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현대사회와 불교윤리

1. 세계화와 불교의 역할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면서 세계는 지구촌으로 변화되었고, 나날이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게 되었다. 국가 간의 자유로운 국제통상과 교류를 내세우면서도 세계 각국은 미래의 생존을 위한 자원의 선점과 국력증강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고 있다.

그동안 초월적인 이성의 영역으로 남아 인류 구원의 마지막 의지처가 되어 주리라 희망을 주었던 종교조차도 국익을 위한 전쟁의 선봉에 서서 문명간의 충돌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불교에 눈을 돌리고 있다.

세계 근대사를 식민지 진출과 확장이라고 기술하였을 때, 그 주된 피해지역인 아시아에 깊이 뿌리를 내렸던 불교에 대한 연구가 이제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열쇠로 재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과 정보화를 동반한 최첨단의 과학발전에 힘입어, 그동안 낙후된 국가의 종교이며 근대화를 저해하는 미신 정도로 여겨졌던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들의 인식전환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며 우주의 지배자라고 하는 독단적인 인식으로부터, 인간 또한 우주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자각의 형성이다. 인간 생명의 사슬이며 근본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게놈(Genom)구조의 판독 결과, 초파리와 인간이 다른 점은 겨우 몇 가지 유전 정보의 차이일 뿐이란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사람들을 경악시켰고 인간의 위상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이는 일체의 유정을 포괄하여 차별 없이 대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이제야 겨우 이해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지구의 가치에 대한 자각이다. 지구는 생명체가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이며 유기적인 생명체의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으므로, 세계적인 시각에서 단 하나뿐인 지구를 보호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따라서 불교의 무소유와 환경친화적 생활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셋째,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소비를 바탕으로 한 현재의 사회구조가 지속될 경우 인류문명은 저절로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자각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에 따라 세계 각국에서는 한편으로는 자원의 지속적인 확보를 위해 힘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대체할 물질 개발에 나서고 있다.

 불교의 수행자들이 전통적으로 생명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물질만 사용하고 청결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는 방식은 이런 점에서 당장 시급한 대안으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넷째, 공해와 자연에 대한 난개발 등으로 인해 병든 자연은 결국 인간에게 복수를 하고 마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는 자각이다. 즉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원리에 대해 거시적 관점에서의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

 다섯째, 모든 재앙의 근원이 결국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원리에 대한 자각이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인의 교육과 상호이해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와 공존의 인식을 심는 것이 세계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주요한 관건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문명간의 충돌이나 전쟁은 상호 대립과 편견을 그 기반으로 한다. 유일 신앙에 의한 세계 통일을 최종 목표로 하여 신앙의 전파를 신의 사명으로 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선교와 더불어, 최후의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라는 승리관에 도취되어 있을 때 종교간의 충돌에는 조화와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배타적인 유일신을 기반으로 한 여타 종교들은 결국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며, 보편적인 마음의 문제로부터 화해와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동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인간이 서로간에 마음을 열고 상호공존을 위한 평화협력을 가능케 할 지름길이 불교의 가르침을 확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세계인의 마음을 향한 이러한 자각은 매우 불교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교에 대하여 인류생존과 평화달성의 희망을 걸게 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의 절실한 염원이 있기 때문에,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 듯 세계가 불교의 가르침에서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불교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소극적인 포교와 은둔을 위주로 하는 종교라는 전통적 규정으로부터 벗어나, 도시와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열어주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만 할 것이다.

2. 현대사회와 불교도

세계평화와 인류복지 등 거시적 시각에서의 유용성과는 달리, 불교도 개인의 사회생활은 때때로 커다란 모순과 대립, 그리고 결단의 연속에 놓여있게 된다. 자연상태의 개인은 인연도 속박도 타락도 없는 자유인의 모습 그대로지만, 사회인으로서의 개인은 역할분담의 부속품이며 욕망이 들끓는 사회의 한 가운데 서서 때때로 스스로의 실체마저 부정해야 하는 곤경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사회와 무관한 한 개인으로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인으로서의 개인은 집단이기주의에 종속되어야 하는 부자유와 비도덕성을 한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사회와의 계약 때문이든 아니면 생태적인 조건 때문이든지 간에, 이러한 부정적 속성은 개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굳건한 장벽을 만들고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독점적 집단의 구성, 경제적 이익증대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결집체, 학연 과 지연의 고리를 통한 배타적인 아성을 쌓는 구조 등을 생각해 보면, 개인의 자율성은 소멸되고 희망은 좌절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냉정하게 현실을 살펴본다면, 인류의 문명이란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힘이나 신무기의 개발에 의존해 형성된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도전과 응전'의 지속적인 반복선 상에서 인류도 적자생존의 법칙을 피할 수 없으며, 침략을 통해서건 발명에 의지하건 외부로부터 다량의 재화를 획득하지 않고서는 번영된 나라를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생존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습은 타에 대한 침탈(侵奪)과 폭력을 일삼는 악순환과 그에 따른 괴로움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약간의 인권과 만민평등을 내세우며, 중소국들은 실리(實利)를 내세우고, 약소국들은 전체주의로 환원하려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대립구도가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립구도 속에서는 다수의 힘, 이익추구, 현실주의, 욕망의 충족 등이 주류를 형성하고 이와 반대되는 소수의 의견, 희생과 봉사, 이상주의, 금욕 등은 명목상의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교도는 후자의 경향이 강하므로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는 소극적이고 현실 도피적으로 보이게 된다. 붓다도 공연히 중생들을 위해 깨달음을 전하려 애쓰지 말고 빨리 열반에 들라는 악마의 유혹을 받았듯이, 패권주의, 배금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자비와 희망이 넘치는 사회 조성을 위한 대안 제시는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성공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전통적으로 불교도들은 전쟁이나 폭력을 통한 이념의 관철보다는 조용하고 온건한 개혁을 선호하였다. 즉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을 통해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이익사회의 대립구도가 자연스럽게 공동사회로 전환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이다.

