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종교와 정치 그 갈등과 유착의 관계

1. 독일의 보수적 ‘국민정당’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의 패망을 가져온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경제부흥과 민주체제의 안착을 통해 중부유럽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독일을 ‘서구화’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양대 국민정당인 기민련(CDU)/기사련(CSU)과 사민당(SPD)이었다.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말하자면 기민련의 당수였던 아데나워(K. Adenauer) 수상을 빼놓을 수 없고, 독일의 복지제도와 독일 통일의 기틀을 세운 ‘동방정책’을 말하자면 사민당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던 브란트(W. Brandt) 수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독일 통일과정은 콜(H. Kohl) 수상으로 대변되는 제2세대 기민련 지도자의 이미지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전후 독일의 역사는 이념적으로 기독교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간의 경쟁과 협력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사실 보수적인 기독교 민주주의와 진보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대결과 협력은 역사적으로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 세계대전 후 건설된 기민련은 옛 독일제국의 가톨릭 정당인 ‘중앙당(Zentrumspartei)’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독일 의회에서 가톨릭계 의원들이 하나의 교섭단체를 이루면서 시작된 중앙당은 비스마르크가 남부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도를 억압하기 위해 벌인 ‘문화투쟁(Kulturkampf)’ 하에서 상당한 핍박을 받다가 그의 실각 이후 사민당과 더불어 독일의 대중정당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중앙당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사회주의자 진압법’에 의해 탄압당했던 사민당과 마찬가지로 억압을 받다가 후에 국민정당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그 구성에서 사민당과 매우 다른 측면을 보인다.

우선 사민당이 제도권 밖에서 비합법적으로 먼저 건설되었다가 후에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반면에, 가톨릭의 중앙당은 처음부터 원내 의원들의 연합으로 출발한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민당은 노동자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여기에 일부 지식인층과 수공업자 등이 참여한 ‘노동자당’이라는 점에서 당원의 동질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의 당 강령을 중심으로 뭉친 이념적 정당이었다.

이에 반해 중앙당은 노동자, 귀족, 수공업자, 관료, 사무원, 성직자, 공장주, 농민 등 이질적인 사회구성원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이들간의 공통점은 단지 그들이 가톨릭교도였다는 것일 뿐 어떤 단일한 당 강령으로 결집된 당이 아니었다.1) 1) 〈Die Macht der Parteien〉, in: 《Der Spiegel》, 11/1999 참조.

이 중앙당이 사민당과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 민주주의의 만개와 동시에 혼란상의 주역이었으며, 결국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수권법(授權法)’에 찬성표를 던져 스스로 붕괴의 운명을 맞는다. 전후 독일 보수세력은 민주정치의 재건을 위해 중앙당의 전통을 잇는 동시에 나치즘에 반대하는 기독교 정당을 전국에서 건설하기 시작한다.

당의 중심 구성원은 여전히 가톨릭 교도였지만, 점차 개신교 신자들도 참여하여 범기독교 정당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고, 1950년에 비로소 바이에른주를 제외한 각 지역의 지역당이 연합하여 전국 연방차원의 ‘기독교민주연합(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을 결성하게 되었다. 다만 바이에른주에서는 독특한 역사전통에 따라 ‘기독교사회연합(Christlich-Soziale Union)’으로 당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연방 차원에서는 기민련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방식으로 정리가 되었다.

2. 기민련의 당 이념 : ‘기독교 연대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

기민련과 그 자매당인 기사련은 모두 가톨릭 교회의 사회이론에 그 이념적 기초를 두고 있다. 지역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개신교보다는 가톨릭 전통이 강했던 독일에서 이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민련이 소련점령지역과 바이에른주를 제외한 여러 지역의 기독교 지역당의 연합을 통해 구성된 데 반해, 기사련은 바이에른주의 독특한 역사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역당인 동시에 준(準)연방당이라 할 수 있는 이 기사련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기민련과 공유하며 연방의회에서 하나의 단일 교섭단체를 이루고 있지만, 세부 사항에 있어서는 기사련이 기민련에 비해 보다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기민련이 가톨릭 교회의 사회이론에 그 이념적 뿌리를 두고 있다 하여도, 이 이론은 단순히 하나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기독교 사회이론은 두 학파로 분화되어 있었다. 예수회 학파와 도미니코회 학파가 그것인데, 전자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자유주의를 강조하였던 데 반해, 후자는 공동체와 공익을 강조하였다.

