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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페미니즘이다. / 리타 그로스
해외불교 특집 - 리타 그로스 지음 / 정미숙 옮김
[13호] 2002년 12월 10일 (화) 리타 그로스 mahapanya@hanmail.net)

* 이글은 Rita M,GrossBuddhism after patriarchy 제 8장 "Resource for a Buddhist Feminism"을 번역한 것이다.

만약 정확하고 유용한 과거에 기초를 둔다면 불교의 핵심 개념을 페미니즘적으로 분석하고 불교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쉬울 수 있다.

불교의 특정한 핵심 개념들에 대한 페미니즘의 함의를 주장하고자 할 때 그리고 불교의 제도와 개념들을 재구성하고자 할 때, 역사적 깊이는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이들의 통찰과 주장을 강화한다. 때때로 여성과 불교에 관한 이슈들에 대해서 논평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역사적 지식이 없을 때도 있지만, 만약 이러한 역사적 지식이 없다면 그 토론은 단면적이며 꽤 소수의, 아마도 비전형적인 현대 불교도 집단의 경험으로만 제한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전통에 대한 페미니즘의 논의는 과거보다는 좀더 현재와 미래에 관심이 있다. 과거 전통에 대한 정보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기보다는 그 전통에 대한 페미니즘적 분석과 재구성을 촉진하는 데 사용된다.

불교 페미니즘의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지금까지 거의 손대지 않았던 미지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너무도 짜릿한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에 대한 페미니즘 시각의 역사학은 거의 없었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불교에서 여성의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토론에 그쳤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 있는 논의를 제외한다면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젠더(gender)문제에 대한 불교 교리의 함의에는 거의 집중하지 못했다. 페미니즘의 가치와 일치하는 불교 세계의 재구성을 제안하는 기존 문헌에서도 이와 관련된 논의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서구 페미니즘 사상의 자원

불교 페미니즘의 분석과 재구성을 향한 이러한 모험에 있어서 위대한 자원들 중 하나는 당연히 지난 20여 년 동안 학계와 사고체계를 너무도 급진적으로 바꾸었던 거대한 페미니즘 사상일 것이다. 학문적 방법으로서 그리고 사회적 전망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부록에서 자세히 논의가 되었는데, 이러한 의식 혁명에 의해서 건드려지지 않은 학문적 확신 혹은 인습적 진리는 없었다. 불교의 페미니즘적 분석과 재구성의 대부분은 경험을 이해하는 두 개의 거대하고 근본적인 양식인 불교와 페미니즘을 연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험은 기독교와 페미니즘의 지식을 연결시켰던 기독교 페미니즘과 어떤 면에서 유사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여성해방신학 사상은 불교 페미니즘보다도 더 많이 발달되었으며 더 많은 지지자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페미니스트들 혹은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이 직면하는 대부분의 물음들은 각자가 사용해왔던 많은 전략들만큼이나 비슷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페미니즘과 불교 모두에 친숙한 사람들은 기독교 페미니즘과 앞으로 나올 많은 것들간에 유사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러한 유사함이 모방이라고 오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20여 년 전, 기독교 여성해방운동이 시작될 때 핵심적인 최초의 질문이 제기되었다. 전통 내에서 페미니즘의 전망과 양립할 수 있는 비성차별적인 알맹이를 찾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혹은 이러한 전통 내에서 여성을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간존재로, 위엄을 갖추고 자기 결정력이 있는 그런 존재로 여기는 것이 불가능한가? 기독교 맥락으로부터 나온 종교 페미니즘 사상은 이러한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누어진다.

그중 하나는 ‘전통을 재구성하기’ 작업에 전념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 페미니스트 신학자와 소수의 유대교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이다.1) 이러한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은 전통의 핵심적인 상징들은 본래적으로 성차별적 혹은 여성혐오적이거나 가부장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평등하고 모든 인간존재를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호의적이지만 여성에게는 적대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문화적 관행과 편견들은 이러한 초기 교리들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만약 전통이 초기의 손상된 것이 아닌 평등한 가르침의 핵심을 포함한다면, 그러한 상황이 허용되는 것뿐만 아니라 전통이 재구성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재구성은 불가능하며 유일하고 가능한 대안은 모든 전통으로부터 철수하여 새로운 출발(때때로 소위 기독교 이전의 상징들과 의례로)과 ‘새로운 전통의 창출’을 주장하는 소수의 ‘탈기독교인’ 혹은 ‘탈유대교인’ 페미니스트들이 있다.2)

