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행원리로서의 지와 관

‘옛날 천태종에서 수행하던 지관(止觀)을 되살려야 한다’는 식자들의 의견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간화선 일변만 고집하는 조계종이나 관음수행을 하는 현재의 천태종을 의식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성립하려면 천태지관이 간화선이나 관음수행과 같은 범주 안에서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별도의 수행방법을 갖는 체계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석존께서 전법 초기에 수행에 대해 설법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잡아함경》의 권17 〈동법경(同法經)〉에 보면 아난과 어느 상좌간의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비구가 만일 빈 들이나 나무 아래, 한적한 방 등에서 사유할 때는 어떤 법으로써 선정사유에 정진해야 합니까?” “빈 들이나 나무 아래, 한적한 방 등에서 사유하는 사람은 응당 두 가지 법으로써 선정사유에 정진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止)와 관(觀)입니다.” 상좌는 이어서 “지와 관을 함께 닦으면 모든 것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아난은 이 대답에 만족치 않고 오백 비구가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들도 지와 관으로써 선정사유해야 하며 이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석가모니에게 가서 같은 질문을 하니 석가모니 역시 한 구절도 가감 없이 앞 사람들과 똑같이 지와 관으로써 선정을 닦아야 한다고 설한다.1) 1) 대정장 2, p.118.

여기서 ‘지와 관 두 가지로써 선정사유에 정진해야 한다.’는 말을 통해 지관과 선정이 양립 불가능한 개념이 아니라 지와 관이라는 방법을 통해 선정을 닦아야 하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관이 선정을 수행하는 ‘원리’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지관이 불교 수행의 원리라고 밝힌 구절은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해심밀경》 《유마경》 《유가사지론》 《구사론》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처음 수행에 들어가는 것은 (지와 관) 두 문을 벗어나지 않는다.”면서 “지와 관을 함께 닦으면 모든 수행이 다 갖추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2) 2) 대정장 44, p.204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수행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선정(參禪)이나 염불이고 지관은 천태의 수행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유는 지관이 선정의 원리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이나 구체적 방법에 대해 설명해 놓은 경론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에 인용한 〈동법경〉에서 아난이 상좌의 대답에 만족치 않고 오백 비구와 석존에게 같은 질문을 거듭한 까닭도 당시에 불교의 수행을 지관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흔치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존이 입적한 지 1천여 년이 흐른 뒤 중국의 천태대사 지의(智확, 538∼597)가 불교의 수행방법을 지관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지는 선정에 들기 위한 수승한 원인이고 관은 지혜를 이루기 위한 바탕”3)이라고 규정하여 선정을 닦아 지혜를 얻는 불교의 수행과정이 지관이라는 원리로써 이루어짐을 밝혔다. 3)<수습지관좌선법요(=소지관)>, 대정장 46, p.462중.

그리고 실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크게 점차지관(漸次止觀)·부정지관(不定止觀)·원돈지관(圓頓止觀)의 세 갈래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가운데 점차지관이란 사선·사무색정·부정관 등 각종 선정을 기초적인 것으로부터 심도가 깊은 것으로 점차 닦아 들어가는 가운데 지관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차지관의 체계에는 각종 경론에 나와 있는 기존의 선정법이 망라되며 그 가운데 행하는 지와 관도 기초적인 것부터 심오한 것까지 다양한 층차를 갖고 있다. 이는 천태대사가 새로운 수행방법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기존 수행법을 지와 관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천태대사의 점차지관에 대한 해설을 통해 지와 관이 불교 수행의 원리로서 작용하는 메커니즘 및 현대의 주요 수행법과 갖는 관계를 고찰, 그 현대적 의의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 이 소론의 목적이다.

2. 지와 관에 대한 천태의 정의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지(止)와 관(觀)은 각각 범어 사마타(s첺matha)와 비파사나(vipas쳙ana?를 한역한 것이다.

원래 사마타는 ‘조용함(tranquillity)’을, 비파사나는 ‘바른 식견(correct insight)’을 기본 의미로 가진 말인데, 수행 용어로서는 대체로 ‘고요히 함(calming)’과 ‘숙고(contemplation)’라고 번역된다. 천태대사는 여기에 조금 더 풍부한 의미를 담아서 정의 내리고 있다.

먼저 지의 의미에 대해 천태대사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지란 제어하는 것이고 또한 그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일어나면 억눌러서 유동하지 못하게 하므로 ‘제어한다(制)’고 하고,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뜻을 고정시키면 온갖 어지러운 생각이 쉬게 되므로 ‘그친다(止)’고 한다.4) 4) 《석선바라밀차제법문(=차제선문)》 권3상, 대정장 46, p.492상.

