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서구불교의 가능성과 과제

1. 머리말

서구에서 동양의 종교인 불교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불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신도들이 늘고 있다.

가령 미국만 보아도 참선 수행이나 위빠사나, 요가 수행을 하는 사람이 1천5백여 만 명에 이르고, 이 중에서 스스로를 불교도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약 6백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들은 미국 전역에 설립되어 있는 불교 사찰, 불교 센터, 참선 수련 센터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련 센터가 1980년대 중반에는 400여 개였는데 90년대 말에는 거의 4배에 이르는 1,600여 개에 이르고 있으니 가히 폭발적인 증가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불교도의 수가 날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실로 불교가 금세기에 들어와서 서구 사회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사실 불교는 서구 사회에서 오랫동안 일부 지식인들이나 학자들의 연구대상에 머물러 있었다. 신앙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구의 일반 대중들도 몇몇의 불교 용어들을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니르바나(열반)·카르마(업)·다르마(법)·삼사라(윤회)·코안(공안) 등이다. 심지어 어느 통조림 회사에서는 자사의 통조림통이 ‘재생’된다는 말을 ‘윤회’된다는 말로 대치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불교는 서구 사회에서 이미 이국적이고 신비한 종교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기독교와 대등한 종교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하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사회인 서구에서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1) 종말론의 허구에 대한 반성
인류사에서 금세기는 가장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먼저 인구만 보아도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16억이었던 세계 인구가 한 세기 동안에 4배에 가까운 60억으로 증가했다. 이런 인구 증가율은 다른 어느 세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마찬가지로 금세기의 과학문명의 발전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인류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안겨 주었으며 의학의 발달은 인류를 많은 질병의 공포에서 해방시켰고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문명이 인류에게 진정한 행복을 선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결국 과학문명이 인간에게 안겨다 준 안락함과 신속함은 인간의 삶의 터전인 자연환경의 파괴와 맞바꾸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핵무기는 전 인류를 단숨에 파멸시킬 수 있는 가공할만한 것이다. 이런 핵무기가 일부 극단론자들에 의해 오용되거나, 컴퓨터가 잘못 작동되어 참혹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류 생존의 위기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항상 복병처럼 숨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한편 금세기를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이는 칼로리를 과다 섭취해서 성인병의 발병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에 불과하다. 지구 도처에서는 영양 실조로 어린이들이 2분에 한 명꼴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부(富)의 편중은 점점 심화되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긴장이 날로 증대하고 있다.

오랫동안 세계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체제로 대립되어 오다가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결되었다. 그 붕괴된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새롭게 종교와 결탁한 민족주의가 들어서고 있다. 민족주의를 표방한 종교적 분쟁들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팔레스티나 지역, 북아일랜드, 체첸 지역, 동티모르, 아프카니스탄, 보스니아 등은 사실 민족주의의 옷을 입고 종교간의 갈등이 표면화 되어 분쟁이 일고 있는 곳이다.

이처럼 종교의 이름을 내세워 지구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 상황,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 현상, 과학문명이 초래한 생태계의 위기를 보고 서구에서는 다시 인류의 역사상 가장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가 도래했다고 법석을 떨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를 종말론자들은 노스트라다무스(M. Nostradamus, 1503∼1566)가 예언한 지구 종말의 시기라고 주장한다. 그 문제의 구절은 이렇다.

“1999의 해, 일곱번째의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려고 그 전후의 기간에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

