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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경계 : 세잔느, 다빈치, 그리고 용수(龍樹) / 홍성기
[기획] 불교와 예술
[15호] 2003년 06월 10일 (화) 홍성기 nagajuna@korea.com

I. 시간과 소요(逍遙): 세잔느의 경우

예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명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고 미술은 공간의 예술이다.

이러한 언명은 직관적으로는 쉽사리 이해가 가는 듯 보이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확히 그 이유를 밝히라고 한다면 생각처럼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견해는 음악과 미술에 대한 서양미학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수수께끼가 발생한다.

그것은 흔히들 '기운생동(氣韻生動)', '살아 있음' 등과 같이 그림과 조각을 묘사하는 상식적인 표현들과 조형예술로부터 시간적 요소를 배제하려는 전통적 미학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생동한다"거나 "살아 있다"라는 표현들은 모두 "움직임"을 개념적으로 내포하고 있고, 움직임이란 다른 모든 변화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을 전제한다.

따라서 기운생동하는 조형예술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간의 흐름과 연관을 맺어야만 하나, 바로 그 점이 전통적인 미학에서 부정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 근원이 자리한다. 직관적으로는 미학적 관점도 이해 가능한 것이며, 또한 상식적으로는 생동감에 대한 일반적 상식들 역시 그 나름대로 수긍이 간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일단 딜레마(dilemma) 즉 역설(paradox)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고 보인다. 그것을 우리는 편의상 "기운생동의 역설"이라고 불러보도록 하자.

한편 그림 속의 어떠한 인물도, 또 어떠한 인체조각도 사람처럼 움직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운생동"이니 "살아 있다"느니 하는 표현들은 그저 비유적, 문학적 감탄사로서, 혹은 조형예술의 전문용어로서 "빼어나다"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천과 종이 위에 그려진 인물과 청동으로 주조된 인체상(人體像)을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살아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반면에 사진술 초창기에 사진이 영혼을 빼앗아간다는 두려움의 바탕에는 사진 속의 인물이 "살아있다"고 보여졌고 영혼은 하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운생동"이나 "살아 있다"라는 표현이 단순한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일단 비유를 유추(類推, analogy)와 은유(隱喩, metaphor)로 대별하여 본다면, 두 개의 대상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공통적인 속성을 전제로 하는 유추(예: 쟁반같이 둥근 달)는 먼저 배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나 풍경을 단순히 비슷하게 모방하였다고 해서 작품의 품격을 의미하는 앞의 표현들이 부쳐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技)와 기(氣)를 구별하는 동양의 오랜 전통은 바로 이점을 충분히 말해 준다.

 한편 은유를 대상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비로소 새로운 속성이 드러나는 경우(예: 양[陽]-하늘, 남성, 태양, 앞[前], 높음[高] 등등/ 음[陰]-대지, 여성, 달, 뒤[後], 낮음[低] 등등)를 의미한다면, "기운생동" 등의 표현이 하나의 은유로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그림과 그 그림의 대상이 비록 다르다고는 하나 "기운생동"이라는 표현은 양자에 공히 같은 의미로 쓰여지며, 또한 각각 독립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산의 깨끗하고 생동하는 모습을 볼 때나 혹은 그 산의 빼어난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모두 같은 의미에서 "기운생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즉 기운생동의 역설은 "기름진 음식"과 "기름진 땅"의 경우와는 다르다).

앞의 두 표현들의 사용은 유추와 은유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들 표현은 기운생동하는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이나 살아 있는 인물의 모습이 예술작품에 '그대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로 이들 작품에서도 대상(motive)의 살아 있음을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고 봄이 내용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앞의 기운생동의 역설이 갖는 모든 문제는 이 "그대로"라는 표현으로 옮겨진 것이지 아직 해명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다. 시공(時空)의 지평에 놓인 대상이 회화와 조각으로 옮겨질 때, 즉 모든 것이 찰나찰나 변하고 마는 대상의 세계가 정지의 세계로 옮겨질 때, 그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의 시간성 역시 공간성과 함께 옮겨져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는 살아있음, 즉 생동감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우정을 광활한 대기 속에서 동일한 상승과 동일한 목마름으로 풀어 주는 것, 그것은 아마도 천재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우주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일, 그리고 그것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일.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흩어지고 사라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연은 항상 동일하지만 자연의 가시적 현상 중 어느 것도 지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예술은 자연에다 --- 변화하는 모든 현상 및 구성요소들과 함께 --- 지속함이 갖는 숭고함을 부여해야만 합니다.

