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기복불교를 말한다

1. 들어가는 말

한국 사람들은 복을 받고 태어나서, 복을 빌며 살다가, 복을 비는 마음으로 죽는다고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복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예컨대 ‘복이 있다’ ‘복이 찾아온다’ ‘복이 달아난다’ ‘복을 믿는다’ ‘복을 누린다’ ‘복을 타고난다’ ‘복스럽게 생겼다’ 등이나 한 해를 시작하면서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편지를 맺으면서 ‘댁내에 큰 복이 내리시기를 축원합니다’라는 말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복지·복조·복락·복운·수복·복덕·화복·복권·행복·만복·오복 등의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을 좋아하고 즐기는 듯하다.

5복은 복 가운데 가장 큰 복을 의미하며, 예로부터 가장 행복한 삶을 말할 때 ‘5복을 갖추었다’고 한다. 삶의 보금자리인 집을 짓고 상량할 때 ‘하늘의 세 가지 빛에 응하여 인간 세계엔 5복을 갖춘다(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라고 쓴다. 5복을 다 갖춘 사람을 큰 복을 누렸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쌍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 운명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복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 다복하게 혹은 박복하게 타고난다고 생각한다. 복을 받거나 누리는 것은 하늘의 뜻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복을 받는 사람은 전생에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복인복과(福因福果), 인과응보의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불교사상이라고 알고 있다. 사실 한국인의 삶의 밑바닥에 내재하고 있는 복사상은 적어도 외견상 불교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복 추구는 불교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인 무속은 물론이고 서양에서 근대 이후 전파된 기독교 등 제 종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무병장수나 부귀영화를 기구하며 현세적·이익적인 복을 추구해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불교 신행에 있어서 복을 축원하는 행위는 기복(祈福)불교1)라 하여 바람직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여야 할 최고의 과제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가 제시한 가르침에 의지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하기보다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탁하여 현세적 자기 중심적 이익, 즉 복을 구하고자 하는 기복신앙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불교에 있어서 여성 불교와 더불어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최대의 걸림돌로 인식되어 온 지 오래다. 1) 기복불교는 아직 학술적으로 정립된 용어는 아니나 본고에서는 ‘기복불교’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본 글은 도대체 불교에 있어서 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서 기복현상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고대 이래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그 역사적인 전개양상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작은 글이 한국불교 내지는 불교의 정체성을 되찾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바가 있길 바란다.2) 2) 본 글은 불교사 전범주에서 다루지 않고 인도·중국·우리 나라의 불교사의 전개에 국한하여 스케치하였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학술적인 연구를 기대하는 바이다.

2. 복이란 무엇인가

먼저 세간에서의 복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불교에서의 복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 복이란 과연 무엇인지 어원적 유래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복(福)이란 ‘시(示)’와 ‘복()’의 회의문자로, 시(示)는 하늘(天)이 사람에게서 내려져서 나타낸다는 신(神)의 상형문자이고, 복()은 복부가 볼록 튀어나온 단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따라서 복이란 하늘의 신, 즉 하느님이 사람에게 내리는 배가 볼록한 단지이라는 것에서 사람의 힘을 초월한 ‘운수’라는 뜻과 ‘오붓하고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이라는 말은 ‘아주 좋은 운수’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이다. 결국 복이란 인간을 초월한 천운에 저절로 돌아가는 운수(氣數)로, 부족함 없이 두루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며, 사람의 삶에 관련된 선악·행복·불행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로부터 복 가운데 제일 큰 복을 5복이라 했는데 이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 가운데 하나인 《서경》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경전의 〈홍범조(洪範條)〉에 의하면 5복을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이라 하였다. 오래오래 장수하는 것, 재산을 많이 모아 가지는 것, 존귀하게 되고 건강한 것, 좋은 평판을 듣는 덕이 있는 것,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들이 바라 마지않는 5복이라는 것이다. 그 뒤 다른 경전이나 문헌에도 5복에 대해서 나오는데 《서경》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한(漢)나라 환담(桓譚)이 지은 《신론(新論)》에서는 5복을 장수·부·무병·식재(息災)·도덕(道德)이라 하였고, 청나라 적현(翟顯)이 1825년에 지은 《함해(重鐫 函海)》의 〈통속편(通俗編)〉에는 수·부·귀(貴)·강녕·자손중다(子孫衆多)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복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바라 마지않는 바람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이 바라는 5복은 〈통속편〉의 그것이라 한다. 이는 남에게 덕을 베푼다는 유호덕보다는 귀함이 낫고, 자기의 천수대로 사는 고종명보다는 자손이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복도 위에서 언급한 그것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나 다음에 살펴보는 바와 같이 불교가 탈현세적인 종교성을 지니기 때문에 다소 차이를 보인다.

