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獵奇) 문화의 한 읽기

1. 저속한 유물론-엽기(獵奇), 맥락과 징후

처음엔 일종의 열광과도 같다. 그리고 흐르거나 머물며 마침내 범람한다. 몇 개의 기표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테면 ‘엽기(獵奇)’가 그러하다. ‘괴이쩍은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사전상의 일들. 우리는 이 술어(術語)의 라틴어적 혹은 희랍적 기원도, 예술학사전 상의 용례도 알지 못한다. 그로테스크, 고딕, 추(醜), 악, 위반, 디오니소스 등등이 이 범주를 포위하거나 흡입하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범람 지역 모두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지상 최고의 용례를 자랑하는 대한화(大漢和)사전은 이 말의 고전적 용례가 결코 중국식이 아님을 그 용례의 ‘없음’을 통해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일본 문예물과 국어사전의 틀림없는 한 표제를 이루는 엽기(獵奇)라는 말, 그리고 그 한 범주로서의 엽기소설(獵奇小說)·엽기가(獵奇家)의 존재는 무엇일까.

아마, 거의 틀림없이 《오트란토 성》에서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는 고딕 소설에 대한 번역 과정에서 생성되었고, 일본식 데카당과 자연주의를 거쳐 일본 하위 문화의 가장 유력한 전위로 자리잡았을 이 범주의 비가역성(非可逆性)은 그러니까, 이 범주를 기원(concept)이 아니라 맥락(contexts)과 징후(symptoms)로 파악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의 주제는 표제어보다는 용례를, 사전보다는 사례집을 필요로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엽기성의 세계는 타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든 하위문화적 뒤섞임이 그러하듯이 엽기성은 ‘이다’가 아니라 ‘∼이 아니다’라는 술어를 통해 무엇에 대한-주로 정통적인 것, 진정한 것(authenticity)에 대한 위반으로서만 범주화되곤 했다.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18세기 고딕 소설의 전범들과 20세기의 흡혈 판타지 양식들이 이들 사이의 엄청난 의미 결락(缺落)에도 불구하고 늘 저속한 모더니즘(vulgar modernism), 모더니즘 문명의 타자들로 뒤섞여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문제는 기원이 아니라 맥락이다. 문학이나 영화, 인터넷, 만화 할 것 없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넘쳐흐르고 있는 이 문화적인 현상은 이미 말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버린 지 오래이며, 오히려 어떤 때는 놀랄 만큼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단순히 ‘특이한 것’이라는 뜻으로 통하기도 한다.

그것은 흔히 공포가 아니라 무언가의 과잉 혹은 초과(excess)를 지시한다. 예컨대 통신 소설을 거쳐 출판과 영화로 넘쳐버린 이 문화의 한 대표 주자―《엽기적인 그녀》는 ‘무서운 그녀’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머러스한 비표준형 애인의 기이한 행동들을 이야기한다. 배설과 기행(奇行)으로 이름난 한 토끼의 재치를 표현한 ‘마시마로의 숲 이야기’(김재인 그림, 일명 ‘엽기토끼’)라는 동영상은 지금까지도 인터넷 웃음 시장의 믿음직한 총아이다.

우리의 사례집은 두껍기 이를 데 없고, 대부분의 경우 어쨌든 이야기는 공포와 즐김의 뒤섞임을 지시하고 있다. 백민석의 소설 《목화밭 엽기전》, 김언희의 시집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같은 경우는 어떤가. 이 시집에서 시인 자신은 서문을 통해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구토, 오한, 발열, 흥분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는 자서(自序)를 붙이고 있다. 생의 찌꺼기, 미국 하위 문화의 가장 문제적인 장르인 스너프 필림은, 벨기에의 한 아동의 실종과 발견과정을 통해서 전유럽이 들끓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 멀리 나간 병적 징후/미디어의 신화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 이 아시아의 한 변방 소설가는 바로 그러한 사건으로 한국 문화의 세계성을 증거하기에 이른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이나, 〈야생동물보호구역〉을 거론한다고 해서 우리의 사례집이 너무 광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낚시 바늘에 꿰어진 입과 음부. 연쇄살인이라면 장윤현 감독의 〈텔 미 썸딩〉도 그럭저럭 잘 해낸 적이 있다. 한편 만화라는 장르의 하위문화적 근성은 곧잘 이 분야의 왕좌가 누구의 것인지를 알게 한다. 실상 유머와 과장의 수사가 지배하는 만화의 기기묘묘한 이미지들은 어떻게 보면 엽기라는 말의 현재적인 쓰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끔찍하거나 끔찍히 웃기거나. 남의 얼굴을 훔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토 준지의 《얼굴 도둑》 같은 진지한 엽기물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Let’s Go! 이나중 탁구부》(미노루 후루야)나 《멋지다 마사루》(쿄슈케 우슈다)와 같은 급진적인 유머들에 ‘엽기’라는 수식이 붙기도 한다. 인간 신체에 대한 위해(危害)나 배설 행위는 퇴행의 웃음을 거쳐 ‘엽기’로 명명된다. 열광은 그 사이사이 마다에서 폭발한다. 가치 판단이 정지된 상황에서 만나는 초현실적인 폭력 및 성묘사는 흔히 범법이 아니라 기호(嗜好)로 간주된다.

〈에이리언〉의 시각 효과의 근원이 된 H. R. 기거의 공포와 〈사우스 파크〉(트레이 파커 & 멧 스톤)의 요절복통할 욕지거리 살육전은 이 순간 별반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사례집 속의 두 일화들일 뿐인 것이다. 〈사우스 파크〉. 399번의 욕설, 128번의 무례한 행위, 221번의 폭력행위가 범람하는데, 그 주인공은 초등학생이고 그 결과는 탈선이 아니라 희극이다. 방귀에 붙은 불로 타죽는 케니의 온갖 죽음의 양상들.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의 ‘Come to Daddy’ 뮤직 비디오에 등장하는 소녀의 몸을 보면서 한 폭력광의 괴기스런 얼굴(아티스트 자신)은 놀랍게도 웃음 짓고 있다.

