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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왜 아라한이라 불리지 않았는가
엘리슨 핀들리 / 안옥선 옮김
[5호] 2000년 12월 10일 (일) 엘리슨 핀들리 안옥선 옮김

옮긴이 서문 - 논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왜 여성은 ‘아라한’이라 불리지 않았는가”는 엘리슨(Ellison Banks Findly)의 논문 〈Women and the Arahant Issue in Early Pali Literature〉(Journal of Feminist Studies in Religion 15, 1999)을 완역한 것이다. 논문의 핵심 주제를 살리는 의미에서 위와 같이 제목을 변경하였다. 원제는 나타난 바와 같이 “초기 팔리문헌에 나타난 여성과 아라한 문제”이다. 논문의 구조와 내용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논문의 핵심을 소개하고자 한다.

초기불교 문헌 속에는 많은 여성 아라한(arahant, arahat, arhat)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아라한이 된 비구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당연히 아라한이 된 비구니들에게도 ‘아라한’이라는 호칭이 수여되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남성 아라한과 마찬가지로 여성 아라한도 ‘아라한 아무개’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슨의 조사에 의하면 초기 팔리문헌에서 여성 아라한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에서일까? 이 논문에서 엘리슨이 탐구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초기 팔리문헌에서 아라한이 된 여성 출가자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왜 ‘아라한’이라는 경칭이 부여되지 않았느냐’라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그녀는 베다 시대부터 지속되어 온 사회적 관습에서 찾고 있다.

즉 브라흐만의 제의식 전통에서 여성은 여성 고유의 신체적 속성으로 인하여 불경한 존재로 간주되는 측면이 있었는데 이러한 전통이 초기불교 전통에서도 거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엘리슨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의 신체적 속성으로 인하여 여성을 불경한 존재로 보는 브라흐만적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불교도들은 비구니들에게 보시하는 것보다도 비구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보다 큰 공덕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보시하는 데 있어서 당연히 비구승가를 더 나은 복전(福田)으로 생각하여 비구들에 대한 보시를 더 선호하였다. 불교 승가는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도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교도들의 이러한 비구(승가) 선호를 수용하였다. 비록 경전은 비구니가 보시 받는 과정에서 차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교설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보시 받는 순서를 정하는 데 있어서 “비구를 우선하라.”고 말하고 있다. 엘리슨에 의하면 깨달음을 성취한 여성 아라한들에게 ‘아라한’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지 않는 것은 이상과 같은 사회분위기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아라한’이라는 말이 불교의 모든 교설을 관통하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여성에게도 열려 있는 용어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여성 아라한들이 존재했음에도 사회적 분위기 내지는 기준 때문에 여성에게는 ‘아라한’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다. 환언하면 팔리문헌은 원칙적으로 여성이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현실에서 여성 아라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만 ‘아라한’이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전통에 의해서 제한을 두고 있는 것이다. ‘아라한’이라는 말은 남녀 모두에게 열려 있는 ‘해탈학적(soteriological)’ 용어이지만 동시에 그 구체적 적용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제한을 받은 ‘사회적(social)’ 용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라한’이라는 경칭은 정신 상태의 인정을 위해 주어진 말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 환경의 역학과 관계된 말이다. 이상과 같은 논지를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엘리슨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검토하고 있다. 즉 ‘아라한’이라는 말의 의미와 어원, 아라한 상태의 특징, 깨달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비구와 비구니의 차이 및 그 이유, 깨달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비구와 비구니의 일치성, ‘테라(thera, 장로)’와 ‘테리(ther沖, 장로니)’라는 말의 의미와 사용례, ‘아라한’이라는 말의 브라흐만적 전통에서의 용례와 의미, 그리고 ‘보시(da?a)’와 ‘아라한’이라는 말의 관계 및 이에 근거한 ‘보시하는 자’와 ‘보시 받는 자’의 역학관계 등이다. (안옥선)

1. ‘아라한’이라는 말의 의미

고대 인도의 여성들이 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고 탐구할 기회를 가졌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알파라 아트레이(Apa?a A?reyl?, 고샤 카크쉬바티(Ghos.a ka?s.l?atl? 그리고 로파무드라(Lopa mudra?는 《리그 베다》 찬가의 전체 혹은 그 일부의 저자라고 전해진다. 마이트레이(Maitreyl?와 가르기(Ga?gl?와 같은 《우파니샤드》의 여성들은 철학적 문제들에 대하여 능란했을 뿐만 아니라 공적인 토론에 있어서도 논쟁 상대에 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였다.

쉬라우타(s쳑auta)로 알려진 공공의 엄숙한 제의제도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남성에게 풍성한 정신개발의 길을 밝히고 있었는데 이는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평등주의적 정서에 의해서 여성에게도 종교적 지위을 허용했던 자이나교와 초기불교의 전통 이외의 그 어느 전통에서도 여성에 대하여 이러한 정신개발을 제도화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것은 초기불교도들이 성별문제에 있어서 진보적 주창자였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 전통 안에서 최고의 종교적 지위, 즉 ‘아라한(arahant)’의 지위에 대하여 면밀히 검토해 보면 우리는 문제가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리어 불교경전에서 ‘아라한’이라는 용어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모든 유정(有情)의 생명에게 있어서 종교적 탐구의 완성, 명상적 평정의 획득, 그리고 완전함의 표준들을 달성하는 것을 나타낸다.

‘아라한’이라는 말은 기술적으로 서술된 일련의 경험을 거쳐서 공동체 내에서 모범적인 윤리적 행동을 드러낸 사람에게 부여된 규범적 용어로서 전통 내에서 일관적이면서도 분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싯달타 고타마(Siddhattha Gotama), 즉 붓다(the Buddha)는 최고의 아라한이므로 모든 경전을 통해서 ‘아라한’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최초로 닙바나(nibba?a, 깨달음)를 경험한 사람이었다는 점, 그리고 제도적인 지도나 인도를 받지 않고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다른 아라한들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한’이라는 말은 붓다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는 경칭이 아니었으며 불교의 목표에 참으로 도달한 자라면 누구에게나 부여된 경칭이었다. ‘아라한’이라는 말은 어근 ‘arh’로부터 파생된 말로서 《리그 베다》와 그 후기문헌에서 ‘할 만하다(deserve)’ ‘받을 만하다(merit)’ ‘존경할 만하다(be worthy of)’ ‘하지 않으면 안 된다(be obliged)’ 혹은 ‘할 수 있다(be able to)’ 등을 의미한다. 이름이나 경칭으로서의 ‘아라한’은 《샤타파타 브라흐마나(S첺tapatha Bra?man.a)》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팔리문헌에서 ‘아라한 상태(arahantship)’는 학습기, 즉 범행기(brahmacariya)의 마지막 단계이며 네 가지 정신적 과위(phala) 중에서 마지막이다. 아라한 상태는 여러 가지 징표들3)을 갖는다고 서술되고 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징표는 네 가지 아사바(a?ava), 즉 흐름들의 소멸이다.

