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단] 데이비드 킨슬레이

편집자
이 글은 David Kinsley의 Ecology and Religion의 제7장 “Buddhism: Ecological Themes”를 번역한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 활동 가운데, 생태학(ecology)은 종교나 인문학과 거의 관련이 없는 생물학이나 지질학 계통의 학문에 우선적으로 바탕을 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학과 종교는 서로 간에 그 영역을 침범하거나 중복시키고 있다. 그러한 중복의 일반적인 분야는 첫째로 철학적·이론적·구조적인 것이고, 둘째는 도덕적·윤리적·정신적인 분야이다.

생태학은 1886년 찰스 다윈의 독일인 제자인 에른스트 헥켈(Ernst Haeckel)1)이 명명한 용어로서, “유기체와 그들의 환경 사이의 관계들의 총체 혹은 그 관계들의 유형”(the totality or pattern of relations between organisms and their environments)2)이라고 정의된다.

생태학과 종교는 우주의 조화로운 체계 및 그 체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지위와 관련이 있다. 인간의 본성과 실재의 본질에 관련된 고전적 의문점들에 대해서, 인간들은 오직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던 보다 확장된 ‘환경’이라는 맥락에서만 답하려 하였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 다시 말해 사물의 보다 광범위한 체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아는 것이 철학과 신학과 종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화두로 대두되었다. 생태학은 그와 같은 자연 세계의 맥락 내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종교와 관심사가 겹치게 된다.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에 나타난 생태학적 주제에 관심을 돌렸을 때, 서양 사람들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문화와 매우 다른 사회적·경제적·종교적 환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도, 중국, 한국과 일본의 전통에 있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제적 유대감은 서양의 전통적인 사냥문화보다는 덜 지배적이고 덜 강력하다.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에는 생태학적 정신 세계를 제시하는 많은 가르침과 주제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정신적 함축을 내포하고 있는 아시아 종교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실재들 간의 조화’(the unity of reality)이다. 특히 인도에서 “모든 것은 하나이다”란 언명은 제반 종교 사상의 근본이자 모든 존재의 상호 연관성을 말하는 생태학적 정신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점을 제시해 준다.

아시아 종교의 또 다른 관심사항은 자연에 대한 신성화 및 그것의 고유한 가치를 고려한다는 점이다. 인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현상들이―강, 산, 바람, 불, 그리고 지구 그 자체―위대한 신으로 의인화되었다. 또한 중국, 한국과 일본 불교에서는, 바위와 나무들의 정신적 성숙과 관련된 진지한 토론들이 수세기 동안 진행되었으며, 비인간적 형태의 존재가 본래부터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해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아시아의 종교적 전통의 세 번째 중요한 주제는 비폭력이다. 비폭력은 모든 존재의 상호 연관성을 배가시킨다. 다음 장에서는 적극적인 생태학적 함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생태학적 정신과도 관련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검토해 보려 한다.

2. 비폭력

불교는 때때로 냉정할 정도로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지극히 금욕적인 것으로 정형화되어 왔다. 혼란스러운 생활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함을 터득함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는 핵심적인 문제가 바로 고통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불교는 흔히 그 고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종교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경향들은 불교의 역사에서 실제로 찾을 수 있으며, 특히 인도불교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 경향들은 실재(reality)에 대한 더욱 복잡한 통찰력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실재라는 것에는 생태학적인 것으로, 또는 생태학적 정신을 고무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보다 흥미롭고 다양한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불교의 핵심 주제, 곧 불교 신앙을 그 어떤 것보다 두드러지게 특징지워 주는 주제는 비폭력 즉 불살생(ahim.sa?이다. 비록 불교가 이 사상을 인도의 또 다른 토착 종교인 힌두교(Hinduism)나 자이나교(Jainism)와 공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비폭력에 대한 강조는 불교 윤리의 뚜렷한 특징이다.

‘실재’에 대한 불교적 분석에서, 고통은 존재에 속박된 부분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고통은 상당 부분 무지에 의해 야기된다. 고통의 종식은 깨달음에 의해 대치되어진다. 고통은 다른 생명체(creature)에 대하여 또 다른 생명체가 저지르는 불필요한 폭력에 의해서도 증가되고 강화된다.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불교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대하여 가하는 고통의 양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다른 생명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우리가 불교에서 불살생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생명체들의 고통에 대한 붓다 자신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붓다의 깨달음 추구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 중에서도 핵심적인 에피소드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알려진 일련의 사건들이다.

