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불교가 보는 환경과 생태

1. 불교의 인간 이해

우리는 지구라는 별 속에 살고 있다. 이 지구는 약 150억 년쯤 되는 우주의 자궁 안에서 태어난 무수한 은하계들 속에서 운행하는 별이다.

그런데 이 별은 셀 수 없는 행성 가운데에서 대략 50억 년쯤 된 태양을 돌고 있다. 이 별이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환경1)이다. 1) ‘환경’과 ‘생태’ 개념은 엄격한 의미에서 구분된다. 환경이 ‘생활체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사물 또는 유기체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이라면, 생태는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 또는 생활하여 가는 상태’를 말한다. 즉 환경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살아가야 할 공간 또는 기제’라면, 생태는 ‘자연 환경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의 생존 형태 또는 생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개념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어서 굳이 말하면 ‘생태환경’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개념이 갈리는 초점은 생명을 중심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 생명의 터전을 중 심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이 글에서는 ‘생명’(생존형태)과 ‘터전’(생존공간)이라는 두 개념을 분리하지 않고 불교의 환경론을 전개해 갈 것이다

45억 년의 나이를 지닌 이 지구는 그 안에 서서히 생명체를 탄생시켜 왔다. 최초의 생명체인 단세포 생물에서부터 다세포생물-어류-양서류-파충류-포유류-영장류 등의 생물들은 지구의 몸 안에서 약 35억 내지 38억년간 살아왔다.2) . 2) 아텐보르, 《생명의 신비》, 김훈수(학원사,1985); 박상윤, 《진화》(전파과학사, 1980)

그런데 지구라는 환경 속에서 이러한 생명이 지속적으로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을 지켜온 어떠한 ‘자연스런 질서’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그 질서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명체들을 유지시켜온 ‘생태의 사슬’3)은 아마도 그 자체가 하나의 질서였을 것이다. 3) 여기서의 ‘생태의 사슬’이란 개념은 강자가 약자를 먹이로 삼는다는 의미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동물들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찬 부정적인 형태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상호의존성 내지 상호연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개체의 존재성을 열어준 조건이라는, 타자를 통해 규정된 원리인 ‘연기의 법칙(緣起法)’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구의 폭발과 문명의 확장 그리고 고착된 사고에 의한 인간 욕망의 극대화로 ‘스스로 그러한’ 지구는 서서히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구의 ‘스스로 그러함’을 유지하기 위한 어떠한 인위적 질서의 설정이 요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위적 질서의 요청과 더불어 연기의 법칙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법칙의 다른 표현으로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먼저 이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욕망과 환경4) 간의 ‘상생’ 또는 ‘중도’적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4) 황태연, 〈21세기 知性의 키워드: 환경정치학〉, 《조선일보》 2000년 8월 18일, 19면. “‘환경문제’를 가장 큰 연구 대상으로 삼는 환경정치학자들은 환경정치학의 근본적 지향점을 크게 생태주의와 환경주의로 대별한 뒤 생태주의보다는 환경주의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생태주의는 합리주의, 시장자본주의, 기술공학, 산 업주의 등 근대성의 핵심 요소들을 환경 파괴의 근본 원인으로 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에, 환경주의는 합리주의, 인본주의, 민주주의, 시장주의와 산업주의 등 근대 기획의 기본요소들을 견지한다. 특히 환경주의자들의 환경회복 방안은 기술·산업구조와 권위주의적 경제구조를 더욱 합리화, 시장화하고 정치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민주화, 인간화하는 것과 병행하여 환경정책을 강화하고자 한다.” 이런 입장은 최근의 환경학 또는 생태학의 새로운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환경’ 또는 ‘생태’라는 개념보다는 ‘자연’이라는 개념이 보다 광범위하게 인식되어 왔다.

“나의 욕망 공간의 확장이 남의 욕망 공간에 대한 장애(희생)를 최소화(현실적 인간) 내지 무화(보살적 인간)시키는 인식의 틀”5)인 연기론이 환경론 내지 생태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근거 역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독일 수학자 뫼비우스가 창안(1865년)한 ‘뫼비우스의 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가르침이다. 직사각형 띠의 끝을 한 번 꼬아서(180도 회전시켜서) 다른 쪽 끝에 붙이면 면이 하나밖에 없는 띠가 된다. 5) 졸론, 〈연기철학 서설:《반야심경》과 《금강경》의 연기철학적 기반〉, 《석림》 제33호, 동국대학교 석림회, 1999.

이 띠 위로 기차가 달린다면 모서리를 넘지 않고도 앞뒷면을 모두 달릴 수 있게 된다. 이른바 불교 화엄의 담론인 중중무진(重重無盡), 제망찰해(帝網刹海)의 세계가 펼쳐진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연기(緣起)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 또는 생태의 위기는 바로 뫼비우스의 띠가 보여주는 자타불이의 세계에 대한 무지 또는 망각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구라는 별 속에 사는 개체와 개체, 개체와 자연, 자연과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몰지각(沒中道)’과 ‘무정견(無相生)’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불교는 욕망의 존재인 개체(正報)와 이 개체의 삶을 담고 있는 자연 환경(依報)의 관계를 바르게 보게함(正見)으로써 ‘중도’와 ‘상생’이라는 지혜의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것이 불교이며, 남을 해치는 마음이 없이 불쌍한 마음으로 중생을 사랑하는 것이 불교이다.”라고 《불설문수사리현보장경(佛說文殊師利現寶藏經)》에서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의 중생의 범주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인 유정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새로운 인연을 통해 생명성을 회복할 무정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때문에 불교의 환경론6)은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계’7)의 즉자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살아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성이 없는 존재까지 포함하여 “굴레에 빠져 있는 모든 것들을 살려주라.”는 ‘방생계’의 대자적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6) 박병기, 〈논평:원전주의와 상황적 추론의 변증법:슈미트하우젠과 해리스 등의 입장에 대한 주체적 번역 후기〉, 《가산학보》 제8호(1999년, 125면). 여기서 평자는 불교학계의 환경윤리에 관한 종래의 논의를 정리하여 ① 불교의 경전에 근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논의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전주의(原典主義)’와 ② 원전 자체를 중시해야 하기는 하지만, 환경문제 자체가 새로운 성격의 문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풍부한 추론과 해석을 덧붙여야 한다는 ‘상황적 추론주의’로 명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슈미트하우젠을 ‘원전주의자’로, 해리스와 캔트웰을 ‘상황적 추론주의자’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 뒤 그는 원전주의와 상황적 추론의 변증법적 통합을 위해서는, 첫째는 불교 경전 자체를 환경윤리학적으로 재해석해 내는 원전주의 방법과, 둘째는 보다 포괄적으로 불교 정신을 해석하면서 환경윤리적 요소를 추론해 내는 방법을 제시한 뒤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129면). 7) Lambert Schmithausen, The Value of Nature in Buddhist Tradition: 램베르트 슈미트하우젠, 〈불교적 전통에서 본 자연의 가치〉, 《가산학보》 제8호(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년, 98면). 논자는 여기서 “불살생계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동정(day )과 배려(anukamp )의 자세로 실천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불교 경전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윤리적 행동을 권할 때 자주 활용되는 황금률에 상응하는 것이다.”고 했다.

