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 교수

지난 회에는 중세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전개되었던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중세가 지나고 근세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던 ‘종교개혁’과 이로 인해 생겨난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을 일별해 보기로 한다. 우리 주위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발전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세에는 그리스도교가 나름대로 신학적으로도 발전하고 신비주의로 인해 신앙이 심화되기도 했지만 교회의 일반적 상태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보는 이들이 점증했다.

특히 15세기 인쇄술이 발달되면서 성경을 직접 읽고 초대교회와 그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그런 불만이 더욱 확산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교회는 베드로 성당 건축 등 여러 세속적인 일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면죄부(indulgences)나 기타 돈이 될 여러 가지 사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행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영국 옥스퍼드의 성경번역자 위클리프(John Wyclif, 1320~1384), 보헤미아 사람 후스(John Hus, 1374~1415) 등이 그 선구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모두 화형에 처하는 등 교회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틴 루터

이들과 달리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 나타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독일의 젊은 신학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였다. 그는 본래 법률가가 되려고 법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22살 되던 여름 어느 날 벼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겁이 나 살려만 준다면 사제가 되겠다고 서약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 공부를 중단하고 아우구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2년 후 사제가 되고 그 후에 다시 위텐베르그 대학 신학 교수가 되어 성경의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바울 서신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파는 등 교회에서 하는 일이 자기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이를 조목조목 적어 1517년 10월 31일 그가 시무하던 위텐베르그 교회 문에다 붙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95개 조항(The Ninety-five Theses)’이라는 것으로, 그것을 문에 붙이면서 박은 망치소리가 그렇게 폭발적인 줄은 루터 자신도 몰랐다. 

그는 면죄부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인서〉 1:17에 쓴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강조했다. 교회가 믿음과 동시에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선한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데 반해, 루터는 이른바 ‘믿음으로만’(sola fide)을 강조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참된 믿음만 있으면 좋은 행위는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따라 나온다고 보았다. 그는 또 우리가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느님께로 간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두가 신에게 직접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만인 제사장직’(the universal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장하기도 했다. 

루터가 처음부터 교회와 결별하여 새로운 종파를 시작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리적 차이가 점점 커지고, 드디어 1521년 출교 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독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1529년 가톨릭 제후들이 장악한 쉬파이어(Sypeyer)의회에서 루터파에 대한 관용을 철폐하기로 한 결정에 저항(protest)했기 때문에 그의 개혁운동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신부들이 결혼할 것을 권장하고 스스로도 수녀와 결혼하고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진리가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입증되어야 한다고 성경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평신도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 독일어 성경은 독일어를 통일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기도 했다. 루터는 교회 안에 철통처럼 자리 잡고 있던 권위와 위계질서를 무너뜨렸다는 의미에서 ‘현대성’의 문을 연 셈이기도 하다.

그의 개혁운동은 독일의 대부분, 그리고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제국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제국으로 들어가고, 이런 나라들에서 북미로 이민 간 사람들과 함께 북미로도 퍼졌는데, 미국 위스콘신과 미네소타 주,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많이 몰려 있다. 한국에서도 미국 루터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1960년대 ‘루터란 아워’라는 방송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고, 출판사 컨콜디아사(재단법인한국루터교선교부유지재단)를 통해 활약을 계속하고 있다.

