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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독기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 박치완
[17호] 2003년 12월 10일 (수) 박치완 chwpark001@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하늘-천, 따-지를 따라 외며 하늘을 섬기고 땅을 일구는 법을 배웠던 옛 서당(書堂)이 지금은 모두 속셈학원, 영어학원 등으로 바뀌어 있다. 거리엔 온통 학원 간판이 즐비하다.

이런 현대판 학원에서는 자연을 중히 여기고 사람 사는 이치를 가르치는 대신 남을, 동료를 이기고 누르는 법만을 가르친다. 어느새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이고, 지면 밀려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경쟁의 중심에서 밀려나면 곧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하여, 중심을 향해 모든 사람들이 그처럼 불나비처럼 모여드는 것일까?

그러나 문제는, 불교적으로 말해, 그 중심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정한 중심이라기보다는 화탕지옥(火湯地獄)이라는 데 있다.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는 그곳에서 살아남을 장사(將士) 있을까? 종교나 철학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기적 과욕과 무지, 어리석음(三毒)만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도 구제론적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는 말이다.

다소 급하게 말해, 이러한 삼독(三毒)의 결과가 현대의 기법(機法)1)으로 과(果)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기법은 서구의 도구적 이성과 과학주의의 연기물(緣起物)이다. 주지하듯, 도구적 이성과 과학지상주의는 자연은 물론 인간을 ‘죽이고’ 있다. 온 세계를 ‘지배하고 삼키려’ 안달이다. 베이컨의 “지식은 힘이다”는 선언 이후 종교와 철학은 과거의 영예를 잃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1) 본 논고에서 기법(機法)이란, 서구의 도구적 이성과 그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과학기술중심주의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왜 현대의 종교와 철학은 죽어가는 자연과 기심(機心)으로 가득 찬 인간을 구제하는데 진력(盡力)을 다 하지 않고 오히려 과학 쪽을 기웃거리고 있는지? 기웃거리며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이 불이일원(不二一元)임을 이야기하려고 애쓰는 것인지? 직접적으로는 아니어도 이것들이 서로 상통하고 있다는 억지 중매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왜 많은지?

그러나 이러한 과학 기생적·소극적 태도로는, 필자의 판단에, 종교와 철학이 제 소임을 다 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는 적절한 태도도 아니고 모색해야 할 방법도 아닌 듯하다. 과학과의 억지 중매는 실제로 종교와 철학의 위상을 불리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으로는 결코 인간과 세계를 구제할 수 없다”고. “기법(機法)은 인간과 자연 세계를 황폐화시킬 뿐이며, 그것이 현실”이라고.

이와 아울러 종교와 철학이 현재처럼 비인간적·반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세태를 바로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본분을 다 할 수 있으려면, 과거의 고차의 훈계적 태도에서 전략적으로, 잠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종교와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허상(虛像)에 휘둘리고 있는 세간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한, 구현될 수 없는 추상적이기만 한 진리는 그 누구를 위한 진리도 될 수 없다. 비유컨대, 세간을 비추지 못한 거울은 거울로써의 본래 의미를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범인들의 허상을 쫓으며 겉도는 삶, 삼독(三毒)과 기법(機法)이 지배하는 세계, 이에 거울이 되어줄 수 있는 지혜이다. 이러한 삶과 세계판도에 반성을 촉구하는 일종의 지표(指標)로서 거울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때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종교와 철학의 역할은, 최소한, 충분하다. 그렇게 필자는 믿고 있다. 혼자만의 독각(獨覺)을 위해 마음의 거울을 닦는 일보다 현재 자신이 가진 거울로 현실을, 세상을 비추어보고, 거기서 해야 할 바를 찾을 때 종교와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가 구체화될 수 있다.

이렇게 구체화의 과정을 통해 겁래(劫來)한 무명(無明)을 하나 둘 벗겨가야 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여러 현철들에 의해 제시된 진리, 이상사회에 대한 이념들은 부지기수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진리, 이념들이 모자라 현재 우리의 삶이 삼독기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결국 문제는 이들 진리, 이념들이 현실을 전혀 비추지 못하거나 비추려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실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역전현상들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사랑도, 자비도, 구원도, 양심도, 평등도, 정의도, 합의도, 배려도 모두 허명일 뿐, 이러한 선(善) 이념들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원활히 구현되고 있거나, 다른 사회·국가, 서로 다른 문화권 간에 상호 소통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으니! 그런 기대를 하기가 점점 어려운 것이 세상꼴이니! 이러한 두 가지 문제의식을 갖고서, 이 글에서 필자는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를 불교의 독자들 앞에 소개해볼 생각이다.

왜?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바슐라르가 다른 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대를 진단하고 있으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슐라르가 불교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식자들만의 편견이다. 그의 사상만큼 삼독기법의 지배를 반성케 해주는 철학자가 없다고 사료된다. 물론 그의 사상적 행보가 우리에게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모든 인간에게 있어 그 근본 근기(根器)라 할 감성, 상상력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그 누구도, 어떤 사상가도 바슐라르 이전에 감성과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그게 뭐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래에서 확인하게 되겠지만 감성과 상상력은 인간 사유의 모태이자 삶의 근원이다. 감성과 상상력 없이 인간이란 존재는 살아갈 수 없다. 위에서 제시한 삼독기법(三毒機法)의 지배 또한 바로 이 감성과 상상력이 일방적으로 이성과 과학에 의해 지배받게 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고, 필자는 진단하고 있다.

2. 이성과 과학 중심의 ‘현대’, 죽음의 도시

삶의 근원이자 사유의 모태인 감성과 상상력을 되살릴 때, 회복할 때 우리는 흘러가는 세계를 다시 볼 수 있다. 거슬러 볼 수 있다. 현재의 허상(虛像)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상(眞相)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다. 버려도 좋을 것과 되찾아야 할 것을 분간할 수 있다. 박물관의 지식과 생(生) 지식을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대’가 과연 제대로 방향잡아 가고 있는 것인지, 그 실상을 한 번 바슐라르의 언급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바슐라르가 볼 때도 현대는 당연 삼독기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는 분명 인간과 세계가 삼독기법이 지배하게 됨으로써 갈수록 황폐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성에 대한 절대 믿음과 과학의 진보가 그 일차적 원인일 것이다. 이성과 과학은 인간에게서 흙과 더불어 가능했던 휴식의 공간을 모조리 집어 삼킨다. 휴식의 동산에 인정이라곤 없는 자본이 들어서고 있다.

대지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로 꽉 차고, 대지와 자연의 목자이자 주인이기도 했던 인간은 오히려 자신이 편의를 위해 만들었던 것들에 의해 통제받고 감시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벽은 두꺼워지고, 벽이 두꺼워질수록 외부세계와 인간은 단절되고, 하늘은 뿌옇고, 시야는 갑갑하고 인간들이 함께 설, 살, 움직일 땅은 점점 비좁아진다.