보다 적극적인 이해와 실천을 위해서는 존재의 생사(生死, 輪廻)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중도와 상생의 담론에 대한 명료한 통찰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근원적인 인식 전환을 촉구하는 불교의 중도와 상생의 메시지는 환경 혹은 생태의 위기를 헤쳐나갈 새로운 담론이 될 수 있다.8) 8) 불교의 환경관 또는 자연관에 대해 피상적이고 현상적으로 이해한 종래의 연구는 재고되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불가의 계율에서 불살생이나 살생유택은 훌륭한 생명존중사상이다. 불교의 종지인 자비는 자연에도 적용되며 만물의 인연화합사상이나 연기법에서는 상생의 원리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사상에서 자연파괴의 원인을 찾아볼 수도 없지만 만물순환론이나 제행무상, 허무적멸 등에서 구체적인 자연보존사상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불교의 경전에서 자연보존과 직접 상관되는 분명한 자연관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불교는 자연이라든가 사물에 집착하는 것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기본적 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는 환경윤리와는 상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불교의 민속인 〈방생〉에서 생명존중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불가의 생명존중사상은 생명이 있는 개별에 대한 연민을 말할 뿐 생태계 전체와 자연 전체에 대한 사랑이나 존경을 말해주지 않는다. 불가는 자연 그 자체를 허깨비로 보고 자연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을 헛된 것으로 본다.”(진교훈, 〈한국인의 전통적 자연관의 현대적 의의〉, 《환경윤리》(민음사, 1998), 195면)는 주장은 불교에 대한 몰이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아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경우 소승과 대승은 유기체적 우주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유교와 도교 전통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無我說을 주장하는 불교교리에서 외부세계로부터 눈을 돌려 추구해야 하는 ‘내적 자아’라고 하는 실체는 인정하지 않지만 불교적 수행은 필연적으로 자연보다는 인간의 심적 상태에 관심을 두는 내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적어도 소승불교적 열반의 추구는 자연을 도외시한다. 중생에 대한 자비가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는 일과 합치되며 무욕의 삶이 자연을 보존하는 길로 이어질 수도 있겠으나 열반이라는 초월적 경험을 위해서는 결국 자연에 대한 애정이나 집착은 금물일 것이다.”(최수빈, 〈노장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본 ‘여성과 자연’〉, 《생태주의와 에코페미니즘》(한국불교환경교육원, 2000), 92면)는 주장 역시 근본불교의 ‘무상’과 ‘무아’에 대한 오해 내지는 피상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나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이타적 인간, 보살적 인간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간상은 곧 현실적 인간인 우리들 자신이 곧 업보(무아)의 인간이자 일심(진여)의 인간임을 통찰함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업보’와 ‘무아’, ‘일심’과 ‘진여’의 자각이 바로 ‘이타적 인간’, ‘보살적 인간’으로 태어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온(五蘊)이라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의 화합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오온은 각기 다섯 가지의 자아의 모습으로 환원된다. 즉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四大)의 속성9)으로 된 육신은 신체적 자아와 감수작용을 하는 감각적 자아·지각작용을 하는 이성적 자아·의지작용을 하는 의지적 자아·인식작용을 하는 의식적 자아들로 구성되어 있다.10) 9) 《中阿含經》 권7, 3경(《大正藏》 제1책, 464하 면). “云何四大? 謂地界火水風界.” 여기서 ‘界(性)’는 산스끄리뜨 어원에서부터 ‘속성’, ‘성품’, ‘요소’ 등의 의미를 지닌다. ‘지계’란 땅이 지니고 있는 ‘견고성’을, ‘수계’란 물이 지니고 있는 ‘습윤성’을, ‘화계’란 불이 지니고 있는 ‘온난성’을, ‘풍계’란 바람이 지니고 있는 ‘유동성’을 가리킨다. 10) 이중표, 〈불교의 인간관〉, 《범한철학》 제18집(1998). 여기에서 논자는 오온, 즉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재인 ‘오수음(五受陰)’ 또는 ‘오취온’을 분석하면서 ‘색’을 ‘신체적 자아’, ‘수’를 감정적 자아, ‘상’을 ‘이성적 자아’, ‘행’을 ‘의지적 자아’, ‘식’을 ‘의식적 자아’로 명명하고 있다.

이들 각자가 어떠한 인연에 의해 만나 오늘의 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이들 다섯 가지 요소가 나의 ‘들숨과 날숨의 멈춤’이라는 죽음상태에 직면하면 저마다 인연의 끈을 상실하여 공(空, 空性)으로 해체된다. 이러한 담론은 불교의 여러 경론들과 티베트의 고전들에서 자주 발견된다. 죽어가는 과정은 체내의 요소가 해체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거기에는 여덟 단계가 있다. 맨 먼저 흙, 다음에는 물과 불 그리고 공기가 해체된다.

그 다음에는 색으로 나타나는 네 단계를 경험하게 된다. 흰색이 나타나다가 빨간색이 많아지고, 다음에는 검정색에 가까워지다가 결국 죽음이라는 맑은 빛이 된다.11) 때문에 나를 구성하는 것은 어떠한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11) 달라이 라마,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 공경희(문이당, 2000), 90면.

오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호흡이 멈추고 난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살아서 지었던 업, 다시 말해서 인연(因緣) 화합에 의해 생겨난(生起) 나의 업식(業識)인 것이다. 이 업식의 과보에 의해 비로소 업보(무아)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 인간들은 모두 몸(행위)과 말(언어)과 뜻(사유)으로 유위의 업보를 짓는다.

이 업보는 어떠한 인연과의 화합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인연은 이미 업 그 자체이며, 인연은 곧 연기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결국 업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러 비구들이여! 안근(眼)이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안근은 실체 없이 생기며, 생겨서는 다 멸한다. 업의 결과(業報)는 있으나 지은 이(作者)는 없는 것이다. 이 (오음의) 덩어리(陰)가 멸하면 다른 (오음의) 덩어리(陰)가 상속한다.12) 12) 《雜阿含經》 권13, 335경(《大正藏》 제2책, 92하 면). “諸比丘! 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已盡滅, 有業報而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

여기서 ‘업보는 있으나 지은 이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는 말은 ‘도둑은 없지만 도둑질은 남는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명제는 무아설을 근거로 하는 불교 업설의 대전제가 된다. ‘안근은 실체 없이 생기며, 생겨서는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이어서 ‘안근이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안근이 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는 것은 무아설의 실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업식의 주체인 안근이 실체가 아님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업의 주체가 문제된다. 업을 짓는 주체는 실체가 아니지만 그가 지은 업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업을 지은 이는 없지만(無作者) 지은 업의 과보는 나의 아뢰야식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남아 있게 되는 것(有業報)이다. 나는 의업(意業)이 가장 중요하다고 시설하니 악업을 행하지 않게 해야만 악업을 짓지 않게 된다.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은 그렇지 않다.13) 13) 《中阿含經》 권32, 〈優婆離經〉(《大正藏》 제1책, 628중 면). “我施設意業爲最重, 令不行惡業不作惡業. 身業口業則不然也.”