최종적인 지혜는 완전한 행동 속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아라한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행동을 드러내며, 자연적으로 폭력·탐욕·감각적 쾌락·어리석음·음주 등을 삼가며, 힘들여 애쓰지 않고도 상가(san?ha)의 모든 규칙을 지킨다.또한 아라한은 중력과 같은 자연의 법칙을 극복하는 신통력(iddhi)을 드러내는 자라고 특징지워질 수 있다.

2. 여성과 아라한 상태

불교에서 ‘아라한’이라는 말은 완전(perfection)에 대한 이론적 규범인데 경전에서는 개인이 달성한 상태를 지칭하여 특정 개인에게 적용하는 경칭이기도 하다.

이 경칭을 가진 사람의 수는 매우 많으며 ‘아무개 씨는 아라한이다’라는 지정은 보통 개별 대화의 말미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초기 경전에서 아라한이라는 말은 모두 남성에게 사용되고 있다.

여성 사문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화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비나야(Vinaya)나 니카야(Nika?a)에서 ‘아라한’이라는 말이 특정의 여성에게 분명하게 적용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팔리경전은 이론적으로는 여성이 아라한이 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최초의 여성 사문에 대한 출라박가(Cullavagga)의 이야기에서 붓다 자신은 여성이 완전한 아라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불멸 후 붓다의 시자였던 아난다(A?anda)는 심문을 받자 여성 출가에 대한 자신의 역할이 잘못되었다고 고백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계속하여 주장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성이 아라한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의 정당성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경전의 다른 부분에서 아난다는 비구나 비구니가 자신이 아라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을 선포할 수 있는 네 가지 요소를 거론한다.

《앙굿타라 니카야(An?uttara Nika?a)》에서의 비구(bhikkhu)와 비구니(bhikkhunl?에 대한 규범은 초기부터 여성이 아라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지하지만 혹자는 ‘아난다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가르침의 권위에 대하여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전의 어떤 부분은 아라한 남성이 ‘정각 붓다(Samm sambuddha)’가 될 수 있을지라도 아라한 여성(itthi, itthl?은 그렇지 못한다고 반복하여 말한다.

여기에는 정각 붓다들의 역사적 붓다와의 관계 혹은 여성 아라한들에 대한 정각붓다 상태의 불허 등과 같은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는데, 논의의 핵심은 ‘여성 아라한들(itthl araham)이 정신적 논의의 범주 안에 있다’는 바로 이 전제이다. 아라한 상태가 여성에게 분명하게 열려 있다는 입장은 《디가 니카야(Dl?ha Nika?a)》의 한 부분에서 확인되는데 여기에서 붓다는 아무도 아라한 상태를 성취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서 아라한 상태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데에 대한 부정적인 증거가 있다. 율장의 어떤 부분에 의하면 붓다가 승려들에게 인사를 허락한 사람의 범주 속에 아라한이 속하지만 여성(ma?uga?a)은 이 반대의 범주, 즉 붓다가 승려들에게 인사를 금지시킨 사람의 범주에 속한다.

게다가 경전은 아라한이라는 말이 여성형임을 보증하고 있지도 않다. 팔리어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경칭이나 지칭들에 대하여 두 개의 성별 선택이 존재하는데 예컨대 assaman.a/assaman.l?남녀 비사문), upajjha?a/upajjha?남녀 은사), upa?aka/upa?ika?남녀 재가자), pavattin/ pavattinl?남녀 승려지원자), bra?man.a/bra?man.l?남녀 브라만), bhikkhu/ bhikkhunl?남녀 승려), saman.a/saman.l?남녀 사문), sa?an.era/sa?an.erl (남녀 견습승) sikkhama?a/sikkhama?a?남녀 수습승). 반하여 ‘아라한’이라는 말에 상응하는 여성형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이러한 점들은 초기 팔리경전의 규범이 여성도 아라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 전통은 실제로는 여성에게 아라한 상태를 개별적으로 적용하여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부 학자들은 팔리불교에서 아라한 상태가 여성에게 열려 있었으며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아라한이 되었다(추정컨대, ‘아라한’으로 불리웠다)는 것을 상투적으로 인정한다. 폴리(Caroline Foley), 호너(I. B. Horner), 팰크(Nancy Auer Falk), 위치(Kajiyama Yichi), 스폰버그(Alan Sponberg) 그리고 월터스(Jonathan Walters)와 같은 저자들은 자신들이 접한 초기문헌 속에서 많은 여성들이 아라한 상태라는 말로써 논의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기원전 6세기말에서 기원전 3세기말로 추정되는 《테라가타(Theraga?ha? 장로게)》와 《테리가타(Ther沖ga?ha? 장로니게)》라는 시편이 제공하는 가능성일 것이다.

이들 시편은 각각 초기 상가의 장로들과 장로니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다. 시들은 전통적으로 특정의 개인에 의해서 지어졌거나 암송되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시들은 완성 성취의 추구에 관한 서술일 뿐만 아니라 완성 성취의 경험에 대한 증언이라고 생각된다.

《테리가타》의 경우에 시들은 여성 출가자들을 위한 ‘승리의 노래들’이라고 말해지며또한 《테리가타》는 시편으로서는 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 신비문학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테리가타》가 여성의 정신적 완성에 대한 표현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시편이 여성들의 아라한 상태를 반영한다는 주장은 표제의 ‘테리(therl? 장로니)’라는 말이 실제 지칭하고 있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넘어선 것이다.

호너, 말라라세케라(G.P. Malala-sekera), 샤르마(Arvind Sharma), 팰크, 캐츠(Nathan Katz), 윌리스(Janice Willis), 랭(Karen Christina Lang), 무르코트(Susan Murcott) 그리고 트래이노(Kavin Trainor)는 《테리가타》의 시들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자료들이 깨달음을 이룬 여성들의 경험을 표현하고 그들을 ‘테리’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초기 전통에서 여성들은 ‘아라한’이라는 경칭과 필연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저자들은 《테리가타》의 주석서인 《아파다나(Apada?a)》와 《파라마타디파니(Para-matthadl?anl?》와 같은 후기문헌에 대한 자신들의 신뢰를 분명히 하면서, 아라한의 속성을 찾아내는 데 있어 초기 경전에서 ‘테리’(혹은 테라)가 아라한을 의미한다고 쉽게 추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초기문헌 자체에 의해서도 입증되지 않는 결론일 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비약이다. ‘테리’라는 말은 초기 팔리문헌에서 독립적으로 기록된 용례는 없지만 이 말의 남성형은 많이 거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말의 남성형과 여성형이 일반적으로는 대체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테라’라는 말에 대하여 검토하는 것은 ‘테리’를 아라한이라는 말의 사용과 관련지어서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상가라는 공동체 내에서 비구는 견습비구(nava bhikkhu), 중간비구(majjhima bhikkhu), 장로비구(thera bhikkhu)의 세 등급의 비구 중에서 한 등급에 속하게 된다.

