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적극적 가난이란 무엇인가

1. 수처작주(隨處作主)1)

《불교평론》이 나에게 주문해온 것은 특집 주제로 잡은 ‘불교와 환경(생태)’ 중 환경2)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써 달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환경문제가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자’는 투의 낭만적인 뜻이 아니기에 조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환경문제가 인간의 욕망과 세계관의 전환, 적극적 가난 등의 문제와 함께 얽혀 있는 문제인 데 반해 나는 욕망에 자유롭지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인 가난을 내 몸으로 실행하며 살아가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욕망의 이면과 적극적 가난이란 무엇인가라는 컨텍스트에 더 골몰하고 있다는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환경문제의 본질로서의 욕망과 적극적 가난이란 주제를 불교의 시각으로 풀어내서 써야 한다는 것은 아득할 뿐이다. 더군다나 “고만고만한 재주로써 고만고만한 논문을 써내고 있는”3) 주류 불교학계 열매의 부실함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내가 디딜 수 있는 징검다리는 그리 많지 않기에 걸음을 쉽게 나아갈 수 없다.

말하자면 이 주제는 나에게 올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달리 거칠게 말하면 이 주제는 나에게 혹은 모든 불교인들에게 와야 할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불교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고, 이는 나에게 혹은 모든 불교인들에게 불교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실천을 함의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곧바로 만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접점에 (이 용어가 가능하다면) ‘운명적으로’ 욕망·생태·무소유 등의 문제를 실존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화두(話頭)가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편으로 “(불교철학자는) 불교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 혹은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모두가 이러한 삶을 드러내는 주체가 되라는 것이 불교의 요청”4)이란 안옥선의 문제인식과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불교철학자의 자기 물음은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불교인들에게 다시 실존적으로 되물어져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과 발밑을 벗어난 채 환경의 위기니, 욕망을 벗어 던져야 한다, 탐진치(貪嗔痴)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며 시류를 타고 짐짓 위엄 섞인 목소리로 녹음기를 틀어대는 불교인들의 허위의식에 어지럼증을 느껴왔던 터라 새삼스럽게 환경의 도덕론을 다시 부르짖고 싶지 않다.

그것은 이미 김종철이 말했듯이 “입으로 환경 위기와 생태적·사회적 파국에 관해 말하고, 그것을 머리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깊은 내면에 충격을 주지 않는 한 모든 것은 부질없는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는”5) 것에 동의한다는 것과 같다. 더불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불교의 실천적 테제 속에서 환경, 혹은 생태의 문제를 말할 때에는 당위에 휩싸인 채 ‘가짜욕망’으로 자전하고, 부패된 사슬로 공전하는 오늘 불교계 안팎의 야만성을 정면으로 문제삼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실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바탕으로 무아(無我), 연기(緣起)6)적인 세계 인식과 실천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깨달아야 할 대상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일 뿐 그밖에 다른 것이 있지 않다.”7)는 통찰에서 보이듯이 ‘지금/여기’의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교 수행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지금/여기)의 ‘생태위기’가 오늘의 ‘생활(삶)양식의 위기’에 다름 아니라면 나는 그 위기의 외인(外因)으로 우리들의 삶을 끊임없는 피로감과 권태로움으로 몰고 가며, 욕망을 자극하여 물질의 확대 재생산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가장 우선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더 심층적으로 이러한 천민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 속에서도 스스로 불교적 삶의 양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 불교의 눈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선가(禪家)의 수처작주(隨處作主)란 말은 이럴 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언어의 진실성은 몸의 실천 속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어느 곳에서나 주체가 된다’는 언표는 반드시 그가 몸담고 있는 삶의 터에서 끊임없이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이게 어렵다.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문제삼고자 하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터는 바로 광포하게 굴러가는 자본의 수레바퀴에서 늘 공회전을 하고 있는 폐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앎(苦의 인식)과 삶(苦에서 벗어남)의 문제가 늘 겉돌면서 충돌하게 된다. 이미 이 충돌의 갈등은 당대를 가장 전위적으로 살아갔던 한 지식인의 다음과 같은 독백에서도 아프게 드러난다.