의업은 신업과 구업과 달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언제나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연필 열 자루를 지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의 필통에서 내가 말 없이 한 자루를 가져갔다고 하자. 그런데 친구는 내가 훔쳐간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도둑으로 몰 수 없다고 하자. 더욱이 나는 본래 실체가 아닌 존재이므로 연필을 가져간 주체 역시 없다고 하자.

그러나 친구에게 들키지 않았으므로 나는 ‘도둑’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연필을 ‘훔쳤다’는 나의 행위(업)는 나의 경험과 인식의 창고인 내 아뢰야식에 고스란히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악업은 친구가 ‘주지 않은 것을 훔친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 내가 연필을 훔친 사건에 대한 친구의 숙지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친구에게 들키지 않았다고 해서 내 죄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때문에 그 업의 과보는 신업과 구업과 달리 특히 의업에서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일체 중생들은 모두 유위(有爲)로 된 것이어서 모든 인연을 따라 화합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인연이란 곧 업이다.14) 14) 《別譯雜阿含經》 권11, 202경(《大正藏》 제2책, 93면 하). “一切衆生悉是有爲, 從諸因緣和合而有. 言因緣者, 卽是業也.”

그러므로 유위로 된 중생들의 업은 모두 인연을 따라 생겨난 것이다. 선업을 짓지 않고 악업을 계속 짓는 한 유위의 업은 수미산처럼 쌓여갈 것이다. 업설은 이러한 인과법의 도리를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연기된 오온이라는 주어에 상응하는 술어인 무상과 무아 역시 마찬가지다. 무상(無常)을 생각하여 닦아 익히고 거듭 닦아 익혀 능히 일체의 욕애(欲愛) 내지 무명(無明)을 끊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상을 생각함이란 능히 무아에 대한 생각을 건립하는 것이다. 거룩한 제자들이여! 무아에 대한 생각에 머물러 마음에 아만(我慢)을 여의면 열반을 얻게 된다.15)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연기된 ‘오온은 무상하다’는 생각은 곧 무아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 내온다. 15) 《雜阿含經》 권10, 270경(《大正藏》 제2책, 70하~71면 상). “無常想修習 多修習, 能斷一切欲愛 …… 無明. 所以者何, 無常想者, 能建立無我想. 聖弟子! 住無我想, 心離我慢, 順得涅槃.”

이러한 통찰은 곧 물리적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헤아릴 수 없는 인연으로 생겨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의 자각인 것이다. 이러한 무상과 무아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곧 아만을 끊게 되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 업보의 인간은 결국 무아의 인간으로 구체화된다. 업의 주체인 인간은 실체는 없지만 그 업보는 남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비유컨대 두 손을 마주쳐서 소리를 내듯이, 이와같이 안근(眼)과 색(色)을 인연으로 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며, 근·경·식(根境識) 세 가지가 화합하여 촉(觸)이 되고, 촉(觸)에서 수(受), 상(想), 사(思)가 함께 생긴다. 이들 모든 법은 나(我)가 아니며, 항상한 것이 아니며, 이 무상한 나는 항상하지 않고 안온(安隱)하지 않고, 쉽게 바뀌는(變易) 나이다.16) 16) 《雜阿含經》 권11, 273경(《大正藏》 제2책, 72면 하). “比丘! 譬如兩手和合相對作聲, 如是緣眼色生眼識, 三事和合觸, 觸俱生受想思. 此等諸法, 非我非常, 是無常之我, 非恒非安隱, 變易之法.”

여기서 우리는 인식주관(6근)과 인식대상(6경)과 인식활동(6식)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비로소 현실적 인간인 나의 삶의 총화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실체가 아니며, 나의 삶 또한 실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즉 업보로서의 인간이 모든 만물의 무상성을 통찰하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것이 연기설, 다시 말해서 업설의 핵심이다.

이러한 업설은 불교의 인간 이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업보(무아)로서의 인간은 결국 모든 것의 근거인 마음(一心)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인식의 주체이자 업보의 근거인 이 마음은 화가처럼 우리의 현실 세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마음은 업으로 드러나는 의식이다. 이를 업식이라 한다. 우리의 업은 몸으로 짓고(身業), 말로 짓고(口業), 생각으로 짓는다(意業). 이른바 행위와 언어와 사유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으로 짓는다는 의업은 모든 업의 근간이 되며 이것은 곧 마음의 업을 말한다. 마음은 업의 근원이자 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의업이 모든 업의 자성이다.

이 의업은 다시 ‘생각만 지니고 있을 뿐 아직 실천에 옮기지 않은’ 사업(思業)과 ‘생각이 이미 실천으로 옮겨진’ 사이업(思已業)으로 구분된다.17) 이러한 의업에 대한 정치한 접근이 이른바 마음의 철학인 유식학이다. 유식학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심(心, 제8 아뢰야식)·의(意, 제7 말나식)·식(識, 제6 요별경식)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우리가 지은 선과 불선의 행위(種子)는 마음에 습관처럼 배어들어 훈습(熏習)된다. 이렇게 훈습된 습기를 종자(種子)라고 한다.18) 17) 《大事經》 권1, 〈一法品〉(《大正藏》 제17책, 663면 상중). “業自性者, 謂或思業, 或思已業. 如是應知諸業自性.” 18) 護法 等, 《成唯識論》 권2(《大正藏》 제31책, 8면 중). “故諸種子無始成就, 種子旣是習氣異名.”

이 종자가 업의 결과로서 모여 있는 곳을 우리는 마음 또는 아뢰야식이라 한다. 이 업이 일어나는 근원이자 업의 결과인 아뢰야식을 불변하는 내적 자아로 생각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말나식이다. 그리고 감각적 지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안, 이, 비, 설, 신의 전5식을 총괄하는 의식을 제6의식이라 한다.

이렇게 심, 의, 식의 세 식이 업을 발생시키는 근원이자 업의 결과를 훈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마음은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유식에서는 “하나의 물을 놓고도 네 가지로 본다(一水四見).”19)고 하며, 화엄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一切唯心造).”고 한다. 즉 업보로서의 마음은 결국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현상)는 업이 근본이 되고, 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 된다.”20)는 것이다. 19) 같은 물을 놓고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천상의 사람은 물을 유리로 장엄한 땅으로 보는가 하면, 인간은 물을 물로 본다. 아귀는 물을 고름(膿)과 피(血)로 보는가 하면, 고기 따위는 자기가 사는 집으로 본다. 20) 實叉難陀 譯, 《大方廣佛華嚴經》 권19, 〈昇夜摩天宮品〉(《大正藏》 제10책, 101면 중). “一切衆生界, 皆在三世中, 三世諸衆生, 悉住五蘊中, 諸蘊業爲本, 諸業心爲本.”

이처럼 업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마음은 시작은 없으나 끝이 있는(無始有終) 무명과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有始無終) 진여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멸한다. 때문에 이 마음은 모든 것의 근거이자 불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마음(一心)은 《대승기신론》에서 진여 또는 여래장으로 표현된다. 여래장은 무아를 근거로 하므로 무아의 여래장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업에 의해 차별이 있을 뿐인 것이다.

때문에 대승에서는 제일의공, 진여, 불성, 법신, 중도, 열반, 실제, 구경, 일승 등으로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일컫는다.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에서는 성공, 실제, 불생, 무상, 무원 등으로 여래장을 설하면서 인간의 참모습을 ‘무아에 근거한 여래장’이라고 설한다.