《차제선문(次第禪門)》의 설명에 따르면 지란 일어나는 마음, 즉 생각을 제어하는 것과 생각을 한데 모아 잡념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란 자신의 뜻대로 일정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불쑥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정에 들고자 마음을 다잡을 때는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뜻하지 않게 불쑥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빨리 알아채서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가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전일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던 온갖 잡념이나 망상 등의 거친 생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는데 이를 그친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제어하여’ 잡념을 ‘그치는’ 작용을 ‘지’라고 한다는 것이 천태대사의 정의이다. 여기서 제어한다는 것은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고 그친다는 것은 일어나는 잡념을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태대사가 《차제선문》보다 20여 년 뒤에 강의한 《마하지관》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형태로 지관에 대한 개념 정의를 내리고 있다.

《차제선문》에서는 지에 대한 정의밖에 없지만 여기에서는 지와 관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 천태대사는 《마하지관》에서, 모든 법이 생기거나 멸함이 없는 반야공(般若空)의 시각으로 본다면 지와 관을 분별할 수 없지만 상대적 시각으로 본다면 지와 관에 각각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5) 그것은 다음과 같다. 5) 《마하지관》 권3상, 대정장 46, p.21중∼하.

▲지의 세 뜻 : ① 그침(息) ② 머뭄(停) ③ 부지에 대한 지(對不止止)

▲관의 세 뜻 : ① 꿰뚫음(貫穿) ② 통달함(觀達) ③ 불관에 대한 관(對不觀觀)

이 가운데 세번째 뜻으로 설해진 ‘부지에 대한 지’와 ‘불관에 대한 관’은 교리적 내용이다. 즉, 무명(無明)을 부지와 불관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비되는 법성(法性)은 지와 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치로 본다면 무명과 법성은 상즉(相卽)한 것으로서 분별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상으로 나타나는 속제(俗諦)의 세계에서는 상대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는 깨달아야 할 이치라고 할 것으로서 수행 입문상에 실효적인 의미는 없다고 하겠다.

지의 뜻 가운데 첫번째 그침이란 “각(覺)과 관(觀), 그리고 온갖 망념과 사(思)·상(想)들이 모두 고요히 쉬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각과 관은 신역으로는 심(尋)과 사(伺)라고 하는데 보통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이라고 풀이되는 부정(不定)심소이다. 전오근(前五根)과 오식(五識)에 의하여 생기는 첫 느낌이 각이고 의근과 의식이 상응하여 이 느낌을 분별하는 것이 관인데 선정의 첫 단계에서 고요한 마음을 방해하는 대표적 작용이다.

망념이란 의지와 관계 없이 집요하게 맴도는 허망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염(念)’이란 《구사론》에서는 대지법, 유식에서는 별경심소로 분류되는 마음작용으로서 염불(念佛), 사념처(四念處) 등의 용례에서 보듯 한 생각을 놓치지 않고 늘 상기하는 것을 말한다. 사와 상은 《구사론》에서는 대지법으로, 유식에서는 변행심소로 분류되는 심소법이므로 분별이 있는 한 반드시 일어나는 마음작용이다.

이들을 종합하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작용과 끝없이 이어지는 망상, 그리고 의식 자체에서 미세하게 이어지는 생각의 작용들을 모두 그치도록 하는 것이 ‘그침’으로서의 지이다. 두번째로 머뭄이란 “마음을 사제(四諦)의 이치에 반연하여 그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도록 묶어둔 채 동요 없이 머무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이 내용은 사제로 대표되는 진리에 정신을 집중하여 생각을 놓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다시 크게 두 가지 단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초입자로서 사제관(四諦觀)을 행할 때 등과 같이 오로지 사제의 이치에만 생각을 고정하여 다른 잡념이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경우와, 단계가 깊어져 사제의 이치를 확연히 보게 될 때 그 진리에 마음을 고정시켜 안주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를 단순화하여 정리하면 지에는 ‘(번뇌가) 그침’과 ‘(진리에) 머뭄’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이 《마하지관》에 나타나는 지의 정의이다.6) 6) 이러한 정의와 관련하여 일본 학자 쿠스야마 ?쥬(楠山春樹)는 “사마타는 지식(止息)을 본래의 뜻으로 하는 것인데 중국불교에서 안지(安止)의 뜻이 부가되었으며 특히 지의에 이르러 안지의 뜻은 지식의 뜻과 함께 명백히 지의 일면을 보이는 것으로 되었다.”고 논하고 있다. 세키구치 신다이(關口眞大) 편, 〈한어(漢語)로서의 지관〉, 《지관의 연구》 (동경:岩波書店, 1975), p.198.