“인간의 이기심 소유욕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인가. ……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생각하곤 한다. 인간성은 본질적인 것으로서 사회환경의 개조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기주의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제도를 낳은 바로 그 인간성이다. 도덕주의적 인간과 사회의 실현은 꿈일 뿐이란 말인가. 그 가능성을 어느 정도 믿고자 하고 믿기도 했던 나는 비과학적인 이상주의자(또는 심하게 말해서 몽상병 환자)였던가?

지난 얼마 동안의 나의 자기비판과 고민은 이 문제를 놓고 계속되었다. 소수의 종교적 사상적 또는 혁명적 순교자만이 생명 탄생의 시간부터 사망의 시간까지 ‘도덕주의적 인간’으로서 90도로 꼿꼿이 서서 살 수 있다. 거의 모든 인간은 더 많은 안일·쾌락·소유를 원하는 이기주의자일 수밖에 없음이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사회에서 입증된 셈이다. 그들 대중은 절대로 90도로 빳빳이 선 생존과 행동방식을 오래 수락할 수 없다.”8)

어찌 이 갈등이 한 지식인 개인의 것일 수 있겠는가. 요컨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러한 삶은 아닌데’란 자기 독백을 끊임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처지는 “이른바 전지구적 자본주의 구조의 그림자 아래 연명하는 ‘회사 인간’의 행태를 애써 없애고, 철학자, 인문학자다운 비판적 자기 성찰성을 견결(堅決)하게 유지하려는 태도마저도 내 스스로 안쓰러워 보일 적이 적지 않다.”9)는 고백과 마주하면서 심층화된다.

분명한 것은 거짓된 욕망을 끊임없이 생산하며 모든 것을 파편화한 채 자본의 아가리 속으로 삼켜 버리게 하는 이 물질화된 근대의 야만성은 불교의 무아(無我)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과는 정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인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소수의 종교적 사상적 또는 혁명적 순교자만이 생명 탄생의 시간부터 사망의 시간까지 ‘도덕주의적 인간’으로서 90도로 꼿꼿이 서서 살 수 있는가”에 있다. 만약 여기에 동의한다면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의 불교는 이제 할 일이 없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이 가야 할 곳은 인간성에 대한 선과 악이 교차되는 곳에서의 절망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무리 욕망과 이기심의 유혹 앞에 쉽게 굴복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려고 강렬하게 희구한다. 그 결심이 서는 자리에서 바로 불교는 시작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망과 청정, 이기심과 애타심(愛他心)이 서로 원초적으로 교차하는 삶의 번뇌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 의식의 깊은 곳에는 불성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성의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일이 바로 대승보살의 수행이다.”10)라는 적극적인 시선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기실 이러한 결론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승보살의 수행을 말할 때에는 우리 삶이 처해 있는 복잡성을 치밀하게 탐색해 들어가야 하며, 그러한 과정이 생략되어 돌출된 결론은 대개 실천의 궤적을 이탈해 방향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때문에 대승보살의 수행은 ‘상품주의의 폐수’라는 늪 속에서 “자기 탐구의 행법(行法)”11)을 어떻게 보여주면서 불성을 싹틔울 것인가 하는 물음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본다면 “외부의 정보에서 벗어나 홀로 있으면서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기의 일상을 객관화하여 반성하고,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각해야 한다.”12)는 주장은 비록 종교적 엄숙주의의 흔적이 보이지만 진정성을 갖는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야만성이 생태의 질서를 깨뜨리면서 종교의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될 정도로 강력한 흡인력을 갖는 현실에 비춰보면 자기 내심의 소리를 듣고, 자기의 일상을 객관화하고,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한 존재의 자각은 이 소란스럽고, 속도주의가 일상화된 땅에서 발본적인 맹성(猛省)의 터가 될 수 있으리라.

2. 생태문제와 아(我)의 위기

환경위기는 인간의 행복한 삶이 경제적 풍요의 충족이나 너와 나의 대립에서 실현될 수 있는가, 혹은 이제까지의 발전과 진보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인류의 생존이 과연 이제까지의 발전과 경쟁적 세계관으로서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가의 물음을 괄호 속에 넣고 있는 것이다.