“너에게 피 흘리는 나를 선물할게, 고마워, 고마워, 너에게 피 흘리는 새를 선물할게, 너에게 피 흘리는 나를 선물할게.”라는 보컬이 끝도 없이 척척 감겨드는 자우림의 ‘새’는 또 어떤가. 이 불균질성과 무국적성을 우리는 균질적으로 즐기며 그러한 난삽함과 뒤섞임을 범주화하는 용어가 바로 엽기이다. 우리의 입구를 지나치게 잡학한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반복되는 이 주제의 전제들을 나열해 보면 어떨까. 왜 엽기인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을 엽기로 알게 하는가. 흔히 이야기되는 맥락은 대략 대여섯 가지 정도인 것 같다.

제도, 사회, 전통, 정치, 경제, 테크놀로지상의 전이들. 첫째 우선 제도적인 변화 요인이 꼽히는바, 사전 심의의 위헌 결정에 따른 제도적 변화가 흔히 이야기되고 있다. 작품을 도륙하던 가위가 도륙하는 작품을 낳았다. 억압되었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귀환했고 마침내 넘쳤다. 둘째, 엽기보다 더 엽기적인 현실의 일상화라는 사회적 요인이 지적된다. 극단의 이미지를 육박 혹은 초과해버린 현실은 더한 극단에의 탐식증을 낳았다. 셋째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동아시아적 신체 숭모(崇慕)가 엷어지면서 신체 상해에 대한 거부감이 약화된 것도 엽기적 효과들을 하나의 스타일로 여기게 된 미학적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다.

사실상 하위 문화의 독특한 문화코드를 이루는 피어싱(piercing)은 이 순간 성형 수술과 같은 취급을 받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넷째, 흔히 이야기되는 거대 서사의 위축에 따른 감각 문화의 진군과 그에 개입된 정치적 요인 또한 엽기성의 중요한 바탕으로 지적되곤 한다. 감각의 총아는 이미지이고 그것은 늘 직접성을 꿈꾼다. 감각은 식물성이 아니라, 동물성의 극단화된 형태에서 직접성을 획득했고, 관념 사회는 이미지 중심의 감각 사회로 급격히 이동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범람에서 폭발로 전이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선정주의를 돈으로 바꾸는 문화산업의 팽창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좀 일반적이고 정태적인 현상 분석처럼 보이는 위의 다섯 가지 전제에 덧붙여, 디지털이라는 변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엽기의 문화적 에너지를 재생산하고 폭발시킨 가장 강력한 동인으로서의 사이버 혹은 디지털 문화의 개입. 디지털 사회가 초래한 기술적 역설에 있어서 인간 육체에 대한 사이버 세계의 병적 집착은 악명 높은 것이다.

딱딱한 질료, 화려한 화면은 자신의 무기성(無機性)을 보충해줄 말랑말랑하고 일관된 색상의 인간 육체를 끊임없이 탐해 왔고, 점점 더 강력하게 그것을 빨아들이려 했다. 엽기라는 기표의 넘침이 발생한 지점을 적시해보면 사이버 공간일 터인데, 이 공간의 비물질성(非物質性)에 대한 하나의 위반이 육체가 지닌 물질성에 대한 지독한 탐닉이었던 것이다. 무기물의 세계에 대한 유기적 감수성은 위반이면서 때때로 대안처럼 보였다. 디지털 가상(假像)의 가장 먼 곳에 몸이 있었고, 디지털의 탐식증은 마침내 육체를 재영토화하기에 이른다.

물질 밖으로 튕겨 나가는 문화―사이버 공간을 중심으로 역설적으로 희구되고 획득되는 삶의 선연한 실체성, 날 것들의 비린내. 서구적 합리성에는 몸은 정신이 명령하면 움직이는 도구 혹은 연장이라는 전제가 은연중에 깔려 있다. 몸 그대로의 몸은 그래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흔히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고딕 소설은 펄프로 추방되곤 했다. 오늘의 엽기적 작품들에는 신체(body)가 정신과의 관계에서 종속적·타자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전제돼 있으며, 육체(flesh)를 하나의 물질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게 배어 있다. 신체는 무엇보다 살과 피와 뼈로 되어 있는 ‘몸뚱이’가 되었고, 육체 정치학의 무정부주의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신들의 살과 피와 뼈를 통해서만 자신들을 구별짓고, ‘실체’를 확인하고, ‘살아 있음’을 느끼는 표면 위의 불안. 저속한 유물론. 하지만 이 모두가 그저 표면의 맥락이자 징후일 뿐이다. 어쨌든 약간은 범박한 대로 유기적 감수성, 해방된 육체의 정치학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엽기적 상상력은 지금 이곳의 문화적 욕구를 담아내면서 억압에 대한 반문명적 충격효과를 거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가 점점 더 비유기적인 확장을 거듭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텔레커뮤니케이션(핸드폰)과 네트스피어(노트북)를 내장한 비유기적 신체들의 등장 속에서 엽기물이 보여주는 유기적 파열과 반문명적 충격은 역설적으로 문명의 야만성을 표시하며, 배제되었던 타자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 긍정성은 우리 사회에 갖고 있던 억압의 증거이고 이것 아닌 무언가에 대한 징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입론은 너무 네거티브한 데가 있다. 위반은 종종 역설과 반작용에 의존하는 ‘다른 것에 의한 자기 규정’에 머물 수 있다. 타자는 안티 테제의 사례집이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징후 혹은 자기 규정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술어를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엽기라는 말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는가.

2. 달마(達磨)와 캐롤(Lewis Carrol) : 박상륭과 백민석 사이의 심연들

1) 박상륭의 탁발승―헤겔주의와 선불교적 모티브

엽기성의 중심은 어찌 됐든 신체에 대한 훼손과 변형에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엽기성의 문제는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클래식한 범주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고딕과 판타지라는 개념을 통해 타자화된 근대 서사의 한 종류로 엽기성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시도들조차 때때로 더 많은 기갈을 낳는다.

원시사회의 카니발리즘, 디오니소스적 축제, 구약성서 속의 카인과 아벨, 예수의 못박음과 같은 서구의 희생제의적 서사들과 신체 일부의 절단과 공양(供養), 수도의 방편으로서의 남근에 대한 학대를 보여주는 아시아 불교 문화의 수많은 선불교(禪佛敎)적 일화들은 그러한 심증의 구체적 증거들이다. 아즈텍 문명의 피비린내 나는 제의와 일본의 할복의식을 포함하여 문명은 흔히 야만적 풍경을 지렛대 삼아 형이상학의 심연에 도달하곤 했던 것이다.

