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지야마 유이치(梶山雄一) 지음, 김성철 옮김, 《空(공)입문》(동국대학교출판부, 2007) -

《空(공)입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7
올해(2008) 설 연휴는 유난히 긴 느낌이다.

그 끝자락에 《空(공)입문》을 읽었다. 이 책 뒤에 정리된 참고문헌에는, 저자 가지야마 유이치(1925~2004) 선생이 쓴 《반야경》 관련 책들의 목록이 제시되어 있다. 그렇게 원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축적해온 노대가(老大家)가, 반야사상의 위대한 조사 용수(龍樹, 나가르쥬나, 150~250년 경)의 “사상과 종교를 현대에 통용되는 말로 가능한 한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한 시도”(머리말)가 이 책이라 한다.

설일체유부나 용수의 사상은 불교 중에서도 가장 고도의 철학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난해한 것이다. 그것을 가능한 한 알기 쉽게 써보자고 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실제로 알기 쉽게 썼는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15~16쪽)

저자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최초의 독자’인 역자 김성철(金成哲) 박사의 판단은 어떤지 궁금해진다.

비록 대중적인 어휘로 쉽게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 책이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나타나는 설명의 무게감과 심오함은 쉽지만은 않다. 칸트를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초등학생에게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한 부분의 이해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역자후기, 186쪽)

역자는 ‘무작정 쉽지만은 않’고, 초등학생에게 칸트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 쉽지 않은 것일까?

空, 쉽지 않은 까닭은

무엇보다 사유(思惟)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우주의 시작이나 인생의 길흉화복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삶의 현실에는 그 뒤에서 ‘밧줄’을 드리우고 조종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 ‘존재’를 신이라느니, 정신이라느니 해왔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관념론이라 말한다. 그 어떤 ‘존재’를 물질이라 말하는 부류도 나타났다. 이른바 유물론이다. ‘정신’ 내지 ‘신’으로부터 풀어오든지, 물질로부터 풀어오든지 간에, 이러한 사유는 공히 어떤 ‘존재’로부터 이 세계의 현상을 설명한다. 그 ‘존재’가 하나라면 일원론, 둘이라면 이원론, 셋 이상이라면 다원론이 된다.

이러한 사유경향은 인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브라만이니 아트만이니 하는 것들이, 서양에서의 신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을 상정하는 사고방식과 같은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이나 현상의 배후, 내지는 근저/최초에 어떤 ‘존재’가 있으며, 사물이나 현상은 바로 그러한 ‘존재’로부터 전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유체계를 존재론 또는 형이상학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서양이나 인도의 사유체계는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럼 불교는 어떨까? 불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는 ‘존재/유’로부터가 아니라 ‘비존재/무’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유는 무에서 나온다(有生於無)”라고 말한다면, 최초의 존재인 무 역시 사실상 ‘존재/유’에 다름 아니게 된다. 불교는 이러한 사유방식과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형이상학적 관심을 내다버린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붓다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전유경(箭喩經)》이나 《밧차고타경(火喩經)》에서 취한 태도이다.(172~173쪽 참조) 형이상학적 사유가 낳은 신이나 정신, 물질 등은 모두 변함없이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말씀하신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저자 가지야마 선생은 우리에게 용수의 공사상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서, 그 예비지식을 먼저 주입한다. 초등학생을 대학원생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제1장 붓다의 공사상, 제2장 유의 형이상학, 제3장 대승의 공사상 등은 《空(공)입문》의 입문이다. 그 중에서 제1장 붓다의 공사상은 무상(無常)으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것은 무상이다’라고 하는 것이 붓다 가르침의 기본이었다.”(23쪽)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 우리들조차 무상을 절감하거나 체감(體感)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나는 우리들의 불교공부에서 이 ‘무상’, 즉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좀더 강조되어야 마땅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저자도 마찬가지 입장을 내보이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의 끝이 ‘3. 유한성의 자각’이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결국은 죽어 없어지는 몸이라는 인간의 시간적 유한성의 자각, 불교로 말하면 무상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을 죽음이 없는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업보윤회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절대평안에 의해 초월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업보윤회하는 인간의 유한성의 자각은 절대평안으로 초월하기 위한 받침대인 것도 확실하다. 도덕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니지만 도덕적 자각 없이 종교적 자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183~184쪽)

무상은 유한성의 자각이다. 무상한 것에서는 영원한 것(=존재=실체=실재=본질)이 없다. 그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그렇게 무상하고, 무아인 까닭은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緣起)이므로 무상하고, 무상하므로 무아이다. 이러한 이치를 《반야경》에서는 ‘공’이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 공은 이미 《숫타니파타》에서부터 설해졌다고 한다.(28쪽)           