불교인 개개인은 '지혜', '진리', '초월', '자유' 등의 개념을 추구하는 반면, 사회는 이와 반대로 '무지', '허위', '타락', '속박'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생활향상, 자본축적, 품위유지, 성공확보 등을 위한 경쟁이 치열한 현대사회에서, 수도자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면서 가족을 거느리고 사회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은 일이다. 빈곤, 결핍, 불안, 부정, 타락, 범죄 등 부정적인 요소가 만연한 상황에서 청정도를 지키며 생존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대나 불교도들에게는 비상한 결단과 유연한 지혜, 그리고 문제해결의 능력과 독창적인 창의성이 요구되었다. 불교도에 대한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한국불교의 역사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래, 한국에서 불교의 명맥이 유지된 것은 자신의 운명을 진리에 내건 명승들의 치열한 구도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신라의 자장, 원광, 원효 등 고승들은 각기 그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적 소임을 완성하였다. 계율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뛰어났기 때문에 명나라의 연지(蓮池) 대사도 신라의 자장율사를 가리켜, "그만한 인물이 우리 중국에는 없다"라고 찬탄하였다.

계율의 측면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고찰해 본다면 사실상 커다란 모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근본이 되는 오계(五戒)만을 재가에서 지키려고 해도, 사실 비상한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만일 직업을 가지고 술을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술을 마시지 말라"는 계를 지키려 한다면, 필사적인 노력을 하거나 아니면 중병에 걸렸거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더욱 곤란한 일은 권하는 술을 받지 않거나 마시지 않으면 자신을 모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이다.

외국에 손님으로 나갔을 경우, 현지의 예법에 따라 부득이하게 술을 마셔야 할 경우도 있다. 또한 "살생하지 말라"는 계의 경우, 적게는 육식을 하면서 죄를 짓고, 크게는 낙태를 하면서 죄를 짓고, 더 크게는 전쟁에 참가하여 살생의 죄를 짓게 된다. 직장에 나가면 남녀가 평등하게 어울려 생활을 해야 하며, 텔레비전을 켜면 불륜과 방일한 생활이 소재가 되고, 컴퓨터를 켜면 쉴 새 없이 스팸 메일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처럼 재가에서 세속의 오계만을 지키려고 해도, 하루 종일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면서 근신하지 않는 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계율에 충실한 불교인이 되려면 금주·금연과 더불어 무감성적, 무지성적, 비사교적, 비문화적, 반문명적, 비교육적, 비사회적, 후진성 등등의 속성을 지녀야만 한다. 말하자면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불교인으로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려면 신경이 쓰이고 손발이 자유롭지 못한 구속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불교의 속성이 이런 것이라면, 어찌하여 불교가 역사적으로 인류의 자유와 자비를 구현한 위대한 가르침이었으며, 현대의 서구사회에서조차 인류를 구원하는 철학인 동시에 종교로서 각광받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여러 가지 난점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보물로서 귀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고는 불교의 계율사상을 중심으로 이러한 모순점에 대한 연구와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3. 인도 종교의 속성과 불교의 특질

1) 인도 종교의 속성

붓다(Buddha) 이전에 인도 사회를 지배하던 종교인 브라흐만교(Br hmanism)는 제사를 중시하고 공희(供犧)와 제물로서 성공과 실패를 규정짓는 특징이 있었다. 인격신으로 구성된 신들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친척관계를 가지면서, 전쟁의 승리와 사후의 심판, 재물과 행운의 부여, 자손의 번성 등의 권능을 가지고 아리안족이 지배하던 카스트사회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 신의 속성은 베다(Vedas)의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아리안 사회의 발전과 신을 숭배하던 시인들의 상상력에 따라 신들의 친족 관계에 혼선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들 중요한 신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S. Tachibana, The Ethics of Buddhism, London: The Cromwell Press, 1994; Alfred Hillebrandt, Vedische Mythologie, trans. by Sreeramula Rajeswara Sarma, Vedic Mythology,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1. }}

아그니(Agni) 신은 불의 신으로서 희생을 바치는 불이 의인화되어 나타난 신이다. 이 신은 가정의 수호신인 그리하스빠티(G ihaspati) 혹은, 손님의 신인 아띠티(Atithi)로도 불린다. 흔히 부엌의 신인 조왕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불은 모든 부정을 정화하고 어둠을 몰아내는 특징이 있다.

