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Home
불교평론 소개 l 지난호 보기
 
 인기키워드 : 사색과 성찰, 청규, ,
> 뉴스 > 특집 > 기획특집
     
중국불교의 위경제작 어떻게 볼 것인가
[ 특집 ] 대승불교의 경전 찬술 어떻게 볼것인가
[11호] 2002년 09월 10일 (화) 김진무 ripl@ripl.or.kr
1. 머리말

중국불교의 대체적인 특징으로 흔히 불성론(佛性論)의 전개, 위경(僞經)의 찬술, 종파(宗派)의 발전 등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특징들은 사상과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인도로부터 발생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발생한 중국 전통사상과의 충돌, 융합의 과정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위경의 찬술과 유행은 보다 두드러지게 인도로부터 전래한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종교, 혹은 전통성을 갖는 전적(典籍)에 있어서 ‘위경(僞經)’, ‘위서(僞書)’의 출현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등의 역사에서도 끊임없는 위경의 논란이 일어나고 도교, 유교의 각 경전과 핵심적인 저작들에 대한 위경, 위서가 끊임없이 출현하고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는 고대로부터 경전과 중요 전적들에 대한 위서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 역대로 목록집을 만들고, 또한 각 전적들에 대한 진위(眞僞)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불교에 있어서 위경의 찬술의 과정과 그 내용에 대한 연구는 현대불교학이 일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어 대체적으로 그 면모가 밝혀져 있다고 할 수 있다.1) 그런데 중국불교에 있어서 위경의 제작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단순하게 참다운 불전(佛典)이 아니라고 배척해야 할 것인가? 본고에서는 그러한 위경에 대하여 그 개념, 위경이 나타나게 된 사상적 배경과 그 내용, 중국불교에 있어서 위경이 갖는 사상사적인 의의 등을 살피고, 최종적으로 현대의 우리 불교인들이 위경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를 논해 보고자 한다.

2. 위경(僞經)이란 무엇인가

경전에 대하여 ‘진위(眞僞)’의 구별을 진행한 것이 바로 ‘위경(僞經)’과 ‘진경(眞經)’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위경’은 이른바 ‘진경’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진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전에 대한 개념부터 살펴본다면 위경의 개념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바로 부처님에 의한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불타(佛陀)가 설한 바를 기록한 것을 ‘진경(眞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타가 설하지 않은 경전을 ‘비진경(非眞經)’이고 바로 ‘위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불멸(佛滅) 후 불제자들은 4차에 걸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결집을 행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결집은 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암송의 형태였으며, 전적(典籍)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상당히 후대의 일이다. 또한 인도에서도 불교의 발전에 따라 여러 경전들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대승경전은 전통적인 부파불교에서 이른바 ‘악마의 가르침’ 등으로 비방되는 등 이른바 ‘위경’의 논란이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 그렇다면 부처님에 의한 참다운 경전인 ‘진경’의 소재는 더욱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실상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하여 직접 기록되거나 저술된 전적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경전은 모두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른바 경전의 서두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歡喜奉行)”으로 끝나는 형식은 바로 ‘들어(聞)’ 기록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경전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또한 없는 것이다. 바로 제자들이 부처님을 시봉하며 설한 내용을 암송하여 전한 것이고, 그것이 후대에 전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비록 부처님께서 직접적으로 저술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경’의 개념 문제는 사실상 서로 다른 각도와 지역에서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위경의 개념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각 학파에 있어서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하나의 경전에 대하여 인도에서 어떤 학파에서는 위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반면에 다른 학파에서는 진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인도에서는 위경으로 인정되었어도 중국에서는 진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중국불교에서의 위경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중국불교에 있어서의 위경의 개념에 한정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불교의 중국 전래는 바로 경전의 번역과 그 행보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에 불교는 서한(西漢) 말(末)에서 동한(東漢) 초(初)에 서역(西域)의 교통로가 열리며 본격적으로 수입되게 된다. 중국에서의 역경(譯經)은 어떠한 체계성이 없이 그대로 서역의 승려가 지니고 온 경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그에 따라 인도에서와 같이 사상의 발전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른바 대승과 소승의 경전, 부파불교와 대승의 논서 등이 차별이 없이 번역 소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중국에서 ‘교상판석(敎相判釋)’이 나타나게 하였다.3) 왜냐하면, 불교의 교의(敎義) 발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는 대승과 소승 등의 경전과 논서에서 서로 모순되는 교설이 전개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부처님의 교설을 나름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교판(敎判)’에는 기본적으로 인도로부터 전래되어 번역된 모든 경전이 ‘진경’이고, 또한 모두 부처님의 ‘친설’이라는 전제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유추하자면 바로 인도의 ‘범본(梵本)’이 존재하는 경전은 ‘진경(眞經)’이고, 그렇지 못한 경전이나 논서 등은 ‘위경(僞經)’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유행하는 경전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그에 대한 목록을 작성한 이는 위진(魏晋) 시기의 도안(道安)이다. 도안은 흔히 ‘격의불교(格義佛敎)’의 대표적인 반야(般若)학파인 ‘본무종(本無宗)’의 종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또한 역경된 경전의 체계적 정리에 관심을 가져 비록 현존하지는 않지만 역경된 경전을 정리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편집하였다. 그는 또한 경전에 대하여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 등의 삼과(三科)를 세웠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종리중경목록》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승우(僧祐)의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는 《신집안공의경록(新集安公疑經錄)》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 최초의 ‘위경’에 대한 목록이다.

