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 윤회, 사실인가 믿음인가

1. 들어가는 말

인간의 궁극적 물음의 주제는 바로 인간 자신 즉 '나는 누구이며 또한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물음은 인간 자신에 대한 규명을 근본적인 출발점인 동시에 최종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목적은 그것이 신화적, 종교적 물음이든 아니면 철학적인 물음이든 또는 그에 대한 접근방법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든 아니면 은유적이고 비합리적이든 결국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간이 인간 자신을 물음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의 불완전함이란 어떤 개념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까?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개념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존재적 측면에서는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죽음을, 그리고 둘째 인식적 측면에서는 무지를,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가치적 측면에서 욕망을 각각 불완전의 대표적인 요소로 들 수 있다.

이상의 세 가지 측면에서 요약된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과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인간의 물음의 시작이며 그것을 풀어나가려는 전 존재적 노력이 인간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물음을 푼다는 것은 인간이 불완전함을 넘어 완전을 추구한다는 의미와 연관된다. 이처럼 불완전한 요소를 지닌 인간이 그것을 넘어선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 브리하드아라냐까 우빠니샤드(Brhadaranyaka Upanisad)에서는 '비실재에서 실재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죽음에서 불사로'라는 압축된 기도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를 다시 풀어보면 존재적 측면에서의 불완전인 죽음에 대한 완전은 바로 불사 또는 영원으로, 인식적 측면에서의 무지는 지혜 또는 절대지로 마지막으로 가치적 영역에서의 욕망은 종교적 측면에서의 무욕 또는 일상적 측면에서의 완전한 충족으로 대비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목표는 도달 가능성보다는 불가능한,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완전한 신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먼저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적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일체가 괴로움(一切皆苦)이라는 불교적 명제를 떠올리게 하거나 때로는 비록 합리적 근거가 아니라 단지 직감적, 감정적 동의만이 가능한 언어적 조작의 방법으로 영어의 삶을 의미하는 live를 거꾸로 썼을 때 악을 의미하는 evil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처럼 완전에 대한 불가능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대로 인간의 포기와 좌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끈질긴 노력은 그러한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 가능한 목표로 바꿀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 결과 죽음과 불사의 중간에 장수를, 무지와 지혜 사이에는 학습을 그리고 욕망과 무욕사이에는 절제라는 개념이 새롭게 수정된 목표로 우리 앞에 제시된다.

이렇게 수정된 목표는 일상적인 인간들의 공통된 목표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인간의 목적에 대한 현실적 추구가 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처럼 인간의 삶의 목적이 수정된 형태로 제시되어 일상인에게 희망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 갈증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이처럼 풀리지 않는 갈증은 고대부터 오늘 날의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 물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수정된 목표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완전하게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 무지, 욕망이라는 세 가지 불완전의 요소 가운데 무지와 욕망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 가능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 가능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실처럼 느껴진다.

2. 죽음과 윤회

이처럼 죽음의 필연적 현상이 무지와 욕망보다 더 근본적인 난점를 제기하기 때문에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죽음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모든 불완전성을 대표하는 개념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불완전함을 대표하는 개념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떠한가? 이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끝 또는 마지막으로 간주한다.