장 칼뱅

루터 이후에도 스위스의 개혁자 쯔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를 비롯하여 개혁자들은 계속 나왔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프랑스 사람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이다. 프랑스 발음으로는 ‘장 칼뱅’이지만 한국에서는 영어식으로 ‘존 칼빈’이라 부르는 사람이 더 많다. 칼뱅도 신부가 되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법학을 공부하면서 고전학과 인문학에 열중하다가, 결국 신학을 공부하여 26세의 젊은 나이에 칼뱅주의 교단에서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책 《그리스도교 강요(綱要)(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처음 라틴어로 쓰였다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그가 죽기까지 4번 개정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로마 가톨릭교에 의해 타락되기 이전의 상태로 고치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의 주권, 원죄, 예정론 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가톨릭 신학의 기초를 놓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루터와 칼뱅을 통해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칼뱅의 가르침은 주로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우리가 구원 받을지 멸망할지 하는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선택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 우리의 직업은 ‘소명’(vocation)이라는 것, 하느님의 동역자가 되어 열심히 일하고, 일한 대가를 받고, 그 돈을 함부로 쓰지 말고, 좋은 일에 쓰든가 남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는 것도 좋다는 것,  이렇게 근검절약하는 자주적 삶이 선택 받은 자의 표시라는 것 등이었다.(독일 종교 사회학자 Max Weber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통해 칼뱅의 이런 신학사상이 서양에서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목회를 했는데〔이른바 신정(神政, theocracy)〕, 실질적으로 칼뱅 자신이 가혹한 형벌을 통해 그 곳의 모든 일을 다스리는 통치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교회의 치리를 장로들을 통해 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찾아 제네바로 왔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죽은 다음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등 유럽 각지로 가서 칼뱅의 가르침에 따른 교회를 설립했다. 프랑스에서는 유그노(Huguenot)가 되었다. 영국에 간 칼뱅파 중에는 영국 교회를 가톨릭의 영향으로부터 ‘청결’하게 하겠다고 하다가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로 피해 간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일부가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으로 간 ‘청교도들(Puritans)’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John Knox)의 지도로 이 교파가 국교(the Church of Scotland)가 되었다. 네덜란드와 헝가리에서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 불리고 기타 지역에서는 ‘장로교’(Presbyterian Church)라 불려졌다. 교회에 감독이나 주교 같은 것이 없이 장로들이 의사를 결정하도록 개혁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영국교회

영국에서도 개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다. 물론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깔려 있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이유는 영국 왕 헨리 8세의 이혼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왕은 왕비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자 왕비와 이혼하고 새 왕비를 맞으려 하여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교황이 이를 거절했다. 지금까지 ‘믿음의 수호자’라고 칭함을 받던 영국 왕이지만, 교황의 거절과 상관없이 새 왕비를 맞아들인 다음 로마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1534년 스스로 영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의 수장이 되었다. 비록 로마 가톨릭과 분리되기는 했지만, 신부들의 결혼을 허락하는 일 이외에는 교리나 예배 형식, 교회 체제 등에서 가톨릭 색채를 대부분 유지했다. 

헨리 8세가 죽고, 둘째 부인에게서 난 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이 되었는데, 이 때 영국은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헨리 8세의 맏딸 메리가 여왕이 되자 다시 가톨릭을 옹호하면서 이단 박멸 운동을 펼쳤다. 이것이 그녀를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부르게 된 이유다. 

 메리의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로마가 그녀를 공식적으로 출교하자 여왕은 로마 가톨릭 예배를 금하고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해 영국교회가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영국인의 교회가 되도록 하였다. 영국교회를 영어로 Anglican Church하는데, 미국에서는 ‘영국’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느껴졌던지, Episcopal Church라 한다.  한국에서는 ‘성공회’로 알려져 있다.

재세례파

재세례파들을 근본 개혁자(Radical Reformers)라고 하는데, 이들은 다른 종교개혁이 철저하지 못했기에 자기들만은 ‘뿌리’까지 들어가는 개혁을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히 어릴 때 세례를 받은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받은 것이므로 무효이므로 성인이 되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재세례파(Anabaptist)라는 말이 나왔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멘노(Menno Simons c., 1496~1561)를 지도자로 한 메노나이트(Menonites)파, 거기서 나온 허터(Jacob Hutter, 1536사망)를 지도자로 하던 허트라이트(Hutterites)파, 암만(Jacob Amman, 1644~1725)을 따르던 아미쉬(Amish)파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북미로 이주했는데, 특히 허트라이트파나 아미쉬파는 자기들대로의 집단 거주지(colony)를 이루어 살고, 아직도 마차를 이용하는 등 옛날 생활방식 그대로를 지키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메노나이트파는 현재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 부근에 많다.