‘그침’은 깨뜨려야 할 대상(所破)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머뭄’은 생각을 제어하는 주체(能止)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앞에서 살펴본 《차제선문》의 정의와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없애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양자 함께 ‘그침’으로서 표현하되 내용적으로는 《차제선문》이 ‘온갖 어지러운 생각’인 데 비해 《마하지관》은 사(思)와 상(想) 같이 미세하게 늘 일어나는 마음작용까지 포괄한다.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에 대한 지의 작용을 《차제선문》에서는 단순히 ‘유동하지 못하게 제어함’이라고 한 데 대해 《마하지관》에서는 ‘사제의 이치에 머뭄’이라고 하여 한층 적극적이고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 문헌 간의 이러한 차이는 천태대사의 사상이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점차지관을 설한 《차제선문》이 수행의 입문에 초점을 맞춘 데 비해 원돈지관이라는 차원 높은 수행을 설한 《마하지관》은 더욱 심도 깊은 지를 설명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지의 정의를 내려보면, 선정에 들기 위해 마음을 제어하되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이어지지 않도록 제어하여 거칠거나 미세한 생각들이 모두 그치도록 하거나 사제의 진리에 생각을 집중시키다가 진리를 보면 거기에 안주하여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관의 세 가지 뜻 가운데 두 가지는 ‘꿰뚫음’과 ‘통달함’이라고 하였다. 꿰뚫는다는 것은 날카로운 지혜로 살펴 번뇌를 뚫어 없앤다는 말이고 통달한다는 것은 관하는 지혜로써 진여(眞如)의 이치를 완전히 깨달아 안다는 뜻이다. 관찰 또는 통찰이라는 기본 의미는 같되, 앞은 깨뜨려야 할 번뇌를 대상으로 한 것이고 뒤는 깨달아야 할 진리를 대상으로 말한 것이다. 앞에서 지의 뜻 가운데 그침이 번뇌를 대상으로 하고 머뭄이 진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수행이란, 첫 단계에서는 그치고 깨뜨려야 할 번뇌를 초점에 두고 지관을 행하는 것이고 다음 단계에서는 깨닫고 안주해야 할 진리를 초점에 두고 지관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종합할 수 있다. 이를 일반적 진행과정으로 말한다면 지를 통해 고요한 마음이 된 뒤에 관을 행하고, 관을 통해 진리를 봄으로써 거기에 안주하는 지를 행하여 체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지는 그 이치에 따라 수연지(隨緣止)·입정지(入定止)·진성지(眞性止)의 세 가지로 논할 수 있다고 한다.7) 7) 《차제선문》 권3상, 대정장 46, p.492상.

수연지란 심소법의 10가지 대지법(유식에서는 5가지 별경심소) 가운데 정(定)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얕은 단계의 지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에 의해 포착되는 어떤 대상(緣)을 만나 그에 대해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잠깐이나마 그 대상에 정지하여 집중해야만 한다. 이때 집중하는 마음작용을 심소론에서는 정(定)이라 하는데 천태대사는 이를 수연지라 하여 지의 한 가지로 본 것이다.

입정지란 선정에 들었을 때 마음이 고요히 유지되는 것을 뜻하므로 앞에서 보았듯이 그침과 머뭄의 지를 말한다. 또 진성지란 마음의 본성은 항상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불생불멸의 본래적 차원에서 조망한 개념이다. 이 가운데 선정 수행에 직접적 의미를 갖는 지는 입정지이고 진성지는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할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3. 지의 종류와 수행 방법

지관이란 불교의 수행 원리로서 마음을 제어하여 번뇌 망상을 그치고 고요한 상태를 이룬 뒤 진리를 관찰하는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설명은 너무 원론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마음을 제어하여 번뇌 망상을 그쳐야 하는데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리하여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는데 그 가운데 입문자들에게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천태대사가 점차지관을 중심으로 설한 《차제선문》에 나오는 계연지(繫緣止)와 제심지(制心止)와 체진지(體眞止)의 삼지(三止)이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마음이 고요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 생활 중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작용을 잘 제어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고요하게 제어하는 실천행위가 제심지이다. 제심지란 ‘마음을 제어하는 지’라는 뜻이니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잡념·번뇌·망상이 떠오르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제어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정진하여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경지가 되면 더 이상 일어나는 생각을 억제할 필요가 없이 다만 그 마음을 응시하기만 하는데 이를 응심지(凝心止)라고 한다. 이 과정을 거쳐서 몸과 마음이 텅 빈 듯이 고요하게 되면서 선정에 들면 입정지(入定止)에 머문다고 한다. 호흡을 중심으로 수(數)-수(隨)-지(止)-관(觀)-환(還)-정(淨)의 여섯 단계로 선정을 닦는 육묘문(六妙門)에서 세번째 단계인 지는 바로 이 제심지를 사용하는 경우라고 한다.8) 8) 《차제선문》 권7, 대정장 46, p.524하.

