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시민운동의 새로운 길,수행과 운동을 하나로

1.머리말

최근 큰스님들께서 여러 분 열반하셨다. 세대와 세기가 바뀌는 때, 한국불교의 미래 전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 시대 절박한 삶들을 보는 눈이 있어야 답할 것 같다. 지난 10여 년 동안 뜻있는 시민들이 앞장서서 직접 사회변혁의 기틀을 만들고자 하는 민주화의 열망을 밖으로 요구했다.

새 세기는 대중들이 주체적 참여의 길을 스스로 만들고 열어가려고 하는 ‘대중참여민주주의’가 실험에 올랐다. 2002년 대선 때의 ‘노사모’는 대중참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뚜렷한 철학과 방향성을 가지고, 대중 속으로 지속적으로 확산해 가는 힘인지는 의문이다.

참여민주주의에서 주체는 특별히 각성한 시민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현장 곳곳에서 대중이 스스로 적극적인 주체가 됨을 뜻한다. 하지만 개인이 자기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동시에 보지 않고는, 참여민주의 실천은 쉽지 않다. 이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중생구제’라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방향으로 열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 실천은 법답게 가고 있는가? 우리 시대에 불교의 현실참여란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불자로서 성찰해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정토회는 중생구제의 길을 시대 문제와 직접적으로 결합시켜, 대중이 주체가 되어 참여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정토회를 지도하고 있는 법륜 스님에게 사상과 배경, 실천 방향에 대해 직접 물어 보았다. 법륜 스님은 《실천적 불교사상》(1985), 《인간 붇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1990) 등을 통해 일찍이 실천적 불교의 길을 열어갔다. 《일과 수행, 그 아름다운 조화》(2002) 등 저서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듯이, 법륜 스님과 정토회는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수행집단을 사회적 실천 속에서 펴보이고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는 말머리를 꺼내자마자, 스님은 질문하고자 하는 내용을 개괄적으로 듣고 하나씩 답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 땅의 정토

오늘 인터뷰할 요지를 말씀드리면, 불교시민운동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 나갈 길을 모색하는 의미에서, 정토회에서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저도 불교시민운동에 오랫동안 동참하면서 일반시민운동과 다른 운동주체의 역량, 불교사상적 방향성 등을 기대했습니다. 막상 일속에서는 일 중심으로 움직이며, 사람과의 갈등이나 문제들이 만만치 않았고, 재정문제도 한계에 부딪히고, 그야말로 기존 사회운동을 좇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지나왔습니다. 불교계로서 독자성과 새로운 영향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거죠. 이런 문제를 수행과 연관하여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정토회가 어떤 이념과 사상을 가지고 무엇을 추구하고자 하는지 듣고자 합니다. 정토회에서 운동의 주체가 되는 사람을 어떻게 세우는지, 운동의 이념과 불교사상을 어떻게 접맥시키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부대중인 출가자와 재가자의 공동체상에 던져줄 정토회 조직의 새로운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문제들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문제와 사회 문제를 결합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스님, 정토회란 이름에 담긴 의미가 있겠지요? 또, 이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계기도 듣고 싶습니다.

▲ 왜 하고많은 이름 중에 정토라는 이름을 붙였느냐, 정토의 기본적인 운동의 방향이 뭐냐는 것은 제가 중심이 되어서 시작한 일이므로 저의 입문 동기부터 이야기해야겠군요. 되돌아보건대, 불교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민족적인, 이런 몇 가지 요소가 제게 맞았어요. 처음에 불교를 접했을 때, 불법 자체가 너무 좋았습니다. 신비적 요소가 나를 끈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가진 과학적·합리적 요소가 제 성향에 맞았고, 또 불교가 가진 전통 문화와 정서가 민족성과 결합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민족적인 지향이 불교와 결합하면서 민족을 뛰어 넘는 열린 민족주의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형성된 것은 스승이신 도문 스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스승님은 불법에 대한 해밝음과 원칙, 민족성이 분명했습니다. 신앙으로 말하면 의심 없이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계셨습니다. 회의하지 않고 바로 믿음은 중요한 힘입니다. 믿음은 스승이 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저의 사회의식은 가족과 주위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을 한 형님들을 비롯해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간접적이지만 그런 상황이 저에게 민족의식, 민중의식을 강하게 갖도록 함으로써 지금 활동의 중요한 배경이 된 것 같습니다.