루이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도입부에 내장된 면도칼로 안구를 자르는 장면이나, 살바도르 달리 혹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뭉개지고 일그러진 신체 형상들은 가히 엽기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의 파괴성을 보여준다. 《장화홍련전》을 거쳐 《구마검》에 이르는 섬뜩한 괴담과 복수들, 6.25전쟁을 다룬 손창섭이나 장용학의 구더기 들끓는 소설은 이 충격의 상상력이 얼마나 집요한 충동인지를 알게 한다. 김동리의 〈등신불〉에 등장하는 만적이라는 인물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은 또 어떤가. 최루탄 냄새 매캐한 1970년대 대학가의 시위현장을 다소 탐미적으로 채색했던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산다.”라는 데카당트한 구호, 흔히 압사(壓死)와 분신(焚身)이 되지피곤 했던 1980년대의 열기는 피의 수사와 혁명이 맺는 관계, 그 관계를 설득의 수사로 삼는 수많은 시와 소설을 낳았고 그것들은 다시 혁명의 열기로 재점화되었다.

박노해와 백무산이 들려준 〈손무덤〉의 이야기들만큼 강력한 구호가 달리 있었던가. 하지만 그 모두를 통해 우리가 ‘괴이쩍은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 따위를 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엽기의 현재와 그것의 표면적 영속성 사이에는 나락과 같은 단절이 있다.

단적으로 말해, 육체에 대한 훼손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렛대이거나 구도였으며 업(業)이거나 의미로 가는 제의(祭儀)를 의미하곤 했다. 박상륭의 이름난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예수와 자신의 동료를 배신한 유다의 죽음의 과정을 다룬 〈아겔다마〉(1963/1997년 문학과지성사 재출간)는 그의 등단작이다.

이 작품의 겉면은 일종의 위반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의 그 구원의 과정은 선불교적인 모티브에 의존해 있다. 유다는 예수의 못박힘을 보고, 그가 그토록 탐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팽팽하고 물큰해 보이는 두 가랑이가 창끝에 의해 들쳐나 보이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번민 속에서 자신을 보살피던 노파의 옷을 찢고 능욕하고 피흘리게 한다. 그는 “광포한 짐승”, “짐승의 한계에서도 더 아래쪽 길을 처벅처벅 걸어댔다”. 문제는 유다가 그런 일을 설명하는 태도이다. 그는 그 모든 엽기적 행각의 변명처럼 이렇게 말한다. “아까는 확실히 신경이 이상했었어. 신경(神經)과 나〔我〕와의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지도 몰라”.

박상륭의 이 진술은 주체의 의지를 육체에 전하는 신경과 육체 아닌 어떤 것으로 환원되는 ‘나’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흥미로운 것은 유다가 죽은 노파의 눈에서 심연을 본다는 점이다. “그땐 유다의 눈도 서서히 변해가던 중이었다. 의미가 하나씩 바래버렸던 것이다. 유다는 불현듯 생각난 듯 기력을 다해 노파의 몸뚱이를 살펴보았다. 피가 그녀의 옷과 살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다음 순간 유다는 약간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에게서 아까 보았던 것과 흡사한 두 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몇 올의 머리칼이 눈자위로 늘어져 있었다. 그 눈은 아무 의미도 기력도 없는 죽음의 강 건너편 저쪽 마을 사람의 눈―그것은 투명하긴 했지만, 끝간 데 모를 심연을 가진 눈”. 물질적 대상으로서 난자되었던 노파의 눈은 완전히 끝장난 육체의 끝에서 “끝간데 모를 심연”을 보여준다. 바로 이 순간 하나의 초월이 발생한다.

아까 보았다는 그 눈은 예수(無念)의 눈이고 “그 눈 속엔 무(無)가 있었고, 휴지(休止)가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불멸 그 자체이기도 했다”. 난자된 표면을 통해 심연으로 이르는 건너뜀. ‘피밭’이라는 뜻의 〈아겔다마〉가 보여주는 엽기적이기 짝이 없는 장면들은 육체의 훼손이 극단화되는 순간 비로소 육체 이면으로 넘어가는 구도와 해탈의 과정을 보여준다. 예수 주변의 이 모든 살해적 이미지들은 사실상 불교적 구도 혹은 수행법에 전적으로 힘입고 있으며, 일종의 선불교에 기운 통종교성(通宗敎性)을 보여준다.

상해(傷害)의 고통은 (구원보다는) 자기 완성에게 답한다. ‘아함경법문’을 기반으로 한 〈장끼전〉을 비롯하여, 불교 설화의 삽화들을 인유하며 박상륭이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 육체의 벌건 물질성이 노골화된 순간의 초월적 국면이다. 부처와 스승과 말을 죽여가는 과정으로서의 구도, 근친상간을 비롯한 모든 금기를 초월하는 과정으로서의 해탈을 보여주는 유리라는 인물의 일탈적 행각들―《죽음의 한 연구》(1975/1986년 문학과지성사 재출간)―의 가장 위쪽의 표면은 쉽게 말해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 특별히 몸의 업보에 대한 극한적 부정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의 심연을 겨냥하고 있다.

유리는 수많은 신체적 고행과 살육을 거친 후, 오조(五祖) 촌장을 죽이고 육조 촌장이 되는데, 이러한 모티브는 오조 홍인(弘忍)과 육조 혜능(慧能)에 얽힌 선지식을 극단화시킨 것이다. “안팎으로 만나는 자를 모두 죽여라.” 유리는 ‘구도적 살인’을 해나가고 그 자신 역시 칠조가 될 촛불승에 의해 주살된다. 박상륭에게 예술은 어떤 종류의 동물이 축생도와 업을 극복한 그 총계이다.(《칠조어론》) 이 《임제록》의 현대적 판본들이 보여주는 모든 훼손들은 최종적인 국면에서 어떤 심연으로의 입구가 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육체,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면서 원초적 조건이다. 이 세계와 중생들은 병들어 아프다.

