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부천대 교수

김광식
부천대 교수

1. 서언

1928년 3월 14∼17일,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에서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일단의 학승 46명이 집회를 가졌으니, 조선불교학인대회였다. 이 학인대회는 당시 강원에서 수학을 하던 청년 학승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때문에 근대불교사에서는 강원의 학승들이 불교개혁을 고민하고, 불교발전을 위한 대안을 제기하였으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던 최초의 대회였다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대회에서 주장하고 결의한 일부 내용은 당시 교단에서 일정 부분 수용되었다. 지금껏 근대불교에서의 개혁은 신식학문을 수용하거나 외국 유학을 갔다 귀국한 불교청년들이 주도한 것으로 이해된 감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회의 제반 개요를 살펴보면 이른바 구학 계열 강원의 청년학승들도 불교개혁에 큰 고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금껏 이 대회에 관한 학계의 관심은 매우 미약하였다. 대회가 갖고 있는 역사성, 대회에서 제기된 불교개혁의 의미, 대회의 주역, 대회가 불교계에 미친 영향 등 종합적인 이해가 극히 부실하였다. 이것은 이 분야가 그 간 학계에서 무관심의 지대로 방치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관련자료의 부족도 원인이었다. 필자는 수년 전, 이 대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관련된 논고를 발표하였다.1) 1) 〈조선불교학인대회 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민족사, 1998), 〈1930년대 강원제도 개선 문제〉 《근현대불교의 재조명》(민족사, 2000).

그러나 당시에는 관련 자료가2) 부진하여 대회의 총괄적 이해를 그려내는 데에는 미진한 내용이 적지 않았다. 2) 당시 필자가 이용한 자료는 《불교》, 〈조선일보〉 등에 보도, 게재된 관련 기사였다.

그런데 필자는 최근 대회의 총괄을 보여주는 〈조선불교학인대회록(朝鮮佛敎學人大會綠)〉의 원본을 입수하였다. 이 대회록은 대회를 정상적으로 마친 대회의 집행부가 1928년 4월 18일자로 발행한 것이다. 발행소는 조선불교학인대회, 편집 겸 발행인은 조선불교학인대회 대표 이순호(청담 스님), 인쇄는 한성도서주식회사, 보급은 비매품으로 나왔다. 제원은 13×19cm이고, 분량은 본문이 112페이지고 도입부의 축하지면, 목차, 사진 등의 12페이지 정도가 별도 구성되어 있다.3)3) 겉 표지에는 ‘二九五五年 戊辰 仲春’이 조선불교학인대회록의 우측 상단에 인쇄되어 있다. 그리고 필자가 입수한 이 원본에는 ‘趙宗泫’이라는 한문의 자필 글씨가 씌어 있다. 이로써 이 자료는 당시 대회에 참석

 

이 자료의 전체 내용을 유의깊게 살핌으로써 우리는 그 대회의 구체적인 진행, 세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동시에 그에 나타난 불교개혁의 본질과 방향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껏 이 대회의 참가자들이 누구였는가에 대한 세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던 것도 해소할 수 있다. 또한 지금껏 대회를 마치고 기념 촬영한 사진이 전하여졌지만 그 대상 얼굴이 누구인지를 전혀 파악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회록에 사진의 실명이 전하고 있어 우리의 흥미를 더욱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학인대회록에 의거하여 학인대회의 전모를 소개하고, 그 내용속의 불교개혁의 의미를 추출하고자 한다.

2. 학인대회의 개요

조선불교학인대회(이하 학인대회라 약칭함)의 개요를 〈조선불교학인대회록〉(이하 대회록으로 약칭함)의 요목(목차)을 참고하여 제시하겠다. 그 요목에는 대회 강령, 기념촬영, 발기 준비회, 발기 취지서, 대회 요의, 대회 선언, 출석일람, 발기인 모집문, 제1회 발기총회록, 대회 준비위원회 발표, 대회 소집장, 제2회 발기총회록, 대회 예비회록, 대회록, 견학일정, 간친회기, 교무원 교섭 전말, 대회 강연기, 의연기 등이 나와 있다. 이제 이 요목에 의거 학인대회를 재구성하고, 그 전모를 소개하겠다.

학인대회는 대회의 발기모임부터 시작되었다. 대회 발기준비회는 1927년 10월 29일 저녁 7시 개운사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참석자들은 조선불교 사정을 토의한 결과 학인대회의 발기를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그 준비회를 즉시에 열었다. 여기에서 발기인 모집인원을 선정하고, 발기에 관한 제반 준비사항은 모집위원에게 일임하였다.

그리고 대회는 1928년 3월 경으로, 불교를 연구하는 자로서 조선불교의 부진 원인과 미래의 발전을 연구하는 대상자들의 많은 찬동이 있기를 제안하였다. 그 결과 그 해 11월에는 대회 발기 취지서를 작성하고, 발기인 모집 위원에 박용하·이순호·정찬종·김형진·박홍권·배성원·김태완·정화진 등 8명을 정하였다. 이들은 학인대회 발기 취지서를 작성하고, 12월 21일에는 전 불교계에 발송하였다. 이 취지서를 누가 작성하였는 지는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대회록에 전하는 ‘학인대회 요의(要義)’에는 대회를 개최하는 목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4) 이 요의서에 의하면 대회 주도자들은 불교를 배우는 것이 학인 자신이 불교를 배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중생의 제도를 위함에 있다고 단언한다. 이에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방편을 배워야 한다는 당위를 제시하였거니와, 그 방편이 바로 불교교육제도라고 이해하였다.4) 이 요의서는 언제 누가 작성하였는지 명확치 않다.

때문에 학인대회에서 교육제도 개선의 문제를 토의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당시 불교 교육제도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고, 기성의 교단 간부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기에 학인대회를 개최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하면 우리 학인은 언제까지라도 그 불완전한 교육제도 아래에서 유유복종(唯唯服從)하는 희생이 되야서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의 대의를 몰각(沒覺)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교육제도 문제를 직접 포착(捕捉)하는 것이 학인의 본의가 아닌줄 알면서도 부득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야 이 모임을 일우게 된 것이다.5)5) 대회록 5면.

즉 불교의 근본과 중생을 교화할 방편을 함께 배울 수 있는 불교교육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불교 당국자 및 책임자를 각성시키려는 목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과 취지를 갖고 대회 주도자들은 대회 발기인 모집에 나섰던 것이다.