예수회는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와 둔스 스코투스(J. Duns Scotus)의 전통에 따라 윤리와 정치를 엄격히 구분하고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질서를 기본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에 반해 도미니코회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전통에 서서 개인보다 전체를 강조하고 윤리와 정치가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가톨릭 사회철학의 중심개념인 공유개념으로부터 사회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주의적인 질서관을 도출해내었다. 이러한 기독교 사회이론의 두 학파는 전후 기독교 민주연합이라는 범기독교 정당을 구성하면서, 사회·경제체제에 관한 당내 논쟁에 그 흔적을 남긴다.

정당 건설 초기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요구, 특히 서부 독일과 남부 독일 지역당의 초기 강령에서 나타나는 기간산업의 사회화에 대한 요구는 도미니코회의 이러한 사상적 전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 독일의 전반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던 이런 토미즘적 ‘기독교 사회주의(christlicher Sozialismus)’는 가톨릭 사회이론에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던 예수회의 ‘기독교 연대주의(christlicher Solidarismus)’는 전체를 강조하는 중세의 질서관을 배경으로 한 토미즘이 개인을 과도하게 공익에 속박시켰다고 비판한다.

근대 이후 사회의 기본구조가 변화하였으므로, 기독교 사회이론도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입장이 전통적인 의미의 자유주의에 완전히 수렴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시각에서 ‘기독교 연대주의’는 직업 신분적 질서를 사회·경제질서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질서에 반대하는 동시에 순수한 자유경쟁 자본주의 질서에도 반대하는 일종의 중도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처럼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고유한 노동과 자본의 분리를 직접 지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부정적 결과들을 완화하려 시도한다.

그 시도가 인간 노동의 상품적 성격을 제거하고 각 개인이 그가 공동체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국민공동체’에서 정당한 지위를 갖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때 ‘기독교 연대주의’는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고전적인 자유주의 국민경제의 전제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 전제란 시장이 전적으로 자율 규제적이며, 각 개인이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경제가 최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경제자유주의의 전제에 대해 ‘기독교 연대주의’는 경제과정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일정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경제에는 시장의 원리보다 상위의 원리인 ‘공익적 정의’와 ‘사회적 사랑’의 원리가 규제적 원리로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위의 원리를 가지고 경제에 개입하는 주체로서의 국가는 적극적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기민련은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중도 국민정당’으로 정의해왔다.

아데나워 수상 주변의 유연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이념적으로 경사되어 있었던 ‘기독교 연대주의’가 전체의 공익을 더 강조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 점차 당내 주도적 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됨에 따라, 기독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협력은 보다 용이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통해 기민련은 서독 경제부흥기의 정치적 주도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거의 ‘국가정당(Staatspartei)’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것은 가톨릭의 중심 조류가 시장경제와 자유기업의 정신에 바탕을 둔 현대 산업사회를 원칙적으로 수용한 것을 반영한다. 이렇게 가톨릭 사회이론의 개인주의적 형태가 당내 이념적 주도권을 잡게 됨으로써 다수의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이 당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이를 통해 기민련의 이념이 무엇보다 정치·사회체제를 자연법적인 근거를 갖는 신적 질서체제가 아니라 하나의 세속적 질서체제로 보는 개신교의 사회윤리와 중요한 접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중요한 접점은 반공주의에 있었다. 개신교도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 연대주의’의 반사회주의적 체제관이 토미즘의 자연법이론에 근거한 ‘기독교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자신들과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시에 당내에서 기독교 노동운동 분파의 세력 약화를 의미한다. ‘기독교 사회주의’에 경사되어 있었던 이들 기독교 노동운동 세력은 그들의 초기 슬로건이었던 “철저한 사회경제적 혁신”의 요구를 포기하고 ‘기독교 연대주의’를 당의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하는 냉전시대라는 외부 환경의 영향도 있었지만, 당의 단합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기독교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태도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기민련은 자본주의를 사회적으로 개혁하는 수준의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를 당의 사회·경제정책의 기본이념으로 제시하면서, 대외정책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동유럽의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블록의 구축을 기조로 삼게 되었다.2) 2) 〈Die 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 in: Richard Sto촶s (Hrsg.), 《Parteien-Handbuch. Die Parteien der Budesrepublik Deutschland 1945∼1980》, Bd. 1, 1983, Opladen, 514쪽 이하 참조.