대혜여! 내가 말하는 여래장은 외도가 설하는 아(我)와 다른 것이다. 대혜여! 여래정등각께서는 성공(性空)·실제(實際)·열반(涅槃)·불생(不生)·무상(無相)·무원(無願) 등의 여러 구절의 뜻으로서 여래장을 설하시어 어리석은 범부들로 하여금 무아의 공포를 여의게 하고, 분별이 없고 영상이 없는 곳에 여래장의 문을 설하여 미래와 현재의 여러 보살 마하살들이 아(我)에 대한 집착에 응하지 않게 한다. …… 일체의 분별상을 멀리 여의게 하는 무아법(無我法) 속에서 갖가지 지혜와 방편의 뛰어나고 교묘함으로 혹은 여래장을 설하기도 하고, 혹은 무아를 설하기도 하니, 갖가지 이름과 글자(名字)가 각기 차별이 있는 것이다.

대혜여! 내가 여래장을 설하는 것은 아(我)에 집착한 여러 외도들의 무리를 껴안고 망녕된 견해를 떠나게 하여 세 해탈(三解脫, 空, 無相, 無願)에 들어가 속히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阿?多羅三큷三菩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니, 이러한 까닭에 모든 붓다들께서 설하시는 여래장은 외도가 설하는 아(我)와 다른 것이다. 만일 외도의 지견을 떠나고자 하면, 마땅히 무아의 여래장의 뜻을 알아야 한다.21) 21) 實叉難陀 譯, 《大乘入楞伽經》 권2(《大正藏》 제16책, 599면 중).

불교의 지향이 집착을 멸하고(滅執) 충만한 지혜(滿空)를 얻는 것에 있음은 위의 인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일체의 분별을 떠나게 하는 무아법을 바탕으로 설하는 여래장 역시 ‘무아의 여래장’인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떠한 존재가 있다, 없다라는 단멸론과 단상론을 넘어 중도의 길, 지혜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붓다는 인간의 참다운 모습인 여래장을 설하는 이유를 아(我)에 집착한 여러 외도들의 무리를 껴안고 망령된 견해를 떠나게 하는 데에 있다고 역설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세 가지 해탈에 들어가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함에 있다. 그리하여 여래장은 여래장이면서도 ‘무아의 여래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붓다들은 일체가 마음에서 변화된 것임을 아나니, 만일 이처럼 이해한다면 그는 참된 붓다를 볼 것이다. 마음이 이 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이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니, 일체의 불사(佛事)를 함에 더없이 자재한 것이다. 만일 삼세의 모든 붓다임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든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22) 22) 實叉難陀 譯, 《大方廣佛華嚴經》 권19, 〈昇夜摩天宮品〉(《大正藏》 제10책, 101면 중).

《화엄경》은 우리 눈앞에 벌어진 온갖 것을 모두 마음에서 변화된 것으로 파악한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부처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미혹의 세계 속에 사는 현실적 인간들은 우리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세계를 쉽게 자각하지 못한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우리 마음이 이 세계를 만들어 내었음을 일깨워줌으로써 미혹의 세계 속에서 헤매이는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고 나아간다. 여기서도 인간 행위의 근거인 업보로서의 마음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업보와 마음은 환경 담론의 주체인 인간 이해의 주축이 된다.

2.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이해

1) 인식으로서의 존재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을 지칭할 때 ‘인식능력이 있는 존재’인 유정(有情), ‘목숨을 지니고 있는’ 중생(衆生), ‘생명을 지니고 꿈틀거리는 존재’인 준동(蠢動)과 ‘사유능력(情識)을 머금고 있는 존재’인 함령(含靈) 등의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 왔다. 특히 유정과 중생의 구분은 중국 한역경전의 번역의 지평을 신역(新譯)과 구역(舊譯)으로 가른 현장(602∼664)에 의해서이다.

현장 이전의 번역에서는 《열반경》에서의 “모든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것처럼 주로 ‘중생’을 사용해 왔다. 이때의 중생은 살아 있는 것들의 총칭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현장의 역경 이후에는 보살을 “깨달은 중생(覺有情)”이라고 번역했듯이 살아 있는 존재를 주로 ‘유정’으로 표현해 왔다. 여기서 유정의 ‘정’은 인식능력, 사유능력, 판단능력을 의미한다.

‘정’이란 감정, 인정, 망정, 유정, 통정 등의 다양한 용례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러한 용례에서 공통된 이 ‘정’ 역시도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업 가운데에서 생각(마음)의 영역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은 인식, 사유, 판단 등의 마음의 작용을 뜻하며, 유정은 인식능력, 사유능력, 판단능력을 지닌 존재를 일컫는다.

중생 역시 목숨 가진 것들, 즉 살아있는 뭇 생명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중생의 출생방식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포유류처럼 태에서 태어나는 태생(胎生), 하늘을 날으는 새나 바다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처럼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 미생물이나 작은 곤충처럼 물기가 있는 습한 곳에서 나는 습생(濕生), 그 나머지 천상이나 허공이나 일정한 방식에 의하지 않고 어떠한 변화에 의해 나는 화생(化生) 등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이 화생은 천상이라거나 지옥의 중생 또는 죽은 뒤의 존재인 중유(中有) 등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면 ‘생명을 지닌 무리들’인 ‘중생’은 어떻게 사유하는 존재인가. 우리 인간을 예로 들어보면 나의 제6식으로 전5식의 작용을 분별하고 종합한다. 그리고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서 표층의식으로 전개되는(種子生現行) 7전식과 이미 현행한 의식으로부터 다시 아뢰야식으로 훈습하면서 환원하는(現行熏種子) 제6식, 그리고 아뢰야식 속에서 다시 잠세하는(種子生種子) 종자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사유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心王)과 마음의 작용(心所)을 지니고 있는 존재, 즉 정식(情識)이 있는 존재를 유정이라 하고, 사유하는 존재라 한다. 정식은 유정과 무정의 존재를 파악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유정 가운데는 인간과 같이 인식능력, 사유능력, 판단능력을 지닌 존재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존재도 있다. 이를테면 풀이나 나무 같은 존재는 생명활동은 있지만 정신작용은 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풀과 나무들은 저나름의 방식으로 생장하고 번식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들이 인식, 사유, 판단 등의 능력이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모든 풀들은 누구나가 존재 이유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명명된 이름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 어디에도 “잡초는 없다.”23) 23) 윤구병, 《잡초는 없다》, 보리, 1998.

