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을 위한 그리스도교 이야기 ⑨

지난 회에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었던 큼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번 호에는 20세기 중반 그리스도교에서 발달한 신학적 흐름을 개괄해 보고자 한다.

신학적 지평을 넓힌 신학자들

20세기 중반 그리스도교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신학적 노력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대표적이고 영향력이 있던 신학자들 셋을 들라면,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디이트리히 본회퍼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물론 영향력이 큰 신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결함이 있음을 선언하고 복음적 ‘신정통주의 신학’, 혹은 ‘변증법적 신학’을 제창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가장 두드러진 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톨릭 측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좀 더 현대화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자로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론’으로 유명한 독일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신학적 인식론에 공헌한 캐나다 신학자 버나드 로너간(Bernard Lonergan, 1904~1984), 여러 문제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 1882~1973) 등을 들 수 있다. 지면상, 여기서는 위에 열거한 처음 세 신학자의 기본 사상을 간단히 일별해 보기로 한다.

1)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 신약학 교수로 있던 불트만은 개명 시대 이전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진술된 성경은 기본적으로 ‘신화적’이라고 주장했다. 우주를 하느님과 천사가 거하는 하늘, 사람들이 사는 땅, 그리고 마귀와 악한 천사들이 득실거리는 지하 세계, 이렇게 3층 건물처럼 생겼다고 믿는 우주관 때문에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죽어 지하 세계로 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등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병이 들어도 그것이 병균이 아니라 악귀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 등도 이런 고대 신화적 세계관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라 보았다.

불트만은 이런 고대 신화적 진술은 이제 물이 지나도 한참 지난 것으로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이라 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m)’이 없이는 성경에 나오는 이런 신화적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물어본다. “우리는 현대인이 복음만이 아니라 이런 신화적 견해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런 신화적 표현은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기별이 아니라 고대 문화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존재하는 것은 이런 고대 신화를 문자적으로 가르치고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성경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다 제거해야 할까?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참된 목적은 지금 있는 대로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 그림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표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를 버릴 것이 아니라 신화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배우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두고 신화를 ‘우주론적으로가 아니라 인간학적으로, 혹은 실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표현했다.

그러면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서 발견해야 할 기본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는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같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기별이라 보고 이것을 ‘케류그마(keyugma, 선포)’라 불렀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신화적 표현에서 케류그마를 찾아내기 위해 성서를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이론은 서양 신학계에 큰 충격이었다. 그 결과 그의 이론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계승, 수정, 발전시키려는 ‘불트만 학파’까지 형성될 정도였다. 여기서 한 가지만 지적할 것은 ‘비신화화’ 혹은 ‘탈신화화’라고 하여 성경에서 신화를 없애자는 시도라는 인상을 주기 쉽지만, 불트만은 결코 신화를 없애자고 한 것이 아니라, 신화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거기에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실존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신화화’라는 말 대신에 ‘탈문자화(deliteralization)’이라 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고 지적한 폴 틸리히의 지적이 옳다고 볼 수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신화란 보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므로 신화가 없이는 종교적 진리를 표현할 길이 없기에 차라리 오늘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는 신화로 다시 표현한다는 뜻에서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2)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틸리히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차 세계 대전에 군목으로 봉사하고, 그 후 여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강의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미국으로 망명, 1956년까지 뉴욕의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그 후에는 하버드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했다. 틸리히는 미국 신학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로 꼽히고 있다. 그의 신학 사상 중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틸리히와 관련해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믿음 혹은 종교를 ‘궁극 관심(ultimate concern)’이라 보았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우리를 무조건 사로잡고 우리의 절대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종교나 신앙이라는 뜻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궁극 관심’을 갖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누구나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궁극 관심이 돈, 명예, 권력, 성 같은 세속적인 사물에 관한 것이면 그것은 ‘사이비(pseudo)’ 신앙에 불과하다. 그 대상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같은 정치 이념이나 예술이나 과학과 같이 한정된 문화적 형식과 관련된 것이면 그것은 ‘유사(quasi)’ 신앙이다. 진정으로 초월적인,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궁극적인 대상에 관한 궁극 관심만이 진정한 종교 내지 신앙이 된다고 보았다.