정토란 이름은 불교의 중심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사상은 중생구제, 정토구현이 핵심이죠. 보통, 불교하면 “개인구원”, “깨달음”이란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죠. 그래서 정토회는 깨달음을 기초로 하되 궁극적으로 나가야 할 목적은 중생구제나 정토실현에 둡니다. 다시 말해, 불교가 개인의 깨달음을 얻는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 즉 정토구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토회는 중생구제와 정토구현에다 확실하게 활동방향을 둔 불교적 사회운동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정토회는 종파적 개념으로써의 정토사상, 정토종, 정토삼부경 등에 한정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불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 정토회가 지향하는 역사적 모델이 있습니까?

▲ 딱 이거다 할 역사적인 모델이 특별히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근본불교정신과 승단, 대승불교운동의 비판정신과 보살사상, 초기 선불교의 혁명성 등을 계승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전체 역사에서 현재적 의미를 찾아 운동의 목표로 삼은 거죠.

― 운동의 목적과 실천 강령이 있겠죠?

▲ 자기 내면의 괴로움의 원인을 우리는 바깥에서 찾는데, 사실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 문제로 고민을 하죠. 먹고 입고 쓰고 출세하는 등 이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니, 남에게 도움을 청하고 절대자를 찾습니다. 문제를, 남을 탓하거나 남으로부터 찾을 게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찾으면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즉 내면을 되돌아보는 수행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죠.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남는 삶의 에너지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쪽으로 쓰자는 겁니다. 이것이 정토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기본으로 삼는 주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자’입니다. 전자가 성불이고 수행이라면, 후자는 정토건설이고 일입니다. 여기서 일은 일상적인 노동도 포함되지만, 엄격히 말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남을 돕는 ‘운동’을 말합니다. 수행과 일을 하나로 아울러 나가는 겁니다. 이것은 불교 역사의 전통으로 보면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것이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이며, 선농일치(禪農一致)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사상이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삶 속에 스스로 실천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회적 실천의 역사적 배경

― 불교에 다양한 모습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죠?


▲ 좀 더 부연하면, 수행이란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에게 돌려 자기를 봄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이것은 근본불교, 붇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근본불교는 사회를 외면하고 눈감는 소승불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생활하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삶과 법을 중시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우리 운동의 정신을 찾고 있습니다.

― 거기에 따른 소의경전은 무엇입니까?

▲ 핵심은 부처님의 일생, 삶에 있습니다. 정토회에 처음 오면 불교가 무엇인지 특징을 잡아 ‘불교의 첫걸음’을 가르칩니다. 다음으로, 부처님이 어떻게 자라고 무슨 고민을 했는지, 그리고 걸식하며 검소하게 살아가신 발자취를 되짚어 보는 ‘부처님 일생’과 중도ㆍ사성제ㆍ8정도·연기법ㆍ삼법인 등 ‘부처님 근본가르침’에 대해 차례대로 가르칩니다. 여기서 근본불교적 정신을 찾는데, 매일 독송하는 경전은 《아함경》입니다.

― 근본불교에서 정신을 가져오자는 것이라면, 대승불교에서는 어떤 점을 계승합니까?