따라서 정신 역시 고통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 고뇌가 외화된 현상이 육체의 아픔들이다. 한 바리의 곡기는 탁발승의 육신이 원초적 조건임을 알려준다. 탁발과 고행이란 정신의 도정(道程)이고 주살(誅殺)이란 멸집(滅執)의 구도이다. 여기서 욕망은 차라리 길잡이다.(“충동이 언제나 그의 길잡이였던 것이다.” 《죽음의 한 연구》) 그것은 업이 무엇인지, 멸(滅)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사실상 육체의 훼손 과정은 정신의 변증, 특별히 부정의 변증이 실현된 결과이고 그 표현일 뿐인 것이다. 육체의 파열은 정신이 이 세계 안에 있음을 알려준다. 육체라는 대상의 현존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변형과 부정을 통해 대상 안에 도달하고, 그것의 심연을 통과해 초월에 육박하는 정신현상학이 여기에 있다.

표면의 파동은 ‘깊이’의 입구라는 의미에서(만) 중요해진다. 헤겔의 육체론의 한 대목은 육체의 표면에서 심연으로 잠행해 들어가는 정신의 변증을 가장 근대적인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 육체의 외관에 대해서, 그것의 모든 표면은 동물 세계의 표면과는 달리 마음의 존재와 파동을 드러내준다고 말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술의 임무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표면의 모든 부위에서 현상과 외관이 눈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 영혼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그 결과 영혼은 감지 가능해진다.”(헤겔) 육체의 훼손과 그에 대한 끔찍한 묘법들이 실은 영혼을 감지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활동이고 그것은 권장할 만한 무엇이다. 근대 미학을 통해 감각이 한번도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듯이 육체(의 변형과 훼손) 역시 정신의 도상(圖像)일 뿐이다.

몸이라는 소여(所與), 그것도 신경에 의해 조정 가능한 이 몸이라는 표면은 정신을 통해 육체(Ko촳er)가 지워진 신체(Leib)가 되었고, 세계와 정신 사이의 매개가 되었다. 육체(Ko촳er /fresh)가 생물학적인 질료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신체(Leib/body)는 주체의 의지를 실현하는 연장이자 매개·표현을 의미한다. 그릇(器)으로서의 그것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대한 ‘의미’일 것을 강요받는다. 끔찍함은 공포가 되었고, 흔히 절대적인 극한으로 밀어 붙여진 끔찍함, 크기, 변형은 숭고 미학이라는 전율의 체험을 통해, 정신의 어떤 초월성을 상기시키는 기제가 되어야 했다.

고전주의나 사실주의의 반대편에 그것들의 도플갱어인 고딕과 숭고 미학이 있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이러한 고딕적 모티프와 서사구조들은 계몽주의적 기도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심리적, 영적(靈的)으로 어두운 영역을 그것이 더 잘 지배될 수 있도록 정밀하게 표시해두는 것과 같다. 이 지배술은 타자(육체)를 자신의 외화(外化)된 현신으로 삼고, 도구로 삼는다. 이 얼마나 완전한 동일화이며, 이 얼마나 절대적인 매개인가. 그런 의미에서 재래적 의미의 엽기성 심급의 제 효과들은 형상을 무너뜨림에 있어서조차, 거의 전적으로 근대적 반성 미학, 정체성의 재구축, ‘의미’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

자연과 자유 사이의 어떤 것, 형식 충동과 유희 충동 사이의 어떤 것, 정신의 연장으로 정의되는 예술과 육체에 대한 매개적 이해들은 이토록 수미일관하다. 이것은 거의 어김없이 반영 미학, 반성 미학에 의존해 있고, 헤겔주의의 그림자를 강하게 드리우고 있다. 육체는 무의미한 것이 됨으로써만, 정신의 표현이 된다. 상처 입은 육체의 고통은 이 세계의 환부(患部)를 알려주고 함께 고통받게 한다는 의미에서 대승(大乘)적 길잡이가 된다. 정신은 신경을 움직이고, 명령은 표면에 가서 의미가 된다. 깊이와 의미의 시학.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와 관련하여 그로부터의 전이와 탈주들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그 수많은 엽기적 이미지들 위로의 미끄러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 백민석의 연쇄살인범―캐롤의 표면, 베이컨F.Bacon의 고기

이를테면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모든 것이 끔찍한 싸움으로부터 시작한다. 여러 사물과 동물들이 터지거나 우리를 터지게 한다.

상자들은 너무 작아서 내용물을 담을 수 없고 공간은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앨리스를 기괴한 형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몇몇 음식물은 유해하며, 몇몇 괴물들은 덮치거나 껴안으려 한다. 꼬마 형은 동생을 미끼로 이용하고 육체들은 서로를 뒤섞는다. 음식물과 배설물을 혼재시키는 잔혹함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의도’는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다. ‘의도’라는 목적론적 진술이 여기에 합당하기나 한 것일까. 들뢰즈에 따르면 이는 행위의 영역이자, 육체에 대한 정열의 영역이다. 사물과 단어들은 흩어지거나 분해 불가능한 덩어리가 된다. 모든 것이 끔찍하다. ‘무의미’하다. 들뢰즈는 루이스 캐롤이 그 끔찍함들 속에서 박기와 묻기라는 심연으로의 활동을 ‘미끄러짐’이라는 측면적 움직임, 표면의 정복으로 전이시켜 버렸다고 말한다.

‘깊이의 동물들’에서 ‘두께가 없는 카드 그림패’로 옮겨오는 서사. 그것은 더 이상 깊이의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사람들, 겉을 뒤바꾸면서 다른 쪽으로 끝없이 이동해 가는 왼손잡이(他者)들의 정열을 보여준다. 세계에 관한 일체의 사유에 선행하는 하나의 세계 체험, 세계와의 접촉을 표시하는 일을 자신의 과제로 삼는 일―오늘의 어떤 인간은 바로 그 표면의 일들, 경험적 존재, 사랑과 증오 속에서만 현존한다. 그리고 깊이의 세계는 여전히 표면 아래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표면을 파열시키려 하고 있다.

