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양 불교의 특징

서양으로 간 불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변하여 이국의 풍토에 자리잡고 있을까? 크게 분류한다면 두 가지 전통을 들 수 있다.

첫째, 이식되기 이전 불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파된 불교가 있는데, 이민자들이 고향에서 믿던 종교를 그대로 믿고자 절을 짓고 스님을 모신 경우이다. 이런 불교를 일러 서양에서는 ‘수하물 불교(Baggage Buddhism)’라 하는데, 새 지역의 문화에 맞게 전파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기에 발전이 미미하다. 둘째는 ‘백인 불교(White Convert Buddhism)’라 하여 동양인이 아니라 자국민이 불교를 배워 스님이나 법사가 된 후 가르침을 펴는 경우이다.

서양에서 불교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후자이다. 수많은 저술이나 연구도 당연히 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양 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생활 불교’이다. 역사적으로 선불교의 전통에 젖어 있던 우리 나라에선 세간에 관여하지 않는 불교, 세간과 떨어진 불교가 주축을 이루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불교가 점점 어렵고 현학적이 되고, 민중의 삶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도 못하고, 현대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종교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교육과 포교를 등한시하다보니 새로운 인적 자원이 충원되지 못했고, 노보살들만이 불교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이들은 오랜 습성대로 불교를 오직 기복신앙으로만 아는 면이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서양인들이 불교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970년대였으며, 그 계기 또한 우리와는 다르다. 70년대에 한국인들이 서양인들의 삶의 수치적 지표, 즉 높은 GNP 숫자, 외부적 가치를 따라잡기 위해 질주할 때 이들은 이미 가던 길에서 완전히 유턴을 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문화와 가치관에 전반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고 있었다. 60년대 히피족으로 표현된 반문화, 반지성주의가 계속되고 있었고, 대안 의학, 대안 교육 등 이른바 기존의 문화, 삶에 대한 대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발전되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 사회적, 문화적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불교의 어떠한 면모가 서양인이 당면했던 문제와 사고방식에 특히 어필했던 것일까? 첫째, 서양 문명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이다. ‘나 세대(Me Generation)’라고 해서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살다보니 그 ‘나’가 주체할 수 없는 골치 아픈 것이 된 것이다. 또한 물질적으로 더 나은 것을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쌓인 물건에 오히려 소유당한 듯한 삶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신적으로는 사유(思惟)의 끝을 본 것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여 물질과 정신을 이원화하고 생각과 이성을 인간의 상위 개념으로 놓은 이후부터 지성에 더 중점을 두고 학문과 철학이 발전해왔고, 전문화·분석화·환원주의로 학문과 사상이 발전했는데 그 한계를 확실히 본 것이다.

둘째, 물리학의 발달, 특히 양자역학의 발달로 인해 이성적, 합리적인 사고로도 불교의 공(空)·불이(不二)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사실 양자역학이 발달되기 이전부터 이미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는 불이의 이론이 정립되어 있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이 물질과 에너지는 대립개념이 아니라 상호 변환할 수 있는 것, 즉 물질은 에너지로 변할 수 있고 에너지는 물질로 변할 수 있다는 불이의 개념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모든 것은 에너지로 표현될 수 있다, 공간은 에너지가 희박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고체는 에너지가 더 긴밀히 응축된 것이라는 설까지 발전했다.

이는 불교에서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가르침과 너무나 흡사한 설명이다. 이를 더욱 뒷받침해주는 연구는 노벨물리학 수상자 겔만(Murray Gellmann)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원자보다 더 하위 개념의 입자인 쿼크(quark)를 발견했고, 쿼크의 단순성(simplicity)과 가장 발달된 생명체 중 하나인 재규어(jaguar)의 복잡성(complexity)이 다른 것이 아니라, 쿼크 속에서 재규어가 보이는 것임을 그의 저서 《쿼크와 재규어》에서 밝혔다. 즉 《화엄경》에서 말하는 하나(一)는 모든 것(多)으로 통하고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셋째,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위가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권이 점점 더 흙과 멀어져가고 직업 역시 세분화되다 보니 인간의 소외가 가속화되고 몸 따로, 마음 따로의 경향이 극에 달했다. 더구나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보니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속출했다. 70년대에 들어 불교 명상이 기공과 함께 스트레스 치료와 예방에 효과적임이 판명되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가속화됐다.

넷째, 불교가 창조주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 서양의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에게 어필됐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기독교의 교리가 과학적, 합리적 논리와 모순된다는 점이 밝혀진 데다가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의 극단적이고 편협한 신앙 행위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더 이상 내리누르는 신, 억압적인 신을 모시고 싶지 않은 마음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친 붓다를 본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업설(業說)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였다. 전생에서 지은 업이 현세에 영향을 미친다는 업설을 해석하는 관점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이를 ‘반이 있다’고 보느냐 아니면 ‘반이 없다’고 보느냐 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겠다. 한국에서는 ‘반이 없다’고 보는 편이 우세해 불교가 허무적이고 세상을 등지고 초연하게 사는 것으로 많이 인식되었음에 반하여, 서구에서는 이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석하였다.

‘반이 있다’는 것은 내가 내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서양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운명,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불교의 업설에서 발견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바로 서양인의 이런 마음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일종의 무신주의이며 동시에 뭇생명을 고루 소중히 여기는 일종의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다섯째, 불교의 융통성과 포용성이다. 불교는 문학과 예술로 전해질 수도 있고 철학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 독일에서는 쇼펜하우어, 하이데거가 철학으로, 막스 베버가 (비록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학문으로, 이후 1950년대에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라는 소설을 써서 전세계에 불교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미국 대중에게 불교를 전한 사람들은 잭 캐루악, 앨런 와츠, 앨런 긴즈버그, 게리 스나이더 같은 비트(Beat)의 문인들이었다. 선불교가 서양에 전해질 때는 참선만이 아니라 다도·검도·합기도·꽃꽂이·서예 등이 선의 일부로 전해져서 어필됐다.

티베트 불교는 탕카 같은 화려한 미술과 신들린 것 같은 역동적인 의식으로 서양인에게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화 쿤둔을 보았다면, 가장 인상적으로 되풀이된 것이 아름다운 만달라와 신관의 접신의식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부처님은 법으로 들어가는 문이 8만4천 개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틱?한 스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계속해서 더 많은 문을 발견해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교에서는 교조주의가 없다. 불교 내에서도 각 종파간의 포용성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타종교에게도 불교만큼 포용성을 보이는 종교는 없다. 불교의 이러한 포용성은 오늘날 서양에서 매우 신선한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종교간 화합회의를 주재하는 것도 불교 쪽이 많이 하고 있다.

여섯째, 티베트와 동남아 일대의 정치적 불안으로 수많은 불교 지도자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가서 활동을 편 것이 서양에서 불교가 발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베트남의 틱?한 스님은 조국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해외에서 적극적이고 모범적인 포교활동을 했다. 그런가 하면 타일랜드의 아잔 차, 슐락 시바락사 박사, 캄보디아의 간디라 불리는 마하 고사난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박사, 인도의 암베드카 박사 등은 자국 내에 불교단체를 건립해서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서양인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이들은 해외에 지부를 설치하여 활동영역을 확대하기도 했다. 일곱째, 불교의 변신이다. 위의 아시아권 스님들과 이분들이 키워낸 서양인 제자들은 불교를 전하는 데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서양인들이 불교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불교는 ‘아시아의 옷(Asian garb)’을 벗고 서양의 땅에서 자랄 수 있게 되었으며, 변형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정수는 그대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방면에서 불교 인구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199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불교도는 3백만∼4백만 명으로 총인구의 1.6%를 차지하고 있다. 2위는 1백만 명으로 총인구의 0.7%를 차지하는 러시아이고, 3위는 65만 명으로 총인구의 1.15%를 차지하는 프랑스이다. 4위는 18만 명으로 총인구의 0.3%를 차지하는 영국이고, 5위는 15만 명으로 총인구의 0.2%를 차지하는 독일이다.1) 총인구 중 불교도가 차지하는 비율로 보면 미국이 1위, 프랑스가 2위이며 비록 불교도의 수는 1만4천명밖에 안되지만 총인구의 0.8%를 차지하는 오스트레일리아가 3위를 차지한다. 불교 단체의 수는 어떠한가? 영국에서는 79년에 75개이던 불교단체가 97년 340개로 약 5배 증가했고, 독일에서는 75년에 40개이던 것이 97년엔 400개로 늘어 일약 10배로 증가하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2)

불교도의 수로 보나 비율로 보나 단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는 미국에서는 90%의 단체나 수행센터가 모두 70년대와 80년대에 생겨났다고 한다. 미국은 이제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고 이질적으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던 초기단계를 넘어서서 미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3)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다. 문화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서양에서 불교가 이만큼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불교계의 큰스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달라이 라마, 틱?한 스님, 87년 작고한 트룽파 린포체는 세계 불교계에 길이 빛날 큰별들이다. 이 큰스님들이 주최하는 강연회와 명상수련회에는 불교신도만이 아니라 비신자의 참여도 아주 활발하다. 또한 이분들은 한 종파의 불교도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종파를 초월한 모든 불교도들도 많이 따른다는 게 특징이다. 이 세분의 공통점은 첫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개인적 매력, 그냥 거기 있기만 해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둘째, 이분들은 가르침의 매개체인 언어에 능통한 분들이다. 달라이 라마는 본래 자국에서 집중적인 영어 교육을 받았으며, 틱?한 스님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했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도 하였다. 트룽파 린포체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 이분들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불교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전통적인 불교 용어를 떠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새로이 창조했다.

틱?한 스님은 인간이 ‘연기적(緣起的) 존재’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연결된 존재(interbeing)’라는 말을 만들었고 ‘삶이 바로 불교’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는 말을 만들었다. 달라이 라마는 ‘보리심’ 대신 ‘보편적 책임감(universal responsibility)’이라는 말을 쓰고, ‘불교’라는 말 대신 ‘사랑과 자비가 내 종교’라고 하고 있다. 트룽파 린포체는 티베트 불교 특유의 원색적인 맛을 창조적인 언어로 표현해 수많은 사람들을 기쁘게도 하고 경악하게도 한 사람이다.