 아그니 신은 인간과 천상을 맺어주는 중계자로서 제사의 불을 천계로 가지고 올라가서 천상의 신성한 불에 이를 합치고, 악마를 몰아내며 부정한 것을 정화한다. 인드라(Indra) 신은 천둥의 신으로서 가뭄과 어둠을 몰아낸다. 또한 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아리안들에게 안겨준다. 전쟁에 참가하는 용사들의 신으로서 숭앙되며, 인간을 선행으로 이끌어주지만, 변덕이 심하며 부도덕한 면도 있다.

부친을 죽이고, 친구를 괴롭히며, 소마를 너무 많이 마신 탓으로 신의 마차를 부수기도 했다. 브리하스빠티(B ihaspati) 신은 기도자들의 신으로서 경건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수명을 연장해주며 질병을 치료해준다. 소를 모는 신으로서 사람들에게 동물을 번성하게 하고 부유함을 가져다 준다.

우샤스(U as) 신은 새벽의 여신으로서 인간에게 여명의 빛을 열어준다. 만물의 움직임을 주관하고 자손과 번영과 무병장수를 내려주며, 시인에게 영예를 선사한다. 아빠스( pas) 신은 물의 요정들이다. 이들은 죄악, 폭행, 저주, 거짓말 등의 죄를 정화해준다. 치료와 부유함, 건강, 장수, 불사 등을 선사한다. 바루나(Varu a) 신은 원래 달의 신이었으나 도덕의 신으로 나타난다.

 하늘과 땅을 지탱하며, 법과 정의의 집행자로서 신성한 세계가 지켜지도록 그의 강한 무기와 마술적 힘으로 세계를 보호한다. 이 신은 세상의 도덕적인 규칙을 세우고 그것을 엄격하게 집행한다. 인간이나 신들이 이것을 어기면 진노해서 혹독한 벌을 내린다.

그 벌은 불행, 질병, 죽음으로 나타난다. 진실을 아끼며 거짓을 미워하며 악의 냄새를 맡아 이를 징벌하나, 모르고 저지른 죄의 경우에는 관용을 베푼다. 내세에 정의의 신으로서 나타나며 베다의 신 가운데 가장 도덕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미뜨라(Mitra) 신은 태양의 신으로 바루나 신과 동등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강한 힘과 지혜로 우주의 지배자, 삼라즈(Samr j), 교단의 수호자 등으로 불린다.《리그-베다》시대에 독립성을 상실하고 미트라-바루나로 동시에 불린다. 뿌샨(P an) 신은 방목과 소떼를 지키는 신이다. 어머니와 결혼하였으며 여동생을 하녀로 두고 있다. 결혼식에서 번성의 신으로서 경배된다. 루드라(R dra) 야수와 같은 파괴의 신으로서 후에 쉬바( iva) 신으로서 숭배된다. 인간과 소떼들을 병으로 멸망시킬 뿐만 아니라 식물을 상하게 한다. 파괴자인 동시에 병을 없애는 치료자이기도 하다.

거프(A. E. Gough)가 지적한대로 이러한 신들은 도덕성과는 별로 연관이 없다. 기도와 찬양, 희생을 바치는 이들에게 행운과 부귀, 번영, 쾌유, 승리, 속죄 등을 선사하는 상업적인 신들일 뿐이며, 인간의 희생 정도에 따라 철저히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일 뿐이다.

2) 불교의 특질과 사회개혁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붓다는 인류최초로 인간 평등을 선포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평생을 보낸 분이다. 붓다는 맹목적인 신앙이나 모순된 사회제도 유지를 위한 악법을 정당화하는 신학에 반대하고,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명실상부한 평등주의를 실천하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과, 사회적인 지위와 부귀는 선천적인 계급에 의해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행위의 결과로서 부여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당시 사회에서는 파격적이고도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불교도들은 불행하고 괴로움에 찬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여 자유와 행복이 구현된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와 소유를 버리고 수도와 연구, 그리고 사회봉사에 몰두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서양학자들은 불교도를 군인에 비유하여 '전사'(warrior)라고 불렀다. 불교의 도덕률을 사회적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사회개혁에 관한 불교의 적극적인 특징이 보다 명백해질 것이다.