불교에서 복은 범어 푼야(pun.ya)의 번역으로 복덕(福德)이라고도 하며, 일체의 선행에 의하여 얻는 행복과 이익을 뜻한다. 불교도들은 붓다가 지혜와 더불어 복덕을 구족했다고 하여 숭앙한다. 붓다뿐만 아니라 원시불교 이래 비구와 교단을 복덕을 낳는 밭이라는 의미에서 복전(福田)이라 했다. 《우바새경》에 의하면 경전(敬田 : 불·법·승 삼보), 보은전(報恩田 : 부모), 빈궁전(貧窮田 : 빈곤한 사람과 병든 사람)의 3복전을, 《불설복전경》에는 5정덕(五淨德)을 갖춘 승복전(僧福田)과 7복전(七福田)을, 그리고 《범망경》에는 8복전을 들고 있다. 따라서 삼보뿐만 아니라 빈궁자·질병자, 심지어는 축생에 이르는 모든 중생들이 무한한 공덕(복)을 발생하는 복전이다.

이러한 복전에 의하여 복이 발생하는데 아함부 경전에 의하면 복의 성격에 따라 크게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으로 나누고 있다. 출세간적인 무루의 범행(梵行 : 청정행)이 무루복이요, 세간적 유루의 복덕이 유루복이다. 유루복은 생로병사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누리는 한정되고 부자유한 사바세계의 복이며, 무루복은 생로병사가 없는 불보살과 성현들이 누리는 영원하고 걸림이 없는 정토세계의 복이다.
붓다는 다음에서 보듯이 다섯 가지 복을 제시한 바가 있다.

이와 같음을 내가 듣사오니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모든 제자에게 말씀하시되, 어진 사람은 법을 설하여 다섯 가지 복덕을 얻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 복덕이냐 하면, 첫째는 사람이 세상에 나서 오래 사는 것이요, 둘째는 세상에 큰 부자가 되어 재물과 보배가 많은 것이요, 셋째는 사람이 단정하게 잘 생기는 것이요, 넷째는 명예가 세상에 널리 드러나는 것이요, 다섯째는 정신이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것이니라.(불조요경)

붓다가 말씀하신 5복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오래 사는 것(壽), 세상에 큰 부자가 되어 재물과 보배가 많은 것(富), 사람이 단정하게 잘 생기는 것(단정한 모습), 명예가 세상에 널리 드러나는 것(명예), 정신이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것(지혜)이다. 이는 《서경》의 5복과 비교할 때 수·부·명예는 같고 단정하고 지혜로움이 다르며, 5복을 얻기 위하여 법시(法施)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본래 보시 행위는 보시하는 자(施者)·보시물(施物)·받는 자(受者) 셋으로 이루어지는데, 《금강경》에서 밝히고 있듯이 보시하는 자·보시물·받는 자 셋이 공적(空寂)하고 지극히 순수해야 무한한 공덕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보시물은 물질적인 재물(財施), 바른 법을 베푸는 법시(法施),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여 안심을 얻게 하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금강경》에 “3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해도 대승경전을 수지하고 남에게 설해 주는 것만은 못하다.”고 했듯이 법시가 가장 중요하다.3)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3) 고익진, 〈Ⅳ.불교윤리와 한국사회〉 《한국의 불교사상》,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7, pp.249∼250.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아나율은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다가 눈병이 생겨 실명하게 되었다. 아나율이 옷을 기우려고 했으나 바늘에 실을 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나율은 세상에 복을 구하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실을 꿰어 달라고 말했다. 이 소리를 들으신 부처님께서 아나율에게 말씀하셨다.

    “네 바늘을 가져오라. 내가 꿰어 주리라. 이 세상에서 복을 얻고자 나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여섯 가지 일에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여섯 가지는 남에게 베푸는 것이요, 남을 가르침이며, 억울함을 참아 견딤이요, 계를 가르침이요, 중생을 감싸고 보호함이요,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 여섯 가지 일에 만족함이 없이 항상 힘쓴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닦은 힘 가운데 천상에서나 인간에서 안락하게 하는 것은 복의 힘이 가장 훌륭하나니 그 복의 힘으로 불도를 성취하리라.”(증일아함경 제31)

붓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자라고 밝히셨고 이를 위하여 위의 여섯 가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복은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을 할 때 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불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붓다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의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길흉화복은 오로지 자신의 업보일 뿐이다.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3세 인과를 깨달음으로써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스스로 선업을 행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악업을 부정하고 적극적인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복을 받는 것이 일부의 종교와 같이 절대자나 하늘에 의지하거나, 붓다의 가르침(三法印)을 외면하고 ‘모든 것은 항상하고 즐거운 것이 나’라고 보는 것은 전도망상이다. 그런 뒤바뀐 생각, 나를 존속시키려는 끊임없는 활동(業)은 혼자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남이 싫어하는 행동이며, 악업을 쌓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가 초래하는 것은 복이 아니라 생사윤회와 괴로움이다.