우리가 흔히 잡초라 여기는 그 어떤 풀조차도 그 나름대로의 존재방식이 있다. 그렇다면 그 풀은 분명히 생명을 가진 존재이자 그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풀에게도 우리 인간들과 유사한 인식, 사고, 판단 등의 능력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나무 역시 마찬가지이다. 생명의 역사에서 지고한 연륜을 이어왔던 나무조차도 생식의 능력은 있으나 인식의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풀이나 나무들은 모두 유정이지만 윤회하는 주체로서의 인식, 사유, 판단 능력을 지녔다고 보지는 않는다. 때문에 풀이나 나무들은 정신작용, 다시 말해서 부처가 될 가능성인 ‘불성(여래장)’을 지녔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단지 생명현상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풀이나 나무들은 담이나 벽과 같은 무정물과는 엄격히 구분되지만 자신이 지은 행위에 의해 윤회하는 존재(유정)들과도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환경이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수화풍으로 되어 있는 자연은 결국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 속의 색온인 것이다. 모든 흙(地)과 물(水)은 다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火)과 바람(風)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그러므로 항상 방생을 하고 세세생생 생명을 받아 항상 머무르는 법으로 다른 사람도 방생하게 해야 한다. 만일 세상 사람이 축생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마땅히 방편을 써서 구호해 괴로움을 풀어 주어야 한다.24) 24) 《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十》 권下(《大正藏》 제24책, 1006면 중). “一切之水是我先身, 一切火風是我本體. 故常行放生, 生生受生常住之法, 敎人衆生. 若見世人殺畜生時, 應方便救護解其苦難.”

나의 몸을 구성하는 지수화풍 네 요소(四大)가 바로 나의 진실한 본체라는 통찰은 곧 연기적 인간, 보살적 인간으로의 탄생을 의미한다. 보살적 인간은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어떠한 보편적 가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이타적 인간이다. 불교 환경론의 지향 역시 인간과 환경을 대상화시켜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화시켜서 둘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혜의 길인 중도와 상생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생명에 대한 끝이 없는 자비인 ‘동체대비’로 표현된다.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지 말고 널리 살려주라는 방생은 동체대비 실현의 출발이 된다. 그래서 《방생회권중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살생을 경계하는 것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의 바탕이요. 죽어가는 목숨을 놓아주어 자유롭게 살게 하는 것은 자비로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무리가 삶을 즐겨하지 않음이 없고 꼬물거리는 미물도 모두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아니, 어찌 슬픈 소리를 듣고 차마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요. 또 피를 가진 동물은 반드시 느낌이 있으며, 이 느낌은 곧 불성이니 어찌 오늘의 천한 것이 다른 날에 존귀했었다고 할 수 없겠는가?25) 25) 《放生會卷중서》

그러므로 피를 지닌 동물은 불성(느낌)을 지니고 있으므로 함부로 죽여서는 아니 된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자유롭게 살게 하려는 마음은 모두 자비로운 마음에서 비롯된다. 한때는 천한 존재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존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듯이 생명을 지닌 존재에 대해 평등하게 대해야만 한다. 생명 지닌 것이면 누구나가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알고 삶을 즐겨할 줄 알듯이 이 글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평등성을 확보해야 함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불교에서의 유정과 무정은 인식능력을 지닌 존재와 지니지 않은 존재로 구분된다. 그러나 그런 구분이 반드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피를 가진 동물이 느낌(佛性)을 지니고 있듯이, 생명을 지니지 못한 존재도 변화가능성이 있으므로 어떠한 계기에 의해 언젠가는 성불을 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유정과 무정의 이해는 존재에 대한 전관적 통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2) 불성으로서의 존재

유정과 무정의 변별은 ‘여래의 태아(如來藏)’이자 ‘부처가 될 가능성(佛性)’의 유무로 구분한다. 부처가 될 가능성인 불성은 곧 정신작용과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대반열반경》의 〈가섭보살품〉(제24품)에서는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말하면서 불성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다.

부처가 될 가능성(佛性)은 하나의 존재(一法)라 할 수도 없고 만 가지 존재(萬法)라 할 수도 없다. 그것은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을 때의 온갖 좋음(善)과 좋지 않음(不善)과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無記) 것까지도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라 이른다. 부처의 성품이 아닌 것은 이를테면 일체의 담과 벽과 기와와 돌 등이니 이와 같이 정식(情識)이 없는 물건을 여의고는 곧 부처의 성품이라 이른다.26) 26) 《大般涅槃經》 33권 〈迦葉菩薩品〉 제24(《大正藏》 제12책, 826면 상중). “夫佛性者, 不名一法不名萬法, 未得阿 菩提之時, 一切善不善無記法盡名佛性. 非佛性者, 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 離如是等無情之物, 是名佛性.”

경전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불성, 즉 부처가 될 가능성은 어느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 타고난 것이다. 대승 이전의 경론에 의하면 ‘중생’은 ‘정식(情識)’을 지닌 유정지물을 말한다. ‘담(牆)’이나 ‘벽(壁)’이나 ‘기와(瓦)’나 ‘돌(石)’과 같은 것들은 정식(情識)이 없는 무정지물(無情之物)을 일컫는다.

무기체인 담과 벽 그리고 기와와 돌 등은 정식을 지니지 못했다고 본다. 또 유기체인 초목은 생명활동은 있으나 정신작용은 없다고 분류된다. 여기서는 윤회의 주체가 될 행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가 문제가 된다. 그 때문에 초목은 윤회의 주체가 되는 정신작용이 없다고 보아왔던 것이다. 결국 유정과 무정의 구분 문제는 정신작용의 유무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경론에서는 생명활동의 소지가 반드시 정신작용의 소지를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불성의 유무는 결국 정신작용의 유무에 따라 규정했던 것이다. 때문에 초목의 경우는 생명활동은 있지만 정신작용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작용이 없다는 것은 성불 가능성이 없다는 것과도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과 같은 대승의 경전에서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적극적이다. 즉 생명활동만 있는 식물이나 정신작용까지 있는 동물, 나아가 생명현상이 없는 무정물까지도 부처의 성품인 불성이 있어 마침내는 성불한다고 말한다. 존재에 대한 대승경전의 이러한 적극적인 해석은 개체의 끝없는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시각까지 열어 둔 것으로써 대단히 역동적인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27)27) 졸론, 〈불교의 생태관:연기와 자비의 생태학〉, 《생태문제와 인문학적 상상력》(나남, 1999), 165∼166면. 원효는 법신과 보신과 응신의 삼신의 관점에 서서 해명하고 있다. 그는 《대반열반경》 등에서 “담과 벽과 기와와 돌 등의 정식이 없는 물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성이 있다.”는 경설을 풀이하면서 이는 ‘보신 부처의 입장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법신 성품의 입장에서는 유정지물과 무정지물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장벽과 와석조차도 (법신 성품의 입장에서는) 불성이 있으므로 성불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개체와 개체, 개체와 환경, 환경과 환경에 대한 불교의 적극적인 시각은 근본불교 이래 선근의 씨앗을 끊어버린 일천제(一闡提)28)조차도 불보살의 자비력에 의해 다시 선근의 종자를 회복하면 끝내는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유기체 인식은 중생이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유정의 범위에 한정하는 좁은 시각이 아니라 무정에까지 이르는 불교의 무제한적이고 무차별적인 범주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대자비심이 투영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28) 중국의 자은학통에서는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 등에 의거하여 결정코 성불할 수 없는 존재를 설정하여 일천제라 하고 일천제 불성불론(不成佛論), 즉 일분무성론(一分無性論)을 주장하고 있다. 일천제(一闡提)는 선근이 끊어져(斷善根) 구원될 가망이 없는 자 또는 올바른 법에 대한 믿음을 갖추지 못해(信不具足) 부처가 될 소질이나 인연이 없는 자, 아무리 수행하여도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자로서 현실적인 욕구로 꽉 차 있는 자(iccantika)를 말한다. 중국 자은(법상)종의 규기(窺基)는 그의 《成唯識論掌中樞要》 권상본(《大正藏》 제43책, 610~611하 면)에서 이 일천제를 다시 생사를 즐기는 단선근천제(斷善根闡提, 一闡底迦), 열반을 즐기지 않는 대비천제(大悲闡提, 阿闡底), 영원히 열반의 성품이 없는 무성천제(無性闡提, 阿顚底迦)의 세 가지로 나누어 체계화하고 있다.

