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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열반(nirvana)에 대한 서구적 해석 / 황순일
황순일 충북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19호] 2004년 06월 10일 (목) 황순일 hwangsoonil@hotmail.com
1. 서언

불교가 유럽에 소개된 이래로 열반에 대해 수없이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정말로 만족할만한 설명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세기 초반 벨기에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라 발레 뿌생(Louis de La Vall e Poussin)은 《종교윤리백과사전》에 수록된 열반에 대한 자신의 원고{{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ed. James Hastings, p.376.}}에서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 학자들도 불교인들이 이해한 정도로 열반이 이러하다고 이해하고 있음으로, 열반에 대해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꼭 우리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는 서술에 불교인들은 만족해 왔는데, 아마도 우리 유럽의 학자들이 수세기에 걸쳐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려 해온 것에 반해 인도인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가 불교의 교리들을 외부에서 거의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다루기 때문일 것이기도 하다. 열반이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고고학적인 흥미를 일으키는 대상이라면 불교인에 있어서는 실천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열반이 어떤 것인지를 연구하는 것이라면, 불교인이 해야 할 일은 열반에 다가가는 것이다. 서로 너무나 다른 일이 아닐까 한다.

일견 불교인이나 인도인을 자신을 포함하는 유럽인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서술한 것이 그 당시 유럽에 팽배해 있었던 오리엔탈리즘적인 기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명확히 하려 했던 것은 불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학문적 호기심에서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열반이란 어떤 경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경지에 대해 실천적으로 접근하려는 사람에게 열반 개념이 가지고 있는 애매모호함을 따지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르며, 감히 언어적으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영역에 남겨두는 것이 차라리 실용적이며 어떤 종교적인 중요성을 지닐 거라며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과학적 사유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다종교 사회에서는 별로 호소력이 없다. 현대 과학이 제공하고 있는 명확하고 투명한 설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점차 종교적인 영역에서까지도 좀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객관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지향하는 최고의 경지인 열반 또한 여기에서 예외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이 학문적으로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불교가 유럽에 소개된 후 많은 유럽의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열반 개념에 대한 해명을 시도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학자들의 노력은 1968년에 가이 리처드 웰본(Guy Tichard Welbon)에 의해 정리되어 《불교 열반과 그 서구적 해석들》{{ The Buddhist Nirv a and its western interpretations, by Guy Richard Welbon, Chicage, 1968.}}이란 제목으로 시카고에서 출판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열반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명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며, 여러 학자들의 주관적인 관점과 각각의 기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2. 열반에 대한 객관적 접근법

한번이라도 열반 개념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해보려 했던 사람이라면 라 발레 뿌생이 직면했던 어려움을 쉽게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개개의 승려들이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주관적인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열반이라는 점이 가장 큰 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초기 경전에서는 열반을 유여열반(saup disesanibb na)과 무여열반(anup disesanibb na)으로{{ 불교혼성범어에서는 sopadhi e anirv adh tu와 nir/an-upadhi e anirv adh tu로 표기한다.

}} 나눈다. 전자는 붓다의 깨달음과 동일시하며 탐냄(r ga)·혐오(dosa)·우둔함(moha)이 소멸된 것(nirodha)으로 설명되는 반면, 후자는 붓다의 마지막 열반으로 더 이상의 새로운 생이 없어서 윤회하는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설명된다. 유여열반의 경지를 체험한 성인은 '생이 파괴되었고 종교적인 삶이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이 세계에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알았다'고 하는 환희에 찬 외침을 통해서 자신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고, 남아있는 삶을 마치면 마지막 열반에 들 것이라고 사방에 알린다.

하지만 그 스님이 유여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는지의 여부는 스스로에게 주관적으로 알려질 뿐 외부에서 확인할 길이 없다. 더욱 윤회하는 이 세계를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것으로 막연히 설명되는 무여열반의 경우, 일반인들로서는 접근조차 해 볼 수 없다. 설령 어떤 성인이 마지막 열반에 들어가서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우리에게 확인해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근래 불교를 좀더 수행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려는 학자들 중에는 불교에서 제시된 여러 경지들이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연구도 객관성이나 합리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이러한 주관적 체험 내지 실천적 측면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문헌학적·교리적으로 아직까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불교학을 학문적인 영역으로부터 스스로 분리시키는 것이며, 좀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객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현대적 분위기에 역행한다.