기타

이왕 프로테스탄트 교파들 이야기가 나왔기에, 직접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의 영향에서 생긴 것은 아니지만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종파들을 일별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청교도:

영국에서 있었던 ‘피의 메리’ 여왕의 종교 박해로 여러 곳으로 나가 살던 영국인들이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와 함께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나가 살 동안 칼뱅파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은 영국 교회 안에 잔재하는 가톨릭적 요소가 못마땅하게 보였다.

여러 가지 예배의식을 간소화할 뿐 아니라 교회도 ‘장로제’로 바꾸려 하였다. 이렇게 교회를 ‘청결’하게 하려 한다고 하여 ‘청교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결국 이들 중 더러는 영국교회에 잔류하였고, 다른 일부는 아주 분리되어 홀란드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분리주의자(Separatists)라 한다. 

영국 교회에 남아 있던 청교도들은 그 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장군의 지도로 청교도 혁명을 일으키는 등 우여곡절 끝에 1640년 정권을 잡았다. 그들은 그 이후 12년간 영국을 청교도 국가로 바꾸고, 교회를 청결하게 하기 위해 엄격한 행동강령을 강제하였다.

이 무렵 생긴 것이 이른바 ‘웨스터민스터 고백’(Westerminster Confessions)이다. 그러나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고 영국교회를 회복시킨 다음 2년 후 일치법(Act of Uniformity)을 제정하여 청교도들은 영국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이렇게 추방된 청교도들은 회중교회(Congregationalists), 침례교(Baptists), 퀘이커교(Quakers), 장로교(Presbyterians), 유니태리안교(Unitarians) 등이 되거나 그들과 합류했다.

■ 침례교:

한편 청교도 혁명 전에 홀란드로 간 분리주의자 청교도들 중 일부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그 지도자 존 스미스(John Smyth)는 옆에 살던 재세례파 메노나이트교인들의 영향을 받고 성경에는 영아 세례가 없다는 것을 발견, 스스로 성경대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고 자기 교인들 모두에게도 그런 침례를 주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1612년 경 영국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영국 각지로 퍼지고 1639년 미국 로드아일랜드 침례교회를 설립, 미국 각처로, 특히 남부로 많이 퍼졌다. 현재 미국 남침례교회는 미국 개신교파 중 가장 크다.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램 같은 이들이 속한 교회다.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도 이 교파에 속했으나 몇 년 전 교회가 “남자는 여자의 머리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채택한 데 반대하여 교회를 떠났다.

■ 회중교:

홀란드로 갔던 분리자 청교도들 중 다른 일부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므로 감독이나 장로 등 특별한 머리들을 둘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모든 회중이 다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중 일부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일부가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 ‘필그림’(순례자)들로서 이들이 세운 교회가 회중교회다.

이들을 선두로 영국에 있던 다른 청교도들도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 아일랜드만 제외하고 전 뉴잉글랜드가 다 회중교회의 영향 아래 들어가 약200년 간 미국 동북부 지방에서 실질적으로 국교의 역할을 담당했다. 자기들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하버드, 예일 등을 세우기도 했다.

■ 퀘이커:

이들의 공식 명칭은 ‘종교 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로서, 영국인 조지 팍스(George Fox, 1624~1681)에 의해 시작된 종교 단체이다. 그는 1646년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입각해, 교회의 형식이나 십일조 제도 등에 반대했다. 종교란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뾰족당’(steeple-house)에 가서 직업적인 신부가 읽어주는 설교나 기도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빛’으로 밝아짐의 체험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동등한 ‘친구’(friends)라 하였다.