발기인 모집문은 1927년 12월 25일자로 기재되어 있다. 모집문은 취지서를 첨부하여 배포하였는바, 그 개요는 불교계 내분의 일단락, 재단법인 교무원의 등장이라는 정황을 우선 상기시켰다. 그러나 교육시설의 부진, 재단의 부진을 외호하는 자세에서 발기하였음을 전제하고,

구(舊)를 안립(安立)하고 신(新)을 건설하야 조선불교 특유의 가풍을 발휘하고 세계적 지위에 웅건하자 하매 먼저 질로 순화하고 양으로 대성하야 칠천(七千)으로 일로(一路)에 동귀(同歸)하고 삼십(三十)으로 일단 완성하야 각자 승가의 본원을 수(守)하고 인재를 양성함에 급선(急先)하야 그리하야 사조에 대(對)하고 시의(時宜)에 응하자 함이 본 취지의 정화이며 발기 모집의 강령입니다.6)6) 대회록 13면.

조선불교의 가풍을 건설하자고 강조하였다. 그 건설은 구(舊)를 안정시킨 후에 신(新)을 추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발기인은 승려 및 신자로, 발기인은 단체7) 또는 개인으로 조직, 발기인은 19세 이상으로, 발기인은 승낙서를 첨부하고, 승낙서는 음력 12월 말 이내로 발송하고, 발기인은 대회 개최시까지 책임이 있으며, 발송은 개운사의 이순호 앞으로 보내야 함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모집문에 의거 발기인으로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대상자를 승낙순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7) 단체일 경우에는 3인 이내의 대표를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신구(고양군), 박용하(유점사 동국경원), 정찬종(서울, 대각원), 이순호(개운사 강원), 박홍권(옥천사), 김태완(개운사), 김형진(개운사), 정남제(개운사), 배성원(개운사), 이문호(개운사), 김보섭(개운사), 김병하(개운사), 김동규(법주사), 강태현(제주불교협회), 안도월(제주, 관음사), 오리화(제주, 관음사), 최환권(범어사 강원대표), 최중근(범어사 강원대표), 최경수(동국경원), 이능상(동국경원), 이재희(동국경원), 김동운(동국경원), 서성우(송광사 강원대표), 조동환(송광사 강원대표), 최동식(송광사 강원대표), 최학연(건봉사 강원대표), 김성전(건봉사 강원대표), 박종운(건봉사 강원대표), 조종현(동화사 강원), 신응윤(통도사 강원 신진회대표), 김병규(개운사), 김락환(개운사), 박영춘(개운사), 이해일(개운사), 박윤진(개운사), 이성화(개운사), 정두석(건봉사 중앙포교소), 황하석(개운사), 황보안(개운사), 김영선(개운사), 김영식(백양사 강원대표), 유영하(백양사 강원대표), 이지원(백양사 강원대표), 지대련(해인사 강원 불지회대표), 서병재(해인사 강원 불지회대표), 김달윤(통도사 강원 신진회대표), 황영진(건봉사), 김영호(동화사 강원 강우회대표), 박무근(동화사 강원 강우회대표)

발기인은 위의 49명이었다.8) 그런데 당시 대회 주도자들은 위의 발기인 총회를 개최할 시간이 촉박하다는 판단에 의거 서면총회를 추진하였다. 이에 그들은 시급한 문제(대회 장소, 시일 등)에 대한 개요를 우선 결정하고, 기타 중요한 사항(강령, 규약)은 대회 직전에 결정하기로 정하였다. 2월 5일의 서면 총회에 회보할 내용은 대회 장소, 대회 시일(교무원 평의원회 전후), 대회 준비위원 선거 등 3개항이었다.9) 8) 그러나 범어사 강원대표인 최환권, 최중근은 취소를 신청하였다. 이는 3월 9일자의 범어사 강우회의 이름으로 발기인 모집위원회로 보낸 공문에 의한 것이다. 그 공문에서는 ‘純全한 강원학인대회가 아니기에’ 승
9) 이 사항에 대한 대회 주도자들은 지방보다는 중앙에서, 시일은 교무원회의 이전에, 준비위원은 준비상에 의하여 서울에 거주하는 자를 발기인 모집위원에 위임하는 것으로 유도하였다. 그리고 별지에 이름에 적색 표시를 하였는데 이는 준비위원 피선될 가능성이 많은 대상자를 제시하였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7인을 선정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그 결과 대회 장소는 중앙, 개운사, 교무원 등이 제시되어 결과적으로는 중앙이 20건 지방이 1건으로 나와 다수결에 의하여 중앙으로 결정되었다. 대회 개최일은 교무원 평의회 전인 3월로 나와 교무원 회의 이전에 하기로 하였다. 대회 준비위원은 기존 발기인 모집위원을 그대로 활용하자는 안이 18건, 새로 선출하자는 안이10) 3건이 제기되어 역시 다수결에 의하여 발기인 모집위원을 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출하였다.11)10) 새로 선출하자는 의견에 추천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신구, 정두석, 이순호, 박윤진, 김락환, 박영춘, 이해일(이것은 법주사 김동규 제안), 이순호, 박윤진, 정두석, 김병규, 이성화, 박영춘, 이해일(이것은 서울의 이신구 제안), 이순호, 이해일, 이성화, 정두석, 박영춘, 박윤진, 김병규(이것은 개운사 김락환의 제안). 11) 그러나 모집위원 중 정찬종, 박홍권, 김형진은 ‘사고’에 의하여 준비

이러한 21명(처)의 발기인들의 동참하에 지상총회가 추진되었으며, 그 지상총회를 제1회 발기인 총회로 인식하여, 그 결과를 각 처의 발기인들에게 통보한 것이 1928년 2월 22일이었다. 대회 준비위원회는 2월 23일 회의를 개최하여 대회의 제반 사항을 정하였다. 우선 준비 부문의 조직을 정하였는데, 서무부의 외사(外事)·교섭은 박용하, 서무부의 내무·문서는 배성원, 서무부의 응접은 김태완, 서무부의 설비는 김보섭, 박윤진, 정남제이었으며 회계부에는 이신구와 이순호가 배정되었다.

그리고 대회 장소는 각황사에서, 시일은 3월 14일부터, 제2회 발기인 총회는 3월 12일 오전 8시부터로 정하였다. 그밖에 대회 참가의 주의사항으로서 회비, 숙소, 휴대품, 4일간의 회의 일정 등도 정하였다.12) 이러한 제반 개요를 정한 준비위원회는 2월 25일자로 대회 소집장을 엽서로 작성하여 각 처로 발송하였다. 12) 회비는 교통비는 스스로 해결, 숙박비는 4원(1인, 1일분에 1원 가량), 기타 1원으로 정하여 각 5원을 회계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숙소는 각황사, 유대품은 법복(홍색가사, 장삼)과 인장, 대표위원은 해당 단체의 신임장을 지참하도록 하였다. 회의일정은 제1일은 환영 강연회, 제2일은 분회별 준비회, 제3일은 정식회의, 제4일은 정식회의와 간친회로 정하였다.