순수하게 경험적이고 물질적인 사건들을 다루는 작품들, 문화적 창조물들은 바로 이 잡다한 육체 위에서 그것들의 행위와 뒤얽힌 복잡한 정념의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표면의 무의미는 순수한 사건들―한없이 왔다가 한없이 물러가는 실체들의 광휘와도 같다.(들뢰즈, 《비평과 진단》, 김현수 옮김, 인간사랑, 2000) 들뢰즈의 말대로라면 아무것도 의미 곁을 지나게 하지 않고 무의미 속에서만 활동하게 한 건 캐롤의 책임이다. 의미의 불안한 심연이 아니라, 깊이·표면·볼륨·감긴 표면과 같은 무의미의 다양성은 세계 전체의 공포와 영광을 함께 표현한다.

인식론과 가치론을 포함한 모든 선규(先規)들―‘박기와 묻기’의 작용을 피해 도달한 순수 사건들은 표면에 대한 접촉을 표시하며 표현으로서의 신체는 이때 형이상학적 표면이 된다. 표면이 표면 그 자체로서 탐구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와 추가, 의미와 무의미가 한 덩어리가 되어 맨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공포와 끔찍함의 서사가 주는 현재적 의미는 바로 이 ‘표면 위로의 미끄러짐’이라는 측면에서 탐구될 필요가 있다. 교양주의적 고리타분함에서 보자면 이 미끄러짐의 구체적 세목들, 악행들은 하나의 반면교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의 끔찍함에의 매혹은 심연으로의 직선적 움직임이 아니라, 기표들에의 흡혈귀적 탐식―측면적 움직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백민석 혹은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 2000)의 경우는 어떤가. 납치, 폭력, 출혈, 감금, 악을 숭배하는 미로 같은 수도원, 시체, 비밀의 문, 꿈, 지하감옥, 기절, 화재, 배반과 복수, 아동 성애, 태워진 편지, 지하 통로, 뽑혀진 눈알, 살아 움직이는 수컷의 광기와 암컷의 탐욕, 패닉(panic), 자살, 도덕적 이유, 법과 정의의 개념에 의존해 해명되는 악과 폭력의 문제란 여기서 객쩍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여기서의 폐덕과 폭력은 목적을 가진 폭력이 아니고 따라서 목적론적 가치 판단에 대해서라면 최선을 다해 ‘무료해 한다’. 악의 정당화가 아니라 정당화 자체의 바깥. 엽기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오늘의 위반들은 그러한 의미 연관의 유보 혹은 전면적 폐기를 통해서만 자신에 대한 해명을 허락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육체와 형이상을 함께 표현하는 ‘표면’의 사유라고 할 수 있을까? 도무지 추(錘)가 너무 기울어 있는 것은 아닌가. 백민석이 《목화밭 엽기전》에서 그려내는 인간은 정신이 아니라 육체, 동물성의 극단에 도달해 있다. 여주인공 박태자는 불특정인, 특히 이제 막 어림에서 젊음으로 이끌리는 ‘누군가의 평생을 망쳐버리는 일’에서 흥분을 느끼고 그 생각만으로도 몸에서 분비물이 나올 정도의 인간이다.

《목화밭 엽기전》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남녀주인공의 갖가지 엽기적 행위, 그들에 의해 몸부터 철저히 망가져 가는 희생자들의 온갖 분비물, 역겨운 냄새로 가득 차 있다. 부부인 한창림과 박태자는 제도적 권력과 자본주의적 유희의 상징인 정부종합청사와 서울대공원이 있는 과천에 산다.

그들의 집은 동물원과 서울랜드 롤러코스터 사이의 인적 드문 그린벨트 안에 있다. 각각 대학 강사와 수학 과외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 부부의 성(城)이라 할 소설의 공간에는 생지옥 같은 지하 작업장이 있다. 그들은‘수컷 기질’이 있는 사내아이를 납치해 학대하고 포르노그라피를 찍고, 해머로 머리를 쳐서 죽이고, 시체를 삽으로 찍어 파묻는 광기 넘치는 행위를 벌인다. 그리고 그 장면을 ‘삼촌’이라 명명된 절대적인 위반의 권력에게 헌상하는 것으로 삶의 희열을 대신한다. “그애처럼 수컷 기질이 있는 놈들은 아직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 그 이빨을 제거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부라기보다는 암컷이고 수컷이며 그것마저 초과해버린 괴물들이다. 여기서는 사유와 안목을 본능과 냄새가 대신한다. 소설을 가득 채우는 수컷 기질, 수컷 냄새. 주인공 한창림에게 “그 위력은 대단한 것 같았고, 그래서 수컷인 그는 그 냄새에 매혹되었다.” 육체에 대한 변형과 훼손을 해탈과 사유의 과정―그러니까 ‘시간’의 틀에서 단계화하고 그것을 정신적 성숙의 과정으로 삼는 박상륭의 세계, 헤겔주의적 신체론은 여기에 전혀 개입하지 못한다. 백민석에 따르면, “육체란 공간이라서 그렇다.”(171면) 단지 타인에 대한 린치에서 경험하는 “흔치 않은 격렬함의 순간”, “그 순간이 해소된 후에 느닷없이 밀려드는 어떤 감정”에 동물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백민석은 그것을 의식의 진전이 아니라, “의식의 확장감”(99면)이라고 쓴다.

마치 LSD로 의식 확장에 이르고자 했던 티모시 리어리처럼 주인공들은 어떤 중독(addiction)과 그 중독이 주는 열림에서 가스를 넣은 풍선처럼 의식의 용적량이 터무니없이 커진 듯한 확장감, 의식의 최고점을 경험한다. 그것은 전통적 의미의 의식-정신의 변증법과 단절되어 있다. “사색은 발갑지 않은 물건이다.”(134면) 하지만, 이 모두는 한국문학사 안에서는 대단히 위반적일지 몰라도, 고딕적 전통, 영화적 문법, 하위 문화의 파장들 안에서는 상당부분 낯익은 요소들이다. 기울어진 추가 두드린 바닥은 이미 포화 상태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백민석의 소설이 표시하는 것은 표면이 아니라 기표들이다. 몸이라는 표상에 가해지는 진정한 위해(危害)의 이유나 특별한 접촉면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대중문화에의 흡입과 흡혈 본능이 솟구쳐 오른다. 이 과잉의 유희를 채우는 것은 새로운 사건, 아직 보여지지 않은 표면이라기보다는 잘 알려진 클리쉐(cliche)들이다. 그렇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 이러한 특성 자체는 일단, 결함이라기보다는 미학이다. 마치 사이버 공간의 웹 서핑이 엽기적 이미지 위로의 미끄러짐과 유희를 획책했듯이 백민석의 소설은 위반의 기표들과 그에 대한 클리쉐 위로 미끄러진다.