허공을 향해 치솟은 각진 네모꼴 세상엔 온통 찬란한 인조물들로 화려하나, 정작 그 속에는 ‘인간’이 숨쉴 공간은 ‘없다’. 이렇게 서구의 도구적인 이성, 이성의 노예가 된 과학중심주의는 우리에게 기계-천국이라는 폐허만을 선사한 것이며, 가스통 바슐라르의 경고대로,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집이 없는”, “꿈꾸기가 불가능한” 거대 도시에 유폐된 채 살아가야만 하는 사물-존재, 생각하는 기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2) 2)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03, p.107. “빠리에는 집이 없다. 포개어져 놓은 상자들 속에서 대도시의 주민들이 살아간

죽음의 사자(使者), 유령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온 도시가 이 지칠 줄 모르고 폭식하는 사자(死者)의 그림자들로 가득하다고나 할까, 이런 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지치고 고단한 영혼과 육신을 놓아 쉴 곳을 찾기 힘들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여유로운 공간 자체가 없다. 그뿐 아니라 쉴 짬도 주어져 있지 않다. 기계처럼 계속 움직여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인, 앞서도 언급했듯, 움직이지 않으면 타인, 친구를 이길 수 없다. 경쟁에서 뒤쳐진 죽은 목숨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마치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로봇이나 다름없는 사물-존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관계》란 그림을 보라.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하고 있을 뿐, 그 어떤 이와도 대화하지 않는다. 서로는 관여하지 않은(상대에게는 전혀 관심없는) 관계로 대상과 관계 맺고 있다. 복잡한 관계, 구조, 시스템 안에서의 고독이라고나 할까!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이 아닌 외로움! 공허러움! 아마 에셔는 이 그림에서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역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관계는 다른 인간과의 관계가 아닌 자신과의 관계라는, 타자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일과 관계라는, 자연 세계가 아닌 인조된 세계와의 관계라는,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도는 관계 속에서도 그러나 늘 외롭다는…….

다시 한 번 두 눈을 크게 뜨고 이 《관계》란 그림을 보라. 등장한 소재들 모두가 오직 건물 내부를 치장하기 위한 오브제처럼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건물 내부의 치장을 위해 인간까지도 서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 되는 우주복을 입은 마네킹이 되어야 했는지!?

그러나 이런 인공 세계에 꽃이 필 수 있을까? 없다. 새가 없다. 노래가 없다. 자연, 숲이, 인간이 휴식할 수 있는 나무 그늘이 있을 수 없다. 대화할 수 있는 ‘동무’가 있을 수 없다. 도시적 삶은 그 흔한 수다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곳에는 색깔도, 향기도 없다. 한마디로, 이런 인공 세계에는 인간이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공간이랄 수 없다. 전시된 것은 오직 과학-기술의 산품들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을 누가 과연 인간이 살만한 곳이라고, 다감다정한, 인정이 넘치는 이상적인 세계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세계에 기계적으로 맞추어 살아야 하는 현대인, 이 ‘기술적 이성중심주의’를 과연 문명인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을까?3)3) 신승환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살림출판사, 2003)에서 벨쉬를 인용해 우리는 근대 기술을 단순히 옹호하거나 일방적으로 거부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단지 기술적 이성중심주의가 범람하는 것을 거부할 뿐이

프로메테우스적 공작인, 절제를 모르는 근대 기술인의 욕망은 이렇듯 기법으로 현신(現身)했고, 지금도 이러한 인간들의 지칠 줄 모르는 삼독은 지구촌 곳곳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으며, 급기야 우리는 서로 상호 의사소통마저도 불가능한 언벌(言罰)을 받고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기법(機法)의 지배 앞에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만 것이다.

대화가 막힌 인간관계, 그렇게 스스로를 외부세계와 차단하는 자폐적 인간들. 그 결과 심지어는 대화(dia-logue)마저도 ‘먹거나 뱉는’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 ‘관계’, 사랑마저도 주고받는, 받은 만큼 주는 일종의 거래로. 제 욕망에 타죽을 줄 모르고 돈이 보이는 곳, 돈이 부는 곳으로 떼를 지어 쏠려 다니며 자본의 노예가 된 불나비 같은 존재들. 제 가진 것에 만족하지도 못하고, 이를 나눠가질 줄도 모르는 당신, 우리들.

이는 분명 우리의 시대의 한 단면이요, 변화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과거적인, 적응을 하지 못한 아버지 세대가 자식 세대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종교와 철학이 제 역할을 하기가 날이 갈수록 힘들어진, 모로 가는, 모로 사는, 극도로 도시화된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현대 문명이 쌓아 놓은 물질문명의 피라미드 속에 잠들어 있는 미이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4)4) 그런데 그 미이라들은 다시 자신을 벽돌삼아 새로운 피라미드를 쌓고 있다. “아버지, 당신이 남긴 것은 벽 속의 벽돌 한 장 뿐이시지요.”(Pink Floyd의 노래,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1〉 중에서)

이렇듯 이성과 과학이 중심이 된 현대의 우리는 주인이 되지 않으면 노예가 되어야 하고, 비양심적일수록 성공하고, 이기스럽지 않고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이름하여 무한경쟁 시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자들과 투쟁할 수밖에 없는 ‘홉스적인’ 투쟁의 세계에 살고 있다. 병적·광적 현대! 현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이론까지 등장해 있으니, 웃기도 씁쓸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낯이 화끈거린다.5) 이는 분명 필자만의 군걱정은 아닐 것이다. 5) R.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홍영남 옮김, 을유문화사, 2002) 참조. 도킨스는 이 책에서 우리 인간 역시 모든 동·식물, 박테리아 그리고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원래 이타적 존재가 아니라 이기적 존재며, 이러한 이기적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생존기계라고

3. 삼독기법(三毒機法)의 지배와 이의 횡포

이렇듯 우리 모두는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중생과 함께 더불어 가꾸어가야 할 이상적인 미래-사회, 불국토(佛國土), 탕아처럼 떠돌다가도 언젠가는 되돌아가 육신을, 영혼을 쉴 수 있는 곳, 마음의 고향·본향을 잃어가고 있다. 진정으로 진실이, 참 진리가 통할 수 있는 세계상, 인간상을 잃고서 방황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가 본(本)을 삼고 추구해야할 진상(眞相)이 일그러져 있으며,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화탕지옥과도 유사한 상황과 사태를 마치 남의 일인 냥 고민하고 있지 않으니 문제다.