불성(佛性)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으므로, 사회적 불합리를 개선하는 측면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고대 인도의《마누법전》을 보면, 브라흐마니즘이 아리안족의 카스트제도(Var a)를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체제라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노예계층인 수드라에 대한 규정은 이들을 인격을 박탈한 사유물로 간주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드라는 카스트 규정에 어긋나는 어떠한 범법행위도 할 수 없으며, 성찬식에 참여할 수도 없다. 수드라는 아리안의 신성한 법에서 규정된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못하며, [이들에 대한 처벌 등은] 법에 반하는 어떠한 금지 조항에도 해당되지 않는다(Laws of Manu, X-126).

수드라는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하여도 재산을 모을 수 없다. 수드라가 부유하면 브라흐만들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X-129).

이러한 규정에 따라 상위계급의 수드라에 대한 학대와 폭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교묘하게 자행되어서, 현대 인도사회에서도 이 문제의 해결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을 정도이다.

한편 초기불교에서는 신적인 존재들이 무제한의 권능과 지배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법칙 안에서 자신이 선업을 쌓은 만큼 복락을 누리는 중생의 일종이라는 교리로써 신적인 존재들이 수도자의 하급에 속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신적인 존재들도 수도의 계위에 따라 탄생과 소멸의 윤회를 거듭하기 때문에, 자력에 의한 수행과 깨달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종교들을 관찰해 보면, 어떤 종교든 예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의 존재, 예배의 방법, 찬송, 제사, 제물 봉헌, 심지어 인신공양에 이르기까지 이름과 형태는 다르지만 공통되는 양식을 가진 동일한 형식이 생겨난다. 붓다는 타종교에 대해 배척하는 일이 없이, 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토론하였으며 이들을 존중하였다. 그리하여 대열반(大涅般)에 든 후 그의 사리를 놓고 전쟁이 일어날 때, 붓다를 따르던 바라문이 나서 중재를 함으로써 평화롭게 사리를 나누어 갖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천상의 신적 존재들에 대한 이러한 철학은 결국 지상에 존재하는 계급제도에 대한 비판과 폐지로 이어졌고 인류평등과 자유의 구현이라는 과제를 향한 실천방안으로 구체화되었다. 맹목적인 신앙이나 신적인 대상에 대한 숭배관념의 약화는 보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능케 하고,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합리적으로 생활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도덕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접근이 낡은 사회의 해체와 개선을 가능케 하는 첫걸음이 되었으며, 종교성의 약화가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도를 증진시켰다고 하겠다.

이처럼 다른 종교에 비해 불교는 철저히 도덕적인 원칙에 의해 서열을 결정하는 우주관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브라흐만교는 종교적인 지혜, 대승불교는 철학적인 지혜, 상좌불교는 도덕적인 지혜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말처럼, 불교는 원래 도덕성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인간의 감각과 신체의 본질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그것이 무상(無常), 고(苦), 공(空)임을 깨닫고 다른 중생을 위해 몸과 마음을 헌신하는 삶을 귀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붓다시대에 세워진 병원은 세계 최초의 병원이라는 명예를 갖게 되었고, 고아원, 무료 급식소, 양로원 등의 불교 역사 초기에 이루어진 업적들은 인류애와 복지의 증진을 위한 인류 최초의 터전이 되었다.

또한 인간이 생사를 초월한 무한한 자유를 구현할 수 있다는 니르바나(nirv a, 涅槃)의 가르침이 기나긴 윤회의 과정에서 등불이며 희망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그 종교성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다. 불교의 발전사를 돌아보면, 도덕적인 요소보다 오히려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요소가 더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불교를 종교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고, 종교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신앙적인 요소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찾는 일이 불교인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과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4. 불교 율장의 발달

1) 불교 율장의 성립과 발달

잘 알려진 바대로 불교의 율장은 불교 교단이 성립되어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규범이다. 도덕론을 최우선으로 하는 불교의 특성상 율장은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그 소의경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율장의 중요성은 그리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나 남방의 소승불교에서 율장은 교단의 핵심이 되고 있으며, 동남아에서부터 불교연구를 시작한 서구의 불교연구 역시 율장의 연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불교의 교리체계에 대한 구체적 이해가 약한 상태에서 경율론 삼장(三藏)이 한꺼번에 전래됨으로써 경전의 정확한 뜻을 해석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삼장의 체계 역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계율의 중요성은 비교적 늦게 부각되었다.

이 결과 율장의 교리에 의한 규범적이고 의례적인 출가의식이나 수계의식 등은 초기에는 실시되지 않았으므로, 일정한 규제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 자각의 종교로서 불교를 이해하였다. 따라서 승려들은 요괴들을 잡아 가두는 도사 혹은 힘이 센 역사(力士) 정도로만 인식되고, 불교도들은 손오공과 같이 천방지축인 사람들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대승불교에서 율장이 약화된 이유는, 아마도 초기교단의 분열과정에서 나타난 지나치게 세세한 율장의 규정이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천상의 어려움도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에 견주어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루 한 번 식사하되 정오 이후에는 식사하지 못한다"라든지 "금은보화를 만질 수 없다"는 등의 규정은 상업적으로 활발한 대도시에서는 정확히 적용하기 어려웠고, 진보적인 수도자들이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 수도의 형식과 교단의 역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규정을 어기고 금전을 취급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정통 상좌부의 처벌 요구가 지역적인 대립을 격화시켰다.