끝 혹은 마지막으로서의 죽음은 바로 우리의 존재자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이 경우 죽음은 철저하게 존재적 문제가 된다. 존재적 문제로서의 죽음은 인간의 불완전에 대한 자각을 더욱 심화시킬 뿐 우리에게 완전함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존재의 한계는 적어도 그 존재자체의 노력으로는 그것의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도적 관점에서 죽음은 끝 또는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적인 흐름 속에 있는 변화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존재가 그 형태를 바꾸는 것일 뿐 근본적인 생명은 그자체로 영원하게 이어진다고 간주한다. 여기서의 연속적인 흐름을 인도에서는 윤회(samsara)라고 부른다. 또한 이 경우 죽음은 바로 존재자체의 소멸이 아니라 단지 존재가 그 형태를 변화시킨 것일 뿐이기 때문에 죽음을 불완전으로 간주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인식의 문제가 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도에서는 모든 불완전 또는 괴로움의 근원을 인식론적 무지(avidya)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어떤 형태로 극복하여야만 인간의 완전성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인도적 관점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적으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이 경우 죽음은 바로 생명체에게 주어져 있는 필연적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참된 존재로서의 영혼의 죽음이 아니라 다만 이름(nama)과 형상(rupa)의 토대인 변화하는 물질로서의 육체의 변화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죽음의 필연적 현상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 같은 필연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 수반하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죽음은 완전한 종말 또는 사라짐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를 위한 필연적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나간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통한 죽음의 극복은 인도사상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이 이처럼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변화에 불과하다면 그에 맞는 인간의 조건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여기서 인도신화에서 죽음의 탄생에 관한 신화를 통해 그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을 찾아 볼 수 있다. 태초에 불멸의 창조주인 브라흐마(Brahma)가 생명체를 창조했다. 처음에는 창조의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예기치 않은 문제가 나타났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창조된 생명체가 소멸됨 즉 죽음이 없이 존재만을 지속해 나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창조된 존재가 소멸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창조주인 브라흐마의 완전성과 불멸성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이것도 완전하고 저것도 완전하다. 완전함에서 완전함이 생겨났다. 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을 빼도 완전한 것만이 남는다'는 이샤 우빠니샤드(Isa Upanisad)의 구절처럼 완전하고 불멸인 브라흐마에서 나온 모든 창조물들 역시 그자체로 완전하고 불멸이었기 때문이다.

점차 대지위에 창조물들의 수효가 늘어만 가자 이를 견디다 못한 대지의 여신 쁘리뜨비(Prtvi)는 브라흐마에게 고통을 호소하면서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촉구한다. 이에 뚜렷한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던 브라흐마에게 쉬바(Siva)와 동일한 신으로 여겨지는 루드라(Rudra)가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창조물들 가운데 일부를 존재형태의 변화를 통해 천상의 세계에 올려다 놓고 그 나머지만을 지상에 둔 다음 그들을 주기적으로 순환시킴으로써 창조된 모든 생명체들도 온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대지의 여신의 고통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루드라의 제안을 받아들인 브라흐마는 생명체의 순환을 위해 존재형태의 변화를 일으키도록 하는 요인으로 죽음을 창조한다.

죽음에 관한 위의 인도 신화에서 우리는 존재자체의 소멸이 아니라 단지 존재형태의 변화를 일으킬 뿐인 기준점이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계기임을 발견한다. 아울러 이 신화는 이러한 존재형태의 변화가 그 변화되는 대상과 더불어 불변하는 본질이라는 이원적 구조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 요건은 변화하는 부분과 불변하는 두 부분으로 나뉘며 이에 대해 우리는 전자를 육체에 그리고 후자를 영혼의 속성으로 간주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영혼 또는 정신과 육체의 결합이라는 구조가 확립된다. 뿐만 아니라 이 신화 속에 나타나는 존재형태의 변화를 통한 주기적 순환이라는 관념에서 우리는 인도사상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윤회의 개념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형태의 변화로서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존재가 궁극적으로 영원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신화 속에서의 윤회관념은 오늘 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통스런 세계로서의 윤회가 아니라 바로 생명의 영원성 또는 영혼의 불멸성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이것은 고대 인도의 윤회관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주어진 것일 가능성을 암시한다. 인간 영혼의 완전성에 대한 이 같은 전제는 인도 종교와 철학 전반의 성격을 특징짓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인도사상 전반에서 인간의 불완전의 근본원인에 대해 죽음이라는 존재적 측면보다는 무지 혹은 무명이라는 인식론적 측면과 욕망과 집착이라는 가치적 측면을 더욱 강조하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인도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대한 극복의 노력이 윤회라는 독특한 개념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윤회란 무엇인가?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과 '흘러가다', '움직이다', '불다'를 뜻하는 동사어근 sri가 결합한 samsara로서의 윤회는 글자 그대로 함께 흘러감, 방황, 이동, 생의 변환을 의미한다. 바르마(V. P. Varma)에 의하면 윤회의 개념은 다음의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된다. "먼저 가장 대중적인 형태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은 방황하는 정신적 영혼으로 육체가 죽은 이후에는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죽은 자는 다시 인간의 형태로 태어날 수도 있고 동물의 형태로 태어날 수도 있다. 두 번째 윤회의 이론은 때때로 (신들의 세계와 같은) 어떤 초월적 영역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르마의 이 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윤회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후자보다 전자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자이든 후자이든 연속적인 흐름으로서의 윤회는 생명의 본질로서의 불멸성 또는 영원성을 물질적인 신체가 아니라 비물질적인 영혼의 속성 또는 본질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서 끝없는 흐름의 대상 즉 존재 형태의 연속적 변화는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담는 또는 플라톤의 말처럼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서의 물질적 신체의 문제일 뿐 영혼은 언제나 불변하는 영원하고 영속적인 존재이다.

