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엄적 글쓰기를 시작하며 ―

글쓰기, ‘무엇인가’와 ‘어떻게’가 순환하는

나는 최근 모 신문에 단 열 자의 시를 쓰고 거기에 90자 정도의 시작 노트를 붙이는 이른바 〈열 자로 읽는 세상〉을 연재하기로 하였다. 예를 들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파도였던가 기껏 바다는

몇 년 만에 처음 바다엘 갔다. 여름은 끝났다. 바다가 기껏 내게 보여주었던 건 파도뿐이었다. 그렇다. 바다는 파도였다. 바람 속에서 일렁거리며 날 기다려준 저 푸른 마음

난 이 글을 준비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열 자로는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 있는 반면, 단 열 자만으로도 표현해 낼 만한 것이 참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글자 수가 줄어들면서 일어나는 가슴 답답함은 마치 내가 좁은 방 속에 갇혔다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글자가 줄어들어 무언(無言)에 가까워질수록 왜 나에게 이런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말을 줄이니 생각은 압축·제한되고 생각이 긴장된다. 만일 나에게 끝내 이 열 자도 버리고 네 자, 세 자, 한 자로 줄여서 쓰라고 한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수록 나에게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글이란 무엇인가? 글쓰기(writing)란 무엇인가?

이렇게 내가 ‘무엇인가?(What)’라고 묻는 것은 사실 본질론에 해당하며, 근본적 문제에 접근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보통 정면에서 답하기가 곤란하며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이럴 때엔 차라리 살짝 방향을 바꿔 물음의 정면을 비껴서,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고 물어도 된다.

그러면 한결 대답에 다가서기가 쉬워지는 듯하다. 이 ‘어떻게(How)’의 문제는 방법론에 해당한다. 물론 본질론과 방법론은 내용이 서로 다르다. ‘어떻게(How)’의 문제는 ‘무엇인가?(What)’의 문제가 풀려야만 논의될 수 있다. 즉 ‘무엇인가?’의 물음과 그에 대한 해답은 ‘어떻게’를 푸는 전제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전제가 된다고 해서 ‘무엇인가?’에만 매달려 오로지 거기에만 머문다면, 우리들의 삶과 세계에 대한 거의 모든 문제들이 한발자국도 꿈쩍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무엇인가?’의 문제는 ‘어떻게’라는 탐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답을 얻어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어떻게’의 문제는 ‘무엇인가?’를 풀기 위한 쪽으로 귀결된다. 양자는 왕복순환을 통해서 상호 해답의 자료를 얻는다. 이것은 나의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다가 어려워지면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쪽을 물어 들어가서, 그 결과를 토대로 다시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정의(定義)’보다도 ‘표현’이 우선한다. 정의되기 전에 인간의 글쓰기는 이미 거기(Da) 그렇게 있다(sein).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문자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을 글쓰기라고 한다면 분명 글쓰기는 ‘나’를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것은 나를 남에게 ‘알리고 싶다’는 뜻이다. 물론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서 쓴 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글마저도 남과의 관련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수많은 은혜의 연관 속에 내버려진다. 우리 개개인은 타자들과 서로 관계하면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빚을 지고 사는 것이다. 따라서 ‘홀로이다. 그래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삼가야 한다는 뜻의 ‘신독(愼獨)’(《中庸》)이란 말을 되새겨 볼 만하다.

결국 글쓰기는 자기자신을 표현하고 자기자신만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 양명학(陽明學)의 좌파로 ‘거짓[假]’을 버리고 ‘참[眞]’을 추구하고자 했던 명말(明末)의 진보적 지식인 탁오(卓吾) 이지(李贄, 1527∼1602)는 반유교적(反儒敎的)인 언설로 정부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곤 했으며, 마지막에는 투옥되어 옥중에서 76세의 나이에 자살로써 생을 마감한다.

그는 생전에 ‘태워버려야 할 책’이라는 뜻의 “분서(焚書)”, ‘산중에 꼭꼭 묻어버려야 할 책’이라는 뜻의 “장서(藏書)”를 썼다. 이것은 이단의 책으로 중국사상사에 잘 알려진 책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태워버려지지도 묻혀버리지도 않고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그 사상적 가치가 음미되고 있다. 특히 탁오는 당시 세간에서 흔히 읽히는 소설 형식의 글쓰기도 성현이 지은 《경서(經書)》 못지 않게 주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지상에는 묻어버려야 하고 태워버려야 할 글도 글쓰기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글쓰기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모두 평등하다.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서 “만물은 애당초 (그것으로서) 그러한 바가 있고, 또 진실로 옳은 바가 있다(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고 말하듯이, 모든 글쓰기는 각각의 존재 의의(가치)가 있는 것이다.