장로비구는 아사바의 지멸과 같은 아라한 상태의 모든 기술적 징표들을 거쳐서 깨달음에 대한 법의 모든 규정들을 달성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경전의 다른 부분들과 날카롭게 대조가 된다. 경전의 다른 부분에 의하면 ‘테라(thera, 장로)’가 아직도 중간비구에 속하고 아직 수습기의 계(sikkha?ada)를 마치지 못했거나 심지어는 수행이 더 요구되는――즉 거기에 이르지 못한(sikkha?a?a)――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경전의 또 다른 부분은 테라가 부덕하게 혼란에 빠질 수도 있으며 규범적 법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고 하고 있다

장로의 정신상태에 대한 논의보다도 더 중요한 점은 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것이다. ‘테라’라는 말은 정신의 향상 정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지만 평범하게는 제도적 역할을 지칭하여 상가 내에서의 위치와 상가에 대한 지도력을 설명해준다. 예컨대 한정어 ‘san?hapitar(종단의 아버지)’와 ‘san?haparin.a?aka(종단의 지도자)’는 각각 가르침과 규율의 문제에 대하여 세번째와 네번째의 권위를 가진 장로집단과 한 명의 장로라고 분명하게 풀이된다.

상가의 아버지나 지도자는 우선 법랍, 즉 종단에서 보낸 시간의 길이에 따라 엄격하게 결정되고 다음으로는 경험에 있어서 결정적인 지혜, 즉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나이에 도달했느냐에 근거하여 결정된다. ‘테라’가 주로 상가조직에 속하는 경칭이라는 것은 장로들이 상가의 업무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명시한다. 즉 테라들은 바루와 승복의 배당을 총괄하고 그것들을 적합하게 다루는 것을 판정한다. 또한 그들은 수계에 관여하며 보통 수계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또한 그들은 전통의 수호자들로서 흔히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법적 문제을 해결하고 이에 대한 판결을 내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테라들이 정신적 삶에 있어서 동료들이 그들을 존중하고 경애하며 존경하는 방법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로 나이와 판단에 관한 제도적 용어로서 ‘테라’는 모범적인 정신적 향상과 관련되어 있거나 보다 적합하게는 최종적 정신적 유덕함(worthiness)과 관계되어 있는 말인 ‘아라한’과 구별된다. 즉 ‘테라’가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용어라면 ‘아라한’은 ‘해탈학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는 아마도 ‘테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비구니 상가의 장로니는 법랍이 높은 사람이며 경험도 풍부한 사람으로서 사원 동료의 경애와 존경을 받았다. 정신 향상의 정도에 관한 ‘테라’라는 말의 쓰임새와 나란히 놓고 볼 때 ‘테리’라는 말의 쓰임새는 폭넓으며 ‘아라한’이라는 말과 반드시 꼭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테리가타》의 자료에 대하여 이상과 같은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문헌의 주어진 제목으로 보건대 《테리가타》의 시들은 비구니 승가의 연장자들에 의한 것이며 그것들 중 일부는 그들의 깨달음 체험에 대한 기술이거나 표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전의 내적 배열의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시는 그 의미에 있어서 《테라가타》의 남성의 시에 상응한다고 생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테라가타》에서의 일부 남성들은 아라한의 상태와 일치하므로 우리는 두 문헌을 비교해 봄으로써 여성들의 깨달음 체험의 깊이와 그 완전함에 근거하여 ‘아라한’이라는 경칭이 최소한 일부 여성에게 동등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여성의 깨달음:《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의 증거

《테라가타》와 《테리가타》, 이 두 문헌의 활용에는 주의가 요망된다.

노만(K. R. Norman)과 폴리는 이 두 문헌에 대한 자신들의 번역본 서문에서 시 각각의 저자가 다양하다는 것을 장황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어떤 시들은 문헌에서 명명된 사람에 의해 지어지고 송출된 것으로 보이며, 다른 시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지어지고 송출되었다. 또 다른 시들은 느슨하게 전통에 속하여 남녀 모두에 의해서 송출되었으며, 그리고 또 다른 시들은 질문을 제기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붓다가 송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들이 여성의 경험에 귀인되는 것인지 또는 남성의 경험에 귀인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리는 것은 늘 쉽지 않다. 이상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정신적 삶을 발전시키는 것, 즉 (재가에서 출가에로의―옮긴이의 첨언임) 전환 경험으로부터 깨달음의 전환 경험에 이르기까지의 증거에 대한 분석은 성별에 근거한 다양성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이 깨달음이라는 경험을 행해 감에 따라 전환의 국면에서 언표된 다양성은 감소된다. 트레이너가 주목하고 있듯이 출가의 삶을 위해 떠난 개인들 각자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독특했으므로 이것이 그들의 경험과 경험의 표현 속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고대 인도에서 여성과 남성의 삶을 특징 지웠던 매우 상이한 사회적 조건들, 그리고 개인적 결단에 의해서 세계를 떠나게끔 했던 동기와 그 구체적 환경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개별 출가자들의 성별에 따라 형성된 것이었다.

예컨대 《테라가타》에서 남성의 시들은 보통 제3자적이고 중성적인 목소리의 전환 경험을 보여주는데, 그 목소리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결여하고 있고 세상의 감각적 쾌락으로부터의 떠남에 기초해 있다. 또 그것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명시하고 있지도 않다.

어떤 남성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들으며, 다른 남성들은 자신들의 현재 수행이 그릇되게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또 다른 이들은 무상한 몸에 대하여 새로운 경험적 견해를 취한다. 남성의 경험은 싯다르타의 첫번째 깨우침과 출가를 모델로 하여 서술되는데 그것은 빈번히 존재의 무상성에 대한 일반적인 발견으로서 그리고 현존하는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한 선견(善見)으로서 서술된다.