3. 불교에서 기복현상은 왜 발생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무루복이 아닌 세간적인 유루복에만 매달리고 있다. 이러한 기복적인 불교의 관념이나 의례 또는 주술은 왜 발생하였으며 고대 이래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고대 인도사회의 일반 민중들은 사후에 인간의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세계인 천계(天界)에 태어나기를 바랐다. 이러한 윤회설은 붓다가 생존할 당시 이미 일반 민중에게 수용되어 있던 관념이며 민중신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욕망을 직선적으로 만족시켜 줄 뿐이며 일시적인 감정의 해소에 지나지 않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단적으로 인생의 위기를 해소하려는 방법에 지나지 않으며, 때문에 현세 이익적이며 세속적·세간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4) 4) 中村 元 외 지음·김지견 역, 《불타의 세계》, 김영사, 1984, p.426.

그래서 붓다는 천계의 의미를 열반(涅槃)으로 바꾸어 놓고 “천계에 오르라. 즉 열반을 구하라.”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보시(施)를 행하고 계(戒)를 행하고 지키면 생천(生天)할 수 있다고 가르쳐서,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의 업보설을 믿게 하였다.5) 이것이 바로 붓다가 설한, 순서에 따라 행한 훈화를 뜻하는 차제설법(次第說法)이다. 팔리어 《율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5) 위의 책, pp.428∼429.

좋은 집안 출신인 야사가 한쪽에 자리잡고 앉자 부처님은 그에게 ‘순서에 따른 훈화’를 설했다. 즉 보시에 대한 훈화, 계율에 대한 훈화, 생천에 대한 훈화, 여러 가지의 욕망에 대한 근심·해악·오염과 버리고 떠남(出離)이 지닌 이익을 설했다.

이 가운데 앞의 셋은 시론(施論)·계론(戒論)·생천론(生天論)이라는 3론으로, 시론은 수도자나 곤궁한 자에게 옷이나 음식을 베풀라는 것이며, 계론은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이지 않고 사악한 간음을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고 나쁜 행위에 빠지기 쉬운 음주 등을 삼가는 5계를 지키라는 것이다. 그러한 선업의 결과로 사후에는 천계에 태어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생천론이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개선해 나가면, 내세를 기다리지 않고도 현세의 생활이 평안하고 즐겁게 된다는 것이다.6) 6) 水野弘元 지음·동봉 역, 《원시불교》, 진영사, 1988, p.71.

붓다는 이러한 세간적 차원의 관념을 출세간적 차원으로 승화시켜서 불교에 받아들여 자신이 무명 때문에 번뇌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이러한 고통이 신이나 악마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전생에서의 자기 행위가 낳은 업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오늘을 바르게 살고 바른 행위(業)를 쌓을 수 있게 하였다. 7)7) 中村 元 외, 앞의 책, p.433.

이렇듯 붓다는 상식적인 업보설조차 믿지 않는 그릇된 사고방식의 사람들에 대해서 불교적 가치관에 기초한 윤리적 실천을 통해 현세의 생활이 평안하고 즐겁게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8) 그런 후 욕망이 악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 욕망을 버리도록 가르쳤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그릇된 선입관이 제거되면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열고, 이를 믿도록 하여 민중들을 진실(法)에 비로소 눈을 뜨게 하였다.8) 水野弘元, 앞의 책, p.71.

그러나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은 전문 수행자가 아닌 일반 민중들로서는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반 민중의 생활은 출세간적인 차원에서의 관념과 행법, 그리고 윤리적 생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해탈 즉 열반은 무한한 윤회의 피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는 실현 불가능하거나 현실의 재해나 불행의 극복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출세간과 세속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즉 장례나 조상숭배 등의 민간신앙이나 의례는 불교의 본질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아무래도 좋다고 무시되면서,9) 무상이나 무아의 이법을 배우고 매일 매일 노력하며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출세간적인 행과 세간적인 생활이 역설적으로 오히려 양립되어 갈 수 있었다. 민간신앙, 의례가 불교와 습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적인 문제들의 처리는 주술적 애니미즘적인 관념이나 의례에 의존하게 되었고,10) 그 결과 자연적으로 불교에 기복적 신앙형태가 스며들게 되었다.9) 위와 같음 10) 中村 元 외, 앞의 책, p.426.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 기복 현상은 민간신앙과 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붓다의 출세간적인 가르침은 욕망의 지배를 받는 중생으로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적 이익을 강구하기 위해 기도 등의 공덕이나 주술을 동원하여 복을 구하였고,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교의 일부로 간주되기에 이른 것이다.