글쓰기 없이는 진리도 없다

유사 이래로 수많은 글쓰기가 있어 왔다. 철학에서건 문학에서건 종교에서건 글쓰기라는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남에게 표현하고 전달해 왔다. 글쓰기 없이는 아무리 궁극적인 의미가 있어도 그 의미를 고정화, 객관화, 보편화하여 지속적으로 전달하기가 어렵다. 각 종교의 성전(聖典)들, 철학과 문학의 고전(古典)들도 글쓰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것들이다.

영어 릴리전(religion)을 번역한 한자어의 ‘종교(宗敎)’라는 말은 ‘으뜸·궁극(=神 혹은 그런 존재를 말함)’이라는 뜻의 ‘종(宗)’과 ‘가르침·교설’이라는 뜻의 ‘교(敎)’가 합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종교는 ① ‘종의 교’인가 ② ‘종과 교’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①이든 ②이든 간에 궁극적인 어떤 것도 ‘말[言語]’과 ‘글[文字]’을 통한 ‘가르친다’라는 행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가르침의 행위에서 글쓰기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신의 소리마저도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는 글로써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眞如), 즉 진리는 말에 의지해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말을 여읜 진여[離言眞如]’를 이야기하면서도 ‘말에 기댄 진여[依言眞如]’를 이야기하고 있다. 본래 진여는 언어·문자를 통한 이른바 개념적 사유를 초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언어·문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가 없다. 원효도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에서 “말과 글에 기대어서 말과 글을 버릴 수밖에 없다(因言遣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말과 글을 떠나지 않는다(顯理不離言說相).”라고 하였다. 언설(言說)에 기대지 않고서는 진리를 표현·전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陶淵明, 327∼427)은 다음과 같은 시를 쓴 적이 있다.

사람 사는 곳에 초가 짓고 살아도 수레와 말달리는 시끄러움 모르겠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속세로부터) 멀어지니 사는 곳이 저절로 외지게 되네.
동쪽 울 밑에 핀 국화를 따고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보네.
어스름 저녁 산 기운 아름답고 나는 새들 짝지어 돌아오네.
이 속에 참된 뜻[眞意=道]이 있는데 말하려 해도 이미 말을 잊고 마네.1)
1)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 此間有眞意 欲辯已忘言

도연명은 제일 마지막 구절에서 진리[道]는 표현하고자 해도 언어[言]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묘사했다. 말과 진리 사이의 간극과 거리, 즉 표현할 수 없고 개념화할 수 없는 진리가 말로써 표현될 때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다.

《장자(莊子)》 〈천도편(天道篇)〉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수레바퀴를 깎는 일을 하는) ‘편’이란 이름의 노인[輪扁]이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는데, 손에 잡은 망치와 끌을 놓고 당상으로 올라가서 환공에게 물었다. “잠깐 여쭙겠습니다. 공(公)께서 읽으시는 것은 무슨 말[言]이오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聖人之言]이니라.” 편은 물었다. “그 성인은 아직도 살아 계십니까?” 환공은 대답했다. “벌써 죽었다.” 편은 말했다. “그러시면 임금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古人之糟魄]라는 말씀이겠지요.” 환공은 노하여 말했다. “과인(寡人)이 책을 읽고 있는데 수레바퀴를 깎는 사람이 어찌 함부로 참견하고 드는가? 할 만한 말이 있으면 좋지만, 할 만한 말이 없을 때는 죽이리라.” 그러자 편은 말했다. “신(臣)은 신이 하고 있는 일에 비추어서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는, 느리게 깎으면 헐거워져서 단단하지가 못하고, 급히 깎으면 뻑뻑하여서 들어가지가 않습니다. 느리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순전히 손으로써 알고, 마음으로 전해질 뿐, 입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깊은 이치는 바로 그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신은 신의 아들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고, 신의 아들 역시 신에게서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도 칠십의 나이가 된 이 날까지 늙도록 수레바퀴를 깎는 일은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자기의 일을 남에게 전하지 못한(古之人與其不可傳也) 채 죽어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임금께서 읽으시는 것도 그 옛 사람이 남긴 찌꺼기일 뿐이라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2) 2) 桓公讀書於堂上, 輪扁?輪於堂下, 釋椎鑿而上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爲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輪扁曰, 臣也以臣之事觀之, ?輪, 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言於其間, 臣不能以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輪, 古之人與其不可傳也死矣, 然則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수레바퀴를 깎는 노인 편은 책에 쓰여진 글[書]이라고 하는 것은 말[言]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을 완전히 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도 자기의 일을 남에게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간 것”처럼, 말이나 글에 의한 표현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 결국 진리를 드러낼 수 없기에 글쓰기는 필요 없는가?

