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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은 종교인가 / 오강남
[15호] 2003년 06월 10일 (화)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편집자
이 글은 “종교학에 있어서 ‘종교’의 개념”이란 주제로 1990년 이태리 로마에서 있었던 제16회 세계종교학회에서 발표하고 그 후 발표논문집에 실린 “Is Zen a Religion?"이라는 논문을 저자가 직접 한국말로 번역한 것이다

1. 서론

20세기 미국의 가장 위해한 종교 사상가들 중 하나라고 손꼽히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오랜 기간 선을 연구한 후 결론적으로 선은 아무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단언했다. 머튼에 의하면, 선과 기독교를 비교하는 것은 마치 수학과 테니스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에서 알려진 어떤 범주도 선에 적용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은 삶에 대한 조직적 설명도 아니다.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세계관도 아니다. 계시나 구전의 신학도 아니다. 신비도 아니다. 완전을 향한 금욕적 수행법도 아니다. 서양에서 이해된 대로의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범주에도 맞아떨어지지 않는 무엇이다. 따라서 그것에 ‘범신론,’ ‘정적주의,’ 펠라기아니즘 따위의 딱지를 붙여서 폐기 처분하려는 우리의 어떤 기도도 완전히 부적절할 수밖에 없다.

선이 종교인가? 머튼이 말한 바에 따르면 선은 물론 종교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 특히 선을 서양에 소개하는데 크게 공헌한 D. T. 스즈끼 같은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

20세기 미국의 가장 위해한 종교 사상가들 중 하나라고 손꼽히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오랜 기간 선을 연구한 후 결론적으로 선은 아무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단언했다. 머튼에 의하면, 선과 기독교를 비교하는 것은 마치 수학과 테니스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에서 알려진 어떤 범주도 선에 적용될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은 삶에 대한 조직적 설명도 아니다.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세계관도 아니다. 계시나 구전의 신학도 아니다. 신비도 아니다. 완전을 향한 금욕적 수행법도 아니다. 서양에서 이해된 대로의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범주에도 맞아떨어지지 않는 무엇이다. 따라서 그것에 ‘범신론,’ ‘정적주의,’ 펠라기아니즘 따위의 딱지를 붙여서 폐기 처분하려는 우리의 어떤 기도도 완전히 부적절할 수밖에 없다. 선이 종교인가? 머튼이 말한 바에 따르면 선은 물론 종교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 특히 선을 서양에 소개하는데 크게 공헌한 D. T. 스즈끼 같은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학자들의 대답은 물론 ‘예스’와 ‘노’이다. 이 짧은 글에서 우선 이런 학자들이 제시하는 이런 양면적 대답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결국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선을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원리가 각이한 문화나 종교 전통에 따라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적용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을 말할 때, 사람들의 문화적 종교적 배경과 상관없이 그들의 삶과 안녕에 공헌할 수 있는 “보편선”(universal Zen)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좀 깊이 고찰하려는 것이다.
이제 선이 종교가 ‘아니다’고 하는 입장부터 다루어 보기로 한다.

2. 선은 종교가 아니다

“선이란 무엇인가?”하는 제목으로 쓴 짧은 글에서 D. T. 스즈끼는 스스로 “선은 종교인가?”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거기에 자기대로 대답을 한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이해된 대로의 종교라는 의미의 종교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대답은 선이 종교냐 아니냐 하는 여부가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좌우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스즈끼에 의하면, “선은 종교가 아니다. 거기에는 섬겨야할 신도, 준수해야 할 예전도, 죽은 사람들이 들어가 살 미래의 거처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영혼과 그 불멸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에는 이런 교의적이고 종교적인 부대 요소들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일단 스즈끼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라는 것이 유신론적 신관에서 이해된 대로의 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일이나 예식을 거행하는 것, 혹은 개인의 최후 운명으로서의 천국, 지옥 등을 믿는 것이라면, 분명 선은 ‘그런 종류의 종교’는 아니기 때문이다. 머튼이 말한 것처럼, “선은 신에 대해 기독교에서처럼 그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실 이런 식으로 선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별도로 더 언급을 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날 지각 있는 사람들로서 종교의 본질이 신을 섬기는 것, 종교적 예식을 준수하는 것 등이라고 믿는 이들은 별로 없다. 오늘 날 종교는 이런 외부적인 요인들보다 더욱 깊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의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길게 논의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다만 종교를, 예를 들어, “궁극관심”이라든가 “궁극적 변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정의했을 때, 여기에는 이런 외적 사항이 종교의 불가결한 핵심 요소라고 하는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역사적 맥락에서 특수하게 표현된 여러 가지 표현 양태 이상이라는 뜻이다.