뿐만 아니라 불교학의 외연을 확대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태도일 것이다. 불교에 대한 주관적인 접근은 기본적으로 불교를 수행을 통해 직접 체험하고 있는 분들, 라 발레 뿌생의 표현을 빌면 '열반에 다가가려는' 분들이 실천적으로 감당해야할 부분이 아닐까 하면서도, 호흡·명상 그리고 참선과 같은 불교적 수행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필자와 같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열반에 대해 연구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종종 딜레마에 빠지게도 한다.

그렇다면 열반에 대해 객관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열반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 열반은 이러이러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다르마(dharma)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인 붓다의 가르침과 여기에 대한 방대한 문헌적인 자료들이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자료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문헌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어느 정도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주관적인 판단이 우선하는 설명보다는, 주어진 어떤 문헌에 나타난 자료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했을 때 '그 문헌의 작자 또는 문헌이 속하는 학파의 사람들은 열반을 이러이러하게 이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 형식을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들이 축적되면 열반 개념에 대해 역사적인 분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적절한 재해석까지 가능하게 되겠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되기에는 너무도 먼 것이 현실이다.

3. 초기 경전의 비유적 성격

문헌 위주의 분석 또한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비유적인 용어들로 가득한 초기 경전의 경우 주요한 교리적 개념들을 명확히 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비달마의 논사들에게도 동일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승의 몇몇 논서에서는 초기 경전에 이미 대승적 논의들이 간접적으로 시사되었음을 주장하려고 할 때 종종 '밀의(密意)에 따른 것( bhipr yika)'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설일체유부(Sarv stiv dins)나 경량부(Sautr ntikas)와 같은 부파불교의 논서류에서는 주로 용어의 정의에 입각한(l k a ika) 아비달마의 설명에 대비되는, 초기 경전의 전후 문맥 또는 화자의 의도에 입각한 설명 방식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tasm d bhipr yika s tre u nirde o l k a ikas tv abhidharme, Abhidharmako abh ya ed. P. Pradhan, revised by A. Halder, Patna, 1975 p.333, 133, 185, 235, 331. bhipr yiko hi s tranirde a , no l k a ika , yath abhidharma , Sphu rth Abhidharmako avy khy , ed. U. Wugihara, Tokyo p.172, Akb-h .
}} 동일한 경향이 테라바다(Therav da)에서도 나타나는데, 아비달마의 설명을 직설적(nippariy ya)이라고 지적하면서 문맥에 의존(pariy ya)하는 경전의 설명과 대비시키고 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아비달마의 논사들이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경전의 내적인 전후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다의적인 용어들을 이해하는 것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각 용어들의 개념적인 정의에 바탕을 두고 주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에 익숙했던 아비달마의 논사들에게 문헌자료 전체의 내용을 고려해서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비달마의 논사들에게 있어서 전후 문맥에 크게 의존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일종의 골칫거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불교학 초창기에 서구에서의 열반에 대한 연구 또한 이와 유사한 문제점들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불교 열반과 그 서구적 해석들》을 보면, 열반 개념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는 주로 용어의 어원적 분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nirv a', 'upadhi', 또는 'up di'와 같은 열반에 관련된 핵심 용어들의 어원분석을 놓고 여러 학자들이 대립했었다.

