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나는 새로운 체험에 도전했다. 말 그대로 단식 체험이다. 조금만 먹어도 올챙이 배처럼 불룩하게 내민 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던 차, 내가 아는 어느 여자 선생님이 단식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얼마 후 나도 갑자기 시작하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 것인가? 처음해보는 일인지라 기대감 못지않게 약간의 우려도 없지 않았다. 준비 기간도 전혀 없이 무작정 10일 동안 곡기를 끊은 것이다.
무모한 듯 시작했지만 얻은 것은 참으로 많았다. 타성에 젖어 지내오던 내 몸의 온 세포들이 온통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하루 24시간 내내 온몸이 아롱아롱한데, 특히 수면 중의 그 아롱거리는 현상은 청소년 시절의 꿈결 이상으로 묘한 느낌을 연출한다. 잠이 아니라 이건 마치 아련한 비몽사몽 그 자체다.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한 세포덩어리 그 자체라고나 할까?

한끼 한끼 버티는 심정으로 한 3일 지나니 스스로가 대견스럽게 느껴지고, 하루 하루 신기록을 경신하는 심정으로 극복해 나간다. 생각만큼 공복이 크지는 않았다. 5일쯤 지난 뒤, 마무리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몰라 인터넷에서 검색어 ‘단식’을 치고 들어가 보았다.

나는 참 무모한 시작을 했구나! 본 단식 전에 예비단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생수단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오로지 생수만을 먹고 제대로 해야 하는데, 공복을 참기가 좀 힘들 때 사과, 귤 등을 좀 먹은지라 이제라도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 7일 단식을 10일 단식으로 늘려 잡았다.

무턱대고 대충 시작했지만, 단식 기간은 생각보다 훨씬 길 수밖에 없었다. 본 단식이 열흘일 경우, 미음과 죽을 먹는 1차 회복식 기간이 열흘, 된장국에 밥 반 공기 정도로 먹는 2차 회복식이 열흘, 그 후 식이요법 기간이 20일, 그러니까 회복식만 해도 40일 동안이나 된다. 사실 단식은 회복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단식은 회복식의 전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밝히자면, 본 단식이 끝나고 30여 일이 지난 현재 내 몸무게는 63kg 정도에서 56kg 이하로 내려갔으니, 7kg이나 줄어들었다. 그러나 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면 금세 본래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회복식 때는 특히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다고 생각된다. 장황하게 단식이야기를 꺼낸 것은 몸무게가 얼마나 줄고, 올챙이 배가 없어지고 하는 것들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 것들도 중요하고 또 분명 큰 의미가 있기는 하겠지만, 여기서 내가 밝히려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단식은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준다. 내 몸이 얼마나 소중하고, 음식물 특히 야채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실감나게 한다. 영양가 높고 진기한 음식을 통해 몸보신하고, 끝없이 먹어대는 행위가 오히려 우리 몸을 얼마나 학대하는 행위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먹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적게 먹는 것이 보약이요, 육류를 삼가고 야채류 위주로 식사하는 것이 우리 몸을 회복시키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서 한 걸음 빠져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리고 동녘에 희망찬 아침 해가 뜨고, 밝은 기운 속에 숨을 들이쉬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제와 오늘이 같아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끝없이 변화해야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우리는 사실 어둠 속의 야광주, 스스로 보름달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단식 한번 하고 난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듯이 표현하느냐 할지 몰라도, 내 경우 단식은 최소한 나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큰 지각변동임에 틀림없다. 음식물에 대한 고마움이 저절로 느껴지고, 살아 있음 그 자체를 훨씬 더 실감하게 된다.

몸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담는 기본 틀이 아닌가! 몸이 쇄락해야 영혼이 쇄락해진다. 몸을 가볍게 해야 명상도 제대로 되고, 참선도 제대로 된다. 나아가 내 한 몸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우주적 존재인가를 깨닫게 한다. 불교적 명상은 끝없이 비우는 작업이다. 비우면 우주의 기운이 저절로 내 몸을 채워주게 된다. 병 안의 물을 비우면 그 빈 자리에 공기가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너무도 간단한 이치다.

10여 년 전 필자는 서점에서 책을 열람하다가 하나의 큰 보배를 만난 적이 있다. 조그마한 문고판인데 그때 붙어 있던 정가가 500원이던가, 아니면 1000원이었던가 했을 것이다. 소개하면, 그 책은 1979년 한진출판사에서 간행한 일본 사람 增谷文雄이 저술한 《釋尊의 直觀》(韓甲振 譯)이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조그만 책이 나를 설레게 했다. 석존(釋尊)께서 얻은 그 깨달음이란 쉽게 말해 ‘수동성(受動性)’의 원리라는 것이다. 깨달음은 내가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비우면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나의 좁은 머리로 판단해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겠지 하고 궁리를 하는 것은 미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머리로 생각하면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나 자신의 선입견이 작용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일체의 존재가 나에게 다가와서 ‘참 그렇구나!’ 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 ‘만법이 다가와서 자기를 수증(修證)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이 내포하고 있는 수동성(受動性)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불교적 소양이 부족하기만 했던 당시의 나에게는 감탄할 만한 명쾌한 제시였다. 어찌 보면 가만히 내버려 두는 그 ‘비우다’의 행위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일 듯도 하지만, 우리 인간의 끝없는 본능적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 그것이다. 우주가 아름다은 것은 텅 빈 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텅 빈 하늘이 있기에 그 사이를 훈훈한 바람이 스쳐가고, 온갖 꽃이 피어나고, 새가 날고, 천고마비의 푸른 하늘 붉은 고추잠자리가 투명한 날개를 저어 비행을 하는 것이다. 또한 밤이 되면 수 없는 별들이 반짝이고, 동산에 둥두렷이 보름달이 떠오르는 것이다. 텅 빈 공간이 있기에 저 멀리 별을 바라보며 우리는 꿈을 꾸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귀에 대고 영원을 속삭이는 것이다. 비우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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