이 구절에 근거하여 전세계의 종말론자들은 1999년 7월에 지구의 최후의 날이 온다고 주장하고 믿었다. 이에 한국의 공영 텔레비전 방송들도 맞장구를 치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중심으로 흥미 일변도의 종말론을 특집으로 꾸며 방영하였다. 이 특집 방송에서 여러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십자가 형태로 재배열할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내용의 천문학(?)도 함께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 무덥고 야릇했던 1999년의 7월도 지나갔고 벌써 세 번이나 7월을 넘겼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쉬었는지 몰라도 종말론을 믿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허탈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이미 999년에도 1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여 사람들을 일대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서의 이런 종말론은 거의 10년 단위로 있어 왔다고 한다.
1990년대에 우리 나라에서도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1992년 10월 28일에 지구의 종말이 오고 선택받은 자신들만 산 채로 몸이 하늘로 빨려 올라가 천국으로 간다는, 휴거설을 주장하여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던 적이 있다. 물론 이 휴거설은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당시의 잘못된 예언의 결과와 사회적 비판으로 그 자취를 감추기는커녕 아직도 도처에서 종말론을 무기로 삼아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1995년에는 스위스와 프랑스 및 캐나다에서 ‘태양의 사원(Solar Temple)’의 종말론 신도들이 연쇄적인 집단 자살을 하였다. 또한 1997년 4월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샌디애고에서 ‘천국의 문(The Heaven’s Gate)’이라는 종말론 사교집단에서도 39명이 동반 자살하였다. 당시에 핼리혜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였는데,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핼리혜성으로 옮겨 타야 한다는 것이 자살의 동기였다고 한다.

더구나 놀라운 일은 이 집단 자살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고학력 소유의 백인들이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 공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교집단은 연쇄 자살 사건 이후 당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잔존하여 그 세력이 유럽 및 캐나다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종말론적 사교집단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증후처럼 보여지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집단적 좌절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날로 심해지는 공해와 오존층의 파괴 현상에서 야기된 엘리뇨 현상과 같은 기상변이와 생물의 변종 등을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런 현상에 대한 절망적 좌절감으로부터 종말론 집단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800년대 뉴욕에서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예견이 풍미하였다. 뉴욕 시민들이 집집마다 마차를 소유하게 되자 당시의 미래학자는 장차 뉴욕은 점점 늘어나는 말들의 배설물로 가득 차게 되어 일대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그 예견은 빗나갔다.

이런 종말론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오면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이 종말론의 근거이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창조와 종말을 알리는 단선적 시간관이다.

이처럼 비관론적 종말론에 맞추어 미래를 예견하는 일에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지친 것이다. 물론 오늘날 야기되고 있는 환경 파괴의 문제는 심각하지만 비극적 종말론은 더 이상 해결책도 위안도 아닌 것이다. 서구 사회는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 세계관으로 이행된 지 오래되었다.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믿음보다는 과학적 인과론에 바탕을 둔 종교를 찾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는 과학적 인과론에 바탕을 둔 순환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에 종말론에 식상한 현대 서구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류의 현재의 문제나, 앞으로 닥칠 많은 문제들을 종말론적 징후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허구에서 벗어나려는 반성이 깊이 일어난 것이다.

2) 새로운 세계관에 관한 요구
서구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서 자연을 인간 위주로 개발해 왔고, 그 결과 자연 환경은 파괴되어 가고, 생태계는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경제적인 풍요를 지향하는 물질문명의 구조는 인간성의 상실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서구 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젊은 세대들은 낙관적인 전망 대신에 깊은 회의를 지니고 있다. 이는 곧 인류의 미래는 지금까지의 세계관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 팽배해 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곳곳에서는 환경 재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단 하루 사이에 20만 에이커(약 8만 정보, 1정보는 3,000평) 이상의 열대 우림이 파괴되고 있으며, 3만 6천 에이커(1만 4,000정보)의 땅이 사막화되어 불모지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천 3백만 톤의 유독성 화학물질이 공기중으로 방출되고, 그에 따른 오존층의 파괴는 날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토양의 오염, 수자원의 오염, 산성비, 지구의 온난화, 산림 파괴와 함께 하루에 130여 종에 이르는 생물이 멸종된다고 한다. 더구나 4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일 굶어 죽어간다고 하니 매우 심각한 환경 재앙을 겪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상태로 진행되어 간다면 결국 지구는 50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마저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은 이성에 바탕을 둔 과학화와 산업화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 진화, 발전한다는 단선적인 역사관에 회의를 갖게 하였다. 또한 성장과 진보를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던 낙관주의적인 역사관에 따른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흔들리게 된 것이다. 결국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이 심각한 상황의 원인을 주로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근대 서구 과학기술 문명에 돌리게 된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과학기술은 가치 중립적인 것인 만큼 과학 그 자체가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 것이 아니고, 그 과학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점이다.