3. 윤회의 기원과 상징

그렇다면 이 같은 윤회의 관념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어떠한 상징 속에서 윤회의 개념이 나타났을까?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을 통해 그 기원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자연계의 물질의 결합과 분리라는 순환적 과정에서 그것이 비롯되었을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 계절의 순환에 따라 식물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지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의 결과로 윤회관념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 같은 자연계의 순환에 대한 지속적 관찰을 윤회의 기원으로 본다면 이동성이 강한 유목민족보다는 정착적인 농경민족에게서 그것이 비롯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정된 한 장소에서 지속적인 자연의 생성변화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경험할 수 있었던 농경민족이 가축의 먹이로서의 초목이 사라지면 다른 초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야만 하는 유목민족보다 더 자연의 순환 다시 말해서 생과 사의 연속성 혹은 상호연관성에 대한 의식이 뚜렷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유목민족은 양자를 상호 연관적이기 보다는 도리어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생명체의 순환이 눈에 보이지 않고 경험 불가능한 영혼의 문제보다는 단순히 물질적 순환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자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적 관점 또는 유물론적 견해와 같은 순환에 머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는 단순한 물질의 순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윤회는 인간처럼 물질(육체)과 영혼(정신)간의 상호결합에 의해 생겨나는 어떤 개별적 존재의 연속적 흐름 또는 순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단순히 물질만이 아닌 어떤 일정한 개별적 존재의 특징을 유지하는 의식의 흐름이 반드시 전제된다.