붓다는 네 가지의 광경, 즉 병자, 노인, 시체와 수행자에게서 아주 깊은 인상을 받음으로써 깨달음에 대한 추구를 시작했다. 이 사건들이 있었을 당시, 젊은 왕자였던 붓다는 마치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가 병들고 늙고 죽은 것처럼, 슬퍼하는 인간의 고통의 광경을 보고 매우 괴로워했다. 이런 광경에 대한 그의 태도는 실존적(existential)이었고, 그 광경들은 그에게 강력하고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젊은 왕자는 인간들에 대해 비상한 감정이입, 즉 연민(empathy)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들의 슬픔, 고통, 그리고 아픔을 스스로도 느꼈다. 그는 그들만큼이나 상처를 받고 당혹해 했다. 붓다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스스로 직접 경험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와 같은 연민의 표출은, 농부들이 밭을 경작하는 광경을 지켜 본 부처의 반응을 묘사하는 부분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쟁기질이 땅 속에 있는 조그만 생명체에게 불러일으킬 고통을 생각하면서, 붓다는 괴로워했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여기서 붓다의 연민은 인간의 고통의 범위를 넘어서 확장되었으며, 심지어는 다른 종들 (species)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 불교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배양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에서 불살생을 행함으로써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증가시키지 않을 것을 권하였다. 깨달았거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다른 존재들의 감정과 고통과 갈망을 자신의 일과 똑같이 생각한다. 그들은 일체감을 확대하여 다른 인간들까지 포함시킨다. 둘째, 이 연민의 감정은 비폭력의 가르침에 따라서 모든 생명체들에게로 확장되어야만 한다. 연민의 감정에 의해, 가능한 한 인간 중심적(anthropocentric)이 아니라 생명 중심적(biocentric)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자아통제와 타아지배

불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명상이다. 다른 사람들이나 생명체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심어주어, 비폭력이 적절한 행위나 사고의 한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명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체로 종교로서의 불교는 이기적인 집착과 그것의 강화에 기초한 인간의 삶에 대하여 정교하게 비판한다. 불교는 자아 중심적인 갈망에 의해 일어나는 욕망들의 끊임없는 만족에 토대를 둔 삶이란 무지몽매하고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치부해 왔다.

그러한 욕망에 대한 갈증이란 결코 만족시킬 수 없으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단지 욕망의 강도만 더하게 만들 뿐이다. 정신적 탐색은 육체적인 필요, 편안함, 부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니며, 그와 동시에 타인들과 자기가 처한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발휘하기 위한 일도 아니다. 정신적 탐색의 목적은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들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와 같은 욕망을 소멸시키는 일은 주로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깨닫지 못한 인간들은 삶의 문제와 고충과 불만족을 외부 환경에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바람직한 결혼, 좋은 직업, 좋은 가정, 좋은 자동차, 이러한 것들이 변화를 줄 수 있으며, 결국에는 기쁨이 자신의 삶을 지배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외부적 환경에 대해 조금만 더 자제한다면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지게 될 것이다. 명상은 사물에 대한 이러한 자아 중심적 견해를 전복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자아는 본질적이고, 불변하며, 존경과 사랑 혹은 선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발상을 없애는 것이 바로 명상의 지향점이다. 불교 명상의 중요한 부분은 자아의 분석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자아의 분석에 의해서 자아의 동일성이라고 하는 허구적으로 구성된 개념의 무상한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불교의 명상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제한된 견해를 기초로 인간의 자아관이 성립되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또한 불교적 명상은 자아 중심적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함을 추구한다.

초연함과 자아통제로 이끄는 명상의 과정은 타인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삶의 방식과 대조된다. 많은 불교 관련 문헌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행위에 대해 완전한 절제력을 가지게 된 불교적 영웅들을, 자기 자신은 통제하지 못하면서 세속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통치자나 왕들과 비교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아 통제를 얻기 위한 투쟁은 타인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한 노력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힘든 일이다. 자아를 정복하는 일은 수천 수만의 타인들에 대한 정복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특히 다음의 이야기는 타인을 지배하는 일보다 자아의 제어가 우월하다는 불교적 관점을 잘 보여준다.

옛날 굉장한 권력을 가진 왕이 충직한 신하들을 이끌고 연회장에 갔다. 왕은 곧 만취되어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왕의 여자들은 그만 지루해져 정원 주위를 거닐었는데, 거기서 명상에 깊이 잠긴 한 수행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여자들은 그 젊은 수행자 주위에 둘러서서, 그가 누구이며 어떻게 왕궁의 정원에서 명상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 수행자는 자신은 끄샨띠와딘(Ks.a칗tiva칍in, ‘모든 것에서 인내와 용서를 선언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인생의 목적을 이기적인 욕망을 정복하는 일에 두었으며, 투쟁 속에서 관용과 인내 그리고 자아 통제력을 배양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러는 와중에 왕은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허둥거리고 있었고, 여자들이 곁에 없어서 매우 화가 났다. 여인들이 수행자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질투심을 느끼고 분개하여 그 젊은 남자가 누구인지 밝힐 것을 요구했다. 끄샨띠와딘이 왕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왕은 그의 통제력을 시험하기로 결심하고 왕궁의 집정관들을 소환했다. 왕의 명령에 따라서 집정관들은 그 젊은이의 사지를 자르고 몸이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온 몸에 상처를 내면서 고문했다.