그가 아니면 누가 ‘광기 속의 지혜(crazy wisdom)’ ‘영적 물질주의(spiritual materialism)’ ‘부정적인 부정성(negative negativity)’ 같은 말을 만들겠는가? 셋째, 이분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대할지라도 모두를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신선하게 환영해주는 자비로움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달라이 라마는 73년 인도의 부다가야에서 열렸던 칼라챠크라 입문식 후 개인적 축복을 받으려고 줄을 선 15만 명의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이나 처음과 같은 미소와 따스함으로 대했고,4) 틱?한 스님은 누가 차를 대접하든지 늘 ‘세상에서 처음 맛보는 차’ 인 듯이 그렇게 마셨다.5)

우리는 흔히 불교는 단순히 철학이나 종교가 아니라 ‘삶의 기술’이라고 얘기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다. 불교가 일상의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서양인들이다. 그들은 아직 원숙미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의욕과 실험정신이 풍부하다. 바로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신선한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경이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온전히 머물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 실천이 없는 사상은 이론이고 철학일 뿐이다.

삶 속에서 불교의 진리를 실천하고 수행함으로써 이원화되었던 삶, 지성과 이성, 직업과 취미 등 양극으로 갈라졌던 삶을 이제 치유하고 하나로 일치시키는 데 서양인들은 아주 적극적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꾸고 키워나가는 수행단체를 봄에 있어서 전통적인 한국적 개념의 선방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부처님이 펴신 삼학의 수행에서 다만 정(定)만이 아닌 계와 혜를 수행하는 단체도 살펴볼 것이며, 더 나아가서 사회와 자연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 보살들의 수행단체와 바르게 사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을 실천하는 불교단체도 살펴보려 한다.

2. 프랑스의 플럼 빌리지와 틱냣한 스님

프랑스의 남서쪽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해바라기가 노랗게 익어가는 드넓은 평원에 전통을 자랑하는 보르도 포도주의 고향이 있다. 바로 이 보르도 지방에 틱?한 스님의 플럼 빌리지가 있다. 플럼 빌리지의 동쪽은 해바라기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고호가 살았던 프로방스이다. 플럼 빌리지는 ‘자두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엔 정말 자두가 있을까? 있다. 1,250그루의 자두나무에서 나온 자두는 이곳의 수입원 중 하나다.

1982년 스님은 수십년간 키워온 꿈을 이루기 위해, 영적인 오아시스를 마련했다. 현대인에게 알맞은 불교를 전해주기 위해 임제종(臨濟宗)의 분파인 접현종(接現宗)을 창설하고, 또 승가와 재가가 고루 수행할 수 있는 수행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이곳 플럼 빌리지에 매년 찾아드는 1000여 명의 방문객 중 반은 베트남인이고 반은 서양인이다. 플럼 빌리지에는 ‘빨리 빨리’도 없고 ‘많이 많이’도 없다. 처음 이곳에 온 사람들은 TV와 오락이 없고, 말도 많이 하지 않고, 하루 중 묵언을 몇 시간씩 해야 하고, 특히 식사 때 묵언을 하는 것에 당황한다고 한다. 집중적으로 명상을 많이 시키지도 않고 법회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선 무엇을 배우는가? 바로 팔정도의 하나인 정념(正念),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깨어 있는 눈으로 보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아는 정념을 24시간 실천하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다. ‘밥 먹을 때 밥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잠잘 때 잠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틱?한 스님은 플럼 빌리지에 있을 때 가끔 공양간에 가서는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스님이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정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다. 이곳에서는 농사를 친자연적으로 짓는다. 화학비료나 살충제를 전혀 쓰지 않는다. 자두나무 잎이나 양배추를 먹는 민달팽이를 제거하기 위해 이곳 사람들은 민달팽이를 잡아 깡통에 넣어서는 다른 야산에 옮겨준다고 한다.6)

방문자는 나무와 채소와 풀이 많은 이곳의 유유하고 친자연적인 환경에 자연스럽게 젖어들어 몸과 마음을 쉰다. 행선(行禪)을 위해 만든 오솔길 입구에는 “…… 그대 발걸음마다 서늘한 바람이 일고, 그대 발걸음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네……”라고 쓰여 있다. 흙과 지구, 즉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어린이를 중시하는 스님의 배려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한 달 동안 지속되는 여름 수련회이다. 여름 수련회에서 아이들은 명상·다도·법회 등 모든 행사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 스님은 처음 10분간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한다.

10분이 지나면 아이들은 자유롭게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있다. 틱?한 스님은 어린 왕자와 시인과 관세음보살을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스님은 물론 비구이지만 스님에게선 깊은 여성성이 느껴진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했을 때 그 여성적인 것이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만물을 끌어안아 포용하고 키워주는 그러한 여성성이었으리라. 바로 그러한 것이 스님에게서 느껴진다. 틱?한 스님은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는 말을 처음 만들고 ‘행’하는 불교를 주창한 분이다.

참여불교의 특징은 첫째, 정념(正念), 깨어 있음으로 삶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이다. 둘째, 나와 이 세상이 깊은 차원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셋째, 일단 제대로 본 후에는 상응하는 ‘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아마도 현재 세계적으로 활동중인 큰스님들 중에서 사회변화를 위한 조직적 활동에 가장 경험과 조예가 풍부한 사람일 것이다. 1960년대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베트남 국민을 살리기 위해 공산측도 자유측도 전쟁을 중지하라는 평화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 미국으로 가서 강연회를 통해 평화를 호소했다.

미국에서 70년대에 불교 붐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 터를 일구었던 사람이 바로 틱?한 스님이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All Buddhism is engaged).”는 것이 틱?한 스님의 생각이다. 접현종의 주축을 이루는 교리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7)

첫째, 불교는 이미 참여하고 있는 불교이다. 아무런 관련 없이, 참여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이미 불교가 아니다. 둘째, 나는 연결된 존재라는 지혜, 즉 나는 개별적인 나가 아니라 개별적 나가 공(空)하다는 지혜와 무상함은 참여불교의 수행과 평화창조의 근본이다. 셋째,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불교 수행에는 깨어 있음의 수행과 사회봉사와, 불의를 줄이고 멈추기 위한 비당파적인 지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넷째, 참여불교는 우리가 삶을 사는 법이다.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다. 평화란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행(行)에 포함되어야 한다. 다섯째, 가르침과 수행은 시대와 지역에 합당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는 쉬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배운다.

1995년 스님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교 여성해방 신학자인 정현경 교수가 새 종파를 세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스님은 자신이 임제종의 스님으로서 전통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접현종은 새 종파가 아니라 다만 임제종이라는 고목에서 뻗어나온 새 가지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새 가지는 재가신자와 스님들 사이에 중요한 다리가 될 것이며 현 시대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잘 대처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일부 사회운동가들이 ‘신은 가난한 자의 편’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스님은 “부자도 고통이 있다. 신은 어느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포용한다. 고통의 근원을 찾아 그 상황을 일신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오직 고통만을 낳을 뿐이며 오직 사랑과 이해만이 최상의 무기이다.”고 대답했다.8) 1982년 플럼 빌리지를 설립한 이후 이곳은 계속 성장해 98년에는 5개의 건물과 상주 인구가 100여 명인 단체로 컸다. 평소 플럼 빌리지를 주축으로 하는 핵심 멤버는 승가와 재가를 합쳐 500여 명에 달한다. 98년 현재 접현종의 법사와 스님은 75명이고 전세계에 퍼져 있는 수행 승가는 300여 개가 되었다.

90년대에는 미국 버몬트 주에 단풍림 승원(Maple Forest Monastery)을 설립하고 인근에 그린마운틴 수행원(Green Mountain Dharma Center)을 세워 승가와 재가를 공히 교육하고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3. 영국의 칫타비베카 숲속 승가

1992년 작고한 아잔 차는 부처님 당시처럼 숲속 생활을 하는 태국의 큰스님이다. 부처님 당시 사문들이 했던 그대로 마을에서 탁발하고 숲에서 참선하는 이들은 숲속 수행자라고 불린다. 아잔(Ajahn)은 태국어로 스님이라는 존칭이기에 따로 스님의 호칭을 생략한다.

그는 늘 혼자서 숲속에 들어가 명상하고 고행을 했고, 그렇게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승가로 돌아와서 며칠만 지나면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려운 것을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 싶어 승가에 더 오래 머물러 수행했다. 후에 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승원에 모아놓고 단체로 사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혹자는 아잔 차의 제자들이 명상을 별로 하지 않는다느니, 들에서 일만 한다느니 하고 비난했지만 아잔 차는 그 방법을 고수했다. 승가 공동체의 단체 생활에서 계율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 자체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며, 진정한 수행은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숨쉴 시간이 있다면 명상할 시간도 있는 것이다. 걸을 때도 숨쉬고 서 있을 때도 숨쉬고 누워 있을 때도 숨쉬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 된다.” 아잔 차는 숭산 스님과 교류도 하고 그의 저서에 숭산 스님이 서문을 쓸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이다. 아잔 차는 체구도 크고 호방했으며 짧고 힘있는 말로 법을 전달해 서양인 제자가 많았다. 일례를 하나 들어보자. 한번은 아잔 차가 제자들에게 지팡이를 보여주며 물었다. “지팡이 크기가 어떠한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지팡이가 사용되는 곳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는가. 더 큰 지팡이가 필요하다면 이 지팡이는 작게 여겨질 것이요, 작은 지팡이가 필요하다면 이 지팡이는 크다고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지팡이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 크기가 어떠한가는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다. 번뇌는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1977년 아잔 차는 영국 승가 후원회(English Sangha Trust)의 초청으로 영국에 왔다. 이때 10년간 아잔 차의 지도를 받은 영국인 수제자 아잔 수메도를 동행했다.

아잔 차는 곧 귀국했지만 영국에서 다르마를 구하는 열기가 뜨거운 것을 보고 아잔 수메도를 불교도가 보시한 아파트인 헴스테드 승원(Hempstead Vihara)에 남기고 갔다. 법을 전하되 태국에서 숲속 수행자들이 하던 그대로 전하라는 스승의 명을 받고 아잔 수메도는 아침 저녁으로 명상을 지도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아파트를 나와 인근의 공원으로 탁발을 나갔다. 불교를 전혀 모르고 탁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곳에서도 꼭 탁발을 나가야 하느냐고 묻자 스승은 대답했다.

