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헤이즈 글 · 성청환 옮김

* 이 글의 원래 제목은 Did Buddhism anticipate Pragmatism?이며, ARC: The journal of the Faculty of Religious Studies, McGill University, 23

1. 불교인식론과 프래그머티즘: 표면적인 유사성

유럽과 북미의 독자에게 불교를 소개하는 학자들은 고대와 중세 아시아인들의 다양한 사유체계에서 유래하는 낯선 관념들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익숙한 현대 철학의 용어들을 자주 이용해왔다.

이론을 넘어선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듯한 사상을 발전시킨 붓다와 많은 철학자들 때문에, 불교는 흔히 그 태도에서 실천적이며, 심지어 실용적이라고까지 평가된다.

이전의 전통적 불교학자들의 믿음들과 현대 과학의 발견 사이에는 의견의 불일치가 거의 없었고,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 사이의 충돌에도 개입할 여지가 없으므로 많은 불교도들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과학적인 종교로서 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단순히 종교로만 간주된다면 비과학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염려한 많은 불교도들, 특히 스리랑카와 타일랜드의 상좌부 불교도들은 불교가 종교로만 한정되는 것을 꺼려했다.

불교가 지향성에서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라는 의미가 프래그머티즘의 한 예견이라는 의미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불교와 프래그머티즘의 다양한 측면을 비교하는 것은 유용한 실험이 될 수도 있다. 이들 둘 사이의 몇 가지 유사성과 차이점들은 까말라 꾸말리(Kamala Kumari)1)와 잔 파워(John Powers)2) 등의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유사성에 대한 몇 가지 예들은 다음과 같이 쉽게 찾을 수 있다.1) Kamala Kumari, Notion of truth is Buddhism and Pragmatism, Delhi: Capityal Publishing House, 1987. 2) John Powers, Empiricism and pragmatism in the thought of Dharmak┓rti. Presented at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Annual

1) 두 체계 모두 권위주의에 대해 회의하는 성향.
2) 아직 묘지에 영원히 안주하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사들과 명백하게 관계없는 이론을 피하려는 경향.
3) 좋은 성품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은 교육의 효과를 통해서 좋은 성품의 함양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귀착한다.

불교와 프래그머티즘의 이러한 유사성들은 그 친밀성을 실험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앞에서 예를 든 학자들은 그 둘 사이의 유사성과 유사성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이미 많은 공헌을 해왔다. 이 논문의 목적은 다른 학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약간 구체적인 이유를 부여하는데 있다. 특별히 나는 진나(陳那, Digna칐a, 5세기 초)가 창시하고, 그의 계승자인 법칭(法稱, Dharmak┓rta, 6세기 후반∼7세기 초)이 더 상세하게 발전시킨 증표(因) 이론의 측면에서 설명할 것이다. 이들 두 명의 학자들은 지식, 앎의 한계(pramana)에 대한 연구를 특별히 강조하는 학파를 창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을 인식론자들(Pra칖a칗ikas)이라고 이름한다. 이 논문은 두 명의 불교인식론자를 프래그머티스트인 찰스 샌더스 피어스(Charles Sanders Peirce)와 비교하는 것으로 그 범위를 제한한다.

진나는 인(因)들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긍정적인 형태로 결코 지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시된 대상으로부터 생성된 존재에 대해서 어떤 일반적인 진술들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단어들과 다른 인(因, 증표)들의 의미가 분명해질수록 지시하는 대상에 관해서 더욱 많이 배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찰로부터 나는 두 명의 불교인식론자들이 프래그머티스트인 피어스와는 다르다는 측면을 밝히는데 주력할 것이며, 가장 기본적으로 내가 인식하는 차이점들을 지적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2. 경험, 증표(因) 그리고 의미

1) 불교인식론자들
붓다의 입멸 시기와 진나의 활동 시기 사이에는 천 년이 넘는 간격이 있다. 2천 년이 넘는 동안 불교교단은 붓다의 말씀을 기술한 것으로 간주되는 방대한 경전을 축적하였다. 방대한 경전의 축적으로 인하여 경론들 사이에서 교리적 불일치가 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들 중의 일부는 불교를 실천하는 방식을 다른 엉뚱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심각한 것도 있다.