인간 욕망의 극대화를 지향하고 있는 기술문명이 인류를 절박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면,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서구 사회는 21세기에 들어선 인류가 전환기에 처해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환경(environment)이란 말의 속뜻에는 계몽사상의 연장선에서 인간 중심적 관점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하여 생태계(ecosystem)란 말은 탈인간 중심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오늘날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환경에 대한 시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전략이 숨겨져 있다. 환경이 훼손된 것은 인간 생존에 필요한 여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야기된 부작용이라고 본다. 이것은 인간이 중심적인 존재라는 가치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앞으로 더 나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환경의 중요성을 각성하게 하여, 환경 파괴적인 생산 및 소비를 지양하게 하며 환경 친화적인 기술과 산업을 개발해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환경을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 대상화하여, 인간의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환경을 파괴시킨다면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오히려 인간의 생존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윤리(ethics of anthropocentrism)에서는 인간만이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그 밖의 모든 존재들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수단적, 다시 말해서 외재적 가치만을 지닌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싱거(Singer) 같은 학자는 윤리공동체를 인간 사회에서 동물 사회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통을 알고 감정을 가진 동물도 윤리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동물 중심적 윤리(ethics of animocentrism)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만큼 존중되어야 하고 윤리적인 배려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생물 중심적 윤리학(ethics of bio-centrism)에서는 윤리공동체의 범위를 모든 생물에까지 확장시킨다.

여기에서 인간 중심적, 동물 중심적 윤리관은 존재양식 사이에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단절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생물 중심적 윤리관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 사이에 절대적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생물 중심 윤리관에서도 생물계와 무생물계 사이의 불연속과 절대적 단절성이 전제되고 있다. 이처럼 존재양식 사이의 단절성과 비연속성을 전제로 하여 존재 사이를 질적으로, 절대적으로 구별해 보는 것은 서양의 세계관에 기인한다.

서구 문명의 역사는 곧 인간이 자연을 끝임 없이 정복하는 과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복의 논리를 기독교의 세계관이 뒷받침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너희는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지배하여라”(창세기 1장 28절)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신의 은총으로 여긴 것이다. 17∼18세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된 기술과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의 회복으로 이해하였으며, 근대의 과학적 진보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획득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기술과학의 발달은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지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기독교적 자연관과 근대의 데카르트, 베이컨 이래의 이분법적 자연 이해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식은 힘’이라고 외친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이 말한 지식이란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인간의 현실생활에 유용한 것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자연을 정복하고 대상화하는 서구의 자연관은 서구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기술과학을 발달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과학은 오늘날 인간을 기술과학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그에 따른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초래하였다. 마찬가지로 무차별한 자연 개발에 따른 자연환경의 파괴와 생태계의 파괴 위기, 자원의 고갈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21세기의 문턱에 서있는 인류는 세계관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서구의 지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즉 서구의 세계관이 인류를 이처럼 절박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면,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해결책이란 서구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인류를 암울한 미래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아와 세계를 연기(緣起)로 인식한다. 자연 만물의 원리나 본성이 연기(prat沖tyasamutpa?a)되었다는 것은 곧 ‘수많은 조건들(prat沖tya)이 함께(sam) 결합하여 일어난다(utpa?a)’는 상호 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이렇게 일체 현상이 상호 의존성에 의해서 성립되었기에 어느 것 하나 영원 불변하는 고정된 것이 있을 수 없고(諸行無常), 연기된 것은 서로서로 존재하려고 힘을 들이고 있으며(一切皆苦), 그리고 독자적으로 생성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독립된 실체로서 독자적 동일성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이 없다(諸法無我)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존재들은 서로 상호 의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론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계란 바로 나의 인식주체인 육근(六根)이 여섯 가지의 인식대상(六境)을 만나서 여섯 가지의 정신적 작용(六識)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이것을 일체(一切)라고 하는데 물질계와 정신계가 연기라는 원리에 의해서 통합되어 작용하는 하나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론에서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바라본다.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를 중생이라고 부른다. 중생의 개념이 초기 경전에서는 유정(有情) 즉 생명체를 의미하다가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생명현상이 없는 무정(無情), 즉 무생명체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붓다의 성품인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란 말은 붓다로 성불할 수 있는 범위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으로, 다시 생명체에서 모든 무생명체로 확대되어 간다. 이것은 전 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불교의 생태관의 일면이다. 여기에서 모든 중생이 하나이고 구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불교적 생태윤리관을 보여주는 《범망경》의 구절을 보기로 한다.

