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은 이혼할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결혼을 했을까? 결혼이란 남녀가 성적·심리적·경제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뜻하는 중요한 행위로 혼인이라고도 한다. 사회 통념상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죽을 때까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사회의 기초적 구성단위인 가정과 가족을 형성하는 단서가 되고, 나아가서는 종족보존이라는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가 어떤 형태로든지 결혼을 승인하고 이에 대해 법률적 규제를 하는데, 형태는 각 사회의 경제적·종교적·민족적 요소에 따라 다르다.
이러한 결혼은 역사적으로 누구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느냐에 따라 세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남자의 의사만으로 성립되는 약탈혼(掠奪婚), 둘째는 여자의 아버지나 오빠의 의사와 남자 또는 그의 부모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권혼(父權婚), 세 번째는 당사자 사이에 혼인할 의사가 합치함으로써 성립하는 공낙혼(共諾婚)이 있다. 이 가운데 남녀가 대등한 입장에서 혼인을 체결하는 세 번째의 것이 현대 문명국가의 일반적인 혼인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세 번째 방식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요즈음 결혼식을 보면, 예식을 주재하는 주례는 많은 하객 앞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두 사람은 이제 백년해로를 할 부부가약을 맹세하겠습니다.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맹세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서약을 받는다. 그때 혼인 서약문은 이렇다.

"신랑 ○○○군과 신부 ○○○양은 어떠한 경우라도 항상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 도리를 다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예"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식에서는 혼인 당사자들이 배우자에게 각각 "신랑 ○○○는 신부 ○○○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예로써 사랑하고 존중하여 진실한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아내 ○○○씨에게 서약합니다.", "신부 ○○○는 신랑 ○○○씨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지혜로운 내조를 함과 아울러 ……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온 정성을 다할 것을 남편 ○○○씨에게 서약합니다"라고 당사자들이 직접 혼인서약을 낭독하고 서명까지 한다.

그런데 이렇게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하겠다고 서약해놓고도 요즈음 10쌍 가운데 3쌍 정도가 이를 어기고 헤어지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어떤 조사에서 결혼한 지 20년이 되는 부부에게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겠느냐?"고 물었더니 75퍼센트가 "아니오", 20퍼센트가 "글쎄요", 5퍼센트만이 "예"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들에게 지금 결혼생활이 어떠하냐고 물으면, 첫째는 "심한 갈등 속에서 차마 이혼 못하고 살고 있다"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냥 체념하고 살아간다", 셋째는 "비교적 잘 만난 행복한 생활이다", 마지막 넷째는 "결혼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라는 순서로 대답을 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 해당될까? 이에는 잘못된 결혼의 목적이 한몫을 한 것 같다. 결혼한 목적을 물어보면 대개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결혼을 못하거나 안 하는 사람들이나 이혼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 없어서 결혼 못한다.", "그이는 나를 더 이상 행복하게 못하니까"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은 나를 행복하게 할 도구를 찾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로맨틱, 성적인 욕구충족, 돈 등은 행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고 결혼을 통해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헌신짝 버리듯 상대를 내팽개친다. 이처럼 요즈음 결혼을 진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적은 경험과 상식과 들어온 생각으로 결혼하고 살아간다. 결혼을 위해 많은 책을 읽지도 공부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불행하기 위해 작정한 것 같다. 그리고 가정을 수단으로 사회적인 성공이나 출세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결과로 결국은 그렇게 굳게 맹세한 서약도 깨뜨리고 이혼이라는 길을 선택한다. 민법 제83조에 보면 이혼이 성립되는 사유로 대략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배우자에게 부정한 행위가 있을 경우, 둘째는 배우자 또는 그 직계가족에게 부당하게 대우할 경우, 셋째는 나쁜 의미의 한 쪽의 유기가 있을 경우, 넷째는 3년 이상의 생사가 불명인 경우이다.

이 가운데 첫째의 경우가 이혼사유로 가장 문제인 것 같다. 여기서 부정한 행위란, 다른 이성과의 성관계까지 이른 간통 행위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성관계까지 이르지 않았더라도 이성과 한 방에서 밤을 지낸 경우라든지 이성과 껴안고 입맞추면서 심하게 어루만지는 행위, 사창가를 드나든 사실 등, 단 한 번이라도 외도한 사실이 있는 경우이다.

이것들은 불교적으로 보면 5계 중에서 불사음계를 어긴 것이다. 초기불교경전인 《싱할라에 대한 교훈》(한역 《육방예경》,《선생경》)에도 부부간에 지켜야 할 윤리 가운데 "스스로 도에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것은 앞의 부정한 행위에 의한 이혼 사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근거로 보면 불교는 다분히 일부일처제를 가장 이상적인 결혼제도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결혼 이전에는 순결한 것이, 그리고 결혼 이후에는 정절을 지키는 것이 이상적인 몸가짐이다.

결혼생활에 성공하려면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상호신뢰(信)·도덕성(戒)·헌신(捨)·사리분별(慧)이 결혼의 행복과 성공을 보장하는 덕목으로 강조된다. 상호신뢰는 서로 의지하는 것을, 도덕성은 인격적인 힘을, 헌신은 정서적 성숙을 의미하고, 그리고 사리분별은 지성적 성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질들은 두 배우자를 굳게 맺어주며 그 인연은 죽은 후에도 다음 생에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나꿀라의 부모는 늙은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들의 사랑이 죽음을 넘어서 이어지기를 소원한 이상적인 부부로 경전에서는 그리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이 부처가 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고, 마침내는 부처가 되며, 아니 우리 모두가 벌써 부처라면 결혼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부부가 서로 부처가 되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래서 부부간의 만남이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자극하고 보다 풍부하고 깊은 내면 세계를 경험하도록 도움으로써 더욱 긍정적이고 밝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혼도 그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고타마 싯달다는 사랑하는 아내 야쇼다라와 이혼하고 부처의 길을 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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