이러한 진영에서는 왜 재구성이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두 가지 주장을 한다. 그 하나는 종교체계의 상징들이 희망이 없을 정도로 너무도 가부장적이어서 만약 종교전통의 상징으로부터 가부장제를 제거해버린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재구성할 어떤 것도 없다. 비록 반론 역시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적 유일신교의 종교 상징체계에서 이러한 경우를 찾는 것은 쉬울 것이다.3) 다른 하나는 비록 상징체계의 재구성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종교를 통제하는 위계적인 권력층이 여성들의 관심에 너무도 냉담하여 재구성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체계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경우 그 결과는 고통스럽고 소모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대안적인 공동체를 창건하거나 찾아야 한다. ‘여성교회(Womanchurch)운동’4)과 같이 이러한 몇몇 공동체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의 관행이 그 전통내의 공식적인 권위를 가진 자들에 의해 신앙의 표현으로서 인정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모체인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보지 않으며, 그 전통을 지속시키기도 한다. ‘여성의 영성운동(women’s spirituality movement)’ 혹은 ‘페미니스트 위카(feminist wicca)’5)의 주도하에 집단적으로 알려진 다른 공동체들은 그들의 지향성과 이데올로기를 ‘탈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이전’에 의해 정의한다. 그들은 권위적인 제도 체계의 붕괴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 상징체계가 전혀 기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불교 페미니즘의 분석과 재구성은 위의 범주들과 유사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불교에 대한 페미니즘적 역사, 분석 그리고 재구성의 한가운데에 있다면 불교에 대한 이러한 페미니즘의 논의는 재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게다가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상징들이 본질적으로 평등하며, 모든 이들을 해방시키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과 평등하게 관련되며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책의 몇몇 장에서 체계적이고 세밀한 방식으로 이러한 경우를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사례의 설명 이후에 어떤 종류의 재구성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가능한지 혹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한 질문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에 있어서 현재 권위적인 지위에 있는 자들이 이러한 재구성을 격려하고 통합시킬 의지가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 근본적이지만 현재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해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불교와 관련된 재구성은 ‘여성교회(Womenchurch)’ 그리고 ‘여성의 영성운동’과 어떤 점에서는 일치할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불교적 정의

불교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에 대한 제3의 정의를 통해서 상호간에 관계를 맺을 수 있다.6) 이것은 바로 내가 때때로 불교도들에게 페미니즘을 소개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것인데 불교 용어로 페미니즘을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공동 인간성(co-humanity)에 대한 급진적 수행”을 포함한다. 나는 이 정의의 각 단어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급진적’이란 단어는 ‘사물의 근본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주요한 존재적 질문과 관련된 매우 불교적인 접근이다.

불교는 외양 혹은 인습적인 이해방식으로 사물의 피상적인 측면에 의존하지 않는다. 페미니즘 역시 이와 유사하게 우리들로 하여금 급진적인 방식으로 관습적인 젠더 제도와 유형화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교는 지금까지 수용되고 사용되는 젠더 유형화와 제도들에 대해서는 통상적인 그 급진성을 적용하지 않았다.

정의의 끝부분으로 옮겨가면, 관습적인 단어 순서와 반대로 된 ‘여성과 남성’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언어적 정밀함에 대한 진지한 집중은 비록 불교가 언어적 표현을 궁극적인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항상 불교철학의 관심이 되어 왔다. 페미니즘 역시 단어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고 때때로 언어와 의식간의 미묘한 연결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녀(she)’를 일반적인 대명사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모든 사례가 아니라 이 경우에만 관습적인 단어 배치는 의식화의 문제를 숙고함에 따라서 뒤집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남성과 여성의 공동 인간성(co-humanity)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 역시 완전히 인간 존재에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비록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여성혐오와 관련된 가치들이 이 지구를 파멸로 이끌고, 필연적으로 전쟁과 억압 그리고 강간7)을 초래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이러한 가치를 극복할 수 없는 쓸모 없고,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로 보는 페미니즘의 시각으로부터 내 자신을 분리한다는 것을 말한다.

