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불교와 예술

1. 인터넷 불교음악 감상실

3년 전 어느 날이었다. 필요한 인터넷 자료를 찾아 검색하던 중 <세계의 종교>라는 사이트를 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여러 종교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각 종교관련 음악들도 소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교 쪽에는 음악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기독교 쪽에는 '찬송가'가 있고 천주교에 '생활성가'가 있다면, 불교에도 '찬불가'라는 것이 있는데 어찌하여 불교음악에 관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교음악', '찬불가' 등의 단어로 검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검색 사이트들을 뒤졌음에도 찬불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얼마간의 노력을 통해 겨우 찾아 낸 사이트로서, 찬불가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음반을 기획·판매하는 곳 몇 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두어 개의 사이트를 통해서라도 필자가 들었던 법회 의식곡 외에 여러 찬불가가 음반으로 제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불교음악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근처의 음반가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불교음반들을 구입하자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이것들을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결국 웹사이트 몇 곳을 통해, 시디와 카세트 테이프로부터 인터넷에서 들을 수 있는 파일로 옮기는 법을 질문하여 배운 후, 구입한 불교음악들을 모두 파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인터넷 방송국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초라하지만, '불교음악 감상실'(www.sambori.com)이란 자그마한 홈페이지를 만들게 되었다.

그후로 국내의 어느 사찰을 가든지 아니면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불교음악들을 찾기 시작하였고, 주변에도 해외에 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면 "혹시 그곳에 불교에 관련된 음반이 있으면 구해다 주시겠어요"라는 말로 배웅을 하곤 하였다.

그렇게 하여 현재까지 수집된 불교관련 음악들은 찬불가, 찬불국악, 불교관련 명상음악, 찬불동요, 독송, 중국·티벳·베트남 등의 불교관련 음악을 합쳐 약 200개가 조금 넘는 상태가 되었다. 현재, 매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방송이 진행되는 '불교음악 감상실' 홈페이지에는 하루 평균 100명이 넘는 방문·접속자의 숫자가 기록되고 있다. 2002년 7월 홈페이지의 용량이 부족하여 별도로 웹호스팅을 서비스를 이용해 개편한 이후, 현재까지 총 32,692명의 접속기록이 축적되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불교음악 관련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불교음악을 감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불교음악에 대해 평소에 가지고 있던 느낌들을 본고를 통해 간단히 서술해 보고자 한다.

2. 불교음악의 필요성

우선 필자가 즐겨듣는 곡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불교음악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개인적으로 즐겨 듣는 곡은 홍순지 씨의 <눈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는>과 김승화 씨가 부른 <산사의 종소리>이다. <산사의 종소리>는 그 가사가 마치 불교를 처음 접했던 20대 초반의 필자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내가 지은 업장인데
사주팔자 나쁘다고 원망도 하고
얄궂은 세상이라 탄식도 하며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산과 들로 방황하던 그 어느 날
산사의 종소리가 내 마음 울려라.
나는 들었지 님의 말씀을
나는 보았지 님의 미소를
번뇌와 망상들이 나의 적이라고
웃음 잃은 이 마음이 나의 병이라고
아아 산사의 종소리 영혼을 퍼져 가는 구원의 소리.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필자 역시 대학시절의 무수한 방황 속에서 불쑥 조계사 법당에 들어가 본 것이 불교와의 깊은 인연이 되었는데, 그러한 젊은 시절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한 이 노래의 가사는 유난히도 마음을 끌어당긴다. 이 곡 다음으로 즐겨듣는 곡은 홍순지 씨가 부른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는>이란 곡이다.

눈 내린 들판을 밟아 갈 때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낮에는 한잔의 차요
밤들면 한바탕의 자비일세.
푸른 산과 흰구름이 함께
나고 감이 없음을 이야기하네.

이 곡은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를 노래로 만든 것인데,{{)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 자기 자신의 발걸음 하나, 행동거지 하나가 세상에 어떠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노래이다.

물론 이 선시의 내용이야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그것을 늘 가슴에 담고 있지 못한 것이 우리들 중생의 삶이지만, 내 발자욱 하나가 이 세상에 올바른 이정표가 되기도 하고 잘못된 이정표로 세상을 어지럽게 할 수도 있음을 잠시라도 돌이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면, 그것이 바로 연기(prat tyasamutp da)의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음악의 힘이란 바로 이렇게 어려운 가르침을 쉽고도 가슴깊이 느끼게 만들어 주는 데 있다.