왕은 이 고통스러운 고문을 통해서 그 젊은이가 여전히 인내심을 유지하는지, 혹은 그를 고문하는 왕에 대해서 분개하는지 알아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수행자는 한 순간도 자아에 대한 통제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감정적으로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끄샨띠와딘과 왕의 이 팽팽한 힘겨루기는 자아 통제가 타인에 대한 지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결국 수행자는 상처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왕은 화가 난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왕은 수행자의 감정을 자극시키지 못했음에 분개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젊은 수행자가 패자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불교적 윤리관의 맥락에서 본다면 끄샨띠와딘은 왕이 가진 어떠한 수단으로도 그 고요함을 깨뜨릴 수 없는 자아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보여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영웅이다.

내부에 있는 탐욕의 손길과 싸우면서, 그러한 양상들을 극복해 나간 끄샨띠와딘은 모든 면에서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외향적인 우아함과 절제는 내부의 고요함과 자아통제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외적인 힘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지고, 다치고, 모욕당하거나, 혹은 악용될 어떤 개인적인 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극복한 정신적인 용사들은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다. 자아통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개념을 좀 더 넓은 데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더 이상 자아 중심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아집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 말에는 생태학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 대한 가장 오래된 불교적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이글거리는 불 속에서 통제력을 상실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깨달음은 불을 끄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불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불은 곧 만족을 찾아 헤매는 지속적인 욕망이다. 욕망에 달아올라 궁극적인 만족을 기대하면서, 이러저러한 갈망들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갈라지고 부스러지며 산화한다.

더욱이 신체적·정신적·감정적 만족에 대한 우리들의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기도 한 이 불길은 다른 사물들과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파괴적이다. 이 불같은 우리의 욕망은 타인들과 우리의 환경을 태워 버린다. ‘소비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은 이제 우리의 문화 속에서 너무나 지배적이기 때문에, 사물들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는 더 이상 적절하게 맞아떨어질 수 없다.

‘소비자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에는, 물리적·감정적·정신적·심리학적으로 우리가 주로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관념 및 인간의 삶이 이러한 수많은 요구들을 만족시켜 나가는 과정이라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소비자적 정의는 인간은 무엇보다 육체적·감정적·정신적·심리학적 욕구의 덩어리라는 개념과 인간의 삶은 이들 수많은 욕구들을 만족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개념에 입각하여 내려진 것이다. 우리는 이들 요구를 충족시키고 충분한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곤란하거나 혹은 지루한 일들에 대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한다.

이와는 반대로,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은 거의 없거나 간단할 뿐임은 명백하다”고 말하곤 한다. 즉 아주 소박할 정도의 옷과 거처, 그리고 우리의 몸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이 그것이다.

어떤 절대적 관념에서 볼 때,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은 불필요하거나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불필요한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격렬한 갈망 속에서 우리의 세계와 우리 자신들을 태워 없애고 있다. 이것은 파괴적인 행위이며 우리를 평화와 평안 혹은 자유로 이끌지 못한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방종이 아니라 절제가 평화로 가는 길이며, 환경을 황폐화시키지 않는 적절한 태도이다. 생태학적 책임은 내적인 자아통제로부터 넘쳐 나오는 것이다.

4. 생명과 보살적 이상의 상호의존성

힌두교에서처럼 불교에서도 윤회의 사상은 전제되어 있다. 불교에서 현세의 삶이란 영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전생의 삶을 포함하는 드라마의 마지막 짧은 끝자락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은 전생의 많은 삶을 인간이 아닌 다른 종(種)으로서 지내왔다. 불교 문헌 가운데는 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다룬 《자따까》라고 불리는 아주 방대한 문학적 장르가 있다. 다양한 설정들을 통해 이들 이야기는 동물의 형상으로 존재했던 붓다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영웅의 행위는 불교적 윤리를 조망해 주고 있다. 동물의 형상을 한 영웅은 굶주린 동료의 배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는 위대한 자비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들을 하곤 하는데, 이러한 설정은 《자따까》 문학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러한 이야기들 및 윤회에 대한 붓다의 신념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부각시켜 준다. 먼저 인간의 삶은 인간 이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種)들의 경계를 뛰어 넘는다는 점에서 윤회는 모든 유형의 생명들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붓다가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자따까》 이야기는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의식을 가지고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 이외의 종을 도덕적 존재로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에 놓여있을 수도 있는 절대적인 구분을 약화시켜 준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모든 유형의 생명체들 역시 상호간 연결 고리를 맺고 있다.

