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생명공학과 불교윤리

1. 2004년 우리 불교계의 두 풍경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청와대 앞에서는 연약한 스님 한 분이 벌써 수십 일째 단식농성 중에 있다. 경부고속철도 건설 공사로 천성산에 터널을 뚫게 되면 그 산에 사는 도룡뇽을 비롯한 온갖 생명이 피해를 입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런 자연의 피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고스란히 우리 인간에게까지도 미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 공사를 막아보고자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 단식 고행을 실천하고 계신 것이다.{{ <불교신문> 8월 17일자에서 한 독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산을 지키기 위해 포크레인과 맞서고, 청와대 분수앞에서 단식하며 끝내 천성산이 없으면 도룡뇽도 없고 자연도 없고 결국 우리도 없음을 일깨워주신 아름다운 스님, 지율스님… 분명 스님께서 행하시는 고행이야말로 살아 숨쉬는 만생명을 위한 일임을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희는 소수의 손익에 따라 이루어지는 파괴의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 스님의 단식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

그런데 이보다 조금 앞선 지난 5월, 석탄일을 맞아서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불자대상 수상자로 서울대 황우석 교수와 골프선수 박세리 씨를 선정하였다. 황우석 교수 선정의 변으로 조계종 총무원은 그가 "인간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해 학술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황 교수는 1999년 국내 최초로 체세포 복제 송아지 '영롱이' 연구와 광우병에 내성을 지닌 소 개발에 이어서 금년 초에는 세계최초로 인간배아 줄기세포의 배양에 성공하여 전 세계 과학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심사위원장 성관스님은 "불자로서 국위선양과 사회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대상으로 문화, 학술, 예술, 통일 등 6개 분야에 걸쳐 심사한 결과 두 명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불교신문 2004년 5월 22일자 인용.}}

지율스님의 단식농성에 대해서 불교계는 사뭇 열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이런 기사에 접하는 일반대중들의 반응 역시 상당히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필경 도룡뇽과 같은 미물까지도 애틋이 보듬어 안고자 하는 불교의 생명존중 정신을 스님이 몸소 실천하시는 데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일 것이다.

그러면 황우석 교수 수상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의 연구가 과연 불자대상을 받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었을까? 황 교수가 불자대상을 수상하기 이전, 지난 2월에 전주교대 박병기 교수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생명은 인연의 산물이다. 여러 인연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모여서 생명을 이루고 그 인연들이 흩어지면 그 생명도 사라지고 각각 다른 형태의 인연으로 자리바꿈 한다. 인간의 생명도 동일한 인연의 산물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인연들이 모여서 나라는 존재가 탄생하여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면서 자라고 병들고 늙어서 결국 죽게 된다.

인간 배아복제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흐름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업(業)을 짓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업은 반드시 보(報)를 가져오고, 아직 우리는 인간 배아복제의 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만 그 결과 중의 하나로 죽어 가는 다른 생명을 살려내는 자비의 행위가 포함될 수 있고, 이 부분에서 도덕 판단의 혼란이 야기된다.

불교윤리의 핵심은 동체자비의 선행과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인 계율의 준수로 요약된다. 인간 배아복제는 인연의 법칙을 깨뜨리며 업을 짓는 행위이지만,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살려내는 동체자비의 선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계율의 차원으로 오면 복제의 과정에서 많은 생명체를 죽이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배아 복제 연구의 활성화는 인공수정을 통한 수정란의 보유가 많은 우리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 자체의 소중함은 수많은 인연의 알 수 없는 결합에서 비롯된다. 수정란에서 태아로 넘어가는 이른바 원시선(primitive streak)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연구가 계속 발표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결합을 강제하는 인간 배아복제는 신중해야만 한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보살행은 권장되어야 하지만, 아직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단계의 생명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 속에서 배아복제 자체에 관한 연구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는 측면도 있다. 그 과정과 결과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면서 윤리적 판단과 법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 가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불교신문 2월 27일자)

물론 황 교수의 연구가 배아복제의 범주에 드는 지의 여부는 아직도 논란 중에 있고 그의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이익-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데에 따르는 생명구원의 이익도 포함된다-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설령 이런 세간의 논쟁을 모두 회피할 수 있다고 해도 그를 애써 불자대상 수상자로 선정한 조계종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의구심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황 교수의 연구가 불교가 갖는 근본정신과 어느 만큼이나 부합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쉽게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대자대비의 종교이고 인간 생명은 물론 뭇 생명에 대해서 한없는 인연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이런 연장선상에서 비록 경제성과 상황논리를 중시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장이라고 해도 천성산을 지키고자 애쓰는 스님들의 갸륵한 정성에 대해서는 일반 대중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황우석 교수의 불자대상 수상에 대해서는 이런 공감대가 조성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것은 필자가 그의 연구 업적을 과소평가해서도 아니요 그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미래의 잠재력에 대해 무지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필자가 정작 우려하는 바는 황 교수의 연구와 같이 윤리적인 측면은 물론 다른 측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우리 불교계가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 모아진다.