모든 흙과 물은 모두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모두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그러기에 늘 방생하고 세세생생 생명을 받아 항상 머무는 법으로 다른 사람도 방생하게 해야 한다. 만일 세상 사람이 축생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마땅히 방법을 강구하여 보호하고 그 괴로움으로부터 풀어주어야 한다.1)

이러한 통찰은 세계와 내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物我同根)이라는 점을 알게 한다. 즉 모든 중생과 나는 서로 뗄 수 없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관계성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을 지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지혜의 실천을 자비라고 한다. 자비는 불교의 생태윤리의 기본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생태윤리는 생물 중심적 윤리를 넘어 생태 중심적 윤리(ethics of ecocentrism)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모든 개개의 존재는 존재 전체의 일부로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에 생태 중심적 윤리공동체는 바로 자연 전체이고 존재 전체와 일치하고 동일한 것이다. 불교의 자비심은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식물뿐만 아니라 돌·물·흙에게도 미쳐야 한다.

이 자비의 생태윤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야기된 지구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생명체들이 공존 공생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져야 할 종교적 윤리라고 할 수 있다. 환경문제가 근원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존재 위기로까지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환경윤리가 생태 중심적 종교윤리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종교적 당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서구 사회는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 우주와 사물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설정하려 한다. 이를 패러다임(Paradigm)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더 이상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대상화되어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지배와 복종의 주종 관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태계의 위기가 인류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없이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유기체적 관계로의 발상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발상의 구체화 가능성을 서구의 학자들은 연기 논리의 상의상관성에서 찾고 있다. 더구나 생태주의자들은 서구적인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상호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불교적인 연계의 사고(inter-connectedness)로 변환할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따라서 저것도 없어지며, 이것이 생겨남에 따라 저것도 생겨나는 것이며, 이것이 없어지면 곧 저것도 없어지게 된다”(잡아함경 II 65)는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사물이 절대적으로 홀로 생성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면서 존재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연기의 법칙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명 중심주의(Life-centrism), 더 나아가 불교적 생태 중심주의 사고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인격의 우주적 확산을 가능하게 한다고 서구인들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온 우주가 서로 유기체적인 관련성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연기법적 세계관에 기초한 생활을 통하여 인간은 모든 생명체와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자비(compassion)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게 되었다.