4. 기복불교의 역사적 전개

1) 인도불교에서의 기복신앙
붓다 입멸 후 불교에서의 기복적인 신행형태는 어떻게 변천해 갔을까? 여기에서는 붓다의 입멸 후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 나타나는 신행형태에서 기복적인 요소의 추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붓다의 입멸 100년 후부터 기원 100년 무렵에 풍부한 경제적 후원에 힘입어 출가자는 승원을 중심으로 일반 신도들과는 유리된 채 저마다 교리의 연구에 힘써 학문 불교인 아비달마 불교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정치(精緻)한 교학체계의 구축이라는 화려한 성과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교단이 대중·사회와 유리되고, 재가신자의 교화도 형식적인 설교로 전략하여 비구와 재가신자와의 관계는 공덕을 쌓게 하는 매개체로서 기계적 기능만이 정착되었다. 그 결과 재가신자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기보다는 이른바 공덕을 쌓기 위해 승원과 승가의 물질적 측면을 확충하는 데 힘을 기울이게 되었고, 신행은 점차 미신화되어 갔다.

불교의 가르침 그 자체보다는 과거에 생존했던 붓다에 대한 동경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고, 불탑 등을 건립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공덕 관념이 팽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공덕 관념이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와 결합하면서 공리주의적 또는 현세이익적 민간 기복신앙과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합치되었다. 예를 들면 윤회사상은 물론 우파니샤드 철학 이래 인도의 민간신앙이었다. 불교는 이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윤리적 삶을 영위하도록 유도했었다.

그러나 교리의 왜곡현상으로 인해 기복적인 신앙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았다. 무아설(無我說)은 그대로 무영혼설(無靈魂說)로 통용되었으며, 원인과 결과를 직결시키는 업관(業觀)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과거세의 특정 행위가 현세에 일어나고 있는 특정한 상황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무엇인가 곤란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급격히 선업을 쌓고 공덕을 쌓는다는 소위 ‘인스탄트 카르마(instant karma)’가 유행하게 되었다.11) 11) 奈良康明, 앞의 책, p.230. 소위 ‘인스탄트 카르마’는 오늘날에도 기복적인 측면에서 횡행하고 있는데, 불교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기 때문에 불교신행에 있어서 경계해야 일이다.

이처럼 윤회설, 업설이 민간신앙적 관념과 복잡하게 결부되어 가면서 기원(祈願)이 현세적 이익을 얻는 소원성취의 한 의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경 점차 무르익어 갔던 대승불교운동이 전개되면서 재가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불탑을 중심으로 예배의례를 행하면서도 그에 대한 신앙은 단순한 경배나 기복이 아닌, 참회와 삼매를 이루는 수행으로 발전시킨 부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붓다의 덕을 찬미하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그 가르침에 순종해 가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와 더불어 다채로운 불보살(佛菩薩)이 등장하여 시방세계에 많은 부처님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자, 이에 따라서 삼신불(三身佛)로 대표되는 불신관(佛身觀)이 발전하게 되었다.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는 법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점차 법 자체를 실체로 갖는 부처님인 대일여래(大日如來) 등의 법신불(法身佛)의 관념이 생겼고,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대승적 깨달음의 서원을 발하여 수기(授記)를 받고 그 수행의 과보로 성불한 부처님인 아미타불·약사불 등의 보신불(報身佛)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교화의 대상에 따라서 그 화신(化身)이 되어 출현하는 응신불(應身佛, 化身佛)이 탄생하였으며, 특정한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찬탄이 구상적인 보신불과 문수·보현·관음·지장 등의 보살들을 탄생시켰다.12) 12) 武內紹晃, 〈제4장 불타관의 변천〉(中村 元 외, 앞의 책).

그러나 불보살의 위대한 본원(本願)과 위신력을 설하는 사상은 자력적이고 주체적인 초기불교의 모습을 크게 후퇴시켰다. 부처님과 보살들 그리고 그 형상이 곧 세간 차원의 현세 이익적 기원의 대상이 되면서 대승불교 초기의 건강한 신앙은, 다음에서 살펴볼 아미타신앙과 관음신앙에서 보듯이 의존적 타력 일변도의 유신론적, 기복적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아미타불신앙에서는 법장(法藏)보살이 서원을 발하여 보살행을 닦은 결과 성불하여 아미타불이 되어, 악한 사람들까지 감싸서 구원해 준다고 한다. 대승경전 650여 부 가운데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를 찬탄하고 있는 것은 200여 부로 전체 경전의 3분의 1정도에 이른다.13)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서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자신의 힘보다는 미타의 본원력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죄악범부도 죽을 때 아미타불을 열 번만 외우면 구제되어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이므로14) 기복적인 요소가 짙다. 13) 여익구, 《민중불교철학》, 민족사, 1988, p.217. 14) 고익진, 《현대 한국불교의 방향》, 경서원, 1984, p.194.