다시 말해서, 필자는 황 교수의 연구 자체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논쟁의 건강성과 그 논쟁의 당사자들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는바, 불교계가 이런 당사자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특히 우려하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런 필자의 이유 있는 우려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2. 생명공학은 뭇 생명의 안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불어닥친 생명공학 바람은 미생물의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부가가치가 높은 신상품을 제조하고(바이오농약과 새로운 항생제의 탄생 등) 외래유전자를 접목시켜 생산성 높은 농작물 품종을 개발하는(유전자변형 농산물) 등 새로운 산업혁명의 도래를 약속하였다. 이렇게 미생물과 농작물을 대상으로 처음 시도된 유전자조작 기술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고등동물을 대상으로 적용되더니 이윽고 인간에까지 확대되어 이제는 유전자 검사와 유전자 치료가 마치 유행어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생명공학 기술이 이처럼 유전자 조작만을 무기로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명공학자들은 세포 수준에서 그 내용물을 서로 바꾸거나 변형하는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서로 다른 생물종들을 서로 교잡시켜서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전혀 새로운 생물종을 창출해내는 기술도 확보할 수 있었다(이렇게 탄생한 잡종 생물체를 키메라라고 부른다). 여기에 부가해서 이렇게 얻어진 새로운 세포주 하나를 사용해서 실험실에서 그것을 얼마든지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기술도 갖게 되었으며(인공번식 기술) 또 한 개 세포에서 출발해서 한 생명체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는 오직 모체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일이 멀지 않아서 실험실에서도 가능하기에 이르렀다(복제기술).

의학 부분에서의 발전도 눈부신데 AIDS 백신의 개발과 같이 미생물 유전자 조작을 이용한 의약품 개발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반화되어 있고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비정상적인 유전자 대신 새로운 건강한 유전자를 환자에게 주입해서 유전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는 유전자 치료법이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장기를 떼어내어 불치병 환자에게 시술하는 장기이식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이제는 돼지에게서 인간 장기를 키워내어 그것을 인간에게 이식하고자 하는 연구가 상당한 수준까지 진척되고 있다. 아직은 해외토픽감에 불과하지만 컴퓨터 칩을 인간 두뇌에 이식하여 인간과 컴퓨터가 서로 전기적 신호를 직접 주고받으면서 교신하는 그런 사이보그의 탄생도 사실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생명공학이라고 부르는 신기술은 유전자조작, 세포조작 및 세포배양 기술, 전자공학, 의료기술 등이 두루 망라되는 새로운 종합기술 분야이며 이런 생명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부상하고 있는 신산업이 바로 바이오산업이다. 이런 바이오산업은 그야말로 풍요와 번영의 21세기를 약속하는 미래과학의 꽃으로 불릴 만하다.

먼저, 생명공학은 식량 증산, 먹거리의 고품질화, 유용 신소재의 개발, 새로운 신재생에너지의 확보 등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고 있다. 아직도 절반의 인류가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석유자원의 유한성에 전 인류가 목을 매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자원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생명공학 기술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런 물질적 풍요에 못지않게 인간의 수명 연장과 질병 퇴치에 엄청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생명공학 기술은 바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까지 이르는 인생여정에서 보다 건강한 출산과 고생없고 질병없는 삶, 그리고 노화예방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공학 기술이 지니는 잠재적 영향력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야말로 21세기의 산업혁명에 비견될 수 있을만큼 엄청나다. 하지만 그처럼 인류 복지의 향상에 기여하는 만큼 그 반대급부 또한 적지 않은데 우리 불교계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기술이 인간의 생노병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 뭇 생명의 안위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런 비근한 예로서 유전자조작 농산물(GMO 식품)의 대량 재배는 한편으로는 제3세계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해주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농약에 저항성을 갖는 유전자를 자연계에 전파시켜서 생태계의 질서를 크게 변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현재는 식품의 대부분이 농장과 양식장에서 재배되고 사육되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많은 식량이 공장과 실험실에서 대량 공급된다고 할 때 그런 식품이 반드시 안전한 식품이라고 보장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설령 그런 방식으로 식량 조달이 충족된다고 할 때 오히려 인구 증가를 부채질하게 되어 장기적으로는 지구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발달된 생명공학 기술의 덕분으로 우리 다음 세대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인류의 운명은 사뭇 달라지게 될 것이다. 생명공학 기술은 이처럼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뭇 생명의 안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고속전철이 관통하면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천성산의 일부 야생동물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단식투쟁도 불사하는 우리 불교계가 어째서 천성산 정도가 아닌, 전 세계 인류와 지구생태계 전반에 걸쳐서 훨씬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생명공학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초연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계의 근시안적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과학에 대한 무지 때문일까?