“그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법을 전할 수 있단 말이냐?” 아무도 공양을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수메도는 매일 아파트 주변과 공원으로 탁발을 나갔다. 그렇게 몇 달을 반복하던 어느 날 한 노인이 공원에서 물었다. “도대체 매일 그렇게 나와서 무엇을 하시는 거요?” “예, 저는 불교의 사문으로서 이렇게 아침마다 주변을 돌며 주민들도 만나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주민들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 있는 기회도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주고 받다가 노인은 이들이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숲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흔쾌히 숲을 기증했다.

그렇게 해서 영국 남부에 있는 웨스트 서섹스(West Sussex)에 위치한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해머우드(Hammerwood) 숲속 108에이커의 땅에 숲속 승가(Forest Sangha) 최초의 승원인 칫타비베카(Chittaviveka, ‘고요한 마음’이라는 뜻) 승원이 건립되었다. 1984년에는 두번째 승원인 아마라바티(Amaravati, ‘不死界’라는 뜻)를 설립하고 아잔 수메도가 승원장이 되었다. 이어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승원이 늘어났다. 영국에 노섬버랜드(Northumberland) 승원과 드본(Devon) 승원, 스위스에 칸데르스탁(Kanderstag) 승원, 이태리에 세자로마노(Sezza-Romano) 승원, 뉴질랜드에 웰링턴(Wellington) 승원, 오스트레일리아에 서펜틴(Serpentine) 승원 등이 설립되었다. 미국에는 캘리포니아의 멘도치노 카운티(Mendocino County)에 소재한 래드우드 밸리(Redwood Valley)에 120에이커의 숲을 기증받았다.

숲속 승가의 스님들은 오늘도 전세계에서 그 개조(開祖) 아잔 차의 단순하고 솔직하고 직접적인 동시에 생활과 밀접히 연결된 가르침을 펴며 법을 전하고 있다. 아잔 아마로는 명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명상 수련회나 선방에 장기간 있는 것도 좋지만 이것의 단점은 명상과 생활을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 안에 여유 공간을 만들고 이를 광대하게 넓히는 것과 같다. 좀더 쉽게 말하면 실내 사격장에 가서 오리를 쏘아 넘어뜨리는 것과 같다. 다만 명상에서 쏘아 넘어뜨리는 것은 단순한 오리가 아니라 ‘생각’이라는 오리와 ‘감정’이라는 오리인 것이다.”9) “명상수련회에서만 명상을 하고 평소 생활에서 하지 않는 것의 단점은 거리에서 사격전을 벌여 적을 소탕하는 것과 같다.

사격이 끝난 후 거리는 깨끗해 보이지만 실은 게릴라들이 복병으로 숨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련회에선 마음이 깨끗해진 듯 하지만 세상 속으로 나오면 다시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잔 차가 늘 강조했듯이 같은 공동체에서 탁발도 하고 울력도 하며, 즉 몸에 흙을 묻히며 수행을 실천해야만 진정한 평화가 온다.”

4. 직업을 통해 다르마를 실천하는 영국의 서구 불교종의 친구들

‘서구 불교종의 친구들(The Friends of the Western Buddhist Order: FWBO)’은 불교가 서양으로 가서 그 모습을 바꾼 가장 전형적인 예이며, 서양인에게 맞는 불교를 새로 창조했다는 칭송이 자자한 단체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팔정도 중에서 정명(正命) 즉 바른 직업으로 생계를 삼는 것은 생활 불교가 별로 발달되지 않는 한국과 동양에서는 별로 연구되거나 주목받지 못했다. FWBO는 바른 직업을 통해 새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단체이다. FWBO는 불교 센터(수행의 장), 거주 공동체(쉼의 장), 협동조합(일의 장)이라는 세 지부가 한 곳에 모여 서구 산업사회에서의 불교 사회를 축소판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모델 역할을 하고 있다.

FWBO는 1967년 영국의 상가락시타(Sangharakshita) 스님이 세웠다. 1925년 데니스 링우드라는 이름으로 노동 계급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스님은 1950년 사미계를 받았다. 그는 인도 다질링 구역에서 〈마하 보디 저널(Mahaa Bodhi Journal)〉의 공동 편집장을 맡으면서 티베트 인들에게 금강승도 배우고 암베드카 박사의 불가촉천민 불교 개종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렇게 인도에서 20년간 불교 운동을 한 후 67년 영국으로 온 상가락시타 스님은 큰 꿈을 품게 된다.

“서구 문명의 상황에 맞는 정신 운동을 펼치자. 고도로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상황에 맞는 현대적 불교를 창조하자.”는 것이었다.10)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님은 여러 불교 종파의 이론과 방법을 차용했으며 동시에 서구문학과 철학의 거장들인 윌리엄 블레이크·괴테·니체 등의 작품도 사용했다. 다르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불교 밖에서도 영감의 원천을 두루 찾으려 한 것이다.

FWBO의 목적은 “진정한 개인의 성장을 돕는 것”이며 동시에 “옛것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이상이 오늘날에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들이 주장하던 환경문제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FWBO 회원들은 어떻게 정명을 실천하고 있을까? 소극적으로는 특정의 해로운 직업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기도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는 일하는 시간을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건설적으로 쓰고자 한다.

첫째, 청정한 직업이란 불교적 견지에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건강하고 유익하며 기술적인(kusala) 직업을 말한다. 유익하지 않은 직업에는 경박한 사치품이나 불량품을 만들거나 파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광고계에 종사하는 것도 별로 건설적이지 못한 것으로 본다. 의미 있고 유용한 직업, 개인의 영적 발전과 사회에 공히 유익한 직업, 기본적이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고수준으로 제공하는 직업을 중시한다. 둘째, 가능하면 어떤 생산이나 서비스 활동은 혼자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같은 이상을 가진 그룹 내에서 서로 격려하고 영감을 주며 활동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또한 권위적 서열체계 없이 행동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리는 법도 배운다. 협동조합이라는 체제와 원칙 하에서 일을 하면 자연히 긍정적 근로 환경이 조성되어 즐겁지 않은 일조차도 웃음지으며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팀 단위로 결성한 것이 건강식품 가게, 채식전문 식당, 인쇄소, 보험사, 조경사이다. FWBO의 주력산업은 캠브리지에 소재한 윈드호스 무역사(Windhorse Trading)이다.

선물가게를 도매, 소매로 운영하는 이 무역사는 92년에 성장률 37%를 기록해 신속성장 100대기업에 속했고, 96년에는 매출 37% 신장, 이윤 101% 신장률을 보였다. 97년에는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에 18개의 선물가게를 두고 불교도 170명을 전업직원으로 고용했다. 윈드호스 출판사는 영국에 본사, 미국·호주에 지사를 두고 불교와 관련 분야의 출판 사업을 하고 있다. 셋째, 협동조합에서 하는 작업은 효율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근로자를 착취하여 지치게 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근로자가 생활을 영위하고 다른 불교 복지사업을 도울 수 있도록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

보시와 소득에 대한 FWBO의 원칙은 “줄 수 있는 만큼 주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이다. 런던의 한 불교 식당에서 9년간 일해온 회원, 수바드라마티의 말을 들어보자. “매주 모든 사람은 일정한 주급을 받아요.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저축할 만큼은 아닌 그런 정도죠. 어떤 사람이 좀더 돈이 필요하다면 팀 내에서 의논을 해서 지급해요. 저는 여태까지 돈을 더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을 제 미덕으로 알고 살았어요. 거짓 없이 온 마음을 다해서 산 삶이에요.” 넷째, 정명의 원칙에 따라 사는 삶은 그 형태나 내용면에서만이 아니라 목적에서도 차이가 있다. FWBO 회원에게 있어서 자신이 불교도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명상이나 가르침을 받아 영적 발전을 하고, 일을 하면서도 자신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정치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도 포함한다.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행이 바로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르마를 수행하기에 더 나은 조건을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사회적 참여로 해석되는 보살의 이타행인 것이다. 협동조합은 속되고 탐욕스런 환경과 FWBO 회원들의 영적 세계 사이를 잇는 다리인 것이다. 동시에 협동조합은 외부인들을 불교의 가르침으로 이끌고 그들에게 불교를 알리는 가교 역할도 한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것은 정명에 따라 행하는 사업 덕분에 FWBO는 자급자족할 수 있고 따라서 이들이 바꾸려고 하는 ‘구(舊)사회’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즉 켄 존스가 지적했듯이 정부의 정치체제나 경제기구에 재정을 의존하는 취약성 때문에 기껏해야 정치적 의의가 없는 보수노선 정도밖에 표명하지 못하는 아시아의 승가 같은 처지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11) FWBO는 1970년대 말부터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서부 인도에 암베드카가 이끄는 신불교도를 지원하기 위해 카루나 자선재단, 협동조합, 공예품 산업공장을 설립하였다. 이 단체들에는 FWBO 회원이 수천 명 있다. 8,90년대에는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말레이시아·스리랑카·네팔·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유럽 각국에 FWBO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전세계의 서구 불교종 회원은 82년에 187명, 97년에 700명으로 추정된다. FWBO의 후원자와 친구들은 10만 명 정도 된다. 97년 현재 영국에는 50개의 FWBO 도시 센터가 있고, 15개의 수련장이 있으며 다양한 정명(正命) 협동조합이 있다. 윈드호스(Windhorse: 타루초(經幡))라는 출판사를 설립해 왕성한 불교 출판 활동도 벌이고 있다. 서구 불교종의 회원들은 남녀, 기혼, 미혼 등 다양하다. 스님들처럼 금욕을 지키며 사는 사람도 있고, 직장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 종단 내에서 시간제나 전업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회원들 중 다수가 FWBO 센터 근처에 있는 거주 공동체에서 산다.

상가락시타 스님은 1997년 FWBO 종정 자리를 내놓고 대신 13명의 원로 지도자로 구성된 ‘지도 위원회(Preceptor’s College Council)’에 수계(授戒)와 종단의 지도를 의뢰했다. 설립자가 부재한 경우에나 사후에도 종단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5. 독일의 붓다 하우스와 아야 케마

“나의 철학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계의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불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19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가 한 말이다. 인도철학과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그의 사상은 이후 니체 같은 철학자, 토마스 만 같은 문학가, 바그너 같은 음악가에 영향을 미쳤다.