▲ 조직형태, 운동방식을 계승합니다. 왜냐하면, 승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고, 남을 돕는 것이 자기구원이라는 점에서 수행과 일을 구분하지 않고, 나아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불교와 비불교도 구분하지 않는, 차별 없는 포용력이 대승불교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근본불교는 불교가 없는 데서 처음으로 나온 것이라면, 대승불교는 불교가 있는 데서 그 잘못을 비판하면서 나왔지요. 그처럼 오늘 우리도 새롭게 나아갈 길을 열어야 합니다.

대승불교가 어떤 문제의식에서 당시의 승가와 조직과 사상에 대해 비판했는지, 공(空)을 제시한 근본 취지가 무엇이며, 현실의 벽을 넘어 새로운 불교를 일으키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그 후 4∼5백년 흐르면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살펴서, 오늘날 우리 운동의 모델을 만드는데 참고하자는 겁니다.

대승불교의 대중성 확보는 나중에 세속화ㆍ힌두이즘화 함으로써, 근본불교가 법집화(法執化)한 것보다 더 모순적이고 비불교적으로 되어갔습니다. 그 운동의 초기 정신에 입각하여 후대의 변질된 문제를 반성하고,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되찾아 보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승불교의 장점을 살리고, 근본불교의 입장을 투철히 해야 합니다.

― 대승불교가 속화하고 힌두이즘으로 빠졌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한국불교의 문제인 기복화가 연관되는 게 아닙니까?

▲ 일반 대중에게 기복적 요소는 당연히 있습니다. 그 문제는 불교사상적 측면에서 이미 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비판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고 봅니다. 기복성은 대중이 가진 인간정서의 문제이므로, 근본으로 돌아가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부처라는 이름의 또다른 ‘신’을 탄생시킨 것은 근본불교의 연기법, 무아(공) 정신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전지전능한 신은 유아(有我) 사상에 근거해야 하므로, 사상적으로 불교일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를 낳습니다. 이런 모습의 불교에는 문화로서의 불교일수는 있지만, 담마(법)로서의 불교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사상적·철학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불교학자나 사상가들이 할 일입니다. 불문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논쟁이 필요 없고, 곧장 바르게 수행하도록 만들면 됩니다.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복을 비는 쪽으로 가는 문제는 처음에 얘기했던 대로, 문제가 자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생겨난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면 빌 필요가 없지요.

그러므로 문제의 원인을 ‘안’으로 돌이켜보아서 찾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여 비불교화된 대승불교의 문제를 근본불교 정신으로 회귀시킨 것이 초기 선불교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남방불교에서 부처님 일생과 근본 가르침을 구하고, 초기 대승불교의 사상과 운동방식을 계승하며, 초기 선불교가 일어날 때 문제제기한 측면들을 오늘에 되살려 운동의 근간으로 삼습니다.

무아: 체험적 사상으로

― 스님 말씀을 들으니, 결국 무아(無我)정신과 공(空)사상에 기반을 하여야 확고한 자기 실천력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아나 공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기 어렵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중론》이 정교하게 유아(有我)론을 깨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아·공이 구체적 실천력으로 전환되는 문제가 이해될까요?


▲ 사상화(思想化), 철학화한 무아와 공에서 실천력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체험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무아·공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므로써 더욱 복잡해집니다. 사상으로서 ‘무아’가 ‘거짓 나’를 버리고 ‘참나’를 찾자는 식이 되면 결국 유아적 입장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아’를 말하고 있지만 무아가 아닙니다. 체험할 수 있는 무아, 공, 견성이라야 실천력이 나올 수 있습니다.

― 체험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무엇이죠? 나를 버리는 것을 안다는 것인가요?

▲ 예를 들면,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애기를 가졌다면, 그 부모는 엄청난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어쩔 줄 모르고 괴로워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자가 17살이라면,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면 애기를 낳을 수 있지요.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남녀가 만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는데 무엇이 큰 문제지요?