물론 우리 불교계가 생명공학 기술에 대해서 그토록 관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생명공학과 불교' 관련해서 이제까지 여러 차례 진지한 논의들이 있어왔지만 적어도 필자가 아는 한 생명공학 기술의 발달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생명들의 안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 중요한 화두가 전면적으로(full scale로) 검토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대부분의 발표들에서 이 주제는 생명의 정의에 대한 논쟁이나 생명복제의 윤리성 논의 정도로 축소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한 예로서 불교평론 2000년 가을호의 특집 제목은 "생명공학과 불교"였다. 여기에서는 5개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생명공학의 현재와 미래', '불교적 입장에서 본 생명공학의 윤리 문제', '생명공학의 도전에 직면한 불교의 윤회설', '인간복제와 불교교리는 모순되는가', '생명공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 등이 그것이다.}}

필자가 불교계에 대해서 우려하는 점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불교계는 생명공학 기술이 지니는 범지구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돌리면서 생명의 정의 문제나 생명복제 문제와 같은 일부 사안들에 집착하거나 윤회론과 연기설 등과 같은 고담중론에 빠져있다는 것이 필자의 우울한 진단이다.

3. 생명의 정의는 이분법적이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생명공학의 윤리성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학자들 사이에 생명의 정의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거론했던 이제까지 대부분 발표자들의 관점은 생명에 대한 정의가 과학적, 종교적, 법적, 사회적·문화적으로 상당히 다를 수 있고 따라서 이런 각기 다른 정의들을 서로 비교하는 가운데에서 어떤 해결의 단초가 얻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표출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불교평론 2000년 가을호에 게재된 여러 논문들에서도 이런 관점을 엿볼 수 있다. }}

여기에서는 이런 관행적 시각에서 탈피하여 다소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불교의 입장과 연결될 수 있는 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생명공학 기술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생물의 본질이자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또는 살아있는 생물(인간)을 세포 수준과 장기 수준에서 마음대로 다루는 기술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연구자가 생명의 생사여탈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바 바로 여기에서 기술 자체의 윤리성 문제가 부각되게 된다. 물론 기존의 의학 기술도 생명을 다룬다는 입장에서는 생명공학의 입장과 별로 다를 바가 없고 특히 인공유산에 관련해서 제기되는 윤리성 문제는 생명공학에서 제기되는 윤리성 문제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공유산의 합법성 여부를 따지는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점은 낙태의 대상이 되는 태아를 과연 하나의 생명체, 또는 한 인격체로 간주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모아진다. 만약 그 태아를 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낙태행위 자체는 곧 살인이 되는 것이며, 또 전혀 반대로 태아에 대해 아예 인간 대접을 할 필요가 없다면 인공유산을 금지하는 행위가 오히려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제가 이쪽과 저쪽의 두 가지 중에서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이분법적인 문제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적 파장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에 있어서는 그런 쾌도단마식의 이분법 대신 다음에 논의하는 것과 같이 어정쩡한 수준의 이분법을 적용해서 해결책을 찾는다.)

생명공학에 있어서도 똑같은 윤리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요즈음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줄기세포 배양 연구에 있어서는 난자와 정자가 합쳐진 수정란이나 체세포핵이 이식된 난자를 일정 기간 동안 배양해서 세포덩어리로 키우고 그 중에서 줄기세포를 찾아내게 되는데, 이렇게 배양된 세포덩어리를 자궁에 이식하면 그대로 태아로 자라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포덩어리를 발생초기의 태아로 간주할 수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인공유산의 경우와 같은 윤리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한 개 수정란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세포덩어리로 자라나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척추와 심장이 생겨나고 이어서 손발과 얼굴 모양이 갖추어지고 그래서 수정 후 9개월 만에 성숙한 아기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의 고결한 탄생 과정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실험의 편의를 위해서, 그리고 법학자들은 현실 세계에서의 법 적용을 위해서 이런 일련의 과정을 구분하고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구분법은 다음과 같다. 수정 후 14일 즉 가장 기초적인 척추의 모습(원시선)이 나타나기까지는 단순히 세포덩어리로(이를 배반포라고 부른다), 이후 우리 몸의 각종 기관이 처음 만들어지는 8주까지는 배아기로,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출산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은 태아기로 구분된다.