이들의 방법 또한, 주어진 문헌 자료가 스스로 의미를 드러내도록 기다리기 보다는, 어원 분석을 바탕으로 용어들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려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맥락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초기 경전 용어들의 이해에 한계가 있었으며, 따라서 부파불교시대 아비달마의 논사들과 유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우리들의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초기경전에 나타난 열반에 관련된 용어들이 가지고 있는 비유적 성격이다. 기본적으로 열반 즉 nirv a란 용어 자체가 일종의 비유어로서 nir v (to blow)란 자동사 형태에서 파생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냐나몰리( y amo i)에 의하면, 이 용어는 원래 풀무질로 바람을 불어넣어 활활 타오르던 불이 대장장이가 풀무질을 멈추었을 때(stop blowing) 자연적으로 소멸하는 것을 지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 Path of Purification, y amo i, Colombo, 1976, p.319 note 72. }}

따라서 '불의 소멸'이란 이미지가 열반이란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때의 의미는 갑작스러운 바람 등과 같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 활활 타오르던 불이 갑자기 꺼지는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 등과 같은 연료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서 불이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4. 두 가지 열반에 대한 상이한 해석

구체적으로 이 상태에서 어떤 것이 소멸하는가 하는 것은 빨리어에서 'saup disesanibb nadh tu'와 'anup disesanibb nadh tu'로 표기되고 불교혼성범어에서 'sopadhi e anirv adh tu'와 'nir/an-upadhi e anirv adh tu'로 표기되는 두 가지 열반에서 'up di' 또는 'upadhi'가{{ 현장은 이 용어를 의지하다는 의미의 '依'로 번역한다. }}

무엇을 지시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데 사실상 초기 경전에서부터 이미 기존의 유여·무여 열반에 대한 이해와 상이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EA(TD2 579a).}}.

테라바다의 주석 전통은 'up di'가 더미(蘊)를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따라서 유여 및 무여열반은 붓다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인 깨달음과 마지막 열반에 해당된다. 더미(蘊)란 의미를 'saup disesanibb nadh tu'에 대입하면 비록 탐냄(r ga)·혐오(dosa)·우둔함(moha)과 같은 번뇌들은 소멸되었지만(nibb na)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더미(蘊)들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태(sa-up dhisesa)가 되며, 따라서 유여열반은 번뇌의 소멸(kilesa-parinibb na)로 설명된다{{ Th-a I p.46, Dhp-a II p.163.}}.

동일한 의미를 'anup disesanibb nadh tu'에 대입하면 탐냄·혐오·우둔함과 같은 번뇌들이 이미 소멸된 상태에서(nibb na) 남아있던 더미(蘊)마저 완전히 소멸된 상태(an-up dhisesa)가 되며, 따라서 무여 열반은 더미(蘊)의 소멸(khandha-parinib na)로 설명된다{{ Th-a I p.46, Dhp-a II p.163.}}.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도공의 물래가 모터의 힘에 의해 돌고 있다고 했을 때, 유여열반은 모터가 멈춘 뒤에도 원심력 등에 의해 계속 돌고 있는 상태이고, 무여열반은 돌고 있던 물래가 더 이상의 회전력이 남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멈춰선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한편 몇몇 근대 현대 학자들은 up dhi를 '집착 또는 번뇌'를 지시하는 것으로 본다. 올덴베르그(Hermann Oldenberg){{ Buddha: his life, his doctrine, his order, by H Oldenberg (tr. William Hoey) NewDelhi 1992(1882), pp.427-445.}}를 필두로 러브조이(A.O.Lovejoy){{ "The Buddhistic technical terms up d na and up disesa" by A.O.Lovejoy, in JAOS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XIX, 1898, p.127-136.}}

그리고 매이스필드(Peter Masefield){{ "The nibb na-Parinibb na Controversy" by Peter Masefield, in Religion Vol. 9, 1979, pp. 215-230.}} 등의 학자들은 초기 경전이 'up disesa'의 다른 용례를 보여준다는 점을 바탕으로 'up dhi'가 원래 더미(蘊)를 의미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이 용어는 초기 경전에서 '집착 또는 번뇌'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네 가지로 분류되는 불교의 성인(ariyapuggala)의 단계에서 첫 세 단계를 지시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고{{ AN IV pp.74-79: 아라한(arahant)의 단계에 해당되는 ubhatobh gavimutta와 pa nimutta가 anup disesa로 지칭되고, 그 아래 세가지 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k yasakkhin, di tipatta, saddh vimutta, dhamm nus rin, animittavih rin은 saup disesa로 지칭된다. 그리고 AN IV pp.379-381에서는 다섯 가지 종류의 불환(an g min)과 일례(sakad g min) 그리고 세가지 종류의 예류(sot panna)가 saup disesa로 지칭된다. }},