아니다. 글쓰기 없이는 철학도 종교도 인문학도 미래가 없다. 《도덕경(道德經)》 1장에서는 “도(道)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名]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 있는 《도덕경》은 무려 5,000여 자나 된다. 인간의 개념적 표현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데에도 결국은 많은 말이 허비된 셈이다. 아니 수많은 말을 허비해서라도 설명할 것은 해야만 되는 것이다.

주자학의 이학(理學)에 맞서서 심학(心學)을 제창한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은 “뭇 성현이라는 권위도 내 마음[良知]=주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지가 곧 나의 스승[師]이기 때문이다.”3)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경서(經書)는 사람이 진리[道]를 인식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료제공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고 본다. 3) 《陽明全書》 卷20, 兩廣詩, 〈長生〉: 千聖皆過影, 良知乃吾師.

즉 양명은 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듯이(得魚而忘筌)4) 진리[道]를 얻게 되면 《오경(五經)》은 통발에 불과하며, 《사서(四書)》·《오경(五經)》과 같은 서적은 마음의 본래 모습을 설명한 것5)으로 본다. 4) 《陽明全書》 卷22, 外書4, 〈五經臆說序〉. 5) 《傳習錄》 上: 四書五經, 不過說這心體.

육상산(陸象山, 1139∼1192)이 “《육경(六經)》은 모두 내 마음의 각주(註脚)이다.”6)라고 한 것처럼, 양명(陽明)도 성인이 남긴 경서를 내 마음의 재산을 기록해 놓은 그 목록[記籍]과 같으며 경서의 내실[實]은 다름 아닌 나의 마음에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6) 《陸象山全集》 卷34, 語錄: 六經皆我註脚

그래서 양명은 경서와 나의 마음[心]을 병열시킴으로써 경서에 대한 마음의 고유 영역을 정립하고, 나아가서 경서의 내실[實]이 결국 마음에서 연원함을 지적한다. 그래서 경서의 의미는 경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서의 도리를 나의 마음에서 구하고 또 이것을 때에 따라 행하는 것이 경서를 존중하는 것[尊經]이라고 보았다.7) 7) 즉 양명은 이렇게 말한다. “經常道也, ……六經者非他吾心之常道也, ……故六經者, 吾心之其籍也, 而六經之實, 則具於吾心, 猶之産業庫藏之實積, 種種色色, 具尊於其家, 其記籍者, 特名狀數目而已, 而世之學者, 不知求六經之實於吾心, 而徒考索於影響之間, 牽制於文義之末, ……然以爲是六經矣”(《陽明全書》 卷7, 文錄4, 〈稽山書院尊經閣記〉).

이렇게 해서 양명에게 있어 경서는 인간 주체의 고양에 따라 상대화되고 만다.

결국 경서는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산물이 되고 만다.8)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글쓰기란 결국 나[주체]를 드러내는 수단, 방법에 지나지 않기에 글과 책 그 자체에는 진리가 없다. 진리는,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지시(指示)해 놓은 글과 책을 읽는 바로 그 사람[讀者]이 직접 얻어 낼 수밖에 없다. 8) 이에 대해서는 최재목, 〈제6장: 유교에서 전통과 주체―왕수인(王守仁)의 경서관(經書觀)을 중심으로〉, 《나의 유교 읽기》(부산: 소강, 1997)를 참조 바람.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 상〉에서는 공자(孔子)가 “글[書]은 말[言]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意]을 다하지 못한다.”9)고 말했다.

이처럼 글의 작자(作者)=발신자(發信者)의 마음을 알린 뜻[意](ⓐ)과 그가 알려준 말[言](ⓑ), 그 알려준 말로 이루어진 글[書](ⓒ) 사이에는 분명히 ‘간극’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독자(讀者)=수신자(受信者)(ⓓ)가 그 간극을 극복하고 발신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생겨난다. 알려준 자(ⓐ)와 읽는 자(ⓓ)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은 읽는 자에 의해서 ‘해석’(새로운 의미로 창조)되게 마련이다. 결국 이 읽는 자의 해석은 읽는 자 자신의 ‘앎’에 의해서 국한·제한되기도 하고 개방되기도 한다. 이 점에서 글은 읽는 자의 자기이해에 해당한다.

