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在家者든 出家者든 깨달음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신행생활을 한다. 그런데 막상 ‘무엇이 깨달음이냐?’고 물을 경우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과거 러시아의 大 불교학자 Stcherbatsky조차, ‘불교라는 종교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또 그 철학이 무엇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에 있다’고 토로할 정도였으니, 일반 불자들이 느끼는 혼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재 전 세계 불교권은 남방상좌부의 소승불교권(Hīnayāna)과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권(Mahāyāna), 그리고 티베트의 금강승불교권(Vajrayāna)으로 삼분된다. 인도불교의 전파시기에 의거하여 이 세 지역의 불교권을 비교하면, 소승불교권의 경우 서력 기원 전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고, 대승불교권에는 서력 기원 후부터 8세기까지 대승활동기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으며, 금강승불교권에는 8세기 이후 13세기까지 금강승 전성기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소승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고, 대승과 금강승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권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불자들 대부분은 선불교에 의거해 신행생활을 해 왔다. 그런데 선불교가 불교인 이상, 그 궁극적 목표 역시 불교적이어야 할 것이다. 대승을 능가하는 최상승이라고 자부하는 선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승과 대승과 금강승의 교학에 비추어 볼 경우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게 된 禪僧의 정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아라한인가, 아니면 부처인가? 아니면 제3의 누구인가? 앞으로 최상승인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 역시 교학적 견지에서 명확히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연구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해, 소승과 대승, 그리고 금강승의 교학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를 비교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2. 소승의 깨달음

소승불교의 수행자는 아라한을 지향한다. 아라한이란 모든 번뇌가 소진되어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게 된 최고의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果를 얻은 수행자는 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의 삶은 이미 다했으며 청정한 행은 이미 세웠노라. 할 일을 다 했으니 내생에 다시 삶을 받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아노라.

戒行을 어기지 않고 살며,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가 소진된 아라한은 결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계행이 완성될 경우 三界 중 欲界의 정상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계행만으로 아라한과를 얻을 수는 없다. 계행과 함께 좌선이 겸수되어야 한다. 계행을 갖춘 수행자의 마음은 좌선을 통해 욕계를 초월하여 色界의 初禪, 2禪, 3禪, 4禪의 상태로 향상하게 된다.

그리고 제4선의 상태에서 연기의 지혜를 추구할 때, 비로소 아라한과가 열려 有餘依涅槃에 들게 되며,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오는 無餘依涅槃 역시 제4선에서 이루어진다. 색계 제4선에 윤회로부터의 탈출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계정혜 삼학이라고 부른다.

수행자는 지계행 이후에 선정을 닦고 선정 이후에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혜학의 단계는 철정한 계행과 제4선의 선정력에 의해 뒤받침되고 있다. 제4선의 경지에서 계, 정, 혜 3학이 竝修될 때 모든 번뇌가 정화되어 깨달음을 얻는다. 그 결과 아라한은 자신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自知不受後有).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혹이 생길 수 있다. 불전에서는 ‘如來는 死後에 존재하는가, 아닌가?’라는 문제가 無記答으로 처리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의 사후에 대해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는 반면, 깨달은 자인 아라한은 ‘내생의 삶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고 선언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잡아함경󰡕에서는 焰摩迦(Yamaka) 비구의 일화를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염마가라는 이름의 비구가 ‘번뇌가 모두 사라진 아라한은 열반한 이후 존재하지 않는다(漏盡阿羅漢身壞命終更無所有)’고 주장하자 많은 비구들이 염마가를 ‘惡邪見의 비구’라고 말하며 이를 사리불에게 이른다. 그 때 사리불은 염마가를 별도로 부른 후 비유를 들어 타이르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재산이 많은 한 장자가 하인을 구하는데, 장자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하인으로 가장하고 들어와 온 정성을 기울여 일을 하여 장자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래서 하인을 좋아하게 된 주인이 방심하게 되자, 하인은 장자를 칼로 찌르고 달아난다. 장자가 하인의 정성이 거짓임을 알 경우에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윤회하는 세속의 진상에 무지하여 세속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세속이 마치 원한을 가진 하인과 같이 자신을 해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럴 경우 세속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되어 스스로 열반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부자를 속인 하인은 윤회의 세계인 세속을 비유한 것이고, 부자는 어리석은 비구승들을 비유한 것이다. 삶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어리석은 비구승이나 일반인들은 세속적 삶이 자신을 해치는 것인 줄 모른다. 마치 부자가 지극 정성의 하인으로 가장한 사람이 사실은 자신을 해치는 자객으로 돌변할 것을 모르듯이 …. 부자에게 그 하인의 음모를 알려 주어도 부자는 이를 곧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하인이 당장 자신에게 큰 행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인 부자가 방심한 틈을 타서 하인으로 가장한 자객은 부자를 해치게 된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지금 이곳은 행복한 곳으로 착각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이곳은 무상한 윤회의 세계일 뿐이며, 윤회의 세계에서 그나마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바다 밑을 헤엄치던 눈 먼 거북이가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얼굴을 내밀다가 우연히 그 곳에 떠 있던 널빤지의 구멍에 목이 끼게 되는 정도의 확률’을 갖는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지금 전 인류의 대부분은 내생에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축생 이하의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 우리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은 수만 년, 수억 년 후의 일이다. 그 때까지 우리 대부분은 축생이나, 아귀, 지옥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윤회의 진상, 윤회의 고통을 정확히 자각할 경우,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자각하게 된다.

