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천당에 갔더니 입만 동동 뜬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냐 했더니 목사, 교수 등 주로 입으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더랍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몸뚱이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옥에 있다고 하더랍니다. 입으로는 그럴싸한 말만 골라 했는지 입만 천당 가고 제 몸뚱이는 남몰래 못된 짓도 많이 했는지 지옥에서 고생한다는 얘기입니다.

천당과 지옥의 이분법적 구도, 등장인물의 유형을 보면 아마도 기독교 문화권에서 지어낸 우스개 소리이겠지만 왠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만 들립니다.

주변에 돌아가는 상황이 하도 우스워서, 똥개도 배꼽잡고 웃을만한 막돼먹은 일을 많이 겪다보니 어느새 저도 풍자의 마수에 걸려들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괜스레 심각해질 때가 많습니다. 어느덧 저도 무기력한 냉소주의자가 되어, 덩달이 시리즈로 비릿한 웃음이나 흘리는 속물이 돼 버린 것은 아닌지 자조해보기도 합니다.

내 자신도 입만 천당 가는 무리들 속에 끼지 않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그 무리들 속에 끼워 넣어야 하는지, 더위가 닥치는 길목에 선 지금, 교수라는 직업이 무언지, 불교가 무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전신을 태울만한 강렬한 폭염을 기다립니다.

제가 아는 선배 한 분이 그야말로 복장 터지는 경우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악명 높은 ‘대학교수 임용비리’. 모교에서 오랫동안 강사생활을 했고 또 학계에서 내노라 하는 중견학자로 인정받고 있던 터인지라 임용서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재단에까지 올라갔다 합니다.

한데 하루는 낯선 사람에게 전화가 와서 한다는 말이,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인사 좀 다니셔야지요.” 인사? 이 사람이 말하는 ‘인사’란 도대체 뭔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의 어투로 보아, 그리고 자신이 주변에서 들었던 몇 가지 사례를 종합해 본 결과, 그 ‘인사’란 것이 몇몇 재단의 실력자에게 몇 천 만원 돈을 갖다 바치라는 뜻인 줄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하여 이 선배의 내면에서는 뼛골 삭는 소리 없는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한편에는 학자의 자존심이 불끈 일어섰고, 다른 편에는 대학교수란 직함을 얻고 싶다는 명예욕이 자리 잡아서 팽팽하게 맞섰다는군요. 결국 학자의 자존심 쪽이 승리하여 지금까지도 그 선배는 대학교수 직에 연연하지 않고 펄펄뛰는 건강한 야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존심이 없어도 문제겠지만 자존심이 지나쳐서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 나이든 교수가 젊은 교수에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해서 외국서적을 쉽게 구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던 이 젊은 교수는, 애써 책을 구했고 몇 십 만원이나 하는 귀한 책이기는 했지만 바쁜 일 때문에 직접 전해주지 못하고 상대편 우편함에 그 책을 넣어두었답니다.

그런데 이 나이든 교수는 상당히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던지 자신이 직접 책을 가지러 갔고, 돌아오는 길에 그 젊은 교수와 마주치자 책을 길바닥에 팽개치며 “이 책이 얼마나 하는지 아느냐.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느냐”며 역정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길바닥에서 봉변을 당한 그 젊은 교수는 연장자에 대한 예우를 생각해선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맥없이 당하기만 했다고 합니다.

적당한 자존심은 나쁜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지만 자존심이 지나치면 아만(我慢)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불교 집안에서는 ‘거문고 줄 고르듯’ 수행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행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당한 자존심’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 현장의 안 좋은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소개한 것은, 교육이란 장이 지식의 함양뿐만 아니라 인성교육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재단에 돈을 상납해서, 아니면 어느 교수의 시봉 노릇을 한다는 암묵적 합의하에, 학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팽개쳐버리고 알량한 교수 자리를 얻었다 해보죠. 당장에는 그럭저럭 좋을지 몰라도, 적어도 상식적인 윤리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원죄를 걸머진 사람처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뻔합니다. 더구나 이런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진리’를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자리에 서건 첫 단추를 잘 꿰는 일이 중요합니다.

더구나 불교 집안에서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수행에 연결시킬 정도로 마음 수련을 중시합니다. 공부하는 학인들이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건전한 자존심’을 학문 외적인, 게다가 사회에서조차도 통용되지 않는 몰상식한 일로 망가뜨리면, 그 화는 눈덩어리 커지듯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학계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제대로 된 연구직에 종사하지 못하는 분이 육칠 십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분들이 끝까지 건전한 ‘자존심’을 지키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불교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불교를 사랑하는 분들이 무엇보다도 애써야 할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급한 일을 게을리 하면 할수록 불교학계는 자칫 잘못하면 배알도 쓸개도 없는, 돈과 권력에 휩쓸리는, 단지 ‘말 잘하는 앵무새’로 가득 차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존심’ 이야기가 나왔으니 직업과 관련된 자존심 문제를 하나 더 생각해보죠. 대학교 학창 시절에 대학교수가 절에서 설법을 하는 장면을 자주 보곤 했습니다. 강의나 강연이라면 괜찮겠는데 분명히 야단법석 위에 엄숙하게 진행되는 설법이었습니다. 그 때는 제가 학생 때라 별다른 의식 없이 지나쳐버렸지만, 이제 제가 대학 교수가 되다 보니 때로는 설법 요청을 받는 일도 있고 해서 곰곰이 이 문제를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강의나 강연은 지식을 공유하는 장이기 때문에 대학 교수가 주빈 노릇을 해도 괜찮겠습니다.

그런데 설법은 수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자리인지라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대학에서 하는 연구가 수행 그 자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경건한 신자들 앞에서, 눈 퍼런 수행자 앞에서 수행을 논한다는 것은 무언가 꺼림칙하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학자의 자존심이 지나쳐 천지사방 분간 못하는 ‘아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수행을 겸하는 훌륭하신 학자 분들도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구업(口業)’을 짓는다는 생각에 설법을 수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친 거마비도 학자의 자존심을 망치게 하는 큰 유혹이 되고 말입니다.

백 보 양보해서 재가 신자를 대상으로 한 설법에 과연 대학교수가 얼마나 보탬이 될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재가 신자들은 말뿐인 말에 싫증나 있습니다. 체험적인 말에, 진솔한 경험에, 내 자신이 직접 겪은 수행상의 경험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대학 교수보다는 비록 어눌하게 말할지라도 출가하신 스님들이나 재가의 수행자들이 낮지 않겠습니까? 학자는 강단에서 연구에만 전념하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설법은 수행자에게 맡기면 되지 않습니까? 하여 학계가 남의 장단에 놀아나는 ‘노예의 학문’에서 벗어나고, 수행자들이 불교 교단의 주춧돌이 될 때, 바로 그 때 학자의 자존심이 바로 서고 수행자의 자존심이 바로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종철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인도 마이소르대학 산스끄리뜨학과 연구원. 북경대학 객원교수.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저서로《세친 사상의 연구(世親思想の硏究: 釋軌論[Vyaakhyaayukti]を中心として)》(일본어),《The Tibetan Text of the Vyaakhyaayukti of Vasubandhu》(영어) 등이 있고, 다수의 아비달마․유식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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