이렇게 ⓐ, ⓑ, ⓒ, ⓓ 사이의 간극은 글쓰기란 것의 위험성, 한계성을 나타낸다. 동시에 글쓰기는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불가피성’을 가지며, 또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해석·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긍정될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말과 글을 통해서 진리의 끄트머리[端緖]를 찾아 들게 하는 좋은 수단이자 방법이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말이 없이는 뜻을 드러낼 수 없고, 글이 없이는 말을 전승할 방법이 없다. 말이 글로 표현되지 않고서는 그 본래의 의미가 보존되어 편리하게 전달될 수가 없다. 우리가 접하는 ‘고전(古典, classic)’의 대부분은 어떤 사상가 혹은 그 사상에 동조하는 제자 혹은 그 그룹[學團]에 의해서 성립한다. 성현의 말씀이 고전으로 확정되어 전해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0) 10) 우리가 전통적으로 ‘예[옛]’로 읽는 ‘고(古)’의 고대문자에 대해서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편찬한 중국 고문자학의 대표적 저작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까닭이 되는 것[故]이다. 열 십[十]과 입 구[口]에 따른 것이다. 이전의 말을 아는 것이다(故也, 從十口, 識前言者也)”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고(古)’는 ‘열 십(十)’과 ‘입 구(口)’로 성립한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십구(十口)’란, ‘열 사람의 입이 전한 바의 것’이란 뜻이다. 서개(徐쨜)의 《설문해자계전(說文解字繫傳)》에서, “고대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구두(口頭)로 서로 전승되었다(古者無文字, 口相傳也).”고 말한 대로, 이전 사람의 언어를 구두 전승으로 알았다는 말이다. 청대(淸代)의 단옥재(段玉裁) 주(注)에는 “생각건대, ‘예[古]’라는 것은 온갖 일들[凡事](=만사)이 그러한 까닭(이유)이다. 그런데, 그러한 까닭은 모두 예[古]에 갖춰져 있다. 그래서 ‘예[古]는 까닭[故]이다’라고 말한다(按古者, 凡事之所以然, 而所以然皆備於古, 故曰, 古, 故也).”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예[古]’라는 것은 온갖 일들[凡事], 즉 만사가 그렇게 유래한 까닭(이유)이다. 결국 열 사람의 입이 전하는 것이 시간의 경과와 역사의 전개를 드러내고, 나아가서 그것은 역사의 현실을 규율하고 지도하는 법칙·규범이 된다. 고(古)라는 말이 전(典)과 결합되는 까닭은

말, 그리고 그것을 문자로 나타낸 글은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고 또한 시공간을 넘어서서 소통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컨대, 붓다가 멸한 직후 그의 제자들이 모여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결집(結集, sam.g┓ti) 사업이다. 이것은 부처가 설한 교설(敎說)을 편찬하는 작업이었다. 이것은 붓다가 남긴 가르침과 법[敎法], 규범(律)을 다 모아 정리하여 그것이 분산, 소실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옳게 전승되는 데 편리해지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교단(敎團)의 화합과 통일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불교에서 긴 세월 동안 행해진 《팔만대장경》과 같은 글쓰기가 결국 ‘우는 아이 달래는 종이돈’이니 ‘밑 닦는 휴지’니 하는 말로 표현되는 일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종이마저 없었다면 우는 아이도 달랠 수 없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려는 자들을 구할 수가 없다.

글쓰기는 분명 진리를 향한 표지판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로 향해 있는 그 표지판을 따라가며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표지판은 여행자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거리의 수많은 여행자들을 위하여, 진리의 지도가 없는 자들을 위하여 글쓰기는 더욱 다양하고 흥미롭고 또한 치열하게 지속되어야 마땅하다. 글쓰기 없이는 철학도 문학도 종교도 없다.