괸음신앙은 지금까지 민중들이 애송하는 대표적인 경전인 《묘법연화경》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경전의 〈관세음보살보품〉에 관세음보살을 정성껏 염불하면 일곱 가지의 어려움(七難)을 면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큰 불을 만나도 타 죽거나 빠져 죽는 일이 없을 것이며,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파선이 되어 바다 밑 나찰 귀신의 나라로 빠지는 한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것이며, 또 죄가 있든 없든 간에 목에 씌운 칼이 저절로 풀릴 뿐만 아니라 원수나 도적도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이 같은 7가지 난 외에도 남자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면 단정하고 지혜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며 여자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면 단정하고 예쁜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관음보살은 전능한 힘을 갖춘 절대자적 존재로서 관음을 정성껏 염불하면 화난(火難)·수난(水難)·나찰난(那刹難)·원적난(怨賊難) 등 일곱 가지 난을 당하게 되어도 그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아미타신앙과 관음신앙은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이나 한국 등의 민중들이 현세 이익적 목적으로 즐겨 신행하는, 가장 기복적인 신앙이다.

2) 중국불교에서의 기복신앙
불교는 크게 두 갈래로 전파되었는데 남전(南傳)한 불교는 스리랑카의 고대문화가 불교문화보다도 매우 열악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남방에 전해졌다. 이에 반하여 북전(北傳)한 불교는 인도의 불교문화 못지 않게 그 나름대로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장기간에 변용이 이루어졌다.15) 15) 최석호, 〈민중불교의 역사적 전개〉 《민중불교의 탐구》, 민족사, 1989, p.67.

중국에 불교를 보급한 주역은 정치적·경제적 힘이 있는 지배층과 상류층에 먼저 수용되었는데, 이는 한국과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중국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불교는 왕실불교적이거나 호국불교적 성격을 지닌다. 인도불교에서는 종교와 국가와의 관계가 정법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교주왕종(敎主王從)의 관계를 취했지만 중국불교에서는 왕주교종(王主敎從)을, 일본에서는 국가와 불교가 완전히 유착하여 왕법과 불법의 대립조차 없었다. 중국불교에서는 왕법과 불법이 대립 항쟁하여 결국 불법이 왕법에 굴복한 것에 반하여 한국의 신라불교나 일본의 율령체제 이후의 불교는 왕법과 불법이 처음부터 하나가 되어 수용되었다.16) 16) 鎌田茂雄 지음·장휘옥 역, 《중국불교사》 제1권, 장승, 1992, p.21.

지배층에 받아들여진 중국불교는 처음부터 기복적인 성격을 띠었다. 중국불교는 다양한 경로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불교를 수용, 발전시켰으므로 어느 시대에도 지역적 차이점을 극복하거나 통합적 사상으로서 장기간 존속하였다고 말할 수 없으나 중국불교역사상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후한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고 서진시대가 되자 현실도피적인 노장사상이 귀족 사이에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운을 타고 불교도 노장의 가르침과 영합하여 역경에도 노장의 개념이 이용되었다. 남북조시대를 전후해서 국가적 규모로 불교가 수용되었다. 당시의 지배자가 국가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불교의 주술적 기능을 인정할 때 필연적으로 사찰의 건립이나 불상의 조성 및 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역시 기복적인 성향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불교가 중국인에게 받아들여진 가장 큰 일면이 현세이익으로서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민간신앙에 있어서는 원래 현세이익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숭배의 대상으로서 불교의 부처님이나 보살이 모셔지게 되고 선향을 피우거나 경을 외우는 등의 불교의례가 행해지게 되었다.17) 17) 鎌田茂雄, 앞의 책, p.43.

따라서 중국에 불교가 수용된 가장 초기의 신앙 내용이나 그 성격은 《이혹론》에서 볼 수 있듯이18) 복을 구하는 현세이익적이라 할 수 있다. 민간신앙의 수준에서는 부처님이나 보살은 민중의 현세이익을 들어주는 초능력자로서 기복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중국화된 불교도 다음에 살펴보듯이 현세이익적인 성향이 짙기 때문에 기복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18) 牟融, 《理惑論》 ; 僧祐 《弘明集》 .

중국의 불교는 5호 16국시대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며 600년 전후, 즉 남북조시대 말에서 수대에 걸쳐서 독자적인 불교의 확립 혹은 인도불교의 극복이 이루어졌다. 마침 이 시대에는 북주의 무제가 화북의 전지역에 심한 폐불훼석(廢佛毁釋)을 단행하여 북위시대 이래로 융성일로를 밟아 오던 불교의 발달을 한꺼번에 차단하고 폐절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폐절은 오히려 중국불교의 성립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북조불교의 장려한 불교문화에 대해 신선하고 힘차게 약동하는 생명에 찬 여러 종파의 새싹을 트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중국적인 특질이 현저한 철학 불교로서 천태종과 화엄종이 탄생하였다. 인도에서 찬술된 《화엄경》에 나타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융의 논리와 중국의 수·당대의 불교에서 형성된 ‘즉사이진(卽事而眞)사상’ 즉 현실에 즉해서 진실을 보는 현실 중시의 사고방식이 결합하여, 여기에 새로운 독창적인 사상으로서 확립한 것이 화엄사상이다. 때문에 화엄종의 교리인 ‘사사무애(事事無碍)사상’은 중국불교의 정화라고 불리고 있으나 현실을 중시하는 사고경향이 짙다.