세잔느(Paul Cezanne: 1839-1906)에게 그림이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지향점을 갖는 행위였다. 그것은 그가 본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회화라는 지속적인 형식을 통해 옮기는 일이었다. 세잔느는 그것을 바로 "실현"(realization)이라고 불렀다.

회화에 있어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접근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처럼 단순한 작업을 해낼 수 있는 화가를 "천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유동(流動)의 세계를 일견 정지된 형태로 옮긴다는 것은 마치 원을 사각에 맞추는 것처럼 지난한 일일 것이란 점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평론가들이 세잔느의 회화에 있어 나타나는 "자연의 지속적인 형태"를 플라톤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시공의 현상세계 저편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 추상적 존재로서 자연의 원형, 영원한 형상 등등. 이러한 해석은 바로 조형예술에서 시간성을 배제하려는 견해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그린다는 행위를 그 어떤 직관에 의한 미(美)의 복제(copy)로 해석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서양사상사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플라톤적 세계란, 실상 엄밀한 성찰의 차원에서 볼 때 일체의 인식론적인 바탕이 결여된 가공적 동화의 세계와 구별하기 힘든 것이다:

자연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어쩌면 모든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잔느는 시공 속의 자연의 세계를 그 어떤 변환법칙, 예를 들어 좌표계의 이동이나 삼차원의 공간세계를 평면에 일대일 대응시키는 투사-기하학적 방법으로 재조직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없음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원칙으로부터 대상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에 도달하였다:

흐흠! --- (그는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두 손을 벌리고는 열 손가락을 편 후 천천히 다시 합쳐 쥐가 나도록 꼭 깍지를 끼었다.) 여기, 이것이 바로 터득해야 할 부분입니다. 내가 너무 높이 혹은 너무 낮게 손을 대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단 하나의 엉성한 그물코나 구멍이 있으면 그것들을 통해 나의 감흥이, 빛이, 진실이 빠져나갑니다. 나는 그림의 실현과정을 화폭 위의 모든 부분에서 동시에 진행시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나는 동일한 추진력으로, 동일한 믿음을 갖고 서로 떨어져 나아가려는 모든 것을 연관관계 속으로 다시 놓습니다. ( ) 해서 나는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이 손을 깍지끼고 있습니다. 나는 오른쪽, 왼쪽, 여기, 저기 모든 곳에서 이 색깔을, 이 음영을 취하고 그것을 공고하게 만들며 이들을 서로 합칩니다. (…) 그것들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이에 윤곽을 이루고 대상들, 바위들, 나무들이 됩니다. 이들은 부피를 갖게 되고 작용치를 갖습니다.

그림 속의 덩어리와 무게가 눈을 통해 나에게 직접 주어진 지각 속의 평면들과 점들에 대응한다면, 좋습니다, 나의 그림은 두 손을 깍지끼게 되지요. 이때 그림은 흔들리지 않고 대상을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잡아냅니다. 그림은 이제 바로 진실로서 빈틈 없이 꽉 차게 됩니다. (…)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한 눈을 팔면, 약간이나마 허약함을 느낀다면, 특히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어 해석하려 든다면, 혹은 어제와는 모순된 이론이 나를 사로잡게 되면, 그림 그리는 중에 일호(一毫)만큼이라도 어떤 생각을 한다면, 내가 그 사이에 끼여들게 된다면, 모든 것은 무너지고 실패하게 됩니다. ( ) 예술가는 단지 수용기관(受容器官), 즉 감각의 기록장치에 불과합니다.

세잔느는 자신의 작업과정에 대한 사후(事後)의 기술(記述, description)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중에는 그 어떤 대상도 개체(個體, individual)로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진술하고 있다.