‘나’를 쓴다, 꼴값한다, 그래서 자유롭다

우리는 흔히 ‘생긴 대로 논다’ ‘꼴값한다’고들 한다. 여기서 사람은 각자 생긴 ‘꼴’을 지니고 있고 어느 꼴이든지 각기 지닌 ‘꼴’의 값, 즉 값어치(가치, 의미, 목적)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이 경우 각자 가지고 있는 하나의 꼴은 이미 주어진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예컨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혹은 정상이거나 비정상이거나 누구의 아들이거나 누구의 남편이거나 어느 학교 졸업생이라거나 하는 이 ‘∼이다’라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로서 바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꼴’이 지닌 본래의 ‘값’ ‘값어치’를 발휘해야 한다고 자각할 경우, ‘∼이다’라는 사실=운명(運命)이 ‘∼해야 한다’는 당위=사명(使命)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이렇게 생각하면 운명과 사명은 한 뿌리에서 핀 두 송이의 꽃이라고 볼 수 있다.

는 글쓰기를 ‘꼴값하는 일’이라고 본다. 스스로의 ‘꼴’의 값[가치]을 하나하나 매겨 가는 일, 그래서 스스로를 적극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래서 나는 책을 내거나 시를 쓸 때도 보통 글이 쓰여진 과정을 있는 그대로 차근차근 적어 둘 때가 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이 에피소드이든 추상적인 것일지라도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사고의 과정을 일일이 밝혀두는 일은 말하자면 내 생각과 느낌의 원적(原籍)―이것을 나는 지적도(知籍圖)라 하고 싶다―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외부, 타자에 종속되지 않은 나의 지적(知的) 독립구역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마치 전통시대의 유학자들이 글을 쓸 때에 ‘우안(愚案/愚按: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이라고 하듯이, ‘생각하는’ ‘나’의 회복을 통해서 내가 있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어리석을 ‘우(愚)’ 자는 ‘나’를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고, ‘안(案/按)’ 자는 ‘생각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전통시대의 글쓰기에서는 ‘우안(愚案/愚按)’이 없는 글쓰기는 없었다.

살아 있는 내 마음이 바로 진리와 깨달음의 자리라고 하는 이른바 ‘심즉리(心卽理)’의 자각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나를 죽인 글쓰기, 살아 있는 나를 병신 취급하거나 미숙아 혹은 저능아로 취급하는 글쓰기는 꼴값도 못하는 그런 글쓰기이다. 살아 있는 나를 불결하고도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괄호로 묶어두며, 보다 안전한 순수한 나를 구하려는 글쓰기는 결국 나를 보증하는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 나를 보증하는 그 무엇은 타자(他者)이다.

타자의 글쓰기, 타자의 지식, 타자의 이성에 매몰된 글쓰기는 항상 출처가 분명치 않다. 남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과 말과 글이 나온다. 이런 출처가 없는 글쓰기는 투명인간이나 유령을 그려놓은 것 같다. 각주 없이는 세상이 겁나고 자신이 없어 스스로의 생각으로 한 발자국도 바깥 구경을 못하는 미숙아의 글쓰기에 우리는 익숙해 있다.

나의 글쓰기는 사람과 사회와 세계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내어 일단 ‘편집’하고 인정(人情)·사정(事情)·물정(物情)에 맞게 그것을 적극 ‘풀이[해석]’하여 나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나의 글쓰기는 결국 로고스(logos)라는 말이 유래한 라틴어의 레게인(legein)이 지닌 뜻처럼, ‘모으고’ ‘선택하고’ ‘헤아리고(계산하고)’ ‘말하고’ ‘사유하는’ 일이다. 나와 타자가 감응(感應)하는 가운데 글쓰기가 있다.

이렇게 감성의 영역이든 이성의 영역이든 양심이라는 영역에서건 ‘나’는 한없이 끼여들고 뒤섞인다. ‘나’를 제외한 순수한 글쓰기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있는 글쓰기는 아름답다. 나 자신의 경험, 느낌, 생각이 있었던 자리, 즉 ‘내’가 있었던 자리는 비록 작고 미세한 것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주체’ ‘주인공’의 자리이기에 진실하며 값진 것이다.

글쓰기에서 적극적인 ‘나’의 회복은, 불교적 용어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언어는 버리고 진리 그 자체에 푹 빠져 들어감’[禪]도 ‘진리 그 자체를 비껴가서 언어에 겉 돎’[敎]의 중용을 취하며 있어야 한다.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1604)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부처의 진리가 담긴 경전 그것에만 푹 빠진 것과 경전을 비껴간 겉돌기의 양극단을 대비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 불교[佛]를 배우는 자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부처님의 행실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배로 여긴 것은 오직 불경의 거룩한 글[貝葉靈文]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를 배우는 자들은 전해가면서 외우는 것은 사대부의 글이요 구해 얻어 지니는 것은 사대부의 시(詩)이다.11) 11) 《禪家龜鑑》 〈禪家龜鑑序〉: 古之學佛者, 非佛之言, 不言, 非不之行, 不行也, 故所寶者, 惟貝葉靈文而已, 今之學佛者, 傳而誦則士大夫之句, 乞而持則士大夫之詩.(청허 휴정, 《선가귀감》, 박재양·배규범 옮김(서울: 예문서원, 2003), 23∼24쪽. 번역은 필자가 약간 고쳤음. 이하 같