두 번째는 생명체의 출산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한 출산만이 아니라 영혼의 개념 또는 조상숭배의 개념들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또 다른 자아'라는 인도적 관념은 자식의 출산을 통해 한 개체로서의 생명이 단순하게 죽음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져 나간다는 의식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의 플라톤이 인간의 성에 의한 출산이 바로 한계 지어진 생명체가 자신의 개인으로서의 한계를 넘어 신의 무한한 창조력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 역시 이와 같은 의미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연속성 또는 자기보존의 욕망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르마의 언급처럼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고대인은 어떤 형태로든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가 관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의 심리적인 바람의 일부인 듯하다. 고대에는 가족이나 종족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심지어 죽은 이후에도 죽은 자들이 혼령의 형태로든 조상신의 형태로든 자신의 종족 또는 가족의 삶과 연관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아의 윤회에 관한 관념은 이러한 원초적인 생각이 한층 세련된 것이다. 바르마는 계속해서 개인적 행위의 근거를 종족이나 부족 또는 가족이라는 집단의 명령규범 속에서 찾지 않는 환생개념의 형성과 수용은 집단의 응집력에 맞선 일종의 혁명적 도발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조상숭배를 포함한 생명체의 출산이 윤회관념과 연관된다고 하면 과연 한 생명의 개체성이 다음 생명(자손)에게 그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고대 부족 가운데는 새로 태어난 아기가 조상의 영혼의 이어짐이라고 간주하여 특정 조상과 같은 이름을 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윤회는 오직 가족 또는 혈족에 한정되기 때문에 까르마의 이론과 연관지어 생각해 본다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날 수 있다. 이보다 윤회 사상은 독립적이고 지속적인 개체성의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고대의 집단주의적, 종족중심적인 원시공동체의 응집력을 넘어 오히려 개인이 집단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 윤회는 태양 혹은 달의 순환과 연관되어 발생했다고 간주하기도 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태양의 뜨고 지는 현상 혹은 달의 차고 기우는 현상을 윤회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이 가운데 전자는 예를 들어 이집트의 태양숭배와 같은 사상과 연관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이집트인)의 신앙으로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어 영혼은 육체가 죽으면 육체를 벗어나 하늘 높이 날아올라 태양신 라에게 가지만 아무 때라도 다시 육체로 돌아 올 수 있다." 하지만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태양의 뜨고 지는 현상보다는 달의 차고 기우는 현상이 자연의 반복된 순환 관념과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태양이 항상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뜨고 지는 것에서 변화보다는 불변의 본질이라는 관념을 추구했다고 간주한다. 태양이 서쪽으로 지고 다음날 동쪽으로 떠오르는 것 그가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은 윤회라기보다는 일종의 부활의 의미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은 변화로서의 의미보다는 언제나 규칙적 혹은 필연적이라는 불변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념은 인도 사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쁘라스나 우빠니샤드(Prasna Upanisad)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각을 통제하는 고행, 금욕, 믿음, 초월의 지혜로서 아뜨만(Atman)을 찾아가는 자는 북쪽의 길로 가는 것이며 이 길을 가는 사람은 태양의 세계를 얻는다. 그곳은 모든 생명체의 근거지요, 불멸의 장소, 두려움이 없는 곳, 궁극적인 목적지이다. 그 곳에서 그들은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으며 그것을 (윤회)의 끝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윤회 또는 재생의 관념은 태양보다는 달이 차고 기우는 모습에서 더 쉽게 추론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달은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신 끊임없이 재생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원시인의 의식에서 달의 우주적 운명에 대한 직관은 인간학의 기초를 형성한다. 즉 인간은 달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반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모든 생물의 생명이 그렇듯이 인생에도 종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신월이라는 현상에 의하여 달은 인간의 재생에 대한 갈망에 신생의 희망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마다 초생달-보름달-하현달-그믐으로 이어지는 달의 주기적인 순환이 생과 사의 일정한 반복 즉 재생의 관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인도에서는 태양과 달에 대한 이 같은 관념이 보다 극명하게 나타난다. 인도인들은 죽은 자가 가야할 길을 조상의 길(pitryana)와 신의 길(devayana)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고 전자는 윤회의 연속이고 후자는 윤회를 벗어난 해탈의 길이라고 말한다. 위의 설명에서 조상의 길은 달과 연관되는 반면 해탈의 길은 태양의 길과 연관-때로는 달의 주기로 설명-되기도 한다. 원래는 독립적이었던 두 가지 사상의 결합으로 간주되는 이 관념은 바로 태양과 달이 우리에게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이론들을 윤회의 기원으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관념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보다는 그것들이 시간이 흐르고 인간의 의식이 발전함에 따라 종합적으로 취해진 결과라고 간주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결국 윤회의 이론은 인간이 죽음에 대한 불완전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영속함으로써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지속적이고 심원한 열망에 주어진 한 가지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윤회관념은 해탈, 까르마, 요가등과 더불어 인도만의 고유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4. 동서양의 윤회관