승우는 권두에 부가한 서문에서 당시 위경들이 유행하는 세태를 한탄하고 위경이라고 의심될 수 있는 것들을 후학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에서 목록을 작성하였음을 밝히고 있다.4) 이로부터 본다면 이미 도안(312∼385)의 동진십육국(東晋十六國) 시대에 위경으로 의심되는 경전들이 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안의 목록에는 모두 26부 30권의 의경이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경(疑經)’의 판별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남북조 시기의 승우 역시 《출삼장기집》에 《신집의경위찬잡록(新集疑經僞撰雜錄)》의 제목으로 총 46부 56권의 위의경의 목록을 게재하고 있다. 그의 서문에는 《장아함경(長阿含經)》의 “법과 서로 어긋나면 부처님의 설이 아니다(與法相違則非佛說)”라는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로부터 위경 판별에 대한 대원칙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무엇보다도 불교의 ‘법(法)’에 근거하여 그 경전과 논서의 진위를 판단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서문에는 ‘위경’을 구별하는 기준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여러 경전과 동이(同異)를 비교하여 그 경전의 진위를 구별하고, 그 문체(文體)와 내용의 깊이로서 판별하며, 또한 서역(西域)과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역경한 목록과 대조하여 그에 누락된 제명의 경전 등을 ‘의경(疑經)’ 혹은 ‘위찬(僞撰)’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5)

이러한 《출삼장기집》에 게재된 도안과 승우의 위경 목록으로부터 대체적으로 의심이 가는 경전을 ‘의경(疑經)’으로 부르고, 분명하게 중국에서 찬술되었음을 확인한 경전을 ‘위경(僞經)’으로 칭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중국불교에서는 끊임없이 위경과 의경에 대한 목록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끊이지 않고 위경의 찬술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역대로 나타난 위경에 관한 목록들은 시대적으로 중요한 것만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수(隋) 비장방(費長房)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서 당시 존재하던 이른바 육가(六家)의 목록, 즉 《중경별록(衆經別錄)》(현재 돈황본 잔간으로 일부만이 남아 있음),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위세중경목록(魏世衆經目錄)》(소실), 《제세중경목록(齊世衆經目錄)》(소실), 《양세중경목록(梁世衆經目錄)》(소실), 《수중경목록(隋衆經目錄)》 등을 인용하여 총 141부 335권의 위의경을 밝히고 있다. 또한 당(唐) 도선(道宣)의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권10 〈역대소출의위경론록(歷代所出疑僞經論錄)〉에 총 170여 부 320의 위의경을 들고 있고, 당(唐)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권28 〈의혹재상록(疑惑再詳錄)〉과 〈위망란진록(僞妄亂眞錄)〉에서는 406부 1,074권을 들고 있다.6) 이러한 목록집에서는 위경과 의경에 대하여 몇 가지 분류를 하고 있다.