휴정은 다시 부처의 마음[禪]과 부처의 말씀[敎]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만일 누구든 말[口]에 빠지게 되면, 부처께서 꽃을 드신 것이나 달마 선사가 면벽 참회한 것 모두가 교(敎)의 자취가 될 뿐이다.

하지만 마음에 얻으면, 세간의 하찮고 자질구레한 말도 모두 ‘교(敎) 밖에서 따로 전하는’ 선(禪)의 요지가 될 것이다.12) 12) 《禪家龜鑑》上: 若人, 失之於口則拈花微笑(面壁)皆是敎迹, 得之於心則世間?言世語, 皆是敎外別傳禪旨(청허 휴정, 《선가귀감》, 박재양·배규범 옮김(서울: 예문서원, 2003), 58쪽)

 

진리와 글쓰기는 둘이 아니다. 왕양명은 바깥 세계의 모든 지식도 자신의 마음의 본래 모습[本體]을 성취하게 되면(成就自家心體) 모두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 주체[心] 속에 포용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보았다.13) 중요한 것은 ‘나’이다. 나를 버리고서는 진리도 없다. 책 그 자체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나에게 진리가 있다. 양명은 〈양지를 노래하는(詠良知)〉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3) 《傳習錄》 上: 問名物度數, 亦須先講求否, 先生曰, 人只要成就自家心體, 則用在其中.

모든 사람 스스로가 나침반[定盤針]을 갖추고 있어,
만물 변화의 일어남은 모두 나의 마음에서 근원하네.
따라서 웃노라, 종전에 거꾸로 사물을 보려고 했고,
바깥의 지엽적인 것에서 구했던 것을.14)14) 《陽明全書》 권20, 居越詩, 〈詠良知〉: 人人自有定盤針 萬化根緣總在心 却笑笑前顚倒見枝枝葉葉外頭尋.

내 마음의 양지(良知)는 자기자신의 ‘준칙(準則)’이며, 행위의 모든 방향을 제시하는 이른바 ‘나침반[定盤針]’과 같으므로 그 양지가 내리는 판단대로 행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뭇 성현이라는 권위도 ‘양지(良知)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지가 곧 나의 스승[師]이기 때문이다.15)
글쓰기에서 나의 스승은 바로 나의 생각과 느낌, 나의 경험과 체험이다. 이 생각과 느낌, 경험과 체험이 바로 나의 양지이다. 글쓰기에서 ‘양지’의 회복이 절실하다.

삶을 가로지르기, 내 영혼의 고향 찾기

나는 한 번씩 지난날 내가 써온 글들을 들여다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중의 어떤 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차분한 서술이지만 또 어떤 것은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서술임을 느낀다. 또 어떨 적에는 순수한 영혼의 고백에 해당하지만 또 어떨 적에는 말도 안 되는 몽상의 토로를 만나기도 한다.

삶이 그렇듯이 나의 글쓰기는 이러한 혼잡한 삶을 서서 횡단하거나 잠복하며 통과한 과정들이다. 그렇다. 글쓰기는 내 영혼의 피[血]와 살[肉]과 뼈[骨]와 몸[身體]을 드러내는 일 바로 그것이다. 쓸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나에게 문제인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복잡한 삶과 친해지는 형태로 글을 써왔다.

나의 글 속엔 크든 작든 간에 나의 삶과 바깥 세상에 대한 생각과 느낌의 편린(片鱗)들이 빼곡이 담겨 있다. 글을 읽으면 그 순간, 그 시절의 내 삶의 면목들을 읽어낼 수가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내 삶을 읽어내는 코드일 수밖에 없다. “세수하다가 문득 두 손에 든/물을 바라보다가, 물 한줌 쥔 동안 비치다 깨어지고/다시 짜 맞춰지는 나를 보았네, 두 손과 얼굴 사이에서/은밀히 살아남은 허공의 물방울”(최재목, 〈허공의 얼굴〉 일부)16)에서 보듯이 나의 글쓰기는 내가 쥐어든 내 손의 물 한 줌에 비친 나의 얼굴을 찾아내듯, 내 삶에 은폐된 진실들을 현전(現前)하도록 하는(anwesend) 일인지도 모른다. 16) 최재목,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대구: 시와반시사, 1998), 11쪽.