종종 아라한(arahant)을 지칭하는 용어인 완전지(a a){{ 초기 경전에서 완전지(a a)는 종종 아라한(arahant)과 대치되어 사용된다(MN I p.445, I pp.465-466, SN II p.224).}}에 대비되는 불환(an g min)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었다{{ '두 가지 결과 중의 한 가지 결과가 얻어질 것이다: 이 생에서 완전지(a a)를 얻거나, 아직까지 집착이 남았다면(up disesa) 불환의 상태를 얻을 것이다'(DN II p.314, MN I p.62, 63, 481, SN V p.129, 181, 236, 313, AN III p.82, 143, V p.108, It p.39, 40, 41). 이 구절은 올덴베르크, 러브조이 그리고 메이스필드에 의해 주요한 경전적 증거로 사용되었다.

}}. 이 집착 또는 번뇌란 의미를 두 가지 열반에 대입하면 아직까지 집착이 남아있다(saup disesa)는 점으로부터 유여열반은 불환(an g min)으로 그리고 더 이상의 집착이 남아있지 않다(anup disesa)는 점으로부터 무여열반은 아라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한 승려가 붓다의 가르침대로 살았다면 이들 두 가지 중의 한 가지 결과를 얻을 것이란 초기 경전의 언급으로부터 두 가지 열반은 테라바다 주석 전통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한 승려가 연속적으로 이들 두 가지 단계를 거쳐 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승려가 그들의 능력에 따라 얻는 두 가지의 상호 배타적인 결과로 보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The nibb na-Parinibb na Controversy" by Peter Masefield, in Religion Vol. 9, 1979, p.: 224.}}

이들의 주장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후지타 고우다츠{{ "Nirvana in the early Buddhism, nibb na and parinibb na" by Huzita Koudazu, in JIBS, 1988, p.8.}}가 주장한 것과 같이 초기 경전에서 'up di'가 더미(蘊)를 지시한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점으로 라 발레 뿌생{{ Nirv a by Louis de La Vall e Poussin, Paris, 1925, pp. 168-180.}}과 토마스{{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Edward J. omas, London, 1927, pp.190-191.}}의 경우도 'up di'가 원래 더미(蘊)를 의미했을 것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한편 여기에 대해서 곰브리치는{{ How Buddhism Began, Gombrich, London 1996, pp 68-69.}} 그러한 증거가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How Buddhism began)》에서 곰브리치는 초기 경전에서 'up di'가 두 가지 열반의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때, 이 용어는 '불의 소멸'이란 이미지를 통해 열반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메타포의 일부로서 '집착 번뇌'와 같은 주관적인 의미가 아니라 '연료 땔감'과 같은 객관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초기 빨리 경전에서 종종 나타나는 'up d na-kkhandh '란 표현은 한역 경전에서 주로 '오취온(五取蘊)'으로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up d na'란 용어의 주관적인 의미를 살려서 한문으로 번역된 '취(取)'를 살려서 이 용어를 이해하려고 하거나 한글로 번역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곰브리치는 여기에서 'up d na'는 열반을 포함하는 커다란 비유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으며 '취(取)'로 번역된 것과 같이 어떤 심리적 주관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의미에서 '연료 또는 땔감'이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up d na-kkhandh '는 '연료로서의 다섯 더미(五蘊)'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이 점은 《상윳타니까야(Sa yuttanik ya)》의 <아디따숫타( dittasutta)>에서는 다섯 더미(五蘊)란 연료 땔감으로서 탐냄·혐오·우둔함이란 세 가지 불꽃이 함께 타오르는 것으로 우리 의간의 일상적인 상태를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SN III p.71. }}

다시 말해서, 이들의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을 불환과 아라한으로 보려는 시도는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열반에 관한 언급들의 비유적 성격을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이러한 점이 무시되었을 때 열반이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5. 열반개념과 대기설법

한편 이러한 비유적인 측면만큼이나 초기 경전의 열반개념 파악에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후대에 대기설법(up ya-kau alya)으로 규정된 붓다의 독특한 대화법이다. 붓다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논쟁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론적인 충돌이 일어나면 직접 부딪히기 보다는 대기 설법으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How Buddhism Began, Gombrich, London, 1996, pp. 16-17.}}.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대화에 임하는 붓다의 방식은 거의 동일하다. 스스로를 질문자의 정신적 입장에 가능한 한 가깝게 접근시킨 후 상대의 견해를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토의를 시작해서 각각의 용어들에 새로운 불교적 관점 또는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를 삽입하여 붓다 자신의 결론으로 상대를 유도하는 것이다.