우선 ‘위망(僞妄)’으로 명확하게 위경임이 판별된 것을 가리키고 있는데, 《불명경(佛名經)》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등으로 중국 찬술이 분명한 것을 말하고 있고, ‘의혹(疑惑)’으로 경전의 내용과 체제 등으로 볼 때 중국 찬술이라는 의심이 가지만 명확하게 판별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키며, 《인왕경(仁王經)》 《무위도경(無爲道經)》 《수원왕생경(隨願往生經)》 등을 가리킨다.

그 외에 ‘난진(亂眞)’이라고 하여 경전을 초략(抄略)한 것으로 비록 위경은 아니지만 진경과는 차이가 있는 것을 가리키며, 유명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등이 이러한 초경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실역(失譯)’으로 역경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경전을 가리킨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역경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각 시대적으로 역경에는 반드시 그 목록을 제작하여 그 연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역경목록에 들어있지 않음은 그 진위를 의심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구분에 있어서는 경전뿐만 아니라 대·소승의 논서 역시 포함되어 있다.7)

이로부터 위경의 대체적인 개념에 접근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위망(僞妄)’으로 판별된 것만을 위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다 폭넓게 본다면 ‘의혹’ ‘난진’ ‘실역’도 위경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위경’의 개념을 그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설정하고서 논술을 진행하고자 한다.

3. 위경의 찬술 배경과 그 내용

서한(西漢) 무제(武帝)의 “백가를 배척하고, 유가만을 숭상한다(罷黜百家, 獨尊儒術)”는 정책에 따라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 가운데 유교(儒敎)가 국가의 주된 학문으로 성립된다. 유학(儒學)이 국가의 핵심적인 학문으로 성립되자 진조(秦朝) 시황(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부터 소실된 유가 경전의 복원에 힘쓰게 된다. 그로부터 경학(經學)이 주된 학문적 조류로서 나타나게 되는데, 대량으로 소실된 경전의 잔간(殘簡)을 정리하게 되면서 경학은 급속도로 주석학(註釋學)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주석은 심지어 한 글자에 수만 마디의 해석을 가하는 경우까지 나타나고 있다.8) 이러한 학풍은 본원적인 학문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특히 漢初의 유학자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사상적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는 주석학은 학문적, 사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한다. 더구나 서한(西漢) 말기에 나타나는 북방 민족의 발흥 등의 국가적인 위기에 무기력한 대응으로 점차 주석학 위주의 경학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한(東漢) 중기에 이르러 경학은 다만 관직을 얻는 도구로 전락하고, 전체적인 경학은 완전히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이른바 당시에 형성된 “육경은 나를 주석하고, 나는 육경을 주석한다(六經注我, 我注六經)”는 격언에서 보여지듯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던 ‘경전’은 이미 더 이상 침범할 수 없는 성역(聖域)이 아닌 것이 되었다. 드디어 위진(魏晋)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경학에 반대하여 새로운 학문 연구의 방법으로 현학(玄學)이 등장하기에 이른다.9)

현학은 한편으로 기본적인 학문 연구의 방법으로 여전히 주석을 택하지만, 그것은 이미 한대(漢代)의 방법과는 본질적인 차별이 있었다. 한대의 주석은 철저하게 문자(文字)와 문의(文意)의 파악을 위한 것으로 그 사상 자체에 있어서는 감히 이의(異義)를 제시하지 못하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는 것이었다. 위진 현학에 있어서는 한조(漢朝) 이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유학(儒學)에 대하여 주석을 하지만, 그 필요에 따라서는 경전 혹은 중요한 전적들의 원본을 과감하게 수정하여 자신의 사상을 개진(開陳)하고 있는 것이다.

위진 시기에 일어나 남북조(南北朝)를 풍미한 현학에 있어서는 대체적으로 그러한 경향이 너무도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남북조는 중국에 불교와 현학이 서로 결합하여 서로 다른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정도에까지 이른 시기이다. 한편으로 이 시기는 불교와 현학의 영향으로 도교(道敎)가 하나의 종교로서 체계를 이루어 가는 시기이고, 불교의 경전에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도교의 경전들을 위찬(僞撰)하는 시기이다. 이른바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 《동진경(洞眞經)》 《음부경(陰府經)》 《태평경(太平經)》 등 비교적 잘 알려진 도교의 위경들이 이 시기에 찬술되고 있다.10)