틸리히는 궁극 실재가 저 하늘 위에 존재하는 유신론적 인격신과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궁극 실재로서의 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궁극 실재를 인격적(personal)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신이 하나의 인격(a person)은 아니라고 하였다.

신을 인격으로 묘사한 모든 교설들은 궁극 실재를 상징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보았다.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은 상징을 통하지 않고서는 논의될 수 없기에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서 표현되지만, 궁극 실재는 이런 상징 너머에 있다. 우리가 일상으로 말하는 인격신은 이런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 너머에 있는 신(God beyond the God)’ 그리고 ‘신은 신의 상징(God as the symbol of God)’이라는 말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신을 높이(height)로 생각하기보다 깊이(depth)로 생각하여야 한다고 하며 우리 속에 거하는 신의 내면적 실재성을 강조했다.

틸리히에 의하면 이런 궁극 실재로서의 신을 ‘하나의 존재(a being)’로 생각하면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고 특별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존재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기에, 그 궁극 실재로서의 신은 ‘존재 자체(being-itself)’ 혹은 ‘모든 존재의 바탕(Ground of all being)’이라 했다. 화엄 사상에서 말하는 ‘법계(法界, dharmadhātu)’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법계를 영어로 ‘realm of all being’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틸리히는 특히 종교 상징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상징은 그 자체 너머에 있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고, 상징 자체를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궤를 같이하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틸리히는 불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책도 썼다. 말년 시카고 대학에서 엘리아데와 세계 종교에 대해 공부하고, 자기에게 시간이 좀 더 있다면, 그의 조직신학 책을 세계 종교사의 빛 아래에서 다시 쓰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이웃 종교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했다.

3)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eoffer, 1906~1945)
흔히 ‘독일의 양심’이나 ‘천재 신학자’로 불리는 본회퍼는 베를린 대학 신경과 의사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튀빙겐, 로마, 베를린 등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27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0년 대학교수 자격을 획득했지만 너무 어려 1년간 미국 뉴욕의 유니언 신학대학원에서 연구과정을 거치고, 다음 해 베를린 대학교 조직신학 강사 및 교목이 되었다.

독일 복음주의 교회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동조할 때 이에 저항하기 위해 세워진 독일 고백교회(Bekennenden Kirche, Confessing Church)를 칼 바르트와 함께 이끌면서, 고백교회 목회 후보자를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의 일을 맡았다. 1937년 이 기관이 폐쇄되고, 1938년 독일 경찰의 압력으로 베를린에서 추방당하자, 장소를 바꾸면서 1940년 3월까지 목회자 양성 교육을 계속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그의 책 중 가장 잘 알려진 나를 따르라와 신도들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곳저곳 장소를 옮겨 다니는 중 1939년 6월 한 달 동안 뉴욕에 머물렀는데, 많은 사람들이 망명하기를 권유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갔다. 그를 초청한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에게 남긴 그의 편지에서 “나는 우리 민족사의 힘든 시기를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겪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며 사람들을 살상하는 경우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식이나 치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운전사를 없애는 것이라 주장하며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가한 것이다. 1943년 1월 약혼하고 3개월 만에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미국 군대가 플로센뷔르크 감옥을 풀어주기 불과 몇 시간 전에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형과 매부들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이나 총살형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와 연구 논문 외에 1943년부터 죽기 전까지 옥중에서 쓴 서신을 남겼는데, 1951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본회퍼는 이 시대를 인간이 자율적인 행동을 할 수 있기에 더 이상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성숙한 시대’, ‘무종교 시대’로 규정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교도 스스로를 ‘비종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보통 종교에서는 우리가 곤경에 처하면 하느님께 호소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한 자기 중심주의의 이기적 발상이다.

이럴 때 신(神)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그럴듯하게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해결사로서, 마치 중세 연극에서 이야기의 앞뒤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갑자기 등장시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식의 ‘기계 속에서 나오는 신(deus ex machina)’과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이 이런 식의 신이라면 그런 신은 이제 이런 성숙한 시대에 더 이상 필요 없는 신이라고 했다.