오늘날 불교음악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문득 스쳐듣는 음악 한 소절이 깊은 불심(佛心)을 일으킬 수 있음이, 마치 육조 혜능 스님께서 나무를 하다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깨침에 이르는 순간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또한 현대의 바쁜 생활 속에서 조용한 시간을 내어 경전을 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경전의 핵심이 되는 말씀들을 쉽게 풀어놓은 노래들을 통해, 생활 속에서 항상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중생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는 불교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일상에서 필자가 접하는 불자들 가운데는 청년 불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필자의 생각으론 그 중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접하는 음악이 서구적 리듬을 가진 것들이 많고, 그러한 것은 또한 찬송가와도 쉽게 접합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최근의 다른 종교들의 음악적 성향을 살펴보면, 그들이 젊은이들의 음악적 취향을 상당한 수준으로 배려하여 다양한 장르로 발표하고 있는데 반해, 불교음악은 아직 그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모든 종교는 각각 독자적인 종교음악을 발전시켰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논리를 초월하여 직접적인 감동을 안겨주는 음악 자체가 일종의 종교로까지 인식되기도 한다. 또한 원시종교에서는 음악적 행위가 곧 종교적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힌두교·불교·시크교 등도 각기 고유한 종교음악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시크교의 경우엔 종교의식 자체가 일종의 연주회가 아닌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탁월한 음악성을 보여주고 있다. 유교에서도 예악일치(禮樂一致)를 논하여 음악의 중요성을 언급하였고, 고대 메소포타미아·이집트·그리스·로마 등에서도 종교행사에 음악이 연주되었다는 것은 기록을 통해 잘 알려지고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종교심의 발현을 위한 것이든, 종교의식 혹은 전도를 위한 것이든, 종교에 있어서 음악이 담당하는 역할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계를 살펴보면, 불자들의 상당수가 중·장년 층 이상의 연령에 편중된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필자는 이러한 현상과 불교음악의 문제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동요를 부르듯,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캐롤을 부르듯, 청소년기에 여러 음악을 취미로 듣듯이, 그렇게 불교음악을 접할 수 있다면 젊은이들이 불교를 훨씬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맞는 불교음악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3. 불교음악의 현황

일반적으로 가요가 트로트, 발라드, 락, 힙합 등의 장르로 나뉘는 것을 기준으로 기존의 불교가요를 분류한다면, 현재로서는 트로트와 발라드에 속하는 곡들이 대부분인데 근래에 들어와 국악류의 찬불가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트로트라고 부르는 유형의 곡들은 부르기 쉽고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많은 음반들이 나와 있다. 근래에는 스님들이 직접 부른 찬불가들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지만, 젊은 층과 청년 불자들에까지 어필될 만한 곡은 그리 많지 않다.

최근에는 국악 부흥의 바람을 타고 불교음악에도 국악 풍의 곡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마도 박범훈 교수의 곡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91년 초연된〈교성곡 붓다〉를 시작으로〈보현행원송〉〈부모은중송〉〈이차돈의 하늘〉〈용성〉등의 교성곡을 발표했고, 불교음악《무상》《김성녀의 찬불가》등의 앨범도 냈다. 다음으로는 김회경 씨가 작곡한 곡들을 들을 수 있는데, 1996년에 교성곡〈불밭에 피는 꽃〉을 작곡하고, 1999년〈교성곡 혜초〉등의 국악 찬불곡을 발표했다.

또한 안숙선 명창이 부른〈판소리 불타전〉역시 국악 불교음악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악 불교음악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이 대작이라는 점이다. 교성곡들은 대개 그 총 연주시간이 육십 분을 넘나들고 있고, 판소리는 두 시간 가깝게 진행된다. 따라서 이러한 대작들은 우리가 평소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듣는 음악으로는 부담이 된다.

근래의 음악계의 흐름을 살펴보면, '명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음반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비단 국내에 한정된 현상은 아니다. 뉴에이지(New Age) 계열의 음악들 가운데는 동양의 정신세계를 담아 낸 명상곡들이 많이 있으며, 특히 독일의 올리버 샨티(Oliver Shanti)나 도이터(Deuter) 등의 음악에는 그 소재 자체가 불교적인 곡들이 많이 있다.