이러한 흐름은 중국의 불교인들로 하여금 위경을 제작하게 하는 시대적 배경으로서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불교의 영향으로 종교적 체계를 확립해가던 도교에서 불교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위경들을 제작하고, 또한 그것들을 근거로 하여 《이하론(夷夏論)》 《삼파론(三破論)》 등의 불교를 비판하는 저술들이 나타나고 있음에 불교의 입장에서도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특히 도교는 불교가 서쪽의 오랑캐(夷)의 가르침으로 중국 민족(夏)의 예교(禮敎)와는 근본적으로 차별이 존재하고 있어 반드시 “고향으로 쫓아 보내고(放歸桑梓)” 혹은 “천축으로 돌려보내(退回天竺)”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에 그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가 반드시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체적 배경 아래 중국 불교인들은 불교의 홍법(弘法)을 위하여 혹은 인도와는 서로 다른 중국 문화와 습속에 적응하기 위하여 위경을 제작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것 이외에 위경을 찬술한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일반적인 ‘위서(僞書)’의 찬술 동기를 《위서통고(僞書通考)》에서는 첫째, 자신의 이름을 숨기기 위함. 둘째, 자신의 이름이 너무 미약하여 독자들이 읽지 않음을 두려워 함. 셋째,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가탁(假託)함. 넷째, 어떤 사람을 모해하기 위함. 다섯째, 어떤 사람을 무고(誣告)하기 위함. 여섯째, 논쟁에서 이기기 위함. 일곱째, 이익과 상을 받기 위함. 여덟째, 스캔들을 좋아하여 그를 야기하기 위하여 저작함. 아홉째, 자신의 이름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 위함 등의 아홉 가지로 고찰하고 있다.11) 이러한 분류는 일반적인 위서의 찬술 동기로는 적합하겠지만, 이른바 ‘위경’의 찬술 동기에는 좀더 다른 측면이 있다.
불교의 위경 찬술의 동기와 목적에 대하여 근대 이래 최초로 연구를 진행한 《위경연구(僞經硏究)》에서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통치자의 의도에 부합시키기 위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 시기의 《대운경(大雲經)》 등의 찬술이다. 둘째, 통치자의 정치를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삼계교(三階敎)의 경전인 《상법결의경(像法決疑經)》 《유가법경경(瑜伽法鏡經)》 등이다. 셋째, 중국의 전통적인 윤리사상에 부합시키기 위한 것으로, 대표적인 예로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우란분경(盂蘭盆經)》 《수미사역경(須彌四域經)》 《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 등이 있다. 넷째, 특정한 교의(敎義)에 대한 신앙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불정수능엄경(大佛頂首楞嚴經)》 《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 《대통방광경(大通方廣經)》 《관세음삼매경(觀世音三昧經)》 등이 있다. 다섯째, 현존하는 특정인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고왕관세음경(高王觀世音經)》 《승가화상입열반설육도경(僧伽和尙入涅槃說六度經)》 《권선경(勸善經)》 등이 있다. 여섯째, 질병의 치료, 기복(祈福) 등의 미신을 위한 것으로, 《사천왕경(四天王經)》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 《불설연수명경(佛說延壽命經)》 《불설칠천불신부경(佛說七千佛神符經)》 등이 있다.12)

이렇게 여섯 가지 종류로 위경의 제작 목적을 밝히고, 그 가운데 여섯 번째의 위경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위경의 목적에 따른 분류는 무엇보다도 중국불교에서 나타나는 위경은 바로 인도로부터 전래한 불교가 문화와 습속에 있어서 서로 다른 중국 땅에 민간으로부터 침투하여 보다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과정에서 찬술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질병의 치료와 기복 등과 관련된 위경이 가장 많이 찬술되었다는 점으로부터 불교 전래 이전부터 행해지고 있던 민간 신앙과의 결합을 통하여 불교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하였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불교가 지고무상한 진리를 설하고 궁극적으로는 참다운 불국토(佛國土)를 완성하여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종교이지만, 무엇보다도 대중적인 지지기반이 없다면 그러한 궁극적 가르침의 실현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불교가 전래되어 본격적인 중국불교로 태동하는 남북조(南北朝) 시기에 있어서 민족의 전통적 동질성을 무기로 하는 도교의 도전에 일반 민중의 지지는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그에 따라 한편으로는 《사천왕경》 등과 같은 중국의 민간 신앙과 부합하고, 《우란분경》과 같은 전통적인 효(孝)에 부합하는 위경을 찬술하였던 것이다.