학인대회의 제2회 발기총회는 1928년 3월 12∼13일 각황사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는 제1회 총회가 지상총회였고, 대회의 제반 추진을 회의 직전에 정하기로 한 배경에서 나온 회의였기에 학인대회의 개요를 파악함에 있어서는 중요한 모임으로 볼 수 있다. 총회는 개회, 회원점고, 좌장선거, 경과보고, 선언 및 강령 제정, 대회절차, 회의자격, 견학문제, 강연회 개최, 대회비용, 기타사항, 폐회 등의 순서대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총회 순서에 의거 그 개요를 제시하겠다.

개회는 발기인이었던 이순호가 하고, 일동 기립하여 삼보(三寶)에 귀의하였다. 회원 점고는 발기인 박윤진이 하였는바, 33명이었다.13) 13) 개운사 강원 : 이문호, 이순호, 조종현, 김형진, 이성화, 김락환, 이해일, 김병규, 박윤진, 황보안, 황하석, 김병하, 김태완, 박영춘 / 건봉사 강원 : 최학연, 황영진, 박종운
/ 동화사 강원 : 김영호, 박무근 / 백양사 강원 : 유영하, 김영식, 이지원 / 송광사 강원 : 서성우, 조동환 / 유점사 경원 : 박용하, 최경수, 이능상 / 통도사 강원 : 김달윤 / 표충사 강원 : 정남제 / 해인사 강원 : 서병재, 지대련
/ 경성부 : 정찬종, 정두석다음에는 좌장 선거에 들어갔다. 선거 방법에 대해서는 이문호의 의견 즉, 임시 사회가 전형위원 5인을 선정하고, 그 선정위원이 후보자 3인을 선출하여 투표로 결정하자는 방법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그 결과 전형위원 박용하, 서성우, 박무근, 지대련, 이문호가 선임되어 이들이 박용하, 이순호, 조종현을 좌장 후보로 뽑았다.

이들에 대한 무기명 투표를 하여 박용하를 좌장으로 선출하였다.14)

좌장에 선출된 박용하는 서기에 최학연, 사찰에 김병하와 박영춘을 지명하였다. 이어서 경과보고가 있었는데, 발기인이었던 이순호가 지금까지의 경과를 간략히 보고하였다. 선언 및 강령 제정에 관한 건은 준비위원회로부터 기초한 선언서가 제출되었으나 선언의 범위가 적당치 않았다 하여 다시 수정 제출하기로 하고 강령은 제정위원 5인을15) 선정하여 제정케 하였다. 오후 12시 10분에 휴회를 하였다가 오후 2시에 회의를 재개하여 강령제정위원이 정한 초안을 보고하였고, 이를 수정하여 채택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불타의 근본의를 체달하기 위하야 심적 통일을 기하자
―, 우리는 삼학연구와 교화방식을 시대에 적응하자
―, 우리는 조선불교의 완성을 기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자

다음으로는 대회 절차에 관한 건을 토의하였다. 박용하 좌장이 준비위원회가 정한 부분 회식(삼학연구부회, 교육연구부회, 교화연구부회)을 제시하였으나 최학연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 요지는 대회순서 편성위원을 선정하고 지방 대표의 의견을 참작하여 조정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를 참가한 대중이 동의하여 가결시켰다. 그 결과 위원 7인을 구두호선하자는 황영진의 의견을 조종현과 김병규의 동의로 채택하였다.

호선된 7인은16) 대회의 순서를 검토하였다.17) 회원 자격에 관한 내용은 학인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회원의 자격 범위를 말한다. 그 자격은 “년령 15세 이상의 조선인 사부대중으로 계정혜 삼학을 연수하는 자”에 한하되 심사위원 3인을 선정하여18) 출석 지원자의 자격을 심사하기로 하였다. 16) 이순호, 박용하, 정남제, 최학연, 서성우, 김달윤, 김영식이었다. 17) 이 위원들은 이날 저녁에 모임을 갖고 그 순서를 토의하여, 오후 9시부터 재개된 회의에 보고하였다. 그 결과 최학연이 개요를 보고하였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채택하였다. 18) 이능상, 박윤진, 황하석이었다.

견학에 관한 건은 대회 종료 후 서울 시내의 유명 장소를 견학하기로 결정하고 그 장소를 정한 것이었다.19) 강연회 개최에 대해서는 대회가 개최되는 기간의 야간을 이용하여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정하였다.20)19) 대상은 수송공립보통학교, 총독부 청사, 총독부 박물관, 경복궁,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과학관, 경성역, 조선일보사, 라디오방송국, 총독부의원, 창경원 및 비원, 제생원, 서대문형무소, 용산군대, 경성제국대학, 불교전수학교, 부립 도서관, 동아일보사, 기타 등이었다.
20) 대상자로 검토한 인물은 최남선, 한용운, 권상로, 정인보, 박영호, 백성욱, 김법린, 이혼성, 김정설이다.

대회 비용에 대해서는 준비위원인 이순호가 대회 비용을 개괄적으로 보고하였는데 그 총액은 21원 4전이고, 대회록 출판비가 50원 가량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회비는 대회에서 배당하기로 정하고, 회록 발간은 ‘불교’사에 교섭하여 《불교》 4월호에 부록으로 간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발기회의 비용에 대해서는 그 비용이 11원 13전이라는 내용을 준비위원 이순호가 보고하였다. 이 비용은 출석한 발기인에게 평균하여 처리하기로 정하였다.21) 21) 즉시 분배하였는데 1인당 35전이었다.

기타사항으로 견학시에 입을 의상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그 결과 보통복(周衣)을 착용하기로 하였다.22) 그리고 대회 개최 직전에 예비회를 열어, 대회 순서를 결정하며 대회의장 및 그 속원(屬員)을23) 선거하기로 하고 그 예비회의 사회 및 속원은 발기회의 임원이 그대로 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22) 실제 견학시에는 견학에 나선 대상자들의 다수 의견, 즉 장삼과 가사를 착용하기로 결정하여 시행하였다. 23) 서기와 사찰을 의미한다.