다른 철학가들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조화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는 홀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과 생의 딜레마를 깊게 숙고했으며, 융이 지적했듯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적나라한 고통과 그로 인한 인간의 혼란, 열정, 악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사람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불교를 ‘내세 중심의 고행주의’라고 보았고 ‘이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종교이며 ‘외부세계로부터 물러난’ 종교이며 ‘행동하지 않는 윤리’를 중시한다고 했다. 베버 덕분에 서구에서는 불교를 이 세상에 관련된 행동을 하지 않는 허무주의로 보는 시각이 퍼졌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951년 헤르만 헤세는 소설 《싯다르타》를 써서 불교와 힌두교 사상을 다시 한번 독일과 세계에 전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집안에 불상을 모셔 놓았고 하이데거는 말년에 일본식 선(禪)에 심취해 흑림(黑林) 속에 일본식 다실(茶室)을 닮은 은둔처를 지어놓고 일본의 대선사들을 초대했다. 이로 인해 하이데거는 본국에서보다 일본에서 훨씬 인기가 있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불과 150년밖에 안되는 서양 불교의 역사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하다. 일찍부터 불교와 접하여 불교를 철학, 역사, 학문, 예술로 전하는 개척자와 전달자 역할을 맡았던 긍정적인 면과 그들이 전한 불교의 이미지가 왜곡되어 있었다는 부정적인 면이 엇비슷하게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독일이라는 땅에 뿌리박고 불교를 수행하며 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현재도 불교도가 서양에서 5위이며 이중 반은 베트남 이민들이라고 한다. 독일에는 티베트 불교의 승원, 미국의 피스메이커 오더, 틱?한 스님의 접현종에서 모두 지부를 설립했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세계로 뻗어나간 수행단체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고빈다 라마(1898∼1986)는 인도의 타고르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원래 독일의 음악가였다가 미얀마로 들어가 스님이 된 니안틸로카의 제자가 되어 계를 받았다. 이후 티베트로 들어가 토모 게세 린포체의 제자가 되어 티베트 불교로 전향했다. 고빈다 라마는 그러나 독일이 아닌 인도에 아리야 마이트레야 만달라 불교종파를 세웠다.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그는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불교 강연과 전시회를 가지며 동양과 서양을 잇는 가교역할을 했다. 《구루의 땅》이라는 저술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베를린 동쪽 교외에 베를린 최대의 불교사찰인 ‘불교의 집’이 있다. 1917년 파울 달케 박사(1865∼1945)에 의해 창설된 이곳은 독일 불교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곳이다.

여기서는 불교 강연회, 법회, 불교 관계 전시회가 연중무휴로 열린다. 본당 왼쪽에 증축된 도서관에는 수천 권의 불교 장서가 가득 차 있다. 스리랑카 스님들이 상주하고 있지만 모든 종파에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 독일인으로서 스리랑카에서 계를 받아 비구니가 된 아야 케마(Ayya Khema: Ayya는 스님이라는 뜻)의 일생을 보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다. 나치가 득세를 하던 시절에 유태인의 딸로 태어나 1938년 15세 때 200명의 어린이 피난단에 섞여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

2년 후 상하이로 피난가 있는 부모와 합류하지만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가족들은 다시 일본인의 포로 수용소에 갇히고 여기서 아버지와 사별을 한다. 미군이 진주하여 포로들이 해방되면서 4년 후 미국으로 이민, 결혼하여 1남1녀를 둔 아야 케마는 60년대에 남편과 함께 히말라야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을 다니게 되고 여기서 명상을 배워 70년대에는 유럽 각국에 명상을 가르쳤다.

1979년 55세의 나이에 출가를 하게 된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니안포니카의 제자가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차로 2시간을 달리면 다라그 국립공원이 있는데 이곳에 숲속 승가의 승원인 왓 붓다 담마(Wat Buddha-Dhamma)를 설립했고, 1989년 독일에 붓다 하우스를 설립해 원장이 되었으며, 97년에는 독일 최초의 숲속 승가인 멧타 비하라(Metta Vihara)를 뮌헨에 설립하여 독일어로 비구계를 수계한 최초의 스님을 배출하였다. 스님은 많은 비구니 제자를 키웠고 여성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87년에는 세계 최초의 비구니 국제 대회를 주관하여 열었다.

그로 인해 세계 여성 불교 단체 샤카디타(Sakyadhita: ‘붓다의 딸들’이라는 뜻)가 탄생했다. 87년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유엔에 초청되어 불교와 세계평화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 쉽고 아름다운 말과 문체로 사람들의 가슴에 다가간 아야 케마는 영어와 독일어 저술이 25종에 이르며, 이중 일부는 7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스님의 자전적 일대기인 《이 생명 다 바쳐서》가 번역되어 있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삶(Being Nobody, Going Nowhere)》은 크리스마스 험프리상을 받았다. 수년 동안 암과 투병하며 몇 차례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에너지를 잃지 않고 활동을 하던 스님은 97년 자신이 설립한 독일의 붓다 하우스에서 입적하였다.

자신의 삶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이었다고 말하는 스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자신의 삶 구비구비에서 맞닥뜨린 어려운 일들은 바로 자신을 가르치는 자애로운 스승이었다는 뜻일 게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 버릴’ 수 있음을 스님은 출가하기 전 아들이 말에서 떨어지는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2000년대를 맞아 불교계에서는 불교 페미니즘이 거세게 일고 있다. 불교가 서양에서 융성하기 때문에 그러하고, 또한 70년대에 불교를 수용한 세대 중 다수가 대학 졸업자 내지 대학원 졸업자 등 엘리트이고, 그러다 보니 더욱더 불교가 페미니즘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여성불자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 이 분야의 스승과 비구니 스님이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아야 케마는 세계 최초로 비구니 스님을 단결시켰고 수많은 차세대 비구니 스님을 키워 불교 페미니즘의 초석을 놓았다는 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분이다. 남들이 은퇴하여 안락한 삶을 꿈꾸고 손자 볼 생각을 할 55세라는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던 스님이 늘상 일러주었던 수행이란 어떤 것일까? “수행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온 몸과 온 마음일 뿐이다. 조금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일 뿐이다.”

6.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선센터와 스즈키 순류 스님

캘리포니아의 소노마 산(山)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소노마 산 선(禪)센터에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의 두 개의 부도탑이 있다. 첫번째 탑은 조용한 오솔길, 나무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있다. 작은 돌을 원형으로 배치해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아주 작은 정원을 꾸몄는데 그 한가운데 타사자라 강에서 끌어올린 커다란 황금빛 돌이 있다. 스즈키 순류 스님이 생전에 손수 골라놓은 돌인데 스님이 입적하자 탑으로 쓴 것이다. 이 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돌이라기보다는 좌선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의 아늑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마치 스님을 친견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돌에 물을 붓고 《반야심경》을 욀 때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고 한다. “나를 보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라. 그리고 좌선하라. 좌선하는 그곳에 나는 언제나 있느니. 고요히 바위처럼 그렇게 앉아 있으라.”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 사방이 탁 트인 곳에 화려한 붉은 빛의 목탑이 있다. 스즈키 스님의 탑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의 밝고 역동적인 모습이다. 그 안의 그림을 보면 트룽파 린포체의 모습이 보인다.

선불교의 승원에 웬 티베트 스님의 탑이며, 왜 일본식 가사를 입고 있는 것일까? 트룽파 린포체의 부도가 여기 있는 것은 스즈키 스님과의 남다른 우정에 기인한 것이다. 이 부도를 세울 때 숭산 스님이 해박한 풍수 지식을 활용하여 그 자리를 잡아주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일급 목수, 티베트의 최고 탕가 화가, 멕시코의 원주민 무당 등이 힘을 합치는 등 트룽파 린포체의 부도를 세우는 일은 글자 그대로 국제적 프로젝트였다. 1969년 스즈키 스님과 트룽파 린포체의 첫 만남을 한 목격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선센터로 스님을 뵈러 온 트룽파 린포체가 스님에게 다가왔다. 린포체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전생에 만나 같은 일을 해온 동지끼리 이 생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것처럼,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았고 밀물처럼 다가오는 과거의 기억에 눈물이 터진 것이었다.”12) 이후 71년 스즈키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두 사람은 짧지만 모든 것을 나누는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트룽파 린포체는 스즈키 스님에게 ‘법의 사자(Lion of Dharma)’라는 이름을 드리고 스즈키 스님은 트룽파 린포체에게 발우를 남겼다. 두 사람은 이 생에서도 서로간에 깊은 연대감을 느꼈다. 트룽파 린포체는 조국에서 망명한 사람이고 스즈키 스님은 57세라는 노령에 일본에서의 명망과 안락한 지위를 버리고 불법을 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온 사람이다. 두 사람은 마치 미국 불교를 일으키는 사명을 두 어깨에 떠맡은 듯이 일을 했다. 미국의 불교도들은 말한다.

미국 불교라는 밭을 일군 사람은 스즈키 스님이다. 그러나 트룽파 린포체가 와서야 그 밭에서 눈에 보이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두 사람을 보면 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가 많이 있다. 스즈키 스님은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선승이고, 트룽파 린포체는 티베트 불교의 카규파-닝마파의 승려이다. 스즈키 스님은 가늘고 작은 체구이고 트룽파 린포체는 몸집이 큰 역사형이다. 스즈키 스님은 가능하면 말을 쓰지 않고 가르치는 방법을 택한 반면, 트룽파 린포체는 화려하고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말을 난사했고 가르치는 방식 역시 변화무쌍했다.

한 사람이 아폴론적이라면 또 한 사람은 디오니소스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운명적인 동지의식을 느끼며 서로 도왔다. 실제로 두 사람은 같이 술을 마시며 대취한 적이 몇 번 있었다고 앨런 긴즈버그는 말한다. 스즈키 스님의 다비식 때 관 위에 티베트의 하얀 스카프를 올려놓은 후 큰 소리로 울부짖는 트룽파 린포체의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이었다고 한다.