페미니즘을 ‘수행’으로 보는 것은 그 용어가 너무도 불교적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집단에서는 익숙한 것이 아니다. 불교는 수행, 영적 훈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다양한 명상 방법들은 불교 전통의 핵심이며, 평정심·통찰·해방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다. 불교에서 이론 혹은 철학은 수행을 통해서 나오며, 명상하는 자에게 어떤 자극과 신뢰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 전통의 핵심이 아니라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론이 실천을 압도하는 서구에 익숙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주의 이론’에 대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정으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페미니즘이 단지 이론적이기만 한다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마음과 가슴의 근본적인 재조정을 포함한다. 페미니즘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언어, 기대, 정상성에 대한 생각들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지속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페미니즘의 근본적이고 뛰어난 진리인 여성과 남성의 공동 인간성을 위하여 존재들이 ‘직감적으로 파악’되고,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일어난다.

페미니즘의 핵심은 양쪽 성 모두에 근거한 양성균형적(androgynous) 인간 모델이다. 이러한 개념을 불교의 핵심 개념인 육도와 인간계에서 태어난 것의 귀중함을 연결시키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불교도와 페미니스트 사이의 지극히 잠재적인 연결성을 형성하며 불교의 핵심개념과 페미니즘의 핵심요구가 상호간에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때때로 공식적인 포럼에서 외부인이나 초심자는 “여성은 무엇이고 다르마(法)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특히 티베트 전통에 기반을 둔 불교의 스승들은 다르마에 있어서 여성 혹은 남성에 대한 실재적인 의문은 있을 수 없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불교의 가르침은 보편적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이 있는 존재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사상인 힌두교는 우주를 육도의 한 영역에 위치한 존재들간의 거대한 상호의존체계로 보았다.

심리학적 경험으로서 그리고 정신물리학적 환생의 영역으로서 해석 가능한 이러한 영역은 쾌락에 묶여 있는 천상계(deva-s), 열망에 묶여 있는 수라계(asura-s), 인간계, 축생계, 굶주리고 헤매는 영혼이 있는 아귀계(preta-s), 그리고 다양한 고통스러운 지옥에 묶이는 지옥계의 순으로 이루어진다.8) 여성을 위한 분리된 영역이 없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있는 것은 오직 인간계뿐이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불교경전에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 즉 그들의 생물학적·지적·영적 무능력에 관한 부정적인 시각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문자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축생계와 인간계의 중간 정도에 여성을 위한 제7의 영역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제7의 영역은 존재의 영역을 서술하는 삶의 수레바퀴9)가 없는 곳이다.―이 부분은 불교의 대중적인 정형화 그리고 관행들과 불교의 근본적인 전망 사이에 있는 내부의 모순을 통찰하게 하는 교훈적인 지점이다.

불교에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만이 제7의 영역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다르마는 존재의 모든 영역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만, 오직 인간계에 태어난 자만이 법을 닦을 수 있는 현실적인 기회를 얻게 되어 그 결실을 얻게 된다고 말해진다. 이 부분은 불교 경전에서 수차례 나오지만, 바즈라야나 수행의 네 가지 근본 수행(ngundro)을 행하는 데 인용되는 “마음을 다르마로 변화하는 네 가지 지침”이라는 기도문을 들으면서 내 의식은 마비되었다. 그 첫번째 지침은 “자유롭고 멋진, 얻기도 어렵지만 잃기도 쉬운 귀중한 인간의 몸―이제 나는 무엇인가 유용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침의 전통적인 사용은 인간 삶의 덧없음을 기억하게 하고, 경솔함을 넘어서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헛되이 쓰여서는 안되는 귀중한 인간의 몸이 젠더에 묶여 있을 수 있다는 지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우주론에서 여성을 위한 분리된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반페미니스트인 불교도는 아마도 다르마는 모든 영역에 있는 존재들에게 적용되지만 인간계에 있는 자들만이 수행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법은 모든 인간존재에 적용되지만 몇몇 인간에 의해서 좀더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아마도 대부분의 불교 스승들은 이러한 판단에 동의하겠지만 누가 다르마를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젠더를 사용하는 것의 동기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젠더를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기본적인 불교의 가르침과 부합될 수 있는 그런 진정한 다르마적인 동기가 있을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기준을 사용하는 것은 통찰과 고요함에 대한 불교적 사고 혹은 무아(無我), 공(空), 불성(佛性)과 같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조화되지 않는 인습에의 의존 혹은 편견, 동기들로부터 나오는 것일 것이다.

불교는 페미니즘이다

불교와 페미니즘 양자에 관련된 몇몇 여성들은 불교가 그 자체로 진리일 때 그것은 페미니즘과 같은 전망을 나타낸다는 확신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서 ‘불교는 페미니즘이다!’라고 말한다. 불교는 페미니즘이라는 이 서술이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의 주장, 즉 ‘페미니즘은 불교다’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우선 페미니즘은 광범위한 운동이며,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영성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가 명확하게 혹은 암묵적으로 불교의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교도들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불교도이거나 그렇게 될 필요가 없다.