이렇게 인간의 탄생 과정을 구분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산모의 몸속에서 자라는 태아에게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수정된 수정란에게까지도 그런 권리를 제공하기는 현실적으로 많은 사회적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인위적으로 어떤 경계선을 만들어서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여러 모로 크게 용이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탄생 과정을 수정란, 세포덩어리, 배아기, 태아기로 나누고 그 과정의 어디까지는 비인간으로 취급해서 마음대로 다루어도 괜찮고 그 이후부터는 인간 생명으로 취급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위적인 구분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는 태아의 성장 과정을 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 비교해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필요에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고 청소년과 성인을 구분하며 또 장년과 노인을 구분한다. 하지만 이런 구분에서는 언제든지 경계선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똑같은 12살 아이라도 어떤 아이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 큰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다른 12살 어떤 아이는 아직도 10세 소년의 태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65세를 경계로 이후의 세대를 노인으로 명시하는 것도 각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노화 상태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므로 크게 모순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게 때문이 사회적 관행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아 출생의 과정에서도 산모의 영양 상태나 주변 환경의 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등에 따라서 그 발달 정도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어떤 태아에 있어서는 수정 후 10일 경에 이미 원시선이 나타날 수도 있고 또 어떤 태아의 경우에는 수정 후 10주가 지나도 배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아의 성장 과정이 각 개인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임신 기간의 어느 시기를 경계선으로 삼아서 한쪽의 배아 혹은 태아에 대해서는 아예 비생물적 인격체로 간주하는 일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우며 부도덕한 일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 때, 그것이 수정란이든 태아기 이전의 세포덩어리이든 인간 세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모든 생명공학 기술은 본질적으로 윤리성의 문제를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를 불교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모든 기성 종교들 중에서 불교는 살생에 대해서 가장 엄격하며 이런 생명존중의 정신은 비단 현실의 인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산모의 체내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우경, 『불전(佛典)에 나타난 태아의 생명존엄관과 태교』, 동국대 교육대학원, 1996, "불교에서 보는 태아는 수태되는 순간부터 이미 생명체를 지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다··. 연기설을 기준으로 보면 태아가 모태에 들 때는 전생의 업에 따라 식(識)이 들며 이때부터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의 일생을 시작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한 생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기의 존재로 지속된다고 본다. 말하자면, 십이연기의 무명으로 인한 그 자신의 업에 따라 윤회되기 때문에 수태되는 순간에 이미 전생의 정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불교계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낙태아를 위해서 천도재라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도 필경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낙태아 천도재에 대해서 비판하는 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의식이 낙태 경험이 있는 불자들에게 면죄부의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가장 완벽한 생명존중 사상의 교리 체제를 갖춘 불교계가 미혼모 문제를 비롯해 낙태의 죄와 이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알리는데 종책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타태아(낙태) 천도재 '허와 실', 법보닷컴 2003년 7월 16일자(714호)에서 인용.http://www.beopbo.com/content.asp?news_no=16940}}

필경 생명공학을 바라보는 불교계의 입장도 이래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생명공학의 실험 대상이 수정란이든 세포덩어리이든 그것들은 모두 생명체를 지닌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이런 생명에 대한 정의가 곧 불교의 생명존중 정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불교계는 생명공학 기술이 불교의 생명존중 정신에 얼마나 위배되는 지에 대해서 아직 심각한 고민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바 이것이 필자가 제기하는 다른 한 우려라고 하겠다.

4. 다시 돌아보는 줄기세포 문제

인간복제와 줄기세포 배양에 따르는 윤리성 문제는 2004년 2월 황우석 교수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인간의 체세포와 난자를 이용해서 줄기세포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다시 한번 크게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우리 언론은 이 문제를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 과학계가 모처럼 이루어낸 쾌거로 소개하기에 바빴는데 그런 와중에서 이 연구의 윤리성 저촉 여부에 대한 우려는 일반 대중의 관심권 밖으로 크게 밀려났다.