3. 독일 정치에서 기사련의 독특한 위치

기사련은 바이에른주에만 있는 지역당이자 동시에 연방의회에도 진출하고 있는 당이다. 다른 주의 보수 기독교 세력이 연방 차원의 기민련으로 통일되어 있는 데 반해 동일한 기독교 사회이론을 당의 이념으로 삼으면서도 당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바이에른주의 역사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다른 대부분의 주가 새로운 경계선으로 분할·통합되었던 반면, 바이에른은 1933년 이전의 경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로써 바이에른주는 전통적인 바이에른의 ‘독립국가 의식’을 간직한 채, 전후의 독일 연방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구조에 있어서도 바이에른주는 1940년대 중반까지도 다른 주와 달리 농업기반 사회였으며, 따라서 농민, 수공업자, 소시민이 대부분의 주민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이에른이 오늘날과 같은 산업중심의 체제로 바뀐 것은 전후 20년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기독교 교파로 보면, 인구의 약 2/3가 가톨릭인 반면 나머지가 개신교 전통 속에 들어 있어 전반적으로 가톨릭의 영향력이 다른 주에 비해 강한 지역이다.

이런 영토적 연속성과 다른 주와 다른 전통적 농업 위주의 경제구조는 바이에른만의 독특한 정당구조를 낳았다. 그것은 보수 기독교 정당인 기사련이 잠시 동안을 제외하고 전후부터 현재까지 바이에른주에서 계속 집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기사련의 ‘독재’를 운위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민주적 선거에 의한 장기집권이니 이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우선 지역의 사회·경제적 구조상 가톨릭 농민, 수공업자, 소시민이 당원의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사회이론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삼는다 하여도 전후 초기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등장했던 형태의 ‘기독교 사회주의’나 ‘기독교적 책임에 기반한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이 당내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물론 대전 직후인 1946년의 당 강령에 서술되어 있듯이 기독교 사회의 사적 소유에 기반하여 국가가 인도하는 경제를 지향한다는 ‘경제질서의 새로운 구성’과 같은 일부 사회·경제개혁의 프로그램이 있으나, 그것은 제도적으로 불분명한 수준에 그친 것이었다.

바이에른주의 산업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기사련도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도 이념으로 삼게 되는데, 그것의 내용은 기민련에 비해 보다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다. 기사련이 지향하는 경제체제는 사회적인 배려를 함께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인데, 그것은 정치체제의 사회적 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가톨릭 사회보수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사민당에 대항하는 블록이 깨지고 전통적인 자유주의 정당인 자민당(FDP)이 사민당과 연합하는 소위 ‘사회자유주의 진영’이 성립하는 60년대 말 이후 기사련은 더욱 더 보수주의에 기울게 된다. 결국 기사련의 보수주의는 기업가의 이윤을 사회와 국가의 지주로 보게 되고, 기업가들은 바로 기사련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여기고, 기업과 기사련과의 밀착은 가속화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바이에른의 전통적 농업기반을 중시하여, 농업에 대한 국가지원을 제도화한 것도 기사련이었다.

기사련이 기독교 이념과 보다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분야는 대외정책 분야이다. 그것은 ‘기독교 요새’로서의 바이에른이라는 개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전략에 따르면 바이에른주는 바이에른 조국애를 중심으로 하여 바이에른의 독특한 기독교적 정치문화를 고수하기 위해 외부와 담을 쌓고 ‘기독교 요새’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외부와 영원히 단절되기 위한 요새가 아니다.

그것은 외부로 향해 ‘기독교적 공격’을 행하기 위한 요새이다. 여기서 ‘기독교 요새’ 전략은 바이에른의 기독교 전도임무라는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이어진다. 바이에른은 독일의 다른 연방 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대해서도 ‘기독교적 서구의 국가·문화공동체’ 건설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외부에 대해 담을 쌓고 내부의 요새를 튼실히 건설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대외 전도가 우선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기사련의 대외정책은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해왔다.