즉 다른 사물들과 독립적으로 시공 상에 연장(延長)되어 존재하는, 즉 "지금 여기에, 그러나 얼마 후 저기에 존재할 수 있는" 이른바 "개체"란 그에 의하면 특정한 대상에 관심을 두었을 때나, 혹은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배경으로부터 대상을 오려 내었을 때"나 구성되는 "생각의 산물"이란 점이다.

바위나 나무들과 같은 개체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이에" 점차 그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지 감각의 세계에 직접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상세계에서 개체가 사라질 때는 대상들간의 독립성 역시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서로간에 맞물려 있는, 따라서 어떤 "구멍"도 있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데, 세잔느는 이 점을 "두 손이 서로 깍지낀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때 우리는 위의 기술이 단순히 한 철학자의 사변적 결론이 아니라, 한 화가의 직접적 체험에 근거한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잔느는 바로 이 체험에서 진실과 아름다움이 동일하다는 점을, 즉 인식의 세계와 미의 세계의 일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실이 그러하듯 미란 입맛에 따라 바뀌는 상대주의적 산물도 아니며 또 이미 영원한 시간을 위해 만들어져 플라톤적 세계에 저장되어 있는 기성품도 아니다.

칸트적인 관점에서 시간과 공간이란 이른바 선험적으로 주어진 직관형식으로서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외부의 세계를 인식자의 내적 범주(範疇)에 의해 구성하는 일종의 틀로서 이해되었다. 개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뉴턴의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을 받아들인 칸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지속이라는 개념은 개체의 발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인식론적으로 시간과 시간의 흐름이란 시간의 측정을 전제하며 시간의 측정이란 항상 주기적 변화를 전제하고, 변화란 바로 시공 상에 연장된 개체의 존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손목시계, 모래시계, 맥박 등은 모두 일정한 변화에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는 주기성을 전제하며, 이때 변화의 주체인 바늘, 모래알, 심장 등은 바로 그 모두가 개체들인 것이다. 시간의 측정과 관련된 인식론적인 근거문제는 1905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하기 전에 이미 포앙카레(Poincar )가 제기한 바 있다. 그는 시간의 흐름은 주관적으로는 기억의 선후관계에,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오로지 개체의 주기적 변화에서만 인지할 수 있으며, 변화란 곧 인과관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 '원인'과 '결과'는 역으로 시간의 선후관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순환적 고리를 이룬다는 점도 포앙카레는 지적하였다. 실로 개체는 시공 상에 연장되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 개체와 시간은 이처럼 서로간에 물고 물리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동시에 지속하기도 해야만 하는 개체가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변화/지속의 주체의 소멸을 의미하며 나아가 변화/지속하는 자연세계를 화폭에 담아야 한다는 요구 역시 소멸시킨다. 중요한 점은 이때의 요구란, 바로 그림이라고 하는 행위중의 요구라는 사실이다.

 바꿔 말해 오랜 기간 같은 대상을 그릴 때 흔히 빠지기 쉬운 시간의 중첩에 대한 필요성은 화가 스스로가 만들어 낸 관념적 요구에 근거한다. 발튀스(Balthus)의 경우가 아마 가장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시간의 흐름, 중첩에 대한 관념의 사라짐과 함께 시간의 절편(切斷, slice)으로서의 순간(瞬間)에 대한 관념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한 순간이 곧 영원이고 영원이 곧 한 순간이라는 화엄(華嚴)적 시간관(時間觀)에 다름 아니다.

어느 한 순간의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려는 시도는 인상주의, 그 중에서도 특히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작업과 관련시켜 생각해왔다. 그러나 일단 매우 짧은 시간의 대상의 모습을 기계적으로 포착하는 사진과 달리, 대상과의 만남이 사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장시간인 회화나 조각의 경우 순간의 포착이란 결코 순간 자체가 아니라 순간에 대한 기억의 개입을 불러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마치 관성을 갖고 날아가는 화살을 잡으려는, 즉 시간을 정지시키려는 노력과도 흡사하다. 따라서 순간의 포착이란 항상 시간의 흐름 바깥에 서서 시간을 "바라보고, 잘라내고, 잡으려는" 제3자의 입장을 의미한다. 모네의 그림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인상에서 출발함이 이를 말해 준다. 개체의 사라짐은 관념의 사라짐일 뿐, 실제세계에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잔느의 경우 앞에서 말한 회화의 지향점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나, 내용적으로는 이제 개체의 변화를 통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화가의 시점(視點)과 시각(視角, perspective)들의 실현이 화폭에 공간적·감각적으로 자취를 남기고, 이 "자취를 따라감"이 바로 시간 자체가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폭 위의 대상들은 모두 동일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구석구석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일종의 토폴로지군(topology群)을 형성한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 경이(驚異)를 우리는 세잔느에게서 특히 그의 풍경화와 정물화들에서 극명히 체험할 수 있다.