이후 한국생명윤리학회가 뒤늦게 나서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지만 사회적으로는 한없이 무력하게 보였다.{{ 2004년 5월 22일 한국생명윤리학회는 산하 치료용 인간배아복제 연구윤리 특별위원회 명의로 "의학과 생명과학기술 연구는 생명윤리 기준에 부합하여야 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위원회는 황 교수 등의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우리 과학계가 이뤄낸 모처럼의 개가라고 환영하면서도 이 연구가 지니는 윤리성 저촉 가능성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http://www.koreabioethics.net}}}}/ 참조.}}

그동안의 국내외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황 교수의 업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이 특히 강조되었던 듯하다. 첫째는 그것이 인간복제 기술을 직접 이용해서 얻어진 엄청난 의학적 잠재력을 지닌 연구 성과라는 점이며, 두 번째는 이런 연구에 대한 사회적 규제 장치가 아직 확립되지 못한 가운데서 시행되면서 연구 과정에서 윤리적인 측면을 일정 부분 무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그것이다. 우리 국내 언론들이 주로 첫 번째 부분을 강조해서 보도했던 반면에 외국의 유수 언론들은 두 번째 부분에 크게 주목하였다.
이 글에서 이제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을 다시 한번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동안 언론에서 별로 거론되지 않았던 몇 가지 관점들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먼저, 이번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그동안 공개가 금기시 되었던 인간복제 연구의 빗장을 열어 재꼈다는 점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인간 체세포에서 얻은 핵을 인간 난자에 주입하여 배아로 자라나게 하는 기술은 그렇게 하여 얻어진 배아를 모체의 자궁에 착상시키기만 하면 바로 한 인간으로 탄생시킬 수 있으므로 인간복제 기술의 핵심이 된다. 비록 황 교수는 "인간복제 시도는 범죄행위"라며 난치병 치료를 위해서만 이 기술을 쓸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한겨레신문> 2004년 2월 13일자, "복제아기 탄생 현실화-인간존엄성 논란 재연" 기사 참조.}}

이번 연구가 발표됨으로 해서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이 기술이 악용될 가능성은 더 한층 커진 것이 사실인바 우리 언론은 이런 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이번에 발표된 황 교수의 업적은 그것 자체가 아직은 대단히 불완전한 기술이고 따라서 무수한 실험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배아 직전의 단계까지 자란 많은 어린 생명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이 쉽게 간과되었다. 이번 연구에서는 16명의 여성에게서 채취한 242개의 난자가 실험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핵치환 후 정상적인 세포분열의 과정을 거쳐서 배반포(blastocyst)로 자라는 데까지 성공한 케이스가 30건에 불과했고 다시 그 중에서 줄기세포주를 배양해내기까지 성공했던 케이스는 단 한 건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실험의 성공 확률은 242대 1이었던 바 그렇게 많은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굳이 연구를 수행하고자 하는 데에 숨겨진 의도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로, 지난 몇 년 동안 줄기세포 연구가 크게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신체장애를 갖는 환자들에게 면역거부 반응이 없는 장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줄기세포를 사용해서 환자를 치료하기까지에는 아직도 많은 여정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체세포복제 기술을 사용해서 줄기세포주를 확보하는 일 자체가 아직은 성공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이며 설령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임상에 응용하기까지에는 또 많은 연구와 실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줄기세포를 환자에 투여한다고 해서 신체장애가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황 교수의 연구가 언제쯤 실용화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며, 그 사이에 다른 치료법이 개발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상에서와 같은 검토들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해 비단 윤리성 차원에서의 논의뿐만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다시 말해서, 이번에 얻어진 기술이 인간복제에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 실험 자체의 불완전성과 그로 인한 실험 과정 속에서 어린 생명의 대량희생 문제, 연구 성과의 임상적용 가능성 등은 순수한 윤리적 검토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요한 사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동안 우리 사회가 생명공학 기술에 대해서 보여주는 관심이 크게 피상적이라는 생각을 금하기 어렵다. 언론 보도가 지나치게 긍정적이고 단편적이었던 나머지 일반대중들은 새로운 신기술에 대해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기 일쑤이고 기껏해야 그런 기술에 관련해서 윤리성 저촉 여부 정도를 문제 삼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복제를 비롯해서 생명공학 관련 문제들은 어느덧 사회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 사안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낙태 행위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그 문제를 오직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다룰 수는 없듯이 생명공학 문제도 이제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검토만으로 안심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된다. 최근 들어서 비록 뒤늦게나마 불교계가 불교생명윤리위원회를 구성해서 생명공학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나선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는 2004년 7월 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불교생명윤리 정립 및 실천프로그램 개발 사업의 추진계획안'을 확정하고 "올해부터 2007년까지 4개년 계획으로 종단 차원의 '불교생명윤리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불교신문> 2046호 2004년 7월 9일자에서 인용.}}