참선중에 마음이 너무 가라앉거나 들뜰 때 마음을 위로 보내거나 아래로 내려 바로잡는 것도 제심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제어해 보려 하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으로 있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무작정 되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집중하여 생각을 쫓아내도 잠깐의 틈만 있으면 벌써 별별 잡념이 다 일어나는 법이다. 그래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한 군데 대상을 정해 놓고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좋은 방법이다.

이를 계연지(繫緣止)라고 한다. 계연지란 ‘한 대상에 (마음을) 묶어두는 지’라는 의미로서 일정한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마치 까부는 강아지를 나무 기둥에 묶어둔 것과 같이 쉽게 안정시킬 수 있다. 묶어두는 기둥, 즉 집중하는 대상으로는 신체 가운데 정수리,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髮際)·콧마루(鼻柱)·단전·발바닥 등 다섯 군데가 있다.

이들은 모두 몸의 중심이 되는 부위로서 안정적인 곳이기 때문에 집중하기에 좋다. 정수리에 집중하는 것은 선정을 행할 때 마음이 지나치게 가라앉고 어두워 졸음이 쏟아질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오래 집중하면 상기되거나 신통력을 얻은 것처럼 날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가 되는 곳이란 이마의 위 끝, 머리털이 시작하는 경계선 중에서 가운데 부분을 가리킨다. 이곳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부정관 가운데 백골관(白骨觀)을 수행할 때 쓰는 방법으로서 역시 오래 행하면 눈동자가 위로 쏠리거나 온갖 허상이 보이기 쉽다.

콧마루란 양쪽 콧구멍 사이의 기둥을 말한다. 이곳에 마음을 오래 집중하면 숨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무상(無常)을 깨닫기 쉽다. 또한 숙세에 수식관(數息觀)을 닦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방법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쉽게 선정을 일으킬 수 있다. 단전은 세 군데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단전은 배꼽 아래에 있는 하단전이다. 이곳은 기해(氣海), 또는 중궁(中宮)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가 모이는 곳이고 몸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이곳에 집중하면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데 좋고 때로는 몸 속의 부정한 36물이 보이면서 숙세에 익혔던 16특승(特勝) 등의 선정이 일어나기도 한다. 발바닥은 몸 가운데 가장 아래에 있는데, 몸의 기는 마음을 따라 가는 법이므로 이곳에 마음을 집중하면 사대(四大)가 조화롭고 숙세에 익혔던 부정관(不淨觀)이 쉽게 일어난다. 몸 등에 대한 집착을 깨기 위해 그 부정한 실상을 여실히 보는 부정관은 대개 발가락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인도불교에서 선정에 드는 첫 단계로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방법은 수식(數息)이다.

이는 바른 자세로 앉은 뒤 천천히 호흡을 하되 열 번씩 숨을 세는 방법이다. 세는 것은 들숨이나 날숨 어느 것이나 되지만 들숨을 헤아리면 숨이 속으로 수렴되어 쉽게 선정에 들 수 있고 기력도 왕성해지며 욕심이나 분노를 그치게 하는 등 뛰어난 점이 많다. 두 가지 모두 세면 인후에 병이 생기므로 안 된다. 단전호흡 하듯이 미미하고 길게 호흡을 하면서 들숨의 수를 세되 열 번을 채우면 다시 하나부터 시작하여 열을 채우는 방법이 수식이다.