 결국 교단이 분열하고 이윽고 대승불교가 발생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인 율장 이외에 이를 대신할 새로운 규범이 필요하였다. 현대의 태국 불교계에서도 이러한 조항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수도자들이 돈은 만질 수 없지만 플라스틱 신용카드는 사용해도 좋은가 하는 문제라든지, 또는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나 누워있는 사람 앞에서는 설법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는데, 그렇다면 텔레비전을 통해 설법을 하는 것은 정법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문제 등이다.

둘째, 외부적인 규제를 위주로 하는 율장보다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도덕성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경전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기후와 산물, 역사와 습관이 다른 여러 지역으로 불교가 확산되면서 율장의 규정이 지니고 있는 한계가 노출되었으며, 상좌부의 분파별로도 서로 다른 율장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지역적 특색에 맞는 율장의 창작이 요구되었다.

셋째, 사회생활이 복잡해지고 직업이 분화되면서 신앙생활도 간편하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으므로, 경전 역시 삼장을 동시에 포괄하는 동시에 신앙심과 지적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통합적인 경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넷째, 대승의 보살사상이 발전하면서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밀교, 선불교 등의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율장의 규정에 따라 아라한을 성취하기보다는, 깨달음을 뒤로 미루고 중생교화를 위해 지옥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사상이 발생하였다.

2) 율장의 가치

붓다 초기의 승단은 사부대중인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로 구성되어 수행자와 신도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비구·비구니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엄격히 수행을 실천하고 신도들은 이들이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하여 복전(福田)을 짓는 형태였다. 승단의 운영과 공동생활을 위해서는 의식주가 필요했으므로 이의 공급과 유지에 대한 문제도 세심하게 다루어졌다.

주목할 점은 승단의 계율이 고행의 관점에 입각하여 철저히 자신을 버리도록 음식은 탁발에 의존하고, 의복은 헌 옷을 기워 입고, 거처는 최소화하여 대나무 숲이나 무덤 사이에 위치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또한 공동생활을 하려면 먼저 심신이 건강하고 일정한 지식과 정신적인 준비가 필요했으므로 출가자에 대한 검증절차와 자격조건을 이에 맞도록 규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카스트 계급이나 세속적인 지위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도록 했으므로 교단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승단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토의로 제기된 문제들은 율장 안에 지속적으로 수집되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율장은 계율과 계율위반 사이의 문제점들을 파악할 수 있는 불교현상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성스러운 계율과 이에 반하는 욕망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과 선택의 문제, 성직자로서의 몸가짐과 마음가짐, 파계의 문제, 신도들과의 관계, 이교도들의 종교 압박과 폭행, 일반인들이 성직자에게 가하는 욕설과 비난, 탁발이 어려워 기아에 시달리는 승단의 모습, 전쟁에 휩쓸린 지역에서의 수행 등이 사실 그대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에 율장은 불교의 모습을 가감 없이 알 수 있는 실증적 자료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율장의 기록은 승단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일반화시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대승불교에서 추구된 계율의 정신 문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발로라고 할 것이다.

3) 상좌부 불교의 현황

상좌부불교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주로 동남아시아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들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상호간에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불교적 발전을 이어오고 있다. 상좌부불교의 승려들은 잘 알려진 대로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생활을 하고 있다. 탁발공양, 오후불식계, 불사음계, 불촉금은계 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새벽에 마을을 돌며 음식을 공양 받고 하루 한 끼만 식사한다.

남녀가 함께 버스를 타는 것도 꺼리고, 해외 여행을 할 때도 돈을 다루는 신도가 동행해야 한다. 그 결과 싱가포르와 같은 대도시에 세워진 절은 주로 신도들이 운영을 하고, 승려들은 정기적으로 강연을 하여 생활비를 받기도 한다. 태국에서는 승가와 속가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승려의 파계가 종종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남전율장에 주로 의지하는 출가 수도자들과 달리, 동남아에서 일반 불교도들이 사회윤리와 관련하여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주된 경전은《육방예경》(六方禮經: Sig lov da-sutta)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경전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매일 여섯 가지 방향에 절하는 아들에 대해 붓다가 절을 하는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힌두교도인 시갈라(Sig la)가 아침마다 동서남북 사방과 하늘과 땅에 대하여 예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한 방향에 대해 네 번씩 절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육방에 대하여 예를 갖추는 진정한 뜻을 알려주신다. 한역(漢譯) 경전에 의하면, 네 번씩 절을 하는 것은 살도음망(殺盜 妄)의 네 가지를 상징하는 것이니 이를 지키면 살아서 부귀를 누릴 수 있고, 사후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 복락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육방이 뜻하는 바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쪽은 부모를 모심을 나타낸다. 조석으로 부모를 봉양하여 잘 살피고, 근심을 하지 않도록 하며, 혹시 질병이 들면 의사를 불러 잘 치료해 드린다. 부모 또한 자식이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하게 자라도록 하며, 교육을 시켜 전문적인 직업을 갖게 하고, 또한 때가 되면 혼인을 시키며 유산을 물려준다. 남쪽은 사제(師弟)관계를 나타낸다.