이러한 ‘기독교 요새’로서의 바이에른 전략은 냉전시대에 ‘기독교 요새’로서의 서유럽이라는 전략으로 나아간다. 소련과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에 대한 방어동맹으로서 서유럽을 ‘기독교 요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동독의 승인불가, 소련 공산주의의 외세지배로부터 동독지역의 해방을 의미하는 평화와 자유의 상태에서의 독일 재통일이라는 공세적 동방정책과 더불어 유럽연합의 구상을 당내에 정착시키는 계기가 된다.

전후 30년간 기사련의 지도자였던 스트라우스(F. J. Strauβ)는 이미 50년대 초에 “낡은 민족국가 이념을 포기하고 점차 유럽연방국가로 발전해나갈 유럽국가연합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19세기의 중앙 집중화된 민족 국가적 경향의 극복과 통합원칙은 동구로부터 오는 위협에 직면하여 자유유럽의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 요새’ 개념으로부터 도출된 기사련의 유럽정책은 실용적 노선을 추구했던 기민련보다 더 완고한 것이었다.3) 3) 〈Die Christlich-Soziale Union in Bayern e. V.〉앞의 책, 661쪽 이하 참조.

4. 변화된 현실과 당의 위기

‘중도 국민정당’이라는 기독교 민주당의 정체성은 오랫동안 다양한 계층과 기독교 교파집단을 한 지붕 아래 집결시키는 데 성공적인 처방책이었다.4) 실제로 전후 기독교 민주당이 보여준 이런 사회통합력과 효과적인 자원동원력은 독일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4) 이하에서 기민련과 기사련 중 하나를 특칭할 경우를 제외하고 두 정당을 통칭하여 ‘기독교 민주당’으로 지칭한다.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한 번도 정부를 구성해보지 못했으며, 바이마르 시대에는 연정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전반적인 혼란 상황에서 불안한 여당에 불과하였다. 결국은 히틀러의 나치즘에 민주체제를 빼앗겼을 뿐이었다. 이런 역사에서 전후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독일 경제부흥을 성공시키고 독일이 더 이상 ‘특수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서구화’의 길을 걷게 한 주역을 기독교 민주세력이 담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이 국민정당으로서 통합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전후 가톨릭과 보수 개신교계를 통틀어 범보수세력을 통일시키는 결합력은 사실상 일차적으로 독일 시민계층의 반공주의에 있었다. 모스크바로 상징되는 공산주의의 위협 앞에서 가톨릭 농촌지역의 소농, 한자도시의 거상, 슈바벤 지역의 경건주의자, 중부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이 기독교 민주연합의 깃발 아래 뭉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원인에 의한 내부 통합력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점차 약화된다.

독일 통일시기 동독 주민의 서독체제에 대한 기대와 신속한 통일과정을 주도한 콜 수상 개인의 인기 덕택에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나, 사회주의와의 대결 이후를 제시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 부재, 저성장, 고실업율 등으로 인해 국민들은 점차 기독교 민주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1998년 총선에서의 패배와 더불어 야당으로 밀려난 다음 일시적인 당 응집력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새로이 정권을 잡은 사민주의와 녹색주의는 과거의 공산주의와 같은 위협이 아니었다.

슈뢰더(G. Schro촥er) 수상의 사민주의가 전통적인 복지노선의 수정을 통해 ‘중도’를 표방하고 나서고 사민당과의 연정에 참여한 녹색당이 과거 거리의 데모당에서 변신하여 행정의 책임을 지는 ‘계산 가능한 정당’으로 제도권 안에 성공적으로 안착할수록, 사회주의의 위협이란 말은 국내에서도 알맹이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제 외부의 위협에 대한 방어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내부 응집력을 확보하는 전략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좌파가 오른쪽으로 기울어 우파의 영토로 들어올수록, 전통적인 보수세력은 자신들의 텃밭조차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다.기독교 민주당은 슈뢰더 수상이 그의 국민적 ‘합의정책’을 통해 어떻게 정치 아젠다를 주도하고 사회적 연합을 이루어내는가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상황이다. 국민 대다수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중도’의 이념을 진보세력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전통적인 협력자였던 경제계도 슈뢰더에게 빼앗기고 있다고 기민련 지도부는 한탄하고 있다.