《숫타니파타》에 나타나는 붓다와 마라의 유명한 대화는 이러한 붓다의 대화법을 잘 보여 준다:{{ Sn 33-34: nandati puttehi puttim , iti M ro p pim gomiko gohi tath'eva nandati, upad hi narassa nandan , na hi so nandati yo nir padhi. socati puttehi puttim , iti Bhagav gomiko gohi tath'eva socati, upad hi narassa socan , na hi so socati yo nir padh ti.}}

마라가 말하기를,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동일하게 소 주인들은 소 때문에 기뻐한다. 소유(upadhi)에서 즐거움이 오니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자는 기뻐할 것도 없다". 세존께서 답하기를,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슬퍼하고 동일하게 소 주인은 소 때문에 슬퍼한다. 집착(upadhi)에서 슬픔이 오니 집착이 없는 자는 슬퍼할 것도 없다."

비록 동일한 용어 'upadhi'를 사용하고 있지만, 마라가 사용했을 때는 객관적인 의미로 '부인과 자식', '돈과 황금'과 같은 세속적인 소유물을 지시하는 반면 붓다가 사용했을 때는 주관적으로 그러한 세속적인 소유물들에 집착하는 우리들의 정신상태를 지시하고 있다{{ The Group of Discourses (Suttanip ta) by K.R. Norman, Oxford, 1992, p. 144.}}.

붓다는 동일한 논리를 사용하면서도 객관적인 의미로 사용된 용어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여 상대방을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불교의 교리들이 형성되던 시기에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불교로 전향해 왔다. 이때 일정 부분 상대방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결론을 이끌어냈던 이러한 대화법은 때론 의도적으로 때론 자연적으로 붓다 당시 또는 그 이후의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요소들을 초기 불교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적인 내용에 있어서 탐냄·혐오·우둔함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번뇌의 소멸을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경전에서는 유여열반을 단순히 이러한 세 가지 불꽃(三火)의 소멸로서만 설명되고 있는데, 아마도 붓다의 이러한 대화법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듯하다. 브라만 가장들이 계속 밝혀두고 매일 경배하며 따라서 이 세상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상징하는 세 가지 불, 즉 부모 또는 조상을 상징하는 동쪽의 불( davan ya), 현재 가족들을 상징하는 서쪽의 불(g rhapatya)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성인들을 상징하는 남쪽의 불(dak i gni) 이란 세 가지 브라만의 불에 비유해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How Buddhism Began, Gombrich, London, 1996, p. 66.}}.

브라만의 긍정적이고 삶을 상징하는 불이란 이미지 위에 탐냄·혐오·우둔함이란 불교적 이미지를 더하여, 불을 더 이상 긍정적이고 삶의 상징하는 좋은 것이 아니라 부정적이고 삶에서 가장 멀리 해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어 주로 브라만적인 배경을 가진 청중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풍자로서 사용되는 과정에서 고착되었을 것이다.

이점은 《율장》 <대품>{{ Vin I pp.33-34.}}과 《상윳타니까야》{{ SN IV pp19-20.}}에 고르게 나타나는 <아디따숫타( ditta sutta)>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우리의 모든 인식 현상이 탐냄·혐오·우둔함이라는 세 가지 불과 함께 타오르고 있는데, 해탈의 길은 이 세 가지 불을 멀리하는 것(nibbindati)에서 시작된다고 막 불교로 전향한 자틸라(ja ila)로 불리는 머리를 엉켜 올리고 불을 숭배하는 브라만 수행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슈만이 지적한 것처럼{{ The Historical Buddha by H.W.Schumann (tr. M.O'C.Walshe), London, 1989, p. 87.}}