이와는 반대로 출가로 이끄는 여성의 경험에 대한 논의는 매우 개인적이며 흔히 자전적인 소사(小事)로 가득 차 있다. 《테리가타》의 구절들은 매우 빈번히 단일한 주제, 즉 개인의 신체적 아름다움의 상실이나 가까운 친족――특히 자식――상실의 아픈 체험에 초점이 맞추어진 깨달음의 과정에 대한 일인칭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부심, 자신의 외모와 생김새에 대한 도취, 그리고 자신의 매력을 타인과 비교했을 때의 오만이 《테리가타》 전권을 통하여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매력이 사라질 때 침침해진 눈, 누런 이빨, 주름진 피부에 대한 공포가 깊어져 화자는 치장이라는 일상의 행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집착에 대하여 주의하게 된다. 신체의 아름다움의 사라짐에 대한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몸에 대하여 필연적이면서도 강렬한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 위대한 집중적 명상에 대한 설법인 《마하사티파타나 숫타(Maha?atipat.t.ha?a Sutta)》에 나타나는 도발적인 서술에 의하면 여성은 자신의 몸이 병들고 부패하며 불순하다고 새롭게 경험하며, 자신이 한때는 찬미했었던 그 몸으로부터 나오는 더러운 냄새와 매스꺼운 분비물로 인하여 몸을 역겨운 것으로 새롭게 경험한다.

그리하여 이제 몸은 망가지는 것이며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여 여실지견한다.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이 뿌리뽑혀 나감과 함께 자신의 마음은 집중되고 고요해진다.

《테리가타》에서 발견되는 두번째 특징은 상실 경험이다. 상실 경험은 친족, 특히 자식 상실에 대한 여성의 경험이다. 테리들 각자는 흔히 죽음에 의해서 즉, 자신에게 가까워 정서적 유대 속에 있었던 사람을 상실하거나 그러한 사건의 힘에 의해서 불교의 사문이 된 것에 대하여 서술한다.

탐구의 핵심은 죽음인데 키사고타미(Kisa?otaml?의 경우는 어머니, 키사고타미와 수메다(Sumedha?의 경우는 아버지, 키사고타미·수메다, 그리고 순다리(Sundarl?의 경우는 남자형제, 키사고타미의 경우는 남편, 순다리의 경우는 자식, 우비리(Ubhirl?의 경우는 딸, 그리고 키사고타미, 판차사타 파타차라(Pan?asata Pat.a?a?a?, 바시티(Va?it.t.hl?와 차파(Ca?a?의 경우는 아들의 죽음이다.

이와 같은 자전적인 특이성은 《테라가타》에서는 보통 발견되지 않는다. 남성은 보통 자신의 출가를 자신의 삶 속에서의 특정인의 상실에 귀인시키고 있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쉽게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증거는 여성이 전환 경험을 가장 확실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존재의 무상성에 대한 생생하고 막힘이 없는 깨침을 통해서 변환이 최고로 심오하게 일어난다면, 그리고 불교적 탐구가 변화하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인간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인식을 드러내는 《테리가타》의 표현들의 직접성은 테리들의 경험의 심오함을 나타낸다.

게다가 문헌 자체는 가족을 돌보아야 하고 양육하는 일에 얽매인 여성(itthibha?a)의 상태는 특히 고통(dukkha)에 의해서 독특하게 특징지워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여성의 삶의 상황 속에서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적절하게 진단된다면 궁극적으로는 자유로 이끌어질 수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무상함과 이에 후속하는 고통에 대해서 깨달아 가는 방향성이 여성의 표현 속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지만 남성의 표현 속에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테라가타》의 전권을 통하여 고통은 비애가 사라진 해탈로 귀결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제안했듯이 남성의 표현은 더 교설적이며 아마도 더 제도적인 속성을 지닌 반면 여성의 표현은 매우 빈번히 발견한 순간의 정서적인 힘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의 경험이 남성의 경험보다도 더 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초점을 빗나간 것이다.

표현에 있어서 차이는 경험에 있어서의 차이를 반영하기보다는 서술자의 수행, 청중, 편집자의 의도에 있어서의 차이를 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sekha)’의 생활에서 ‘아라한’이라는 아세카(asekha) 생활로 이행해 갈 때 전환을 가져오는 수행기는 두 문헌 간에 두 가지 차이점에 의해서 특징지워질 수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과의 신체적 격리 그리고 정신적 삶의 배양이 남성의 경험에 있어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비구니는 때로는 격리되어 수행하고 또 때로는 셈세한 명상생활을 발전시키는 데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러한 특징들은 테라들의 경험 속에 보다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남성의 저작이라고 생각되는 구절들은 모두 숲, 산, 혹은 다른 고립된 장소로 홀로 떠나 다른 사람들과의 격리 속에서 노력하는 비구들의 서술들이다. 격리와의 이러한 연관성 때문에 비구들이 자신의 수행의 결과만큼이나 삼매와 주의집중에 있어서의 향상에 대하여 빈번히 기록하고 있는 만큼 《테라가타》 또한 명상의 역할에 대한 기록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게 된다.

수행과정에 있어서 두번째 차이는 스승들의 역할과 관계된 것이다. 비구니와 비구는 모두 붓다로부터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듣는 능력을 평등하게 증언한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탐구를 잘 결론짓는 표시로서 ‘katam buddhassa sa?anam?붓다의 가르침이 잘 행해진)’이라는 표준 구절을 제시한다.

게다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직접적 추종자들로서 비구니와 비구 모두가 붓다와의 관계를 주장하여 비구니는 ‘붓다의 딸(dhl?ar buddhassa)’이라고 하고 비구는 ‘붓다의 아들(putta buddhassa)’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행에 있어서 붓다 이외의 스승들의 역할에 대해 거의 기록하지 않고 있는 비구들과는 달리 비구니들은 다른 이, 즉 더 경험 있는 여성 사문들의 지도의 가르침을 들었다거나 지도를 위하여 갔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러한 여성 스승들은 신참 사문들에 의해서 흔히 ‘신뢰할 만한 비구니(saddha?ika bhikkhuni)’라고 불리는데 《테리가타》에 나오는 이러한 여성 스승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비구니 파타치라(Pat.aca?a?였는데 그녀의 조언과 자문은 많은 여성 동료들의 자양분이 되었다.

여성 사문들을 위한 비구니 스승들의 존재는 붓다가 비구니들에게 내린 여덟 가지 규칙들 중의 하나를 반영하는데, 그 규칙은 비구가 오직 비구상가에 의해서만 계를 받는다는 것과는 반대로 비구니는 비구상가와 비구니상가 양자로부터 수계(upasampada?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들이 제자들로 하여금 최종 수계를 준비시켰기 때문에 비구니 스승들에 대한 언급은 비구니 수계가 양 상가에 의해 거행되었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깨달음 경험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는 차이가 사라져서 특징이 폭넓게 공유된다.