언제나 기독교 민주당의 지지기반이라 믿었던 경제 단체장들이나 대기업의 회장들이 사민당 당수를 겸하고 있는 슈뢰더 수상과 공·사적으로 자주 만나 대화하는 것은 이제 독일 정치현실에서 일상사가 되었다.
과거 당이 언제나 신뢰할 수 있었던 가톨릭 고정 투표층도 점차 붕괴되고 있다. 콜이 1983년 총선에서 승리할 때 전체 가톨릭 신자의 65%가 기민당을 지지했었다. 반면 1998년 사민당에게 정권을 내줄 때 가톨릭층의 기민당 지지는 49%에 불과하였다.

전에는 가톨릭계와 보수계에 확실히 지지기반을 두고 있으면, 전체 사회에서 ‘중도’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용이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이 기독교 교회의 제도와 규범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45세에서 59세에 이르는 연령층의 약 1/3이 어떤 특정 정당이 기독교적 지향성을 갖느냐를 여전히 중요하게 여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6세에서 25세에 이르는 연령층이 정당의 기독교적 지향성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고작 7%에 불과한 실정이다.당의 전통적 지지층의 상실과 더불어 당과 기독교계와의 연계도 느슨해지거나 해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기독교 민주당의 정치가들을 위해 열린 미사와 같았던 가톨릭 신도대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 외부로 공개된 행사가 되었다.

당 위에서 존경받으면서 당을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결집시켰던 교회적 권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70년대까지 유지되었던 교회와 기독교 민주당 사이의 동맹관계는 해체되어, 이제 가톨릭 교회는 기민련과 기사련의 정치적 계산에서 사실상 부수적인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한때 밀접했던 개신교와의 관계도 흔들리게 되었는데, 개신교 위원회는 콜 시대를 거치면서 당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갔다. 개신교 목사가 이끌고 있는 ‘기독교 민주 노조(CDA)’는 회원 1만 5천명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여성층의 지지기반 상실도 심각하다. 당내의 ‘여성 연합(FU)’은 과거의 빛을 잃었다. 1983년 총선만 해도 35세부터 45세의 여성 중 50.9%가 기독교 민주당을 지지했었으나, 1998년에는 겨우 28.4%에 그쳤다. 특히 젊은 여성층이 가장 많이 기독교 민주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러한 당의 정체성 위기와 지지기반의 상실은 대부분 콜 정부 시대 새로운 사회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여 당을 쇄신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노동자층을 대변하는 새로운 참신한 인물을 발굴해내지 못했고, 녹색당이 들고 나온 환경테마를 방기하였으며, 무엇보다 당의 가족정책은 사회현실과 유리되어가기만 하였다. 미혼모, 이민자, 동성애자 등은 당의 정책관심 밖의 일이었다.5) 5) 〈Alle Wege f hren ins Ungewisse〉, in: 《Die Zeit》, 15/2000 ; 〈Der Vatikan und die Weltkirche〉, in: 《Der Spiegel》, 50/1998 참조.

더욱이 최근 콜 집권시의 당 비자금 사건이 알려지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당 지도부의 솔직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행태는 국민들에게 실망만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가명신탁계좌를 이용한 자금유입과정과 곳곳에서 등장하는 수상한 인물들은 국민들에게 마치 당이 ‘자금세탁’을 일삼는 조직폭력배 집단과 유사한 모습으로 비춰지게 만들었다.

급기야 ‘콜 체제’에 들어 있었던 대다수 지도부가 이 사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결국 콜의 뒤를 이을 인물로 여겨졌던 쇼이블레(W. Scha촸ble) 당수가 물러나고 동독 출신 신세대 여성 기수인 메르켈(A. Merekl)을 당수로 추대하게 되었다. 신임 메르켈 당수를 중심으로 ‘생활 속 한가운데로’를 모토로 내세우면서 당을 ‘현대화’하려 시도하고 있지만, 이렇게 변화된 사회현실에 당을 재적응시키려는 시도가 성공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높기만 하다.