국내에서도《산사의 명상음악》《도(道)명상음악》《선의 세계》등을 비롯한 많은 명상 앨범들이 발매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유승엽 작곡의《선(禪)음악 혜초》는 오카리나 연주 앨범인데,《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 스님이 703년에 구도여행을 시작해 787년에 입적할 때까지의 과정을 음악으로 표현한 명상음악이다. 이외에도 '명상'이라는 이름을 붙인 많은 앨범들이 제작되고 있다.

한편 기존에 발매된 불교음악 가운데 가장 희망을 갖게 해 주는 것은 아마도 찬불동요 음반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나라와 같은 음악적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불교와 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찬불동요는 바로 어린이들의 마음에 불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경우 종교를 떠나 12월이 되면 누구나 따라 부르고, 불자라 할지라도 캐롤 한두 곡쯤은 쉽게 외워서 부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캐롤을 많이 들어서, 그것에 익숙한 음악적 환경 속에 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연등 행렬이 벌어지고 찬불가가 울려 퍼졌지만, 캐롤을 부르듯 찬불가를 흥얼거리는 분위기는 전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불교가 일반인들의 생활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쉽게 접할 수 있는 찬불동요를 중요시하고, 그러한 음악들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일에 매진하고 있는 곳이 '풍경소리'이다. 필자는 이곳을 감히 '찬불동요의 전진기지'라고 부르고 싶은데,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찬불동요집 '풍경소리' 음반을 꾸준하게 만들어왔으며, 특히 올해에는 봉축기념으로《연등축제의 노래, 사바하》라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풍경소리'의 음반 가운데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간혹 우리 어른들에게까지도 불교의 핵심을 일깨워주는 곡들이 들어 있다.

특히 2집에 실린〈마음은 신기해〉라는 곡의 가사를 음미하며 듣고 있노라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하는가에 대해 때로는 경전을 읽는 것보다도 자연스레 그 해답을 주는 듯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신기해.
세상 모든 일도 신기해.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죠.
의사가 칼을 잡으면 사람을 살리고
도둑이 칼을 잡으면 사람을 헤쳐요.
우리들의 마음은 마음은
모든 것을 만들어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우리 마음에 있어요.

풍경소리 이외에도 그 동안《어린이법회 찬불가》《대한불교민족종교예술단》《김향의 어린이찬불가》등의 앨범이 발매된 바 있지만, 그 후속 앨범들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상에서 지금까지 발매된 음반을 중심으로 불교음악의 현주소를 간략하게 돌아보았다. 한 마디로 말해 기존에 발매된 음반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대작이거나 일부 연령층에 편중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극복하여, 모든 계층에게 부처님 음성을 음악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바로 현시점에서 불교음악이 안고 있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4. 불교음악 창작의 제문제

필자는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며 하루에 두 시간씩 불교음악을 듣고 있다. 처음 불교음악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을 때부터, 인터넷 사이트에서 감상실의 기능을 함께 한 '대화방'이라는 것을 만들어 두었다. 누가 알아서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대화방을 열어두고 인터넷으로 음악을 송출하는 형식으로 매일 두 시간씩 이 년 가깝게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불교음악을 듣는 셈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두 분의 스님이 진행을 함께 하여 교대로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다. 비록 공중파 방송은 아니라 하더라도, 매일 10-20명 정도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1시간 30분 정도는 불교음악을 감상하고 25분 정도는 경전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과정에서 느낀 문제점들은 어떠한 것들인지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다양성의 부족

방송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아쉬운 점은 근본적으로 곡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줄잡아 200개 정도의 앨범을 가지고는 있지만, 찬불가요의 경우는 같은 곡을 다른 사람이 부른 것이 많고, 새로운 앨범이 발매되어도 기존의 곡을 다시 부르고 몇 곡만 새로 창작하여 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찬불가요로 분류해 둔 앨범은 100개가 넘어가도 같은 곡을 빼고 나면 그 절반 정도라고 해야할 것 같다.