이 점에서 나의 글쓰기는 만남과 대화이다. 나의 일상적 삶에서 소통되는 모든 언어를 통해서, 전면적으로, 전심신(全心身)을 통해서, 삶의 궁극을 향해 가는 과정의 한 수단이자 방법이다. 나의 ‘∼에 대한 의식(Bewu tsein vom Etwas)’, 그것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옛날 나의 젊은 시절에 쓴 시에서 “서성거렸던 땅/다시, 수성동으로 가고 싶다”(〈流民 -다시, 어떤 동화 -〉)17)에서처럼, 어디인가로 ‘가고 싶다’는 의식, 바로 나의 글쓰기가 발원하는 그곳은 내 영혼의 고향에 대한 갈증이다.17) 《죽순》 제18집(죽순동인회, 1984), 203쪽.

나의 글쓰기는 이 ‘∼가고 싶다’라는 나의 총체적 의식, 전심신(全心身)을 이끌고 영위하는 삶의 몸부림 혹은 내 삶의 진정한 고향으로의 열정적인 회귀이다. 그래서 나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삶의 낭만이기도 하다. 나의 글쓰기를 뒷받침하고 있는 고향을 향한 내 영혼의 맑고 푸른 상상력과 낭만. 그것은 ‘좋은(eu-)’ 그러면서도 ‘없는(ou-)’ ‘장소(toppos)’라는 뜻의 유토피아(utopia)일 뿐인가?

모든 것은 선을 행해 있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기술과 탐구, 또 모든 행동과 추구는 어떤 선을 목표 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 삼는 것이라고 한 주장은 옳은 것이라 하겠다.”18)고 말했듯이, 이 점에서는 글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모든 글쓰기는 선을 향한 진정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18)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명관 옮김(서광사, 1984), 31쪽(1094a).

앞으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쓰나

대학에 자리를 잡은 이래, 나는 지금까지 이런 저런 글을 많이 써왔다. 돌이켜보면 십이 년간 내가 쓴 글은 책, 전공 관련 논문, 시집, 시평(詩評), 칼럼, 수필 등 여러 종류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나는 매일 거의 무언가를 생각하며 또 그것을 글로써 썼다. 어떻게 보면 글을 ‘막 써댔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이렇게 막 써댄 글을 문득 돌이켜본다. 나의 글쓰기는 내가 그것을 선택하고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거기에 있었다’. 어쩌면 나에게 글쓰기가 있어 왔다는 사실에 나는 흥미를 느낀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글 속에서 산발적으로 그러나 선언적(宣言的)으로 글쓰기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런 나의 생각들은 《시인이 된 철학자》(청계, 2000)라는 책에 비교적 집약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렇듯 지금까지 이곳 저곳에서 내가 선언적으로 언급한 글쓰기를 나는 좀 체계화하고 제대로 된 내용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에 자극을 준 것은 몇 해 전 〈수행적 글쓰기, 치유적 글쓰기(Writing as Discipline and Therapy)-‘잡(雜)’ 다시 읽기-〉(《백련불교논집》 제10집)란 글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때 박규태 박사(당시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현 한양대 교수)는 〈틈새의 글쓰기〉란 제목의 논평문의 끝 부분에서 내 글을 이렇게 정리, 평가해준 적이 있다.

(전략) 나의 용어를 빌리자면, 최재목 선생님의 수행적 글쓰기, 치유적 글쓰기, 늪의 글쓰기는 틈새의 글쓰기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표자는 ‘틈새의 見者’라 할 수 있다. ‘나의 위기’를 품고 사는 ‘틈새의 견자’에게는 무엇보다 수행이 요청되고, 수행하는 자는 늘 늪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雜’의 존재론을 살지 않을 수 없다. 행자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純’이 아니다! 純=統=精=眞=聖만을 고집하는 자는 수행의 필요성도 치유의 의미도 믿지 않는다. 수행과 치유는 ‘純’이라는 거짓말 대신 ‘雜’의 위험을 선택하는 ‘틈새의 견자’에게 하나의 아름다운 詩語로 열린다. 시인이 정직한 학자가 되고 학자가 소박한 시인이 될 때, 인문학자의 위기는 소리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19) 19) 《백련불교논집》 제10집, (백련불교문화재단, 2000), 304쪽.