모든 존재의 이러한 상호연관성을 묘사하기 위해, 불교 문헌들에 종종 보여지는 흔한 이미지는 ‘인드라의 보석 그물망’이다. 인드라는 천상의 보고에 보석으로 만든 환상적인 그물을 가진 인도의 신이다. 그물 속에서 각각의 보석들은 수많은 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각각의 보석은 다른 보석들을 서로 비춘다.

만일 누군가 그 보석들 가운데 하나의 보석을 보기만 해도, 그는 여타의 다른 모든 보석들도 또한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비추며,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를 계승하면서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다. 다음은 현대의 베트남 승려가 모든 사물들의 상호연관성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인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나머지로부터 우리들 자신들을 떼어내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그 자연의 한 부분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면서, 여타의 동물들과 생명체를 자연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자연을 다루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우리는 자연을 우리 자신을 다루듯이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연에 해를 끼치면 안 되는 것이다. 자연에 해를 끼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과 자신의 동료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안다면,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분리되어 떨어져 나오는 것이 불가하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보살피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들을 해치게 된다.3)

동일한 맥락에서 또 다른 승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기보다 그 일부분임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칼로 스스로를 가해하지 않는 것을 신중히 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이로부터 훔치는 행위는 우리들 자신들로부터 훔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우리가 환경과 맺고 있는 관계는 서로 보살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올바른 행위를 경건하게 행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모습 그 자체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문제이다.4)

대승불교의 입장에 따르면, 만일 모든 존재들이 관련되어 있거나 상호의존적이라면, 각각의 존재는 어떤 양식으로든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으며, 어떤 한 존재가 무엇을 하건 간에 그것은 모든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자각은 대승불교의 핵심이 되는 종교적 이상, 즉 보살의 이상으로 이끌거나 강조하며 강화시켜 준다. 대승불교에서 모든 존재들이 깨달음, 즉 성불을 추구하고 염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또한 모든 존재의 상호연관성에 기초하여, 우리는 그들 모두가 일정 범위까지는 깨달음에 이르는 행로에서 서로 간에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가정한다. 보살은 바로 그러한 조력자를 말하는 것인데, 아마도 평범한 존재보다는 훨씬 나은 강력한 조력자이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이 먼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윤회의 굴레로부터 최종적인 자유와 완전한 불성을 멀리 할 것을 맹세한 사람이다. 즉 보살은 현세에 남아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줄이거나 그들을 정신적인 성숙과 각성의 길로 가도록 돕기 위해, 해탈을 미룬 채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을 맹세했다.

보살의 본성은 자비이다. 자아 통제를 성취하고 자신의 자아 중심적 의식(我執)을 제거하여 욕망의 불을 잠재운 후에, 보살은 무한한 연민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온 몸을 던져 중생들을 돕기를 맹세한다. 이 자비심 속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다른 여타의 중생들과의 일체감을 느낀다. 그리고 우주 전체에까지 그들의 일체감을 확장해 나간다. 보살은 그들의 복을 다른 중생들의 복락과 동일시하며 그것을 항상 가슴에 담고 행동한다.

보살의 자비심과 이타심은 대승불교도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의식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도들의 일반적인 믿음 중 하나는, 성지순례나 시주나 혹은 윤리적으로 올곧은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경건한 행위를 하면 복을 얻게 된다는 믿음이다. 자신의 내생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덕의 축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의 선행이라는 계좌가 가득 차 있다면, 그는 좋은 내생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나쁜 내생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건한 불교도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식(회향식)을 하게 된다. 이것은 선행으로 쌓은 공덕을 모든 다른 존재들에게 보시하고 함께 나누어 가지는 의식이다.

여러 해 동안 어렵게 축척한 공덕을 다 보시하고 난 후에,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결속을 확인하고 그들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어떤 이가 보살적 삶의 본질에 동참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보살로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대승불교에 의하면, 보살은 우리들 가운데 항상 상주하는데, 그들은 생각과 행위의 모든 부분에서 모든 존재의 상호연관성과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을 자각한다. 그리하여 다른 존재들과 환경에 대한 보살행의 결과는 보다 나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5. 반문화로서의 불교

불교 역사의 초기단계에서는 불교가 그 시대의 주류 문화에 반하는 문화를 대변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불교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경전 내용에 근거하여, 상당히 의식적으로 신분체계에 대한  가치관을 거부하는 사회를 창조하려 하였다. 불교적 관점에서 당시의 주류 문화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탐욕, 폭력, 낭비, 권력과 부에 대한 무지한 추구와 자기 권력을 강화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자비가 부족한 것을 뜻했다.