미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패러다임인 불교의 연기법적 세계관을 서구인들은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3) 새로운 인간관과 가치관의 모색
오늘날 서구사회가 물질 만능주의와 철저한 개인주의로 인한 인간성 상실이라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불교는 어떤 대안을 갖고 있기에 서구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서구의 자본주의는 이미 주지하고 있는 것처럼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에 발생한 경제체제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자유경쟁 속에서의 생산활동은 오로지 이윤 추구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서구 중세시대의 장원 경제체제에서는 이윤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지 못했다. 시민계급이 형성되고,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산업들이 가내 수공업의 수준을 벗어나 그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윤의 추구와 부(富)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이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전통 속에서는 부의 축적을 결코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서구 사회에서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타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칼뱅(1509∼1564)은 신약성서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구절을 로마시대의 귀족들을 빗대는 말로 해석하였다. 즉 당시의 부자란 귀족으로 태어나서 노예와 농민들을 착취하였기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칼뱅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하여 번 것은 깨끗한 것이며 누구나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선택된 인간만이 신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데, 구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재산을 모아 잘 사는 부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칼뱅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이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심지어 이윤이 신의 축복이라는 논리로까지 발전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의 중산계층인 시민, 상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산업혁명 이후에 칼뱅 사상은 자본주의 이념의 뿌리가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활동은 경제원칙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 이윤의 추구를 위해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사회, 모든 것을 효율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경영하려는 사회가 바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더 나아가 실용주의의 가치관이 접목되면서, 모든 것을 현금가치(cash value)로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 아닌 것인가의 여부는, 그것이 현금가치를 갖고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판단된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현금가치화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자라난 현대인의 머리 속에 과연 어떤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는가? 현대인은 인간성의 파괴나 훼손보다는 물질적인 손해를 더 중히 여기게 되었다.

비록 인격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 해도 돈이 생기는 일은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대인의 삶의 목표는 인간 회복, 인격 완성이기보다는 보다 풍요로운 물질의 소유에 있다.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인간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폭력과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까지도 눈앞의 이익을 위한 싸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익을 더 많이 얻기 위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현대인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는 덫에 걸리게 된다.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가 되는 인간 부재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이 싸움은 비단 개인적 차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친구가 오늘에는 적으로 돌아서는 비극이 끊임없이 연출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불교만큼 인간의 본연의 모습과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완성을 지향한 사상은 없다.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살(菩薩, bodhisattva)이다. 보살에게 있어서 깨달음(bodhi)은 삶(satta)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보살은 현재의 삶을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하게 구현하는 지혜를 지녔다. 일반적으로 보살이 가는 길로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내세운다. ‘깨달음을 얻는 길이란 곧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와 하나로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 즉 중생이란 살아 있는 것이든 아니면 생명이 없는 것이든 간에 우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환경이란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환경’이라는 말은 사실 ‘중생’이란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중생’이란 대승불교에서 일체 유정과 무정을 모두 칭하는 말이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뜻이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란 말을 ‘일체환경 실유불성’이라고 바꾸어 놓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웃이라는 개념의 외연을 넓혀서 중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대승보살의 이상(理想)은 현대사회가 요청하는 생태적 가치관과 생태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대승보살은 세계의 모든 현상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은 존재이다. 모든 사물이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즉 생물과 무생물에까지 사랑을 보낸다.