진나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로 많은 논서를 남긴 세친(世親, Vasubandhu)은 그의 가장 유명한 논서 중의 하나인 《구사론(Abhidharmakosa)》에서 붓다가 입멸한 후 너무 많은 시간이 경과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붓다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고 서술한다.

세친보다 적어도 한 세기 후의 논사인 진나는 불교도들 사이에 내부적으로 충돌하는 위험 요소들을 해소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논쟁을 일삼는 부파불교의 거의 모든 주제들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그리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주제, 곧 불교 이론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했다. 불교도들 스스로에게 요청되는 근본으로의 회귀와 논서의 권위에 대한 이차적인 논쟁을 피함으로써 진나는 불교가 다양한 측면을 통일할 수 있고, 비불교도들의 비판에 대응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희망하였다.

불교의 근본 개념들 중에서 모든 불만족[苦]은 세상을 진실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에서 생겨난다. 실재를 정확하게 바라보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대체로 부적절한 사유의 습관에서 발생한다. 불교논서에서 사용되는 이에 상응하는 용어인 비리작의(非理作意, ayonis큢 manaska칞a)는 문자 그대로 첫 번째 원인을 정초하는데 실패한 사유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유의 가장 적절한 예는, 어떤 대상 전체에 대해서 그러한 복잡한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들보다는 복잡한 대상 그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서 전체적인 시각에서 조망할 때, 실제로 사람이라는 것은 전체에서 부분들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부적절한 사고의 습관이다. 물론 이러한 오류는 결국 그 사유가 잘못된 것임을 깨달음으로써 해결된다. 그러나 변화나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흔히 자신은 젊음과 건강을 오랫동안 유지하여 영원히 살기를 혹은 최소한 평균적인 가능성보다는 좀더 오래 살수 있기를 희망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불만으로 젊음을 유지하려는 집착은 더욱 강해진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욕망의 증대는 미망의 핵심적인 기능으로서 부주의한 사고의 습관(非理作意)을 통해서 전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진나는 ‘주의 깊은 생각(理作意, yonis큢 manaskara)’은 경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 역할을 하는 대상에 대한 올바른 생각뿐만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사유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유의 과정에서 오류를 피하기 위하여 기존의 논리학 체계를 재정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불교 외의 다른 철학의 논리형식들도 차용하여 자신의 논리학 체계를 탄탄하게 조직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두 가지 범주 속의 하나로 정확하게 분류된다. 두 가지 범주로 분리하는 기준은 감관이 과거나 미래의 감관들이나 언어와 결합하는 정신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분별(kalpana?의 유무이다. 분별이라는 단어는 동사적인 명사로, 글자 그대로 생산이나 창조, 규제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언어는 어떤 기술적인 건축, 음악이나 시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행위를 언급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 언어의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단순한 분별이 아니라 창조적인 분별(판단)으로서 그것을 언급한다.

순수한 지각(pratyaka)은 이러한 창조적인 분별이 완전히 결여된 인식이다. 진나에 따르면, 지각의 한가지 예는 이전에 본 색깔이나 소리, 향기, 맛, 감촉, 온도 등의 유사한 지각과 어떤 형식으로든지 결합하지 않고 색깔의 단편을 보는 행위이다. 또한 이 순수지각은 언어와의 어떤 결합도 없다. 순수지각에서 감각은 그 자체 내에서 스스로를 위한 것처럼 경험되어지는 존재이다.

인식자의 창조적인 분별은 인식의 나머지 하나이다. 창조적인 분별일 경우에 인지된 대상은 더 이상 그 자체로 경험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다른 경험들을 지시하는 증표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기억하는 과거의 경험들을 지시하거나 예측 가능한 미래의 경험들을 지시할 수 있다.