그뿐인가. 설상가상으로 오늘날의 사춘기적 전자세대들은 그런 그림을 그리지도, 갖기를 원하지도 않는 듯하다. 아무런 내용없이 시끌벅적하기만 한, 그야말로 정신없는, 온통 소음뿐인 도시에서 TV, 광고와 함께 태어난, 흙을 만지거나 밟아본 적이 없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담과 벽에 익숙한, 바퀴벌레만 보아도 펄쩍 뛰는, 꿈속에서조차도 로봇들과 더불어 게임하며 가상세계를 유영하는, 이들은 그저 감각과 욕망을 자극하는, 떠도는 무한 정보의 바다 위에서 무자맥질하며, 자신들의 현재 안위와만 잠통(潛通)하고 있으니……. 급기야 이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현실과 가상(가짜) 현실을, 마치 19세기를 살았던 헤겔이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듯이, 완전 혼동하며 살고 있다.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고 있다. 이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라고(보드리야르) 믿고서 정작 중요한 진실을 거부하고 있다. 이성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원본과 사본,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을 마구 뒤섞고 있다. 뒤섞어 기존의 가치를 뒤흔들고 있다. 이들에게는 도덕, 양심, 그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 모든 것이 다 가치란다.

우리가 사는 현대가 혹 자연주기상으로 로마제국의 노년기에 다다른 것은 아닌지6) 심히 의심스럽다. 6) 슈펭글러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성장 단계를 거친다. 그래서 저마다 아동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다”고 한다(조지프 A. 테인터, 《문명의 붕괴》, 이희재 옮김, 대원사, 1999, p.150에서 재인용).

F적 비현실 세계를 ‘순전히 재미로’ 플래시몹하기,7) 가상의 익명 공화국에 길들여지며 점점 기계와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친숙해져가는 생활 패턴. 변화된 환경 때문이 아니고, 어쩌면 유전자적으로 별종이 등장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이제 신세대는 구세대와 세계를 보고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물론이고 라이프 스타일에 있어서도 판이하게 구별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벽은 두꺼워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이들 신세대에겐 어쩌면 머무를 ‘땅’, 되돌아가 쉴 현실과 고향 등이 없는 바, 집·휴식의 거소(居所) 등을 필요치 않은 바, 이들이 가상 세계에서 헤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7) ‘플래시몹(flashmob)’이란 불특정 다수가 인터넷이나 휴대폰을 이용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현장에서 주어진 행동을 동시에 하고 곧바

실향민(失鄕民)! 실토인(失土人)!

이들 머물기보다 떠돌기를 즐기는, 주어진 것에 기생하고 있으면서도 철저히 무소속이기를 원하는 이들 학원 세대는, 감히 말하건대, 우리의 도시·문명·전자·기술이 낳은 희세(稀世)의 ‘탕아들’이 아닐까 싶다. 이 돌연변이 현상, 지난 세기의 경험이나 지혜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마치 《현우경》에 나오는 앙굴리마라처럼 자신의 어머니에게까지 칼을 들이대는,8) 이런 갑작스고 돌발적인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 정작 진리는 가르치지 않고 삿된 것만을, 동료와 남을 이기는 법만을 가르쳐왔던 구세대의 잘못된 교육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8) 이 설화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송지홍이 엮은 《불교 설화 산책》(불교시대사, 1992) 참조.

이 지점에서 필자는 문득 M. C. 에셔의 《눈의 서로 다른 상태》란 연작이 떠오른다. 글을 쓰다 말고 그의 화집(畵集)을 펼쳐, 가만 들여다본다. ‘그가 그린 눈’과 반치기로 눈싸움을 시도해 본다. 순간, 마치 전기에 감전된 느낌을 받는다. 해골에 나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동공 안의 ‘헐크’를 닮은 해골에 인질이 되고 만 것이다. 헤덤비던 내 자신의 존재가 금새, J. P. 사르트르의 표현대로, ‘무화된’, ‘물화된’ 느낌을 받는다. 삼독(三毒)에 찌든 너는 누구냐?

기법(機法)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란 인간은 대체 누구냐? 주어진 현실에 그저 침묵하며 서바이브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너는, 우리 모두는?

이렇게 기계 중심으로 치닫는 현대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적응해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지금과는 다른 건전한 미래의 불국토를 준비하며 도전하고 역무(役務)해야 할까? 자신의 그림 속에 본인을 해골로 그려 넣은, 사유하는 화가 M. C. 에셔, 이는 사실 정신을 잃고, 놓고, 그렇다고 죽지는 못하고 간신히 숨이나 쉬며 연명해가는 우리 모든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죽은 자로 살아있는, 진정한 거소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도회에서 방황하는, 망자로?

도대체 자신의 현주소, 정체 따윈 묻지 않는, 그저 기계처럼 자연 없는 도시의 콘크리트 빌딩에 갇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평범한 인간의 눈보다 더욱 ‘리얼하고’ 강렬한 이 그림은 내게 마치 “정신 차려”라고 호통치는 불가(佛家)의 사천왕상의 우락부락한 눈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우리 모두의 죽음을 앞서 직시하고 있는 듯한, 타락한 인간의 영혼과 희망없는 미래를 염려하고 있는 듯한, 그런 메시지를 담고서.

4. 상상력, 죽음의 도시에서 깨어나는 법을 가르치는

이런 상황에 직면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고, 꿈의 이상향을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한 시골때기 같은 철학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날과 같은 전자-정보-우주시대에 ‘다크 시티’ 같은 인공낙원이 아니라 반대로 과거·전통·신화 속에서 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런 철학자가 있다면, 이는 정말이지 효용가치가 없는, 박수 세례받기 어려운 일일까?

그렇지 않다. “진정한 낙원은 우리가 (삼독기법에 의해) 잃어버린 낙원이다(Proust).”9)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바슐라르에 기대어,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차를 잘못 탄 상태로는 그 속에서 아무리 반대방향으로 걸어봐야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되도록 빨리 그 기차에서 내리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9) F. Berc툁, “Les Paradis perdus de Proust et de Bachelard”, Bachelard, L、arc, 1990, p.67에서 재인용.

그렇다. 진정 깨인 자라면 이성·과학·기계·자본이 중심이 된 자연과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 시대를 수긍해 그저 따라가기보다 이를 겨냥해 ‘응전’해야 한다. 이것이 깨인 자, 각자(覺者)에게 주어진 책임이요 고난이라면, 이를 피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제 선 땅에서 거소 잃은 이방인으로 떠돌며 영혼 없는 시대의 거지로 방랑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시대의 거지로 방랑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는 최소한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비인간적, 비자연적 기계-전자 문명에 대한 치유책을 궁구해야만 할 공동의 책임이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글에서의 필자의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과 고민은 결코 도회에 더 잘 정착하고 문명에 더 잘 적응하자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가보지 않아도 그 결과가 뻔한,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추천할만한 해결책일 수 없다.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타성적으로 자신이 사는 시대를 방향없이 떠돎, 기웃거림은 현대의 기계화, 비인간화, 반자연화에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소극적 태도로는 결코 “신까지 압살한”10) 우리 시대의 흐름을 바꾸거나 뿌리없는 현대의 세계관을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할 것이다. 10) 뒤랑은 라크로와(J. Lacroix)를 인용해 우리 시대를 “신을 압살한 시대”라고 보고 있으며 그 원인을 실증주의에서 찾고 있다(질베르 뒤랑, 《象徵的 想像力》, 진형준 譯, 文學과 知性社, p.27).