1965년 마리안 더비의 거실에서 몇 명이 좌선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 하이쿠 선방은 큰 단체로 자라났다. 샌프란시스코 선센터, 산타 로사 시에 있는 소노마 산(山) 선센터, 산속에 위치한 수행 전문기관이며 아시아 밖에 처음 설립된 전문 승원인 타사자라, 유기농 농장과 명상 수련회, 일반인 교육을 하는 그린걸치 농원 선센터, 버클리 선센터, 카논도 선방, 도심 안에 위치한 초심사(初心寺) 등이 생겼다. 그린걸치 농원 선센터에서는 유기농 강의와 다도 강의도 하고 일반인들에게 불교강의도 한다.

또 엘더호스텔(Elderhostel)이라고 55세 이상의 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연중 수 차례 개최하는 것이 돋보인다. 5일간의 명상 수련회 동안 참가자는 참선, 불교 공부 외에도 선센터의 부엌과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며 이곳 거주 수행자와 비슷한 일과를 보내게 된다. 그린 걸치에는 유기농 수련생 제도가 있다. 이곳 8에이커의 농장에서 이들 수련생들은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간 공부, 실습, 참선을 고루 조합한 훈련을 받게 된다.

1주 30시간 일하고 5시간 수업 받고, 매일 참선하고, 2일간 계속되는 참선정진을 6개월에 한 번 하는 대신 이들은 숙식을 제공받고 약간의 용돈을 받는다. 봄·가을에 개최되는 7주간 참선에 참여하면 학점을 더 많이 취득할 수 있다. 수련은 농사 짓는 기술, 퇴비 만드는 법, 수확하는 법에서 파는 법까지 두루 가르친다. 농장의 일손도 덜고 학생들은 좋은 기술과 불교도 배우는 호혜적인 제도 같다.

샌프란시스코 선센터는 스님 사후에 리처드 베이커가 승원장을 맡고 있으며 2000년에는 새천년을 맞아 다달이 불교계의 기라성 같은 스님과 강사들을 모셔와 강연회를 열었다. 그 명단을 보면 피스메이커 오더를 이끄는 버나드 글래스맨 스님, 불교 명상을 스트레스 치료에 사용하는 의사 존 카밧진, 라마 수리야 다스, 송광사에서 스님으로 10년 수행하다 속인이 되어 영국으로 가서 가이아 하우스를 운영하는 스티븐 베철러, 참여불교의 맥신홍 킹스턴 스님, 저명한 불교 저자 실비아 부어스틴, 하와이의 다이아몬드 승가 원장 로버트 아이트켄, 피스메이커 오더의 존 핼리팩스 등이 있다.

“초심자의 마음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별 가능성이 없다.” 스즈키 스님이 늘 하신 말씀이다. 좌선에 들어갈 때 늘 초심을 가져야 하며 그 초심으로 일상생활의 모든 행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스즈키 선사의 대표적 저서인 《선심 초심(Zen Mind, Beginner’s Mind)》은 스님이 매일 아침 15분 정도 말씀한 짤막한 강연을 마리안이 녹음하여 후에 출판한 것으로 미국의 선불교도들에게 고전과도 같은 책이다. 트룽파 린포체의 샴발라 인스티튜트에서 학생들에게 권유하는 독서목록에 티베트 스님들 것이 아닌 유일한 저술로 끼어 있는 책이다.

7. 미국의 샴발라 승원과 트룽파 린포체

트룽파 린포체는 티베트의 카규파와 닝마파의 11번째 활불(活佛)이다. 스루망 승원의 최고위 승원장으로서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신학과 철학의 박사학위에 해당되는 켄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천재적 언어 감각과 대담하고 격식이 없는 행동, 때로는 정상을 벗어난 행동으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전통적인 비구나 스승의 이미지에 맞추기를 단연코 거부했으며 아시아와 미국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혼합하여 사용했다는 트룽파 린포체. 그는 분명 괴각이었으며 아마도 한국에서는 경허 스님에 비유할 만 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가 왔기에 미국의 불교가 사방에서 쑥쑥 자라고 눈에 띄게 되었다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단호했고 예측 불허하여 페마 최된 스님은 은사인 트룽파 린포체를 아무리 애써도 사랑할 수가 없어서 울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린포체는 어떤 틀에 매이는 것을 제일 싫어했던 것 같다.

예불법이나 어떤 의식을 가르치고 난 후 제자들이 그것에 익숙해질 때쯤 되면 린포체는 앞서 가르쳐준 것은 다 틀린 것이니 지금부터 가르쳐준 방식으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 황당하지만 스승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제자들이 다시 두번째 방식에 익숙해질 때쯤 린포체는 다시 또 방법을 바꾼다. 그렇게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덧 제자들은 알게 된다고 한다.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13)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지 말라. 그것은 자신이 인간임을 부끄러워함과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 대중 앞에서 최악의 행동을 스스로 해보였던 린포체는 좋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을 했을 때 그냥 좋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이라고 하면 그뿐인데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진정 부정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를 트룽파 린포체는 ‘부정적 부정성’이라고 했고 아야 케마는 ‘이중고(double dukka)’라고 했다. 미술가, 시인이기도 했던 스님은 《광기 속의 지혜(Crazy Wisdom)》 《영적 물질주의를 헤치며 나아가기(Cutting Through Spiritual Materialism)》 등 총 17권에 달하는 저술을 했고, 번역서도 많이 내었다.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배출해 릭 필드(Rick Field)는 7권의 책을 냈고, 페마 최된 스님은 5권을 내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크리스토퍼 퀸은 참여불교의 지도자들이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다. 첫째, 동양과 서양을 잘 조화시킬 줄 알며 둘째, 문화쇄신, 사회변화, 초종파적 세계 불교를 이루기 위해 싸운 운동가라는 것이다.14)

트룽파 린포체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완벽히 갖춘 사람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1967년 스코틀랜드에 삼예링 명상센터를 설립한다. 그는 이때 승가를 떠나 결혼을 한다. 1970년 미국으로 온 린포체는 100여 개의 명상센터를 전세계에 세우고 콜로라도 주 불더 시에 서양 최초로 인가받은 불교대학인 나로파 불교대학과 샴발라 센터를 설립하고 격월간지인 〈샴발라 선〉을 발간한다. 샴발라 센터에서는 명상뿐만 아니라 불교 정신이 배어 있는 다도, 꽃꽂이도 가르친다.

또한 가장 중요한 샴발라 교육을 실시한다. 샴발라 교육은 트룽파 린포체가 개발한 것으로 종교라는 틀을 거치지 않아도 깨달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깨달은 사람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샴발라 교육은 현시를 통해 그에게 내려진 ‘테르마’ 즉 숨겨진 비밀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린포체는 그 책에 설명을 덧붙여 이를 5단계의 교육과정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이 사회에 만연한 지배의 정치학, 지배 중심의 인간관계에서 명료함, 온화함, 사랑, 건강한 정신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로 변화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교육은 세 가지 기본적 신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첫째,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 둘째,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성스럽다. 셋째, 이 세상의 종교 전통은 사회적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이상을 그의 저서 《샴발라:영적 전사의 성스러운 길(Shambhala:The Sacred Path of the Warrior)》에서 자세히 펼치고 있다.

나로파 불교대학은 1974년 콜로라도 주 불더 시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여름 동안만 열기로 계획하여 강사진으로는 투룽파 린포체, 비트의 문인 앨런 긴즈버그, 심층 생태학의 그레고리 베이트슨, 하버드 교수였다가 구루가 된 램 다스 등을 확보했다. 과목으로는 명상·기공·탕카·다도·티베트 어·산스크리트 어·중관철학·심리학 등이 있었고, 밤에는 시낭송회·공연·토론·세미나 등을 하기로 했다.

200명 정도의 학생을 예상했던 그해 여름, 그러나 2000명이 몰려들었다. 릭 필드는 이것을 ‘의식의 우드스탁 축제’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2년 후 나로파는 일년 내내 클래스를 열게 되었다. 약 23년이 지난 후에는 정식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나로파 대학의 여름 글쓰기 교실은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비트의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나로파의 문학 프로그램은 늘 성황을 이루고 있다. 나로파의 석사 학위는 불교학·글쓰기·노인학·참여불교·명상적 심리치료의 분야에서 주어진다. 모든 나로파의 학생들은 필수 명상과 선택 명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도시의 병원, 양로원, 말기환자 보호소 등에서 실습을 하며 학점을 따도록 해 원리를 현장과 삶에 적용하는 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개인적인 자비심을 일구는 데 목적을 둔 이런 교육 프로그램들의 결과는 졸업생들의 활동을 통해서 확실히 성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묶어주는 나로파의 명상 중심 교육 프로그램은 참여교육이며, 대안교육으로서 미국 문화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8. 미국의 ZPO와 버나드 글래스맨 선사

1992년 1월 2일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업체 면에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이 눈길을 끌었다. “선(禪)과 사람을 사랑하는 제빵 기술을 혼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살 곳과 일자리를 제공하면서도 이익을 남기는 불교 선사” 그리고 기사에는 이런 말이 있다. “뉴욕 주 용커스 시에서 최고급 제과를 부자에게 매출하여 가난한 사람을 먹이는 스님. 그는 빈자에게 집을 제공하고 그들의 십대 자녀들의 문제를 상담해주며 유아를 위해 탁아소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모두가 연결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서양 불교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버나드 데쓰겐 글래스맨 스님.

1939년 뉴욕 브룩클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그러나 공부를 잘해 UCLA에서 응용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후 미국 유수의 국방산업체인 맥도널 더글러스에서 화성 스페이스셔틀 프로젝트의 팀장을 맡았었다. 출세가도를 달리며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그는 그러나 최고의 학벌과 중역의 자리를 버리고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조동종 스님이 된다.

그리고 젠 피스메이커 오더(Zen Peacemaker Order, ZPO)라는 종파를 설립한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회운동가, 종교지도자들이 있는 피스메이커 오더에는 이들이 꼭 믿고 지켜야 할 세 가지 교의가 있다. 첫째, 아무것도 모르며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린다. 둘째, 이 세상의 고통과 기쁨을 제대로 본다. 셋째, 자신과 우주의 뭇생명을 치유한다. 제1교의인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불교계의 몇몇 거장들이 설파해온 불가지론이다. 이는 틱?한 스님이 설립한 접현종의 제1계인 “이 세상에 불법을 포함하여 어떤 교리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것과 맥이 통하며 동시에 숭산 스님의 “오직 모를 뿐, 모르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너 자신이다.”라는 것과도 공통점이 있다.