이와 같은 지혜의 실천에서 오는 끝없는 사랑이 자비(maitri-karun.a?이다. 자비는 불교의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기본윤리이고 더 나아가서 모든 존재 사이에 기본이 되는 생태윤리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성의 상실과 가치관의 전도, 개인주의의 피폐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는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 인간성의 회복은 불교의 연기법에 따른, 모든 삼라만상이 자신과 유기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결국 불교의 목표인 인격의 완성은 바로 나와 이웃이 동일체라는 것을 깨닫고 무한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온 세계를 빈곤과 무지와 괴로움이 없는 이상 세계, 즉 생태적으로 온전한 불국토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승 보살적인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살은 자신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과 일치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보살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완성하게 하는 길이 여섯 가지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이다. 보통 육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하게 하는 수단으로 취급되어 왔으나, 바라밀(pa?amita?의 뜻이 완성인 것으로 보아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 완성되어져야 할 보살의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이 완성해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 보시(布施)는 ‘준다’는 말이다. 무엇을 준다는 것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 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나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때가 되면 흘러갈 수 있도록 열어주는 것이 바로 보시라고 말할 수 있다. 보시는 마치 흐르는 물이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 것처럼, 모든 관계들이 살 수 있도록 흘러가게 하는 생명의 원리인 것이다. 보시를 통해서 모든 존재와의 연대감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박탈감이나 소외감을 극복하는 ‘더불어 사는 삶’은 바로 보시를 통하여 구현 가능하게 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을 소유의 방향으로만 투사시킬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삶으로 지향하는 보살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이 욕망의 절제를 환경보살이 가야할 두번째 삶의 양식인 인욕(忍辱)이라 할 수 있으며, 이렇게 자신과 전 존재가 하나의 유기체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알고, 이 대전제 앞에서 자신을 극소화시키는 삶을 지킬 줄 아는 것을 지계(持戒)라고 할 수 있다. 정진(精進)은 이러한 생태적 균형 잡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보살은 쉼 없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하며, 이러한 노력으로 보살은 마침내 모든 존재와 원만한 관계성을 회복하여 평화로운 삶의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선정(禪定)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보살의 완성되어져야 할 삶의 양식은 모두 모든 존재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성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혜(智慧)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보살의 길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환경의 문제나 개인주의의 피폐는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보살의 삶은 서구의 현대인들에게 외적인 재물, 권력, 향락 등의 추구가 참다운 삶의 모습이 아님을 알게 하고, 참다운 인간성 회복, 인격완성의 길이 무엇인가 보여준 것이다. 서구인들은 인간성의 회복과 새로운 가치관의 르네상스(renaissance)가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의 길을 따르는 데 일어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불교의 세계관이나 인간관이 미래에 희망을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서구 사회에 수용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으며, 인류가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꾀하는 한 미래는 결코 암울하고 절망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3. 맺음말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선불교가 서구에 번역 소개되었다. 서구인들을 대상으로 한 스즈키 다이세츠의 일본의 선불교에 대한 여러 강연들을 통해서였다. 시기적으로 티베트 불교의 소개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일본의 선불교가 1960년대 이후 발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양인들에게 조직적으로 다가서려고 했지만, 오늘날의 티베트 불교와 같은 열광적인 환영은 받지 못했다. 티베트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은 티베트 불교 라마들의 일차적인 가르침뿐만 아니라 엄청난 개인적 수행으로 청중을 감동시키는 카리스마를 갖춘 서구 출신 라마들의 활약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서구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고조된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존재한다. 우선 기독교의 단선적 시간관에 바탕하여 제기되는 비관적인 종말론에 대한 서구인들의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반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무차별적인 개발로 인해서 날로 심각해지는 자연환경의 파괴와 생태계의 파괴 위기, 자원 고갈의 문제 등, 과학 기술 문명의 발전이 초래한 위기 의식에 기인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한 기독교의 윤리가 생태계 파괴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임을 인지하면서부터 불교의 세계관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 우주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설정하려는 시도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거기에 부응한 것이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이었다.

서구에 불교가 소개되고 난 후 최근까지도 서구인들은 서구 보편주의 입장에서 불교를 잘못 이해한 측면이 있다.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관점과,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관점이 그것이다.

불교는 모든 중생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소질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의 수행은 불성을 가리고 있는 번뇌를 없애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좌선, 염불과 같은 수행의 결과로 청정한 불성이 드러나게 된다. 불성을 드러낸다는 것, 되찾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도 ‘재결합의 사상’임을 의미한다. 다만 기독교에는 재결합 이전에 신이 있고, 재결합 때도 신이 있지만, 불교의 경우는 그러한 것이 없다.

불성은 창조신이나 초자연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에게 불교가 종교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신성’ 내지 ‘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에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사태들에서 기인한다. 결국 불교가 학문적 연구의 대상에서 벗어나 점차 사회문제, 환경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서구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원인이 된 것이다. ■

최종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수학.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및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중.저서로는 <Qi, ein religises Urwort in china>등이 있고 주요논문으로 <불교의 구원관><한국 토착종교와 불교의 습합과정<연기와 공의 종교신학적 이해에 대한 고찰>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