결국 진정한 불국토의 건설을 꿈꾼다면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사유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바꿔 말해, 모난, 균형을 잃은 시대의 흐름에 기죽지 않고 시대를 거슬러 볼 줄 아는 자기-비판, 시대-비판 작업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라는 것이다.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최소한 기계·도구적 이성으로 인해 파괴된 대자연을 치유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또한 인간의 자연본성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다소 ‘고전적인’ 주장이 우리에게 여전히 설득력이 있으며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가 바슐라르의 상상력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역시도, 주지하듯, 모든 인간이 꿈꾸며 살 수 있는 공간을 구상했다. 특히 그는 도구적·계산적 이성 중심의 사유를 비판하고, 인간의 감성적 부분(열정·느낌·감정·정서·감각)을 회복시키는데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실존, 존재의 고통이 보상받을 수 있는 문학·예술·철학을 새롭게 탐구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어쩌면 그는 자본과 과학의 노예가 되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촌농보다도 여유없이 사는 도심의 우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외치고 있을지 모른다. “지성·이성에 노예가 된 문자충들아, 스스로가 채운 진보라는 이념의 이데올로기, 문명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라”고.

바슐라르의 충고대로, 진보·문명의 감옥에서 해방되려면, 그러자면 먼저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눈먼 봉사처럼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했던, 현재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 인간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기술-문명, 인간의 지식은 과학과 더불어 진보한다는 환상으로부터 과감히 깨어나야만 할 것이다. 지적 진보가 인류의 행복을 담보해 줄 것이라는 망상 따위는 이제 버려야 할 것이다. L. 비트겐슈타인도 잘 지적하고 있듯, 인류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진리에 더욱 가깝게 다가서고 진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로 인해 “인간성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것을 추구하면서 인류는 [오히려] 함정으로 빠져들고”11) 있는 것이다. 11) L.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Univ. of Chicago Press, 1980,

아니, 이런 이유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러한 환상에서, 함정에서 벗어나 완보하며 느리게 사는, 다소 더디게 살더라도 그것에 만족하며 사는, 그런 삶의 방식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필자는 강조하려 한다. 현재의 초과학적·디스토피아적 상황에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미래의 진정한 불국토를 건설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에 의해 잠재워진 우리의 온 상상력을 깨워 내어, 잃어버린 본래 마음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그러자면, 바슐라르의 말대로, 먼저 지성, 이성에 대한 헛된 믿음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올된 지적 성숙을 자랑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무너뜨려야 한다.” 왜냐하면 지성, 이성은 자연세계, 인간세계를 경화시키는 것은 물론, 그의 제자인 뒤랑도 《상징적 상상력》에서 잘 지적하고 있듯, 데카르트 이후, 인간을 계산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으로 유도해 물리적인 세계를 절대시하게 하는 “야만적 사고”의 전형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12)12) 《象徵的 想像力》, p.138 : “‘야만적 사고’란 (…) ‘야만인들’만의 사고가 아니고, 보다 심층부에서는 오히려 과학에 의해 형성된 우리들의 사고에 가까운 것이며, 과학이 발달하지 못해 더듬거리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성·이성에 철저하게 파문당한 상상력은 이렇게 세기를 거듭해오면서도 아무런 재평가 없이 “영혼에 대한 범죄(Brunschvicg)”니, “의식의 미성숙한 혼동의 단계(Alain)”니, “유령 같은 대상(Sartre)”이니 가치절하되면서 제 자리를 잡지 못했다.13) 13) 같은 책, pp.30∼32 참조.

그러나 바슐라르가 볼 때 이러한 상상력에 대한 폄하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오해며 오판이다.

그가 힘주어 강조하려는 “인간 정신활동의 보편적인 기능”으로서14) 상상력은 이러한 철학자들의 오판에 전혀 굴하지 않은 생동적인 것(le mouvant)으로써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실존의 못자리 역할을 하며, 특히 허구적 이성이 아닌 실질적 감성을 모태로 현실과 비현실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15)14) 유평근·진형준, 《이미지》, 살림출판사, 2001, p.171.15) 이 글에서 필자가 사용하는 ‘감성’이란 용어는 불어 ‘sensation, sensibilite? sentiment, motion’ 등 이성의 추론, 추상화 능력을 제외한 인간의 제 능력 모두를 포괄하는 그런 개념으로 폭넓게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가 볼 때 바로 이 감성은 이성의 근원인가 하면, 이성의 가면 뒤에 버티고 있는 온전한 생(生)의 자리이다.

그런 즉, 우리는 이제 감성을 더 이상 이성의 배제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때이다. 반대로 그 동안 인간과 세계를 한 방향으로만 편협하게 이끌어왔던 그런 이성이 감성에 의해 오히려 재충전되어야 할 것이다. 이성은 감성을, 감성은 이성을 짝하여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가 상호 보완되는 것을 이제는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16) 16) 물론 이를 놓고서도 입장은 상이하다. 감성을 새로운 합리성 개념에 포섭시키려는 일군의 학자가 있는가 하면, 감성을 이성이 그랬던 것처럼 극단화시키는 일군의 포스트모던적 철학자들도 눈에 띄며, 또 여전히 감성이라는 말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멀리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제거하려는 학자들도 간간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어보려고 하는 경우는 물론 처음의 경우다. 나중의 마지막의 경우는 논리적으로 철학의 고전적 해석의 연장(동일성의 논리)에 근거해 있을 뿐이기에…….

바로 이런 관점 하에 바슐라르는 자신의 철학을 위해 플라톤처럼 예술(특히 시)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시와 함께 하는 철학(une philo-poe큧ique), 상상하는 사유(pense큖 imaginante), 인간에게 꿈을 주는 사유를 구상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철학의 사생아로서가 아니라 적자로서의 시, 형제로서의 시학, 그에게 시와 시학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매개하는 최고의, 최상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그에게 시는 미물에서 우주까지를 연결시켜주는 ‘존재’의 끈이자 인간이 우주와 하나 될 수 있는 생명줄, 인간이 우주가 되는 유일무이한 소통의 공간이었다. 이성·철학과 감성·문예(文藝)를 종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휴머니즘을 개척하고자 했던 바슐라르의 사상이 그가 살았던 시대를 초월해 오늘의 이 땅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5. 감성과 짝을 이루는 ‘자기 변화적 이성’