3. 선은 종교이다

그러나 종교라는 낱말이 이런 외부사항 이상이라고 이해된다면 역설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선은 분명 종교라 할 수 있다. 스즈끼 자신도 선의 종교적 성격을 감지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선이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점은 오직 외부로 나타난 점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선에서 나타나는 야만적 선언들 속에 들어 있는 종교적 요소들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스즈끼는 그러나 분명히 “선이 기독교나 이슬람이 종교라는 뜻으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 못박고 있다. 그는 이어서 선이 우리의 생각을 신의 단일성이던가 그의 무한한 사랑, 혹은 사물의 덧없음 같은 것에 고착시키는 명상의 일종이라 혼동해서도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스즈끼가 선을 유일신관이나 어느 종류의 신관을 가진 종교로 보기를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것은 어느 누구가 종교적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과 직접 관계되는 일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명상 이상을 의미한다. 그가 선이 종교라고 하는 말은 “선의 수행을 통해 존재의 이유 그 자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스즈끼는 그의 저술 전체를 통해 선이란 “우리가 삶과 세계를 다루는데 새로운 안목을” 얻을 수 있기 위해 조직적으로 마음을 닦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선의 본질은 삶과 사물 일반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얻는데 있다”고 밝힌다. 그에게 있어서 “깨침”(悟)은 선의 핵심으로서, 그것은 선을 진정으로 선이 되게 하는 것이요, 또 선을 진정으로 종교이게 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깨침이 없는 선이란 있을 수 없다. 깨침은 선불교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깨침이 없는 선이란 빛과 열이 없는 태양과 같다. 선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헌, 모든 선방, 모든 외부적 요소들을 잃어버려도 좋다. 그러나 깨침이 있는 한 그것은 영구히 살아남을 것이다.

깨침을 “중심 사실”(central fact)로 삼고 있는 선은 그 깨침을 통해 논리적, 분석적,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여 “사물의 본성을 뚫어볼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분명 종교인 셈이다. 그는 이 면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실제적으로 지금껏 이분법적으로 훈련된 마음의 혼동 속에서 파악되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짐을 뜻한다.... 이것이 무엇이든 깨침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 새로운 세계는 지금껏 있던 옛 세계가 아니다. 흐르는 시냇물과 타오르는 불길이 그대로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같은 세상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모든 반대와 모순이 일관된 유기체적 전체로 융화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신비요 기적이다.

스즈끼는 “선 체험으로서의 깨침은 삶 전체에 관련되는 것”이라 했다. 이 체험은 “완전한 혁명”과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종교적 차원으로서, 종교가 “궁극적 변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할 때 그 속에 강력하게 함의된 차원임에 틀림이 없다.

4. 보편 선

선이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데 따라 달리 대답될 성질의 문제라면, 이것은 또 ‘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데 따라서도 달리 대답될 성질의 문제이기도 하다.

낸시 로스(Nancy Wilson Ross)는 그의 책 󰡔선의 세계󰡕에서 ‘보편 선’(universal Zen)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는 선의 연구, 특히 하이쿠 연구에,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한 브라이스(R. H. Bryth)가 사용하던 “선적 안목의 근본적 보편성”이라는 말에 고무되어 “선과 같은 식의 보는 법, 관찰법, 느끼는 법의 실례들”을 함께 모아 보았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선의 가르침은 깨친 의식 상태를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그리고 오랜 세월 실험된, 체험과 수행의 체계를 대표한다. 좌선이나 참선을 통해 영적 깨침을 얻으려고 하는 평균적 서양 사람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상당한 정도의 심리적 재조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이 특수한 선 체험이 아시아 어느 한 지역에만 국한 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세계 모든 문화에서 시인들, 신비주의자들, 예술인들, 철학자들이 선이라는 말이--형용사로 쓰여질 때--그 말이 지칭하는 실재의 본성에 대한 특수한 체험을 다 같이 공유하여 왔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선이 사실 “모든 종교들과 모든 철학들의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D. T. 스즈끼의 기본 사상과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즈끼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선은 종파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선은 불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바다에 큰 고기와 작은 고기가 다 같이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것과 같다. 선은 바다요, 선은 공기요, 선은 산이요, 선은 천둥과 번개요, 봄 꽃이요, 여름의 더위, 겨울의 눈, 아니 그보다, 선은 인간이다. 선이 그 긴 역사 과정에서 축적한 모든 형식들이나 습성들이나 쓸데없는 부속물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 사실은 아직도 활기차다. 선의 특별한 공적은 바로 우리가 아직도 다른 어떤 것에 의해 편견을 갖지 않고 똑 바로 이 궁극 사실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는 것이다.