그렇게 살펴보면, ‘엄청난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 마치 ‘의자가 넘어진 것’과 같은 하나의 현상일 따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현상이라고 보면, 거기에 ‘고(苦)’나 ‘놀람’의 뿌리가 없음을 압니다. 그것이 무아이고 공이죠. 즉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고, 거기에는 고라고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괴로움은 사라지고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는 단지 어떤 선택을 하느냐만 정하면 됩니다. 애기를 낳든지, 낙태를 하든지, 결혼을 시키든지 등등 선택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면 되지 괴로워 할 문제는 아닙니다. 의자가 넘어져서 부러졌다면 고치든지, 버리든지 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일과 다를 바 없죠.

여기서 과거에 집착하여 괴로워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아무리 ‘공’을 논해도 자기 인생문제는 해결 안 됩니다. 굉장히 큰 문제가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알고 보니 별것 아니라는 체험이 먼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 거기에서 ‘합리성’이 또 문제죠. 나를 고집함이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인과 연에 따른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죠. 합리적이라지만 갈등의 요소가 많지요. 그러니 머릿속으로는 이상적 대안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늘 서로 부딪힙니다. 새만금 문제도 보면 서로 옳다고 대립합니다.

▲ 현실 속에서는 대안은 간단합니다. 복잡한 것은 머리입니다.
현실은 쉬운데, 문제는 서로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배제하고 유리한 것만 하려고 하고, 두 개를 다 먹겠다는 욕심 때문이지요. 현실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손해를 감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환경을 지키겠다면 물량적인 것을 포기해야 하고, 핵폐기장을 유치하지 않겠다면 전기를 적게 써야 합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핵발전도 하지 않겠다, 전기세도 올리지 않겠다는 식으로 모순적인 공약을 합니다. 예산을 투명하게 하고, 솔직하게 말해서 국민을 설득하고 신임을 얻지 않으니 문제가 복잡해지지요.

인생 문제도 남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릿속 환영에서 생긴 일과 실제 현실을 명명백백하게 살펴봐야지요. 고(苦)라고 한 것이 환영에서 생긴 일이므로 그 근본 뿌리가 없는 것, 이것이 공(空)입니다. 책상이 없다, 금에는 금이란 것이 없다는 식으로 물질을 분석해 얻는 개념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물질을 연구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고통의 실체가 없음을 체험적으로 깨닫도록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이 무아사상이고 공입니다.

― 그러면 핵폐기장 건설 문제 등에 대해 정토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계십니까?

▲ 우리는 전기를 적게 쓰자는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핵 발전을 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생긴 쓰레기는 어딘가에 보관해야 하는데 그 지역 주민에게 그만한 대가를 지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까지 계산하면 핵 발전이 꼭 경제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물을 펑펑 쓰는 것은 말을 하지 않고 댐만 문제로 삼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쓰레기 제로운동: 대안적 환경운동으로

― 기존의 시민운동과 차별성을 좀더 분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또 정토회가 하는 일이 워낙에 많아서 어느 것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 우리는 철학적으로 소비주의나 물량성장주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실천하는 목표가 분명한 운동을 합니다. 선언하고 주장한 것에 대해 못하면 반성을 할지라도 변명하고 합리화시키지 않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된다면 어느 하나는 포기해야죠. 차는 몰고 다니면서 고속도로 개발은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식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근본 원인에 대한 반성은 없이 결과만 놓고 따지는 시민운동의 문제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특정 사안의 반대를 주로 한 환경운동에 대해서는 정토회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한 운동의 특성이나 필요성에서 대해서는 인정하고 동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적으로 나서서 해야 하는 일과 동조하는 것은 구분을 해서 합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내면을 다스리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한 수행운동입니다. 다음으로, 환경문제는 ‘쓰레기 제로운동’과 같이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을 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지운동과 평화운동으로서 기아(飢餓) 구제와 전쟁을 막는 일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이런 운동에서 우리는 기존 시민운동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가장 열악한 지역이나 사안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노사문제와 같은 사안은 제3세계와 비교하면 배부른 일이지요.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열악한 인도나 아프카니스탄 등지로 가서, 그것도 가장 감당이 안 되는 지역에서 구호사업을 벌이지요. 북한의 기아문제도 절박하지요.