바슐라르의 사상이 현대의 우리에게 유효한 메시지기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를 들라면 아마 그의 니체적 경향의 후배들(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처럼17) 온 인문학의 논장(論場)을 시끌벅적하게 들썩이지 않은 채로 철학자로서 지켜야 할 품위는 충분히 지켜가면서 ‘과학-기술일변도의’, ‘비인간화되어가는’ 이성을 감성적 상상력을 통해 치유책을 찾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17) 신승환은 앞서 인용한 책에서 이들을 일러, 플라톤주의를 뒤집음으로써 가장 끔찍한 허무주의라는 원치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말해, 이와 같은 허무주의는 “왜와 어디로”라는 근거와 목표에 대한 물음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같은 책, p.34 참조)이 신 교수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필자가 바슐라르와 함께 부각시켜 보려고 하는 것, 즉 우리의 “감성, 상상력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전통의 이성에 대한 단순 비판에 그치지 않고 파스칼식으로 말해, 보다 “세련된 정신(l’esprit de finesse, la logique du coeur)”으로 기존의 이성의 폭을 넓히고, 살찌우며 그 깊이를 감성과 더불어 새롭게 정련시켜야 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사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현대의 극단화된 일의적이고 단선적인 합리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합리성을 구축하기 위한 열린 정신, 상상력과 함께하는 철학, 철학적 시론(詩論, poe큧ique)은 우리에게서 잠자는 “감성을 회복”시키는 노력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감성 회복’은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 내용이라곤 하나 없는 이성의 형식적 허울을 치유하기 위해 요청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8)18) 리꾀르의 해석 따르면,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성의 원리 속에는 오직 ‘있음’과 ‘토대’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La me큧aphore vive, Seuil, 1975, p.358 참조). 희화적으로 말해, 철학자들에게 “이성이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Rien n、est sans raison).”(라이프니츠) 바꿔 말해, 존재하는 것은 이성뿐이요, 이 이성 때문에 정작 이성의 내용으

다시 말해, 변해야 하는 것은 인간 사유의 원천인 감성이 아니라 보편·추상의 가면을 쓰고 생성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슐라르의 ‘새로운’ 이성 개념과 만나게 된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새로운’ 이성, 자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성, 자가 변모하는 이성은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는 전통의 이성과 달리 ‘변화(changer)’와 ‘머뭄(demeurer)’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면서 스스로가 새로운 것과 관계 맺고 균형을 잡아가는, 얼마든지 괘도 수정이 가능한 이성이다.19)19) G. Bachelard, Etudes, pre큦entation de G. Canguilhem, J. Vrin,

이런 새로운 정의에 따른다면 이성은 분명 ‘이미 주어져 있는 것(de큜a`donne?’이 아니고 우리가 잘 ‘가꾸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이성은 우리가 가꾸어가야 할 것이기에 자기 아닌 것과 끝없이 대화를 나누며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오가는 가운데 종국적으로는 자기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변화를 스스로 꾀하는 이성, 이미 선험적으로(a priori)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더불어, 경험 안에서 ‘되어가는’ 이성은, 설사 어떤 곳에 머문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변화-머뭄이라는 과정의 일부일 뿐, 자기 아닌 것을 향해 늘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가로지르는 이성을 또한 ‘운동하는 이성’이라고 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성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스스로 헤르메스적으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운동 속에서 자기 아닌 것과 경쟁하고 상호 교류하며, 상호 인정하고 또 때론 궤도를 수정해야 할 때도 있다. 머뭄이 운동을 위한 일종의 휴식이라면 자기 변화는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이 새로운 차원으로 종합될 수 있는 진화적 계기가 되리라. 스스로를 자기 안에 소외시켰던 전통의 이성이 그 허울을 벗고 자기 아닌 것과 새롭게 균형을 잡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언컨대, 이상과 같은 이성에 대한 새로운 정리에 따른다면, 인간의 감성은 결코 이성의 하위 개념이나 살에 박힌 가시와 같이 제거해야 할 것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감성은 결코 이성의 배제항으로써 사유의 적이 아니라 이성 자체를 보충해줄 수 있는 일종의 완충장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성은 얼마든지 가로지르는, 자기 변화하는 이성의 파트너일 수 있으며, 필연코 파트너여야 할 것이기에, 전통의 폐쇄적인 이성이 염려하는 바처럼 그렇게 통제받아야 할 이유가 하등 없다는 말이다.

감성은 무조건 통제되어야 한다는 서구의 형이상학자들의 믿음과 달리 감성은 그 자체로 충분히 자기 통제력을 갖고 있으며, 끝없이 새로운 경험과 대화한다는 점에서20) 오히려 이성보다 훨씬 자기 개방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바슐라르가 밝혀낸 이성의 당당한 파트너로서 감성의 본래 모습이자, 그를 필두로 해서 여러 상상학(l’e큧ude sur l’imaginaire) 연구자들이 중시하며 밝혀내려고 하는 감성과 함께하는 이성의 새로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20) F. Stirn, Les grands penseurs contemporains, A. Colin, 1998, p. 32. 저자에 따르면 바슐라르에게서 이성은 아무 것도 선험적으로(a priori) 결정된 것이 없으며, 끝없이 경험과 대화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즉 경험에 의해 이성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런 점에서 바슐라르의 인식론의 중심 개념을 이루는 것도 경험과 대화 가능한 조건으로써 인식론을 구축하는데 있다고 말 수 있다.

다시 강조하건대, 감성 없는 이성만의 작업으로 철학함을 규정·정의하려는 것은 스스로 붕괴되고 말 허념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21) 그러므로 옹색한 이성이 우리가 대상-세계를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22)을 가로막고 있다는 반성이 절실한 때이다. 21) 이에 대한 상세한 논구는, A. Lalande, “Une fausse exigence de la raison”, Revue de la me큧aphysique et de morale, n?1, 1907 참조. 이미 이 시기부터 랄랑드는 참, 거짓의 구분을 통해 보편화할 수 있는 사고(pense큖 universable)는 다분히 개인적인 소망일 뿐이며, 그런 보편적 사고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들기에 하나의 이성(la raison)이 아닌 여럿의 이성들(des raisons)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진리나 도덕(윤리)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고. 따라서 마치 논리학자나 수학자처럼 세계를 참, 거짓의 세계, 이성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단(分斷)하려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22) 수잔 손탁, 《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옮김, 도서출판 이후, 2002, p.34. 강조는 저자.

에셔의 《꿈》이란 그림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듯이 이렇듯 철저히 문명에 물든(찌든) 이성은 결국 인간을 ‘죽이고’ 말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마 인간이 죽어야 작동되기를 멈추는 것이 문명에 물들고 찌든 이성일성 싶다. 이렇게 이성은 모든 인간에게 공속적이며 보편적인, 근원적이며 원초적인, 실존적이며 구체적인 감성을 인간이 죽어 무덤에 눕는 그 순간까지 표백시키려 든다.