회화사(繪畵史)에 자주 회자되는 일점투시도법의 해체는 이제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화가는 실제로 일점투시도법에 의해 사물을 보지도 않고 볼 수도 없을 뿐더러, 개체의 해체는 전제적(專制的) 투시도법의 해체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소실점을 상정하며 공간(대상들)을 평면(화폭)에 투시하는 시각은 수학적으로 표현해 "개체들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즉 "이 나무는 원경에 있을 경우 근경의 집과 이러이러한 시각관계에 있으나 전경(前景)으로 옮길 경우 저러저러한 시각관계에 놓인다"는 말은 바로 시공 상에서의 위치, 즉 좌표를 옮길 수 있는 개체라는 개념을 전제하며, 또한 대상세계와 화폭 바깥에 위치하여 이들 관계를 설정하고 조망하는 제3자로서의 화가를 요구한다.

따라서 일점투시도법의 경우 관계항으로서 개체는 관계와는 독립적이며, 투사(projection)를 행하는 자로서의 화가는 대상세계에도, 그리고 화폭 속으로도 들어갈 수는 없다. 또 다원화된 시각(視角)과 관련하여 회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입체파의 경우, 세잔느의 예술세계에서 수단과 지향점을 혼동한 20세기 초엽의 다른 전위사조들처럼 행위 전(前)과 행위 중(中)에 시각의 다양성을 전제하고 요구함으로써 의도적 다원성이라고 하는, 마치 "자유로와 지라!(You must be free!)"는 명령문이 갖는 작위성을 피할 수 없었다.

원경과 근경, 좌와 우, 전과 후의 독자적인 시각(視角)들 사이를 넘나들 때 체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화가가 대상의 실현에 보낸 작업시간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시간은 그림에 기록된다. 아니 그림 자체가 시간의 덩어리이며 곧 실현이다.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이 세잔느의 풍경화와 정물화, 그리고 인물화에서 화가가 경험한 시각적 경험과 탐색을 추체험(追體驗)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시간이란 회화에서 소요(逍遙)의 여정(旅程)과 여정(旅情)으로 구현되며 사물의 혼(魂)과 기운(氣韻)은 소요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흔적을 남긴다. 이때 인간의 혼, 즉 정신이 육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외부세계와의 경계 혹은 인간의 드러난 행동에 있듯이, 자연의 기운 역시 사물의 표면과 주변에서 여러 가지 감각영역을 통해 드러난다.

나무의 혼은 나뭇가지 주변 공기의 흔들림에서, 또 유동하는 대기는 나뭇가지의 흔들림에서 느껴진다. 일종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기호(記號)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기운과 그 생동감은 시각(視覺)만을 통해 감수(感受)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다른 모든 감각기관과의 연대를 통해, 혹은 감각기관과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에서 더욱 더 잘 드러난다:

태양빛 아래 소나무들의 짙푸르고 싸한 향내는 아침마다 이슬이 맺히는 들판의 초록빛 향내와 짝을 맞추어야 하고 또 저 멀리 성(聖)빅토와르의 대리석 향기와도 어울려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재현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랬어야 했지요. 다만 색채를 통해서이지 글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보들레르와 졸라가 단지 몇 개의 단어를 연결하여 시(詩)나, 문장 전체를 향기로 가득 채우는 것과 흡사합니다. 감각이 최고조에 달하면 곧 존재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 ) 총체적 조화는 색채에서처럼 모든 곳에서 발견하여야 합니다. 자 나를 보십시오.