진나는 단순한 감각적 재료들보다는 경험이 관여하는 사유의 개념에 보다 더 주목한다. 이것은 또한 경험의 주관적 세계를 창조한다. 세친은 이미 객관적으로 동일한 물리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즉 두 사람 모두 동일한 물리적 세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지옥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사람은 낙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사실 이들 서로 다른 경험은 이전에 겪었던 개별적인 실제상황의 수 많은 분별을 통해서 형성된 정신적 사유가 축적된 결과로서의 경험이다. 진나는 바른 인식을 통하여, 우리가 한편으로는 매우 주의 깊은 사유의 습관을 형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습관적으로 부적절하게 사유한 결과인 무용한 경험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진나가 불교 사상가임을 의식하지 않아도, 그의 논서 대부분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계승자인 법칭은 불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진나는 논리학 체계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으며, 따라서 독자들이 좀더 분명하게 사유할 수 있게 하였고, 유쾌하지 않은 혼란들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반면 법칭은 명백하게 불교가 실질적으로 유지 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다른 어떤 이론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법칭은 사유가 선명한지 아닌지를 논의하는 범위를 어디까지나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일치하는 경험들까지로 한정한다. 법칭의 이 다소 모호한 논리학은 그를 진나와는 상당히 다른 철학자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이 논문에서 프래그머티스트와 불교인식론자를 비교할 때 두 가지 측면이 아닌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하게 하였다. 혼란스러운 사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명한 사유가 필요하다. 선명한 사유는 실망스럽고 불쾌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하다.

2) 피어스(Peirce)

(1) 현상의 범위(Phaneroscopy)
외계의 실재들과 상응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는 ‘현상의 범위(phaneroscopy)’에 대한 글에서, 피어스는 불교인식론에서 두 가지 형태의 인식, 지각과 분별이론과 유사성을 지니는 개념들을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피어스는 그가 단순하게 첫 번째 상태(Firstness), 두 번째 상태(Secondness) 그리고 세 번째 상태(Thirdness)로 이름붙인 존재의 세 가지 양상에 관해서 서술하였다. 이 이론은 철학에서 피어스가 공헌한 측면들에 가장 근접하거나 과학적인 것은 아니며, 다른 책에서는 이와는 다른 형태로 세가지 범주를 서술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진나나 법칭의 이론과 비교할 수 있는 관점을 실질적으로 제공한다.

피어스가 두 번째 상태라고 이름한 것은 진나의 지각과 유사하다. 즉 즉각적인 현재 상태에서의 지각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피어스의 첫 번째 상태는 보편과 잠재라고 하는 두 개의 범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붉은 색의 존재가 다른 붉은 색깔을 볼 수 있게 하는 잠재적인 경우와 실질적으로 보여진 붉은 색에 대한 지각으로 구분된다.

세 번째 상태는 법칙과 가능성으로 규정한 범주인데, 다시 말하면, 과거의 경험과 유사한 형태로 발생하는 미래의 사건들의 경향성이다. 세 번째 상태는 사람으로 하여금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합리적인 예측을 가능하게 하며, 임의로 선택된 실제상황에 대한 연구에 기초하여, 전체 현상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이 상황에서 감각적 속성은 잠재적인 지각을 위한 증표로서의 역할을 한다.

피어스는 존재의 세 번째 양상을 이론적인 특징으로 간주하는데, 구체적 실행 과정에서 그 양상들이 지속적으로 상호 교섭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과거의 지각들과 교섭하며, 순수하게 ‘지금 여기에서’ 대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미래에 대해 예측을 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현재 존재하는 상태의 질(質)에 관한 순수지각은 완전한 허구가 된다.3)3) C. S. Peirce, “The principles of phenomenolgy”, 1905, p.91. 3)역자주: 이 논문에서 인용되고 있는 피어스의 모든 논문은 Buchler의 Philosophical Writing of Pirece(New York Dover Publication, 1955)에 실린 것이다.

법칭 또한 분별이 언제나 지각과 함께 현전(現前)할지라도, 이것은 분별이 언제나 지각 이후에 즉시 발생하여 지각과 그 느낌의 반영이 동시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동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피어스는 현상적인 상황(phaneroscopically)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법칭에 따르면, 인식자는 지각된 존재의 이름이나 기억 또는 기대치들이 더 이상 의식되지 않을 때까지 의도적으로 색깔을 주시하고 소리에 귀기울인다. 그러한 경험들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더욱이 인식자가 사물을 볼 수 있고, 그리고 전체적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무아지경의 상태도 이러한 경험의 구체적인 예이다. 법칭은 무아지경의 집중과 황홀경은 모두 지각과 분별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과정들이며, 그러한 의식은 하나의 과정에서 다른 과정으로 즉각 옮겨간다고 말한다.