그러나 감성이 죽은 인간은 ‘식물인간처럼 다 죽은’ 인간이다. 인간이 죽고 남은 것들, 《꿈》을 다시 보라, 무엇이 이 그림 속에 남아 있나? 죽어서도 온전히 죽지 못한 인간-미이라. 썩지 않아, 방부처리 되어 기계-동물의 보호를 받아가며 영원히 전시되어야 하는 박물관을 위한 존재. 가족도 형제도,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 없이 그저 홀로 저 세상으로 가야 하는 슬픈 인간이란 동물의 운명. 《애니 매트릭스(The Seconde Renaissance)》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식이라면 아마 기계의 인간 지배가 먼 미래는 아닌 듯하다. 방부처리 된 이 인간이 언제 영화 《벨 파고》에서처럼 악령으로 부활해 끔찍한 일들을 전개하게 될지, 영화 《다크 시티》나 《매트릭스 1-3》에서처럼 아예 온 지구의 인간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될지, 모를 일이다.23)23) 이 영화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슬라보예 지젝

“나는 기계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늘어난다면, 모든 기계·과학중심적 사유들이 꿈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풍부한 존재론적 논리를 비논리적인 것으로 치부한다면, 다시 말해 감성이 배제된 이성만이 홀로 진리를 독식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면, 인간에게 있어 물질적인 육체를 넘어선 차원은 영영 망각되어질 수밖에 없다.24)24) 영화 《Never Ending Story》에서는, 아이들의 상상력이 펼치는 끊임없는 이야기의 세계를 사라지게 만드는 괴물의 이름을 ‘nothing’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성은 인간의 상상력이 지니는 힘에 대해서 언제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여기서 우리는 왜 바슐라르가 오늘날과 같이 이성·기술·과학 일변도로 전력 행보(行步)하게 될 지적 파행과 비인간적, 기계적 사고풍토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지, 인간·세계에 대한 절반의 믿음, 즉 이성만으로 세상을 이끌어가려는 세태를 앞당겨 염려하고 스스로 일종의 감성의 ‘십자가’를 지려 했는지, 스스로 감성의 십자가를 짊어짊으로써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집착하고 있는 시대와 이러한 시대정신을 이성보다는 ‘근원적이고 부드러운’ 감성으로 다시 감싸고, 또 점점 기심(機心)에 익숙해져 가는 인간과 세계를 이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는 사물이 주인이 된 세계에서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해, 사물-존재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자연) 세계와 짝하고 ‘벗’이 되어야할 인간이 오히려 사물(기술·문명)의 지배를 받게 되고, 정작 자신이 설 자리마저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근원적이고 부드러운’ 감성이 필요했던 것이다.25)25) 상세한 논의는 졸고, 〈하이데거와 바슐라르의 십자가〉, 《하이데거와 현대철학자들》(한국하이데거학회 엮음, 살림출판사, 2003) 참조.

6. 도심에서 농심으로, 인공세계에서 자연세계로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 존위(尊位)되지 못한 땅, 그곳에서 인간은 필경 사물이나 기계의 노예나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만일 이렇게 인간이 부품처럼 배치, 재배치되고, 그저 사물-부품처럼 쓰이게 된다면, 그러한 자를 우리는 아무도 ‘인간’이라고 명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본의(本義)와는 정반대로26) 현대의 기술·과학·문명은 인간상, 세계상을 온통 위기로 내몰고 있다. 인간의 의식까지 물화(物化)시키고 있다. 인간을 부분 부분 기계로 대치해가고 있다. 어찌해야 하겠는가? 26) 다시 말해, 인간과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데서 출발한 기술·과학·문명은 ‘합리적 방법’을 무기로 오히려 인간과 세계를 그 ‘이론틀’ 밖으

유폐된 도심(都心)에서 벗어나 열린 농심(農心)으로 참된 미래의 불국토를 꿈꿀 것인가, 아니면 B. 홀랜드의 《형이상학자》처럼 외부 세계와 자신을 완전히 차단시킨 채 “진리는 미네르바가 쥬피터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머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들”(데카르트, 《규칙》)처럼, 머리를 쥐어짜내 M. C. 에셔의 《또 다른 세상》과 같은, 가상의, 인간이 존재하기 힘든,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기계공학적 인공낙원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빌붙어 그대의 남은 여력을 헛되이 낭비할 것인가?

재차 강조하지만, 인공낙원엔 인간을 말살시키려는 기계의 속임수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그곳엔 내가 받을, 서로 나눌 감동이 있을 수 없다. 감동없는 세계는 필경 인간을 죽음의 나락으로 몰고 갈 것이고, 사자들의 천국은 예견된 것. 설령 《또 다른 세상》에서처럼 새가 창가에 앉아 있다고 해도. 잘 보라, 그것은 노래하는 새가 아니지 않는가! 사람 얼굴 형상을 한 하이피아이, 세이렌, 신화가 말하듯 인간의 생명을 낚시걸이할 것이며, 그 노래 소리에 속아선 바다로 나간 배가 반드시 참몰한다는 사실을…….

인공의 도시에는 기하학적인 콘크리트 건물들만 즐비하지 바슐라르 같은 몽상가가 설, 우리 모두가 발붙일 땅이 없다. 비인, 트인, 열린 날 공간(l’espace cru)이 전혀 없다. 풍경이 있을 수 없다. 그런 곳엔 궁극적으로 숲, 대자연이 없다. 게다가 이 모든 인조된 것들이 땅에 뿌릴 두고 있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이런 결과, 바슐라르의 말대로, 이제 도시에서 우리는 “지평선”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고단한 몸을 쉴 그루터기 하나 발견키 어렵게 되었다.

“포개어 놓은 상자들”처럼 아파트는 즐비하지만 도심엔 그러나 스스로 꿈꾸며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집이 없다.” 또 설사 집이 있다고 해도 그 “집에 뿌리가 없다.” 결국 이런 도시에서 “이제 하늘 가까이 산다는 것이 거의 공적이 되지 못한다.” 아니, 공적이 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라는 높은 곳에 기거하나, 이는 “단순한 수평성에 지나지 않는” 삶일 뿐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한 층 속에 박혀 있는, 우리들이 사는 (도시의)집”에서 “내밀함”을 찾기란,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대도시의 집(고공 아파트)에 있어서 수직성의 내밀한 가치가 없다”는 것 이외에도 “우주성이 없다”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대도시에서 집들은 이젠 자연 속에 있지 않다.

거소와 공간의 관계는 거기서는 인위적인 것이 된다. 거기서는 일체가 기계이고, 내밀한 삶은 어느 부분에서나 도망가 버린다. “거리들은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는 무슨 도관 같다.”(Max Picard) 그리하여 집은 이제 우주의 드라마를 알지 못한다.”27)27) 《공간의 시학》, pp.107∼108.

어찌해야 하겠는가? 이제 우리 모두가 진진하게 고민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실제로 경험한 상황들을 넘어서 꿈속에서 바란 상황들”로나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추억들”을 “다시 열어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태어난 집에 관해” “상상적인 원초적인 요소들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개인적 체험으로든, 학적 연구를 위해서든, 거짓없는 성(誠)으로, 근원초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기 위해.28)28) 같은 책, p.111.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관찰 대상이나 조작 대상으로써의 자연과는 전혀 무관하고 인간을 낳은 모태이자 키운 터라는, 인공에 의해 잊혀져가는 것들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에너지원이라는, 가치·이념으로써의 자연이다. 즉 괴테가 일찍이 “인간이 지닌 가치는 자연으로부터 오고 그 자연 속에 뿌리박고 있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자연이다.29) 29) F. S. C. 노드롭, 《사람 자연 그리고 신》, 안경숙 옮김, 대원사, 1995,

그러나 지금처럼 만일 우리가 이러한 모태, 가치로서 자연을 멀리하고 인공화한다면, 대자연의 위대한, 신비한 힘과 그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자연은 황폐화되고 인간 또한 피폐화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럴 확률이 매우 높다. 오죽했으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도 이러한 우리의 시대상황을 일러 “대지와 대지 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존재자들과 인간들이 황폐화시키는 시대”로 진단하고 있겠는가!