이러한 화엄종이나 천태종이 철학적 사변에 치우친 면이 있기 때문에 그 결점을 극복하여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사상을 실천적 행동적으로 전개시킨 것이 중국의 선(禪)이다. 법계의 연기의 세계는 우리들이 사는 삼계의 현실이며, 이를 떠나서 법계연기는 없다. 인도불교에 있어서의 삼계의 관념이 중국불교에서는 현실의 이 세상을 의미하게 되었다.19) 19) 鎌田茂雄, 앞의 책, p.39.

중국인이 무위자연으로 산다고 할 때 이는 중국의 전통사상인 노장사상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과 불교의 반야의 지혜가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 중국의 선(禪)이며 가장 중국화한 불교이다. 선에 있어서 어록(語錄)이나 문답(問答)이 발달한 것은 육조(六朝)시대의 청담(淸談) 등이 변형된 것인데, 그렇게 본다면 선도 중국의 엘리트들의 종교로서 민중의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이렇듯 화엄종이나 천태종 그리고 선종 등은 일부 지식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대부분의 민중들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숭배하는 등 기복적인 신앙형태를 유지하였다. 중국인의 3대 행복은 복(福)·녹(祿)·수(壽)인데, 신앙면에서 이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참배나 기도를 하였다. 중국인에게 불보살은 곧 신(神)이며, 신은 구하는 것이 있을 때 반드시 응해 주어야 한다고 한다. 중국불교 역사에 크게 드러나고 있는 불보살은 도교의 사당과 불교의 사찰에서 공존하며, 가장 숭앙받는 신은 현세이익의 신으로는 관음보살, 사후(死後) 내세이익의 신으로는 지장보살이다.20) 20) 鎌田茂雄, 앞의 책, p.44.

이와 같이 불교의 보살도 대중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현세 내지 내세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서 신앙되었다. 중국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현세 이익적 기복적 신앙이다.

3) 한국불교에서의 기복신앙
한국불교는 중국에서 전래된 북전불교를 왕실에서 고대국가의 성립기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왕실 또는 국가불교적인 성향이 짙다. 따라서 왕실 하향적인 성격이 나타나며 기복적인 면이 두드러졌다.
고구려에 들어온 순도(順道)는 당시의 사람들이 질박하였으므로 인과(因果)로서 교시하고 화복(禍福)으로서 설유(說誘)하였다고 하며,21) 고국양왕의 하교에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22)라고 하였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도 부왕이 권장한 불법 숭신의 필요조건인 구복(求福, 修福)의 도량을 마련하였다. 21) 《海東高僧傳》 卷1 釋順道傳. 22) 《삼국사기》 권18 고국양왕 8년조.

백제나 신라도 마찬가지이다. 백제는 아신왕이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고 하였다.23) 《해동고승전》에 아도가 공주의 병을 고쳐 준 것을 계기로 하여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고 불법을 폈다.24) 법흥왕도 흥륜사를 창건하면서 창생(蒼生)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업을 소멸시키는 도량(修福滅罪)의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하였다.25) 이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소극적으로는 재앙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고 적극적으로는 복을 구하기 위한 기복불교였다. 이후 한국불교가 국가적인 성격과 기복적인 차원에서 권장하였던 것이다. 23) 《삼국유사》 권3 難陀闢濟條. 24) 《海東高僧傳》 卷1 釋阿道傳. 25) 《삼국유사》 권3 原宗法興條.

왕실이나 국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왕족의 시조(始祖)가 천강(天降)하였다는 인식은 쇠퇴하고 불교에 의하여 천상과 지상의 이원적 우주관이 일원화되기 시작하였다. 불교 이전의 고유 신앙은 대체로 불교의 종속적인 차원으로 존재하였으나 각 지방의 신사(神祠 : 산신당·칠성각· 삼성각) 신묘(神廟)는 사원에 종속되지 않고 존재하여 민중신앙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에 종속되지 않고 조상숭배의 형태로서 또는 지방사회에서 사당의 형태로서 존재하였다.

불교가 기존의 세계관을 축소하고, 흡수하면서, 이를 이단으로 소멸 파괴시키지 않고 다원적 요소를 종속적으로 일원화시킨 점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26) 그리하여 새로 들어온 불교는 생사윤회의 생명관과 내세관을 심어주고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함을 주로 하는 고유의 신앙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주술로서 이해되었다.26) 허흥식, 〈제3장 중세의 불교와 사회사상〉 《한국중세불교사연구》, 일조각, 1994, pp.97∼98.