반문화(Counter-culture)를 만들어나가는 초기불교의 한 측면은 거기에 포함된 생태학적 의미 때문에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승려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식량으로 취했고, 다른 사람들이 버린 누더기를 옷으로 만들어 입을 것을 요구받았다.

승려들은 매일매일 그들의 식량을 위해 이집 저집에서 탁발을 하고, 그들을 위해 특별히 배려된 것이 아닌 어떤 가족의 식사로부터 남은 음식만을 취해 왔고, 그 점은 아직도 그러하다. 그리고 승려들이 그 지역의 쓰레기통에서 주워 모은 누더기를 바늘로 꿰메어 만든 의복을 입는 것 역시 그러하다.

초기불교도들이 이러한 수행방식을 채택했던 주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방식으로 말해지고 있다.

우리는 당신들의 가치체계에 반대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거부했던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이런 수행방식은 당시의 주류 문화의 소비성향에 대해 하나의 비판이 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소비성향은 기이하게도 오늘날 우리의 문화 속에서도 나날이 증폭되어 가고 있다. 남긴 밥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버려진 누더기로 옷을 만들어 입음으로써, 초기불교도들은 단지 전 승단이 주류 문화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초기 승원 사회의 이러한 수행 방식에서 우리는 재활용에 대한 고대적 사례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대의 재활용 프로그램은 단순히 환경을 보호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불교의 목적은 낭비를 일삼았던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를 뒤바꿈으로써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다.

6. 돌과 나무의 불성문제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을 때, ‘모든 존재의 상호 연관성’(緣起)이라는 주제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그 이론이 “어떤 면에서 모든 물질은 불성(佛性, Buddha nature)을 소유하고 있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들고 나온 불교도들을 생겨나게 한 것인데, 그들은 인도로부터 전래된 연기(緣起)사상과 자연에 대한 토착적인 존경심을 결합시키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대략 8세기부터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영적인 상태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일련의 불교 고승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숙고했고, 점차적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세계 사이에 있는 어떤 중요한 구분을 깨뜨리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존경 혹은 자연을 외경하는 태도는 불교가 전래된 8세기 무렵 이전의 일본에서도 분명히 찾아 볼 수 있다.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에서 주요한 정신적 힘은 카미(神)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것들은 거의 모두 자연에 대한 형상이나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 아마도 가장 인기가 있고 잘 알려진 신도의 신은 아마테라스(天照)라는 여신이다. 그녀는 태양과 관계가 있고 때로는 그것과 일치하기도 한다. 다른 신들은 산, 강, 작물의 성장, 바람, 바다, 달 등과 친숙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신도 사상에서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을 통해서 그들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강력한 정신과 함께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마술적인 것으로 되거나 또는 그러한 신비 자체와 동일시된다. 이런 영혼들과 인간의 관계는 신도의 종교와 의식에서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런 관계는 신이 자연 현상과 똑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기능도 포함하고 있다.
신성한 것이 자연과 동일하다는 것은 신도의 강력한 논지이다. 자연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넘어 성스럽거나 신성한 어떤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즉 자연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하다.

많은 신도의 사원(神社)이 문 뒤에 어떤 건물도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즉 신도의 사원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건물, 사찰 또는 특별하게 장식되어 신성화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문을 통과하거나 그 문을 들여다 봄으로써 흔히 극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그런 것도 아닌, 그저 단순한 풍경을 보게 된다. 거기서 성지(聖地)는 하나의 풍경이다.

신도 신봉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 핵심은 어떤 유적이나 건물이나 또는 세심하게 장식되고 둘러싸여진 대상보다는, 자연 그 자체에서 성스러움과 신성함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요점은 그것을 자연의 세계 전체를 통해 봄으로써 신성한 것에 대한 인간의 감수성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신도에서 구원은 자연 안에서나 자연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5)