제자는 스승을 공경하고 가르치는 은혜를 생각하며, 가르친 바를 잘 따르고 배우는데 싫증을 내지 말며,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는 스승의 칭찬을 하며 스승을 보호하도록 한다. 스승 또한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하루 빨리 학업을 이룩하도록 하며, 다른 사람의 제자보다 우수하도록 가르칠 것이며, 배운 바를 잊지 않게 하고 의문을 잘 해설하여 준다. 또한 제자의 지혜가 뛰어나 자신을 능가하기를 염원한다.

서쪽은 부부의 도리를 나타낸다. 부인은 남편이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갑게 일어나 맞으며, 남편이 출타중일 때는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고 기다리도록 한다. 부부간에 신뢰를 지키며 살림을 규모 있게 하고 재산을 잘 관리한다. 또한 남편은 부인을 항상 사랑과 공경으로 대하며, 계절에 맞춰 의복을 마련해주고 좋은 음식이 풍족하도록 하며, 때때로 금은 진주 등의 보석을 선물하고 집안의 관리를 맡기며,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잘 보호를 해야 한다.

북쪽은 친척과 친구의 우정을 나타낸다. 친구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주고, 그가 위험할 때 피신시켜준다. 친구의 험담을 하지 않고 가족의 일을 염려해준다. 한역 경전에서는 친구가 나쁜 일을 하면 조용한 곳에서 알아듣게 충고해준다. 급한 일을 당했을 때 피난시키거나 구해주고, 다른 사람에게 단점을 말하지 말 것이며, 서로 존중해주며 좋은 물건이 있으면 나누어 가질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땅은 주인과 하인을 나타낸다. 주인은 하인을 부릴 때 그들이 건강하도록 잘 돌보아주며 의식을 풍족하게 해준다. 병에 걸렸을 때 의사의 치료를 받게 해주며, 때때로 휴가와 상여금을 주어 격려한다. 그들이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공평하게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하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일을 하고, 자기 일을 하듯이 근면하며 물자를 절약하여 아껴 쓴다. 주인이 출입할 때는 인사를 하며, 남에게 주인의 칭찬을 하되 험담은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하늘은 승려와 도사들을 나타낸다. 착한 마음으로 이들을 대하고 대화 시에는 고운 말을 골라 해야 한다.

이들을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대할 것이며, 이들의 방문을 환영하고 때때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줄 일이다. 또한 승려들은 일반인들에게 보시와 지계(持戒)를 가르쳐 도덕심을 지키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며, 인내하고 정진하는 생활을 하여 올바르고 정결한 생활로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해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는 "이러한 상징적 비유는 사람의 일생과 같은 것으로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니 부모의 보호를 받는 어린 시절을 나타내고, 남쪽은 태양이 중천에 오르는 곳이니 청년시절을 나타낸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니 장년과 노년시절을, 북쪽은 이들을 망라한 친우 관계를 나타낸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상좌부 불교국가에서도 승단이 정치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미얀마와 태국간의 전쟁은 상호간에 불교문화를 파괴시켰고, 스리랑카는 따밀반군과의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졌다.

또한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불교는 공산주의로 인해 거의 단절이 된 형편이다. 불교 내적인 문제로는 비구니 승단의 단절, 교육·의료·문화 등의 사회적 기능의 약화, 외세와 외국 문물과의 갈등, 지역 승단간의 대립과 분열로 인한 통합기능의 약화, 정령신앙이나 애니미즘과 같은 전통신앙의 수용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스리랑카의 불교부흥운동을 지원했던 영국인들은 불교도들이 자녀의 교육에 무관심하고, 사회활동에 소극적이며, 조직력이 약하여 협력을 잘 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다.

 캄보디아에서는 불교도들이 학살당하고 공산화로 인해 불교교단이 무너지게 된 원인을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불교가 미신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계율의 외연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상좌부불교 역시 많은 문제와 개선할 점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한국사회와 불교계율의 문제

1) 한국불교 발전의 역사


한국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대립과 화해, 존중과 폄하, 부귀와 빈천,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 등등 인간세계에서 경험 가능한 요소들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에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와 같이 신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전래·정착되었고, 고대 삼국은 서로 다른 불교적 성향으로 국가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특히 계율의 수지를 불교의 핵심으로 삼았던 백제에서는 겸익율사를 인도에 파견하여 율장 원본을 구하도록 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승려들을 파견 받아 율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는 보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성립되었다.