생태 문제는 바로 현재 이러한 우리 삶이 가고 있는 방향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색해 들어가면서 자연과 인간, 나-너-우리 그리고 가치관의 일그러진 관계를 성찰하며 등장한다. 말하자면 “생태 문제의 틀은 분명 우리들에게 기존 인간/자연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자연이 무엇인가? 물질인가 아니면 정신인가와 같은 종류의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자연과 인간 사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13) 나는 언제인가, 스님 두 분이 자동차를 타는 문제로 대화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단순화한다면 한 분은 스님들이 자동차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 분은 현대에 자동차는 필수품이므로 스님들이 자동차 타는 것을 갖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두 분의 이야기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끝내 다른 주제로 흘러버렸는데, 나는 이 두 스님의 대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고, 이후 대부분의 스님들의 인식은 후자 쪽에 가깝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았다. 또 그것은 자동차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문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유와 욕망의 메커니즘에 대한 문제였음을 알아차렸다.

자동차에 대한 명상은 김종철의 탁견을 경청해볼 만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 자동차를 소유하면, 공공 교통 수단은 도태될 것이 뻔합니다. 그러면 싫어도 개인 자동차를 소유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미국에서 2차대전 이후 자가용 자동차가 급속히 불어나갈 때 자동차 재벌들이 지방 소도시들에서 버스나 전차와 같은 공공 교통 수단을 독점적으로 사들여 그것을 점차적으로 폐쇄시킴으로써 시민들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개인 승용차를 구입하도록 강요했던 사실은 현대 산업 사회에 있어서 욕망과 그 충족의 메커니즘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알려 주는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14)

앞서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환경과 인간, 사회, 정치적 생활양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태주의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동의는 무척이나 곤혹스럽다. 말하자면 자동차는 필수품이라는 메커니즘, 이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곤혹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새로운 대안적 삶의 양식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는 우리들에게 던져진 커다란 숙제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 같아 비관적으로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갈 때까지 가서 자폭할 때까지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15)라는 탄식에서도 보여진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문제가 있다는 수준으로는 아무래도 논의는 겉돌고, 무력감만 밀려올 뿐. 오히려 현 단계에서는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실상인 것인가를 통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위해서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전환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에너지 소비나 삶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계속 증가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 위기는 생활방식의 위기이며, 분별 없고 혼란스러운 전통에서 오는 위기, 삶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깊이 물어볼 능력이 없는 데에서 오는 위기입니다.”16)

또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적인 성숙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 나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살아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소중하다는 것,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 그것에 대한 감사, 그래서 스스로에 있는 거룩한 존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 내가 부처일 수 있는 것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물을 공경하는 삶을 살고, 보살피고 하는 삶의 태도가 깨달음을 이루는 길이 아닐까 한다.”17)

‘삶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깊이 물어볼 능력이 없는 데에서 오는 위기’ 혹은 ‘내가 부처일 수 있는 것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성찰은 새로운 삶의 양식이 우리 내면에서 어떻게 자생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리고 이를 좀더 삐딱하게 해석한다면 역설적이게 ‘깊이 물어볼 능력’이나 ‘내가 부처에 합당한 삶’을 자꾸만 갉아먹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본래 불성(佛性)의 존재임에도 무엇인가, 딱딱하고 건조한 그 무엇인가가 우리 내면에 숨쉬고 있는 불성에 자꾸만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어디론가 빠르게 주저함이 없이 가야 하며 멈출 수가 없다는 터보 자본주의의 논리가 일상적으로 이루지는 곳에서 ‘깊이 읽기’나 ‘삶의 가치’를 말한다는 것은 한갓 게으름이나 튀기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하물며 우리 내면에 숨쉬고 있는 불성의 호흡을 느끼고, 매만질 수 있다는 것이랴.