인식방법을 지각과 추론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불교인식론과 세 가지 양상으로 존재를 파악하는 피어스의 이론 사이에는 일정 부분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두 이론에서 드러나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 때문에 그 의미가 퇴색된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 프래그머티즘
프래그머티즘 역사가들에게 잘 알려져 있듯이, 피어스는 그가 처음부터 pragmatism이라고 불렀던 의미를 다시 정립하기 위해 pragmaticism 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즉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되면서 그가 처음 의도했던 의미와는 다르게 변질되었을 때, “위험한 유괴자들로부터 충분히 안전한 것”4)을 새로운 이름으로 부여했다. 프래그머티즘에서 “언어나 표현들의 합리적 목적은 삶의 행위에 대해 고려할 수 있는 관계와 독점적으로 놓여 있다.”5) 이것은 피어스가 이전에 말한 “어떤 사물의 의미는 단순히 그것이 관계하는 행위이다.”라고 한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4) C. S. Peirce, “How to make our ideas clear” 참고. Buchler(1955), 1878, p.30.

이에 따르면, 어떤 표현이나 개념이 완벽한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표현에 대한 확신이나 부정이 암시하고 있는 행위에서 고려될 수 있는 모든 차이점이 열거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확신이나 부정은 인간 행위의 차이점을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무의미하다.

프래그머티즘을 정의하는 피어스의 태도와 열반(nirva칗a)을 추구하는 행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질문들을 피하는 불교적 태도는 표면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붓다는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무관심하였으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열반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붓다처럼 구체적인 목표와 무관한 질문을 무시하는 것과 어떤 목표를 위한 행위에서 고려할 수 있는 차이점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개념을 무시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현대 과학자들이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대부분의 질문들은 열반의 추구와는 관계 없으므로 붓다에게서는 무시되어질 수 있다. 우라늄 입자 원소의 반감기를 결정하는 것은 불교에서 자기 중심적인 탐욕이나 혐오를 제거하기 위하여 직접 수행하는 실천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왜냐하면 열반은 유일하게 진실로 가치 있는 목표(artha)이며, 과학적 질문의 대부분은 그러한 목표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목표에서 벗어난 질문들을 범어로 anartha라고 이름하며, 이 단어는 ‘의미 없음(meaningless)’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어떤 과학적 질문들이 ‘의미 없음’으로 불교에서 간주된다고 할지라도, 피어스의 프래그머티즘의 이론에 따르면 ‘의미 있음’이 될 수 있다.

비록 구체적으로 실험할 수 없는 질문이라도, 과학자가 잘못된 가설들을 제거하여 이론적으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면, 피어스에게는 실제로 의미있는 질문이다. 과학자들은 비록 지금은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 증거의 발견이 불가능하다고 하여도, 우주의 기원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며, 또 우주의 기원에 대한 특정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증거를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시각에서 우주의 시작이나 과거에 불변한 것, 또는 현재 불변하는 것 등에 대한 질문은 수행이 무익한 전형적인 질문이다. 이와 같은 중요한 차이점은 불교인식론이 피어스의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예견과는 결코 근접하지 않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또 다른 차이점들이 3장과 4장에서 논의될 것이다.

3. 길(道) 또는 방법? 열반 혹은 과학?

불교인식론과 피어스의 프래그머티즘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유사성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 차이점은 목표에 대한 사유의 선명성이다. 피어스는, 과학자는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너무도 경외스러운6) 우주를 찾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주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진리 그 자체를 위한 진리’의 발견이 유일한 목적이다.6) C. S. Peirce, “The scientific attitude and fallibilism” 참고. Buchler(1955), 1986, p.42.

그러므로 질문은 영리적인 이익이나, 개인 품성의 함양이나, 전체 사회의 발전과 같은 배후의 목적에 대한 어떤 관심 없이도 가능하다. 비록 과학자는 아닐지라도, 품성의 함양이나 지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 또는 좀더 좋은 세상과 안락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피어스가 인정하는 매우 유익한 사람일 수 있다.

피어스는 진정한 과학은 본질적으로 윤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피어스에 따르면, 윤리는 일반적으로 과학의 발전에 긍정적인 장애물이다. 왜냐하면 윤리는 기본적으로 전통을 유지하고 사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도전과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정신이기 때문이다.7) 7) 앞의 논문, p.44.