일본에서 자연을 바라보거나 즐기기 위하여 산과 숲으로 은거하는 오랜 풍습 역시 자연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를 설명해준다. 흔히 간단한 오두막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그마한 은둔처는 일본의 풍경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모습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자연과 섞여 사는 방식으로 늘 자연스런 풍경 속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일본 정원에 있는 조그만 찻집의 존재는 사람이 자연과 함께 할 수 있고,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은둔처를 찾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과 나무의 불성에 관한 일본불교의 논의는, 정신적 성취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일본인들 본래의 신념에는 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비인간적 대상물이 정신적 잠재력과 정신적 본질을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는가에 관한 물음은 많은 대승 경전에서 암시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대승 경전에서는 모든 감각 있는 존재들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단언한다. 인도불교의 맥락에서, 이런 언급은 환생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불교에는 본래부터 구원의 드라마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분명한 주장들이 존재한다. 즉 깨달음은, 모든 창조물이 여러 붓다들과 보살들이 이끄는 광대 무변한 협력의 한 부분으로서 추구되고 성취된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아마도 돌과 식물의 정신적 본성에 관한 문제가 초기 경전에서부터 대두되었다는 주장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그런 경전은 ‘감각이 있는 존재’(유정[有情])와 ‘감각이 없는 존재’(무정[無情]) 사이의 구분과 관련된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왜 감각이 있는 창조물만이, 즉 감정과 의식을 구비한 창조물만이 깨달음에 대한 포부와 운명을 지닌 것들에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중국 불교도들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감각이 있든 없든 간에 모든 존재들은 깨달음의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돌과 나무는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무엇보다 대승불교적 교의의 논리적 확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자연에 대한 특별한 숭상에 그 근거를 둔 것은 아니었다.6)

돌과 나무의 불성에 대한 문제가 일본에서 제기되었을 때, 그 토론은 자연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토착적 주장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즉 돌과 나무에 있어서의 불성은 “어떤 창조물도 그렇게 하찮거나 초라하거나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이라는 위대한 우주적 드라마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대승 불교적 보편 구제설의 논리적인 확장이었다기보다는, 일본인들 고유의 자연관에 더 많은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의 자연은 숭배할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불교철학에서 궁극적인 모습의 붓다는 법신불(dharmaka칪a, 法身佛)이라 불려지고, 이것은 붓다의 깨달음의 원리, 핵심 혹은 잠재력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육신의 부처’(化身佛)는 단지 영혼의 형태화이다. 일본 승려인 쿠카이(空海, 774∼835)는 깨달음의 경지 즉 철학적 원리인 붓다의 법신은 모든 자연에 충만한다는 것에 근거하여 나무와 돌에도 그러한 성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라는, 다시 말해 인간의 인식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감각이 없는 초목들의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법신불은 다섯 가지 위대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간과 식물과 나무들은 그 요소들 안에 포함된다. 이 공간과 식물과 나무들은 모두 다 법신이다. 비록 육체적인 눈으로 식물과 나무들의 조대한 형태는 볼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미묘한 색상은 붓다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질적인 어떤 변화 없이도 나무와 식물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데 아무런 이의는 없다.7)

쿠카이의 경우에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 곧 지혜를 가지고 자연을 관찰하는 사람은 전체 자연의 세계가 가장 정제되었을 때의 특성, 즉 인간을 포섭하고 불교도들이 깨달음의 경지라고 언급한 것과 똑같은 자질에 의해 충만됨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일본 승려는 다소 다른 맥락에서 식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려 하였다. 료오겐(良源, 912∼985)은 모든 물질은 최고의 숭고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옹호했다. 식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그는 유비적 논리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 논리에 따르면 식물은 인간에 비유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풀과 나무는 네 가지의 현상을 지니고 있다. 즉 싹을 틔우고, 자리를 잡아 성장하며, 변화와 재생산을 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를 거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식물이 우선 목표를 열망하고, 훈련을 하고, 깨달음에 이르고, 소멸(nirva칗.a)에 들어가는 그런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식물들이 감각 있는 존재들의 분류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식물이 열망하고 그들 자신을 훈련할 때, 감각 있는 것들도 역시 그렇게 한다. 또한 감각 있는 것들이 간소함을 열망하고 겪을 때, 식물들도 스스로를 열망하고 훈련하는 것이다.8)

우리는 식물을 지배하는 자연적 과정이 종교적이라는 붓다의 관점에 의지하여 료오겐의 견해를 설명할 수 있다. 식물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의 수행자와 같다. 료오겐에 따르면, “이와 같은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다면, 생명의 순환이라는 것은 깨달음의 순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9) 료오겐의 접근법에서 식물은 우선적으로 불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식물들은 적어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인간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일본 승려인 츄우진(1065∼1138)은 자연 세계의 신성함을 주장하였다. 츄우진의 견해에서 식물의 신성함은 인간과의 유사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실 식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의 여러 논증들을 나열하는 가운데, 츄우진은 식물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한 료오겐의 주장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츄우진의 견해에 따르면 식물들은 그 자체로 완벽하며 훌륭하다.

그것들은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츄우진이 그들의 신성함을 제안한 것은, 그것들의 변화하는 과정 때문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순간에 너무도 분명하게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그들의 완벽함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 자신의 본성 중 무수한 것들이 붓다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그들의 내적인 본성에서 변하지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변동이 없고 순수하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붓다라고 부를 때 의미하는 바이다.