이제 내가 눈을 감고 비록 세계의 한 구석에 불과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곳인 성(聖)마르크의 언덕을 마음 속에 떠올리면, 이 영상은 곧 가장 좋아하는 체꽃의 향을 불러일으킵니다. 붸버의 음악 속에서 나는 들판과 숲 속의 진한 내음을 듣습니다. 라씬느의 시 구절 행간에서 나는 푸생의 경우처럼 향토색을 느끼고, 루벤스의 자줏빛들 사이에서는 한 송가(頌歌)가, 어떤 중얼거림이, 리듬이 나옵니다.

시각과 후각, 청각, 미각 그리고 촉각 등 여러 개의 감각의 문(門)은, 장자(莊子)의 말을 빌리자면 그 안이 서로 통해 있는 한 울림통의 구멍들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대상을 주변으로부터 오려 내는 개체화의 시도가 사라질 때 시작되는 감각영역들 사이의 "절대적 경계의 해소"이며, 바로 사물의 기운과 혼이 주변 영역의 다양한 감각영역의 움직임과 직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겨울강의 빈배와 갈대"를 그린 산수(山水) 속에 바람이 불고 "차가워진 추수(秋水)"는 맑게 보이는 것이다. 시각예술을 단순히 선(線)과 색(色), 형태만을 그 영역으로 삼는다고 보는 현대적 사조는 사실 어떠한 자연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이제 자연의 울림, 세잔느의 표현에 의하면 "총체적 조화"에 역시 총체적으로 반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운생동의 요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술은 자연에 평행하는 조화를 의미합니다. 화가가 자연보다 열등하다고 항상 주장하는 바보들을 생각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화가는 자연 옆에 있습니다. 만일 그가 의도적으로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면 (…)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화가의 모든 의도는 침묵하여야 합니다.

그는 선입관이 담긴 일체의 소리를 내부에서 잠재워야 하며, 고요가 찾아오게 하고, 완전한 반향(反響, echo)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화가의 감광판에 풍경 전체가 그려질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총체적인 반응과 기록으로서 예술이란 "꽃이 피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자연 속의 반응들"과 조금도 층위가 구별되지 않는 현상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소요(逍遙)하는 반응자"인 것이다. 자연의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의 예술과 독자적 구성(construction)으로서의 예술 사이의 구별은 적어도 세잔느의 경우에는 없었다. 물론 시각예술의 경우 대상과 작품이 모두 동일한 시각영역에 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현과 구성 사이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기호화된 사물이 갖는 상징의 영역이 여기에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각예술의 이 독특하고 광범위한 지평을, 즉 인식으로부터 작품의 실현, 구축에 이르는 전 과정을 탐구하기보다는 그 일부분을 잘라 절대시함은 시각예술 스스로의 가능성을 위축시킬 것이다. 조형예술에 있어서 시간의 탐구는 그것이 단순히 시간의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존재양상과 예술가의 반응형식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조형예술의 숨은 실마리라고 불려도 무방하다. 실로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

II. 경계의 동서(東西): 다 빈치와 용수(龍樹)

물과 공기의 경계에 대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묘한 생각을 했다:

두 물체 사이에 놓여진 어떤 물체는 그들의 접촉을 방해하지만 물과 공기는 어떠한 매개도 없이 서로 접촉하기 때문에 공기도 물도 아닌, 그러나 실체가 없는 공통된 경계가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

다 빈치가 추론을 하는 과정에서 명시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받아들인 전제들은 다음의 네 가지라고 생각된다:

1. 물과 공기는 직접 만난다.
2. 물과 공기는 실체가 다른(하나일 수 없는) 물체들이다.
3. 물과 공기가 만나는 곳, 그곳이 양자의 경계다.
4. 실체가 다른 물체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경계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제 경계에 대한 고찰에 이르기까지 다 빈치의 추론과정을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5. 만일 경계가 물에도 속하고 공기에도 속한다면, 경계는 물이면서 동시에 공기여야 한다.
6. "경계가 물이면서 동시에 공기이다"라는 5.의 결론부는 전제 2.와 모순이다.
7. 따라서 경계는 물에도 공기에도 속하지 않는다.
8. 경계가 실체가 있다면, 물과 공기는 이 실체를 갖는 것과 또 다른 경계에서 만나야 하며 이것은 무한히 계속된다.
9. "물과 공기가 무한한 과정을 통해 만난다"는 8.의 결론부는 전제 1.에 모순이다.
10. 따라서 경계는 물에도 공기에도 속하지 않으나 실체는 없다.
11. 4.와 10.에서: 공기도 물도 아닌, 그러나 실체가 없는 공통된 경계가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