 

한국불교상 확립의 기본은 신라시대에 이루어져 불교가 국교화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승려였던 자장(慈藏)은 “차라리 계를 지키며 하루를 살다가 죽더라도 계를 저버리고 백년을 살고 싶지 않다.”27)고 하며 불법을 지켜서 당시의 불교교단은 질서가 확립되어 민중들의 10집 가운데 8, 9집은 계를 받고 부처님을 받들었다 한다.28) 그러한 자장도, 그의 부모가 관음상 1,000부를 조성하고 낳았다는 사실에서 기복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27) 《삼국유사》 권4 義解 慈藏定律條.
28) 위와 같음.

신라 불교의 독특한 발전은 진흥왕의 신불(信佛)과 불교정책에 의한 것이다. 진흥왕 때의 전륜성왕사상·미륵사상·화랑제도 창설 등은 모두 업설과 관계되는 것이며,29) 전사족(戰死族)을 위해 팔관회를 베풀었던 데에서 기복적인 성향을 볼 수 있다. 29) 고익진, 〈한국의 고대불교사상〉 《철학사상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이렇듯 불교를 채용 발전시킨 것이 바로 국가 형성의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던 왕권을 중심으로 한 귀족계급이었고 그들의 현세 이익을 위해 불교 신앙의 기복적 관념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목되는 것은 신라 불교에 있어서 미륵의 하생을 바라는 미륵하생신앙과 현실적 소망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미륵사상을 통해서 신라를 이상적 불국정토로 만들며 또한 전륜성왕과 같은 정치이념을 시행하도록 노력함으로써 호국신앙을 지녔다. 이처럼 고대 불교 수용 초기에 일반에게 전달된 교리는 인과화복의 설과 수복멸죄를 강조하는 공덕사상 등이었다.

한국의 불교는 원효와 의상에 의하여 한국적인 총화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며 대중화·실천화로 전개되었다. 원효는 한 종파의 교판에 치우치는 일이 없이 전 불교를 새로운 이상과 종교적 견지에 서서 총화하여 대중을 구제하는 보살행을 실천함으로써 이론적 사상체계와 실천적 교화활동을 구축하였다. 원효의 통합적 교리의 추구는 8세기까지 경흥과 태현 등으로 계속되어 더욱 이론이 다듬어지고 불교의 실천적 신앙생활이 기층사회까지 확산하여 일반서민 노비까지 독실한 신도로 변하게 되었으나,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칭명염불하면 정토세계에 갈 수 있다는 기복적인 측면이 두드러졌다.

의상도 화엄을 전업으로 삼아 교화에 힘쓰면서 보현행(普賢行)을 닦는 실천에 전력을 다하였다. 의상은 문무왕이 성곽을 신축하려고 의상에게 문의하였을 때 “비록 초야의 띠풀집에 있더라도 정도(正道)만 행하면 복업(福業)이 장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정도를 행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쌓을지라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30)라고 했던 데에서 기복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다.30) 《삼국유사》 권4 義解 5 〈義湘傳敎〉條.

이상에서 보았듯이 신라 불교의 전체적인 신앙 형태는 기복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심지어는 오역죄(五逆罪)를 지은 자라도 임종시의 십념염불로써 반드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 데서 그 정점에 이른다.31)
고려의 불교도 신라 불교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고려 불교는 기복양재(祈福禳災), 진호국가(鎭護國家)의 불교였다. 진호국가의 신앙 성격도 결국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것이므로 기복적이다. 31) 채인환, 〈신라시대의 정토교학〉 《한국정토사상연구》, 동국대 출판부, 1985, p.116.

고려 태조의 구세설(九世說)32)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의 왕실이 불교의 교화를 도운 인연으로 왕이 되었고 현재도 보살이 되었다는 기복적인 측면이 엿보이며, 왕실은 불교의 외호자라는 인도의 사성종에서 크샤트리아에 해당하는 예정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왕실의 현세적 위치는 현세에 불교를 지원한 업보에 따라 내세에 부처로서 불국토를 건설하거나 향상될 수 있다는 내세관을 형성하면서 불교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되게 만들었다. 이는 역대 왕실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승되었다.32) 《고려사》 권120 〈金自粹列傳〉. 朴礎 〈闢佛疏〉 《東文選》 권53.

이러한 것은 태조의 유훈인 신서(信書 : 訓要十條)가 고려 역대의 왕실에서 준수되었는데, 여기에서도 국가의 대업이 여러 부처님의 호위에 따라 이루어졌고 불보살을 위한 연등회와 산천용신(山川龍神)을 위한 팔관회를 봉행할 것을 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선의 풍수지리도참설, 산악 숭배 및 용왕 숭배 등등 재래의 토속신앙과 혼합 내지 습합 발전시켰다. 그리고 불교를 현세 이익의 종교로서 생각하기 때문에 연등회·팔관회·보살계도량·독송·경행·호국기원·장수기원 등 여러 행사가 자주 행하여졌으며, 특히 난국을 불덕과 신력으로 구제 해결하려는 기양(祈禳)의 신불(信佛)행사가 지나쳤다.33) 33) 김영태, 《한국불교사》 (개정판), 경서원, 1997, pp.160∼161.