3. 중도와 상생의 환경론

1) 인간(正報)과 자연(依報)의 불이

불교에서는 전세의 업에 따라 얻은 두 가지의 과보를 의보와 정보라 한다. 정보는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五蘊)가 화합하여 이룬 신체이다. 의보는 신체가 의지하여 거주하는 산하 대지, 의복, 음식 등을 말한다. 때문에 어떠한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신체는 그것이 거주하는 산하 대지나 의복, 음식 등과 분리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뫼비우스의 띠는 바로 정보와 의보, 인간과 자연, 개체와 환경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심신에 따라 존재하는 국토, 가옥, 의복, 식물 등인 의보와 과거에 지은 업인(業因)에 갚아지는 과보인 중생들의 몸인 정보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흔히 경론에서는 의보와 정보가 둘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정불이(依正不二)라 하는 것이다. 중국 (법화)천태학의 10불이문의 하나이기도 한 의정불이문(依正不二門)은 원교의 붓다가 나타낸 전삼교(前三敎, 藏通別敎)의 교주(敎主)와 9계(界)에 응동하여 나타내는 몸을 정보라 하고, 적광정토(寂光淨土)로서 나타낸 동거토(同居土), 방편토, 실보토(實報土)를 의보라 한다.

그리고 이 3토 9계의 의보와 정보는 그 자체가 모두 적광토의 원불이라 말한다. 때문에 천태에서는 《대지도론》에 의거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간을 오음(五陰)세간·중생(衆生)세간·국토(國土)세간으로 갈라 설명한다. 하지만 이들 세간은 모두 적광토의 원불로서 둘이 아니며 상생하는 세간인 것이다. 화엄학에서는 이 세간을 중생(衆生)세간·기(器)세간·지정각(智正覺) 세간으로 나누고 있다.

즉 교화대상인 중생세간과 중생들이 깃들어 사는 기세간, 그리고 교화된 여래의 불신 자체인 부처의 세간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과 내용에 따라 중생과 국토와 부처의 세계로 나누어 본 것이다. 이들 세간 역시 의보와 정보가 둘이 아닌 상생하는 세간인 것이다. 정토학에서는 정토를 인간(正報)과 자연(依報)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의보(國土莊嚴)를 지하의 보개와 당번의 광명이 서로 비추는 지하(地下)장엄, 일체의 보배로운 땅, 연못, 나무, 누각 등의 지상(地上)장엄, 일체 변화의 보배 궁전, 꽃그물, 보배 구름, 변화된 새, 바람과 빛 등과 움직여 일어나는 성악 등의 허공(虛空)장엄으로 분류하여 설한다.

그런 뒤에 “세 가지의 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모든 미타(彌陀) 정국(淨國)은 번뇌 없는 진실의 수승한 모습이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보(아미타불 등)에 대하여 주장엄(主莊嚴, 中心)은 아미타불이며, 성중(聖衆)장엄은 정토에 머무르는 성중 및 시방세계로부터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둘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때 주장엄은 별정보(別正報)라 하고, 관음과 세지 등의 성중장엄을 통정보(通正報)라 한다.

여기서는 정보는 통정보와 별정보로 설명되지만 이들 정보는 의보와 둘이 아닌 상생하는 정보인 것이다. 이처럼 살아 있는 것들(衆生)이 깃들어 사는 기세간(依報)과 중생세간(情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체와 개체, 개체와 자연, 자연과 자연은 끊임없이 상생하는 관계 속에 있으며 둘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신체와 국토 사이의 관계로 보다 구체화된다. 불교의 환경론은 바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의 불이에서 비롯된다.

2) 신체와 국토의 불이

인간의 몸은 흙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신토불이(身土不二) 내지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사상은 위에서 언급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연기론의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다. 동시에 불교의 환경론 그 자체가 된다. 신체와 국토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은 연기에 대한 사무친 통찰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보살적 인간의 동체대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각 위에서 신체와 국토의 불이의 담론으로 전개되었다. 때문에 내가 국토에 어떠한 해악을 가할 때 그 해악이 결국은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인식의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전회는 곧 ‘연기(緣起)’의 발견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불교적 인간, 보살적 인간의 통찰인 것이다.

사람의 몸은 흙과 물과 불과 바람 네 가지 요소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원소가 부족하거나 없어 조화를 잃으면 101가지의 병이 생기고, 네 가지 원소가 모두 없을 때나 조화를 잃을 경우에는 404가지의 병이 동시에 생겨난다.29) 29) 《佛說五王經》(《大正藏》 제14책, 796면 중). “何謂病苦? 人有四大, 和合而成其身. 何謂四大? 地大水大火大風大, 一大不調, 百一病生, 四大不調, 四百四病,”

인간의 몸은 국토나 환경 등을 이루고 있는 네 가지 요소(四大)의 인연화합으로 되어 있다. 내가 숨을 멈추면 내 몸은 서서히 이 네 가지 요소로 환원되어 간다. 내 뼈는 딱딱한 흙기운(堅固性)으로 되돌아갈 것이고, 피와 침과 오줌 등은 축축한 물기운(濕潤性)으로 환원될 것이다. 나의 체온은 따뜻한 불기운(溫暖性)으로 해체될 것이고, 나의 주검은 불어오는 바람기에 의해 점차로 흩어질 것(流動性)이다.

《오왕경》에서는 인연 화합에 의해 생겨난 우리 몸의 비실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지수화풍의 본성 한 가지만 없어도 우리 몸은 무수한 병이 생기고, 네 가지 모두 없거나 균형을 잃을 때는 더욱 심한 병이 걸린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는 정보와 의보, 즉 신체와 국토는 둘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세간의 여러 구성요소로부터 연기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은 실체가 없으며, 타자를 부정한 어떠한 고유한 존재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불이’의 사상은 “진리는 하나다.”는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에서도 이미 보인다. 중국의 승조가 “천지는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한 몸.”30)이라고 한 것은 불교의 물질과 정신은 분리하지 않는 ‘색심불이(色心不二)’, 몸과 땅을 분리하지 않는 ‘신토불이’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30) 僧肇, 〈涅槃無名論: 九折十演者: 妙存 第七〉 《肇論》(《大正藏》 제45책, 159중 면).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이는 노장이 추구하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 즉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과도 상통한다. 즉 장자의 “천지는 나와 함께 생겨나고(天地與我竝生立),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萬物與我爲一)이다.”라는 구절과 잇닿아 있다. 이러한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시각은 전 불교사상사에 걸쳐 있다. 인도의 논사였던 호법(527∼559)은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신체와 국토의 체는 차별이 없다.”31)고 역설했다. 31) 護法 等造, 《成唯識論》 권10(《大正藏》 제31책, 56면 중). “又自性身依法性土, 雖此身土體無差別, 而屬佛法相性異故.”