열반 후 어딘가에 존재하든 않든 문제가 안 된다. 다시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이런 자각이 든 자에게 ‘無로서의 열반’은 행복으로 다가오지만, 아직 세속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열반 후 사라진다는 말을 들을 경우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염마가(Yamaka)의 주장을 비판했던 비구들 역시 세속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여래나 아라한이 死後 어딘가 있는지(有), 아니면 아예 사라지는지(無) 여부에 대해 물을 경우, 세속에 대해 집착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無)로 답할 것이 아니라, 먼저 세속의 고통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세속의 진상인 無常, 苦, 空, 無我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라한 死後의 無’는 공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로서의 열반은 고성제를 자각하지 못한 세속인들에게 더 큰 괴로움과 절망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무상, 고, 공, 무아의 苦聖諦를 徹見한 사람에게 ‘아라한 사후의 無’는 평화와 安穩으로 다가온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라한 死後의 無’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소승 아라한을 지향할 경우 세속이 모두 고통임을 철저히 체득하는 수행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희구하며 진심으로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아라한이 될 경우 우리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를 위해 수행자는 탐욕(貪), 분노(瞋), 어리석음(癡), 교만한 마음(慢), 불교에 대한 의심(疑), 자신의 몸이 있다는 생각(有身見), 인생에 끝이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邊執見), 이런 생각들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는 것(見取見), 잘못된 종교의식을 옳다고 보는 생각(戒禁取見), 인과에 대한 부정(邪見)등의 번뇌들을 하나하나 끊어야 한다. 이와 같은 번뇌가 남아 있는 한 내생에 그 번뇌가 초래하는 삶을 다시 받게 되기 때문이다.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 위대한 성자, 즉 아라한에게만 가능한 축복이다.

3. 대승의 깨달음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성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불은 무엇일까? 소승에서 말하는 아라한이 된다는 것과 부처가 된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아라한이라는 호칭은 부처에게도 부여된다.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교화한 후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면 아라한과 부처는 같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대지도론󰡕에서는 부처와 천신과 二乘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 첫째는 대공덕의 신통력이고 둘째는 모든 번뇌의 소멸된 지극히 청정한 마음이다. 천신들의 경우 복덕의 신통력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번뇌를 소멸하지 못했기에 그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 또,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통력도 역시 적다.

그리고 성문과 벽지불은 비록 번뇌를 소멸하여 그 마음이 청정하지만, 복덕이 약하기 때문에 그 세력 역시 적다. 부처는 두 가지를 완전히 갖추었기 때문에, 누구든 이기지만, 다른 자들은 모든 자를 이기지 못한다.

아라한은 그 마음이 청정하다는 점에서 천신과 구별되지만, 마음의 청정과 복덕의 세력이 부처에 못 미친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어 깨닫긴 했어도 전생의 習으로 인해 번뇌의 기운이 남아 있다. 사리불에게는 진에의 습기가 남아 있고, 난타에게는 음욕의 습기가 남아 있으며, 필릉가파차에게는 교만의 습기가 남아 있다고 󰡔대지도론󰡕에서는 각각의 例話를 들어 설명한다.