나는 나의 글쓰기를 〈틈새의 글쓰기〉로 평가해준 박규태 박사에게 늘 고마움을 느껴 왔고, 그 고마움을 언젠가 완성된 이론으로 보여주고 싶은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근 서울 출장에서 《불교평론》의 고광영 편집장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결국 평론지에 “화엄적 글쓰기”란 제하에 졸론을 5회에 걸쳐 게재하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나’의 글쓰기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나의 글쓰기에 정면으로 태클을 해대며 도대체 ‘너의 글쓰기가 뭐꼬?’라고 스스로 따갑게 물으며 나의 글쓰기의 철학을 차근차근 밝히고자 한다. 이 화엄적 글쓰기는 글쓰기의 일반적인 방법론을 서술하는 것도 아니고 고원한 이론만을 서술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글쓰기’에 대한 고백이자 스스로의 관점을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서술해 보는 것이다.
나는 모든 글들이 공존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반영되고 영향을 주면서 상호 보완·수정되어, 각각 새로운 모습의 글쓰기를 전개해 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쓰기를, 예컨대 논문이든 문학작품이든 무엇이든, 평등하게 바라볼 것이다. 모든 글들은 다 의미가 있으며 또한 상의상존(相依相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생적(相生的) 글쓰기에는 감성적(감흥적·즉흥적 포함) 글쓰기, 이성적(인지적) 글쓰기가 모두 평등하게 포괄된다. 이 점에서 나는 나의 글쓰기를 〈늪의 글쓰기〉라고도 불렀고, 〈수행적 글쓰기, 치유적 글쓰기〉라고도 불렀다. 발단은 내가 발견한 ‘늪’이란 개념에서이다. 그리고 이에 착안한 ‘늪의 글쓰기’, 나아가서 이런 글쓰기를 합하여 〈관계적 글쓰기, 연기적 글쓰기〉라고 무모하게 명명한 적이 있다. 내가 연재하고자 하는 〈화엄적 글쓰기〉는 이러한 것들을 철학적으로 포괄한 개념이다.

결국 나의 글쓰기는 선을 향한, 아름다운 삶을 위한 귀향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나의 글쓰기는 사고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의 전 ‘과정’을 시간적으로 솔직히 보여주며 써 가는 이른바 〈과정적 글쓰기〉이다. 이것은 마치 선(禪)의 세계에서, 그 수행 입문(入門) 과정에서 ‘각(覺)’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를 열 단계로 나누어 비유 설명한 〈십우도(十牛圖)〉에 비유된다. 글쓰기는 바로 진정한 자아인 소를 찾아 나서는 일과도 같다.

다음 회부터 전개될 내용들의 차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늪, 늪의 글쓰기〉, 둘째 〈인문학, 편집술, 사적(事的) 글쓰기, 연기적 글쓰기〉, 셋째 〈온몸[全心身]으로 사색하고 쓰기: 전방위적 글쓰기〉, 넷째 〈과정적 글쓰기, 수행적 글쓰기, 치유적 글쓰기〉 ■

최재목
1961년 경북 상주(尙州)에서 태어남. 영남대 철학과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를 거쳐, 현재 인문학부(철학전공) 교수. 영남대 철학과 졸업. 쯔꾸바(筑波)대학원 철학사상연구과졸업(문학석사·문학박사). 동경대 객원 연구원(1996). Harvard大 연구교수(Visiting Scholar)(1998-1999) 역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1987. 시인). 저서로 《동아시아의 양명학》(1996), 《나의 유교 읽기》(1997), 《양명학과 공생·동심·교육의 이념》(1999),《시인이 된 철학자》(2000), 《동양의 지혜》(2002), 《내 마음이 등불이다》(2003) 등이 있으며, 공저로 《실학사상과 근대성》(1998), 《한말 영남 유학계의 동향》(1998), 《한국문화사상사대계》(2001), 공동번역으로 《논쟁으로 본 일본사상》(2001), 시집으로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1999), 《길은 가끔 산으로도 접어든다》(2003) 등이 있다. 논문으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양명학의 전개〉(1991.3 博士學位論文) 〈하곡 양명학사상의 동아시아적 위치〉 〈공허의 실학: 태허사상의 양명학적 굴절〉 외 60여 편이 있다.한국외대 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졸(문학박사). 현재 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유학지원팀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