전체 사회는 일반적으로 진리에 관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와는 독립적으로, 유쾌하게 격려할 수 있는 시각”8)의 통일체를 유지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곤란한 상황에 직면한 경우,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희망과 열망으로 인하여 비현실적인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윤리주의자와는 반대로 과학자는 본질적으로 이성적이며, 그의 임무는 전통적인 민속이나 신화 등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도전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피어스는 과학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으로 윤리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의 삶까지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대학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미 규범적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교수에게 충분한 수입을 제공하고, 신사로서 존경 받을 수 있게 하는 대형 수업이 있으면, 과학적인 질문은 반드시 시들해진다. 관료적인 사람들이 더 많은 수업들을 배우게 될 때, 그 수업은 더욱 나쁜 상황이 된다.9)9) 주 6)의 논문, p.45.

만일 피어스가 정의하는 과학이나 과학적 태도를 전형적인 규범으로 인정한다면, 불교인식론자들 특히 법칭보다 더 비과학적인 누군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법칭은 진나보다 훨씬 더 피어스가 경멸적인 의미로 형이상학자라고 이름했던 그런 사상가들의 실례가 될 수 있다. 과학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탐구하고, 어떠한 선입견 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형이상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유지하기 위해 논쟁하고, 자신이 확신하는 믿음과 충돌하는 다른 것들을 거부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피어스의 시각에서 법칭은 뛰어난 형이상학자이다. 그러나 법칭이 모든 불교도들이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최소한의 원칙을 제외한 대부분의 불교 이론을 논외로 처리하는 이론강령주의자(minimalist)임은 사실이다.

실제로 법칭의 논서에서 불교의 근본이론들을 거부하려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법칭은) 의식이 육체적인 죽음과 별개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이 ‘의식은 육체와는 독립적이며, 따라서 신체적인 진행이 멈출지라도 의식은 지속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에 적합하도록 논쟁을 구성하였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독립적인 지속성은 윤회이론의 논리적 근거로서 중요하며, 이것이 불교의 윤리지침에 대해 이성적 판단을 제공하는 요체이다. 그러므로 법칭의 정체성은 열반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윤리, 또는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독자들이 더욱 확고하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피어스에게 최고 이성은 어떤 특정 목적이나 윤리와는 무관한 질문 그 자체를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법칭은 최고 이성을 평정한 상태라는 목표를 위한 믿음들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한다. 프래그머티스에게 평정한 상태는 진리의 발견이라는 목표로 향하는 수단이다. 만일 진리가 평정한 상태 없이도 발견되어질 수 있다면, 피어스에게 평정한 상태는 무의미다. 반면, 불교인식론자들에게 진리는 평정한 상태라는 목표로 향하는 수단이며, 만일 진리에 대한 앎이 없이도 평정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아마도 진리는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4. 실험 또는 경험, 오류주의 혹은 요가행자의 직관

확실성(certainty)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은 불교인식론과 피어스의 프래그머티즘의 차이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확실성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조망함에 우리는 세 명의 철학자들이 존재를 각기 서로 다른 위치에서 실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피어스의 견해에 대한 간략한 논의에서부터 시작한다.

1) 피어스의 오류주의(fallibilism)
불확실성(uncertainty)에 대한 수용능력과 믿음에 대한 재시험의 의지는 피어스가 설명하는 과학적 태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성의 유일한 역할은 “……당신이 배우기를 희망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그리고 이미 고착화된 사고에 만족하지 않기를 열망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상위의 연구를 방해하는 끝없는 질문의 과정이다. 즉 이미 알려진 사실 전체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상위의 연구를 방해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다.

과학의 탐구는 전체에 대한 부분의 연구, 그 이상은 불가능하므로 결코 멈출 수 없다. 인간은 연구를 위해서 대표적인 표본들로 추출된 부분에 대해서 오직 희망하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긍정적인 이성은 구체적인 실례에서 발견되는 적절함으로 조합된 전체 속에서 구체적인 적절함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코 이성에서 확신할 수 없는 세 가지는 절대적 확실성, 절대적 정확성, 절대적 보편성이다.10)10) 주 7)의 논문, p.56.

많은 사상가들은 감관이나 이성을 통한 확실성은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다. 예를 들면, 종교 사상가들은 흔히 신비적 경험이나 계시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성의 한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설명하는 확실성이 없다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지금 만약 정확성, 확실성 그리고 보편성들이 이성에 의해서 획득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성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확실하게 없다.11)11) 같은 논문, p.56.