이런 가르침과 그에 따르는 행동 때문에 퀘이커들은 투옥 등 박해를 받다가 윌리암 펜(William Penn, 1644~1718)이 지도자가 되면서 1681년 찰스 2세로부터 미국의 땅 일부를 하사 받고 그리로 대거 이주했다. ‘펜실바니아’는 ‘펜의 숲’이란 뜻이고 주의 별명이 ‘Quaker State’이며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형제우애)라는 도시가 생긴 것도 퀘이커 교도들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들의 모임에서는 목사나 신부가 따로 없이 모두가 침묵 중에 앉아서 ‘내면의 빛’을 기다리는 예배를 드리다가 영감이 오면 조용히 발언하여 다른 이들을 위해 섬기는 자(minister)가 된다. 이들은 미국에서 노예제도 반대에 앞장섰고, 평화운동, 감옥 개선 등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초기 함석헌 선생을 중심으로 모이다가 최근에는 박성준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다.

■ 감리교: 

영국교회(성공회) 신부의 열다섯째 아들이었던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옥스퍼드 대학 재학시절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와 함께 ‘신성클럽’(Holy Club)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고 일정한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임재를 직접 체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회심’(conversion)을 통해 사물을 보는 안목과 삶 자체가 바뀌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에 있던 그의 동료들은 그들을 ‘절도주의자’(Methodists)라 부르며 놀렸다.  

1735년 요한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가는 도중 배 위에서 모라비아 형제단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회심’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웨슬리는 전도여행을 마치고 런던에 돌아가서 스스로 이런 회심의 경험을 하고, 자기의 경험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영국교회를 떠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열성적인 전도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자연히 하나의 교파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가 죽을 때 그를 따르는 이들이 영국에만 7만이나 되었고 더욱이 미국에서의 성장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으리만큼 엄청났다. 감리교(Methodist Church)는 미국에서 침례교단 다음으로 큰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 안식일교:

이상은 모두 유럽에서 생긴 교파들인 데 반하여 지금부터 살펴볼 몰몬교, 안식일교, 여호와의 증인교는 모두 미국에서 생겨난 ‘미국산’ 교회들인 셈이다. 세 교파의 공통점은 모두 임박한 종말이 이른다는 종말관에 기초해서 생긴 점이다. 세 교회 모두 문자주의를 고수하고, 물에 잠기는 침례를 주장한다.
19세기 초반 미국 동북부 지방에는 예수가 곧 재림한다고 믿고 가르치는 ‘재림운동’이 활발했다.

그 대표자가 침례교 평신도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였다. 그는 종말론자들이 으레 그런 것처럼 히브리어 성서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계시록》을 연구하고 거기에 나오는 숫자들을 계산하여 예수가 1843년 3월 21일에서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재림한다고 예언했다. 예언이 빗나가자 다시 1844년 10월 22일로 연기시켰다. 그 예언도 빗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고 떠났지만,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모여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를 세웠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밀러가 계산한 날짜에는 실수가 없었다고 한다. 단 그 날이 예수가 지상으로 재림하는 날이 아니라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조사하는 ‘조사심판’을 시작하는 날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이 조사심판을 끝내면 곧 이 세상으로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교파는 화잇(Ellen G. White, 1826~1915)이라는 여자를 말세를 위한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고 그의 저술은 특별히 영감 받아 쓴 ‘예언의 선물’로 받든다. 그는 세상 역사를 선악의 ‘대쟁투’로 보고 앞으로 다른 교파들은 모두 가톨릭을 중심으로 종교 연합을 구성하여 결국 하느님의 ‘남은 백성들’인 자기들을 대적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이것이 말세에 하느님의 백성인가 사탄의 추종자인가를 분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고 여긴다. 〈레위기〉에 있는 유대인들의 음식 규정을 그대로 준수하고, 지금은 채식을 권장한다. 교파 내 학자들 사이에 성소교리 등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도 들어와 위생병원, 삼육대학, 시조사, SDA 영어학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 여호와의 증인교:

그 창시자 럿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도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안식일 교회에 가담하지 않고 자기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1873년이나 1874년으로 예수의 재림 날짜를 다시 산정했다. 그 후 여러 번에 걸쳐 예언이 빗나가자, 1914년에 예수는 보이지 않게 능력으로 재림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했다고 하고,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가 아직 완성이 안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도 조만간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완성되리라는 날짜도 1918, 1920, 1925, 1941, 1975년 등 여러 번 변경되었다. 아무튼 그 날이 오면 악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증언한 진리를 받은 사람들만 살아남아 새로 회복된 지상 낙원에서 살게 된다. 특히 특별한 무리 14만4천은 하늘에 가서 하느님과 영원히 사는 특권을 누린다고 한다.