둘째, 페미니즘 내에서 좀더 호전적이거나 분리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시각들은 불교와 조화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페미니즘의 이러한 시각들이 페미니스트 규범 혹은 전망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불교는 페미니즘이다라는 주장보다는 그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과 더 공감을 잘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페미니즘이라는 직관은 그것이 체계화될 때 불교 페미니즘을 위한 주요한 자원이 된다. 최소한 불교와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지향성에 있어서 나타나는 네 가지 근원적인 유사점은 불교는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을 강화한다.

첫째, 대부분의 서구철학과 신학의 유산과는 반대로 불교와 페미니즘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하고 경험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차 강조하며, 경험으로부터 이론을 도출하는데, 이것은 경험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모두 만약 경험이 실재적으로 이론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면 관습적인 시각들과 원리들은 무가치하다는 그런 접근을 공유한다. 다른 말로 한다면,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세계에 대해서 배워왔던 것 사이에 갈등을 일으킬 때, 페미니즘과 불교는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론 이전에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불교와 페미니즘간의 두 번째 중요한 유사점을 이끌어 낸다.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을지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타고난 기질을 거스르며 나아가 진리와 통찰을 붙잡는 의지와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외적인 구원이 없다는 것(무신교), 영원히 지속되는 자아의 존재가 없는 것(무아), 그리고 괴로움이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으며 도처에 괴로움이 있다는 이러한 핵심적인 가르침 속에서 불교는 종교가 일반적으로 약속하는 최소한의 것조차도 반대한다. 오히려 불교도들은 이러한 비대중적인 종교적 통찰을 “희망과 두려움을 넘어서”10) 해방을 획득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있다.

페미니즘 역시 젠더체계에 대한 관습적이지 않으며 대중적이지 않은 진리를 주장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단지 “자연적인 장소”에서 우아하게 적응할 수 없는 그런 불안한 여성 집단들의 감정적 폭발일 뿐이라고 조롱하고 비난하며 수많은 오해를 낳았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이 거세질 때, “페미니즘의 실패”를 주장하거나 페미니즘은 경제악화, 마약남용, 그리고 가정폭력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칼럼 혹은 편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존의 젠더 특권과 위계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의 예언적인 선언을 와해시키려는 이러한 비이성적인 시도들은 페미니스트 담론을 처음으로 소개하려고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에게서 보여진 용기와 유머를 좀더 값지게 한다.

셋째, 불교와 페미니즘은 관습과 이론을 넘어서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며, 해방을 향하거나 아니면 해방의 장애가 되는데 정신구조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거침없이 밝혀낸다. 불교에 있어서 이러한 노력은 관습적인 에고에 대한 연구, 그것의 고통스러운 습관적 경향들, 그리고 기본적으로 에고가 없는 상태의 자유를 이루는 것을 포괄한다. 페미니즘에 있어서 이것은 여성과 남성에게 있어서 인간성의 반쪽에 갇히게 하는 젠더의 정형화와 관습적인 젠더 역할을 생산하는 사회적 조건들과 상호 무능력을 강화하고 지구를 파괴하도록 위협하는 그런 방식들을 탐구하는 것을 포괄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유사점과 함께 다음 장에서 좀더 깊이 살펴보겠지만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불교는 지금까지 젠더 관습을 고통이 가득찬 에고의 삼사릭(samsaric)의 측면으로서 깊이 다루지 못했다. 페미니즘은 너무도 당면한 문제에만 사로잡혀서 때때로 에고를 넘어선 깊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요한 차이의 밑에 깔려 있는 좀더 근본적인 유사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불교와 페미니즘은 바로 습관적인 에고의 패턴이 얼마나 기본적인 행복을 방해하는지 밝힌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와 페미니즘 모두 해방을 인간존재의 핵심으로서, 모든 존재들이 얻고자 하는 목표로서 말한다는 것이다. 해방을 개념화하는 언어는 피상적으로는 이 두 관점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불교에서는 해방을 세계로부터의 자유와 세계내의 자유로 보는 것 사이에서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이후에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불교내에서 중요한 내적인 모호함을 발생시키는 부분이다. 페미니즘에서 해방에 대한 정의는 좀더 분명하다. 즉 젠더 역할과 젠더 정형화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와 개념화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불교와 다른 모든 인간의 영성에 대한 시각들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은 쉬운 해결과 관습적인 시각들의 즉각적이며 강요된 덫을 초월하는 급진적 자유를 탐구한다.