이것은 유정의 생명체와 무정의 국토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신체의 몸체와 국토의 몸체는 본래 지수화풍의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자연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상가들 역시 신체와 국토의 불이의 담론을 주장해 왔다. 현장(602∼664)이 번역한 《성유식론》에 처음 주석서를 지은 서명 문아(圓測, 613∼696)는 그의 《반야바라밀다심경찬(般若波羅蜜多心經贊)》에서 《성유식론》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신체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른바 자성신, (자타)수용신, 변화신이다. 국토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토요, 둘째는 자수용토며, 셋째는 타수용토요, 넷째는 변화토이다. 그 신체들은 차례대로 네 가지 국토에 머무름과 같다. 신체는 국토에 머무르며 자성신과 자성토의 체는 차별이 없다.”32) 32) 文雅, 《般若波羅蜜多心經贊》(《韓佛全》제1책, 14면 중). “雖自性身與自性土, 體無差別.”

이것은 붓다의 몸에 대한 해석의 담론인 이신(二身)설, 삼신(三身)설, 사신(四身)설이 영토와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서양철학자인 질 들뢰즈의 ‘사유의 영토화’ 내지 개념의 탈영토화, 재영토화33)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에 즉해서 말한다면 붓다의 신체는 국토화되는 것이며 국토는 다시 신체화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유(개념)의 탈신체화와 재신체화인 것이다. 원효도 그의 《본업경소(本業經疏)》에서 “법신과 정토는 오직 한 진리의 세계이다.”34)고 했다. 33)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윤정임(현대미학사, 1995), 125∼166면. 여기서 저자들은 사유를 영토와 대지와의 관계 속에서 풀어낸다. 이들은 영토에서 대지로의 탈영토화와 대지에서 영토로의 재영토화를 통해 철학의 영토와 철학의 대지를 묻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재영토화 없는 탈영토화는 있을 수 없으며, 철학은 개념을 재영토화 한다. 개념이란 대상이 아니라 영토이며 그것은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토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신체를 국토화하거나 국토를 신체화하는 신토불이의 사유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34) 元曉, 《菩薩瓔珞本業經疏》권下(《韓佛全》제1책, 520면 중). “法身淨土, 唯一法界, 互相融通, 無有邊際, 故言無極.”

법신과 정토는 서로 융통하기 때문에 가장자리가 없으며 극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법신과 정토가 둘이 아니라는 말이며, 몸과 마음의 본체인 법계 속에는 진리의 몸과 그 진리의 몸이 구현한 정토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신체와 국토가 둘이 아니다(身土不二)는 담론이다.

의상(625∼702)이 그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의 모습이 없고 제법은 움직임이 없이 본래부터 고요하다.”35)고 한 것 역시 법성의 불이성을 강조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인식기관이 접하고 있는 삼라만상으로서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존재인 ‘법(法)’과 우리의 인식기관이 끊임없이 수용하고 있지만, 대상화하여 분석할 수 없는 본래성인 ‘성(性)’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35) 義湘, 《華嚴一乘法界圖》(《韓佛全》 제2책, 1면 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태현(680?∼770?) 역시 그의 대표적 저술인 《성유식론학기》에서 “자성신은 법성토에 의거하는 것이며, 이 신체와 국토의 체는 차별이 없다.”36)는 《성유식론》의 설을 그대로 수용하여 자신의 저술을 집성하고 있다. 그야말로 신체와 국토는 본디부터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들은 모두 나와 대상을 분리하지 않는 불교의 ‘불이(不二)’의 담론에 근거해 있다. 36) 太賢, 《成唯識論學記》 권下末(《韓佛全》 제1책, 689면 중하).

즉 정보와 의보, 개체와 자연 간의 이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이다. 그것은 곧 연기와 자비의 길이자 중도와 상생의 길인 것이다.

3) 법성(法性)과 법계(法界)의 불이

불교 화엄은 우주 자연의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佛)요, 부처의 몸(佛身)이요, 부처의 국토(佛國土)로서, 신체와 국토(身刹)가 서로 머금는(相含) 법계(法界)를 이루고 있다고 설한다. 아래의 인용은 안과 밖을 이루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불이 관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37) 37) 〈夜摩天宮菩薩說偈品〉, 《華嚴經》 권10(《高麗藏》 제8책, 74면 중; 《大正藏》제9책, 465면 하).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불이를 말하는 《화엄경》의 이 구절은 화엄의 3종 세간의 담론인 중생세간과 기세간과 지정각 세간이 각기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의 세간에서는 불신이 정보이고 불국토가 의보이듯이, 중생의 세간에서는 중생의 몸이 정보이고, 중생이 깃들어 사는 기세간이 의보인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부처와 중생이 깃들 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본체인 법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법계는 내 마음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뚱어리와 사물의 총화인 세계 사이에서 일심(一心)으로 펼쳐지는 치열한 긴장과 탄력의 영역 자체이다.

그리고 이 법계를 통해 우리들 자신이 모두 중중(重重, 세로, 竪盡法界) 무진(無盡, 가로, 橫盡法界)의 인드라그물(因陀羅網)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38) 화엄에서는 우리의 인식주관에 의해 대상화되고 인과적 범주에 속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되기 이전의 그 자체로서의 존재세계를 ‘법계(法界)’ 또는 ‘법성(法性)’이라고 부르고 있다.39) 법계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일체 중생의 몸과 마음의 본체이다. 38) 졸론, 〈불교 華嚴의 修行觀〉, 《청호불교논집》제1집(청호불교문화재단, 1996), 120면. 39) 金知見, 〈海東華嚴과 海印三昧〉, 《白蓮佛敎論集》제3집(白蓮佛敎文化財團, 1993), 317면.

본래부터 신령스럽게 밝아 막힌 데가 없으며 광대하여 텅 비고 고요한 것, 이것이 유일한 참다운 경계(眞境)이다. 모습(形貌)이 없되 대천세계(大千世界)를 펼쳐 놓고 가장자리(邊際)가 없되 모든 존재(萬有)를 머금는다(含容). 마음의 눈(心目)의 사이에 뚜렷하지만 모습(相)을 취할 수 없고 대상(色塵)의 안에서 빛을 발하되 이치(理)를 헤아릴 수 없다. 진리를 꿰뚫는 지혜의 눈(慧眼)과 망념을 여읜 밝은 지혜(明智)가 아니고서는 능히 자기 마음(自心)의 이와 같은 신령스러운 자재(靈通)를 보지 못한다.40) 40) 雪岑, 《華嚴釋題》(《韓佛全》 제7책, 朝鮮時代篇 1, 295면 중). “法界者, 一切衆生之身心本體也. 從本以來, 靈明廓徹, 廣大虛寂, 唯一眞境而已. 無有形貌而森羅大千, 無有邊際而含容萬有. 昭昭於心目之間, 而相不可都, 晃晃於色塵之內, 而理不可分. 非徹法之慧目, 離念之明智, 不能見自心, 如此之靈通也.” 이 문장은 워낙은 雪岑 金時習의 글이 아니라 화엄 5조인 圭峯 宗密의 저서 《注華嚴法界觀門》에 서문을 쓴 唐나라 綿州刺史 裴休의 글 〈注華嚴法界觀門序〉이다.(《大正藏》 제45책, 683면 중). 설잠은 그의 《화엄석제》에서 화엄 4조인 淸凉 澄觀의 글을 많이 인용하고 있듯이, 이 문장은 배휴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계는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 어떠한 범주가 아니다. 이 글을 지은 배휴(裴休)의 말대로 모든 중생의 몸과 마음의 본체가 바로 법계인 것이다. ‘법(法)’이란 우리의 인식기관이 접하고 있는 삼라만상으로서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고, ‘성(性)’이란 우리의 인식기관이 끊임없이 수용하고 있지만, 대상화하여 분석할 수 없는 본래성이다.