수(隋)·당(唐)대는 바로 위경의 찬술이 극성에 이른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각 위경 목록에 나타나는 숫자만도 모두 합한다면 천여 부의 수천 권에 이르는 방대한 숫자에 이른다.13) 수·당대의 위경은 남북조에 비하여 보다 정교해지고 대담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중국의 불교학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경전뿐만 아니라 각종 대소승의 논서에까지 미쳐 용수(龍樹), 마명(馬鳴) 등의 이름을 가탁한 논서의 위찬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경전으로는 지금까지도 널리 유통되고 있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 등이 있고, 논서로는 마명(馬鳴)의 찬술로 되어 있는 중국불교에서 당(唐)대 이래로 불교학 개론처럼 사용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용수(龍樹)의 찬술로 알려진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 《금강정보리심론(金鋼頂菩提心論)》 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14)

이렇게 수·당대의 경론에 대한 위찬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것은 전체적으로 인도에서 발생하여 전래한 불교의 중국적 변용을 상당히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송(宋)과 명(明)대의 위경과 비교한다면 너무도 뚜렷한 차별이 나타난다. 《위서통고(僞書通考)》에서는 각 시대별로 위경과 의경의 목록을 정리하고 있는데, 송대에서는 다만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과 명대에서는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만을 게재하고 있는 것이다.15) 더구나 이 두 경전은 이미 그 이전에 위경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그 시대에 다시금 나타난 것이니, 실질적으로는 송대 이후로는 위경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위경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의 가설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다음의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우선, 당대에 이르기까지 중국불교가 필요로 하는 위경의 찬술이 대체로 종료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방대한 수량의 위경과 논서의 찬술은 이미 그 주제와 내용에서 한계에 도달하였고, 또한 중국불교의 위경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더 이상 위경의 제작이 용이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걸출한 중국불교의 거장들이 나타나 이미 자신의 이름과 목소리로 저작을 발표하여 더 이상 다른 이름 혹은 경전을 가탁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보이는 것이다. 당대의 불교를 종파불교라고 하는데, 이른바 삼론(三論)·천태(天台)·화엄(華嚴)·법상(法相)·정토(淨土)·선종(禪宗) 등 거의 대부분의 종파가 수·당대에 걸쳐 형성되어 완성되고 있다. 또한 각 종파에서는 활발하게 자신의 종의 교의 등에 대한 저작들을 찬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 선종(禪宗)에 있어서 ‘어록(語錄)’의 작용이다. 주지하다시피 선종, 특히 중국 선종의 주류를 이루는 혜능(慧能)의 남종(南宗)은 ‘명심견성(明心見性), 돈오성불(頓悟成佛)’을 제창하고, 스스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강조는 드디어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육조 혜능의 어록을 이른바 ‘경(經)’의 지위로 격상시키고 있다. 이는 중국불교에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커다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그에 대하여 상세히 논하지는 않겠지만, ‘위경’으로서의 경전이 아니라 선종의 조사의 어록을 경전으로 극대화시킨 이상 다시 ‘경전’을 가탁하여 자신의 사상, 혹은 중국불교를 위한 어떠한 경전의 찬술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더구나 송대에 이르러서는 남종 일색의 선종이 중국불교의 주류로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가 중국에서 송대 이후 위경의 찬술이 중지된 까닭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세 가지를 역으로 추정한다면, 다시 중국에서 경전과 논서에 위찬이 나타난 원인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불교에서 위경이 지니는 사상사적인 의의는 무엇이며, 오늘날 그러한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절을 바꾸어 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4. 중국불교에 있어서 위경(僞經)의 의의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중국불교에서 위경의 찬술은 대체로 문화와 사상적 배경이 다른 인도로부터 성립한 불교를 중국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몇몇의 중국불교의 대가들은 대소승의 논서까지도 유명한 용수, 마명 등의 논사(論師)들의 이름을 가탁하여 찬술하였다.
이러한 위경과 중국에서 찬술된 논서들의 작용은 그 각각의 내용과 내재된 기능에 따라 역할이 달랐겠지만, 전체적으로 말해서 불교의 중국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몇몇의 위경들은 오히려 중국불교의 발전에 역작용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위경들은 역대의 위경 목록 등의 작업을 통하여 다만 목록으로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이 현존하지 않아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필 수는 없다. 현존하는 《사천왕경(四天王經)》 등의 내용을 살펴보면 상당한 부분이 본래의 불교와 맞지 않는 도교적이고, 당시 중국 민간에 유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속신(俗信)적인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16) 그로부터 본다면, 현존하지 않는 위경들에 있어서는 보다 불교적인 내용과는 차이가 있어 역사상에서 눈밝은 지식(善知識)들에 의하여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른바 전(前)시대에 ‘위망(僞妄)’으로 판별되었지만, 후대에 와서 ‘진경’으로 판명하여 《대장경(大藏經)》에 편입되고 있는 경전도 다수가 있다.