일견 직관을 통한 형이상학적 주장처럼, 혹은 관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주장처럼 보였던 다 빈치의 물과 공기의 경계에 대한 단상(斷想)은 실은 경계의 개념 정의에 대한 논리적 추론의 결과이다(수[數]의 체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곧 데데킨트[Dedekind]의 절단[切斷]과 실수[實數]의 연속성을 떠 올릴 것이다). 실제로 위의 세 전제들이 받아 들여진다면 다 빈치의 결론은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고 나아가 모든 종류의 경계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지적 유희를 넘어설 수도 있다(예: 생/사[生|死], 성/속[聖|俗], 선/악[善|惡], 인/과[因|果] 등등).

이제 우리는 다 빈치의 무(無)와 사물의 경계에 대한 또 다른 주장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無, nothingness)라고 불리우는 것을 하이데거류의 언어의 비상(飛翔)을 통해 마치 존재인양 다루기만 하면 된다:

무(無)는 사물과 공통된 표면을 가지고 있고, 사물은 무와 공통된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물의 표면은 그 사물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의 표면은 이 무의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물과 공기의 경계에 대한 다 빈치의 결론은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추론의 전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물도 공기도 아닌, 그러나 양자가 만나는 경계(이때 실체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란 주장 역시 다 빈치가 받아들인 전제들과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12. 물이 아닌 것, 그곳에 물은 없다.
13. 공기가 아닌 것, 그곳에 공기는 없다.
14. 물(공기)이 없는 곳에서 물(공기)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어디에 있든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5. 따라서 물도 공기도 아닌 곳에서 물과 공기가 만날 수는 없다.
16. 전제 3.에서: 물과 공기가 만나지 않는 곳, 그것이 경계일 수는 없다.
17. 따라서 "물도 공기도 아닌 양자가 만나는 경계"란 불가능하다.

우리의 추론도 다 빈치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도출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다 빈치와 우리가 공동으로 결론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물과 공기의 경계는;
(i) 물이지만 공기가 아니거나,
(ii) 물은 아니지만 공기이거나,
(iii) 물이면서 공기이거나,
(iv) 물도 공기도 아니다.
그러나 네 가지 어느 경우에도 물과 공기가 만나는 경계란 불가능하다.

도대체 왜 이런 해괴한 결론이 나올까? 직설하면 문제의 핵심은 경계라는 개념의 이중성이고 그 양면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즉 경계란 서로 다른 두 물체가 만나는 곳이지 하나의 물체가 스스로와 (경계에서) 만날 수는 없다. 다른 한편 경계란 두 물체가 한 곳에서 합쳐지는 것, 즉 접합(接合)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 경계란 개념에는 서로 다른 두 물체가 하나가 됨을, 즉 두 개의 모순되는 요청이 함께 들어 있으며 앞의 다 빈치와 우리의 모순되는 추론 결과는 바로 경계의 양면성에 근거한다.

동양적 사유의 전통에서 "불일불이(不一不異)"란 바로 이 경계의 양면성을 교차하여 부정하는 표현이다. 즉 "일(一)"을 주장하면 "이(異)"를 들어서 논파하고, "이(異)"를 주장하면 "일(一)"을 들어 논파하는 방식이다. 이때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제3의 존재양상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동 서를 막론하고 여기에 가장 많은 오해가 쌓여 있다). "불일불이"란 단지 경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차단(遮斷)하는, 이른바 "쌍차(雙遮)"의 역할만을 할 뿐 그 자체는 어떠한 주장도 아니다. 그것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학생들의 주의를 선생이 바로 잡을 때 손바닥을 "탁탁"치는 것과 똑 같은 기능을 할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물과 공기 사이의 경계를 부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경계 없이는 사물의 구별도 없고 따라서 "물"이니 "공기"니 하는 것을 언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언급할 수 없는 것들 사이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이것을 "그림의 부정 불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어떤 사진을 생각해 보라. 철수가 영희 오른쪽에 서 있다. 이 경우 두 대상 "그림 속의 철수", "그림 속의 영희"와 이들 사이의 관계 "그림 속의〈오른쪽에 있음〉"은 어느 하나를 부정하면 나머지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공지(空地) 위에 갈대 셋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을 때 하나를 치우면 나머지 둘도 쓰러진다"는 이치와 동일하다.