이렇듯 학인대회의 개최 이전에 철저한 준비를 거친 후에 마침내, 1928년 3월 14일 역사적인 학인대회는 열렸다. 학인대회가 개최되기 직전인 3월 14일 오전 9시 30분에는 대회의 예비회를 각황사에서 개최하였다. 9시 30분 정각, 좌장 박용하가 삼귀의례로 개회를 선언하였다. 서기 김락영이 회원을 점고하니, 참가자는 40인이었다.

이어서 본 대회의 의장 및 속원을 선거하였다. 전형위원 7인을 선정하여 의장 후보자 4인을 선출하고, 투표로 최다수자를 의장, 차점자를 부의장으로 정하기로 하였다. 이에 전형위원이24) 의장 후보자로 박승주, 차상명, 박용하, 이순호를 선정하였다. 24) 최학연, 박용하, 이순호, 이능상, 이성화, 정남제, 김달윤이었다.
 

이상 4인을 상대로 투표한 결과 박용하 21표, 차상명 9표, 박승주 5표, 이순호 5표가 되어, 의장에 박용하를 부의장으로 차상명을 결정하였다. 다음으로는 서기에 주동원, 박종운, 김달윤을 정하고 사찰에는 조종현, 김병규, 김형진을 전형위원이 정하였다. 대회 순서는 발기회에서 정한 순서중에서 일부를 수정하여 변경하는 것에 그쳤다.25) 예비회는 오후 12시 30분에 폐회되었다.25) 박종운이 주장한 예식에 관한 건을 추가한 것, 주동원이 주장한 본회 존속에 관한 건을 본회 상설기관에 관한 건으로 수정한 것이었다.

학인대회는 1928년 3월 14일, 오후 2시 각황사에서 개최되었다. 그 순서는 개회, 회원점고, 대회 취지 설명, 경과보고, 축사, 선언 및 강령에 관한 건, 교리연구에 관한 건, 교육제도에 관한 건, 교육기관 배치에 관한 건, 교과서에 관한 건, 학인의제에 관한 건, 예식에 관한 건, 학인품행에 관한 건, 교화에 관한 건, 본회 상설기관에 관한 건, 학인대회 기관지에 관한 건, 대회록 출판에 관한 건, 대회 비용에 관한 건, 기타사항, 폐회 등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대상자는 52인이었다. 그 대상자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26) 26) 괄호안의 사찰, 강원은 당시 현주소이다. 이 대상자는 52인이다.

강리형(유점사 동국경원), 김달윤(통도사 강원), 김동운(유점사 동국경원), 김득성(개운사 강원), 김락환(개운사 강원), 김법련(유점사), 김병규(개운사 강원), 김병하(개운사 강원), 김보섭(개운사 강원), 김영선(개운사 강원), 김영호(동화사 강원), 김주진(경성 다옥정), 김태완(개운사 강원), 김형진(개운사 강원), 권정하(개운사 강원), 권정완(봉원사), 나병구(화계사), 유영하(백양사 강원), 이능상(유점사 동국경원), 이문호(개운사 강원), 이성화(개운사 강원), 이순호(개운사 강원), 이지원(백양사 강원), 이해일(개운사 강원), 박용하(유점사 동국경원), 박무근(동화사 강원), 박승주(용문사), 박영춘(개운사 강원), 박윤진(개운사), 박종운(건봉사 강원), 배성원(개운사 강원), 서병재(해인사 강원), 서성우(송광사 강원), 신종기(범어사), 안우천(경성 간동), 오관수(옥천사), 조동환(송광사 강원), 조종현(개운사 강원), 정남제(개운사 강원), 정두석(경성 충신동), 정찬종(경성 종로), 주동원(일본 용곡대학), 지대련(해인사 강원), 차상명(범어사 동래포교당), 최경수(유점사 동국경원), 최학연(건봉사 강원), 표리정(유점사 동국경원), 한영석(경성 서대문), 황보안(개운사 강원), 황영진(건봉사 강원), 황하석(개운사 강원)

의장인 박용하의 개회 선언으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전원이 삼귀의례를 하고, 서기 박종운이 회원을 점고하니 출석자가 46인, 결석자가 5인이었다. 즉 대회가 개회되었던 그 순간에 5명이 불참한 것이다.27) 27) 위의 52인의 출석원 일람은 대회록(9∼12면)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대회록 39면에는 출석원 46인, 결석원 5인으로 나온다. 즉 1인이 착오된 것으로 보인다. 대회록에는 대회 참가자와 불참자의 통계에는 대부분 52명으로 나온다. 요컨대 출석원인지, 아니면 불참자 중에서 1인은 착오한 것이다.

대회의 취지는 준비위원인 이순호가 발표하였다. 이순호는 대회가 개최된 요인을 ‘조선불교(朝鮮佛敎)의 현상(現狀)’에서 찾았다. 즉 조선불교의 불완전한 상태를 구하기 위해 대회가 개최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다음으로는 경과보고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경과보고 준비가 미흡하여 뒤로 미루고, 의장 박용하가 축사를 낭독하였다.28) 이어서 경과보고를 이순호가 하였다.28) 축사는 선암사 강원, 표충사 강원, 표충사 백만기의 축전이 있었다.

선언 및 강령에 관해서는 의장인 박용하가 그 경과를 언급하였다. 발기총회에서 모씨에게 부탁한 선언은 채용되지 못하였으며, 강령은 발기회에서 작성한 바가 있었기에 낭독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김동운은 그 낭독을 요청하여, 선언과 강령이 낭독되었다.

그런데 강령의 ‘불교완성’이라는 문구를 두고 참가대중들의 논란이 지속되어 강령을 수정하자는 의견을 정하고, 이어서 강령 수정위원을 구두호선으로 선출하자는 의견을 정하였다. 그 결과 5인의 수정위원을29) 선출하고, 이들로 하여금 수정케 하고 그 발표는 기타사항의 토의시에 하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정하고 3월 14일 오후 3시 30분에 휴회하였다.29) 이순호, 박용하, 이성화, 이능상, 차상명이었다.
 

3월 15일 오후 4시 30분, 대회를 속개하였다.30) 대회는 속개되어 먼저 교리연구에 관한 건을 토의하였다. 교리연구에 대한 문제는 다수 대중이 의견을 개진하여 명일 의안(議案)으로 제출하기로 하고 오후 5시 50분에 휴회를 선언하였다.

3월 16일 오전 9시 대회는 속회되었다.31) 대회는 전일에 결정하지 못한 교리연구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의견을 개진한 대상자가 다수였고, 이견이 분분하여 치열한 논란이 있었다. 당시 제기된 의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31) 참석자는 34인, 불참자는 18인이었다.