또한 스즈키 순류 선사 역시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믿든지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순간 자기 중심적이 되고 만다.”고 말하여 불가지론을 폈다. 스티븐 배철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교의 불가지론은 알고 싶지 않은 마음, 탐구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과는 다르다고 했다. 또한 ‘제멋대로의 소비주의를 합리화하는’ 지적인 수동성과도 같은 것이 아니며 매스컴이 이끄는 대로 아무런 성찰 없이 따라가는 눈먼 동조주의와도 같지 않다고 했다.15)

80년대가 되면서 나이 40줄에 들어선 글래스맨 선사가 구겨진 옷과 반백의 수염을 기른 채 1주일씩 ‘길거리 참선(street retreat)’을 이끌고 있는 모습이 자주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일까? 자기가 도우려는 사람을 제대로 도우려면 그 사람과 같은 생활을 하며 그 고통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행위를 ‘그대로 보기(bearing witness)’라고 부른다. 이 세상의 고통을 직접 보고 증언하겠다는 것이다. 뉴욕 용커스의 황폐한 동네에 살고 있는 빈민들을 돕기 위해 이익을 내는 사업과 비영리단체를 고루 갖춘 ‘그레이스톤 만달라’를 세운 그는 뉴딜정책을 기획한 자유주의자와 60년대의 혁신주의자들만이 꿀 수 있었던 꿈, 즉 인간 계발과 사회 변화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가 사람들을 대하고 다르마를 전하는 방식은 너무나 미국적이다. 스님들에게 으레 갖추는 예의도 거부하고 그는 자신을 그냥 버니(Bernie, 그의 이름 ‘버나드’의 애칭)라고 부르기를 원한다. 강연을 할 때는 장난기가 가득하고 유머감각 또한 풍부하다. 97년 1월 거창한 타이틀을 여러 개 나열하며 그를 열띠게 소개하는 사회자와 너무나 대조적으로 그는 강연을 이렇게 시작했다. “제 이름은 버니입니다. 그리고 저는 중독자예요. 저 자신에게 중독된 거죠. 이 방에 계신 모든 분들이 아마 같은 증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40년쯤 전에 저는 선(禪)이라는 회복 프로그램을 만났어요. 그렇지만 몇 년이 지난 후 저는 알게 되었어요. 저의 중독증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은사 스님들에게서 철저히 교육받은 화두선(話頭禪)과 사회운동과 봉사에서 오는 혜택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연관된 것이라고 말한다. “화두를 참구할 때는 내 자신이 그 상황이 된다. 그리고 답은 ‘말로서가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로서’ 제시한다.

ZPO가 하는 일은 사회가 돌보지 않는 상황으로 들어가서 그 상황을 ‘화두’로 삼고 일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관념은 모두 버리고 미지의 것을 꿰뚫어서 그대로 보는 것이다.” 글래스맨에게 있어 ‘그대로 보기’는 좌선을 그 나름으로 해석, 실천하는 것이며 ‘삶의 전일성’에 마음을 여는 것이며, 자연발생적으로 ‘나와 남을 치유하려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이며,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글래스맨 선사는 현대인에게 가장 심각한 병이 ‘아귀’의 문제라고 본다. 그가 말하는 아귀는 단지 식욕으로만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명예가 부족해서, 권력이 모자라서, 재산이 고파서, 사랑에 목말라서 이들은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배고픈 아귀가 되었다.

더욱 슬픈 것은 불교도를 비롯한 구도자들이 깨달음을 쫓는 아귀가 되었다는 것이다.16) 무서운 의지와 열성으로 공부를 하던 그는 계속 정진했더라면 한소식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 그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부딪쳐서 불교를 삶과 사회에 실천했던 그는 말한다. 좌선만이 길은 아니라고. “깨달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 좌선만이 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좌선을 아무리 해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반면 좌선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어도 그 마음과 행이 이미 깨달은 사람이 있다.”

9. 니폰잔 묘호지(日本山 妙法寺)와 후지 니치다쓰 스님

부처님은 80세에 입적하실 때까지 맨발로 걸어다니면서 가르침을 피셨다. 제트기와 우주선 시대에 그렇게 이 땅을 두발로 걸어다니면서 불법을 펴는 단체가 니폰잔 묘호지이다. ‘평화의 행보(peace walk)’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지금까지 고통받은 사람들이 걸은 길을 따라 걸은 길이를 합친다면 천문학적 수치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불법을 전하는 단체 중에 인디언의 고통과 흑인들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들과 협력을 하는 것이 바로 니폰잔 묘호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간디의 비폭력에 근거한 문명 사회를 건설하자는 취지로 니폰잔 묘호지를 설립한 사람이 바로 후지 니치다쓰 스님이다. 1885년 일본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임제종의 스님이 되었다가 후에 일련종으로 바꾼 후지 스님을 제자와 주변 사람들은 ‘구루지’라 부른다. 스님에게 구루지(‘영적 스승’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준 것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후지 스님은 1931년에서 38년까지 인도를 두루 여행하다가 간디의 와르다 아쉬람에 머무르게 된다. 거기서 스님은 간디에게 ‘나무묘호렝게교’를 염송하며 기도하는 것을 전했고 간디는 스님에게 비폭력 저항 정신을 심어준다.

1938년 일본으로 돌아와 열심히 활동하던 후지 스님은 1945년 세수 60세 되던 해 히로시마에 있었고 거기서 원자폭탄의 피해를 생생히 목격하게 된다. 이후 100세로 입적할 때까지 그는 핵무기 사용 근절, 평화의 탑 건립에 생을 바친다. 오늘날 전 세계에 약 80개의 니폰잔 묘호지의 평화탑이 있다. 흰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콘크리트 탑 안에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물이 내장되어 있고 그 주변에는 일본식 정원이 놓여져 있다. 그 탑은 마치 종교와 믿음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성스러움이 기도로 표현되어 솟아난 것과 같이 보인다고 한다.

부처님이 입적하신 후 한동안 사원 건립은 없었고 대신 탑을 세우고 그를 부처님 보듯 하던 초기불교 시대의 마음을 니폰잔 묘호지는 평화탑을 건립하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968년 83세의 나이로 스님은 미국에 왔다. 그리고 74년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반대하는 의미로 수도 워싱턴에 니폰잔 묘호지 미국 최초의 사원을 세운다. 1978년 미국 인디언이 조직한 평화의 행보를 후원하기 위해 스님은 종단의 스님들을 파견한다. 그 행보의 이름은 ‘최장의 행보: 알카트레즈에서 워싱턴 DC까지’였다. 그리고 이 협력관계가 자라나 제2의 평화탑은 인디언들의 후원과 축복 속에 건립되었다.

후지 스님은 평화를 구하는 니포잔 묘호지가 감사한 마음과 기도로 일상생활을 하는 인디언들과 굳은 결속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니폰잔 묘호지는 반핵시위, 평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비폭력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고, 자칫 격렬해질 수도 있는 운동에 깊은 정신적 힘과 고요함을 보태주었다. 후지 스님은 1984년 매서츠세츠 주 서부의 레버렛이라는 도시에 35에이커의 땅을 기증받았다. 1982년 니폰잔 묘호지와 함께 세계평화행진을 했던 한 젊은 사람이 보시한 것이다.

이곳에 전세계 수많은 종파와 계층이 1년 반 동안 두루 참여해 완성을 본 것이 미국 최초의 평화탑 건설이었다. 일본 스님들, 서양 스님들, 뉴에이지 추종자들, 그리스도교도와 유태인들, 페미니스트와 히피, 레스비언과 게이들이 와서는 힘 닿는 대 로 도와주다 갔기 때문에 작업 담당조는 언제나 그 숫자와 구성원이 변했다. 진정 이렇게 다양한 계층과 인종과 종파의 사람들이 합심해 평화를 원하는 마음으로 건설했기에 이 평화탑이 의미하는 바는 진실로 크다 하겠다. 그 탑의 제막식에는 3,000명의 인파가 몰렸다. 1997년 니폰잔 묘호지는 해리엣 터브맨(Harriet Tubman)의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를 따라 걷는 평화의 행보를 했다.

그 행보의 의미는 노예라는 족쇄를 차고 미국에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다. 동시에 미래 세대에게 노예제도의 잔인함을 알리고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 미국 흑인의 역사에서 해리엣 터브맨이라는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자못 크다. 남부의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 길은 오직 북으로 탈출하는 것이었고 이는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이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비밀의 거점이 확보되었고 이 거점을 ‘기차역(station)’, 이 거점에서 활동한 3,000명의 비밀조직원을 ‘기차 차장(conductor)’이라 불렀으며, 이 비밀의 탈출로를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 불렀다. ‘남북전쟁의 모세’라고 불리는 터브맨은 노예로 태어났지만 북으로 탈출했고, 그리고는 자신의 안위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노예들에게 자유를 안겨주기 위해 수없이 여러 번 남부로 돌아갔다.

그렇게 지하철도라고 불리던 비밀 탈출로에서 노예 구출하는 일에 맹활약을 하다 1913년 사망하였다. 지하철도를 통해 피신한 흑인은 1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세계 평화를 위해 100세로 입적할 때까지 정진했던 후지 스님은 어떤 문명을 건설하고 싶어 했을까? “문명은 전기가 들어온다거나 비행기를 탄다거나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을 죽이고 사물을 파괴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명이란 바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10. 앙굴리마라의 후예들을 불법으로 이끄는 조동종의 스님들

1) 미국 정토종의 후지모토 스님

1898년 캘리포니아에 세운 정토종의 사원들은 일본 이민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1942년 일본과 미국이 적국이 되자 11만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준감옥에 해당하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44년 12월에 풀려난다. 이러한 진흙과 같은 현실에서 샌프란시스코에 본원을 둔 미국 불교원(Buddhist Churches of America, BCA)의 후지모토 호겐 스님이 연꽃을 피운다. 그는 사무실에서 홀로 전국 수백 명의 수감자와 서신을 주고 받고, 이들이 출옥한 후에는 정신적 힘이 되어 주는가 하면 직장을 구하는 것도 도왔다.