두 문헌 모두에서 공통요소들을 선택하여 불교의 궁극 목적에 대하여 폭넓게 서술하고 있다. 즉 세 가지 지(tisso vijja? tevijjo)의 실현, 아사바의 지멸, 전생을 보는 것(pubbeniva?a, pubbaja?i),다시 태어남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새로운 존재로 나지 않음(na punabhava), 마지막 태어남과 같은 마지막 몸(antima deha)을 취함, 불사(amata), 집착이라는 열정을 소멸시킴과 같은 식힘(sl?a), 완전히 끔(nibba?a), 그리고 노력을 통한 능가할 수 없는 평화의 발견(yogakkhema anuttara)등이 그것이다.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들은 불교적 삶의 최고의 단계에 대한 경전의 전통적 설명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서술들 속에 존재하는 차이들은 주로 이미지의 사용에 있다. 깨달음 경험에 대한 여성의 서술이 그 스타일에 있어서 보다 더 개인적으로 전기적이거나 자서전적이며 그 이미지에 있어서 부엌과 가정적 요소들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남성의 스타일은 사실상 전쟁과 영웅주의 이미지와 짝하며 역설적인 설명과 순간의 감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서술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테라가타》에서 싯달타의 캇티야(khattiya, 전사)계급의 호전적인 특징이 비구들의 깨달음의 과정을 기술하는 데 자주 활용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문헌에는 ‘정복하는’ ‘싸우는’ ‘승리하는’ ‘영웅’ ‘전사’ ‘전투’ ‘화살’ 그리고 ‘검’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테리가타》에서 공유되고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전사의 이미지들 중 하나는 갈애의 ‘창’을 뽑아 불교적 삶으로 전이한다는 것이다.

두 문헌에 있어서 이미지의 성별관계성에 대하여서는 이미 랭이 상당히 논의하였다. 그녀에 의하면 두 시집에서의 직업적으로 정향된 이미지들의 사용은 시들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된 청중 지향성을 가리킨다.

필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미지들이 작자와 청중의 삶의 스타일의 차이, 즉 공적인 영역에 남성을 배치하고 사적인 영역에 여성을 배치하는 가치기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아라한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이제 필자는 ‘아라한’이라는 말을 정의하는 요소들로 넘어가 가장 공통적인 몇 구절을 선택함으로써 《테리가타》의 구절들 속에서 아라한의 등장을 검증해보고자 한다. 세 가지 지의 실현, 아사바의 지멸, 마지막 몸을 취함, 식힘, 그리고 완전히 끔(nibba?a), 이 다섯 가지는 경전이 아라한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규범적 요소들이다. 테리들의 이름이 포함된 《테리가타》 속의 이러한 구절들만을 고려하여 ‘작자들에 대하여 착오 없이 언급’해 볼 때, 혹은 이러한 구절들의 여성 작자들을 구체적으로 밝혀 볼 때 이러한 다섯 가지 요소들 각각이 최소한 한 명의 테리에 의해서 검증된다.

① 세 가지 지의 실현: 밧다 카필라니(Bhadda Ka?ila?l?, 찬다(Canda?, 그리고 수바(Subha?에 의해서 성취됨.
② 아사바의 지멸: 찬다와 순다리에 의해서 성취됨.
③ 마지막 몸을 취함: 디라(Dhl?a), 우파사마(Upasama?, 숙카(Sukka?, 그리고 밧다 카필라니에 의해서 성취됨.
④ 식힘: 수마나에 의해서 성취됨.
⑤ 완전히 끔: 수마나, 웃타마(Uttama?, 그리고 수메다에 의해서 성취됨.

이러한 대표적 예들은 문헌의 편집시기에 많은 테리들이 경전에서 ‘아라한의 상태’라고 기술한 어떤 특징들을 성취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즉 스폰버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고타마의 추종자들 중에는 완전하게 그리고 똑같이 깨달았다고 인정된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아라한’이라는 경칭이 《테리가타》가 편집된 세기 동안에 사용되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즉 《테리가타》는 물론 비나야나 니카야와 같은 다른 적합한 경전에 기록된 테리들의 경험에 근거해 볼 때 분명히 아라한을 성취한 테리들에게 ‘아라한’이라는 칭호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특히 기이한 현상이다.

즉 아사바의 지멸뿐만 아니라 연마된 지혜(disciplined wisdom)를 통해 심해탈을 성취한 오백 명 이상의 비구니들을 붓다가 인정하고 있는 《맛지마 니카야(Majjhima Nika?a)》의 구절, 닙바나를 모든 인간, 즉 여성이든지 남성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상윳다 니카야(Sam?utta Nika?a)》의 구절,붓다의 동의하에서 데바(신)들이 해탈하여(vimutta) 세상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anupa?a? 일군의 비구니들을 인정하고 있는 《앙굿타라 니카야(An?uttara Nika?a)》의 구절, 그리고 붓다가 예류(sota?anna)·일래(sakada?a?in)·불환(ana?a?in)에 이른 비구니 제자들과 과위가 없지 않고(anipphala) 시간의 끝에 도달한(ka?an?ata)――후속적으로 보통 아라한과 연관된 단계에 도달한――다른 비구니 제자들을 지적하고 있는 (붓다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우나다(Uda?a)의 구절 등을 고려해 볼 때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여성과 아라한 문제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도 중요하지만 한층 더 중요한 것은 여성 아라한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여성에 대한 다수의 기준이나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서 여성에 대한 부정적 가르침과 비구니상가와 테리상가의 규율들의 억압적 성격――스폰버그가 각각 ‘금욕적 여성 혐오’와 ‘제도적 남성 중심주의’라고 명명한 태도――에 의해 입증되듯이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의 인도와 불교 사회에서의 여성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이차적이었다.

그러나 해탈학적으로는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깨달음에의 도달 가능성은 성별과 무관하다고 이해되었다.

스폰버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해탈학적 포괄성’(soteriological inclusiveness) 입장이다. 성별의 사회적 측면은 다른 문화적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화적 제도이며 궁극적으로는 구원 문제와 무관하다. “성별 구분은 진리에 대한 통찰과는 무관하다.”는 말은 두 문헌 모두에서 직접적으로 명료하게 말하고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테라가타》는 훌륭한 스승들이 이들의 가르침을 지속시키는 비구와 비구니 모두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구니 소마는 여성이라는 것(혹은 남성이라는 것)이 깊은 마음집중과 명료한 법에 대한 통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녀의 주장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 있어서 성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여성과 남성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 근거 없는 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4. 불교 보시자들의 역할

해탈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다면 초기 경전에서 여성에게 아라한의 상태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해탈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학적――비록 이 용어가 정신적 영예를 나타내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문제이다. 즉 ‘아라한’이라는 경칭은 우리들의 원래의 가설과는 반대로 정신적 상태의 인정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적 환경의 역학과 관계된 말이다. ‘테라’와 ‘테리’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사회적 환경은 법랍과 경험에 따라서 이 용어들을 사용했던 비구상가와 비구니상가라는 사원 공동체였으나 아라한이라는 말은 사원의 벽을 넘어서 불교 보시자들의 가정에서도 쓰였다.