그리고 수행과 운동은 따로 이뤄진다고 보지 않습니다. 평화문제를 다루면, 우선은 나로부터 내적인 평화를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것은 근본불교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과 상통하며, 대결적인 측면에서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모델을 만드는 방향에서 운동이 나아갈 길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환경문제에 있어서는 불교가 갖는 장점과 특징을 살려서 환경교육을 하고, 한발 더 나아가 실제로 실천하는 운동으로 나아갑니다.

― 새로운 환경운동으로서 쓰레기 제로운동이 흥미롭군요. 그에 따른 환경교육 내용도 중요하겠군요.

▲ 환경교육은 수행과 사상 문제를 함께하여 이뤄집니다. 쓰레기 제로운동이란 소비주의에 대한 반대이고, 직접 소비를 줄이는 일을 체험하게 합니다. 음식은 적게 만들고, 적게 먹고, 그래도 남는 것은 발효시켜 퇴비로 만들고, 그래도 남는 것을 최소화, 제로에 가깝게 하고자 합니다. 세제 사용은 최소화하기, 물은 정화시켜 내보내기 등등 자연 순환이 깨어지지 않도록 쓴다는 생각을 갖는 거죠. 이런 실천 과정을 자기 삶 속에 수행으로 삼아 녹여 넣는 겁니다. 그렇다고 인공적인 것은 다 반대하는 환경원리주의자는 아닙니다. 나무를 심는 것은 인공적이지만 환경을 더 낫게 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미래사회의 모델이 되는 실천적 환경운동을 펴고자 합니다. 공간 이용에서 인구수를 적정화하여, 그 공간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제로가 되도록 지향하는 삶의 모델을 찾자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아파트를 짓더라도 적정 녹지를 확보하고, 각 가정에서 나온 쓰레기는 단지 안에서 완전히 처리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자는 겁니다. 환경관리사를 제도적으로 도입하여 그런 시스템의 관리를 완벽하게 하도록 할 수 있겠지요. 이런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새만금운동 등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 것은 그런 대안을 내는 일이 더 중요하고, 또 현재 누구도 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실천 가능한 모델이 가장 중요하겠군요. 또 수행으로서 실천이라 하셨는데, 어떤 지침이 있습니까?

▲ ‘성불’과 ‘정토’의 통일이란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길지만, 실천 지침은 간단합니다. 적게 쓰고 남는 것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적게 쓰면 개인적으로 헐떡거리지 않고, 남는 것을 나눠 쓰면 서로 가지려고 싸우지 않죠. 또한 환경도 파괴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개인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길이 나옵니다. 정토란 그런 모든 문제들이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보고 세수할 때 눈·코·입을 한꺼번에 씻는 것처럼 하나로 풀리는 일입니다.

― 바깥에서 보면 쓰레기 제로가 실천가능한지 묻게 되지요. 집에서 비닐만 따로 모아도 금방 한 봉투가 되거든요.

▲ 쓰레기 제로가 가능하지 않다면 성불도 가능하지 않지요. 둘 가운데 성불이 쉽겠어요? 화를 10번 내다가 9번, 8번…1번 내게 만들듯이, 이렇게 제로로 수렴해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수행: 사회변화에 이르기까지

― 운동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로 이끌어져 간다는 말씀인가요?


▲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술, 제도, 철학과 사상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우선, 삶의 방향을 바꿔야겠다는 철학적ㆍ사상적 일깨움과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환경친화적 기술이 개발되어야 하고, 환경에 관한 전문기술을 지도하고 감시관리하는 ‘환경관리사’제와 같은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는 줄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요. 그러면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대로 갑니다. 여기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깨움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해결가능한 대안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실체를 고정시켜 바꿀 수 없다는 유아(有我)적 사고지요. 무아사상의 핵심은 ‘정해진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연법에 의해 형성된 것은 인연법에 의해 소멸시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 수행과 일이 다르지 않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시군요.