불교와 페미니즘간의 상호변형

불교를 페미니즘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스러우면서도 정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서술은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다. 불교와 페미니즘의 잠재적인 상호변형은 불교 페미니즘을 위한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유사성보다는 상호변형에 초점이 맞춰질 때, 강조점은 이 두 시각이 얼마나 조화로울 수 있는가로부터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로 변한다. 과정(process)을 주목하여 유명하게 된 신학자 존 콥(John Cobb)은 그의 책 《대화를 넘어서 :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변형을 향하여》에서 “상호변형”이라는 말은 진정한 대화로부터 나오며, 다른 영적 시각들간의 상호작용과 변화의 가장 적절한 양식을 묘사하기 때문에 대화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대화와 그 결과로서의 상호변형은 엄격한 이데올로기적인 자기정당화 작업을 하는 것과 거대한 영성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하는 것 사이에 놓여져 있다.

상호변형이라는 개념은 진정한 대화에 참여했을 때 변화되는 그런 경험을 기반에 두고 있다. 진정한 대화는 가능한 한 논쟁의 의제, 주장, 승부 혹은 개종을 포기하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이다. 진정한 대화에 있어서 참여자는 오로지 자신의 자아를 설명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만남의 시작에서부터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대화는 상대편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진정한 대화는 본래적으로 위험하며 어떤 설득을 하고자 하는 공론가들에게는 위협적이다. 대화의 상대편에 있어서 변화는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내적인 성장과정의 결과로서 점진적이며,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이루어진다. 그 변화는 의도적으로 추구되거나 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자기정당화의 보호가 없다면 유기적으로 일어날 그런 것이다.

그 변화들이 유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엄격한 자아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들을 주장하는 보통의 대안들―거대한 영성 슈퍼마켓에서 쇼핑하기, 지각없는 차용, 그리고 손쉬운 혼합―보다는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이다. 상호변형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느리고,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대화는 훨씬 효과가 있고, 훨씬 느리며, 더욱 더 근원적이다.

상호변형은 대체로 서로 다른 영적 관점을 가진 자가 서로 상호작용할 때 나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와 페미니즘간의 대화와 상호변형의 경우에 있어서, 그 과정은 두 관점에 진지하게 결합하는 곳에서 내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내적인 대화는 실질적이지도 못하며 변형적이지도 않다. 내 경험을 살펴보자면 나는 불교수행을 접하기 전에는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로서 살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불교수행에 내 에너지를 쏟기 전까지는 페미니즘적 범주를 사용하여 매우 주의 깊게 체크를 하였다. 나는 종교의 상징체계 혹은 위계적 구조가 너무나도 성차별적이고 그것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에 어떤 종교적 참여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소 조심스럽게 나는 참여를 하였지만 내 삶에서 페미니즘과 불교는 두 개의 분리된 평행선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기하학의 규칙과는 반대로 그 평행선이 합쳐지고 교차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좀 혼란스러웠다. 내 경우에 페미니즘은 처음으로 불교 수행에 의해서 좀더 깊이 변형되었는데 이러한 변형은 끝이 없고 심오한 경험이었다. 불교는 지금까지 구성된 것으로서의 페미니즘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할 수 있으며, 불교사상과 수행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다른 맥락에서 글을 쓴 적이 있다.11) 페미니스트에게 분노는 날카로운 비판적인 힘을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도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분노를 다루는 데 있어서 불교 수행이 매우 많은 가르침을 제공한다는 점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12)

불교 명상수행은 때때로 페미니스트들을 그들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 비효과적인 대변인 노릇을 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강경함을 부드럽게 할 수 있다. 괴로움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페미니스트들이 기본적인 인간의 괴로움과 존재적인 욕망은 가부장적인 결과가 아니며 탈가부장적인 사회조건에서도 제거되지 않을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준다.13) 결국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된 영적 훈련인 불교의 영성은 때때로 페미니스트 영성 운동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자기도취성과 영적 물질주의를 향한 경향들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준다.14)

그러나 이런 점에서 나의 주요한 주제는 페미니즘으로부터 불교로 가는 다른 방향으로부터의 변형이다. 이것은 “불교수행의 관점으로부터 나온 페미니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불교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역사, 분석 그리고 재구성이다.15) 내 생각에는 페미니즘으로부터 불교로 변형되는 것에 포함되는 것은 나는 불교도로서 예언적인 목소리를 사용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라고 말하는 것으로서 가장 잘 요약된다.