자장율사의 엄정한 계율수지가 중국에까지 유명하게 알려진 가운데, 원광법사의 보살계를 원용한 화랑 세속오계의 성립, 의상대사에 의한 중국 화엄종 전래와 원효대사의 통불교적 저술활동은 특색 있는 한국불교가 성립할 수 있는 모태가 되었다. 원효대사는 파계를 한 이후에 천촌만락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무애가(無碍歌)를 부르고 춤을 추며 온 나라 사람들에게 포교를 하였다.

원효대사의 파계는 오히려 불교의 융성을 위한 기틀이 된 셈이다. 원효대사는《범망경》을 해석한 독특한 견해를 중심으로, 계율의 조항보다는 정신적인 바탕에 주의해 적용할 것을 권하였다. 특히 불교를 지키기 위해 살생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계율조항을 상황에 따라 넓고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흐름은 조선시대에 승병활동을 일으킨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 함허당 득통선사는《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을 지어 불교의 오계를 유교의 오상(五常)과 유비함으로써 유·불이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논증하려 하였다. 중국에서 성립된 선불교의 전래도 계율의 복잡한 조항을 자심청정(自心淸淨)의 문제로 간략하게 압축하여 선정을 위주로 한 한국불교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불교 발전의 역사는 구체적인 시대적 상황 안에서 고를 제거하여 보편적인 다수의 행복을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려준다. 구체적으로 고의 멸절(滅絶)과 해탈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고의 원인을 총체적으로 제거하는데 주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분분한 의견과 그 문제점의 해결 과정에서 인식의 진위여부, 지혜의 획득, 해탈의 방법론 등이 주요 논제로 등장하고 있다.

불교의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사상이나 종교와는 달리 구체적 실천을 위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론만으로 생사를 뛰어넘기는 불가능하므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여 계·정·혜 삼학(三學)이 온전한 상태에 도달하여야 진정한 해탈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팔정도(八正道)에서도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은 계학(戒學)에 속하며, 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은 정학(定學)에 속하고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는 혜학(慧學)에 속한다.

2) 한국불교의 윤리사상

한국불교의 윤리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들을 살펴보면, 한국불교는 다른 나라와 달리 호국적인 경향, 인간평등사상, 미래의 구원사상, 선불교의 유심(唯心)지향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와 고려의 불교는 관용적이며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야단법석과 같은 토론문화가 활발했으며, 고승들은 스스로 일반인 속에 들어가 누구나 불법의 고귀함을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병자호란과 같은 외세의 침략 와중에서도 지적인 역량을 총결집한 철학대사전격의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다는 사실은 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인 경이로운 업적이다. 이것은 그만큼 불교에 가르침에 대한 희망이 강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조선시대의 출현은 불교에 대해서는 길고도 지루한 탄압의 역사였다. 조선의 지지자들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고, 그들의 정치적인 힘으로 불교의 근간이 되는 삼보를 파괴하려 하였다. 강력한 불교 탄압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도심에서 밀려나 산중에 자리잡게 되어, 점차 현실참여와는 거리가 먼 기복불교로 변질되었다.

이로 인해 불교는 근대화 과정에서도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래 중생의 고를 구원하는 적극적인 참여적 모습과 달리 은둔적, 비참여적, 소극적, 보수적 성향을 지닌 종교로 인식되었다. 특히 기독교의 급속한 전파와 함께 불교의 전통적 영역이었던 교육기관,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사업에서마저 소외된 데다,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로 인한 고립이 심화되어 불교는 자아와 타아와의 관계 설정이나 윤리사상이 부재한 비사회적 종교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또한 계율에 대한 연구도 많지 않아 단편적으로만 내용이 알려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변화하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에는 그 역량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긴 역사의 과정에서 본다면 조선의 불교 탄압정책은 오히려 불교가 발전할 수 있는 항시적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타력에 의한 불교의 붕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경전의 가설을 증명했을 뿐더러 비도덕적인 사원운영 형태는 궁극적으로 민심의 이반을 불러오기 때문에, 결국 교단이 무너지고 만다는 이치를 보여주었다.

근세 이후로 기독교의 급속한 교세확장 또한 불교도들에게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종교에 대한 자각과 율장에 기술된 포교방법에 대한 진실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에서 이러한 사태는 오히려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는 셈이다.