대지의 황폐화, 인간의 피폐화, 도심·기심에 농심을 잃어가는 인간이 지금 계몽되지 않는다면 자연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더욱 피폐화될 것이다. 하여, 대지를, 인간을 본래의 근원에로 되돌려놓자면, 필경 이 시대의 일방적인 기계·과학중심의 횡보를 철저히 의심·경계할 필요가 있다. 또 이를 교정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 진보란 인간을 내적 근원이 아닌 외적 화려함에로 인도할 뿐이기 때문이다. 외피가 화려하면 뭣하겠는가, 만일 그 속이 텅 비었다면, 그것이 감동없는 삼독기법(三毒機法)의 잡다한 전시일 뿐이라면!

그러므로 우리가 외적 자연, 내적 본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흙을 벗해 자신의 세계를 일구고 그러는 가운데 감동을 발견할 농부처럼. 사실 이런 자연을 아는 자만이 자연을 해치지 않고 우주의 비밀스런 드라마에 다가갈 수 있다. (자연)세계는 그 자체로 인간의 삶과 사유의 젖줄인 어머니 같은 존재다. 자연 세계는 온갖 신비한 것들로 가득 찬 세계며, 궁극에는 우주를 향해 개현된 세계이다.30)30) 이에 대해서는 바슐라르의 〈시적 순간과 형이상학적 순간(Instant poe큧ique et instant me큧aphysique)〉 참조. 이 글은 나중에 《꿈꿀 권리(Le Droit de re늲er)》로 출판됨(P.U.F., 1970).

바슐라르도, 릴케도 강조하고 있듯, 하늘과 땅이 하나로 어우러져 교호하는, 그런 조화로운 세계, 현실 속에는 부재하는 ‘시원’, ‘원형적 이상’을 갈구해야 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다. 또 갈구해야 마땅하다.31) “죽은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들이 머물 곳을 찾으라고 한다면”, 아마 이와 같은 “상상의 공간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도대체 어디에”32) 있겠는가(릴케)! 31) 《공간의 시학》, p.203의 역주 19) 참조.32) 하이데거,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Wozu Dichter)?〉 참조.

재차 강조하지만, 인공의 회색 낙원은 우리가 살 곳이 못된다. 그러므로 “너무나 일찍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본질을 포기해”버리고서, “기계의 시중을 들며 기계나 조작하는데”33)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기적 문명의 소용돌이에 정신을 잃고서도 아무런 대책없이 회의주의자 피론(Pyrrhon)처럼 잠을 청할 때가 아니다. 직면한 시대의 궁핍에 과감히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지금보다도 훨씬 기계적인, 비인간적인, 돈을 소유한 자들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가시적 존재자들이 날뛰는, 그런 만큼 희망이 없는, 대화가 단절된, 상상력이 마른, 단지 기계처럼 상대방에게 반응하는데 그치는, ‘꿈’이라는 말이 우리의 기억에서마저 사라져버린 세계 판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33) 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의 사건학》, 서광사, 2003 참조.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죽은 것들을 다행으로 여기고, 죽어 가는 것들이나 애도하면서,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탄스러운 그런 날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정확히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 세계, 본래 세계를 모델로 우리의 기술적 현대를 재편성해야 할 줄 안다. 자연이 텅 빈, 기계적인 것들로 꽉 찬 세계로부터 진정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꿈을 키워가야 할 때라 생각하기에. “성장을 통한 노쇠보다는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젊음을 꿈꾸는 시인”과 함께 “그들의 꿈속에서, (우리도 그와) 같이 탈바꿈하는 젊은 존재로” 부활할 수 있기 위해.34)34) 진형준,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문학과 지성사, 1992, p.200.

7. 왜 사유하기보다 꿈꾸기가 어렵기만 한지?

사실, 사방이 막혀 꿈꾸기가 어려운 시대다. 꿈을 허용하지 않은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심묘(深妙)한 앎, 지식에만 우리 모두가 몰두하고 있어야 하겠는가? 연연해야 하겠는가. ‘형이상학자’처럼.
이렇게 우리는 어느새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꿈을 꾸며 잘 살기보다 세계를 파뒤집고 조작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세간에서도, 탈세간에서도.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인식한다”, “사유한다”보다 “감동한다”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이다. 바슐라르처럼 우리도 “감동한다”의 순수한 주어가 되기를 원할 때,35) 비로소 우리는 “우주 앞에 존재할 뿐인 그런 단순한 철학자”들과 구분되는, “생각과 표현의, 사유와 꿈의 전인(l’homme litte큥aire est une somme de la me큕itation et de l’expression, une somme de lae큣ense큖 et du re늲e)”36)이 될 수 있다. 35) 《象徵的 想像力》, p.93에서 재인용. 36) G. Bachelard, L’air et les songes, J. Corti, 1944, p.302.