불교 승가제도의 유덕함에 있어서, 즉 여기에서는 사문생활에서의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자원을 수집하는 데 있어서 특정 불교 성향을 가진 보시자들의 공동체에게 (어떤 출가수행자에게 보시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권리가 분명히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논의를 보시(da?a)의 영역으로 옮기게끔 하는 실마리는 ‘아라한’에 대한 경전의 논의에 관한 또 하나의 서술적이고 규정적인 해석이다. 《테라가타》에서는 비구는 수차에 걸쳐 “나는 보시를 받을 만한 아라한이다(araha dakkhin.eyo ‘mhi).”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절은 아라한에 대한 다른 전통적 징표들(예컨대 세 가지 지를 갖는 것, 아사바를 지멸시키는 것, 죽음을 초월하는 것, 그리고 다시 태어남의 토대를 갖지 않는 것)의 문맥 속에서 최소한 세 번 나타나며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여러 번 나타난다.

‘dakkhin.eyya(보시를 받을 만한)’라는 말은 산스트리트어 ‘daks.in.a (제의식비, sacrificial fee)’로부터 파생된 말이며, 이 말의 팔리어 ‘아라한’과의 관계는 ‘아라한’이라는 말의 기원이 어근 ‘arh’와 관련된 초기 베다어에 있다는 점이다.

리그 베다어 ‘arh’는 대부분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지 ‘주는 것’ 혹은 ‘최소한 물질적인 것을 소모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해야 한다(ought)’라는 의미로 ‘arh’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은 신과 인간 간에 유익한 물품 전달을 의무로 하는 관계를 맺는 상황에서 사용된다. 예컨대 바유(Va?u)와 인드라(Indra) 신은 소마주를 받을 권리, 즉 인류를 위한 자신들의 위대한 행동에 대하여 보상받을 권리가 있을(arh) 뿐만 아니라 루드라(Rudra)와 같은 신은 화살과 금을 ‘적법하게(arh)’ 몸에 지니며 제의식의 후원자들에게 약과 같은 바람직한 것들을 준다.

보통 인간의 축복받을 권리는 신과의 관계를 충족시키는 데 의존해 있을 뿐만 아니라 보시자의 본래의 복을 인정하는 것에 의존해 있다. 그러므로 받을 만한 신 브리하스파티(Br.haspati)는 인간이 ‘훌륭한 보물을 내려주십사.’ 하고 요청하는 대상이며 ‘활수하고 받을 만한 마루트(Marut)들은 활수한 후원자들과 화해한다.’ 이 두 경우에서 인물 가치는 재물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받을 만함’의 물질적 측면은 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특히 받는 사람에게 속한다.

예컨대 인드라와 아그니는 ‘상을 받을 만한 두 훌륭한 신’이라고 특징지워지며, 수리야의 소마와의 결혼 상황에서는 수리야 찬가를 알고 있는 사제만이 신부의 가운을 받을 만하다고 이야기된다. ‘arh’의 물질 관계성은 이것이 ‘da?주다)’와 짝을 이루고 있는 이 두 구절에서처럼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리그 베다》의 5.79.10에서는 새벽의 신 우샤스(Us.as)는 그녀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한다(arh, ought)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리그 베다》 7.18.22에서는 ‘수다스(Suda?, Paijavana) 왕의 보시물인 200마리의 황소, 두 대의 마차, 그리고 젊은 부인들은 가치 있다.’고 간주되어 시인들은 왕족 보시자를 칭송하여 불을 순행한다.《리그 베다》에서 ‘보시물을 나르는’을 의미하는 ‘arh’는 그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조촐한 제의에 근거하여 물품에 의해서 추동되어 운행하는 우주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신과 인간은 서로에게 보시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81) 서로가 보시를 주고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보시할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보시물을 가지고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하며 성품의 탁월함에 의해서 그것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보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경기에서 승자가 되거나 아름답고 훌륭한 노래를 작곡하고 노래함으로써 그것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시를 하는 자는 그가 신이든지 인간이든지 주로 남성이기는 하지만 여성 또한 ‘보시를 하는 자’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예컨대 여신 우샤스는 어둠에 감추어진 보물을 보시를 하며 귀족의 아내들은 자신들의 남편이 보시할 때 출석할 의무가 있다. 《리그 베다》에서는 ‘arh’라는 말이 보시의 의미로서 사용되는 예들이 많은데 그 용례들 중의 하나는 이 말이 ‘보시 받을 만한 존재’라는 뜻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arh’의 ‘보시물품’과의 연관성은 샤타파타 브라흐마나에서도 계속된다.

여기에서 ‘arh’라는 말은 인간은 물론 신에 대하여 설명하는 (말의-역자 첨언) 범주에 속한다. 유의미하게도 이 책에서의 ‘arh’의 사용은 소마왕 희생제의와 관계된 부분에서 가장 잘 두드러진다. 이 제의에서 ‘arh’는 환대의식(A?ithya?의 중심인 손님과 주인 관계의 맥락 속에서 발견된다.

‘arh’의 중요한 용례 중의 하나는 소마 왕 구매에 대한 의식화된 논쟁 속에서 나타나는데 이 의식은 아티탸 의식――소마 왕은 판매자가 제공하는(소 두 부분을 바치는) 것보다도 ‘더 받을 만하다(arh)’고 말하고 있는 의식――의 바로 앞이다.

‘arh’의 두번째 용례는 합당하게 행해지고 있는 아티탸 의식 속에서 소마 왕을 희생자의 손님으로 바로 구매하는 데서 나타난다.

손님 소마 왕은 가정의 대표자로서 그리고 가정의 재물 관리자로서 희생자의 아내가 만든 음식보시를 받을 만한 이(arhat)로서 의식을 통하여 숭앙된다.

이러한 의식이 행해지고 그 결과 소마 왕은 희생자에게 노하지 않으리라는 것과 번영을 가져오게 되는 의식 결과를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샤타파타 브라흐마나에서의 구절들의 의미는 첫째로 그것들이 줄 의무와 받을 권리의 개념 주변에서 ‘arh’라는 말의 초기의 윤곽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구절들은 ‘arhat’를 ‘손님-주인’ 관계 속에 배치시키고 있는데 그 배치 속에서 ‘arhat 손님’이 무엇인가를 받는데 이때 받는 것이 음식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환경――즉 소마 희생제의에서 환대의식――은 이것이 《베다》의 범행기의 승려이든지 아니면 자이나교 혹은 불교의 승려이든지 집 대문에서 보시 요청자를 환대하는 의식과 의미 있게 관련되어 있다.