▲ 오늘날 삶의 문화에서 외국 사상과 종교를 무조건 따라가는 일에 한계가 드러나고 있지요. 현대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틀’로서, 붇다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얻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운동의 근거를 근본불교의 가르침에 반 이상 비중을 두고 있지요. 또한 대승불교의 철학적ㆍ사상적 측면과 선불교의 참신한 파격이 주는 가르침과 현대사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대안이 되는 정토사회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붇다의 본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 보죠. 실천에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 수행의 정신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철저한 계급사회의 벽을 깨는 일보다야 오늘날 환경에서 소비주의문제를 푸는 일이 쉽지요. 부처님 당시보다 어렵지는 않으니 풀 수 있는 문제지요. 관건은 삶에 대한 확고한 안목과 실천을 가진 붇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현실과 타협하지요.

― 타협은 현실의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 아닌가요?

▲ 담배가 나쁜 데도 피우는 것은 타협이죠. 운동의 궁극 목표는 상대방을 설득해서 안 피우게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나는 안 피운다는 것이 실천의 마지노선이지요.

― ‘간접흡연’도 있지요. 저도 물질중심적 사회의 소비주의를 반대하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함이 옳고 그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필요 이상 쌓이고 쓰게 됩니다.

▲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용납하지 않아야 하는데, 한 번 양보하면 두 번 하게 되고, 그래서 옷이 쌓이고, 안경이 몇 개씩 됩니다. 한계는 좌절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참회를 요구합니다. 부처님이 살아가신 모습이 본이 되어야 하죠. 절을 하면서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참회를 통해 자신을 다시 비춰 보고 때 묻었으면 묻은 줄을 알아야죠. 그렇게 매일 씻고 반성합니다.

다양한 시민운동의 길

― 기존의 시민운동과 다르게 자연스럽게 대안적 차원의 정리가 됩니다. 그러나 좀더 적나라하게 보면, 불교 시민운동의 다양성, 이것이 이 시대의 합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도 좋지만, 당장 진통제가 필요한 것처럼 새만금개발 반대도 급하지요. 스님은 기존 불교시민운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 모두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 바는 없고, 굳이 이야기한다면 어떤 운동을 하든지 우리가 물러서지 않고 공유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지구 전체 환경을 위해 소비주의에 대한 반성과 과소비를 줄이는 환경윤리 문제가 중요합니다.

환경윤리는 인간의 도덕적 윤리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둘째, 인류가 굶어죽고 작은 병에도 죽어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북한의 기아문제는 국가 정책의 변화가 있을 때까지 인도적인 지원에 대해 함께 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셋째, 한국에 산다고 하면 한반도의 평화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북한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김정일을 좋아하든 반대하든,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어야 합니다.

― 어떠한 운동의 장이든지 의식적으로 그런 문제는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죠?

▲ 모든 사람이 이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큰 틀의 문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서로 협력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비유하면, 그런 문제들은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가족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겁니다.

― 저는 ‘통일운동의 일상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스님은 북한문제에 대해 의식을 열어 놓는 정도로 말씀하시군요.

▲ 모든 사람들이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통일의 방식에 있어서도 다양하고, 원치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보다 사람이 굶어죽고, 간단한 질병에도 죽는 문제가 더 중요하고 반드시 치유되어야 옳습니다. 따라서 북한을 어떻게 보든지, 굶어죽는 것은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공감대로부터 또다른 선택의 여지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든지 국민여론을 수렴해 보면 반대가 있습니다. 이해가 서로 다른데 무조건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한 운동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조선일보를 지지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는 겁니다.

― 그럴 때 성숙한 대화의 문화가 중요하지요. 또한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잡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성운동, 안티조선운동 등은 힘이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 있기 때문에 균형을 잡자는 대안이지 않겠어요?