이제 불교는 기나긴 조선의 암흑기를 딛고 새로운 도약을 이룰 수 있는 전환점에 서 있다. 조선시대 5백 년간 삼보(三寶)의 뿌리는 시들고, 삼장(三藏)은 제대로 펼쳐지지 못했으며, 삼학(三學)은 명맥을 유지하기도 벅찼다. 더구나 불교국가라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불교 발전에 오히려 역작용을 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불교 우호정책이 해방 후에는 오히려 불교와 관련이 있는 모든 분야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런 상태에서 밀어닥친 근대화의 물결은 그나마 남아있던 전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켜, 전통종교 대신 승전국의 종교에 관심을 증대시켰고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복음신앙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인간 복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이에 대한 불교적인 해법도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또한 생명공학이나 과학·기술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이 분야에 인재들을 기르고 있는 국가적 상황을 검토한다면, 원래 과학적인 방법론을 기초로 하는 한국불교가 교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오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은 이처럼 복잡다단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는 호기가 아닐 수 없다.
한국불교는 종교의 중요한 역할의 하나인 구원론적 측면에서도 오래 전부터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의 보존과 현대적 조류 사이의 조화 문제로서, 물질은 풍부해졌으나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상황하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불교가 미래의 희망이며 참다운 구원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거시적이기보다 미시적이고 즉각적인 해답을 바라고 있다.

불행하고 불확실한 현재의 문제에 대해 속시원한 비전을 보여주기를 요구한다. 불교는 '고(苦)로부터의 자유'라는 완전한 행복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적인 무장으로 접근하기를 권고하기 때문에, 유일신앙이 제시하고 있는 인생 문제에 대한 해법들을 미신의 일종으로 인식한다. 사견(邪見)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생은 궁극적으로 고의 증폭을 가져오므로, 비록 불안하고 고통스런 상황일지라도 불도(佛道)가 끊어지지 않는 사회에 사는 것을 행복으로 삼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리적인 접근은 앞에 고찰한 바와 같이 현실의 참모습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성제(四聖諦)의 방법론은 적극적으로 조명되고 개발됨으로써 실용적이고 유용한 학문분야가 되어야 하며, 객관적인 시각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중지를 모아 이를 해결하는 불교의 독특한 방법이 폭넓게 각 분야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불교교단이 구성된 뒤에 교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불교계율은 물론 이에 대한 반발과 반론도 포함하고 있다. 지킬 수 없는 법은 법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범법자를 양산할 우려가 있는 것처럼, 불교계율도 일반인들도 지킬 수 있는 유용한 자율적 규범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교적 접근은 이미 원광법사가 통일신라의 기틀을 마련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제적인 전례가 있다.

그러나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사회가 오랜 기간 유교적인 관습과 규범에 젖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얽매이기를 싫어하고 자유적인 성향이 강한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본다면, 불교가 계율에 의거한 도덕적 규범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미 윤리학에 염증이 나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불교적 윤리를 말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상좌부불교의 정통으로 자처하는 태국에서도 승려의 파계와 스캔들로 시끄럽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엄격한 윤리에는 그만큼 커다란 모순과 위험도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일반 신도들은 불교윤리의 기본정신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일반인들과 반대로 교단에서는 철저히 계율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눈먼 중생들의 의지처이며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법력과 도력을 갖추고 신뢰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소비와 무소유로 일관하면서도 영원한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인류의 열망이 바로 계율의 정신이며, 자율적 윤리관이 주류를 이루는 불교계율은 거대한 외부세계의 물질적 증폭과 함께 증대하는 미망(迷妄)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안락한 미래를 약속하는 구원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6. 현대사회의 과제와 불교윤리

불교윤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기반으로 하여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현대사회는 정보화의 눈부신 진전으로 비밀스럽던 종교의 속성이 정확하게 알려지고, 물자와 인적 교류의 증가에 따라 종교간의 교류와 새로운 유입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 종교가 한 지역에 동시에 공존하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그동안 서로 다르게 인식되던 종교간의 의례도 점차 공통화되는 과정에 있다. 이미 힌두교와 불교는 의례 면에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상호 우호적인 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종교별 접근법도 각기 다른 시각에서 해답을 모색하고 있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중심으로 일반인이 참가하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불교에서는 주로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한 절제와 검약, 환경 보호, 명상을 통한 인간성 회복의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나 이슬람에서 전개하는 인권 문제, 참여 문제, 여성 및 노동자 문제, 탈북자 문제, 장애인 및 소외계층 문제 등과 같이 정치적인 분야의 사회윤리 개발은 취약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는 사회의 간접자본과 관련이 있는 대사회적 서비스 분야인 의료, 교육, 환경 등에 비용을 투자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신도조직을 운영하는 경험과 역사가 짧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소망의 성취를 위한 기도불사에 전념하는 미신적 경향이 강하다고 비판받고 있다. 세속적인 권력을 이끌어 가는 성스러운 조직으로서의 수도원체계를 확립하여 불교적인 행동 양식이 세속사회의 눈이며 귀가 되어 가시적인 이익을 확립해줄 수 있어야 세계 종교로서의 불교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불교윤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 사회 제분야에서 고(苦)를 제거하는 실천적 방향 정립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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