바로 이 지점에서 생태위기는 나의 일상성의 위기와 끔찍한 조우를 하게 된다. 이 일상성의 위기 속에 서 있는 나는 “과학문명이 대단히 발달해 물질은 풍부하고, 교통 또한 편리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정보도 홍수같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마음 중심을 잃고, 주체성18)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심을 잃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주체성 없이 욕망에 끌려 다니게 됐다는 거죠. 욕망으로 살면 자기 이외의 존재를 ‘자기 소외물’, ‘욕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이기적이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알력이 생기고, 혼란이 파생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불자들은 무엇보다 욕망에 끌려 다니는 삶을 극복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19)라는 선승의 언어가 만족스럽지 않다.

선승들은 오늘날 문명의 위기와 그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정확히 꿰뚫어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 법문에 동의하고 현재의 삶을 위기로 인식하며 전변시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너무나 깔끔하게 정리된 말씀이란 것이다.

좀더 밀어붙인다면 “욕망에 끌려 다니는 삶을 극복하겠다는 자세를 가져라”라는 진단은 시대적인 적실성을 상실한 언어로 읽혀진다. 왜냐하면 그 욕망의 삶과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붓다 이래로 선지식들이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주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불만은 전적으로 이를 듣는 청자(廳者)의 두 귀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선승의 역할은 ‘줄탁동시(啄同時)’라는 선의 언어와 역사 속에서도 보이듯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볼 때 좀더 다른 통로 혹은 징검다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자위하면 되는 것인가.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가. 오히려 나는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해 “생산의 확대 재생산은 자본의 논리이며 생명이다. 무제한의 생산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제한의 소비가 필요하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소비 계층이 계속해서, ‘결핍’의 의식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고 욕망의 크기를 확대하는 게 필수적이다.

이러한 욕망을 우리는 본능적 충동으로 보도록 길들여져 있지만 그것은 사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에 규정되는 상품적 욕구이다.”20)라는 진단이 더욱 섬세하게 느껴진다. 우리들의 자본주의 상품적 욕구가 결국은 가짜욕망에 근거한 것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결국 가짜욕망의 충족을 위해 ‘나’는 근대에서부터 계속 덜컹거리며 어디론가 끊임없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멈추면 죽을 것만 같아서 숨가쁘게 달려가는 나는 결국 어디로 가는 것인가.21)

3. 탈주하는 자아와 불교적 상상력

“원래 시인은 누가 시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어쩔 수 없이 되는 것”22)이듯이 붓다의 호흡과 인식을 면밀하게 성찰하여 온 사람이라면 현대 문명에 대한 위기적 인식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어쩔 수 없이 불교적인 감성으로 가장 민감하게 체감되는 것이다.

비록 모든 것이 자본으로 둔갑하는 일상에서 불교적인 감수성이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졌지만, 불교계 안팎에서 ‘위기’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들리고 있는 현실은 상처받은 불성이 조심스럽게 그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무엇보다 그 상처의 담지자인 나-너-우리들은 위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둘러보며 살피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다름 아닌 그 건조한 것, 그 딱딱한 것은 바로 발밑에 바짝 붙어 있다. 쉿! 조심하라. 이놈은 어떤 물체이든지 다 빨아먹어 버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 수 없지 않은가. 일단 그곳을 벗어날 수밖에. 나는 제안한다. 아사다 아키라가 주문했듯이 이제 “슬슬 탈주의 여행에 나서라고.” 굽은 등에 ‘나의 것’을 가득 짊어지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 허리를 쭉 펴라고.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아사다는 무조건 탈주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수고스러움뿐. 방향을 갖고 탈주해야 한다. 그럼에도 일차적으로는 ‘탈주’하는 것이다. ‘나의 것’으로부터, 그리고 ‘가짜욕망’으로부터. 나는 이것이 불교 수행자의 초기 행법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대상에 의존하고 있는 세속적 행복에서는 열반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기에, 석존은 출가하여 유랑하는 사문이 되었으며 언제나 홀로였다. ……가정에서 불교 수행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어렵다고 한 곳은 있다. 그러므로 출가의 낙을 얻기 위해서 가정을 내버린 다음, 독립적인 공동체를 설립하여 계정혜를 실천하자는 것이다.”23)