성문과 연각의 이승과 부처 모두 색계 제4선에서 깨달음에 든다. 그리고 깨달음에 들기까지, 초야, 중야, 후야에 걸쳐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이 차례로 열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三明의 힘에서도 아라한은 부처와 차별된다. 󰡔대지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三明은 대아라한과 벽지불도 획득한다.
문: 그렇다면 부처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답: 이들은 비록 三明을 획득했지만 그 밝기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부처는 완전하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문: 어째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답: 아라한과 벽지불들의 숙명지는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완벽하지 못하다. 전생 하나만 아는 아라한도 있고, 2생, 3생, 10생, 천겁, 만겁 내지 팔만겁까지 아는 아라한도 있지만 이 이상을 넘어가게 되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안통이 완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라한과 차별되는 부처의 복덕과 지혜는 어떻게 얻어진 것일까? 󰡔대지도론󰡕이나 󰡔성유식론󰡕 등 대승논서는 물론이고 󰡔구사론󰡕이나 󰡔아비달마대비바사론󰡕 등 소승 논서에서도 부처와 아라한을 구별하며, 부처의 복덕과 지혜는 3아승기겁의 수행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승기(asaṃkhya)란 無數, 또는 無量으로 번역되며 인도에서 사용되는 숫자 단위 중 가장 큰 단위이다. 세 번의 아승기겁 각각에서의 보살행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첫 번째 아승기겁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인지, 부처가 되지 않을 것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두 번째 아승기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긴 하지만, 그것을 발설하지 않는다. 세 번째 아승기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을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공연히 발설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3 아승기겁의 보살행이 끝나면, 100겁에 걸쳐 三十二相의 과보를 초래하는 공덕을 짓게 된다. 부처가 삼십이상으로 몸을 장엄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고, 비단 지혜와 선정 등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성불을 위해 우리는, 초발심 이후 3아승기 100겁의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 이는 대소승 논서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초지 보살이 되기 이전에 제1 아승기겁의 수행을 완성하고 초지에서 제7지까지 향상하는 기간이 제2 아승기겁이며, 제7지에서 제10지까지가 제3 아승기겁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무량한 세월 동안 수행해야만 가능할 수 있는 성불을 지향하며 윤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경우, 3아승기겁의 보살행 기간 동안 수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며, 성불한 이후에도 그 공덕의 힘으로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과의 경우, 鈍根機는 최소 3생의 수행, 利根機는 최대 60겁의 수행만 하면 성취된다. 부처가 되든 아라한이 되든 대열반의 의미는 마찬가지다. 대열반에 든 자는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성불이란 이렇게 至難한 일이며, 그 동기는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전생에 3아승기 100겁의 수행을 모두 마치고, 현생에 성불하는 수행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그는 태어날 때부터 三十二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량한 세월 동안 무량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조바심 내며 기다려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불이라는 목표는 지워버린 채, 항상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행하고(상구보리), 항상 남을 도우며 살아갈 때(하화중생), 미래세에 언젠가 성불의 과보가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수억 겁에 걸친 무한한 과정적 신행을 통해 귀결되는 것이 대승불교의 깨달음, 즉 성불이다. 그리고 이렇게 久遠劫 이후의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이 대승불교의 보살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럴 자신이 있는가?

4. 금강승의 깨달음

밀교 또는 ‘불교 Tantrism’으로 불리는 금강승은 크게 보아 대승에 속한다. 대승과 마찬가지로 성불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과 차별되는 점은 ‘3아승기 100겁’이라는 보살행의 기간을 현생의 1생으로 단축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성불의 기간을 단축하는 이유는 보다 빨리 더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3아승기겁 동안 무량한 공덕을 쌓아야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기간을 1생으로 단축시킬 수 있을까? 부처가 된다는 것은 부처의 몸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의 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는 法身과 報身과 化身의 三身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몸을 모두 성숙시켜야 한다.

법신은 空性과 無我에 대한 조망을 통해 성숙한다. 그러나 법신만 성숙시킬 경우 소승 아라한이 될 뿐이다. 그래서 금강승의 수행에서는 보신과 화신의 성숙을 목표로 삼는다. 보신은 일반적 공덕을 지음으로써 성숙한다.

그리고 금강승에서는 이렇게 ‘3아승기 100겁’ 동안 지어야 할 공덕들을 현생에 농축적으로 짓는 수행을 하게 되는데, 그 요점은 자신의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의 三業을 부처의 身口意 三業에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이다. 수행의 결과인 부처의 모습이 그대로 수행 수단으로 사용된다. 대승은 보살행의 因을 통해 불과를 얻기에 因乘이라고 부르며, 금강승은 수행의 結果인 부처의 보신과 화신을 수행의 因으로 삼기 때문에 果乘이라고 불린다.