이러한 입장은 어떤 설명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어떤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존 콥(John Cobb)은 내가 여성과 불교에 대해서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들이 고전적인 불교의 자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서구인으로서 나의 영적 유산의 영역인 나의 가치체계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했다. 페미니즘, 특히 내가 가장 친숙한 기독교와 탈기독교 페미니즘 사상은 성서적 예언이 지속되는 것으로, 사회적 비판의 진정한 의미로서 보았으며, 권력의 남용에 저항하고 좀더 정의와 평등이 표현되는 사회적 질서를 전망하고, 수단이 적절하건 필요한 것이건 간에 가장 중요하고 좀더 정의롭고 평등할 수 있는 질서를 적극적으로 갈구하는 의지를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예언적 목소리는 불교도들이 젠더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사회 제도와 함께 젠더 평등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를 포함하여 자비에 대한 거만하고 지극히 제한적인 가르침과 쉽게 결합하도록 만들었던 간과된 요소이다. 불교에 있어서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때때로 이야기되는 것처럼 불교는 사회적 윤리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불교는 도덕적 행위를 위한 매우 세세한 가이드라인이 있다. 그러나 불교도는 일반적으로 정치, 경제 혹은 사회조직의 영역에서 그러한 윤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행위에 기꺼이 참여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개인의 존재전환과 깨달음이 가장 우선적인 것이며 사회는 너무도 다루기 어렵고 미망에 쌓여 있어서 사회적 행위는 에너지의 소모와 낭비라고 느낄 것이다. 역사 속에 있는 대부분의 불교의 유형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를 더 향상시키기보다는 현재의 상태를 수용하려는 경향이 분명히 더 컸었다.

‘자비’는 불교의 윤리에 대해서 토론할 때 아주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어이다. ‘정의’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윤회(samsara)의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 존재에 내재된 모든 모욕들로 고통을 당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비는 불교도의 삶의 방식을 위한 가장 우선적인 동기이며 정당화이다. 불교도의 사회적 도덕성인 팔정도를 지키며 사는 것은 모든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이익을 주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개인적이며 어느 정도 수동적이었다. 특히 예언적인 목소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정의와 옳음을 요구하고 이에 근거한 행동들과 비교를 했을 때 더욱 그렇다. 불교 페미니스트로서 예언적 목소리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나는 자비에 힘을 부여하고자 한다. 그것은 불교사회윤리에서 너무도 잘 이해되는 것처럼 불교의 자비에 관한 전망을 갖는 불교사회에서 실질적으로 표상되는 것으로서 정의에 관한 관심을 직접적으로 고취시킴으로서 자비에 힘을 부여하려는 노력을 하고자 한다.

매우 분명하게 나는 대부분의 불교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재 상태의 젠더 제도를 수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만약 대부분의 불교세계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조건에서 불교도 여성으로서 살아야 한다면, 불교는 나의 종교로서 선택될 수 없을 것이다. 내 전망의 핵심인 불교와 페미니즘의 상서로운 합치만이 내적인 대화를 허용한다. 그러한 내적인 대화는 상호변형의 결과로서 나온다. 초기에 영성에 대한 서구적 양식에서 훈련된 것으로부터 나오는 예언적인 목소리는 명백하고 분명하게 여성에 대한 나의 불교적인 토론을 통해서 나오고 있다. 게다가 불교의 담론에서 이러한 예언적인 목소리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아마도 불교 페미니즘을 위해서 가장 위대하며 가장 필요하며 가장 유용한 자원이 된다.

동시에 상호변형은 다른 측면을 통해서도 나오는데, 불교의 명상수행과 자비로움에 대한 강조는 예언적인 목소리를 형성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때때로 그것의 진리와 통찰을 표현하는 데 귀에 거슬릴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사회윤리에 있어서 자비와 정의의 결합, 즉 젠더 불평등, 특권 그리고 위계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부드럽지만 적극적인 접근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정미숙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 박사과정 수료.현재 동국대 여성학 강사. 불교여성학 연구모임인 '담마딘나' 회원. 저서로 <성인 지적 여성 자활사업 평가와 모형개발에 관한 연구>가 있고 논문으로 <여성가구주 성별화된 빈곤 그리고 일:어머니냐 노동자냐><재판 이혼의 사례를 통해 본 한 부모 가족의 자녀 양육비 실태와 대안>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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