스즈끼처럼 시적으로 쓰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선이 기독교에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 기독교 사상가들은 부지기수다. 몇 사람만 예를 들면, 토마스 머튼, 윌리암 쟌스턴(William Johnston), 돔 그래험(Dom Aelred Graham), 한스 월덴펠스 같은 사람들이다.

누구보다도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은 선이 “서양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중대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있다. 그는 선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가 한 쪽으로 너무 치우쳤음을 깨닫게 하고” 기독교 전통에서 망각되고 사장(死藏)된 요소들을 재발견하게 하는데“ 특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선이 기독교에 공헌할 수 있는 분야는 크게 다섯 가지다.

 1) 인간의 완결성과 안녕을 위한 새로운 노력, 2) 새로운 실천 방안(orthopraxy), 3) 모든 존재들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인식과 육체에 대한 새로운 강조, 4) 마음을 조용히 하는 것과 각자 자신의 심령 깊이로 직관적으로 내려가는 집중 훈련, 5) 사고나 감정이나 소원 등에서 해방된 침묵과 기다림을 함양함 등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큉은 선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특히 선은 위대한 실용주의적 낱말 하나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 낱말은 바로 “자유”다. 자아를 잊어버리는데서 오는 자아로부터의 자유,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강압에서부터의 자유, 개인과 개인의 직접적인 체험이나 깨침 사이에 끼여들려고 하는 모든 권위로부터의 자유. 나아가 붓다로부터, 경전으로부터, 더욱 철저하려면 심지어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길이요 또 길로 남아 있어야 할 선 자체로부터의 자유. 이런 완전한 내적 자유에서만 우리는 이 생애에서건 내생에서건 참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큉은 많은 기독교인들도 선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참된 해방”으로 체험할 수 있다고 결론 짓고 있다.

결국 비록 그들의 기도생활, 교리, 경직된 규례, 종교적 ‘순종훈련학교’의 후유증 등으로 규격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내용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유, 이처럼 대상을 상정하지 않은 명상, 이처럼 청복으로 체험되는 비움 등을 참다운 해방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그들은 내적 쉼, 더 큰 평안, 더 훌륭한 깨달음, 실재에 대한 더욱 예민한 감수성 등을 발견하는 것이다.