5. 기독교 민주당의 미래를 위한 고투

무엇보다 당의 ‘현대화’를 위한 이념적 기반을 찾기가 용이하지 않은 점이 문제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동시에 기독교 자체의 사회적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고 기독교와 기독교 민주당간의 관계가 느슨해지는 상황에서 보수적 다수를 결집시킬 통합 이데올로기가 현재로서는 어떤 윤곽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는 당의 이름에 들어있는 기독교 민주주의가 무엇을 말하는지 적어도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면, 이제 ‘기독교 민주주의 공화국’이란 이념은 역사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반공주의라는 부정적 이념만으로 당의 단합을 이끌어내던 시절도 먼 옛날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경제기적을 이루어낸 당이라는 과거의 이미지로부터 더 이상 얻어낼 것도 마땅치 않다. 오히려 저성장과 고실업이라는 고질병을 유산으로 남겨놓은 정당이라는 인상이 강하며, 게다가 당 비자금 사건은 여기에다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더하고 있을 뿐이다. 콜이 남긴 그림자는 너무 길어 아직도 ‘콜 이후의 기민련’을 말하기보다는 ‘콜과 함께 하는 기민련’이라 말해야 할 형편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기민련 내에서 당 강령을 둘러싸고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기민련이나 기사련에서 당 강령에 대한 이론적 논쟁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아데나워 시대이든 콜 시대이든 집권당으로서의 정부정책이 당의 방향을 결정해 왔다. 그런 점에서 당수이자 수상 일인이 지배하는 ‘수상당(Kanzlerpartei)’이라는 비하 섞인 표현이 당에 항시 붙어 다닌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야당으로 밀려나면서 전체적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자유로운 당 강령에 대한 토론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당내 강령토론에서 이념적 논란의 초점은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민주주의에서 ‘기독교’가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와 동시에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화두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측은 당이 ‘기독교 인간상’과 ‘기독교 윤리’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당 지도부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당 강령에는 여전히 교회가 가치지향에 대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당이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망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에 따라 이제 더 이상 독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웃사랑이야말로 공동생활의 도덕적이고 정서적인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동안 고수해왔던 민족주의 지향성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기민련(CDU)에서 ‘기(C)’자에 대한 배반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판하는 당내 목소리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념과 연결된다. 물론 이 ‘기’자에 대한 이해가 논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기독교 윤리의 입장에서 이 ‘기’자를 되살리려는 주장에 따르면, 기민련은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부의 축적이라는 ‘황금송아지를 위한 춤’에 휩쓸리지 말고, ‘사회적 시장경제’의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민련에서 ‘기’자는 당이 무작정 경제자유주의의 노선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감독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을 강조할 경우, 그것은 사민당과 녹색당의 중도좌파 적·녹 연정이 방만해진 복지국가를 개선하는 차원에서 긴축재정 정책을 펴는 데 대해 기독교 민주당이 사회적 양심세력의 역할을 떠맡는 역설적인 상황을 낳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보수 신문은 기민련이 사민당보다 더 왼편에 서려는 것이라는 비판까지 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렇게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면서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할 때, 기민련이 무엇으로 사민당과 구별되는지 불분명하게 된다는 점은 명확하다. 당의 이념적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경쟁당을 닮게 되어 오히려 당의 차별적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이 당내에서 강령문제를 제기한 측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기독교 윤리’가 기독교 민주당에 부담으로 제기되는 문제영역은 무엇보다도 생명기술의 경제적, 의학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의이다. 이 문제가 당으로서 난처한 문제임이 최근 기민련 의장 대리 중의 한 사람인 류트거스(J. Ru촷tgers)의 생명정책에 대한 당내 토론 발제문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가 보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일이 생명의료연구에서 세계적 수준에서 첨단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그는 연구분야에서는 자유주의적 접근이 매우 중요하며,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은 어떤 이데올로기의 간섭 없이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민당의 슈뢰더 수상의 주장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기독교적 가치는 인간 생명과 인간 유전인자에 대한 무제약적 이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논의되어야 할 문제, 즉 이러한 기독교적 가치가 생명기술의 제한적 이용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발제문에서 전혀 언급이 없다.