, 불을 매개로 기존의 의미와 정 반대되는 이미지를 끌어낸 이 가르침이 불을 맹목적으로 숭배해왔던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6. '불의 소멸'과 열반

열반에 대한 서구적·현대적 해석들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점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열반관이 때때로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어떤 학파 또는 어떤 문헌에 나타난 열반관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 부파 또는 문헌의 견해만을 반영하는 열반관을 때때로 초기 불교 내지 불교 전체를 대변하는 열반관으로 제시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역사적인 붓다가 열반의 경지, 즉 '여래(Tath gata)의 사후상태'에 관해 침묵(avykata)한 이래 과연 이것이 어떠한 경지인가를 해명하려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어 왔다. 현대의 불교학자들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의 유명한 아비담마 학자인 랑스 카진(L. Cousins)이 <열반과 아비담?gt;{{ "Nibb na and Abhidhamma" in Buddhist Studies Review 1, 2, London, p. 97.}}란 논문에서 유여열반을 얻은 아라한이 죽음과 함께 마지막 열반에 도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여래의 사후상태'에 관한 해답을 초기경전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슈레이더(F. Otto Schrader){{ "On the problem of nirv a", by F.Otto Schrader, in the Journal of Pali Text Society 1904-1905, London, pp.167-170.}}에 의해 PTS Journal에서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된 후, 최근 타니사로(Thanissaro){{ The Mind Like Fire Unbound, by Bhikkhu Thanissaro, Massachusetts, 1993, pp.15-20.}}, 피터하베(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m: eachings, history and preatices by Peter Harvey, Cambridge, 1990, pp.66-67.}}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한 번씩은 다루어 왔다.

슈레이더의 해석은 초기 및 중기 우파니샤드에 기원{{ SU I 13, VI 19, N si hottarat pin Upani ad 2, Maitr Upani ad VI 34.}}을 둔 '불의 소멸'에 대한 인도적인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도적 관점이란 '소멸된 불꽃은 진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불로 나타나기 이전의 근원적이고 순수하며 보이지 않는 상태의 불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의 소멸'이란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된 무여열반의 경지는 단순한 비존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피터하베는 초기 경전에서 신통력을 가진 비구(iddhimant)가 잘라 놓은 나무에서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D rukkandhasutta (AN III pp.340-341).}},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서구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꺼진 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로인가 가는 것이 아니지만, 고대 인도에서 붓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꺼진 불을 잠재상태의 열기라는 나타나지 않는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불의 소멸이란 비유는 '여래의 사후' 상태가 단순히 비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An Introduction to Buddhism: teachings, history and preatices by Peter Harvey, Cambridge, 1990, pp.66-67.}}

화학이나 물리학 교육을 받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불의 소멸이란 일종의 완전 연소로서 더 이의 존재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고대 붓다의 청중들에게는 불의 소멸이 단지 나타난 상태의 불이 잠재상태의 불로 되돌아갔을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비록 양자가 상이한 자료를 통해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했지만 '꺼진 불은 비존재가 아니라 그 기원 또는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란 관점으로부터 '여래의 사후' 상태는 단순히 비존재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불의 소멸'이란 이미지를 이용하여 열반의 경지를 설명하는 부분은 네 가지 유형의 10가지 또는 14가지 대답되지 않은(avy kata) 질문들에 대한 붓다와 바차고따의 토의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마지마니까야》의 <아지바차고따숫타(Aggivacchagottasutta)>에서는 바차고따의 계속되는 질문들에 대해 '바차여, 나는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na kho aha Vaccha eva di hi, MN I 484. }}라고 간단히 답하고 있던 붓다가 어떤 결심을 한 듯 '여래의 사후' 상태에 대해 계속 물어오는 바차고따에게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반격한다:{{ MN I 487.}}