가짜욕망의 대상과 거리두기. 그렇다면 나는 지금 출가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출가의 유의미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범부들의 삶이란 세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 세속의 탐진치의 농도가 얼마나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떻게 엷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아니, 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세간과 출세간의 구분은 이제 빗금을 치고 담장을 두른다고 해서 나눠지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탐진치의 농도가 짙으면 그것은 세간이 되는 것이고, 그 농도가 엷어지면서 마침내 맑은 물이 흐를 때에는 출세간 혹은 출출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여기’인 세속이 탐진치의 극한으로 가면서 그 농도는 짙어만 가기에 이 세속의 삶을 뛰어넘는 새로운 삶의 기획을 세속에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삶의 기획을 위해 일차적으로 ‘나의 것’ ‘가짜욕망’으로부터 탈주를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의 발생이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나온다는 인식과 함께 이의 해법으로 석존이 무아(無我)와 연기법(緣起法)을 제시한 것에서도 읽혀진다. 그러나 이 탈주는 아주 낮은 단계로서의 ‘만물에 나의 것이라고는 없다. 오직 서로서로 의지하며 관계 속에 있을 뿐이다’라는 무아(無我)적인 실천으로의 발걸음이다. 물론 이 탈주가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아가 지향한 곳으로 또 다른 탈주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범부에게서 무아와 연기론적인 인식과 실천은 쉽지 않다. 마치 대승불교가 “그 이름만으로, 그 이념만으로 이루어지는 불교가 아니라 진정 대승이고자 하는 보살들의 의지가 실천되고 일체중생에게 헌신하는 지혜와 자비의 행이 수반될 때, 비로소 대승불교가 되는 것”24)처럼 ‘지금/여기’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탐진치에 휩싸인 범부의 입에서 나오는 무아와 연기의 단어는 바깥의 오염된 공기와 부딪치자마자 쉽게 바스러진다.

나의 것과 가짜욕망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지 않은 채 부르짖는 무애행(無碍行)은 필히 저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져 상처투성이가 될 뿐이다. 범부는 가짜욕망과 싸우면서 닮아간다. 범부들이여! 제발 그 상처를 자랑하지 말길! 상처는 곪아서 몸을 타고 들어갈 뿐. 그때는 그저 ‘나의 것’이라고 불리는 것, 그리고 가짜욕망으로부터 슬슬 탈주하는 버릇을 먼저 기르는 것이 지름길이다. 아니면 또 다른 층위에서의 사유와 생활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저 50∼60년대 한국불교의 선방에서는 욕망의 대상과 철저한 거리두기가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이 점은 중요한 모티브를 갖는다. “춥고 배가 고파야 도가 나온다. 봉암사 결사 때는 청담, 성철 스님 같은 분들이 면소재지까지 가서 쌀을 배급받거나 탁발을 해 끼니를 잇고, 나무를 직접 해 불을 때면서도 정진했다. 그러나 물질이 풍요해진 요즘은 정신이 해이해져서 그런지 힘을 얻는 이들이 나오지 않는다.”25)

“선객은 모름지기 ‘3부족(三不足)’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식부족(食不足)·의부족(衣不足)·수부족(睡不足)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추태는 갖가지 욕망의 추구에서 비롯되는데, 욕망에서 해방은 되지 못했으나 외면만이라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세속의 칠십 노파가 산문의 홍안 납자에게 먼저 합장하고 고개 숙이는가 보다.”26)

무아적인 실천의 발걸음은 바로 3부족에서 시작되지만 그렇다고 3부족이 곧 무아의 인식과 실천으로 곧장 직진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3부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요컨대 석존의 가르침과 불교의 수행은 필연적으로 “적게 보고, 적게 먹고, 적게 싸는 길”27)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벌써 주눅이 들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옳긴 하지만 비현실적이며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이 매섭게 날아올 수 있다.