그것은 연출자가 한 배우에게 그가 맡은 "배역과 하나가 되라"고 청할 때, 배우가 우선 자신이 맡은 역과 스스로를 구별하고, 그 후에 하나가 되려는(즉 구별을 부정하려는) 시도처럼 불가능한 것이다(문장과 그림의 구조적/구문론적 차이의 하나로 그림에는 '부정문(否定文)'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다 빈치의 경계에 대한 고찰과 관련, 동 서사상사의 공정한 평가를 위하여 인용해야만 할 철학자가 한 사람 더 있다. 그는 바로 서기 1-2세기 인도에 살았던 대승불교의 철학자 나가르주나(N g rjuna, 龍樹)이다. 이 글의 핵심도 실은 그에게서 빌어 온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경계에 관한 한 고독한 선두주자라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논리적으로 엄밀하고 예리했다. 그는 불교의 핵심교리인 연기설(緣起說)을 인간의 의식이 이 세계를 분할(partition)하고 조합(configuration)하여 생멸(生滅)의 세계로 만드는, 즉 연기설은 이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세계 구성의 원리인 연기설은 실체론적 관점에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의 저서 {중론(中論)}에서 종횡무진 파사(破邪)의 게송(偈頌)을 펼칠 수 있었다.

중도(中道)의 쌍차쌍조(雙遮雙照)에서 바로 쌍차(雙遮)에 해당되는 부분을 {중론(中論)}에서 집대성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세잔느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중에 그 어떤 이론, 즉 잡념과 망상이 없는 상태에 몰입하려 한 것은 아직 사물이 개체로 단위화되어 굳어지지 않는 상태에 들어가려는 시도이며, 그것은 물론 불교적 용어를 빌자면 '본지풍광'(本地風光)을 그리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세잔느는 새로운 풍경을 그리기 위하여 자신은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길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만 조금 돌리면 완전히 새로운 시각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나라르주나의『중론』에서 "등불이 [스스로와 어둠을] 비춘다"는 주장과 '분할'과 '결합'의 가능성을 논파하는 부분을 인용하면서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등불 그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 등불이 머무르고 있는 곳에도 어둠은 없다. 어둠을 파괴하기 때문에 비춘다고 하는 데, 어둠이 없는 곳에 등불이 무엇을 비추겠는가?(중론 7.9.)

만일 그 불빛이 어둠에 도달하지 않고서도 등불이 어둠을 파괴시킨다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등불이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어둠을 타파하게 되리라.(중론 7.11.)

만일 하나라면 결합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스스로와는 결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것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결합할 수 있겠는가?(중론 6.4.)

만일 하나인데 결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짝이 없어도 그렇게 되고, 만일 서로 다른 것들인데 결합한다면 역시 짝이 없어도 그렇게 된다.(중론 6.5.)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그처럼 결합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결합된 존재임을 논증하기 위하여 서로 다르다는 것을 추구한다.(중론 6.8.)

서로 다르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결합됐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별개의 존재가 있기에 당신은 결합을 희구하는가?(중론 6.9.)

홍성기
서울대 인문대 독문과. 뮌헨 루드비히 막스밀리안 대학(석사: 크립케의 고정사이론 비판/분석철학). 자르브뤽켄 대학 (박사: 연기론의 논쟁구조 분석). 서울미술관 학예실장 역임. 현 한양대 정신의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및 아주대 교양학부 강의교수. 논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증명된 신화?>(한국논리학회), <인공지능과 인간의 마음: 뷔트겐슈타인의 행위론을 중심으로>(문화과학), <분할과 조합: 용수의 연기설과 분석철학>(한국인도철학회), <정신병리적 언어행위의 형식적 특징규명을 위한 기초연구>(한국정신병리학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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