현재 불교음반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상당히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선은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곡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된다. 최근에는 많은 불교음악이 나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종교음악들에 비하면 아직도 걸음마 단계라고 보아야할 것이 불교음악이기 때문에, 특정한 장르만을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2) 인터넷과 불교음악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요사이는 피투피(p2p)라는 것을 통해 음악을 교류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저작권에 위배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많은데, 불교음악 역시 이러한 논쟁에서 예외가 아니다. 피투피가 가능한 사이트들을 통하여 상당수의 불교음악이 엠피쓰리(mp3)라는 형식의 파일로 상호 교류되고 있다. 물론 불교음반을 제작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흥행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불교 음반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앨범을 구입하지 않고 엠피쓰리 파일이 교류된다면, 새로운 불교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부정적 역할을 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음반은 유료로 구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외쳐보지만, 이러한 의견이 별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일반 대중가수들의 음반의 경우에도, 돈을 내고 구입해서 들을만한 곡이 앨범 전체에서 반도 안되기 때문에 파일로 주고받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불교음반의 경우는 들을만한 곡의 여부를 떠나 이미 발표된 곡들이 중복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더욱 더 앨범 구입의 욕구가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피투피를 통해서라도, 일단은 불교음악이 널리 알려지는 것이 긍정적인 일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최근 들어 인터넷 채팅 사이트마다 몇 개씩의 불교음악을 듣는 음악대화방이 생겨나고, 그를 통해 불교음악이 불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3) 새로운 장르의 발굴

불교음악에 관한 또 다른 논의로는 찬송가 풍인 초기 찬불가와 법회의식곡들을 다시 작곡해야 한다는 문제를 들 수 있다. 필자는 우선 역사적 흐름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그러한 옛 곡들은 그것들대로 두고, 새로운 물결 속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곡들이 작사·작곡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타종교의 음악 스타일과 유사하다는 분별심만 앞세워, 무조건 예전 것은 잘못이니 고치자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극단적인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로크 음악 시기 다음에 고전주의 음악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바로크 스타일의 음악을 모두 고전주의 스타일의 곡으로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유성기 음반 시절의 창극곡들이 오늘날 좀 유치하게 들린다 할지라도 그러한 곡들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인 만큼 굳이 그것을 새로 고쳐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한다.

비록 초기 찬불가의 흐름이 찬송가 스타일이었다고는 할지라도,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찬불가는 당시의 찬불가대로 두고, 새로운 스타일의 국악풍이나 레게풍 혹은 힙합풍의 찬불가를 작곡하여 불음(佛音)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온당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일 시대적 정서가 다른 상황에서 만들어진 찬불가라고 해서 모두 고쳐야 한다고 하면, 애국가도 국악으로 다시 작곡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서양풍의 음악보다는 국악풍의 음악이 더 불교적이라는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벽을 쌓아 갇히게 되는 결과를 낳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어떠한 형식이나 장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불교음악이 다양하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도리도리'의《부다팝스》음반, 유승엽 작곡의 락음악《카르마》음반, 그리고 '스나이퍼'(MC Sniper)의 힙합 곡〈육도 윤회〉등은 새로운 시도로 여겨지며, '니르바나 필하모니'와 같이 "서양악기로 동양의 정신을 실어 부처님의 음성을 전한다"는 모토를 표방한 오케스트라 역시 불교음악의 새로운 장르를 이끌어 갈 수 있기에,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트로트나 명상류 등의 찬불곡은 꾸준히 이어지는데 반해, 락(Rock)이나 힙합 곡은 그러한 바람을 타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 대하여 혹자는 불교음악은 락이나 힙합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찬불곡의 기본이 부처님 말씀을 음성으로 전한다는 데 있고, 청년불자가 턱없이 모자란 오늘의 한국불교라는 상황에서 보면, 젊은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불교음악을 만들어 그들에게 부처님의 음성을 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현재 불자의 대다수가 중년층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아줌마 불교'라는 말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러한 연령층에 어필될 수 있는 음악 위주로 찬불곡이 만들어지는 것 역시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보다 젊은 불교, 보다 활기찬 불교를 지향하려고 하면, 불교음악 역시 국악이나 명상류 혹은 트로트 형식이어야 한다는 일반적 인식을 과감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 불교는 대승불교의 흐름 속에 있고 대승불교의 지향점이 생활불교라고 한다면, 어떠한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히는 모습은 좋지 않을 뿐더러, 젊은이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불교와 가까워지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서에 맞는 불교음악을 만들어 부처님 음성을 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4) 종교성과 음악성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새로운 장르, 즉 락이나 재즈 등의 다양한 불교음악 나와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음악이 추구해야 할 근본은 "부처님의 음성을 전한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음악적 수준이 높은 그룹이나 연주자들을 모아놓고 불심 없는 소리만의 불교음악을 만들어서도 안될 것이고, 반대로 불자 혹은 스님들이 연주한 음악이라고 하여 그 음악성이나 내용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불교음악으로 이해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종교음악은 본래 음악성과 종교심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양악기를 다루거나 서양음악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불자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락이나 재즈, 힙합 등의 찬불곡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각 종단이나 단체에서 '찬불가 공모'를 하거나 '찬불가 경연대회'를 열어 각 장르별로 장려한다면, 좀 더 다양한 음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때 찬불가 공모대회 혹은 경연대회가 트로트 일색으로 꾸며졌던 때가 있는데, 그러한 흐름이 아직도 그다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음은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이다.