그는 그 기표들의 과잉, 클리쉐의 반복을 통해서, 또 흔해 빠진 일상의 사건들을 과장하는 그 초과의 상상을 무기로 현실의 억압된 부분을 가장 세차게 들이받는다. 백민석은 한 인터뷰(〈한국일보〉 2000. 8. 16.)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태포르노 등 엽기가 가장 활개치는 나라는 독일과 일본입니다.

꽉 짜인 조직사회이기 때문이지요. 한국도 키치, 컬트의 문화적 코드화를 거쳐 이제는 엽기가 젊은 층의 화두입니다.” 그리고 이 진술은 우리의 문제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시준점을 제공한다. 어떤 형태의 맥락과 역설적 전망이 없을 때 위반은 의미로부터 이탈해 버리고 초과는 맥락을 잃은 채 지루한 것이 되고 만다. 《목화밭 엽기전》은 그 맥락과 지루한 기표 유희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다.

나날의 삶이 지리멸렬하면서 또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신없이 뒤바뀌는 세계 속에서 과장의 형상은 그 자체로 리얼한 것이다. 엽기성의 중요한 징표를 이루는 육체의 변이는 시선의 변이에 수반된 결과이다. 날마다 풍경이 뒤바뀌는 고도성장의 세계와 그에 따라 급격히 전이되고 혼재되는 가치들의 뒤틀림은 몸의 리듬 안에서 수미일관하게 세상을 규정하는 방식을 파괴해버렸다. 날 새면 새 건물이 서고, 백화점과 다리는 어디론가 실족한다. 사실상 굴절과 변형이란 상시적인 감각, 유일한 선험이 된다.

몸은 스스로의 리듬을 잃은 채 변형되고 몸 밖으로 폭발한다. 상시적 변형의 감각 속에서 과장과 초과의 상상이야말로 현실적이며, 요컨대 ‘리얼’한 태도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백민석 식의 과장은 생활 세계를 초과할지는 몰라도, 하위 문화적 침전물 안에서는 인유(引喩)에 가깝다. 백민석은 욕망을 다룬다. 그의 소설은 자주 어쩔 수 없는 나르시즘을 보여줘 왔는데, 육체 정치학의 진정한 파동은 이 나르시즘의 흔들림을 다룬다. 현대의 육체 정치학은 의식의 변증을 자기애적 거울 보기·구심적 운동으로 파악하며, 육체의 약동과 변형에서 시대정신을 본다. 감각의 극단화는 필연적으로 ‘자기’ 밖으로 나가는 원심력을 필요로 하며, 백민석의 질주는 때때로 거기에까지 육박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번 소설에는 어쨌든 이 ‘나’가 없다.

소설은 흔히 수컷 기질(한창림), 막강한 힘의 파쇼적 인물(삼촌)들과 교호하면서 권력 의지의 극단화된 모습을 띄어 간다. 그것은 18세기적 사디즘―가해와 폭력을 통해 권력에 이르는 계몽의 도플갱어―을 초과하지만, 19·20세기식 (가해자와 피해자의 계약 관계로서의) 매저키즘 혹은 (계약과 유희의 동시적 구현으로서의) 사도매저키즘 수준의 위반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 지체는 작가의 것이라기보다 그만큼일 뿐인 사회의 몫인지도 모른다. 백민석이 그려내는 위반의 인간형들은 기껏해야 “비극적 존재”들일 뿐이다(“둔덕에 수백 구의 시체를 파묻어도 비극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261면). 거기에는 운명론의 그림자, ‘연민’의 정조가 강하게 배어 있다. 따라서, 만약 그 이상의 질주가 있다면 그것은 의도와 배치로서가 아니라 징후로서이다.

백민석은 그러니까 계몽과 정신의 승리에는 무심하며, 오직 그것들의 탈승화된 형태인 권력에의 의지와 욕망들을 다룬다. 욕망에 대한 의식만큼 접근하기 힘든 영역이 따로 있을까. 욕망은 그 자체만으로 의식의 명확성을 변질시켜 버린다. 더구나 욕망이 충족되어 버리는 순간, 욕망에 대한 명확한 의식도 사라져 버린다. 동물성을 통틀어 볼 때에, 성적인 만족 역시 대단한 ‘감각의 혼란’ 속에서 일어난다.(조르주 바타이유, 《문학과 악》, 최윤정 옮김, 민음사, 1995, 141면)

백민석 읽기의 어려움은, 보여줄 수는 있지만 좀처럼 해명되지 않는 욕망의 어려움이다. 육체의 감각이 부정이 아닌 위반과 희구의 대상일 때 그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목화밭 엽기전》은 의미를 찾아가는 ‘나’가 아니라, 무심한 위반의 몸뚱이들을 보여주며, 우리는 그 욕망을 소재로 징후적 읽기를 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있고, 따라서 심급이 부재하는 그것을 말이다. 위반은 쉽게 상투화되고 넘치던 기표들은 금새 어디론가로 배수(排水)되고 만다. 징후적 차원에서 파악할 때 차라리 그것이 다루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고기’이다. 여기서의 육체는 해부학적 주제라기보다는 무엇에 대한 그림자이다.

그 그림자는 우리가 숨겨두었던 어떤 동물적 근성처럼 몸에서 빠져나와 몸의 가장 어두운 부분으로 새겨진다.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유명한 베이컨의 회화들을 설명하는 들뢰즈―《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5)가 해설하는 육체의 얼크러짐이 바로 그렇다. “베이컨의 회화가 구성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형태적인 상응 대신에,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은 동물이 된다.”(39면) 인간으로부터 빠져나간 그림자는 인간 밖의 동물이 된다. 육체가 아니라 고기이다. 고기는 인간의 살이며 동물의 살이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공통의 사실에 대해 알게 되며, 베이컨이 느낀 연민을 이해하게 된다. 공포와 연민, 혐오와 탐식 사이에 고기가 된 인간의 몸이 있고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훨씬 깊은 비구분의 영역이다. 자아이자 타자인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통해서 가장 또렷하게 귀환하며, 살은 뭉개짐으로써만 그것이 ‘고기’였음을 발설한다.