나무와 식물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깨달음의 경지인 ‘서른 두 가지의 표시’(32相)를 가지거나 보일 필요는 없다. 그들은 현재의 모습으로, 즉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사귀를 지님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방식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10) 츄우진 역시 식물의 불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나무와 식물의 자성(自性)은 설명될 수 없으며, 따라서 나무와 식물이 소유한 불성이라는 것 역시 설명할 수 없다.

츄우진의 저작에서 식물의 불성이라는 것은, 식물들이 감각적이라거나 인간과 유사하다는 식의 주장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그의 견해에서 보면, 식물 본래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불성의 신성함을 포함하고 있다. 식물과 같은 비인간적 존재는 인간의 본성과는 달리, 그들 자신의 본성 너머로 정신적 가치를 확장하기 위해 더 이상의 아무런 근거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츄우진은 비인간적 존재는 물론 심지어 비감각적 존재들조차 원래부터 인간의 정신세계와 그다지 관련이 없다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11) 츄우진의 경우, 돌과 나무의 깨달음의 경지와 관련된 문제들은 본래부터 인간의 문제이다.

 나무와 돌이라는 것은 사실상 순수하다. 그들은 최고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을 보는 데 있어서, 우리들의 어려움과 문제는 자기 본위나 인간중심주의적 관습 등에서 기인하는데, 이는 현대 생태학자들도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성향에서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보통 인간들은 그들 자신과 다른 존재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의해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존재와 그들 자신을 비교할 때, 다른 존재들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사실 츄우진과 또 다른 이들이 말하듯이, 다른 존재들은 그 자체로 올바르며 완벽하다. 사실 어떤 면에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머물러 있는 것은 단지 인간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은 다른 존재보다 열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들은 항상 어디에서든지 그들 자신이 완벽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는 항상 완벽한 나무이다. 그리고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고양이는 고양이가 되는 데 뛰어나며, 그밖의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다수 인간들과 달리, 그들은 아마도 순수하고 완전하게 성취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돌과 나무의 불성에 대하여, 또 다른 일본 승려 사이교(1118∼1190)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의 사상들은 대부분 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이교는 자연 속에서 불교의 가치를 구현한 세계를 발견하고, 인간이 식물과 나무로부터 불성에 대해 배울 것이 많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사이교는 불성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자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자주 언급하곤 한다. 그는 붓다의 우선적 기능이 가르침에 있기 때문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이 인간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사이교의 시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때때로 인간이 종교적인 의식이나 문화적 삶 속에 몰두해 있을 때보다 자연 가운데 있을 때, 자신의 불성을 실현하고 깨닫고 깨우치는 일이 더 쉬운 것 같아 보인다. 예를 들면 다음의 시에서 보이는 바와 같다.

“그저 멈추시오”라고
버드나무 그늘 속으로 길을 걸어갈 때 나는 말했다.
기포를 뿜어내는 시냇물이 흘러 내리는 곳에서
내가 잠시 멈춘 이래로 시간을 가지게 되었듯이.12)

자연(=본성)을 벗어나 불교성지를 향하는 순례의 도중에, 사이교는 그의 종교적 모험과 노력에서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로 결심한다. 다시 말해 그저 시냇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의 잠시 멈춤은 영원한 깨달음에 이르고, 한편으로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성지 순례자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적용하지 않는다. 사이교에게 있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일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면서 그저 자연 속에 있는 것이 보다 더 수승한 수행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이교의 경우, 그가 먼 거리의 성지로 가는 도중에 자연을 스쳐 지나치던 일을 멈추고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했을 때 깨달음이 일어났다.

사이교는 시냇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정신적 성취를 위해 더 이상 탐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그 밖의 어떤 곳, 즉 특별히 신성하다고 알려진 멀리 떨어진 어떤 장소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일은, 깨달음을 위한 탐구를 억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13)

이러한 사상은 성지순례 여행의 목표란 결국 자연 세계 내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통해서 성지순례의 시인은 ‘숭배의례 중심의 종교 공동체’(the cultus-concerned religious community)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믿고 있던 곳보다 더 먼 곳을 여행한다.

사이교의 많은 시들 속에서 우리는 그가 자연과의 강한 일치감을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의 결과는 흔히 중요한 불교의 진리의 깨달음인 통찰력(discernment)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사이교는

 자연으로부터 배움을 얻는다.
산 속의 불어난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 자체가 그 과정을 따라
얼마나 빨리 재촉당하는지 알게 하네.14)

이런 시들 속에서 사이교와 자연과의 일체감은 뚜렷하다. 우리는 그가 자연에 대한 인간적 사고와 감정, 그리고 느낌을 강요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그의 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 장면에서 그 자신을 억지로 맞추려 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예를 들어 다음의 시를 감상해 보자.