5) 불교음악과 방송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보다 많은 불교음악을 공중파 방송을 통해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디오 혹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불교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턱없이 부족하다. 불교방송 라디오 채널의 경우에도 찬불가를 전문적으로 선곡하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고, 불교텔레비전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1년 전에 '스카이라이프'(Sky Life) 위성채널에 불교음악 채널이 생긴 것을 계기로 불교음악의 활성화를 기대해 보았지만, 그 역시 기폭제가 되지 못한 채 최근에는 채널의 유지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일은 불교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비록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공중파 방송에서 찬불곡들이 많이 방송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을 때, 이를 계기로 보다 많은 불교음악들이 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반 대중가요계의 음악에 대한 소비·유통구조에서, 이러한 메카니즘은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이다. 현실이 이러한데, 불교관련 방송에서조차 찬불곡의 방송에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전문적으로 불교음악을 작곡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양성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요가 없는 공급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이 만들어지는 음반이 '신곡발표'라는 잠시의 뉴스거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방송됨으로써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보급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속 음반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자연스럽게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적어도 불교관련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에서 만이라도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6) 불교음반의 제작

방송의 역할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불교음반을 제작하는 이들 역시 좀더 세심한 음악성을 갖추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음반 제작에 무성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음반들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앨범에 수록되는 음악들은 한 곡 시작될 때와 끝날 때는 '훼이드 인'(Fade in)과 '훼이드 아웃'(Fade out)이라는 형태를 갖고 있다.

 즉 시작할 때 점점 커지는 것과 곡이 끝날 때 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마치게 되는 것으로, 앞의 곡과 뒤의 곡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간혹 불교음악 시디(CD)들 가운데는 이러한 기본적 손질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존재한다. 그 나름대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공중파 방송은 물론 인터넷 방송에서도 그러한 곡을 선곡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하나의 곡이 끝났다는 느낌보다는 곡을 중간에 잘라버렸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방송국에서 선곡할 때 그러한 음악들은 제외시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다. 애써 만들어낸 불교음악 앨범을 방송에서 선곡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깊이 반성해야할 부분이다.

청취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일이 종교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음악적 수준을 너무 낮게 생각하고 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음악이란 일반 음악적 수준에 플러스하여 깊은 종교적 영감을 담아내야만 한다. 음악적 수준에 앞서 종교적 신심만으로 들으라고 하는 것은 음악으로 부처님 음성을 전하는 데 오히려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5. 전통보존에 대한 제언