선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좋은 것인가?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선이 일반 현대인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적 양식”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에릭 프럼(Erich Fromm), 앨란 왓츠(Alan Watts), 에브라함 매슬로(Abraham Maslow) 등등이다. 물론 잘 알려진 바대로 칼 융(Carl G. Jung)은 깨침이라고 하는 선 체험이 유럽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릭 프럼 같은 사람은 “선이 유럽 사람들에게 어렵다 하드라도 그것이 헤라크리터스, 마이스터 에카르트, 하이덱거 보다 더 어렵다고 볼 수는 없다.”고 융의 입장에 반기를 들었다. 프럼은 “선이 어려운 것은 깨달음 자체가 어려운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얻는데 요구되는 엄청난 노력” 때문으로서,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당하기 곤란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프럼은 선이야말로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무의식을 의식화하게 하므로써” 소외와 단절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므로 사람들의 안녕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앨란 왓츠는 선이 현대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인간과 자연을 재결합시키려고 하는 서구 사람들에게 선의 자연주의에는 단순히 감상적인 것 이상으로 어필하는 무엇이 있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이 비극적으로 이분화된 문화를 위해 선은 근본적으로 신선한 통전적 생각을 심어주는 세계관을 제공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선은 기독교 후기 많은 서구인들에게 크게 호소력을 갖는데, 내가 믿기로 그것이 히브리 기독교의 예언자 전통처럼 설교하거나 도덕적으로 가르치려하거나 꾸짖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로 선이 일반 현대인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혜택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이분법적 의식을 초인격적(transpersonal) 주객 초월의 의식으로 바꾸어주는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스즈끼는 “깨침,” 곧 “새로운 안목을 얻는 것”은 바로 “이분법적으로 훈련된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깨침의 체험에서 “모든 반대와 모순들이 결합되고 조화되어 일관된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분법적, 이성(理性)적 의식을 초월한다고 하는 이런 생각은 인간 의식을 취급하는 “초인격 이론”(transpersonal theory)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켄 윌버(Ken Wilber)는 그의 책 Up From Eden (에던에서 위로)에서 “역사는 인간 의식의 발달사로서 그 궁극적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 의식의 발달에 여덟 개의 계단이 있는데, 이것을 다시 셋으로 대분하면, 1) 인격이전의 주객미분의 단계, 2) 인격적 자의식의 주객 이분의 단계, 3) 초인격적 주객초월의 단계로 나누인다는 것이다.
에던 동산에서 살던 인간의 삶은 선악의 차이를 알지 못하던 무의식의 식물적, 본능적 행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인간의 의식(意識)이 주객의 구별이 없는 두루뭉수리 의식이었다. 그러다가 이른바 ‘타락’을 통해서 인간은 “에던에서 위로” 올라서게 되고, 그 결과로 자의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런 자의식은 물론 분리되고 ‘불행한 의식’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지금 이 주객 이분의 이성적, 반성적, 자의식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이제 이런 이성적 자의식의 단계 넘어 더 높은 가능성의 실현이 가능한 제3의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높은 그리고 초의식적인 수준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자아가 현 수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 단계와 분화하여(differentiation), 다음 높은 단계로 초월하여야 (transcend) 한다”는 것이다. 윌버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참선이 이루어내고자 하는 바로서, 이성적 자의식 내에서의 번역(translation)을 그만두고 초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변혁(transformation)을 시작하는 것이다.”

윌버는 참선이야말로 “현재 평균적인 의식 단계에 있는 이들이 스스로 이 단계를 넘어서 가기 위해 할 일”이라고 선언한다. 윌버에게 있어서 참선은 현대에 사는 남녀들이 수행해야 할 하나의 지상명령으로서, 그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가--그대와 내가--인류의 진화를 추진시키고자 하면, 그리고 인류가 과거에 몸부림치면서 획득한 유익을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진화에 뭔가를 공헌하고, 거기서 진액을 빨아먹는 일에 머물지 않으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절대 정신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그것을 영구화하지 않으려면, 참선이--혹은 그와 유사한 참된 명상법이--절대적인 윤리적 명령, 새로운 지상 명령일 수밖에 없다.

만약 윌버의 전체적인 가설들이 맞다면, 특수한 명상방법으로서의 선은, 오랫동안 그 효용성이 증명된 그와 유사한 다른 명상방법들과 더불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남녀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이 어떠하냐와 관계없이, 하나의 중요한 실천 요목이 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5. 결론

선은 야스퍼스(Karl Jaspers)가 말하는 차축시대 이전(pre-axial)에 있던 종교 같은 그런 식의 종교는 아니다. 선은 꽁트(Auguste Comte)나 프레이져(Sir James Frazer)가 의미하는 것처럼 실증적, 과학적 시대에 이르기 전에 인류가 거쳐야 하는 그런 의미의 종교도 아니다.

그러나 선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차축시대 이전에 있던 그런 종교는 물론, 정상적인 이분법적 의식 마저도 넘어 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종교다. 과도한 합리주의와 맹목적 과학주의, 그리고 전근대적인 종교 의식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선은 분명 오늘을 위한 하나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을 종교라 하든 종교가 아니라 하든, 중요한 점은 현대를 살아가는 남녀들에게 순수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실재의 세계로 그들을 안내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하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향기는 마찬가지.“
- 쉑스피어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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