空, 어렵지 않은 이유는

연기를 이해할 수 있으면 공은 어렵지 않다. 연기가 바로 공이기 때문이다. 한자로 ‘空’(빌 공)이라서, 뭔가 ‘블랙홀’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되어서 어렵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공이라고 말하면 부정적·소극적으로 들린다. 용수는 공이 연기라고 말한다. 연기란 사물이 생기하고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긍정적·적극적인 표현이다. 모든 것이 실체를 갖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해서 발생하고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공이다.(147쪽)

연기를 공이라 말했다. 연기를 이해한다면, 공은 어렵지 않다. 사유방식의 차이는 개념의 차이를 낳는다. 보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 다른데 동일한 개념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라느니, 무라느니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사용해서 붓다가 본 것, 용수가 본 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니, 새로운 말이 필요해진다. 연기, 무상, 무아, 공……. 이렇게 불교의 언어는 세속의 언어와는 다르게 된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진다. 《空(공)입문》이 이문열의 《삼국지》만큼 팔릴 수도 없고, 읽힐 수도 없는 이유이다.

공은 유라느니 무라느니,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말해질 수 있는 사유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공은 무엇이라 말해지는가? 유라고도 말하지 않으며, 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생이라고도 말하지 않으며, 멸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말했던 것이다. 유와 무, 생과 멸의 대립을 뛰어넘는다. 그것들은 모두 ‘판단’(分別)이기 때문이다. 다시 비유비무라거나 불생불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책상의 비유’를 든다.

예를 들어 현재 내 눈 앞에 있는 책상이라는 개별적 사물은 실은 ‘책상’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그 앞에 앉아 그 위에 책을 놓고 읽으면 그것은 책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걸터앉으면 그것은 의자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도끼로 패면 그것은 순식간에 장작이 되고, 스토브에 불을 지피면 재가 되어 연기로 사라져 무(無)로 돌아가고 만다.(73쪽)

책상이 책상이기만 하다면, 책상은 실체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이 부분에서 구효서의 소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이 생각났다. 통조림깡통은 깡통따개로만 따야 되는 줄 아는 주인공은 깡통따개를 찾아 온 마을을 다 돌아다닌다. 그러나, 없다. 그때 한 농민이 호미로 깡통을 따버린다. 깡통따개가 깡통따개라는 실체를 갖고 있었다면, 깡통따개 외에는 깡통을 딸 수 없어야 한다. 호미가 깡통따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호미와 깡통따개가 공히 고정적인 실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호미도 깡통따개도 공히 공이다. 이 소설은 공의 작용, 즉 공용(空用)을 드러내준 것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앞서 공은 비존재/무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다시 ‘꿈의 비유’를 든다.

공은 무(無) 혹은 비존재(非存在)가 아니기 때문에, 앞서도 말한 것처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공은 때때로 꿈이나 마술로 비유된다. 꿈에서 본 것 또는 마술이나 비전(vision)은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아니고’가 ‘많고’로 되어 있으나, 역자도 오류라고 확인하였다.―서평자), 또 보이고 있는 이상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공이 되는 셈이다.(91쪽)

그렇다. 나는 또 ‘드라마의 비유’를 들고 싶다. 공은 드라마(drama, 劇)다. 작년에 내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로 〈완벽한 이웃이 되는 법〉(SBS)이 있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아니 그 드라마를 보고 난 뒤 현실로 돌아와서도 내 의식 속에는 그 드라마 속의 삶들이 실제 서울 어딘가에서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니 드라마가 마냥 무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픽션이, 무라고 할 수도 없고 유라고 할 수 없음을 갈파한 것은 일찍이 우리의 의상(義相, 625~702)스님이셨다. 이러한 생각을 나는 〈드라마 --- 완벽한 이웃이 되는 법 --- 〉라는 제목의 시로 정리해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그 일부만 옮겨 보기로 한다.

윤희는 어느새 배두나로 돌아와 무슨 광학기기 디지털 광고의 모델이 되고
밤낮으로 女福이 두 배나 많은 김승우는 또 무슨 영화라도 찍고 있겠으나
아무래도
북아현동이나 고덕동이나
그 어디를 가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이 있을 것이다
“저 웬수~” 윤희 엄마는 목을 따고
의처증 남편의 예쁜 아내는 맨발로 쫓겨나 골목을 달리고
곤이는 남도 사투리로 귀여울 것이다

드라마가 오히려 실(實)일 수 있다. 우리 현실이 허(虛)임에 비해. 그런 의미에서 극락이 오히려 실이며 우리의 현실이 허라고 말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 1889~1962)였다. 탁견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공사상이, 《반야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여기에 있다. 드라마로 알고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현실을 허로 생각하고,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서 연극하듯이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 수 있을 때, 그 삶을 바라밀이라 한다. 반야바라밀, 지혜의 완성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공은 분명 쉽지만은 않다. 우리가 초등학생이어서가 아니라, 이치로 사상 내용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그것은 조금 노력하면 된다. 강의 좀 듣고, 책 좀 보면 된다.) 몸으로, 우리 삶에서 받아들여서,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자꾸만 ‘공’을 밀어낸다. 이론적인 차원에서까지 밀어냄으로써, 실천적인 차원의 밀어냄을 정당화한다. 일찍이 이러한 상황을 《상윳타 니카야》 산문 부분에서도 예언하고 있었다 한다.