제아무리 고차의 형이상학적 지식이라면 뭣 하겠는가, 뭇 범부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 문자에 그치는 것이라면, 심심난해(深深難解)하여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지식·진리는, 설사 그것이 아무리 높은 경지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텍스트에 기술(記述)된 것 이상을 의미하지는 못한다. 해석이 그렇듯 기술도 창조적 노동 거리라 할 수 없다. 그래서 바슐라르도 강조하고 있듯 이제 “철학은 하나의 내적 행위(un acte intime)가 되어야 한다.”37)37) 《꿈꿀 권리(Le Droit de re늲er)》, p. 233.38)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데리다도, 철학사에서 미사유된 것들을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철학 밖으로의 외출을 대담하게 시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철학 밖으로’의 외출은 보통 상상하는 것보다 생각하기가 훨씬 어려운 일이다. 사실 오래 전에 활달하게 이미 그렇게 했노라고 자부하는 이들 역시, 자신들이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담론 전체에 의해 형이상학 속에 일반적으로 깊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바로 이런 점에서, 바슐라르의 상상력의 ‘철학’, 철학적 ‘시학’은 기계나 과학에 종속된 현대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들을 시사하고 있다. 개념·논리·체계 중심의, 소위 규정화·고정화로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려는 딱딱한 학(學)이 부드러워지고 내적으로 더욱 풍부해지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남은 열정을 따라서 이제는 감성, 상상력과 관련한 연구들에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죽했으면 바슐라르가 만년에 행한 한 라디오 강연(“Dormeurs e큩eille큦”)에서 “꿈꾸는 의식(conscience de re늲er)이 우리에게는 사유하는 의식(conscience de penser)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했겠는가! 그러나 “꿈은 (결코) 사유의 포기가 아니다.” “꿈은 이와 달리 활동적이며 사유를 준비하는 힘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바슐라르가 주문한 바대로 ‘사유(된 것)를 다시 사유하는’, 그 속에 ‘자신이 없기에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는’ 타성적이고 습관적인 태도를 버리고 “철학 밖으로 외출하려는”38) 꿈꾸기를 대담하게 재시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꿈이 지상에서 시작되어 언젠가는 무한 우주에 가 닿을 수 있는 날까지, 한 인간에서 시작되어 뭇 범부들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도록. 바로 그 때 우리는 지금처럼 별을 보기 위해 시골을 찾지 않아도 될 것이며,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을 찾아 깊은 산중으로 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여, 우리 모두는 이제 현실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꿈을 꾸어야 한다. 상상력이 망각됨으로, 상상력이 죽음으로, 인간들은 스스로가 마치 감옥같은 ‘네모난 세계’에 갇히게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현실이 꿈 없는 모난 세계이기에 ‘둥근’ 꿈이, 그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둥근 꿈을 가지게 될 때, 바슐라르의 몽상을 따라 우리 스스로도 꿈을 꿀 때, 현대의 모르페우스가 춤추며 지나갔던 그 길을 따라 갈 때, 이성과 감성이 M. C. 에셔의 《만남》에서처럼 하나 되는, 낮과 밤이, 시간과 공간이 악수하는, 선악이, 같음과 다름이, 질서와 무질서가 서로를 부르는, 그렇게 둥글게 피어나는 꿈과 사유가, 인간과 자연이 어울리는 가운데, 세계가 경우에 따라서는 투쟁하면서도 종국에는 화합하는(헤라클레이토스) 원무 속에서, 그래서 출발인 경쟁이 결국에는 하나의 춤으로 종합되는, 또 그래서 온 우주가 상생의 리듬에 맞추어 한 판 거나하게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세계,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한데 어우러져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고, 이 춤은 곧 우주의 리듬과 하나 된 신비한 음악이 되고 시가 되어 온 대지를 울리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세계를 향유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왜 바슐라르가 “존재는 둥글다(l’e늯re est rond)”,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둥근 것이다”(PE/208-209), 라는 사유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지,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문명을 가능케 해 주었던 원시(原始)·시원(時原)의 감성의 세계, 바로 이러한 상상력의 바다가 살아 있기에 사실 우리 인간은 아직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는 분명 미래의 학문이 참구해야만 할 세계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희망이 있어 학문이라는 것을 이론적 틀이나 논리적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초학문적으로 계속해 나갈 수 있다.

8. 결론에 대신하여

누구나 필자가 이제까지 말한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인간은 동물 이상이며, 더더욱 기계 이상이고 이성 이상이다. 인간은 사고하며 꿈꾼다. 꿈꾸며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인식된 것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고 착각해서도 곤란하다. 차라리 보는 만큼 보는 것이 자신의 인식의 한계라고 고백하는 하는 것이 더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제 우리는 고작 왼발 오른발을 교대로 옮기는 수준에서 “학문을 한다”며 자만해선 안 될 것이다. 19세기적 삼각의 칼도 20세기적 사각의 도끼도 아닌 만각(萬角)이 교차하는 다원적이며 역동적인, 나와 타자가 가로지를 수 있는, 다투나 긴밀히 결합된 ‘21세기적 이성’으로39) 우리가 이제껏 망각하고, 잃고 있었던 것들을 경험에 비추어 되찾아야만 할 때이다. 39) J.-J. Wunenburger, La raison contradictoire, A. Michel, 1990 참조. 이 책의 결론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세계를 더 이상 분단(分斷)화시키지 않을 새로운 사유의 문(une autre entre큖)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모든 지식은 그것이 단순한 것이든 복잡한 것이든(단순한 원리에 기초한 것이든 중층적 원리에 기초한 것이든) 세계에 대한 하나의 시선(regard)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바, 잘못될 수 있는, 버릴 수 있는, 바뀔 수 있는 것은 시선이지 결코 인간 경험의 토대요 고갈되지 않은 샘이자 현실인 세계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학문’이라는 그물망을 빠져나가 이 ‘학문’을 조롱하며 존재하는 것(le donne?, 바

21세기적 이성은 가슴을 필요로 한다. 가슴없이 머리로만 자각해탈(自覺解脫)을 이룰 수 없다. 또 이 자각해탈은 각타(覺他) 없이는 완수할 수 없다. 자각해탈을 위해서도 각타를 위해서도 ‘학원의’ 머리가 아닌 ‘서당의’ 가슴이 재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느낌·감동이 없는 ‘구름 나라’의 사상은 아무리 그것이 고차적인 지식이라 할지라도, 이 지상세계를 위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B. 홀랜드가 《형이상학자》란 그림을 통해 잘 예시하고 있듯이, 이제 머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로는 도구적 이성과 과학중심주의에 길 잃은 현대인을 결코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이런 구습적 태도로는, 변화를 읽어낼 수 없는 철지난 과거의 지식으로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 현대를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더욱 삼독기법의 소굴에 갇힌 어리석은 자들을 해방시킬 수 없다. 바슐라르가 말한 대로 머리가 아닌 감성과 상상력을 작동시켜 우리는 우리의 지상계를 다시 건설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 그 지상에서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수 있도록. ‘문명화된 도시적’ 이성이 아닌 ‘원시적, 농경민적’ 감성과 상상력을 회복시켜 “세상의 모든 것을, 심지어는 썩고 죽은 것까지 받아들이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가 있는 겸손한”, “짓밟아도, 짓밟아도 끝없이 용서하는”, “볍씨가 떨어지면 벼를, 풀씨가 떨어지면 풀을 키우는 정직한” 대지40) 위에서 문학/철학, 이성/감성을 구분하기만 했던 영역 다툼에서 벗어나 “인간을 회복”하기 위해 흘리는 눈물, 그것보다 더 “행복한 눈물”이41) 있을 수 없을 것이기에, 우리의 후손들의 미래를 작금의 삼독기법의 지배와 횡포에 양도할 수 없기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시각의 현실적 불교 연구가 필요한 것이리라. 40) 정채봉, 《멀리가는 향기》(일러스트 김복태), 샘터, 1987, pp.61∼63. 41) J. Lescure, Une e큧e?avec Bachelard, Luneau Ascot Editeurs, 1983,

박치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철학과 졸업. 프랑스 부르곤뉴대학교(Univ. de Bourgogne)에서 철학박사 학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대 철학과 교수. 〈베르그송의 ‘생명’ 개념을 통해 본 기계론적 진화론의 한계〉, 〈하이데거와 바슐라르의 십자가〉를 비롯하여 〈프랑스에 불고 있는 정체불명의 불교〉, 〈정신분석학과 선, 그리고 소고기 매운탕〉 등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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