대상화되어 인식되는 것과 그것의 본래성은 원래가 원융한 일체를 이루면서 그 자체로서 현현한 것41)이다. 화엄이 보여주는 이러한 통찰은 인간과 세계를 일심(一心)의 법계라는 영역을 통해 연기적(緣起的), 또는 성기적(性起的) 공관(空觀)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공관(空觀)은 모든 대상에 대한 연기적 통찰에서 비롯되며,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끊임없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 생겨나는 것이다. 41) 雪岑, 《大華嚴法界圖註幷序》(《韓佛全》 제7책, 朝鮮時代篇1, 303면 상). “法者, 卽六根門頭, 森羅萬象, 情與無情也. 性者, 六根門頭, 常常受用, 計較摸索, 不得底消息也. 圓融者, 一切法卽一切性, 一切性卽一切法. 卽今靑山綠水, 卽是本來性, 本來性卽是靑山綠水也. 無二相者, 靑山綠水本來性, 元是一箇王太白, 本來無二也.” 金知見, 위의 논문, 317면.

화엄의 메시지는 인간, 나아가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有機體)에게까지 그 시선이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도 법계연기의 그물 속에서 눈길을 주고 받으며, 그 눈길은 끊임이 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화엄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시선의 따뜻함은 그물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과 세계를 법계의 연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즉 사물 개체에 대한 따뜻함 그것은 곧 대상화된 시선이 아니라 주체적인 시선이자 자기화된 시선이기에 가능한 것이다.42) 42) 졸론, 앞의 논문, 앞의 책, 121면.

그 세간은 몸과 마음의 본체인 법계이기도 하고, 신체와 국토의 불이의 세간이기도 하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신비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신비는 정신작용, 다시 말하면 불성(佛性)으로 화현한다. 때문에 정신활동을 하는 유정의 삶은 성스럽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어떤 것이든 공포에 질린 것이거나, 튼튼한 것이거나, 혹은 그밖의 긴 것이거나, 거대한 것이거나, 중간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아주 작은 것이거나, 통통한 것이거나, 보이는 것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멀리 있는 것이거나, 가까이 살고 있던 것이거나, 멀리 살고 있던 것이거나, 방금 태어난 것이거나, 이제 태어나려는 것이거나, 모든 중생 일체의 생물은 안락하라. 어머니가 하나뿐인 외아들을 생명을 걸고 보호하듯 일체의 생물에 대해서도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라.

몸과 마음의 본체인 법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오는 이러한 《자비경》의 가르침은 불교의 환경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안락하게 살 권리를 타고나는 것이다. 정보와 의보, 신체와 국토, 법성과 법계의 불이라는 연기를 통찰한 보살은 이러한 생명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뿐인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보호하는 어머니처럼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그 생명체를 보살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환경관은 ‘업보’와 ‘무아’, ‘일심’과 ‘진여’의 자각을 통한 ‘이타적 인간’, ‘보살적 인간’이 펼치는 연기와 자비의 환경론이며, 단견과 상견을 넘어선 불고불락의 ‘중도’와 인간과 자연, 신체와 국토, 안과 밖의 불이의 사상을 통한 ‘상생’의 담론이라 할 수 있다.

4. 환경에 대한 불교의 눈

오늘의 환경생태 문제는 지구라는 별 속에 사는 개체와 개체, 개체와 자연, 자연과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몰지각(沒中道)’과 ‘무정견(無相生)’, ‘몰이해(沒緣起)’와 ‘무자비(無慈悲)’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인간들 자신이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문명이 주는 속도감을 그냥 무비판적으로 추수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불교는 욕망의 존재인 개체(正報)와 이 개체의 삶을 담고 있는 자연 환경(依報)의 관계를 바르게 보게함(正觀)으로써 ‘중도’와 ‘상생’이라는 지혜의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 지혜의 담론은 바로 극단적인 이항 대립을 넘어서는 중도설과 상호교섭(相卽)과 상호투영(相入)에 의해 생성되는 연기론이다. 중도설의 구체적 표현인 연기론은 나의 존재성을 연(조건)이라는 타자를 통해서 규정하는 원리이다.

즉 오늘의 나의 성취는 무수한 사람들의 인연과 협동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듯, 타자를 전제로 하지 않는 어떠한 고유한 존재로서의 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나의 욕망 공간의 확장이 남의 욕망 공간에 대한 장애(희생)를 최소화(현실적 인간) 내지 무화(보살적 인간)시키는 인식의 틀인 연기의 원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때문에 연기론은 환경생태계를 유지하는 ‘생명의 그물’의 원리로서 오랫동안 소통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지 말라.”는 즉자적인 불살생보다는 “굴레에 매여 있는 모든 존재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라.”는 대자적인 실천행을 적극적으로 요청해 왔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불살생계는 생태계를 파괴하지 말고 살아 있는 것들을 널리 살려주라는 생명해방의 담론이다.

따라서 굴레에 갇혀 있는 생명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존재의 생사(生死, 輪廻)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보다 적극적인 보살행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환경은 개체와 개체, 개체와 자연, 자연과 자연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기적 존재에 대한 해명 아래 인간(正報)과 자연(依報), 신체(身)와 국토(土), 안(自)과 밖(他)의 불이를 주장해 왔다.

‘불이’는 어떠한 이항을 전제로 하되 그 전제에 매이지 않는다는 담론이다. 즉 이항은 불이를 말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존재할 뿐 끝내는 상호교섭(相卽)과 상호투영(相入) 속에서 존재할 뿐이라는 메시지이다. 다시 말해서 이 담론은 “서로의 각기 다른 점을 찾기보다는 각기 같은 점을 찾음으로써 서로의 불이를 드러내는 기제”인 것이다.

업보(무아)로서의 인간, 일심(진여)으로서의 인간 이해는 불교적 인간 이해의 대전제가 된다. 동시에 이것은 모든 존재 이해의 대전제가 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어떠한 보편적 가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보살적 인간, 이타적 인간이 출현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교의 환경관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개체와 개체, 개체와 자연, 자연과 자연의 연기(不二)를 통해 개체와 자연에 대한 따뜻한 이해로부터 동체대비심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가장 올바른 길인 ‘중도의 길’이자 모든 것들을 살려내는 ‘상생의 길’이다. 따라서 환경을 바라보는 불교의 눈은 기본적으로 보살적 인간, 이타적 인간의 연기와 자비, 중도와 상생의 삶 속에 겨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한국불학연구소 연구실장. 저서로 <불교경전의 수사학적 표현><원효><한국불학사>(신라고려시대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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