실로 비구들이여, 미래세에 비구들은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여래가 설한 그 경전들은 심원하고 의미 깊으며, 세간을 넘어, 공성에 속하는(su쁭쁭ata-pat.isam?utta) 것이다. 그것이 설해졌을 때 〔비구들은〕 잘 듣지 않을 것이다. 귀를 기울이지 않고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수지해야만 하고 숙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33쪽)

이론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공을 받아들여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 우리에게는 집착해야 할 그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붙잡고 놓지 않을 ‘밧줄’이 필요하다. 그게 중생이다. 그래서 그토록 사람들이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주체가 없기에, 무아이기에 윤회할 수 있지, 주체가 있다면 윤회할 수 없음”(어느 사석에서, 승가대 송찬우 교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실체도 이 세상에서 죽은 후 저 세상에 태어날 리는 없다. 다만 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부터 공에 지나지 않는 것이 태어날 뿐이다.(161쪽)

그래도 사람들은 그 ‘밧줄’을 놓지 않는다. 왜? 살고 싶은 것이다. 죽어서까지, 죽은 뒤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은 욕망/집착이 윤회에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 가지야마 선생은 분명히 알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공으로부터 공이 태어날 뿐이라고.

결론적으로 정리해 보자. 공, 쉽지도 않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비이비난(非易非難)이다. 불교가 책 안에만 있지 않다(敎外別傳)는 것은, 불교가 머리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삶과 수행에서 집착의 ‘밧줄’을 놓을 수 있을 때, 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윤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자유롭게.

꿈 속에서는 여섯 갈래가 뚜렷하더니
꿈 깬 뒤에는 삼천대천세계가 도무지 없노라.(영가현각, 《증도가》)

번역과 관련한 아쉬움

〈역자 후기〉를 통하여, 김성철 박사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을 추천해 주신 동국대 김호성 교수님과 ( ---- )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는데, 참 다행이었다. 가지야마 선생의 공 이해가 나의 공 이해와 다르지 않아서 기뻤다.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일은 이제, 역자가 말한 대로 ‘독자의 몫’이리라. 노력 없이 되는 일이 있겠는가. 다만,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번역과 관련한 아쉬움을 두 가지만 지적해 둔다. 
첫째, 형식을 변경한 점이다. 〈역자후기〉에는, 그러한 형식변경에 대한 고백이 있다.

본래 강연의 원고였던 까닭에 원서는 경어체로 이루어져 있고 구어적 느낌도 살아있다. 하지만 번역과정에서 출판사와 협의해 경어체를 평서체로 바꾸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자의 원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186쪽)

역자의 ‘최선’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할 일이지만, 원서의 경어체와 구어체를 평서체로 바꾼 것은 잘못이다. 원서처럼 경어의 구어체를 그대로 옮겼더라면, 독자들에게 이 책은 ‘혼자서 읽는 책’이 아니라 ‘저자로부터 직접 강의를 듣는 책’이 되었을 것이다. 읽는 것보다 듣는 것이 쉽게 다가온다. 그랬더라면 독자들은 좀더 친절하게 공의 세계로 안내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형식의 무거움이다. 메시지를 전하는 형식은 메시지의 내용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다.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둘째, 역자가 보이지 않는다. 원래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한 탓인가, 김성철 박사는 전혀 자기 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반야경》의 사상을 원천으로 하는 양대 대승학파가 바로 중관파와 유가행파”(역자후기, 185쪽)인데, 역자는 유가행파를 전공하였다.

역자가 지적한 것처럼, 《空(공)입문》을 무작정 쉽지만은 않게 하는 “군데군데 나타나는 설명의 무거움과 심오함”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줄 역자 주(註)를 달아주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초등학생’을 다소라도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며,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와 역자의 대화, 공을 주제로 한 중관파와 유가행파의 토론을 지켜보는 솔솔한 재미까지 독자들에게 덤으로 안겨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그렇게 ‘역자 주’를 통한 적극적인 참여야말로, 번역을 일방적인 문화전달이 아닌 문화교류로 승화시켜 줄 것이다. 거기에 우리 학문의 자존심도 지켜질 수 있으리라.

어쨌든, 번역과 서평의 “잔치는 끝났다!” 《반야경》, 공, 그리고 용수가 어느 만큼 손에 잡히는지, 독자들이 직접 확인하는 일만 남아 있다. 패기찬 독자들의 겁 없는 도전주의(挑戰主義)를 기대해 본다. ■
 (2008. 2. 12)

 

김호성 /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 저서로 《대승경전과 禪》 《천수경의 새로운 연구》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역서) 《책 안의 불교, 책 밖의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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