한편으로 생명공학기술 발전과 그것의 경제적 이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윤리’를 고수한다는 기독교 민주당의 노선은 이에 대해 아직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당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런 점에서 당이 차제에 기독교 민주당에서 ‘기’자를 버려야 한다고 내심으로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6) 6)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2001.4.3일자; 〈Kotinuita촷 im Umbruch. Die CDU/CSU auf dem Weg ins neue Jahrhundert〉, in: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 B. 5/2000 참조.

다른 한편으로 이민정책에 대한 논의에서 기민련/기사련의 당내 갈등은 현재 독일 보수세력이 처한 위기와 동시에 변신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후 경제발전기에 들어온 외국노동자들과 그들 가족이 이미 6백만에 이르며 특히 지식정보사회로의 진입을 위해서 필요한 고급 노동력이 부족한 현실에서 이민문제는 독일 정치가 더 이상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사회에 적응하였다 하더라도 독일의 전통과는 다른 습관과 문화를 지닌 ‘외국인 노동자’들로 인해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독일민족’이라는 관념을 점차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보수세력에게는 그 신념의 근저를 뒤흔드는 일이다. 그렇다고 폐쇄적인 단일문화 개념을 고수하기도 어려운 것이 지식정보사회로의 변화를 위해서는 외국의 고급 숙련노동자들의 유입이 절실하고, 그를 위해 이들에게 유인책이 될 수 있는 이민정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강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민련과 기사련이야말로 진정으로 ‘독일 경제발전을 위한 당’이라는 이미지를 고수하려 하는 한 이러한 개방의 요구는 그만큼 더 불가피하다.그 동안 독일 기독교 민주세력은 1998년 연방정권을 사민당에 내준 후 일부 지방선거에서 대중추수적인 민족주의 선거운동, 즉 외국인의 이중국적 반대 서명운동으로 승리하는 덕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슬로건의 약효는 그야말로 선거용이어서 지속적인 정책이 될 수는 없다.

최근 기민련은 메르켈 당수를 포함한 당내 개혁파의 노력의 결과 이전보다 개방적인 이민정책안을 준비중에 있다. 당내 이민정책위원회의 초안에 따르면 외국 노동력의 유입에 대해 특정한 수의 제한을 두지 않으며, 이들 가족의 추가 이민에 대해서도 할당량을 두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기할 점은 독일 보수세력의 정체성의 근간이었던 독일적 ‘주도문화(Leitkultur)’라는 말이 이 초안에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보다 우익의 입장에 서 있는 기사련은 독일의 ‘주도문화’라는 개념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면서 독일은 ‘고전적인 의미의 이민국가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정책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독일에 이주한 외국인은 독일어를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독일의 법질서와 사회질서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추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독일인이고자 한다면 독일사회에 통합되어야 하는데, 이 통합의 기준은 모든 문화국가에서 지배적인 ‘주도문화’여야 한다는 것이다.7) 7) 〈Integrationskurs fu촵 Ausla촱der〉, in: 《Speigel Online》 2001.4.14; 〈Ade deutsche Leitkultur〉, in: 《Speigel Online》 2001.4.29.

앞으로 당내 논의기구를 통과하면서 기민련과 기사련의 통일된 이민정책안이 제시되기는 하겠지만, 이는 어떤 식으로든 당의 민족주의적 기본 신념에 일정한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도 위에서 언급한 변화하는 사회현실이 강요하는 새로운 가족정책이나 여성정책, 그리고 생명의료기술에 대한 정책은 이들 문제가 기독교 전통윤리와 배치되는 측면이 큰 만큼, 앞으로 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따라 기독교 민주당에서 기독교라는 말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한 가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당이 변화된 현실에 적극 적응하면 할수록 기독교 민주당에서 기독교라는 말은 허사(虛辭)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한승완
고려대학교 독문과 및 동대학원 철학과 졸업(석사), 독일 브레멘(Bremen) 대학 철학박사 (Ph. D.) 현재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논저서로 《Marx in epistemischen Kontexten (인식론적 맥락에서 본 마르크스)》〈비판적 사회이론의 방법론적 전략〉<합리성에 관하여. - ‘비상대주의적 다원주의’의 가능성><새로운 민족정체성 확립을 위한 제언><통일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시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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