大日如來를 主尊을 삼아 觀想하며 손(身)으로는 手印(mudra)을 짓고, 입(口)으로 진언(mantra)를 암송하며, 만다라(maṇḍala)를 보며 마음(意)으로는 자신이 부처로 출현하는 모습(生起次第)을 관상하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부처의 몸으로 성숙시키기도 한다.(究竟次第). 이런 수행을 통해 우리의 육체는 급격히 化身으로 성숙하고, 우리의 영혼(= 中陰身)은 신속히 報身으로 성숙하게 된다. 금강승에서 卽身成佛을 기치로 내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Ratnakaraśanti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성에 대해서만 명상할 경우 성불은 무량겁이 걸린다. 반대로 佛尊修行(deity yoga)만 할 경우 성불은 완전치 못하다. 공성에 대한 명상과 불존에 대한 명상을 겸할 때 성불의 시기는 단축된다

여기서 말하는 불존수행(deity yoga)이란, 자신을 부처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부처의 보신으로, 또 자신의 육체를 부처의 화신으로 성숙시키는 수행이다. 그런데 이러한 금강승의 수행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달라이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겔룩파의 경우 󰡔보리도차제론󰡕 체계에 의거해, 不淨觀과 慈悲觀이 철저히 완성되고, 止觀 수행을 통해 공성에 대한 조망을 어느 정도 갖춘 수행자에 한해 금강승을 수행할 자격을 부여한다. 금강승의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수행자는 먼저, 세속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하는 부정관을 닦고,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 자비관을 닦아야 한다. 그 후 三昧力도 훈련하고 공성을 파악하는 논리적 사고도 훈련해야 한다.

금강승의 수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철저히 보살을 닮아 있어야 한다. 아직 세속적 음욕이나 재물욕, 명예욕이 남아 있고, 질투심과 분노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며, 선정력이 깊지 못하고, 공성에 대한 지혜를 갖추지 못한 자에게 금강승의 수행은 금지된다. 藥이 오히려 毒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살로서의 마음이 철저히 갖추어진 수행자는 10만 번의 오체투지를 하고, 자신이 金剛薩陀(Vajrasattva)로 된 모습을 명상하며 100자 진언을 10만 번 암송하여 업장을 정화하며, 쌀과 보석 등의 공양물들을 만달라 판 위에 올려 쌓고 허물기를 되풀이하며 기도문을 10만 번 암송한다.

그 후 금강승 수행으로 이끌어 줄 스승과 자신이 하나가 됨을 관상하며 스승에게 귀의하는 기도문을 암송하는 구루요가(guru yoga) 儀式을 치른다. 이런 모든 의식을 마쳐야 비로소 금강승, 즉 밀교 수행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불교의식을 치르는 것은 보살로서 살아가며 3아승기 겁에 걸쳐 지어야 할 공덕을 농축하여 현생에 짓기 위해서이다.

3아승기겁에 걸쳐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공양을 바쳐야 하는 대승 보살의 수행과 비교할 경우 10만 번의 오체투지, 10만 번의 진언암송, 10만 번의 공양기도는 그 양이 너무 적다고 하겠다. 이러한 금강승의 교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철저한 믿음이 티베트 불교인들의 자발적이고 강력한 신행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소승의 깨달음과 대승의 깨달음 그리고 금강승의 깨달음을 비교해 보았다. 소승 수행자의 경우 아라한을 지향하고, 대승과 금강승 수행자의 경우 부처를 목표로 삼는다. 금강승의 경우 3아승기겁 수행 후의 성불을 현생의 ‘즉신성불’로 단축시킨다는 점에서 대승과 차별된다.

그러나 이 삼자에 공통되는 것은 아라한이 되든 부처가 되든 내세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세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 위해서는 윤회하는 세속의 고통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自問해 보아야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에 공감하는 우리들 중 다시는 태어나지 싶지 않을 정도로 苦聖諦, 즉 一切皆苦를 깊이 자각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지금 위빠싸나 등 소승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불자들 중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또,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갖춘 수행자의 마음에는 ‘나만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다시 태어나지 않게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다음과 같이 自問해 보아야 한다: ‘현재 대승 또는 금강승의 수행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중에 다른 모든 중생을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역시 위와 같은 조망 하에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선승의 깨달음은 아라한의 깨달음인지, 부처의 깨달음인지, 아니면 제3의 무엇인지 ….


김성철
서울대 치과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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