▲ 반대할 자유, 찬성할 자유가 있는데 자신들만 옳다는 주장은 바람직하지 않지요. 그런 주장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크든 작든, 균형이 깨지든 아니든 간에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굶어죽는 문제와 같은 극단적 상황은 막아야 하지요. 그 밖에 일은 인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몫이 있습니다.

파병에 대해 저는 반대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파병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어떠한 대안을 선택해야지요. 만약, 전투병을 파병한다면 전보다는 좀더 세게 막아야 하겠지요. 상황에 따라 선택할 문제라는 겁니다. 다른 시민단체는 각각의 자기 선택에 따라 하겠지요.

운동은 다양한 역할과 자유로운 선택이 있게 하고, 어떤 생각이든지 말을 하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종종 그럴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풀 때 미래에 대한 전망이 중요합니다. 미래 전망이 막히면 과거에 대한 부담이 훨씬 많습니다. 미래 전망이 확실하면 과거에 대한 반성도 좀더 용이해질 것입니다.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김정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문제보다 통일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유익함을 그려보면 생각이 달라도 서로 협력하기 쉽지요.

― 남북 문제에 있어 스님은 평화 문제, 기아 문제에 대해 생각을 공유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가집니까?

▲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다른 일을 접어두고 전쟁부터 막아야 합니다. 전쟁은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야 뛰어들 수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도움이 되냐 안 되냐의 문제가 아니라 민중을 생각하여 최소한의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도 체제 문제와 분리해 민중적 관점에서 제기해야 할 일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도 기아와 인권 문제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보수 쪽은 인권 문제만 가지고 체제까지 비판하고, 진보 쪽은 인권 문제를 외면하고 평화만 강조하고, 중도 쪽은 인권·평화를 외면하고 기아의 문제만을 보고 얘기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새롭게 풀 수 있는 방식은, 공유할 수 있는 이슈는 함께 하고 나머지는 각 단체의 방식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안에 따른 분리 참여가 가능하게 하는 거죠. 부분과 전체 관계를 열어 놓고 가는 겁니다. 다른 비유로 말하면, 젊어서 독립운동을 했지만 늙어서 친일했다고 싸잡아서 친일분자로 비판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지요. 전체적으로 열어 놓고 보면 독립운동을 한 것은 한 대로 도도한 ‘운동사’의 흐름으로 분명하게 남게 됩니다. 부분을 가지고 모두 부정하면 결과적으로 독립운동 한 사람이 별로 없어져서 역사 전체가 부정되고 말지요.

― 전체를 보면 그렇게 설명이 되는데 개인의 문제로 보면 기회주의가 되고 힘이 빠지는 일이지 않습니까?

▲ 인간은 어차피 변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봐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부터 계속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조직으로

―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은 사부대중의 화합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 같습니다. 운동의 추진력이 되는 주체와 조직의 문제에서 정토회가 의미 있는 모델을 제시할 것 같은데요.


▲ 불교의 근본 교단의 모습은 무아와 무소유 등에 핵심이 있었고, ‘상가’는 대중의 귀의처이기 때문에 출가정신에 부합해야 구성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정토회의 총회는 의사결정기구인데, 이 구성원은 상가 정신에 동의해야 합니다. 욕심과 고집이 있고 어리석은 자는 대중이 믿고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가 구성원은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는 출가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탈퇴하면 됩니다. 형식은 초기 대승불교의 보살승단에서처럼, 출가자와 재가자를,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평생서원’을 세워 30년의 만일결사(萬日結社)에 동참합니다.

둘째, 위와 같은 정신으로 삼년 결사(結社)를 하면 실무자가 됩니다. 이들은 일반사찰의 종무원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최소한 3년은 근본불교 정신에 따라 출가자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서원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셋째, 신도들은 자기 생업을 가지고 정토회의 목적에 동의해서 정토회의 운동에 동참합니다.