숨을 열까지만 세는 이유는 열하나, 열둘 등 열 이상은 음절이 길어져 그만큼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나드는 숨을 세기 위해서는 자연히 생각을 코끝에 집중하게 되므로 수식은 곧 계연지를 행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수식을 행하면 모든 선의 근본인 사선에 이를 수 있으므로 계연지는 선정에 들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정에 드는 일반적인 과정을 지의 관점에서 보면 계연지 → 응심지 → 입정지(=선정)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도식을 추출할 수 있다. 또한 선정중에 병이 생겼을 때 치료하는 방법 가운데 마음을 병든 부위나 단전, 발바닥에 집중하여 치료하는 것은 이 계연지를 사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차제선문》의 삼지 가운데 세번째인 체진지(體眞止)는 ‘진리를 체득한 지’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眞)란 일체 제법은 생김도 멸함도 없는 공(空)이라는 이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체진지란 바른 지혜로써 일체의 오온, 12처, 18계와 삼독, 98사, 12인연 등이 모두 공임을 체득한 지를 말한다. 이렇듯 일체의 법이 공임을 깨달으면 마음 속의 언어작용, 즉 분별이 다 사라지면서 의지할 것 없고 집착할 것 없어 망상 전도가 다 그치게 된다.

이는 가장 차원이 높은 지이므로 ‘참된 지’, 또는 ‘무지(無止)의 지(止)’라고도 한다. 체진지는 앞의 두 가지 지와 양상이 조금 다르다. 앞의 두 가지는 실천의 방법으로서 구체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체진지는 그렇게 볼 수가 없다. 즉 제법이 공임을 체득하기 위한 방법은 계연지나 제심지를 거쳐 관을 행하는 것이고, 체진지는 그러한 행위를 거쳐 체득되는 고요한 경지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체진지는 행법으로서의 지라기보다는 관의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상태’로서의 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차제선문》에서 수행방법으로서 소개되는 지는 계연지·제심지·체진지의 세 가지이고 일정한 단계가 지나 선정에 들기 직전에 행하는 응심지를 포함하면 네 가지뿐이다. 이 가운데 실제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은 계연지라고 할 수 있고, 이 방법은 또한 가장 초보적인 것이므로 잘 익혀두면 현대 생활에서도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단순하게 나눈다면 지와 관 가운데 선정과 직접적 연관을 갖는 것은 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지의 수행이 모든 선정의 첫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차제선문》의 “일체의 선정 공덕은 마음을 제어하여 산란함을 그치는 것으로 인해 일어난다. …… 지가 첫 관문이라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든가 “모든 선(禪)에서 지는 통문(通門)이 된다.”9)는 등의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9) 이상 두 구절은 《차제선문》 권3상, 대정장 46, p.491하.

자신에게 맞는 선정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수행의 첫 관문은 지가 되어야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선정은 매우 종류가 많고 발현하는 양상도 다양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옛날에는 반드시 스승과 대면하여 자신이 전생에 닦은 인연과 근기에 알맞는 방법으로써 지도받았는데 이렇게 눈 밝은 스승이 없을 때는 먼저 지를 수행하는 것이다.

지를 닦아 마음이 맑고 고요해지면 숙세에 익혔던 선근(善根)이나 악근(惡根)이 발현하게 되는데 이를 보고 선근이면 그대로 이어서 수행하고 악근이면 그것을 먼저 치유하는 선정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차제선문》에는 그러한 선악근이 나타나는 양상과 각각에 대처하는 방법이 설명되고 있다.10) 예를 들어 입정(入定)을 전후하여 홀연히 몸이 흔들리거나 뜨는 느낌 등의 촉감이 일어나면11)사선(四禪)을 닦은 선근이 나타나는 모양이므로 이때는 계속 사선을 수행하도록 하고, 시체가 썩거나 벌레 먹는 모습 등이 보이면 구상(九想)을 수행한 인연이 있는 것이므로 계속 구상을 수행하면 진전이 빠르다는 것이다. 10) 《차제선문》 3상, 대정장 46, pp.494∼498. 11) 선정이 일어날 때 몸에 느껴지는 촉감은 보통 여덟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므로 팔촉이라고 한다. 그것은 흔들림·간지러움·서늘함·따뜻함·가벼움·무거움·껄끄러움·매끄러움 등이다.

반대로 선정에 들 때 자꾸 아름다운 여성(남성)의 모습만 떠올라 생각이 그치지 않는다면 이는 다른 대상에 대한 탐욕심이 악근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를 치유하는 구상을 수행토록 하고, 성내는 마음이 이유도 없이 일어나면 사무량심을 닦도록 한다.

4. 관의 종류와 수행 방법

지가 선정과 직접 관련이 있다면 관은 지혜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의 실천을 통해 고요한 마음상태를 만드는 목적은 바로 선입견이나 편협한 분별 없이 객관적이고 바른 진리를 살피려는 것이다.