1967년 텍사스에 수감되어 있던 프레드 크루즈(Fred A. Cruz)는 후지모토 스님에게 불교에 대해 알고 싶다는 편지를 쓴다. 아미타 부처님과 서방정토에 관한 정보를 받고 그는 너무나 기뻤지만 그 때문에 하루에 빵 두 쪽만 주는 깜깜한 독방에 들어갔다 나갔다 몇 개월을 반복하게 된다. 그는 화장실 휴지에 쓴 글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6년 후 대법원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 인해 감옥에서 불법을 자유롭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

2) 영국의 앙굴리마라

영국에서는 아잔 케마다모가 수년간 감옥을 방문하여 불법을 전하다가 1984년 ‘앙굴리마라’를 설립하였다. 앙굴리마라는 영국을 방문하는 불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고 미국에서도 이를 모델로 해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들은 방문할 법사들을 모집하여 교육시키고 자문을 맡고 있다. 또한 출옥 후에도 계속 보살펴 주면서 자문 역할을 한다. 현재 55명의 법사가 100개 감옥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자원방문자 교육도 하고 감옥 내에 불당을 설치하기도 하며 통신을 통한 불교교육과 테이프를 대여하는 일도 한다.

3) 미국의 연꽃 선방

미국 뉴욕주 그린해븐에는 중형자 수감소가 있다. 이곳의 수감자가 인근의 선산(禪山) 승원(Zen Mountain Monastery)의 루리 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리 원장은 감옥을 방문하고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좌선을 하려 하였으나 불교는 쿵푸 같은 무술이라고 알고 있던 교도소측으로부터 거절당하였다. 수감자는 이를 뉴욕법원에 호소했고 1년 후 판결에서 ‘불교는 뉴욕 주 감옥 내에서 인정받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감옥에 연꽃선방(Lotus Flower Zendo)이 생겼다. 이런 인연으로 선산 승원은 뉴욕 주에 있는 모든 감옥들에 대해 불교 수행 그룹을 만들고 불교에 관한 한 모든 자문역을 맡게 되었다. 연꽃 선방 회원 두 명이 출옥 후 선산 승원으로 들어가 1년을 지냈던 것은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출옥 후 관리의 좋은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4) 미국의 불교평화우의회

수감자 프로젝트 불교평화우의회(Buddhist Peace Fellowship, BPF)는 전세계에서 불교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가장 적합한 곳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단체이다. 이곳의 분과인 수감자 프로젝트의 사명선언서(mission statement)는 그 요지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오직 한 가지를 가르치셨다. 바로 자유이다. 우리의 사명은 수감자와 그들의 가족과 다른 신앙단체와 일반대중과 협력하여 수감시설 안에 체제적으로 존재하는 폭력을 해결하고, 봉사, 교육, 단체조직을 통해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이다.”17) BPF의 계간지 〈돌아가는 법륜(Turning Wheel)〉은 수감자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이곳에서는 감옥 자원 봉사자에게 도움이 되는 기사와 정보도 자주 나온다. BPF는 명상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감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한 달에 한번 샌프란시스코 선센터에 모이게 해서 재충전을 하도록 한다.

11.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의 스님들

1) 숭산 스님과 관음종 72년 46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가신 숭산 스님은 이미 떠나기 전에 미국의 청년들에게 불교를 전파해야겠다는 확실한 포교대상을 잡은 것 같다. 미국 젊은이들이 몰두해 있던 히피운동을 듣고 불교 전파 가능성을 본 스님은 미국에 도착한 후 초심으로 돌아가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근처에 방을 얻고 세탁소에 들어가 일하면서 영어를 배우고 포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근처 브라운 대학에서 동양문명사를 가르치는 리오 프루덴(Leo Pruden) 교수가 세탁소에 손님으로 왔다가 스님을 알아보게 되어, 그때부터 학생층과 접하게 된다. 숭산 스님이 이민자들을 위한 ‘수하물 불교’ 차원을 넘어서 미국 사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초심을 가지기 쉬운 학생들을 먼저 불자로 만들고 그를 바탕으로 선원을 구성한 후에 한국 이민자들이 그 선원에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숭산 스님은 국제적으로 많은 추종자를 가진 다른 스님들에 비해 영어가 그리 유창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마음 공부라고 했고 선은 이심전심으로 전한다 했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얼굴로 보여주는 본래 마음과 그 마음을 강하게 전달하는 주장자와 할이 있으므로 문법과 어순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어 나열 영어’ 만으로도 스님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고 울리며 칠 수 있었다. 스님의 법회를 하버드에서 처음 본 김용옥 교수는 그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제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케임브리지 선원 한구석에 앉아 숭산의 법문을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 버렸다. …… 그의 얼굴에는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었고 ……그의 법문은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말들은 주어, 동사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 들어갔으니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와 원초적 마력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이라는 책을 펴내 ‘모른다는 것’은 숭산 스님만의 법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은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동서양에 다 존재하던 것이다. 이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과도 멀지 않고, 유태교 신비주의와 수피 신비주의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도 설파한 것이며, 미국 인디언의 믿음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드리밍(Dreaming) 창조신화에도 보이는 것이다. 동시에 서양 불교사회에서는 스즈키 순류 선사도 이를 주창하였고, 버나드 글래스맨 선사 또한 젠 피스메이커 오더(ZPO)의 제1교의로 강조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숭산 스님의 ‘모른다’와 ‘그냥 하라(Just do it)’는 현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그냥’이라는 말은 현대 미국에서 각광을 받는 말인 것 같다. 나이키 회사의 광고에서도 ‘그냥 하라(Just do it)’를 오랫동안 사용했고, 또 낸시 레이건은 마약퇴치 운동을 이끌면서 마약을 권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노’하라(Just say no)”고 말하여 국민의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현대를 왜 미니멀리즘(minimalism, 단순주의, 최소화주의)의 시대라고 하는가? 너무 복잡해진 사고와 사회에 사람들이 지쳐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런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할까(What if?)’라고 늘 생기지도 않은 일을 미리 분석하는 현대인에게 숭산 스님은 그 생각을 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모른다고 할 때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하면 된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자연발생적이고 즉발적으로 지혜도 나온다는 것이다.

반면 늘 생각하고 분석하는 마음에는 지혜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는 배움과 지식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마음 자세를 설명하는 말일 뿐이다. 그렇게 모른다는 마음으로 초심으로 돌아가서 온 마음을 다해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이전에 배우고 습득하여 내 안에 있던 것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과 창조적인 방식으로 쓰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예술가들이 불교 애호가 내지는 수행자가 되었다. 선을 응용하여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농구와 골프까지 마음의 평정과 창조력이 필요한 것이면 다 그에 대한 저서와 수련 프로그램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숭산 스님은 또 서양에서 스님처럼 불교를 보급하는 사람들과 서로 협조하며 연대관계를 잘 이루었다. 아잔 차의 책 《고요한 숲의 물(Still Forest Pool)》에 스님이 서문을 썼고 트룽파 린포체의 부도를 세울 때는 그 위치를 잡아주었다. 또 출판활동도 활발하여 《부처님 머리에 재를 털면(Dropping Ashes on the Buddha)》은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18,000위대, 《선의 컴퍼스(Compass of Zen)》는 22,000위대,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은 43,000위대에 있다. 불교계에도 달라이 라마의 《행복의 기술(The Art of Happiness)》 같은 것이 415위까지 오르긴 했지만 그만하면 숭산 스님의 책은 불교서적으로서 대중에게 많이 읽힌 책으로 손꼽힐 수 있다. 진 스미스의 《365일 선(365 Zen: daily reading)》은 현대의 선불교 선사들이 펴낸 책 중에서 에센스를 골라 매일 한 가지씩 읽고 음미할 수 있도록 엮은 책인데, 총 365편의 글 중에서 숭산 스님이 하신 말씀이 18편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다른 한국 선사들의 일화와 법문도 수록되어 있는데 경허 스님 2편, 원효 스님 2편, 서산 대사 2편, 무학 대사 1편, 지눌 대사 1편이 들어 있다. 이 책이 대중의 호응을 꽤 많이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영어권에 한국 불교가 크게 소개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18) 숭산 스님은 1972년 미국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관음종을 설립하고 32개 나라에 130개가 넘는 포교센터를 세웠다. 미국에는 50여 개의 선원이 있는데 미국 동부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프로비던스 선원(Providence Zen Center)을 비롯하여 공문(空門) 선원(Empty Gate Zen Center), 모하비사막 선원(Mojave Desert Zen Center) 등이 있다. 체코에도 프라하와 클라드노 시에 관음회가 결성되어 있다. 폴란드의 바르샤바에도 80년 이후로 관음회가 있다.

또한 숭산 스님이 하신 것은 아니지만 헝가리의 평화사(寺), 폴란드의 조계선 불교회 등은 다 한국의 조계종 스님들이 설립한 것이다.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관음회가 네 곳이 있다. 또한 관음종에서는 프라이머리 포인트 출판사(Primary Point Press)를 설립했다. 지금까지 스님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아 법을 물려받은 이는 7명이며 모두 외국인이다. 엘리트 불교가 주류를 이룬다는 미국답게 모두가 명문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사회운동 내지는 삶의 근본적인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다.

숭산 스님 역시 다른 국제적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를 인정, 포용하고 공존, 공조를 추구한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나 불교나 다 본체로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공부이다. 본체로 돌아가면 대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고 그러면 아랫배에 센터가 생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게 다 진리 아닌 게 없게 된다. 진리를 깨달아 대자연과 하나 되는 공부, 그것을 수도라고도 하고 신앙이라고도 한다.” 무엇을 하든 그저 모른다는 마음으로 일심으로 하면 된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정말 파격적이다.