  • 조종현 의안 : 선학·교학·율학을 전문적, 부분적으로 연구해야 함
    박무근 의안 : 선종·교종·율종을 분립하여 연구, 삼학의 통일도 지향
    박무근 의안 : 최학연, 황영진, 박종운 의안 : 계율을 수신과목으로 엄수, 선과 교를 분립함
    서병재 의안 : 사교입선(捨敎入禪)
    김병규 의안 : 초·중·고의 3기를 수업한 후에 선·교·율을 전공
    박무근 의안 : 참선―보편적으로 타인에게 주지하도록 연구
    박무근 의안 : 간경―실지로 체험하도록 연구, 대승료의(大乘了義)를 주로 하고, 현대 민중을 접인(接引)하기 위한 연구
    박무근 의안 : 염불―유심정토, 삼매현전을 기할 것
    박무근 의안 : 지계―현대인의 근성에 적합하게 고수할 것
    박무근 의안 : (이상의 각 조항에는 계정혜가 포함됨)
    김형진 의안 : 수학기―교경(敎經) 수료
    박무근 의안 : 연구기―경·선·율·염(念)·주(呪) 각종을 자의로 선택하여 연구
    이능상 의안 : 선교를 쌍수, 기간은 하안거 90일을 선정기(禪定期)로, 그 잔여 기간은 수교기(修敎期)로 함(단 선은 사교 수료자에게 한함)

이상과 같은 의안을 의장인 박용하가 낭독한 후에는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그 결과, ‘선교후선(先敎後禪)’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교육제도에 관한 건은 교육제도 혁신에 대한 정도를 따라 초·중·고의 3등(等)으로 나누고 내전 이외에도 시대에 적합한 상식적 과학을 겸수하되, 흑판 교수로 하자는 의견이 있던 중에 의장인 박용하의 사고로32) 부의장인 차상명이 좌장이 되어 진행을 주도하였다. 32) 이 사고의 내용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차상명은 교육제도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는 위원을 선정하여 위원에게 위임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서성우는 교육제도, 교육기관 배치, 교과서에 관한 주제를 모두 묶어 위원에게 일임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교육제도 1건만을 위원에게 맡기자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그 결과 위원은 12인으로 하되, 각 강원에서 1인을 의장이 선출하고 부족한 위원은 일반 회원중에서 호선하자는 박용하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이 의견에 의거 위원을 선정하고33) 11시 50분에 휴회가 선언되었다. 33) 그 위원은 이순호, 박용하, 정남제, 박종운, 김영호, 김달윤, 서병재, 서성우, 김영식, 박윤진, 조종현, 차상명이다.

3월 16일 오후 1시 30분, 대회는 속회되었다.34) 토의는 교육기관 배치의 건부터 시작되었다. 서병재가 이 안건도 위원에게 의뢰하여 정하자는 의견을 제출하였지만, 김법련은 교육기관 배치, 교과서, 학인의제, 예식 절차 등 4건을 전부 교육제도 위원에게 위임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투표 결과 14 : 14 동수이었지만 의장이 후자의 의견에 가담하여 김법련의 의견이 결정되었다.34) 출석자는 37인, 결석자는 15인이었다.

다음으로는 학인의 품행에 관한 건을 토의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그 결과 5계에 금연, 단육(斷肉)을 가하여 엄수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교화에 관한 건은 하기 휴가에 순회 강연, 4대기념일에 소인극(素人劇)과 강연회를 개최하되 각 사찰이 연합하여 할 수 있는 기념회를 조직할 것, 학인의 명자(名刺)에 ‘조선불교 학인’이라는 견서(肩書)를 부착하고 그 이면에는 포교문을35) 기재할 것을 정하였다. 학인대회 상설기관에 관한 건은 전조선불교학인단체연맹을 조직하는 것으로 정하였다.35) 그 내용은 “人世는 苦海이다. 樂을 求하려거든 佛陀의 慈航에 오르라. 먼저 나를 알라. 온갖 緣境은 다 나를 의지하여 성립되었다”이었다.

이 연맹의 규약은 규약 선정위원 5인을 두어 정하도록 호선하였으며,36) 연맹의 기성(期成)은 동국경원에서 출석한 학인 전부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하였다.37) 기관지에 관한 건은 기관지를 발행하자는 의견으로 정하였다. 그 기관지는 등사로 50항으로 춘추(春秋) 간으로 발행하기로 하였다. 기관지의 경영 및 기타 제반에 대하여는 위원 5인을 회원이 호선하고, 그 위원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하였다.38) 이상과 같은 결정을 한 이후 대회는 오후 5시에 휴회되었다.36) 그 위원은 이순호, 박용하, 조종현, 정두석, 서병재이었다. 37)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되는바, 대회록에는 〈朝鮮佛敎學人聯盟 促成〉이 ‘金剛山 楡岾寺 東國經院內 朝鮮佛敎學人聯盟期成委員會 白’의 이름으로 나온다. 그 내용은 “離散은 滅亡의 表象이다. 分裂은 衰弱의 兆朕이다. 모래라도 뭉치면 泰山이 된다. 올액이도 合하면 동아줄 일운다. 學人이 올액이라면 聯盟은 동아줄이다. 우리는 힘잇고 굿세인 동아줄들이자. 朝鮮佛敎를 運轉할 동아줄들이자. 朝鮮佛敎學人이여 聯盟하자.”이다. 38) 그 위원은 주동원, 이순호, 최학연, 서성우, 이문호이었다.

3월 17일 오전 9시, 대회는 속개되었다.39) 전날에 교육제도를 비롯한 4개 안에 관련된 위원중의 일원인 조종현이 등단하여 위원회에서 제정한 의안을 통독한 뒤에 1개 안씩 상정하여 결의하기로 정하였다. 우선 교육제도에 관한 건은 위원회에서 정한 초등과(3년), 중등과(3년), 고등과(4년)의 제도의 틀과 그 전제하의 과목을 정하였다.40) 약간의 이견은41) 있었으나 위원회 안이 통과되었다. 교육기관 배치에 관한 건은 위원회에서 제정된 의안 그대로 통과시켰다. 39) 출석자는 36인이었고, 불참자는 16인이었다.
40) 교과목은 다음과 같다. 초등과 : 석존전, 불조3경, 도서, 조선어, 일어, 산술 중등과 : 능엄경, 기신론, 반야경, 원각경, 구사론대강, 유식론대강, 조선불교사, 조선역사, 조선지리, 동물학, 광물학, 생리학, 수학, 일어 고등과 : 화엄경, 선문염송, 각종강요, 인명론, 불교사, 세계종교사, 인도철학, 철학개론, 세계지리역사, 물리화학, 地文, 경제학 이상은 흑판 교수로 함을 원칙으로 정하였다. 41) 중등과에 영어를 배우게 하고, 초등과에 음악을 포함시키자는 의견이었다.