이들은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교리를 거부한다.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의 처음 피조물, 그의 첫 아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루스벨 사탄은 예수의 동생으로 이 지구 인간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담 하와를 유혹했기 때문에 그의 큰 형 예수가 이 세상에 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은 삼위일체나 영혼불멸 등을 비롯하여 성경에 없는 잘못된 진리를 가르치기 때문에 모두 ‘거짓 종교들’(false religions)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깨어라(Awake!)》 혹은 《워치타워(Watch Tower)》라는 책자를 들고 집집이 방문하거나 길모퉁이에 서 있는데, 모든 교인들이 자원봉사자로 시무한다. 병역 거부, 수혈 거부, 투표 거부,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공직 거부, 크리스마스 지키기 거부 등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제2지도자에 의해 채택된 공식 명칭이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이었다.

■ 몰몬교:

몰몬교의 정식 명칭은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er-Day Saints)로서, 미국에서 생긴 교파들 중 숫자적으로 가장 크다. 그  창시자는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1805~1844). 스미스는 뉴욕 주에 살았는데, 당시 그 부근에는 많은 교파가 난립해 있었다. 그는 어느 교회에 다닐까 고민하고 있다가 1822년 어느 날 계시를 받았다. 몰로니 천사가 나타나 아무 교회에도 가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금판(金版)을 보라고 했다. 일 년이 지나 뉴욕 주 만체스터에서 땅에 묻힌 금판을 캐내어, 거기 적힌 ‘개정된 이집트 상형문자’를 우림과 두밈이라고 하는 두 보석의 힘을 빌려 판독·번역해 냈는데 그것이 바로 《몰몬경》이라고 한다. 그 금판은 천사가 회수해 가버려 지금은 볼 길이 없다. 

스미스는 하느님의 나라가 곧 미국에 임한다고 선포하였다. 일 년 사이에 천 명 정도의 추종자를 얻었지만 박해 때문에 추종자들을 데리고 처음에는 오하이오 주로 옮겼다가 거기서 다시 새 예루살렘의 도읍지라고 여겨진 미주리 주로 옮겼다가, 거기서 다시 일리노이 주로 옮겼는데, 여기서 결국 스미스는 분노한 폭도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스미스가 죽고 교회는 둘로 갈라졌는데, 그 중 큰 쪽이 제2지도자 브링엄 영(Brigham Young, 1801~1877)의 인도 아래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몰몬교는 일부다처제였지만 1890년 법에 의해 이를 포기했다. 검정색 정장을 하고 가슴에 명찰을 단 젊은이들이 둘씩 거리를 다니며 전도하는 것을 보면, 예외 없이 몰몬 선교사들이다. 이들은 두 명이 한 팀이 되어 2년간 북미나 다른 나라로 가서 전도할 의무가 있다. 

미국에 세워질 하느님의 나라에는 오직 몰몬의 침례를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죽은 사람도 침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조상이 누군가를 알아내어 그들에게도 침례를 받도록 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잘 된 족보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성직자가 없이 모든 남자들이 제사장 역할을 하도록 되었다. 성경 이외의 경전을 받드는 것, 여성의 지위, 종교적 배타성 등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몰몬 태버나클 합창단이 유명하다.

가톨릭의 반동개혁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해 나가 새로 교회를 세우는 동안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이에 대처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를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 한다. 1545년 트렌트(Trent) 공의회를 소집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화해 쪽으로 갈까 오히려 강공(强攻)으로 갈까 의론을 했는데, 결국 강공으로 갈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만’(Sola Scriptura)이라고 한 것에 반하여 진리의 근원으로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결의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는 로마 가톨릭에게만 있음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성례(聖禮, sacraments)를 성만찬과 세례 두 가지로 간소화한 데 반하여, 가톨릭은 견진, 성체, 고해, 종부, 신품 등 일곱 가지 성례를 공식화하였다. 그 외에도 개혁자들이 반대하는 가톨릭의 전통적 가르침을 모두 강화하거나 그대로 확인하였다.