본회퍼는 그런 그릇된 하느님상(像)을 일소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키시는 분으로서의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삶은 역설적으로 신을 ‘삶의 끝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실천적으로 만나게 된다고 보았다. 이제 자기를 위해 존재하던 하느님이 없다는 듯이 사는 세상은 결국 자기 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된 세상을 의미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자기 중심주의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최대의 과제는 ‘그리스도를 따름’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거기 따르는 응분의 값을 치러야 하는데, 이것을 그는 ‘제자 됨의 값(cost of discipleship)’이라고 했다. 그는 하느님의 은혜가 그저 주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값싼 은혜(cheap grace)’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라고 하고,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게 함[義認]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함이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에 불과하다고 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남을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라고 정의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도 이런 예수를 만남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이웃을 위한 삶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가히 그리스도교 역사상 극명하게 드러난 보살(菩薩)정신의 구현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새로 등장한 신학적 흐름

사회가 점점 복잡하고 다양해지면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지금까지 구미(Euro-American) 중심으로, 그중에서도 힘 있는 사람들, 강자의 논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반성의 결과로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신학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을 열거하면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이다. 또 세계가 지구촌으로 바뀌면서 종교 간의 접촉과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에 따라 다른 이웃 종교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를 다루는 종교신학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1)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
해방신학은 1960년대 후반 남미 브라질 신학자 루벰 알베스(Rubem Alves), 페루의 신부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 1928) 등에 의해 주도된 신학으로서, 현실적으로 제1세계의 다국적 기업에 착취당하는 남미 사회의 비참한 역사적 정황과 가톨릭의 사회주의적 신학,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 가톨릭 노동자 운동, 프랑스 노동자 청년 운동, 본회퍼의 정치신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생긴 특수 신학 체계라 할 수 있다.

해방신학은 성경을 읽되 착취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읽되 착취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성경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무엇보다 억압받고 고난 당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해방을 위해 힘쓰는 분이시고, 예수님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구주이기 전에 현 사회의 구조악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해방자’임을 강조한다.

물론 해방신학에 관여하는 신학자들이 한 가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각각 강조점이나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일차적 사명이 지금 여기서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가져옴으로 가난한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방법론적으로 모두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이제 ‘올바른 교리(orthodoxy)’보다는 ‘올바른 실천(orthopraxis)’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올바른 행동에는 경우에 따라 계급투쟁이나 불가피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까지 포함될 수 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마르크스주의적 요소 때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은 훌륭하지만, “그리스도를 정치적 인물, 혁명가, 나사렛 출신의 파격자 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기본 가르침과 어울릴 수 없다.”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교황이 되기 전 해방신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해방신학 대신에 ‘화해신학’을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가 2007년 브라질을 공식 방문하였을 때 해방신학에 입각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연구클럽이 브라질에만 백만 개 이상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 해방신학이 아직도 남미의 중요 신학으로 건재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해방신학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현실 정치와 경제 제도에서 신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므로 신학적 지평을 혁신적으로 넓힌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신학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이른바 제3세계로 퍼져 나가 유럽과 미국 중심의 신학과 확연히 다른 신학 체계를 이루는 데 크게 공헌했다.

 어느 의미에서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도 직접 간접으로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아 생기 신학 체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해방신학의 용어들은 미국 인디언들, 아시아계 미국인들, 동성애자들 등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 되기도 했다.

2) 흑인신학(Black Theology)
흑인신학은 해방신학의 한 가지 특수한 형태로서, 해방신학 중 특히 ‘흑인 의식(black consciousness)’를 중심으로 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1960년 이후부터 뉴욕 유니언 신학교 제임스 콘(James Cone) 교수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여기서 중요한 주제는 물론 백인에 의해 억압받는 흑인의 해방이다. 이들도 흑인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흑인의 해방을 위해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콘 교수가 주장했듯이 흑인신학은 “백인 사회에서 흑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범위와 의미를 규정해야 할 필요”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기서도 고매한 이론 체계를 형성한다기보다 하루하루의 고달픈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해서도 철학적이고 존재론적 이론을 기피하고 억압받는 흑인들의 직접적인 삶에 관계되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신의 인격, 그의 능력과 권위, 백인 남성적인 면 등은 관심 밖이다. 중요한 것은 출애굽 사건 이야기에서 보여진 것처럼 하느님이 그의 의로우심 때문에 그의 억압받는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그의 행동이다.