그 개요는 고등과 강원 1개소는 경성에 설치하되 교무원의 경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중등과 강원은 6개소 이상을 지방에 설치하는 것으로, 초등과 강원은 중등과 강원에 부속하고 그 이외에 상당한 사원에 설치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교과서에 관한 건은 교육제도의 건에 포함되었기에 토의하지 않았다. 학인의제에 관한 건은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위원회안은 예복은 흑색 장삼, 홍색 가사로 정하였지만, 행복(行服)은 흑색 장삼을 소매만을 좁게 하되 주의(周衣)보다는 크게 하고, 가사는 선종식의 락자(絡子)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에서는 락자를 제외하자는 의견이 다수 찬동으로 가결되었다. 다만 락자를 제외하는 대신에 만자(卍字)를 4분 평방[銀製]로 하여 흉부에 수(揷)하기로 하였다. 그외에 모자는 나파륜모[帽]를42) 노소없이 쓰는 것으로 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정하고 대회는 11시 50분에 휴회하였다.42) 필자는 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대회는 3월 17일 오후 1시 50분에 속회되었다. 우선 예식에 관한 건을 토의하였는데, 위원회에서 제정한 원안을 수정 보완하여 통과시켰다. 그 요지는 조석 삼정례(朝夕 三頂禮)만 하고, 참선 10분이었다. 석례(夕禮)·송주(誦呪)는 선송(先誦)만 하고, 삼정례를 한 뒤 참선 10분을 행하는 것으로 하였다.43)

다음으로는 본회 상설기관인 연맹의 규약에 관한 건을 다루었다. 먼저 연맹 규약제정위원인 조종현이 위원회에서 정한 규약을 낭독하였다. 대회에서는 이 안을 기본으로 하고, 가맹과 탈퇴의 절차, 연맹원의 처벌, 연맹의 총회 등의 문제를 보수하여 과반의 찬동으로 통과되었다. 그 규약은 다음과 같다.

  • ―, 본 연맹은 조선불교학인연맹이라 칭함
    ―, 본 연맹은 조선불교학인대회의 강령을 실천하기 위하여 조선불교학인의 일치행동을 기(期)함으로써 목적함
    ―, 본 연맹에 참가할 자격은 조선불교학인단체로 조직함(단 5인 이상의 대표는 단체로 간주함)
    ―, 본 연맹에 가맹 또는 탈퇴하는 절차는 연맹 총회의 결의로 차(此)를 결정함
    ―, 본 연맹의 사무는 조선불교학인대회 또는 연맹 총회에서 지정한 단체에서 집행함
    ―, 본 연맹에 가맹한 단체는 조선불교학인대회 및 본 연맹총회의 결의 또는 본 규약을 이행할 의무가 유(有)함
    ―, 본 연맹에 가맹한 단체로서 전항의 의무를 이행치 아니하거나 또는 본 연맹의 체면을 오손(汚損)할 시는 본 연맹에서 탈퇴를 명함
    ―, 본 연맹의 회비는 매인(每人) 매년(每年) 50전으로 하되 6월 말일 이내로 납입함
    ―, 본 연맹은 기관지를 발행함
    ―, 본 연맹은 매년 3월에 정기 총회를 개(開)하고(단 필요로 認하는 시 총회의 결의로 임시총회를 소집할 수 있음) 필요에 응하야 총회의 결의로 조선불교학인대회를 소집함
    ―, 본 규약은 연맹이 성립되는 때로 부터 시행함
    ―, 본 규약은 조선불교 학인대회에서 출석원 삼분의 이(三分二) 이상의 결의로 개정할 수 있음

이어서 기관지에 관한 건을 토의하였다. 기관지에 관한 문제는 이미 그 개요를 정하였지만, 여기에서 다시 재론하였다. 그 결과 지면을 기존 50항에서 100항으로 변경하였다. 이에 기관지에 관한 개요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 명칭 : 회광(回光)
    ―, 내용 : 권두언, 교리란, 사화(史話)란, 사상란, 창작란, 편계(遍計)란, 소식란
    ―, 투고 : 25자 30행 내외, 6월 말 및 12월 이내로
    ―, 발행일 : 3월 1일, 9월 1일
    ―, 발행방침 : 연맹 강원이 강원 소재 사명(寺名)의 [가나다]순으로 1회씩 발간 책임을 맡고 그 비용은 연맹에서 변출(辨出)함
    ―, 발행부수 : 회원 전수(全數), 31본산, 기타 유지(有志)를 총합(總合)한 수(연맹에서 통지함)
    ―, 기타 : 편집 겸 발행인, 발간 당(當) 강원 모(某) 정재권(停載權)은 편집인에게 일임하고 원고는 절대로 반환치 아니함

그리고 대회록 출판에 관한 건도 재론하여, 《불교》지의 부록으로 하지 말고,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대회록의 출판 사무는 편의상 개운사강원 학인에게 위임하기로 하였다. 대회 비용에 대한 문제도 토의하였다. 먼저 이순호가 대회 비용을 보고하였는데 대회발기, 준비의 비용의 수입은 11원 40전이고 지출은 11원 39전이었다.44)44) 수입은 개운사 강원 학인 일동의 연금이었고, 지출은 취지서 인쇄비, 발기인 모집 통신비, 기타 잡비이었다

발기인 총회비용은 수입이 11원 20전, 지출이 11원 13전이었다.45) 대회 비용은 수입이 73원 85전이고, 지출은 73원 60전이었다.46) 이러한 보고를 받은 대중들은 토의를 거쳐, 비용의 4/1은 회원에게 분배하고 4/3은 강원이 분배하기로 정하였다.47).45) 수입은 발기인 출석 32명에서 나온 수입금이고, 지출은 대회 소집통신비, 기타 잡비이었다. 46) 수입에 9개 강원 분배 수입금(6원 25전씩), 회원 40인 분배 수입금(44전씩)이었으며 지출은 대회록 500부 출판예산액과 대회 잡비이었다. 47) 그런데 이 비용 처리가 학인대회의 비용만을 고려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약간 애매한 점이 있다.