‘arh’가 사용되는 이러한 상황, 즉 희생제의와 손님 예절의 의식이라는 상황은 초기 팔리경전에서의 ‘아라한’이라는 말의 용례를 알려주지만 초기 《우파니샤드(Upanis.ad)》와 《바가바드 기타(Bhagavad-G沖ta?》의 구절들에서 발견되는 일반 용례는 아니다.

‘아라한’이라는 말의 원래 용도가 희생제의 상황에서 선물을 받을 만한 신과 인간 안에 있다고 이해한다면 그리고 후기 제의문헌들, 특히 가치 있는 보시가 음식으로 (등장하는-역자 첨언) ‘손님-주인’ 상황에 그 용례가 집중되어 있다고 이해한다면 불교경전에서의 ‘아라한’의 용례는 더욱 분명해진다.

경전에서의 비구의 선언, 즉 “나는 보시를 받을 만한 아라한이다(dakkhin.eyya).”는 매우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다른 문헌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베다적인 보수적 선언이다. 《디가 니카야》는 추측컨대 다른 어떤 경우에서보다도 보시자와 수혜자 모두에게 보다 큰 결과(maha?phalatara)이면서 보다 큰 이로움(maha?isa sarara)인 끊이지 않는 보시(niccada?a?i)를 아라한이 가는 곳마다에서 받았다고 한다.

《디가 니카야》는 또한 신심 있는 보시자가 불교 관행에 따라 보시의 대가로 복을 받기 위해서 아라한들에게 보시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어떤 아라한 공동체든지를 막론하고 아라한들 중 일부, 그리고 아라한 모두를 위해서 보시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더 나아가서 아라한이 편안하게 지내기 위해서는(pha?um. vihareyyum) 완전한 보호와 후원을 받아야 하며 음식, 법의, 거주지 그리고 약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팔리어 ‘아라한’의 베다적 전통에 의하면 이 말은 ‘보시를 받을 만한 존재’라고 부분적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비구니들이 해탈학적으로 아라한이 되었을지라도 초기에는 그들에게 ‘아라한’이라는 말의 적용이 금지되었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어떤 의미에서 보시자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이 ‘그들은 보시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붓다는 보시자들을 달래는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 노력의 일환이 여성 수행자에게 아라한이라는 경칭을 적용하지 않은 것이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보시자들은 여성 아라한 보시 요청자들에게 보시하는 것에 대해서 더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경전은 비구니가 보시를 받는 과정에서 차별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교설에 의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dakkin.eyya’라는 말은 《베다》의 제의와 긴밀히 관련된 말로서 비구와 ‘sa?akasan?ha(성문상가)’에 대하여 대안적으로 서술해 주는 표준형에 속한다.

즉 “비구는 보시물을 받을 만하며, 환대를 받을 만하며, 보시를 받을 만하며, 절을 받을 만하며, 세상을 위한 비할 데 없는 복전이다.” 이러한 표현이 여성에게 적용되는 경우는 보이지 않지만 또한 여성이 이러한 표현으로부터 명백하게 제외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구나 잠재적인 보시 받을 자의 명단은 보시자가 받는 복의 양에 따라, 즉 여래(如來)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작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구절들은 보시 받는 자를 성별에 의해서 구별하지는 않을지라도 비구상가와 비구니상가 모두가 포함되어 있는 리스트에서는 철두철미하게 비구니 승가를 보통 두번째 위치에 놓고 있다.

그럼에도 여성출가자들에게 보시하는 것을 금지시키거나 억제하는 교설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여성이 보시의 대상으로서 결점을 갖는다는 교설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에 문제는 여성에 대한 일반적 사회제의 태도의 어떤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 관습의 작용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는 문헌에 암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충분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필자는 여기에서 경전편찬 시기의 여성에 관한 지배적 견해에 대한 꼼꼼한 논의――예컨대 윌리스·랭·리타 그로스 그리고 월터스와 같은 학자들의 논의에서 발견되는――를 상세히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는 논의되어온 문제들 중의 하나인 여성과 불경(pollution)에 관한 문제를 간단히 서술하고자 한다.

비록 구속적인 율장의 규율은 속인은 물론 비구와 비구니를 공간적으로 충분히 분리시킴으로써 정신수행의 길이 성에 의해서 교란되지 않도록 하고, 엄격한 명상훈련은 산만하거나 장애가 되는 마음의 성향이 법의 결실을 향해 가도록 성공적으로 이끌지만 여성의 신체는 그렇게 쉽사리 길들여지지 않는다.

《상윳다 니카야》에서 말하는 여성을 남성과 구분하는 다섯 가지 애처로운 특징들 중에서 두 가지는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것(결혼시에 자신의 가족을 떠나야 하는 것과 남성을 섬겨야 하는 것)이며 세 가지는 생물학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이다.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들 중에서 두 가지는 선택의 문제(임신과 출산)이며 한 가지, 즉 생리만이 여성의 몸의 불가피한 요소이다.

여성의 생리주기의 늘 현존하고 끈덕진 속성은 제물을 바치는 자의 아내가 항상 제의를 생산적이고 경제적이게 하기 위하여 항상 출석해야 했던 초기 《베다》의 제의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생리가 도래했을 때 이것은 그녀를 일시적으로 불경하게 한다고 생각되었다.

비록 전통은 생리 동안에 불경한 아내가 제의식에 참석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전통은 재미슨(Stephanie Jamison)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제의의 주요 참여자들 중의 어느 한 사람의 이러한 문제시되고 통제할 수 없는 특징에 대응하는 독창적 방법을 발견하였다. 즉 그녀의 옷 조각을 제의에 포함시킨다든지, 그녀를 가까이 앉게 하면서도 제의의 영역에는 앉지 못하게 한다든지, 혹은 그녀가 다시 청결해질 때까지 제의를 연기하였다.

여성이 불교 비구니가 되어도 생리혈 흐름이 저절로 마르게 될 때까지 혹은 명상수행의 결과로서 마르게 될 때까지 생리는 계속하여 여성 자신과 상가의 관심사였다. 비구니에게는 보통 다섯 가지 옷이 지급되었다. 비구에게도 지급되었던 상의·하의·외의는 물론 법의와 목욕 옷이 그것이다.