종교사상가들은 개별적인 계시에 집착하고 이것과 상충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한다. 그러나 과학자는 신성한 영감이라는 주장 자체를 의심하며, 비록 그것이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할지라도 진리에 도달하는 종교적인 방법으로서의 계시를 거부한다.

불교철학자들은 확실성을 얻는 방법으로서의 계시를 거부하는 무신론자이므로, 어떤 학자들은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유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과학과 매우 유사하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논의되는 것처럼, 불교는 정신적인 면에서 과학적이라는 믿음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고유한 철학적 특징이 있다.

2) 불교에서 요가행자의 지각
전통적으로 인도불교의 보편적인 이론에 따르면 지혜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진리를 이야기 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음으로 생겨나는 지혜(聞慧)가 가장 낮은 단계이다. 다른 사람이 발견한 진리에 익숙하게 되고 확신하게 되는 과정이 첫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의심, 주저함 그리고 적대감이 사라지게 된다.

첫 번째 단계보다 발전된 단계는 사색을 요구한다(思慧). 대부분의 불교문헌에서 나타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이다. 곧 이 단계에서 이성은 비불교든 불교에서든 이론적 진리에 오류가 있음을 증명할 목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법칭의 논서에서는 신성한 계시와 최고 신의 존재, 영원한 자아, 모든 정신적 행위를 물질의 과정으로 축소하는 것 등을 거부하고, 불교 내부에서 가장 빈번하게 논의되었던 다양한 인과(因果)이론에 반대하기 위한 정교한 논쟁들이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연기, 업 그리고 윤회이론을 지지하기 위한 논쟁도 발견된다.

이러한 모든 논쟁에서 사색은 불교이론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하며, 열반이 궁극적 목표이고, 불교의 실천이 그 목적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도록 하기 위해서 상정된다. 그러나 이 사색의 단계는 여전히 수습(bha칥ana?을 통해서 성취되는 지혜의 마지막 단계를(修慧) 위한 예비단계일 뿐이다. 수습의 단계에서 수행자는 불교이론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확실성(nis큓aya)을 갖게 된다. 즉 사색의 단계에서 학습하고 사유하여, 진리로 확신한 이론을 직접 경험을 통해 체득하는 단계이다. 가설이었던 것이 이제 확실한 진리가 된다. 그리고 믿음이었던 것이 이제 지식이 된다.

불교인식론에서 마지막 확증의 단계는 요가행자의 지각(yogipratyaka)으로 알려지며, 이것은 진나와 법칭의 인식론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지닌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진나는 인식을 얻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말한다. 직접지각은 개별적 감각의 특징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며 즉각적으로 현존한다. 분별은 과거지각의 기억과 현재의 지각이 함께 혼합되어 있다. 즉 분별은 과거의 경험을 인지함으로 지각보다 많은 경험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구분에서는 법칙, 규칙, 유형이나 보편에 관한 모든 지식은 분별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오직 분별에서만 즉각적인 현재가 아닌 다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이 가능하며, ‘지금 여기에서’라는 지각보다 더 많은 어떤 인식이 없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과(因果)이론 등 보편적 진리라고 수용되는 모든 불교이론은 지각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분별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불교인식론자를 곤란하게 만든 것은 유명론이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관여하는 모든 보편적 분별은 개별 위에 부가된다. 진나에 따르면, 보편·유사 그리고 법칙들은 마음 바깥에 있는 외부세계의 대상들의 일부분이 아니다. 즉 그것들은 외부세계로부터 기록된 자료들에 관여된 수동적인 마음에 의해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실재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객관적인 실재를 구분할 수 없으므로, 그것들은 마치 감각경험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마음의 산물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논리는 붓다의 가르침도 불교도만이 특별히 집착하는 주관적인 해석들 그 이상을 의미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요가행자의 지각이론은 이런 곤란한 막다른 길목을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진나에 따르면, 요가수행은 이전의 가르침의 영향에서 벗어나 선입관 없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게 한다. 한편 법칭과 그 주석자들에 따르면, 요가행자의 지각은 수행자가 직접적으로 불교의 진리를 알 수 있게 하며, 그 진리들을 완전하고 확실하게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법칭의 논서에서는, 요가행자에 의해서 불교의 진리가 확실하게 드러나는지, 불교도의 길만이 진실로 가치있는 목표에 도달하는데 유일하게 효과적이라는 확신에 의해서 진정한 요가행자가 될 수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이론은 객관적인 진리라고 하는 일반적인 주장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객관적인 진리로서, 그것들은 반드시 분별이 아닌 지각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주장들은 규범적으로 지각이 아니라 분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가행자의 지각은 진나가 구분한 인식의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신의 도움 없이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요가행자의 지각이라는 분명한 사실은 논외로 간주하더라도 요가행자의 지각이 신성한 계시로 확실성을 획득하는 방법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요가행자의 지각은 결정적으로 피어스의 과학적 방법과는 유사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요가행자의 지각은 피어스가 성취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확실성을 성취하기 위하여 상정된다.