하지만 그 위원회가 비단 윤리적 차원에서의 검토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5. 향후 제기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들

2003년 1월 외계인의 존재를 숭상하는 한 사교단체가 인간복제 기술을 이용하여 복제아기를 출산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은 직후 한동안 그 진위를 확인하느라 전 세계가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이 발표에 이어 이번에는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보도되면서 이제 복제인간 탄생의 가능성은 더 한층 높아졌다. 이제는 다만 누가 언제 그 소식을 발표할 것인가 하는 점만이 중요하게 되었는바 복제인간의 탄생은 이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복제인간의 탄생이 임박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여기에 쏠려있는 사이에 생명복제 기술 또한 날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곤 한다. 이제 이 기술이 현재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 지를 잠시 살펴보면서 여기에서 파생되는 윤리적 문제점들을 점검해 보기로 하자.

특정인의 체세포로부터 추출한 세포핵을 여성의 난자에 주입해서 복제배아로 배양하는 기술이 확립되면서 이후의 연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그동안 얻어진 인간 유전자에 대한 정보와 유전자조작 기술이 함께 합쳐져서 특정한 유전자를 선별적으로 투입하거나 또는 배제시키는 그런 체세포복제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당뇨병 환자의 치료 목적으로 줄기세포를 배양한다고 하자. 이제까지는 단순히 환자의 체세포에서 핵을 추출하여 난자의 핵과 치환하고 그 난자를 배양해서 배아줄기세포주를 확보하여 그것을 환자의 몸속에 투여하면 당뇨병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하는 프로토콜하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환자가 선천적으로 인슐린 분비 장애를 가지는 유전병 환자라고 할 때 이런 식의 프로토콜만으로는 당뇨병을 완전히 치유하기가 곤란할 것이다. 이럴 경우에 인슐린 분비를 조절하는 정상적인 유전자를 다른 사람의 세포로부터 추출하여 환자 자신의 줄기세포에 넣어줄 수 있다면 필경 치료 효과는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악성 질환을 야기하는 유전자의 경우에는 그 반대로 그것이 제거된 줄기세포를 배양하여 치료효과를 높일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체세포복제 연구가 유전자조작 기술과 합쳐지는 것은 물론 면역학적인 연구와도 결합해서 다른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이식 가능한 장기를 생산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돼지로부터 인체이식에 거부감이 없는 심장이나 신장 등을 생산하는 연구인데 이런 연구가 실용화될 때 기증 장기의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불치병 환자들에게는 커다란 복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들은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복잡한 윤리적 문제점을 안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전자의 경우 단순히 복제인간의 출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슈퍼인간이 대량으로 복제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는데 이런 일이 현실로 나타날 때 예상되는 사회적 부작용은 가히 우리 상상을 초월할 것으로 짐작된다. 후자의 경우에도 적지 않은 윤리적 문제점이 예상되는데 인간과 돼지가 장기를 서로 공유할 수 있다면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필연적으로 인간키메라의 출현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생명공학 연구에 따르는 윤리적 문제들은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많은 윤리적 문제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생명공학의 발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며 인간 생명을 다루는 인간복제 관련 연구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이익을 무시할 수 없고 특히 불치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희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닫을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거의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어느 특정한 생명공학 기술에 대해 윤리성 문제에 국한해서 이분법적인 논쟁에 치우치는 그런 유감스런 상황을 이제는 과감히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앞에서 논의하였다시피 생명공학에 관련한 사회적 검토가 지금처럼 윤리성 저촉 여부에만 모아져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불러올 수 있는 사회적 파장에 대해서 전면적인 검토가 요구된다고 하겠는바, 이런 관점에서 불교계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이 모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홍욱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학과 및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물공학과를 거쳐 미시간대학교(Ann Arbor) 환경학 박사학위 취득.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 환경담당 책임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계간 과학사상 편집위원, 국무총리실 물관리정책민간위원회 위원이다. 저서로 《생물학의 미래》,《21세기 국가수자원정책》,《3조원의 환경논쟁 새만금》,《새천년 과학기술과 지식 기반 사회》(공저)와 역서로 《회의적 환경주의자》,《백년 후, 인간의 선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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