《차제선문》에서 소개되는 관은 지에 비해 종류와 행법이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것은 삼지에 대응하는 삼관(三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실관(實觀)과 득해관(得解觀)과 혜행관(慧行觀)이다. 실관이란 현상으로 나타난 법을, 드러나는 사실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사물들은 있는 사실 그대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아견(我見) 등으로 마음이 덮여 자신만의 기호와 시각으로 굴절해서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선정에 들어 심안으로 관찰한다면 아무 방해 없이 여실하게 볼 수 있다.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만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미경이나 보청기를 통해야만 지각할 수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식을 통해 정(定)에 든 뒤에 심안으로 드나드는 호흡을 관찰하면 그것은 마치 허공을 다니는 바람처럼 몸 안팎을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피부·근육·뼈·살 등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서른여섯 가지는 마치 양파처럼 알맹이가 없으며 모두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12) 이처럼 1천5백 년 전에 기록해 놓은 우리 몸의 구조가 현대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알게 된 것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에서 선정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또 팔배사(八背捨) 가운데 백골관을 행할 때 볼 수 있는 우리 몸의 뼈 구조와 세포조직도 현대 의학에 의해 밝혀진 모습 그대로인 것으로서 역시 실관이다. 12) 《차제선문》 권7, 대정장 46, 524하.

이 실관이 사용되는 선정으로는 육묘문이나 16특승, 통명관 등이 있는데 이들 선정에서는 실관을 먼저 성취한 뒤 혜행관(慧行觀)을 행하여 참된 무루(無漏)의 지혜를 얻는다. 두번째로 득해관(得解觀)이란 ‘해(解)를 얻는 관’이라는 의미 그대로 감춰졌던 사물의 한 측면이나 이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본래 ‘해’란 ‘이론으로 이해한 지식’ 정도의 의미로서 불도 수행을 신(信)-해(解)-행(行)-증(證)의 4단계로 나눌 때의 해이다.

천태대사는 “미리 (아는) 지혜가 앎(解)이다. 알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끝내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한다.”13)고 하여 해를 행에 앞서는 ‘전지(前智)’라고 표현하였다. 행을 통해 얻는 앎의 원천은 혜(慧)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해는 이와는 조금 달리 ‘불완전한 앎’이나 ‘방편적 이해’에 가까운 의미이다. 13) 《마하지관》 3하, 대정장 46, p.30중.

예를 들어 부정관의 일종인 구상(九想)을 행할 때 보이는, 시체가 썩어 검푸르게 변하고 벌레가 뜯어먹는 모습 등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는 하나 선정을 행하는 지금 현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은 아니다. 또한 팔배사 가운데 초배사(初背捨)에서 발가락을 세심히 보다가 그것이 점차 커지는 것이나 대부정관(大不淨觀)에서 이 세상이 온통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것을 보는 것도 역시 현실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정에 든 상태에서 이 세계가 온통 시체로 가득 차 썩는 모습을 보는 팔승처(八勝處)의 두번째 단계를 설명하는 구절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제2승처)는 해(解)를 얻기 위한 도(道)인 것으로서 마음의 힘으로 전변시킨 것이지 실관이 아니다. 왜인가? 일체는 실로 깨끗한 것이 아닌데도 깨끗한 것으로 오해하는 힘 때문에 보는 것마다 깨끗하다고 여겨 애착심을 낸다.

이렇게 집착하는 번뇌를 깨기 위하여 일체는 다 부정한 것이 아니지만 지금 부정관의 지혜력으로 모두 부정하다고 보는 것이다.14) 다시 말하면 전도된 마음 때문에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여겨서 애착하는 미혹을 깨뜨리기 위해 깨끗한 것까지 모두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득해관이라는 설명이다. 즉 사물의 한 측면만 보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그 반대의 측면을 과장되게 봄으로써 집착을 깨는 방법이다. 14) 《차제선문》 10, 대정장 46, p.544하.

이렇게 보는 것은 선정에서 생기는 지혜의 힘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전도된 망상과는 다르다. 이처럼 득해관은 실관과 달리 가상의 모습을 보는 것이므로 가상관(假想觀)이라고도 한다. 가상으로 과장되게 보는만큼 사실 그대로 보는 것보다 그 반대되는 마음을 끊는 힘이 강하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구상·팔념·십상·팔배사·팔승처·십일체처 등 출세간선(出世間禪)들은 대개 이 득해관을 사용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혜행관(慧行觀)이란 ‘지혜가 작용하는 관’이라는 의미로서, 앞의 ‘해’가 경론이나 가상관을 통해 얻어지는 불완전한 앎이라고 한다면 ‘혜’는 마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참되고 완전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지혜로써 바라본다면 모든 사물은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다.