영속적인 존재에 대한 추구 다시 말해서 불완전을 넘어선 완전에 대한 추구는 인도만이 아니라 시간 공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들에게 절실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윤회가 비록 동일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단순히 인도만의 사상이 아니라 서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양에서의 윤회관을 먼저 살펴보면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이집트의 환생 개념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집트인들은 영혼은 육체가 죽으면 태양신 라에게로 가지만 다시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육신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이전에 죽은 육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야 영혼이 되돌아 왔을 때 원형대로 보존된 육신을 자기 것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이집트인으로 하여금 죽은 시신을 보존할 수 있는 미이라를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이집트인의 환생 개념은 죽은 영혼이 되돌아 올 때 다른 신체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 다시 말해서 죽은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존한다는 것은 영혼이 이전의 죽은 자로 다시 되돌아옴을 의미한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윤회로 번역되는 samsara의 인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관념은 영혼이 이전과는 다른 육체로 태어날 수 있는 윤회라기보다는 일종의 부활의 개념과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은 이후 오시리스의 심판을 거쳐 죄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면 괴물에게 잡아 먹혀 버리는 반면 죄가 없다고 판정받으면 다시 인간으로 -혹은 예를 들어 새나 짐승 심지어는 벌레와 같은 자신이 원하는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 역시 도덕적 인과율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인도적 윤회관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그리스 사상 속에서는 윤회 즉 영혼의 순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있을까?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을 우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를 통해서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죽은 자는 하데스의 영역으로 내려가 다시는 살아있는 자의 영역으로 되돌아 올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은 죽으면 그저 소멸되는 것일 뿐으로 영혼의 윤회나 환생 혹은 부활과 같은 것을 불가능하다. 비록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의 경우와 같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은 자를 살아있는 영역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떠난 하데스로의 모험은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그리스 사상에서는 이 같은 특징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성격의 윤회관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르페우스 종교와 피타고라스 그리고 플라톤의 사상이다.

오르페우스 종교는 트라키아 지방에서 성행하던 디오니소스의 숭배가 기원전 8세기경 희랍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생겨난 종교로 그 명칭은 태양신 아폴로와 카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믿어진다. 오르페우스 종교에서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자는 선의 요소를 후자는 악의 요소를 각각 대표한다. 원래 인간의 영혼은 완전한 존재로서 신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죄를 지어 그 벌로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지상에 태어나 죄를 완전히 씻을 때까지 계속해서 지상에서의 삶을 반복해야만 한다.

죽음은 영혼을 그 감옥인 육체에서 벗어나게 만들지만 그것으로 원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육체 속으로 계속해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죄를 완전히 씻어내면 마침내 불사의 본질로 복귀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오르페우스의 윤회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의 윤회사상과 상당히 유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오르페우스 종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아폴론적인 이성을 유지했던 피타고라스 역시 수학의 원리로 우주를 설명하면서 철저하게 윤회를 인정했다. 그는 오르페우스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은 불멸의 실체이며 신에게 속해 있었지만 죄로 인해 그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육체 속에 갇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두가 상반된 속성의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인해 삶은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어느 날 그가 강아지를 때리고 있는 사람에게 그 개가 전생의 자기 친구의 영혼이 깃든 것이니 때리지 말 것을 간청했다는 일화를 통해 우리는 그가 윤회를 얼마나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윤회는 도덕적 인과율에 의해 결정된다는 관념을 가지고 철저하게 육식을 금하고 금욕생활을 지켜났다. 그의 이 같은 생각은 삶을 괴로움(duhkha)로 간주하고 까르마로서의 도덕적 인과율을 윤회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인도적 관점과 흡사하다.

이외에도 우리는 그리스의 대표적 사상가 가운데 한명인 플라톤에게서도 윤회사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저서 파이돈에서 케베스의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 형식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하데스에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세.

아주 오래된 설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에 갔다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 죽었던 가운데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지 만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우리의 영혼은 저세상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하면 영혼이 다시 날 수는 없을테니까." 그는 계속해서 생성은 되살아나는 것이며 되살아나는 것이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라면 죽은 자가 산 자로부터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 자도 죽은 자로부터 생긴다고 결론짓는다.