기타사항에 들어가서는 선언과 강령을 토의 결정하였다. 위원에게 위임한 선언과 강령을 의장인 박용하가 낭독하고, 참가 대중들의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우선 대회 강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우리는 불타적 구제의 중심자로 홍임(弘任)과 건행(健行)을 가지자
    ―, 우리는 시대에 적응한 교화 방식을 만들자
    ―, 우리는 불교조선의 건립에 필요한 모든 자량을 통일적으로 준비하자
    ―, 우리는 자리이타의 불지(佛旨)를 체인(體認)하기 위하야 완선(完善)한 불교교육제도의 일치 확립을 기(期)하자

이 강령에 의하면 대회 참가자들은 불타적 구제라는 실천 목표를 정하고, 그를 위한 교화방식을 새롭게 정비해야 함을 천명하였다. 이에 그들은 그 목표와 실천은 불교조선의 건립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통일적으로 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 노선이 ‘자리이타’ 불교의 근본이고, 이를 위한 불교교육제도의 확립이 급선무임을 내세웠다고 하겠다.

‘학인대회 선언’에서는 학인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의무에 대한 원칙을 개진하였다. 대회 주도자들은 당시 불교계가 쇠폐, 단절, 멸망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극복할 책임이 학인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극복할 방안은 곧 불력(佛力)으로써 가능하다고 보고,

시대에 마치어 유정을 광도(廣度)하려 하면 방편이 잇을 것이나 절지(切至)한 적응은 자성의 원실(圓實)한 그 자리에서 이러나는 명예(明睿)가 아니면 될 수 없으며 현적(玄籍)을 통지(誦持)하매 반드시 선후와 긴갈(緊즷)을 알어야 할 것이다. 표준은 오즉 자성의 원실이며 조선을 불교화 하야 연지(挺特)한 대건립(大建立)이 잇으려 하매 반드시 여러 가지 준비가 잇어야 할 것이나 통기(統紀)는 오즉 자성의 원실이다.48)48) 대회록 7면.

그 구체적인 준비 내용의 요체는 ‘자성(自性)의 원실(圓實)’임을 강조하였다. 자성의 원실은 무엇인가. 이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충분히, 원만히 수행하는 것 혹은 그를 충실히 갖추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언에서는 자성의 원실을 기하려면 계행의 숙정(肅淨), 송주(誦呪)의 건근(虔謹)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성의 원실을 스스로 증명(證照)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취지하에 추진하는 학인대회는 부처의 대비(大悲), 대지(大智)를 나타내는 대광명의 도선(導線)으로 주장하였다. 즉 학인들의 그 자성을 원실하려는 모임이 바로 학인대회라는 것이었다.

이후 박용하의 제안, 즉 대회에서 의결한 사항중에서 실행을 주선할 문제에 대해서는 실행위원을 선정하자는 것에 대하여 전원이 찬동하였다. 구두호선에 의하여 박용하, 박윤진, 차상명, 이순호, 이능상을 선정하였다. 이어서 주동원이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불교를 알리기 위한 수의과(隨意科)를 두도록 주선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시간이 지났다는 경고에 의해 의장은 폐회를 선언하였다. 곧 조선불교학인대회 만세 소리와 함께 대회는 종료되었다.

이제부터는 대회에 관련된 부수적인 내용을 소개하겠다. 우선 대회 참석자들은 3월 15일 대회 기념촬영을 하였다. 대회록에는 당시 촬영한 사진이 전한다.

그 촬영에 임한 대상자들은 이문성, 김병하, 서병재, 김락환, 유영하, 박영춘, 최경수, 박용하, 안우천, 이지원, 지대련, 김영식, 김법연, 이능상, 조종현, 조동환, 강리형, 표리정, 박무근, 김주진, 김동운, 이순호, 황영진, 권정원, 박윤진, 이성희, 황하석, 김병규, 김달윤, 서성우, 김영선, 김형진, 주동원, 박승주, 이해일, 김영호, 정남식, 최학연, 정두석, 김성인, 박종운, 황보안 등 42명이었다. 그리고 대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대회를 축하해주는 의미에서 공양 보시를 받았다. 3월 16일 오찬은 임천명화(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의 자당), 3월 17일 오찬은 경인생 이씨(경성, 무교동 거주), 3월 18일 오찬은 송만암(중앙교무원 이사)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대회 중간에는 서울 시내 주요 시설을 3월 13일, 15일, 19일에 견학하였다.49) 3월 18일 오후 8시 30분에는 각황사에서 학인대회 참가 대중간의 간친회(懇親會)를 개최하였다. 참석자는 40여 명이었다. 한편 대회에서 결의한 내용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시도하였다. 그 교섭위원이었던 박용하가 교육제도·교육기관 배치의 2건을 교섭위원 3인의50) 이름으로 교무원에 제출하였다. 49) 3월 13일 : 수송공립보통학교(오후 2시), 총독부청사(오후 3시), 총독부박물관(오후 3시반), 경복궁(동 4시) 3월 15일 : 조선은행(오전 10시), 경성우편국(오전 12시), 과학관(오후 12시 반), 경성역(오후 2시), 조선일보사(오후 3시)
3월 19일 : 라디오방송국(오전 10시), 총독부의원(오후 1시), 창경원(오후 2시)50) 3인은 알 수 없다.

그 추진방안은 학인대회의 결의안을 교무원에서 채택하고,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1928년도의 예산에 고등강원 유지비 2,400원을 편입시켜 1928년부터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월 21일, 총독부 학무국장의 ‘지시’ 즉 “불교전수학교가 아직 허가를 얻지 못하는 도중에는 여하한 신사업을 경영함이 부당하다” 하여 예산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제6회 재단법인 교무원의 평의원회에 요구안을 제출하였으나 교육제도 개선, 교육기관 배치 등은 찬성하고 고등강원에 대해서는 학인대회의 요구대로 실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단 실행은 1929년 평의원회까지 유보하기로 결의되었다.