깨끗하다고 집착하는 것도 전도된 번뇌 망상이고 부정관을 행하여 더럽다고 알게 되는 것도 일면만 보는 것으로서 치우침 없는 완전한 지혜가 아니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인과 연이 모여 잠깐 동안 하나의 모습을 이룬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본 모습을 본다면 불구부정이고 불생불멸이다. 이러한 진리를 바탕으로 사물을 관찰하여 무상이고 공인 본 모습을 여실하게 보는 것이 바로 혜행관이다.

천태대사에 의하면 선정을 구분할 때 세간선과 출세간선 등이 있고 출세간선은 다시 행행(行行)과 혜행(慧行)으로 나누는데 혜행으로 분류되는 사제관(四諦觀), 십이인연관(十二因緣觀) 등은 모두 혜행관에 속한다. 이 밖에도 선정 중에 이루어지는 관이 다양하게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초선에서 제2선으로, 제2선에서 제3선으로, 내지는 무소유처정에서 비상비비상처정 등으로 단계가 올라갈 때 각기 중간선(中間禪)에서 행하는 육행관(六行觀)과 팔성종관(八聖種觀)이 있다.

육행관은 선정의 단계를 심화시키기 위해 아랫 단계가 괴롭고, 거칠고, 장애가 되며 윗 단계가 수승하고, 묘하고, 벗어나는 것이라고 상기하여 윗 단계로 오르려는 것으로서 일반 범부들이 행하는 방법이다. 팔성종관이란 무상(無常)을 지식으로나마 이해하고 있는 불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는 자신이 증득한 일정 단계의 선정이 병이나 악창·부스럼·가시와 같고 무상·고·공·무아임을 관하여 다음 단계로 심화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서 앞의 네 가지는 사관(事觀)이라 하고 뒤의 네 가지는 이관(理觀)이라고 한다. 이들 두 가지 관법은 아랫 단계의 선정보다는 윗 단계의 선정이 더 훌륭한 것이라는 사전 지식(解)을 갖고 이를 잊지 않고 상기하는 것이므로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염(念)’에 가깝다.

5. 천태지관의 현대적 의의:지관과 여러 수행법과의 관계

지금까지 지와 관의 정의와 종류, 그리고 그 각각의 수행방법을 살펴보았는데,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이들이 복합적으로, 또한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계연지와 실관이 함께 행해지고 이어서 득해관이나 혜행관이 행해지거나 실관을 통해 입정지에 들어서 득해관을 행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지와 관을 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관을 행한다고 말하는 것과 선정을 닦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보통 선정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갖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앞에서 계연지 또는 제심지를 행하다가 일정하게 마음이 안정되면 응심지를 거쳐 도달되는 상태를 입정지라고 한다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입정지를 보통은 정(定) 또는 삼매(三昧)라고 부른다. 정과 삼매는 실제 용례를 검토해 보면 얕고 깊다는 일반적 차이는 있지만 다같이 범어 사마디(sama?hi)를 원어로 하는 번역어와 음사어로서 마음이 고도로 집중되어 일체의 거친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에 든 것을 ‘정(삼매)에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선정에 들었다’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정이란 좁은 의미의 선정으로서 엄밀하게는 정에 들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정을 닦는다(수행한다)’고 할 때의 선정이라는 말은 이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를 담는다. 지관을 행하여 마음을 집중하다 보면 몸에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지신법(持身法)이라 하여 몸이 편안해지면서 가부좌한 다리나 어깨, 허리 등의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지가 있고 조금 지나면 팔촉(八觸)이라 하여 몸이 흔들리거나, 간지러운 것 등 여덟 가지로 대표되는 몸의 촉감이 일어나기도 한다. 또 초선에 들고부터는 온몸에 퍼지는 기쁨(喜)과 즐거움(樂) 등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기쁨이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에, 즐거움이란 그 오아시스의 물을 마신 것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평상에는 느끼기 힘든 이런 선정락(禪定樂) 때문에 선정에 탐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렇게 지관을 행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을 포함하여 처음 자세를 잡고 숨을 고르는 것부터 깊은 삼매에 들어 관을 행하는 것까지 전체의 행법을 선정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용법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한다면, 선정이라고 통칭되는 불교의 수행이란 지와 관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연지나 제심지, 실관과 득해관 등을 적절히 행하여 나타나는 고요한 경지를 입정지라고 하는데 보통은 이를 ‘(선)정에 들었다’거나 ‘삼매에 들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과정 전체를 또한 넓은 의미로서 선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렇듯 지와 관으로써 불교수행의 원리를 밝히면 현재 불교의 각 종파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수행법들도 지관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계종이나 태고종에서 권장하는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은 오로지 화두에 마음을 매어두는 것이므로 계연지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계연지는 “마음을 한 대상에 묶어두는 지”라고 정의하고 그 대상으로서 신체의 다섯 부위를 들었다. 그러므로 이 다섯 부위가 아니고 정신적 대상인 화두에 묶어두는 간화선은 계연지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체의 한 부위에 마음을 매어두는 행위란 실제로는 그 신체부위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며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콧마루나 단전이라고 하는 시각적 대상(色境)을 떠올려 그것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나 화두라고 하는 정신적 대상(法境)을 떠올려 그것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은 원리상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또한 천태종의 관음수행과 진각종의 진언수행도 계연지라고 할 수 있다.