― 운동에서 뚜렷한 지향과 투철한 결사(結社) 조직을 이루고 있으니, 수행과 운동을 결합한 새로운 조직으로서 모델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사결정을 어떻게 합니까?

▲ 밖에서 보면 정토회는 지도부의 결정에 일사불란하게 무조건 따르는 것으로 알지만, 내부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토론하는 시간이 매우 많고 그 과정도 수행과 일치시킵니다. 정기적인 회의와 연수가 있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삼의제(三議制)를 도입해 반드시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삼의제란, 소수 의견도 존중하기 위해 세 번까지 문제제기하여 재론할 수 있도록 한 방법입니다. 삼의제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게 의견을 수렴할 수 있습니다.

― 재정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 재정은 투명과 절약을 기본으로 하고, 사업을 위해 필요한 것은 쓴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현재 관리 시스템은 일반 재정관리 제도를 원용하여 정착시킨 것입니다. 지정기탁은 그 항목으로만 씁니다. 간혹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정토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를테면 커피 사라고 준 돈은 받지 않거나 준 사람에게 동의를 얻어 다른 곳에 씁니다. 개인에게 쓰라고 준 경우는 처분 권한이 받은 사람에게 있으므로, 공금으로 처리하여 주로 내부 복지 용도로 씁니다.

― 주요한 말씀을 얼추 들었는데, 제 문제와도 연관해 마지막 질문을 드립니다. 자기 문제를 사회문제와 연결해서 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각자 지고 있는 개인의 문제가 너무 무거우니, 그 문제에 답하기도 쉽지 않고, 게다가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기 더 어렵지요. 뜻을 같이하여 대중이 함께 가는 것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의 같고 다름이 무엇인지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는 것은 함께 하기 힘드니까 혼자서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 되니까 혼자서 간다는 것은 다른 이를 외면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외면은 또 하나의 집착일 뿐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는 것은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은 세상이 뭐라고 해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흔들림 없이 간다는 실천을 뜻합니다. 처음에 믿음의 힘을 말했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괴로워서 찾아올 때, 자기 문제가 벅차서 오지, 세상 문제 해결하려고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괴로움이 아무리 커도, 기복적으로 빌게 하거나 맹목적 기도로 풀지 않습니다. 수행의 문제로 눈을 내면으로 돌려보게 합니다. 수련회 등을 통해 자기 몸과 마음에서 철저히 체험하게 하고, 동시에 남을 생각하게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면 근본적으로 풀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잘 이해해도 실천과정에서는 또 안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날마다 수행기도를 하며 지속적인 실천력을 가지게 합니다. 원력을 단단히 하는 기도는 중요하지요.

스님과 인터뷰를 일단 끝내고 몇 가지 얘기를 더 나눴다. 밖에서 볼 때, 정토회의 정체성이 강하니까 함께 하기 어려운 느낌이 든다고 웃으면서 물었다. 정토회는 일과 수행에 몰두하므로 세속적인 ‘친목’이 있기 어렵고, 또 일을 연대할 때는 실용주의로 하니까, 인사치레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정토회 활동의 연대는 일과의 관계에서 종교나 정파를 떠나서 매우 유연하다. 반면 세속적인 의미의 여유와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스님도 변한다고 했는데, 훗날 스님한테서 ‘인간적인 빈틈’을 좀 찾아보고 싶다.

엉뚱한 맺음이지만, 빈틈은 예술에서 찾는 것이다. 예술은 미천하고 모자라고, 버려진 것까지 승화시켜 보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다. 그래서 파격이 폭을 더 넓게 한다. 스님의 단단한 실천에서 그런 의미의 파격은 묻지 못했다. 진리는 ‘선’과 함께 가고 또 ‘미’도 함께 간다. 아름다운 실천이 예술적 파격도 더한다면… 사회적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우리 시대 불교문화를 창조하는 길을 꿈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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