그밖에 비구니에게는 생리 동안에 원래는 ‘가사복(household robe)’이였던 다른 천의 사용이 허용되었다.

왜냐하면 붓다에 의해서 이러한 방법으로 생리천의 지속적 필요가 인지되었으며, 많은 비구니들의 생활 속에서 끈덕지고 불가피한 현존으로서 생리의 지속성이 인지되었으며, 그리고 최소한 비구니 상가의 현행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시자가 상가와 그 시대에 주어진 브라만적 문화전통 안에서 여성의 몸이 갖는 지속적인 차이(와 불경)에 대하여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이 차이에 의한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dakkhin.eyya 공식(formula)’은 비구를 보시를 받을 만한 사문으로서 뿐만 아니라 ‘비할 데 없는 공덕의 밭(anuttara pun??kkhetta)’으로서 본다.

사문에게 주어지는 보시자의 보시는 효험을 갖는다고 생각되었는데, 왜냐하면 사문인 수혜자는 공덕의 밭으로서 보시의 씨앗을 기르기 때문이었다. 즉 일단 밭에 심어지면 보시는 보시자에게 특히 상서로운 내생을 가져오는 효력을 갖는다.

‘anuttara(비할 데 없는)’라는 말의 사용은 경전 전통에서 ‘좋은 밭(sukhetta)’과 ‘나쁜 밭(dukkhetta)’의 구분――보통 종자의 질과 파종 기술을 포함하여 토질과 기상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생산력에 근거한 구분――을 반영한다.

비록 경전은 전통적인 연계, 즉 생리하는 여성의 불경과 업(에 의한 나쁜 밭으로서의-역자 첨언) 불모지를 연결시키고 있지는 않지만――생리하는 여성이 출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베다의 제의에서 생리 동안의 여성의 결석은 생리하는 여성이 공덕을 위해서는 불경스럽거나 효험 없는 수단(밭)으로 이해되었을 사회제의적 상황을 나타낸다.

그래서 팔리 전통에 대한 《베다》 문화의 계속된 영향, 특히 보시-유덕함을 공덕의 밭으로서 비할 데 없는 효험과 결합시키는 ‘dakkhin.eyya 공식’ 때문에, 보시자의 눈에는 비구니들이 공덕을 만들어내는 밭으로서는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패톤(Laurie Patton)이 매달의 생리 흐름의 시초의 예견 불가성에 대한 베다적 상황을 지적했다시피 “여성의 몸 컨디션의 예측 불가성으로 인하여 실제로 여성에게 주어진 권능의 양은 엄밀하게 제한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제 아라한 문제는 좀더 분명해졌다. 아라한의 한 가지 중요한 사회적 측면이 베다적 유산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 아라한의 유덕함에 의해서 보시자의 물질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교설, 즉 제도 불교에 전적으로 개입되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던 ‘아라한’이라는 말이 사회의 성별 역할에 대한 지배적 태도에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성 출가자들은 보시자들에 의해서 비구와 똑같이 충분한 보시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성에게도 깨달음에 대한 해탈학적 가능성이 완전히 열려 있었을지라도 팔리불교는 상가에 들어오는 물질적 지원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관습적인 견해에 굴복하였을 것이다.

비록 보시자들이 여성 출가자들에게 네 가지 필수품 형식으로 지원하였을지라도 이들은 남성 출가자들에게 부여되었던 ‘보시 받을 만한(dakkhin.eyya)’ 충분한 지위를 여성에게 부여하는 것을 꺼려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초기 경전은 불안한 감수성(uneasy sensibility)을 가졌던 잠재적으로 활수한 보시자들을 거슬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에 대하여 ‘아라한’이라는 경칭의 사용을 보류했을 것이다.

비구니를 위한 보시를 요청하는 데 있어서 초기 경전은 어떤 후속적 문제들을 고려했을까? 전통 내에서 실제적인 보호조치, 즉 비구니가 마을에 홀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 안전한 곳에만 다니도록 권유한 것을 제쳐둔다면 문헌은 여성이 보시를 얻는 데 있어서 겪은 어려움에 대하여 간략하게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숫타비브항가(Suttavibhan?a)》에서 수차에 걸쳐 표현된 한 구절은 한 상인 가장의 놀라움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비구니가 비구에게 음식을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여성은 어렵게 물건을 얻는다(kiccala?ha ma?uga?a).”고 말한다.

이러한 증거는 보시를 얻는 과정에 있어서 여성이 남성보다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분명하게 지지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다른 유형의 구절에 의해서도 완전하게 확증되는 것은 아니다. 팰크와 랭과 같은 학자들은 특히 전통이 발전함에 따라 비구니상가를 위한 물질적 자원은 매우 빈약해졌으며, 이것이 인도에서 그 전통의 붕괴의 원인이 되었거나 전통의 붕괴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결론은 산치(Sanchi)와 같은 지역에 있는 석주상의 증거에 의해서도 지지되는데, 거기에서는 많은 여성 보시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보시의 혜택이 남성에게 가는 것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폰버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는 “해탈학적 이론이 아니라 재정적 지원에 필수적인 사회적 수용성을 보존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팔리불교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상이한 견해들을 분류해 본다면 ‘아라한’이라는 말을 여성에게 적용시키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르고 아마도 대립적이기까지 한 전통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아라한’이라는 해탈학적 용어는 사회적 상황이라는 사태에 희생되었다기보다는 해탈학적 관점에서 점차적으로 규정된 용어로 보이지만 더 오래된, 사회적으로 규정된 전통에 의해서 여전히 제한받은 것으로 보인다. 《테리가타》의 내용은 많은 여성들이 아라한의 상태에 대한 해탈학적 요구조건들을 완전히 성취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테리들 혹은 상가의 장로니들은 잠재적 보시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불경한 몸에 속박되어 있다고 인지되었으며 따라서 지배적이었던 사회기준에 의해서 이들에게 아라한의 지위가 부여되지 못한 것이다. 후기 문헌에서는 특정의 여성들에게 아라한의 지위가 부여되지만 초기 경전은 여성의 정신적 성취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던 생리와 불경에 대한 《베다》의 견해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글쓴이 : 엘리슨 핀들리(Ellison Bank Findly)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age) 종교 아시아학과 교수. 저서로 《Nur Jahan : Empress of Mugal India》 《Women, Religion, and Social Change》 《Women’s Buddhism, Buddhism’s Women》 등이 있다.

옮긴이 : 안옥선
전남대 심리학과 및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미국 하와이대학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전남대 강사. 저서로 《Compassion and Benevolence》, 논문으로 〈초기불교 윤리의 한 이해〉 〈초기불교 윤리의 프라이버시 지양성과 公私 구분 거분성〉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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