이 때 가톨릭 교회에서 생긴 또 한 가지 중요한 반응은 스페인 출신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Jesuits)의 출현이다. 로욜라는 군인으로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요양하던 중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읽고 예수를 위한 군병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영적 훈련(Spiritual Excercises)》이라는 자기 성찰과 명상을 위한 안내서를 썼다. 파리 대학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며, 동료학생들에게 이 책을 보였는데, 나중 선교사로 인도와 일본으로까지 가게 된 프란시스 자비어(Francis Xavier, 1506~1552)도 그의 동료가 되었다.

로욜라와 그의 동료들은 로마로 가서 1540년 교황으로부터 예수회 설립의 허가를 받았다. 예수회는 특히 학문연구와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여러 나라에 선교사로 가서 교육에 열중했다.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그 유명한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22~1610)도 예수회 회원이었고, 현재 한국에 있는 서강대학교도 예수회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가톨릭 교회는 그 외에도 1854년 마리아가 동정녀였을 뿐 아니라 원죄의 흔적이 없이 태어났다는 것을 주장하는 무구수태(無垢受胎, The Immaculate Conception)설, 1869년에 열린 제1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이 교리와 윤리문제를 공식적으로 공언할 경우(ex cathedra)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교황무오(papal infallibility)설, 1950년 마리아가 죽어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승천했다는 육체승천(bodily assumption)설 등을 공식화했다.

그러다가 1958년 교황 요한 23세가 교회를 이끌기 시작하면서 그는 1962~65년 제2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고 이처럼 프로테스탄트 교회나 동방 교회와 어긋나는 방향으로만 가는 가톨릭 교회를 화해와 공존의 방향으로 돌리는 혁명적인 교회 쇄신(刷新)을 단행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들면, 가톨릭이 아닌 그리스도인들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유대인들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 금서목록을 철폐한다는 것, 힌두교와 불교 등 세계 여러 종교와 대화의 관계를 가지자는 것 등을 공식적인 교회 입장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 23세가 죽고 그 뒤를 이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책을 성실히 반영하거나 이행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제들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1987년 미국 주교들이 건의한 여자 사제 안수 제도를 거부하고 있다. 특히 최근 교황이 된 현 베네딕토 16세는 교리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에서 우리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리스도교 교파들의 족보를 훑어 본 셈이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불교에도 종파들이 있지만, 이런 ‘종파’와 그리스도교 ‘교파’는 그 성격을 약간 달리한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 수당시대를 통해 삼론종, 법상종, 천태종, 화엄종, 선종, 정토종 등의 종파가 나타났지만, 적어도 이들이 생겨날 당시에는 서로 배타적인 경향이 별로 없이 이른바 소의경(所衣經)에 따라 자연스럽게 각각의 종파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엄경》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그 경을 중심으로 모여 화엄종을 형성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종파는 학파(學派)에 더 가깝고, 이런 이유로 영어로 화엄종을 Hua-yen ‘School’이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경우 16세기 이후 《시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편교’나 《요한복음》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요한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주로 교리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립관계를 이루면서 각각의 교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교파들 중 상당 부분은 타종교에 구원이 없다고 믿는 것은 물론,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기네 외의 다른 교파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교파도 더러 있다.

다음 회에는 그리스도교가 근세에 와서 어떤 형태로 발전했는가를 보고, 마지막으로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어떤 모양으로 바뀌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

오강남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학위논문은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길벗들의 대화》(1983), 《도덕경》(1995),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1996), 《장자》(1999), 《예수는 없다》(2001),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2002), 《세계종교 둘러보기》(2003)가 있고,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기독교서회, 1993),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1997), 《귀향》(2001), 《예언자》(2003) 등이 있다. 제17회(1987) 코리아 타임스 한국현대문학 영문번역상(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