한편 학인대회가 열리던 오후에는 사회 저명 인사를 초청하는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기간에 열렸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 3월 14일, 오후 4시 : 최남선, 〈학인과 학인의 사명〉
    오후 7시 반 : 이혼성,51) 〈환영〉
    오후 8시 : 정인보, 〈조선불교의 근본 문제〉
    3월 15일, 오후 8시 반 : 백성욱, 〈조선불교 학인대회와 나의 소감〉
    3월 16일, 오후 7시 반 : 박영호(박한영), 〈교시〉52))52) 박영호는 박한영을 지칭하는데, 그는 불의에 여행을 떠나기에 10분 정도의 인사나 하고 가겠다는 심정으로 학인대회에 참석한 학인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연설하였다.
    3월 17일, 오후 8시 반 : 김정설, 〈방할(棒喝)〉

이들의 강연 요지는 대회록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정섭의 강연기는 사정으로 대회록에 수록치 않았다. 또한 대회 주도자들이 강연자로 적극 초빙한 한용운은 ‘병석(病席)’으로 인하여 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회록의 말미에는 의손기(義捐記)가 전한다. 이는 대회의 취지를 선전할 겸 발기인 모집을 위해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순방한 모집위원인 이순호에 베푼 동정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당시 이순호는 1928년 음력53) 12월 20일부터 약 3주간에 걸쳐 본산 및 강원의 순방에 나섰다. 이 때 받은 금액이 55원 70전이었다는 것이다.54) 53) 대회록에는 舊 12월 20일로 나오는데, 이를 음력으로 이해하였다.54)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운사(10원), 박한영(1원), 개운사 강원 학인(6원), 교무원 이사 김만응(2원), 동화사(3원), 동화사 강원 강우회(2원), 통도사 강원 신진회(2원), 통도사 강원 강사 조영식(1원), 통도사 강원 강사 우성연(20전), 범어사 강원 강우회(5원), 옥천사(10원), 옥천사 박홍권(1원), 진

 

3. 결어 : 학인대회록에 나타난 불교개혁

이제부터는 지금껏 살펴본 학인대회록에 나타난 제반 내용을 유의하면서, 그 대회록에서 추출할 수 있는 불교개혁의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불교개혁은 더욱 치밀하게 조망해야 하기에 여기에서는 그 방향만을 개진하려고 한다.

첫째, 학인대회가 1928년 3월에 개최되었다는 불교사적인 의의를 찾아내야 한다. 대회록에도 나타난 것과 같이 대회 주도자들은 대회의 발기를 1927년 10월 말부터 본격화하였다. 심지어는 지상으로 발기총회를 할 정도였는바, 왜 대회를 조급하게 열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배경을 정리해야 한다. 이러한 대회의 개최가 우연히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당시 불교사의 흐름, 변동하에서 그에 대한 적절한 의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둘째, 대회의 주도자들의 주요 기반은 개운사 강원이었다. 당시 개운사 강원은 1925년부터 당대의 강백인 박한영이 주석하면서 학인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학인대회의 발기가 바로 그 개운사 강원의 수료식과 맞물려 있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곧 박한영에게 영향받은 개운사 강원의 수료생, 재학생들의 불교 개혁정신과 연결됨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운사 강원이 갖고 있는 근대불교에서의 위상을 점검해야 할 과제를 만난다. 박한영은 1910년대부터 강백으로 명망을 떨쳤고, 불교잡지 발간을 통한 불교대중화의 일선에 나섰으며, 임제종운동과 3·1운동시에도 그 일선에 섰던 당사자였다. 지금껏 근대불교사상에서 박한영에 대한 주목은 매우 미약하였다. 박한영, 그가 왜 1925년부터 개운사에서 강원 교육의 일선에 나섰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과제를 갖는다.

셋째, 학인대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대중들은 강원의 재학생, 수료생들이었다. 요컨대 강원교육과 연결된 대상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10년대 이래 불교 개혁·대중화 등의 구도에서 구학교육·강원·구체제가 배척당하였던 일련의 상황들에서 이 시기에는 불교개혁의 대상과 그 내용이 변화되는 양상을 찾아낼수 있다.

넷째, 대회 주도자들의 현실인식, 불교개혁의 본질을 점검해야 한다. 대회 주도자들의 의식·사상을 찾을 수 있는 대회 취지서, 대회 선언, 강령, 대회 요의 등을 세밀히 분석하면 학인대회가 갖고 있는 사상성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들이 불교개혁의 방향을 불교교육에서 찾고 있음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여타 불교개혁에서도 불교교육 분야를 개혁한다는 주장은 적지 않았으나 이 학인대회의 경우와 같이 불교개혁의 노선을 불교교육에 치중한 경우는 흔치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대회의 또 다른 특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섯째, 대회 진행중에 제기한 학인들의 다양한 의견을 유형별로 정리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특히 교리연구를 둘러싸고 제기된 의안은 우리의 시선을 끄는 주제이다. 동시에 그 내용들은 불교 교리, 사상을 바라보는 일정한 관점을 갖고 있다. 때문에 당시 불교계의 강학분야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섯째, 대회 주도자들중에서 우리의 시선이 더욱 가는 대상자는 박용하와 이순호이다. 박용하는 이운허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이순호는 이청담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대회록에도 나오지만 학인대회를 주도한 주역은 이들이었다. 박용하는 좌장·대회의장으로 대회를 이끌었으며, 이순호는 대회의 실무와 이면에서 대회를 조율한 당사자였다.

박용하는 이 대회 이전에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해방공간에서는 경기도 교무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한국 현대불교의 역경을 대표할 정도로 역경분야에 헌신한 승려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왜 그가 노년에 역경사업에 정열과 혼을 투여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자료로서 학인대회를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순호는 1950∼60년대 이른바 정화불사, 정화운동의 핵심 주역이었다. 이청담으로 불리우던 그 시절에 왜 그가 불교의 정상화를 위해 수많은 역경과 비난, 위험을 무릅쓰고 불교정화에 나섰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답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청담이 정화불사의 연원을 이 학인대회에서 찾았음도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 하겠다.

일곱째, 불교개혁의 다양한 노선과 성격을 찾을 수 있으며, 불교개혁 사상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지금껏 우리는 불교개혁에 대하여 구질서의 파괴, 신학문의 수용 위주의 노선만 강조하였다. 그러나 근현대불교사에는 구학, 구질서, 전통 계승, 근본불교 강조 등과 연결되어 있는 불교개혁의 노선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학인대회가 바로 그 경우로 볼 수 있다.

여덟째, 학인대회의 이후의 학인들의 동향과 학인대회에서 결의한 내용들이 교단에 어떻게 수용·변질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의 관심이 가야 된다. 학인들은 학인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회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교단에서도 학인대회에서 결의, 제안한 내용을 수용하여 불교계에 활용할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측면에서의 성과는 매우 미진하였다. 그러면 그 미진한 원인이 무었이었는가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지금 현재 불교계에서도 참조할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지금껏 1928년 3월, 각황사에서 개최된 학인대회의 전모를 전하는 대회록을 통하여 불교개혁과 연관지워 살필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여 보았다. 추후에 더욱 다양한 시각에서 이 대회와 대회에서 제기한 내용을 분석할 때 이 대회의 역사성은 지속될 것이다. ■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부천대 교수·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첫키스로 만해를 만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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