5. 결론

이상과 같이 불교인식론은 피어스가 말하는 과학, 즉 “진정한 과학은 분명하게 무의미한 사물에 대한 연구”12)라는 의미에서는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법칭에게는 무의미한 사물들로부터 유용성(artha-anartha-vivecana)을 확인하는 작업이 철학의 중심 임무이다. 즉 그는 이성은 사람에게 유용한 것을 갖게 하며, 피해야 할 것을 피할 수 있게 하므로 유용하다고 한다.12) 같은 논문, p.48.

호기심의 충족이라는 단순한 목적을 위한 연구보다 법칭에게 더 무의미한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또한 형이상학에 대한 피어스의 혐오와 같은 것을 불교인식론자에게서는 찾을 수 없으며, 확실성의 무용성에 관한 주장도 없다. 피어스에게 있어서 진정한 과학자는 반박 가능한 증거의 발견에 의해 전복되는 가설을 원칙 속에서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법칭의 논서에서는 불교의 근본적인 이론을 포기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역으로, 그는 불교이론만이 유일한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을 찾기 위해 이성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피어스가 “사람은 그가 사유체계 내에서 최고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을 모든 사물에 부여한다”13)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한 용어, ‘철학자’로서 법칭을 특징지을 수 있는 이성의 사용이다. 13) 같은 논문, p.43.

비록 불교에서 피어스의 프래그머티즘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예견할 수 없을지라도 이들 두 철학체계가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여전히 가능하다. 두 철학체계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두 철학체계를 비교하는 어떤 적절한 관점이 있는가?

이 중에서 첫 번째 질문은 ‘우산과 신발 중에서 어느 쪽이 인간역사에서 더 우수한 발명품인가?’와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신발과 우산은 각자 자신의 고유의 역할을 위해 고안된 것이므로, 다른 역할들을 수행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프래그머티즘은 서로 다른 정신세계에 관여한다. 불교는 발견의 충만한 기쁨을 위해 배움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잘못된 선택이다. 과학의 정신상태는 열반의 성취를 결정한 사람에게는 잘못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 의미있는 일이 배움의 추구인지, 열반의 획득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사소한 차이점은 제외하더라도, 이와 같이 서로 주어진 역할들의 차이가 있으므로 불교가 프래그머티즘으로부터 얻는 것이 많지는 않을 것 같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들 두 철학체계의 비교에 어떤 관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은 프래그머티스트인가, 불교도인가가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프래그머티스트에게는 그 자체로서 목적인 배움의 획득으로서의 연구의 지속이라는 관점이 항상 있다. 두 철학체계의 비교 연구는 어떤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완전히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과학적인 질문의 주제로서는 여전히 가치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한편 불교의 경우,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연구는 아마도 매우 실질적인 목표를 위해서 필요하다. 사유의 원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진정한 불교도가 되기 위해 요청된다.

대부분의 북미지역 불교도들은 교육정책이 프래그머티스트들에 의해서 형성된 거대한 공간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내왔다. 그러므로 프래그머티즘을 이해하는 것은 북미의 불교인들에게 그들 자신을 이해하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들의 사유에서 발행하는 내부적 충돌은 아마도 불교와 프래그머티즘의 사유방법이 기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함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리차드 헤이즈 Richard P. Hayes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미국 뉴멕시코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분야는 세친, 용수, 진나, 법칭 그리고 적천으로 이어지는 불교인식론이다. 저서로는 Dignaga on the interpretation of signs Land of No Buddha: Reflections of a Sceptical Buddhist 등이 있다.

성청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뉴멕시코 주립대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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