그런 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과연 그럴까요? 아마 조금이라도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속으로는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지구의 인구는 60억입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미국과 일본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도리 없이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여기엔 대전제가 필요합니다. 물질적 궁핍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정신적 풍요를 길러야 한다는 거지요. ……현대문명과 산업사회의 일방적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주적으로 사고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 폭력적인 산업문화로는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명백한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28) 너무나도 명백한 이 현실에 단호한 의지를 갖는다는 것. 이제 슬슬 탈주의 여행을 하고 있으니 다시 멈추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처럼 무엇이 허상인가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이때 비로소 나는 무아(無我)의 인식과 실천의 힘을 갖게 된다.

4. 적극적 가난과 불교적 상상력

나는 한국불교와 불교인들이 무제한적인 생산의 확대를 향해 돌진하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와 상대적으로 비교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왔다고 본다. 그것은 근대적인 것들이 방출하고 있는 무한 경쟁과 생산의 논리에 힘겹게 비껴 서 있었다는 뜻이며, 한편으로는 “도저한 정신주의적 전통으로 인한 전근대성으로 근대 이후 탈근대적 전망과 가장 잘 손잡을 수 있는 자원 가운데 하나”29)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신주의적 전통의 전근대적 한국불교의 현재성은 자본주의의 야만성이 증폭되면서 적나라하게 나타난 현대문명의 위기에 무력한 몰골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그 동안 한국불교가 전통에 근거한 내밀한 탐구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게을리 했거나, 전통적 교조성으로 빠져들어가 바깥과의 대화를 외면한 결과에 기인한다.

요컨대 한국불교는 근대의 성장 곡선을 따라가지 않았으면서도 근대가 낳은 무한 질주에 의한 생태위기에 대책 없이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이 ‘대책 없는 노출’은 한국불교에 졸부와 무한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천민 자본주의가 가장 거리낌없이, 그래서 너무나 확연히 보이는 곳에서 기생할 수 있는 터를 제공하게 된다.30)

이것은 “교회는 근대 사회 속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근대 사회의 문명적 성과를 무비판적이고 임의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방주라는, 폐쇄적인 신앙적 게토로서 반근대적으로 자리 매김되어 있다.”31)는 기독교 내부의 비판적 시각과는 궤를 달리한다.

근대 사회의 문명적 성과를 활용하고 누려왔던 기독교의 미래는 이제 탈근대로의 기획이 내부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곧 근대적 질서에 대한 한계성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이는 ‘생태신학’이 등장하는 저변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새삼스럽게 근대적 질서의 야만성을 다시 되밟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의 한계성을 명확하게 꿰뚫어 보는 지혜를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한국불교의 자생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도저한 정신주의적 전통’에서 어떻게 ‘근대 이후의 삶’을 기획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한국불교가 “현대문명의 위기를 자신의 생사 일대사로 삼고 해결해야 할 현안으로 생각한다면 한국불교 그 자신의 실천 궤적과 방향을 스스로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현대문명의 위기를 문명의 비극으로 포장하지 말고 왜곡된 근대성의 격랑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성찰을 포기하지 않는 휴머니티라도 보여 주어야 하는 것”32)이다. 오늘의 생태위기 혹은 삶의 양식의 위기가 “잘못된 가치관에 근거한 잘못된 욕구”때문이고, 이를 “올바르게 전화시키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33)이며, 이 핵심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동인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어떠한 유형이며, 이 문명적인 위기를 넘어설 삶의 형태를 표출할 수 있을까를 현재로서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특히 불교를 삶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이 그리고 불교가 “불교는 자본주의에 편승해 자본의 터를 확장시킬 아무런 명분이 없듯이”(허우성)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받아들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불교인들은 이제 좀더 많이 소유하고, 나의 것을 만들어내고, 가짜욕망 속에서 퍼덕이는 힘겨운 날개짓을 멈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불교인들은 ‘적극적 가난’에 대해 명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것’과 ‘가짜욕망’과의 거리두기를 시작하면서 무아의 깨달음을 향한 틈을 조금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깨달음은 결국 ‘지금/여기’서 살아가는 범부의 걸음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판동
한림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대중불교>에서 기자생활을 했다.현재 <인드라망> 편집위원이며, 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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