바차여, 네 앞에 있는 불이 꺼졌다면(nibb yeyya), '내 앞에 있는 불이 꺼졌구나'라고 알 수 있겠느냐? 예 그렇습니다, 고타마여. 그렇다면, 바차여, '네 앞에 있던 불이 꺼졌는데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그 불이 가버렸을까?'라고 다시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고타마여, 대답할 수 없습니다. 목초와 가지를 연료로 불이 타오릅니다. 이들을 다 사용하고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an h ro nibbuto)고 말해집니다. 그와 같다, 바차여. 여래임을 알 수 있는 여래의 물질적인 형태(r pa)는 '뿌리째 뽑혀 뿌리가 잘려나간 야자열매처럼, 포기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며, 미래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상 붓다는 초기경전에서 직접적으로 '여래의 사후' 상태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거나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고 하는 형태로 직접 대답하지는 않고 있다. 사실상 '여래의 사후' 상태에 관한 바차고따의 질문들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죽은 후 도달하는 어떤 상태를 이미 가정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긍정하든, 부정하든, 긍정 부정을 다 하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든,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 자체만으로 기본적으로 우리의 직접지각에 의해 알려지지도 않고 추론을 통해 파악되지도 않는 어떤 초월적인 상태를 전제하면서 대답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난점을 피해가면서 붓다는 바차고따로부터 '연료가 없어서 불이 꺼진다'는 대답을 유도해 내고 이를 통해 열반이란 것은 우리를 계속해서 윤회하는 세계에 머무르게 하는 번뇌 행위 등과 같은 연료가 없어져서 더 이상 이렇게 윤회하는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는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 이렇게 열반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불의 소멸'에 대한 이미지가 앞에서 언급된 슈레이더의 우파니샤드에 근거한 인도적인 관점과 유사한 것일까? 기본적으로 우파니샤드에 나타난 '불의 소멸'의 이미지는 여기에서 보이는 것과 연료가 떨어져서 꺼지는 불의 이미지가 아니라 부싯질을 통해 마찰열과 같은 조건이 주어지면 언제든지 켜질 준비가 되어 있는 불이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연료가 떨어져서 자동적으로 꺼지는 불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바람 등과 같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 꺼지는 불로 마찰열과 같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불을 뜻한다.

아마도 붓다는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불의 소멸'이란 이미지의 배후에 불멸하는 본질적인 특성(li ga)으로 나타난 어떤 아트만( tman)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실상 구체적으로 '네 앞에 있던 불이 꺼졌는데 동 서 남 북 어느 쪽으로 그 불이 가버렸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이러한 가정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외적으로는 동일한 '불의 소멸'이란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지만, 내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슈레이더와 유사한 열반에 대한 해석은 간접적으로 인도 불교의 열반 개념에 대한 총체적인 모습이 인도 정통 사상을 포함한 전체적인 조망이 결여되었을 때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붓다 이후 불교는 외적으로 승가 또는 교단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점차 비대화되고 내적으로 초기 경전의 해석학적인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 교학을 통해 붓다의 교설들이 체계화되면서 많은 교리적 사상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승려들에게는 출가수행의 최종적인 목표로서 제가 신도들에게는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향으로서 소개된 열반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부파불교 시대에 오면서 붓다에 의해 침묵으로 남겨졌던 열반의 상태는 점차 있음과 없음(ontology)이란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떤 형태로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향을 뛰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앙드레 바로(Andr Bareau)의 조사에 의하면{{ Les Sectes Bouddhiques du Petit V hicule, by Andr Bareau, Paris, 1955, p.285.}}