이렇게 대중 지향적인 찬불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전통을 지켜 가는 일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전통적인 불교음악의 뿌리는 단연 범패일 것이다. 범패는 불교의식을 진행할 때 사용하는 모든 음악을 총칭한 것으로, 요즘에는 주로 '영산재' 시연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 영산재는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취산에서 여러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법화경을 설(說)하실 때의 모습을 재현한 불교의식인데, 이 의식에서 소리와 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범패는 스님들이 의식을 집전 하면서 행하는 곡으로 일반 대중이 개인적으로 감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1999년부터《한국의 범패 시리즈》음반이 제작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1973년에 범패가 '무형문화재 50호'로 등록되고, 이어서 1987년에 마당종목으로 확대되어 바뀌면서, 영산재로 바뀌게 된 것이 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2000년 2월에 영산재 기능보유자이신 송암 스님이 입적하였고, 며칠 전 5월 11일에는 영산재 기능보유자로는 유일한 생존자였던 일응 스님마저 입적함으로써 영산재 기능보유자 모두가 열반에 드시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들의 뒤를 이을 맥(脈)을 걱정하는 소리들이 한층 높아만 지고 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겁던 지난해 5월 30일, 신촌의 봉원사에서는 월드컵경기 개막을 앞두고 영산재를 시연하였다. 많은 스님들이 참가해서 시연을 보였던 영산재를 보면서 필자는 조금은 착잡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의 영산재에 시연되는 춤과 범패를 보고 들으면서 이것이 공연인지 시연인지 하는 생각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행사'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왠지 최근에 유행하는 예술 사조인 '퓨전'(Fusion)과 유사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하면 과한 것일까. 필자는 의식(儀式)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불교음악이라는 관점에서도, 영산재의 범패와 춤은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에 두고, 그것을 대중화하기 위한 변환과 퓨전 혹은 크로스오버(Crossover)의 성향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것들이 시연되거나 들려진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느 한편에서는 한음, 한 소절, 한치의 동작도 어긋남 없는 전통이 지켜져 그 맥이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전통 준 기능 보유자'인 스님들의 범패를 영상화하거나 음반화하여 보존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교음악을 아끼는 사람들의 당연한 바램일 것이다.

해외 공연이나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양한 행사성 시연도 물론 필요한 일이지만, 면면이 이어지는 우리 불교음악의 진수를 그대로 보존하고 전하는 역할도 누군가는 해야하는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시도와 퓨전음악이 창작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조류로서 이 또한 시대가 변하면 바뀌어갈 하나의 조류일 뿐이다. 그러나 전통은 그 뿌리이며 알맹이인 것이다. 이 알맹이는 누군가에 의해서라도 한치의 작은 변질도 없이 지켜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뿌리와 알맹이를 바탕으로 국악풍과 외국풍의 리듬이 섞이는 퓨전이 만들어질 수 있고, 영산재의 동작과 다른 무용의 동작이 뒤섞이는 크로스오버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 또 다른 조류가 일어났을 때는, 변화를 겪은 지금의 새로운 것을 뿌리로 하기보다는, 고수된 전통을 바탕으로 그것을 씨앗으로 하여 또 다른 류의 음악적 물결이 일어나야 하며, 그것은 시대정신에 부응한다는 불교의 근본정신과도 부합되는 일이다. 새로운 조류가 일어난다고 하여 그것에 전념하고 전통을 지켜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음 세대의 또 다른 시대적 상황에서 뿌려질 씨앗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쪽으로는 조금도 변질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으로 범패를 전수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것을 씨앗으로 하여 국악 혹은 힙합과의 접합 등의 시대에 맞는 곡들의 변화된 모습을 만듦으로써, 전통의 전수라고 하는 주체적 태도와 시대조류의 흐름을 타는 유연한 태도를 동시에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통만을 고수하여 "불교음악은 국악이거나 범패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편협한 일이 될 것이고, "새로운 창조가 중요하다"고 하여 지켜야 할 본질인 범패를 변조된 채로 후대에 전하게 되는 우를 범해서도 안될 것이다.

6. 나오는 글

지금까지 불교음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불교음악에 대한 제언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불교음악을 감상하고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들을 간략히 서술해 보았다. 필자는 불교 혹은 음악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적인 부분에서 잘못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행여 이러한 글 몇 줄이 불교음악과 불교에 가까이 있는 분들께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불교음악에 대한 애정이라고 변명의 말을 덧붙여 보고 싶다. 앞으로 보다 다양한 종류의 불교음악이 만들어져, 음악을 통하여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도 부처님같이' 살아지기를 발원해 보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박금표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남아시아연구소 전임연구원. 숙명여대 및 한국외국어대 강사. 인터넷 불교음악 감상실(www.sambori.com) 진행자. 논문으로는《불교와 인도 고대국가 성립에 관한 연구》(박사학위논문)〈고대 인도 농민의 신분변화〉〈붓다시대 왕권강화와 불교에 관한 연구〉〈아르타사스뜨라에 나타나는 수드라와 농민에 관한 소고〉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