나는 이 고목이 피우려 노력하는
몇 개의 꽃 봉우리를 보기 위해
긴장을 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라는 정념(pathos)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더 많은 봄을 만날 것인지 궁금하도다.15)

여기에는 감정이 있는 것 같다. 그 고목은 사멸의 지점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완전하게 꽃 봉우리를 피우려 발버둥치는가! 나도 그와 같이 살수 있을 것인가! 불교의 중요한 주제는 모든 것의 덧없는 본질, 즉 세상 속에 있는 존재들의 무상한 노정이다. 일본에서는 자연을 관찰할 때 흔히 표출되는 부드러운 슬픔의 기분이나 감정에 의해, 무상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사이교의 시에서도 동일하다.

꽃봉오리에 대해 초연한 관찰자는,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그 꽃 봉우리와 친근감 있게 되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꽃이 가지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이 바로 그이다.16)

다른 시에서는 감정 그 자체, 즉 슬픔이라는 것을 자연 속에서 관찰할 수 있고 자연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나뭇잎이 뚝뚝 떨어질 때
그 위에 비친 달님은
그 나뭇잎이 슬픔을 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 그 달빛 속에
오늘밤 떨어진 이슬이 놓여 있네.17)

사이교의 이 마지막 시는 일본불교가 가진 몇 가지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다른 점과 경계를 완전히 부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사이교와 나무는 하나가 된다.

꿈 속에서 나는 보았네.
봄바람이 간들간들 나무에 달려 있는
꽃 봉우리를 살랑살랑 흔드네
그리고 바로 지금
내가 깨어있을지라도,
내 가슴 속에 뭉클한 동요가 일어나네.18)

일본의 중요한 한 전통이 인간 사회의 일반적인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이나 숲이나 어떤 자연 환경 속에서 고독을 추구하는 것임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시를 살펴보면 정신적 성숙, 깨달음 또는 종교적 성취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연과 깊이 의사소통을 갖는 일이 필요하거나 적어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고독하게 거주함을 의미하며, 어떤 경우에는 정원 역시 이러한 기능을 충족시켜 준다. 대학과 같은 문명화된 조직에 뿌리박혀 사는 우리들은 손에 책 한 권 없이 산 속에서 고독한 사색을 하는 일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그러나 숲 속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에게는 독서가 깨달음을 추구하는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몇몇 증거가 있다. 전원적 자연의 맥락에서 깨달음을 찾을 경우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시 두 편을 면밀히 살펴보자.

첫 번째 시는 일본 선승이자 시인인 료오칸(靈觀)이 쓴 것이다.

암흑 같은 겨울 12월에 비와 눈이 녹아 내리고,
천 개의 언덕은 모두 한 가지 색이요.
거의 아무도 가지 않은 일 만개의 길,
과거의 방황들은 일장춘몽이 되었네.
풀로 만든 문과 그 잎사귀는 단단히 붙어 있네.
초가집 문과 섶은 단단히 붙어 있네.
톱밥을 태우는 밤에,
조용히 옛사람들이 쓴 시를 읽는다.19)

두 번째 시는 한산(寒山)이라는 은둔 승려로 알려진 이가 지은 것인데, 그는 중국에 있는 한산의 비탈진 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나의 집은 벽암(碧巖) 아래 있고,
나의 정원, 내 더 이상 성가시게 잡초를 깎을 필요가 없다.
가파르고 높이 치솟은 오래된 바위 위에
새 덩굴들이 뒤틀린 가닥으로 매달려 있나니,
원숭이는 산 속 과일을 가지고 급히 달려가고,
흰 왜가리는 연못에서 부리 속에 물고기를 밀어 넣는다.
불멸의 책 한 권을 들고
나는 나무 아래서 웅얼거리며 독서를 하네.20)


데이비드 킨슬레이(David Kinsley) 
맥마스터 대학(MacMaster University)교수. 저서로는 《생태학과 종교: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본 생태적 영성(Ecology and Religion - Ecological Spirituality in Cross-Cultural Prespective)》(1995)이 있다.

원병관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영어학박사. 뉴욕주립대학 스토니부룩 객원연구원(2001-2002).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강원도립대학 교양과 조교수. 저서로는 Effective Reading Comprehension, 《영어 교수학습의 원리》, 《외국어 교수 방법론》, 논문으로는 “Buddhist Ethics and Ecology in Modern Society”, The Journal of the Korean Association for Buddhist Studies, “The Impact of Buddhist Ethics on “Hwarangdo””(2002. AAR)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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