“불경을 독송하든 성경을 독송하든 아니면 ‘코카콜라’를 되풀이 읊조리든 다 괜찮아. 그 마음이 중요하니까.” 수도의 목적은 보살행이요 봉사이며, 2000년대를 맞아 종교가 해야 할 일은 인간성 회복이라고 말씀하는 숭산 스님. 미국인들은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쉽고, 단순하고, 너무나 재미있으며 배꼽 잡게 웃기지만 동시에 정곡을 찌르며, 가식을 벗기며, 마음을 잠근 빗장을 부수어 버리는 꿰뚫는 지혜가 있어 좋다고 한다.

2) 삼우 스님과 자혜 선원

시카고에서 14만부를 발행하는 주간지 시카고 리더(Chicago Reader)는 99년 1월 15일 삼우스님을 소개하며 그 헤드라인에 “망치를 들면 하고자 하는 일이 사방에 알려진다.(Have Hammer, Will Travel)”라고 썼다.19)

1967년 미국으로 건너간 삼우 스님은 스님도 징병을 한다는 바람에 속인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갔고 거기서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독립군이 되어 만주로 가고 어머니는 4남매와 식당일, 밭일을 하며 힘들게 살다가 몸과 마음을 너무 혹사하여 거의 미친 상태가 되어 돌아가셨고 스님은 고아가 되었다.

67년 뉴욕에 도착하여 맨하탄에 방 1개짜리 아파트를 얻고 UPS에서 일하며 탁발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1년 후 비자가 만기가 되자 캐나다의 몬트리올로 가서 4년간 살고 다시 토론토로 가서 토론토 대학 근처에 방을 얻고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스님의 미국에서의 포교생활은 이때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73년부터 그의 지하실 방에는 참선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76년에는 15명의 제자가 생겨, 이들과 함께 다 쓰러져 가는 집을 인수해 보수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스님에게는 망치가 신심의 도구가 되고 아무리 피곤해도 몸으로 행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보수한 집이 79년 완공되었다. 81년에는 미국 미시건 주 앤아버에 자혜 선원(Buddhist Soceity for Compassionate Wisdom)을 설립하여 현재는 메일링 리스트가 5,000명으로 늘었고 하주(Linda Murray) 스님이 선원장으로 있다. 91년에는 시카고에 선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도 선원(Centro Zen Budista)을 설립했다.

그리고 86년 시카고에 미륵승가대학(Mait-reya Buddhist Seminary)을 설립하여 불법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는 데 일조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하며 배울 수도 있고 외부에서 다닐 수도 있으며 과정은 3년이다. 또 불교 종단 내부와 다른 종교와의 교류 협력을 위해 86년 최초의 선불교 교사진의 모임인 ‘북미의 선불교(Zen Buddhism in North America)’를 주관했고, 87년에는 ‘북미 세계 종교회의’를 8일간 개최했다. 스님은 100불짜리 인쇄기를 사놓고 뉴스레터도 만들었고 계간지 〈교차로의 불교(Buddhism at the Crossroads)〉도 발행한다. 삼우 스님의 제자 중 파랑 스님은 ‘게리 라킨(Geri Larkin)’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비구니이다. 이미 《깨달음과의 우연한 조우(Stumbling into Enlightenment)》와 《선의 탭댄스(Tap Dance in Zen)》를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고 요즈음은 정명(正命)의 원리로 경영하는 기업에 관해 자문도 하고 강연도 하고 있다.

파랑 스님은 원래 연봉 10만불을 넘게 받는 기업 자문가였다. 그러다가 눈에 경련이 와서 잘 낫지 않자 주치의가 명상을 해보라고 권유하여 시작한 것이 삼우 스님과의 인연이 되었고 후에 비구니계까지 받게 된 것이다. 98년 4월 미시건 대학에서 MBA 학생들에게 파랑스님은 정명 기업에 대해 강연을 하였다.20) “정명 기업은 벤처 기업과 반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고속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벤처와는 달리 정명 기업은 자연스러운 성장을 원합니다. 더하여 정명 기업은 부처님의 계를 지키고 균형을 중시합니다.” 〈보더스 닷컴(Border.com)〉이라는 온라인 잡지에서 크리스틴 캐리그넌과 한 인터뷰를 보면 스님은 한국에 순례를 갔고, 승복 한 벌로 30일을 버텨야 했던 이야기며 산속의 스님들이 너무나 자애롭게 맞아주었다는 얘기, 그리고 80대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산속에 살다가 목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 가서 데모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한 할머니는 파랑스님에게 일본군이 빼앗아간 내 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얘기도 했다. 스님의 한국 순례기가 책으로 되어 나올 날을 기대해본다.

12. 맺는 글

서양에서 불교가 놀랍게 발전을 하고는 있지만 아시아의 오랜 역사와 승가에 비하면 이제 초기단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늘 그래왔듯이 서양이라는 새로운 곳에서 그곳의 풍토와 문화에 맞게 변신하면서도 본질은 그대로 지니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리라 본다. 1890년대에 미국에 불교붐이 불었다가 불과 20∼30년 만에 사라진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불교가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미국 인디애나 대학의 종교학 교수이며 94년 해인사에서 열린 전자경전 추진회의에도 참석한 바 있는 잰 내티어(Jan Nattier)는 불교도 1위 국가인 미국불교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개인 차원이 아닌 가족 차원의 수행으로 발전해야 하며 사회 체제 안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자기들 수행만이 옳고 다른 그룹이 하는 것은 옳지 않거나 진정한 불교가 아니라고 무시하거나 낮추어보는 태도를 시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같은 승원이나 선센터 안에서도 아시아계 불자와 백인 불자들은 서로가 섞이거나 공감하는 바가 없는 병렬 구조(parallel congregations)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내티어 교수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21) “첫째 엘리트 불교층, 백인 불교도의 수행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불교가 가족과 사회 안에 탄탄히 유기적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수하물 불교에서 그 강점을 배워야 한다.

둘째 튼튼한 구조가 체제를 받쳐준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견디려면 구조의 건강함이 필수이며 그런 면에서 포교 불교(SGI처럼 적극적으로 포교하는 불교)의 강점을 배워야 한다. 셋째 다양한 인종, 계층, 문화가 섞여 있어야 탄탄한 집단이 되므로 엘리트 불교층처럼 단일문화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입맛에 맞는 스승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비교해보는 구루 쇼핑(guru shopping)은 소비자 지상주의와 서비스 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그 또한 익숙한 일이므로 각 수행단체와 스승들은 이를 나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것을 오픈해 놓고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도 필요하리라 본다.

누구나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 번에 찾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실수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해주고 ‘다른 선택을 할 자유’도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깨달음(enlightenment)이라는 말은 이미 18세기에 서양에서 ‘계몽주의’라는 말로 한 시대를 구분지었던 말이다. 그 깨달음을 삶에서 구현하려는 열풍이 이제 20세기 후반에 다시 강렬히 일어나 21세기로 넘어간 지금 깨달음이 진정 가족과 사회와 민중의 차원에서 전세계에 정립되기를 바라며 지면관계상 중요한 수행단체를 제대로 다 소개하지 못했음을 양해바라며 글을 맺는다.쭦

1) Martin Baumann, “The Dharma Has Come West: A Survey of Recent Studies and Sources” Journal of Buddhist Ethics 10, no. 1 (1995), pp.55∼70. 2) Martin Baumann, “A Survey of Recent Studies and Sources” 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 4 (1997), pp.194∼211. 3) Henry C. Finney, “American Zen’s ‘Japan Connection’: A Critical Case Study of Zen Buddhism’s Diffusion to the West,” Sociological Analysis 52, no.4 (1991), pp.379∼396. 4) Dalai Lama, The Path to Enlightenment (Snowlion Publications, 1992) 5) Amy Uyematsu, “Tea for Thich Nhat Hanh” in Gary Gach ed. What Book!? (Parallax Press, 1998) 6) 틱냑한 외 지음, 《조화의 여섯 가지 원칙, 육화법》(애너벨 레이티, 양문출판사, 2000), p.254. “이 세상은 나의 사랑이며 또한 나다.” 7) Patricia Hunt-Perry and Lyn Fine: “All Buddhism is Engaged: Thich Nhat Hanh and the Order of Interbeing” in the Engaged Buddhism in the West, edited by Christopher S. Queen (Wisdom Publications, 2000), p.36. 8) Therese Fitzgerald, “Four Springs in Asia,” The Mindfulness Bell 14 (autumn 1995), pp.24∼25. 9) Wes Nisker & Terry Vandiver, The Happy Monk: Living Buddhism in the West, Inquiring Mind, Volume 12, Number 1 (Fall 1995). 10) Sangharakshita, New Currents in Western Buddhism (Glasgow: Windhorse, 1990) 11) Ken Jones, The Social Face of Buddhism: An Approach to Political and Social Activism (London: Wisdom Publications, 1989), p.213. 12) Laura Shinko Kwong, “NO DISTINCTION, NO DIFFERENCE: Shambhala and Sonoma Mountain Communities Share the Path”(Shambhala Sun May, 1994). 13) Pema Chodron, When Things Fall Apart: Heart Advice for Difficult Times (Shambhala Publications, Inc. 1997) 14) Christopher S. Queen and Sallie B. King, eds., Engaged Buddhism: Buddhist Liberation Movements in Asia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3), p.23. 15) Stephen Batchelor, Buddhism Without Beliefs: A Contemporary Guide to Awakening (Riverhead Books, 1997), pp.17∼18. 16) Bernard Glassman & Rick Fields, Instrutions to the Cook: A Zen Master’s Lessons in Living a Life That Matters (Bell Tower, 1996), p.12. 17) Turning Wheel: Journal of the Buddhist Peace Fellowship (Winter, 1999). 18) Jean Smith ed, 365 Zen: daily reading (HarperCollins, 1999) 19) Sridhar Pappu, “Have Hammer, Will Travel” Chicago Reader, Jan. 15, 1999. 20) Jeanine Fukuda, Zen Buddhist and savvy businesswoman: Geri Larkin, giving the UMBS a lively and entertaining presentation. Monroe Street Journal Online, Vol. 50, Issue 24. 21) Jan Nattier, “Buddhism Comes To Main Street”, The Wilson Quarterly, Spring, 1997. /

진우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Texas A&M University에서 평생교육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불교문화센터와 신구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인터넷 불교대학(www.Buddhistweb.com)의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역서로 《이 세상은 나의 사랑이며 또한 나다》와 《일곱 봉지 속의 지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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