기투(企投)가 아닌 투육(投肉)으로서의 삶. “우리 모두는 바로 이 던져진 고기였다.”(46) 베이컨에 의해 암시되는 엽기성의 현재는 머리와 고기의 육체론이다. 얼굴과 몸이 아니라 머리와 고기이다. 여기에 거울/반영 미학을 만족시킬 나르시즘은 애초에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차라리 자기애를 포함한 ‘애욕’보다는 비구분의 영역인 고기에 대한 ‘연민’을 드러낸다. 인간의 입 역시 더 이상 특수한 기관이나 의미의 발화점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몸이 빠져나가고 살이 흘러내리는 구멍이다. 의미가 아니라 연민을, 지금의 육체는 요청하고 있는지 모른다. ‘무상의 묘한 도’를 말(口意)없는 표면으로 전하기 위해, 왼팔을 잘라 달마에게 내주던 신광(神光), 2조 혜가(二祖 慧可)의 무시무시한 구도와 수행.

신체의 끔찍스러운 훼손을 통해 그것의 사라짐을 기도하고, 이 표면의 파동을 통해 심연에 도달하는 초월들. 신체적 고행을 통해 육체의 힘을 줄이고 정신의 자유를 얻는다는 테마. 또한 그로부터도 놓여나 하나의 진여(眞如)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던 부정의 역설은 이제 오늘의 육체의 정치학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탈발승의 고행에서 고기들의 수난·유희로의 이동은 그처럼 가파르다. 잘려진 팔에서 불법(佛法)의 태반을 보던 달마(達磨)의 역설들이 빠르게 주살(誅殺)되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불교적 모티브와 관련된 몸으로부터의 초월과 작금의 엽기성의 문제는 정히 대조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에로스의 가장 먼 곳에 도달하기 위해 신체 상해(傷害)라는 극한의 고행(苦行)을 감행하던 정신은 이제 신체의 파열을 하나의 극단화된 에로스로 즐기는 관점들을 대면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엽기란 사실상 욕망을 다루는 방식이며, 그와 대조적으로 신체 상해에 대한 선불교적 모티브들은 욕망으로부터 놓여나는 해탈의 궤도를 그려 보인다. 진여(眞如)의 세계에 몸이란 (신체여도 좋고 육체여도 좋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신체/육체란 그저 극복되어야 할 원초적인 조건이자 중생과 함께 앓는 방식을 의미할 뿐이다. 잘려나간 팔, 그것은 깨달음의 높이를 표현하는 하나의 기호(記號)이다.

불교적 고행과 해탈의 과정은 고기로서의 육체가 끝난 곳―신구의(身口意)·불법승(佛法僧)의 밖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참된 지식을 만날 수 있음을 오직 부정적(不定的)으로 지시해 보인다. 신체란 보이는 것이다. 신구의나 불법승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여야 할 무엇이다.

신체의 훼손과 수도승의 고행은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진여(眞如)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불교의 엽기 일화란 대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엽기성은 그 육체의 표면적 움직임을 하나의 매혹이자 실체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에너지를 얻고자 한다. 디지털 가상이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육체란 때때로 경험 가능한 유일한 실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엽기적 이미지들은 의미로의 입구 위에서 끝없이 미끄러지며, 그때 의미의 심연은 하나의 무의미가 된다. 심연의 깊이를 대신하는 표면의 파열과 질료에의 매혹들. 나날이 메말라만 가는 비유기적인 세계를 과연 육체의 심급이 대신할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은 일시적인 과잉일까, 아니면 항구적 단절일까. 헤겔주의적 작법(作法)에 대해서도 같은 근심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정신에서 표면으로의 헤겔주의적 신경망이 급속히 끊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육체는 정신의 지렛대, 구도 과정의 업(業)으로부터 이탈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러니까 박상륭과 백민석 사이의 심연에서 ‘다른 세계’, ‘다른 예술’이 파동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3. 더러운 거울―육체의 예술과 피그말리온의 미학

더러운 거울에 비추이는 모든 것은 일종의 타락의 형상이 된다. 여기에서는 육체의 대표격이자 표상인 얼굴이 그 자체로 일그러진 육체 자체이다.

이것은 괴이해져 버린 육체의 현재를 증거한다. ‘낯설어진’ 무엇―따라서 거울이 비추는 것은 자아이면서 또한 타자이다.(“나는 거울 같은 물에 비친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뒤로 물러섰다.” 《프랑켄슈타인》) 억압된 것의 귀환은 ‘그로테스크’한 형태를 띤다. 우리는 던져진 고기가 우리의 일부임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나르시즘의 반대편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가장 환원주의적인 메타포로서의 거울의 역사를 따져볼 때 이 거울은 루이스 캐롤적 의미에서의 ‘표면의 미끄러짐/통과의 거울’을 지나, 일그러진 형상에 대한 프란시스 베이컨적 거울에 육박해 있다.

한 영화평론가는 이러한 일련의 육체의 정치학과 그 분출을 ‘더러운 거울’(《KINO》, 2000. 2.)이라는 측면에서 해명하기에 이른다. 표면 아래의 의미들은 소란스럽게 들끓고 있고, 일그러짐은 주체의 의지를 표정화하던 ‘의미의 표면’을 뭉개 버린다. 감각은 진동한다. 의미는 ‘날 것인 채로의 표면/형이상학적 표면’ 위에서 난해한 수수께끼를 던진다. 이 이미지들의 세상에서 무엇이 바뀌었는가. 위반의 일상화는 무엇들의 증거이며, 상시 변형의 이미지들은 무엇들을 징후화하는가. 나는 어떤 방식의 예술의 한 읽기를 이러이러하게 예감하게 된다. 물론 그 예감은 상황이라기보다는 징후이며 곧 도래할지도 모르는 무엇이다. 아니 그것은 이미 도착해 있는지도 모른다. 첫째, 이제 어떤 예술은 ‘무관심한 작용’의 반대물이 되었다.