즉, 수(隋) 법경(法經)의 《수중경목록(隋衆經目錄)》에서는 ‘위망’으로 판별되지만, 당(唐)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서는 ‘진경’으로 판별하여 ‘입장(入藏)’으로 분류된 경전은 《보여래삼매경(寶如來三昧經)》 《인왕경(仁王經)》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안택신주경(安宅神呪經)》 《오고장구경(五苦章句經)》 《약사유리광경(藥師瑠璃光經)》 《범망경(梵網經)》 《십왕생아미타불국경(十往生阿彌陀佛國經)》 등이다.17)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 가운데 《점찰선악업보경》을 예로 들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다.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 권12에는 이 경의 유전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 경전이 역경 목록에 없음을 언급하여 ‘위의경’임을 말하고 있다.18) 또한 개황(開皇) 13년(593) 이 경전이 ‘요사스러운 법(妖法)’임을 조정에 상소하여 경전의 유통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천책만세(天冊萬歲) 원년(元年; 695) 10월 칙령(勅令)에 의하여 ‘진경(眞經)’으로 편입되게 된다.19) 이로부터 이 경전이 당시에 분명 어떠한 이유에서 ‘진경’으로 판별해야만 할 까닭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는 비록 중종(中宗)이 황제에 군림하지만 사실상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모든 정사를 장악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측천무후가 정치적으로 불교와 도교를 철저하게 이용하였음은 불교사에 유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위경일지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진경’으로 판별되어질 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어쨌거나 중국에 있어서 ‘위경’은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효과를 일으킨 측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의 작용이 더욱 강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경이나 위찬된 논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단지 중국 땅에서 찬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 역시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가장 유명한 위경인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비록 《대장경》에 편입되지도 못하였지만, 우리 나라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서 끊임없이 전래되어 지금까지도 ‘진경’ 이상의 대접을 받으며 유행되고 있다. 또한 어느 누구도 당(唐) 초, 혹은 그 이전에 찬술된 이 경전이 수행한 중국 땅에서의 공로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온 이래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아온 내용 가운데 하나는 불교에서는 부모와 권속을 버리고 출가하니, 가장 기본적인 인륜(人倫)인 ‘효’를 저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비판에 가장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경전이 바로 《부모은중경》이었던 것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몇몇의 대소승 논서는 중국에서 용수, 마명의 이름을 가탁하여 찬술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 가운데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경우를 보자. 물론 《대승기신론》이 중국 찬술인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문제이지만, 본고에서는 일단 위찬으로 가정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당대 후반으로부터 이 논서는 종파를 초월하여 일종의 불교학개론의 역할을 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원효(元曉) 스님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통하여 ‘유(有)’와 ‘무(無)’의 대립 문제를 해결하여 ‘화쟁(和諍)’사상을 제시하고, 그것은 한국불교의 사상사를 통하여 심원한 역할을 미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약 명백하게 위경으로 밝혀진 《부모은중경》과 위찬으로 말해지는 《대승기신론》이 ‘위경’ ‘위찬’이라는 이유로 단순하게 배척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당한 정체성의 혼란이 예상될 수 있다. 지금까지 ‘진경’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일상생활에까지 배어든 신앙적 생활은 한순간에 공허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또한 《대승기신론》을 위찬의 이유로 배제한다면 전체적인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국에서나 한국불교에서나 ‘선종(禪宗)’이 그 핵심을 이루며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의 논리를 통한 ‘여래장(如來藏)’사상에 대한 선양이 없었다면 과연 선종이 성립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 논서가 갖는 기타 제 종파에 대한 영향을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고…….