플라톤의 사상 역시 앞에서 언급한 인간의 영혼의 본질과 육체와 영혼을 선과 악으로 대비한 오르페우스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러한 그리스의 윤회관이 이집트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헤로도투스는 피타고라스가 이집트로부터 환생의 이론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라다끄리슈난은 이미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집트의 사상이 윤회보다는 일종의 복사의 개념과 유사한 부활의 의미에 가깝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보다는 동양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그리스의 윤회사상은 라다끄리슈난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상당히 반그리스적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진위가 어찌되었든 그것이 적어도 인도의 윤회사상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에 주목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유대교의 카발라에서도 우리는 윤회사상의 흔적을 상당히 많이 찾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서도 널리 인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7년 사해지방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사본은 예수의 가르침이 그보다 적어도 100여년 앞서 있던 에세네파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사해 사본에 의하면 에세네파는 윤회설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오리게네스 등과 같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윤회관념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니케아 회의를 거쳐 윤회사상을 부정하기 시작하다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부인 데오도라가 기독교 단성론자들과 결탁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제 5차 공의회를 개최하고 여기서 플라톤 사상에 입각하여 윤회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의 이론을 이단으로 결정함으로써 기독교에서 윤회라는 관념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영혼이 탄생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영혼의 선재론도 부정되면서 생은 오직 1회적인 것으로 고착된다.

아마도 윤회론이 부정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여러 번 반복된 생을 통해 결국은 모든 인간이 괴로움 혹은 자신의 잘못을 벗어나 완전한 구원 혹은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윤회의 이상적 관념이 황제나 교회 또는 기독교 사제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이후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서구 사회에서 윤회 사상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서양의 고대 윤회 사상이 위와 같다면 동양에서는 과연 어떠했을까? 여기서는 중국보다는 그것의 특성상 인도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윤회 또는 다시 태어남이라는 개념이 언제 본격적으로 인도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마다 견해가 다르다. 어떤 이들은 초기 베다에는 영혼이 이승으로 환생한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리그베다와 브라흐마나스에서 그런 개념이 발견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브라흐마나스에서 영혼의 윤회관념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시대의 사제들이 선한 행위를 통해 좋은 가정에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다는 사실을 들어 이미 윤회가 도덕적 인과율인 까르마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2장의 내용을 토대로 비록 뚜렷한 가시적 증거는 없을지라도 모헨조 다로와 하랍빠의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초기 때부터 이미 그러한 관념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원에 대한 논란을 별개로 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브라흐마나스에서 윤회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고 우빠니샤드에 이르면 보다 분명한 형태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까타 우빠니샤드(Katha Upanisad)에서는 죽음의 신 야마와 나찌께따의 대화를 통해 윤회의 관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산 사람은 곡식과 같이 익어서(죽은 다음) 다시 곡식과 같이 태어난다고 말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죽음의 탄생에 관한 인도신화에서 밝힌 것처럼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존재 형태의 변화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도에서의 윤회가 단순히 물질적 육체의 순환만이 아닌 영혼의 회귀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물질로서의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 태어남 또는 윤회란 과연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이집트의 부활처럼 동일한 신체와의 결합인가? 아니면 다른 신체와의 결합인가? 만일 후자라면 어떻게 이전의 존재와 다시 태어난 존재 사이에 동일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또한 어떤 방법으로 인간이나 동물처럼 특정한 신체와 결합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연적 결합인가 아니면 어떤 필연적인 조건이 있기 때문인가? 이에 대한 인도적인 해결책은 바로 까르마(karma)라는 개념이다. '행위하다'라는 동사어근 kri에서 파생된 까르마는 베다시대 제식 속에 들어있는 주술적인 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후에 존재적 관점에서는 우주적 인과율 그리고 도덕적 관점에서는 도덕적 인과율로 발전한다. 그 결과 업으로 번역되는 까르마는 일상적 행위의 개념을 넘어 그 이면에 있는 행위의 동기와 그에 뒤따르는 일련의 객관적인 결과를 의미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행위의 결과로 쌓여진 까르마가 영혼에 육체를 끌어당기는 일종의 견인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견인력으로서의 까르마는 신체가 가시적인 물질인데 비해 비가시적인 비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영혼의 비물질성과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상캬철학에 의하면 뿌루샤인 영혼은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순수주체인데 비해 까르마는 쁘라끄리띠의 요소로서 비록 비물질적이기는 하지만 인식의 대상될 수 있는 물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도에서의 인간관은 서양을 비롯한 일반적 관점에서 물질과 영혼이라는 이원적 요소의 결합인데 비해 인식의 주체로서의 영혼(뿌루샤 또는 아뜨만)과 이기적 자아와 같은 인식 대상으로서의 비물질적 사유와 물질로서의 신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영혼은 영원불멸하는 본질인 반면 육체는 흙, 물, 불, 바람의 네 가지 요소의 결합과 분리를 통해 개별자의 소멸과 생성을 그리고 까르마는 바로 불변하는 영혼과 변화하는 물질을 상호 결합시키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이러한 관념은 후에 불교에 이르면 업에 의한 연기설로 나타난다.