태조를 비롯한 역대의 국왕이 절을 창건함으로써 복되고 경사롭게(資福慶) 하였다 하여 불법의 힘을 의지하고 믿어서 국가를 복되고 이익되게 하고자 사찰을 세웠다.34) 고려의 사원은 왕과 귀족들의 요양, 휴양소의 역할을 하고 승려는 의료인의 기능을 담당한 예가 적지 않다. 불경의 신비스런 힘을 이용하거나 승려의 신통력에 의존하여 치료하는 성향도 나타났다.35) 34) 《고려사》 권7 문종세가, 문종 10년 3월 계묘조. 35) 《청도운문사원응국사비》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 p.663.

큰 깨달음을 가진 고승들조차도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진각(眞覺)국사 혜심(慧諶)은 “참선 공부는 나라의 복운을 오래 이어가게 하고 지혜의 경론은 이웃 나라의 침범을 막아 준다.”36)고 하였다. 조사(祖師)의 선도(禪道)가 국조(國祚)를 연장시키고 불설지론(佛說智論)이 외적을 진압해 준다는 것이다. 36) 혜심, 〈선문염송집 서〉 《한국불교전서》 5.

고려시대의 고정화된 속신적 기양의 지속성은 불교로 하여금 시대정신을 선도할 역량을 잃게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고려 말 이래 억불숭유의 분위기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불교의 기복적인 현상은 오히려 심화되어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조선조의 위정자와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탄압하면서도 대부분의 관료와 민중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불교의 사찰은 복을 주는 자복사(資福寺)라고 하여 남겨 놓았다.37) 37) 《태종실록》 권14 태종 7년 12월 신사조.

조선 중기 불교를 중흥한 휴정(休靜)이 확립한 간경(看經)·참선·염불의 3문 수업의 전통이 존속하여 출가자들도 염불과 화엄을 수용하되 궁극적으로는 선에 귀착시켜 나갔다. 현세 이익적 관점의 대상으로 기복적인 주술 신앙 및 정토왕생 신앙을 갖고 있는 민중들의 기복적인 불교의 전개였다.

4. 나가는 말

모든 종교는 자기 자신의 문제 해결을 우선적으로 하고 있다. 신과의 대화, 절대자에의 융합, 붓다에의 귀의 등등 그 형태는 여러 가지라 하더라도 오로지 자기를 해결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개체의 문제에 관한 것이지 공동체에 관한 문제는 아니며, 도를 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 개인이며 선을 하는 행위의 과보는 선인선과·악인악과로 원칙적으로 그 사람의 복으로 내려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에 배척할 것이고 남의 이익을 함께 한다면 순응할 것이기 때문에, 혼자만을 위하는 행동은 악이라 할 수 있고 나와 남을 함께 하는 행동은 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선행의 업을 쌓아야 하며 악을 부정하는 계를 수지하고 남에게 아낌없이 주는 보시를 해야 한다. 모든 중생을 진정한 친우로 여겨 사랑스런 말을 하고(愛語) 이익을 주고(利行) 항상 함께 일하는(同事) 사섭법(四攝法)을 실천해야 한다.

악한 업에는 괴로운 보가, 선한 업에는 즐거운 보가 따르는 것이며, 현세에서 받지 못하면 내세에서라도 반드시 받을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늙고 병들어 죽게 되면 정신은 형상이 없을 것이나 가령 죽었다 다시 난다 하더라도 죄와 복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수행본기경)라고 하였다. 인간에게는 선업을 행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삶의 가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힘써 하며 그 마음 스스로 깨끗이 하라.”는 붓다의 가르침(증일아함경 권1 서품 칠불통계)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한국의 불교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이에 따른 규율을 지키고 남을 내 몸처럼 아낌없이 보시하는 정신과 실천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 같다. 재가인은 승가에 재시(財施)를 하는 것으로 그치고 그 밖의 모든 보시 행위를 승가에 미루고 있다.

요컨대 지나치게 승가 중심의 공덕설로 흘러 삼보에의 공양이 곧 보시이며, 그것이 곧 큰 공덕이 발생한다고 하는 복전·기복신앙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출가인도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기를 권유하기보다는 이를 방조한다. 이로 인해 재가인은 붓다의 높고 크나큰 가르침이 있음에도 현세 이익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복을 찾게 되는 것이다.

불자는 “무엇보다도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구해야 하며 그런 원대한 바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교만이다.”(묘법연화경 권1 방편품)라는 붓다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끝>

황인규
동국대 역사교육과 및 동대학원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논저서로는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여말선초 선승과 불교계의 동향〉 《무학대사연구-여말선초 불교계의 혁신과 대응》 《마지막 왕사 무학대사》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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