부파불교의 많은 학파들 중에서 경량부가 열반을 없는 것으로 보는 거의 유일한 학파로 소개되고 있다. 이 점은 세친의 《구사론》에 나타나는 경량부와 비바사사의 대론{{ Abhidharmako abh ya ed. P. Pradhan, revised by A. Halder, Patna, 1975 pp.92-94. }}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슈레이더에 의해 제시된 '불의 소멸'에 대한 인도적 관점이 역사적인 붓다가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열반관에 적용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후대의 테라바다와 설일체유부의 열반관에 있어서는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사실상 후대 부파불교의 몇몇 학파들에 의해 자신들의 열반에 대한 관점을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우파니샤드적인 불의 소멸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들의 관점을 보호하려 했었던 흔적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7. 결어: 유여열반의 중요성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열반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이들이 해결하려 했던 문제는 기존의 유여열반 무여열반의 구도 하에서는 초기경전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던 탐냄·혐오· 우둔함의 소멸을 통해 현생에서 직접 얻는(di he v dhamme) 열반이란 것이 무여 열반이란 완전한 열반으로 가는 중간 단계, 다시 말해서 질적으로 낮은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문제의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행위(karman)를 의도(cetan )로 보는 불교의 행위와 과보에 대한 이론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행위가 과보를 낳는다고 하는 자이나는 주장한다. 덥고 습한 인도적 환경에서 농사일을 하는 것에 비유되어 설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이나의 행위(karman)이론에 의하면 번뇌에 물든 우리들의 상태는 뜨거운 햇빛 아래 일하고 있는 농부의 몸에 땀이 나서 흥건히 젖어 있는 상태로 볼 수 을 것이다. 농부의 끈적끈적한 몸에 먼지가 달라붙어 농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미지를 통해 이들은 아마도 어떤 무게를 가진 물질로 규정된 행위가 영혼(j va)에 달라붙어서 원래 상향성을 가진 영혼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고 무겁게 만들어서 아래로 내려가게 한다는 계박의 상태를 설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농부의 어떠한 행동도 먼지가 달라붙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으로 자이나에서는 모든 행위가 과보로 연결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탈을 향해 가는 길이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죽는 것으로, 즉 굶어죽는 것으로 자이나는 언급하는데, 사실상 마하비라가 이렇게 죽으면서 해탈에 이르렀을 것으로 이들은 보고 있다.{{ The Two Traditions of Meditation in Ancient India, by J. Bronkhost, Stuttgart, p.31.}}

다시 말해서 이러한 행위와 과보의 이론 하에서는 당연히 열반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여열반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으며,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란 의미를 가진 아라한이란 용어 또한 바가바트(Bhagavat)와 지나(jina)의 동의어로서 이미 죽어서 해탈에 이른 사람들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붓다는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cetan )를 행위라고 선언한다. 먼저 의도한 후에 몸으로 언어로 마음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라고 《앙굿따라니까야》의 유명한 경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설명하면서 자이나의 행위와 과보의 이론과 불교를 구분 짓고 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의도적인 행위만이 결과를 낳는다고 본다. 따라서 유여열반을 통해 탐냄·혐오·우둔함을 포함한 모든 번뇌의 소멸을 경험하고 자신이 더 이상 번뇌에 물들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아차린 성인에게 무여열반이란 것은 일종의 덤으로서 유여열반의 상태에서 이미 그 실현이 확증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농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자이나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으면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려는 것에 대해 불교는 땀이 나서 흥건히 젖어있는 농부의 몸의 상태를 바싹 마른 상태로 전환하여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말라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먼지가 달라붙지 않듯이, 몸을 끈적끈적하게 만드는 것으로 비유된 모든 번뇌의 소멸되고 더 이상의 번뇌가 생성되지 않는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은 비록 아직까지 이 세계와 접촉하고 있고 이 세계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더 이상의 미래의 과보를 부르는 행위를 짓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행위와 과보의 이론 하에서는 당연히 열반을 판단하는 기준이 유여열반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으며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란 의미의 아라한이란 용어가 붓다를 포함한 모든 깨달음 즉 유여열반을 얻은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비록 불교의 유여열반과 무여열반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기존의 우려와는 달리 무여열반이 일종의 덤으로 초기 경전에서 중요시 되는 유여열반을 통해 자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기본적으로 열반에 대한 연구가 초기 경전에만 치우칠 경우 전체적인 열반 개념의 교리적 발전과 변형이 무시될 수 있고, 아비달마 문헌과 논서류에 치우치는 경우 초기 경전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비유적 설명들과 대기설법으로 나타나는 붓다의 방법론 등이 가지고 있는 숨은 의미가 무시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우파니샤드와 자이나를 포함한 넓은 인도철학적 안목에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 앞에서 살펴본 열반에 대해 서구에서 행해진 새로운 해석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황순일
충북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이며, 동국대학교 및 금강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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