필자는 여기에서 불교의 정신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금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저작된 어떠한 전적도 없는 것이다. 다만 모두 제자들이 듣고서 그를 결집하고, 이후 전적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부처님 당신이 ‘법(法)’에 의지하고 ‘법’에 비추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란 무엇인가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나타나고 있다. 여래(如來)가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은 바로 중생들을 위하여 ‘불지견(佛知見)’을 ‘열어(開)·보이시고(示)·깨달아(悟)·들게(入)’ 하시려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불지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른바 경전의 어디에도 ‘불지견’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설하고 있는 곳은 없다. 다만 그것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경전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이른바 ‘뗏목의 비유’처럼 철저하게 ‘불지견’을 얻기 위하여 이용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권38, ‘뗏목의 비유’에 이어서 “좋은 법도 버려야 하거늘, 어찌 법이 아닌 것에 있어서랴(善法猶可捨, 何況非法)”20)라고 설한 것으로부터 분명하게 ‘법장(法藏)’인 경전을 어찌 대해야 할 것인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착(無着)이 대승이 불설(佛說)임을 논증할 때,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만약 다른 깨달은 분이 있어 대승을 설하였다면 대승은 불설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 깨달은 분이 있다면 그를 곧 부처님이라고 불러야 하기 때문에 대승은 불설이라는 도리가 성립한다”는 것이다.21) 이러한 논리를 중국불교의 ‘위경’에 대입한다면 너무 무리일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경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경전을 대하는 자세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다. 흔히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방대한 대장경과 또한 대장경에 편입이 안된 수많은 경전과 논서, 불교와 관계된 저술들을 보고서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위경’이 갖는 의미를 또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불교학적, 문화적으로 지대한 학술적인 가치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5. 맺음말

이상으로 간략하게 ‘위경’의 개념, 위경이 나타나게 된 사상적 배경과 그 내용, 중국불교에 있어서 위경이 갖는 사상사적인 의의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실상 ‘위경’ 문제는 불법에 대한 이해와 관계된 문제이다. 불법을 맹목적인 신앙으로 삼고, 경전에 지고한 의미를 부여하여 대한다면 ‘위경’ 문제는 상당히 심각할 수가 있다. 분명히 경전이 갖는 의미는 더 이상 강조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바로 그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내용은 바로 경전에 집착하지 말고 철저하게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이다.

필자는 참다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정진과 그러한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만나는 자리가 바로 현재 살아 있는 불교를 만드는 도량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진리(眞理)’의 모습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러한 가르침이 각각의 시대 속에서 어떠한 형식과 과정을 거쳐가며 펼쳐졌는가를 분명히 인식하였을 때, 비로소 참다운 불교인의 사명이 깨우쳐지고, 또한 진정한 불교인으로 거듭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불교 속에 나타나고 있는 ‘위경’은 너무도 그 문화적 가치가 느껴지는 것이다. 전혀 이질적인 문화와의 만남에서 중국 불교인들이 보여주었던 나름대로의 변용은 신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현대 정보화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 변화에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의 계시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보고인 것이다. ■

김진무
동국대 선학과 및 동 대학원 선학과 졸업. 중국 남경대학에서 중국 철학 전공.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선학과 Post Doctor과정에 있다. 논문으로 <佛學與玄學關系硏究>(中文 박사 학위 논문), <魏晉玄學言意之辯的考察><格義佛敎新探>(中文), <神會의 禪思想에 나타난 반야에 관한 고찰>등이 있고, <분등선(分燈禪)><조사선(祖師禪)><선과 노장><선학과 현학><불교와 유학>등의 역서가 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댓글달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수(0)  
전체기사의견(0)
불교평론 소개독자투고불편신고구독신청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135-887]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2-9번지 MG타워빌딩 3층 | Tel 02-739-5781 | Fax 02-739-5782 | 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사성
Copyright 2007 불교평론.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review@hanmail.net
불교평론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및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