이 까르마는 개별자가 특정한 시간 공간적 환경 속에서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면서 인도에서 자연스럽게 도덕적 인과율의 형태로 확립되어 나간다. 이 때문에 바가바드기따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같은 도덕적 인과율로서의 까르마가 윤회와 결합하면서 까르마의 완전한 소멸이 바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해탈의 이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5. 맺음 말

이상에서 우리는 고대문명 사회와 인도 특히나 불교이전의 인도사상 속에서의 윤회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윤회의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는 존재의 조건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단순히 물질적 존재에 국한되는 경우 그것은 단순한 유물론적 관점의 자연의 순환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것이 윤회의 본래적 의미가 아님은 분명히 알고 있다.

윤회가 성립되려면 반드시 변화하는 물질적 존재 너머 영혼 또는 아뜨만과 같은 어떤 불변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통해 영혼이 육체의 틀을 벗어나 또 다른 존재의 영역에 있다가 다시 육체로 되돌아오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윤회는 물질의 순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혼의 순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점은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첫째 되돌아오는 영혼이 죽기 이전과 같은 신체 속으로 복귀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신체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죽은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존했던 이집트인의 의식 속에서 영혼의 재탄생이 동일한 신체로의 복귀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한 영혼이 동일한 신체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전의 존재가 다시 돌아온 것과 같은 인격임을 알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에 대한 가장 상식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인도적인 관점의 윤회와는 분명히 다르며 이미 밝힌 것처럼 윤회라기보다는 일종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는 재생과 환생이라는 말을 윤회로 대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용어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서로 유사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세부적인 관점에서는 분명하게 차이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재생과 환생이라는 말의 범위는 인도적 윤회뿐만 아니라 이집트적 부활의 의미까지도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윤회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부활과 어떻게 다른가? 또한 만일 영혼이 동일한 신체 속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두 생사이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고대의 종족, 부족, 가족중심적인 영혼의 순환이론을 일단 그 해결책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윤회하는 개별자의 개별적 특성이 완전히 무시되는 단점을 안고 있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에 대한 인도적 해결책은 4장에서 언급한 까르마의 이론이다. 이 도덕적 인과율로서의 까르마를 통해 윤회하는 존재는 각 생에서의 고유한 개별성과 동시에 이전 영혼과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또한 이러한 윤회관은 단순하게 고통스러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면에 모든 생명체는 생의 연속성을 통해 반드시 그것을 벗어난 완전한 존재에 이를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인도적인 윤회관이 그렇다고 해서 초기부터 이러한 관념이 분명하게 확립되어 전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까르마의 도덕적 의미와 같은 문제는 불교의 출현을 통해 보다 합리적인 이론의 틀을 확보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는 윤회의 범위를 식물까지 확대했던 이전의 관점에서 동물까지로 축소함으로써 윤회를 보다 영혼 또는 정신을 가진 의식적 혹은 이성적 존재의 문제로 다루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윤회관을 알기 위해서는 불교와 그 이후 인도의 제반 사상들의 출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형준
중앙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후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Buddhist Concetion of Anatman in the perspective of Early Upanisad(초기 우빠니샤드의 관점에서 살펴본 불교의 무아개념)으로 철학박사학위 취득. 현재 원광대학교 도양학대학원 강의교수로 재직중이며, 중앙대·건국대·한경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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