관음수행이란 보살의 모습이나 공덕을 떠올리며 의식을 작용시키는 염불과 달리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는 자신의 소리(聲境)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일체의 다른 생각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육자진언을 구송하는 진각종의 수행법도 오로지 육자진언만 외우는 무상삼밀(無相三密)의 경우는 수행원리가 천태종의 관음수행과 똑같다.

요컨대 간화선은 화두에, 관음수행은 보살명호에, 진언수행은 육자진언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일체의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계연지를 행하는 수행인 것이다.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간화선의 경우 집중이 강해지도록 하기 위해 간절한 의심(疑團)이 일도록 하고, 관음수행이나 진언수행은 불보살의 가피력에 일정 정도 의지하고자 하는 점일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 불교의 4대 종단에서 주로 행하는 참선법은 그 원리가 계연지로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새롭게 남방불교에서 수입된 비파사나는 말 그대로 관법(觀法)이다. 앞서 관이란 범어 비파사나를 번역한 것이라 하였지만 여기서 말하는 비파사나는 이보다 좁은 개념으로서 몸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살피는 것이 기초적 요령이다.

이 방법은 초기불교에서 행해진 37조도품 가운데 사념처(四念處)의 한 가지인 신념처(身念處)와 같은 것으로서 삼관으로 분류하면 실관을 행하는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삼매에 들어 몸 속 세포까지 보는 실관보다는 얕은 단계이지만 다른 주관의 개입 없이 일어나는 사실 그대로를 놓치지 않고 관찰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원리는 똑같은 것이다.

불교 이외의 각종 명상 수행들도 대개 계연지나 제심지, 또는 실관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불교의 수행으로서 아이덴티티를 갖는 관건은 혜행관과 체진지의 적용 여부, 즉 사제·십이인연의 이치를 진리로서 인정하는가, 그리하여 이 이치를 관찰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천태지관이라 하면 종래 삼지·삼관과 이를 한 마음 중에 닦는 일심삼관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삼지란 체진지·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이고 삼관이란 공관(空觀)·가관(假觀)·중관(中觀)이다. 체진지와 공관은 공을 체득하는 것이고 방편수연지와 가관은 가제(假諦), 즉 언어·천문지리·의술 등 중생교화를 위한 방편을 익히는 것이다. 식이변분별지와 중관은 삼제가 원융한 제법실상을 여실히 깨달아 일체종지를 얻는 것인데 이들을 한 마음에서 한 번에 증득하는 것이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는 것이 이 설의 요지이다.

이는 물론 심오하고 매력적이긴 하나 기초적으로 선정에 드는 방법조차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는 오히려 수행에 대해 경원심만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차제선문》에서 설명된 삼지삼관은 수행의 입문자들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러한 원리를 주축으로 화두를 들거나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우거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방법 등을 통하면 누구나 깊은 삼매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현대생활의 여러 어려움을 불교 수행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수행 이론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 까닭은 조계종이나 태고종 등 전통종단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가풍 때문에 이론 방면이 미약하고, 천태종이나 진각종 등 새롭게 창건된 종단은 아직 수행 이론이 체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 주요 종단에서 행해지는 수행법이 모두 지와 관을 원리로 삼고 있음을 안다면 그 수행 이론 또한 천태지관에 의지할 수 있다. 다만 지금처럼 원돈지관에만 주목하지 않고 점차지관에 눈을 돌린다면 천태의 지관이론은 현대 불교의 각종 수행 원리와 방법론에 대한 훌륭한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 <끝>

최기표
숭실대학교 철학과 및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철학박사. 논문으로 〈천태 ‘일념삼천설’의 연구〉 〈천태의 사선론〉 〈사무량심의 수행체계〉 〈천태 점차지관의 수행체계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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