그것은 치료하지도 진정시키지 않고 곪게 하고 흥분하게 한다. 그것은 욕망과 본능, 의지를 전면화한다. 예술은 권력에의 자유와 비판이 아니라 그대로의 권력의지이며, 의욕하는 것을 자극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수렴하는 거울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거울의 빛을 탐하며 예술의 반동적 힘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카타르시스든 칸트의 무관심 판단이든 이 살해적 질주를 피할 수는 없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사유를 관객으로부터 빼앗아 창조자에게로 돌려 준다.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는 사람 측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판단은 〈좋은 인간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도덕의 계보》) 니체식의 창조의 미학, 피그말리온의 미학이 바로 이 엽기적 위반에 개입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좀더 구체적이 될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움의 결여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장 훌륭한 솜씨로 상아를 쪼아 그 어떤 산 자도 따라잡을 수 없는 미의 여인상을 창조했다.

피그말리온은 그 작품, 자신이 긍정한 것, 자신의 창조물과 사랑에 빠지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거기에 생명을 부여했다. 생은 그때 의지적인 것, 긍정할 만한 무엇이 된다. 예술적 창조를 최고의 현존 형태로 고양시키면서도 거기에 어떠한 진리계기도 부여하기를 거절하는 새로운 예술은 변증법적 부정이 아니라 생에 대한 그 자체의 긍정, 그 긍정의 에너지를 흡입하는 데 골몰한다.

헤겔식의 예술관, 그러니까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것과 순수한 사상을 융화시키는 정신의 예술이라면 이쯤에서 좀 난감해지기 십상이다. “예술은 감각적 영역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통해 동시에 그 감각성의 힘에서 해방.”(《헤겔미학》)된다는 간명한 테제 역시 우리들의 주제를 수미일관하게 봉합하는 데는 곧잘 실패하고 만다. 창조적인 근거를 대지 못한다면 ‘이미 있는’ 정신적인 원칙에 익숙해지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신앙으로 간주될지 모른다. 둘째, 예술은 질주와 거짓말―최고도의 권력이 된다. 그것은 위반과 잘못으로서의 세계를 극적으로 확대시킨다. 속이려는 의지 자체가 미학이 되며, 그 거짓말의 강력함 자체가 우월한 능력의 표지가 된다.

그것은 금욕주의적 억압 바깥으로 튕겨나가 버리며 금욕주의적 이상을 끔찍한 수동성으로 적시한다. 잘 길들여진 가축보다는 금발의 야수가 낫다는 악명 높은 명제는 이 전도의 순간에 재귀한다. 그것은 특별한 위반을 긍정적 권력의 행위로 고양시키고 속이려는 의지, 위반하려는 의지를 능동적 활동으로 점화시키는 ‘거짓’을 창안하려 한다. 질주의 전차로서의 예술.

이러한 극단화된 거짓의 권능에 사로잡힌 예술가에게 미적 가상은 더 이상 현실에 대한 부정과 역설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선택과 수정, 초과와 과장, 배가와 긍정을 의미하게 된다. 무목적적이지만 합목적을 장담하지는 않는 질주. 그것은 있는 것의 부정이 아니라 있는 것을 질료로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안하는 질주를 감행한다. 물론 이러한 긍정의 예술관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감수성의 감각적 직접성, 소수 문화의 탈승화된 설득력, 즉각적 효과로서의 미적 충동에 기대를 걸던 예술관들조차 여기서는 너무 낡은 것처럼 보인다. 가치 함수의 개입이 목적론적이라고 할 때, 새로운 예술은 생산과 창조를 표방한다.

그리고 그것은 위반과 일탈까지를 포함한다. 삶에 맞서는 삶은 목적이라는 잣대가 아니라 그것의 능동적 힘과 맥락 속에서 규정된다. 그것이 꿈꾸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확장이다. 그 순간 진리는 권력과 구별되지 않을지 모른다. 예술의 새로운 이미지가 열리고 있다. 엽기의 문화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거울에, 방광막 화면에, 또 TV에 비춰보기가 진정 어렵다. 이미 우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상호 잠행, 최고도의 내재성. 카타르시스와 반영의 동력에 걸려 있는 근대 미학, 주체와 객체의 간격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이미지의 둔갑술은 거리를 지워나간다. 우리 시공간 이해의 기초인 고전적 재현 방식의 이원론과 부정 변증의 명령 체계가 제거되면서, 그것들을 둘러싼 유서 깊고 끔찍한 구경거리(위반의 이미지)가 무대와 객석의 분리를 결정적으로 깨어버리고 있다.

초과된 이미지들 속에서 대상과 관점은 뒤섞여 버린다. 그것은 아직 회통(會通)이라기보다는 혼돈에 가깝다. 우리는 자주 사유보다는 즐김으로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막 사유되기 시작한 ‘육체의 정치학’은 엽기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암시를 준다.

그러니까, 우리의 위급한 문제는 영혼이 아니라 몸(신체와 육체의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난 그것)이다. 몸이 없는 곳에는 영혼도 없으며, 시선도 없다. 표면도 없고 심연도 없다. 우리 앞에 있던 것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형상의 분출이 사유보다는 마비를 불러온다. 이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순수한 사건들일 뿐인가. 주살된 달마는 귀환할 것인가, 들끓거나 해소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표면의 형이상학으로 심연을 삼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인간 모두를 생물학적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고기’들까지를 구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불안, 우리들의 사유는 이 피 흘리는 표면 위에서 다시 시작될 필요가 있다. 분출하는 육체와 말 그대로의 고기로부터.

황호덕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9년 《문학사상》 신인상 평론부문 당선. 현재 문학평론가·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평문으로 〈60년대식 자기 세계와 그 문체-김승옥의 ‘무진기행’에 관한 문체비평적 해명〉<진정성의 윤리학과 어떻게 맞설 것인가-성석제론〉 〈미래(학), 너무 멀리서 온 판단력-사이버 문학의 가상성과 진정성〉〈프랑켄 맑스-사이보그 2000의 문화생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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