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방증하기 위해 제시한 여러 사실은 개연성이 높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또 이 경이 한문 문화권에서 갖는 중요성을 고려할 때 상세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5. 결론

위에서 우리는 대승경전 찬술의 배경을 대승의 기원과 관련해 논의했고, 그 과정을 대승경전의 한역 과정 속에서 나타난 차이를 통해 살펴 보았다. 대승의 기원은 당시의 사회 정치적 혼란기에 민중들의 삶에 구제의 희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에 대한 갈망이 그 배경에 있었고 이는 대승불교에 있어 ‘보살’ 사상의 대두와 발전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보인다. 대승 보살사상의 대두를 위한 여러 외적 요인의 기술에서 우리는 이란 종교의 영향이 상황론적으로 매우 개연적이라는 바샴의 설명을 따랐다. 또 대승 보살사상의 내적 배경은 《본생담》의 보살관에 근거한 미래불과 천상의 보살이라는 관념의 도입일 것이다.

제도적 측면에서 대승의 기원이 재가신자에 의해 주도된 ‘사리’ 신앙과 불탑 숭배로부터 발전되어 나왔다는 히라카와의 연구에 대해 쇼펜과 해리슨은 각각 비문적 증거와 초기 대승경전 자체의 진술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대승의 기원을 둘러싸고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오히려 승려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집단이 대승경전의 찬술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쇼펜의 논의는 전체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보적경》의 각각의 경에서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은 수적인 면에서 거의 대등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는 파겔의 지적13)을 반대 논거로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쇼펜이 의거하는 소수의 비문적 자료가 대승불교의 광범위한 시기를 커버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히라카와의 주장이 담고 있는 보다 큰 문제는 대승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시작점과 종착점을 갖고 일직선적 발전 단계를 통해 진행되어 왔다고 하는 그의 전제에 있는 듯 보인다. 대승불교는 불교 내의 여러 복합적 요소가 다선적(多線的)으로 전개된 종교운동으로 어떤 단선적 발전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이런 다선적 운동은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다른 이질적 요소를 통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다. 대승경전의 찬술과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불교 내의 여러 복합적 종교, 문화적 요인, 예를 들어 ‘사리’ 신앙과 불탑 숭배, 불상의 건립, 보살 관념 등의 변천에 대한 미술사적, 고고학적, 문헌학적 연구를 아우르는 학제간의 연구에 의해 보다 전체적이고 역사적 관점에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

안성두
한국외국어 대학 독어교육과 졸업.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부설 한국학 대학원에서 한국불교 전공으로 석사. 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 수료. 독일 함부르크 대학 인도학과에서 인도 유식불교 전공으로 석사.박사학위 취득. 현재 충북대 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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