예수님도 무엇보다 미국에 사는 흑인들처럼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힘쓴 사회적 해방자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적 희생양이었다는 교리 같은 것은 무시하거나 거부하기도 한다. 물론 예수님을 백인이 아니라 흑인으로 받아들이도, 예수님의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흑인의 힘(black power)’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흑인신학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잣대는 착취당한 흑인들이 해방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푸느냐 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인간의 죄 많은 본성으로부터의 구원 같은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세상에서 억압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물리적 자유라 주장한다. 죽어서 하늘에서 받을 보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인간 전체가 누려야 할 현실적 해방을 쟁취하겠다는 노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교회는 흑인들이 동등권과 자유를 얻기 위한 흑인 공동체로서 교회와 정치를 분리하지 않는다.

마틴 루서 킹 목사도 흑인 신학을 실천적으로 이끈 지도자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특징적인 점은 그가 그리스도교 전통뿐 아니라 간디의 비폭력 사상이라든가 틱낫한의 불교 사상 등 이웃 종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실천했다는 사실이다.

3) 여성신학(Feminist Theology)
성경에서는 물론 사람 수를 셀 때 여자를 통계숫자에도 넣지 않을 정도로 여성 차별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 주위에 여성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개신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중세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숭배했다. 셰이커(Shakers), 크리스천 사이언스, 안식일교 등이 여성에 의해 시작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교에서도 전통적으로 여성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그러다가 1853년 미국 회중교회에서 처음으로 여자 안수 목사가 나왔고, 유니버설리스트, 유니테리언 등이 그 뒤를 따랐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감리교, 장로교, 조합교, 루터교 등 개신교에서 여자에게 안수를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개신교 일부와 가톨릭, 동방정교에서는 여자에게 안수하는 것이 성경이나 그리스도교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라 주장하며 거부하고 있다.

197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여성 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찰해 보는, 혹은 신학적 문제를 여성의 관점에서 검토하는 ‘여성신학’이 등장했다. 여성 안수나 지위 문제뿐 아니라 남성 중심의 전통적 성경 해석, 교회의 관행, 여성에 대한 선입견 등을 심도 있게 체계적으로 재검토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메리 댈리(Mary Daly) 같은 과격한 신학자나 보다 온건한 로즈메리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 등이 중요한 동기를 만들어 준 여성신학은 신학적 작업을 통해 지금까지 억울하게 살아온 여성들이 완전한 인격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그리스도교 전통 이외에 마녀(Witchcraft) 전통이나 도교(道敎) 등 이웃 종교에서도 이론적 도움을 얻어 내고 있다.

4) 민중신학(民衆神學)
한국에서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서광선 등의 신학적 작업에 의해 촉발된 신학 운동으로, 신학에서 신학적 주체가 ‘민중’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서양의 신학이 신 중심적 신학이라면 민중신학은 민중의 역사, 경험, 한(限) 등을 주제로 한다.

민중신학에 의하면 민중은 갈릴리에서 민중과 함께 고난 당한 예수님의 삶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난 당하는 자기들이 예수님처럼 세상에 대해 메시아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이런 자각을 가진 민중이 주인이 되는 공동체가 참 교회요, 이런 민중에 의해 실현되는 해방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의 신학은 한국인들이 역사적으로 쌓아온 한(恨)을 푸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5) 종교신학(Theology of Religions)
현대 사회의 다원화와 더불어 세계에 그리스도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로이 자각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들 이웃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 하는 문제를 신학적으로 깊이 반성해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려는 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자는 종교 다원주의적 시각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신학자들은 영국인 존 힉(John Hick), 미국인 폴 니터(Paul Knitter), 존 코브(John B. Cobb, Jr.) 등이고 한국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분이 변선환 교수, 정양모 신부, 김경재 교수 같은 분들이다.

종교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리스도교에서도 일반적으로 이웃 종교를 대하는 데 크게 다음 네 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다.

(1) 배타주의: 내 종교만 진리 종교다. 네 종교를 버리고 내 종교를 받아들이라.
(2) 포용주의: 네 종교에도 진리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내 종교를 받아들여 네 종교를 완성시키도록 하라.
(3) 다원주의: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는 어쩔 수 없이 모두 불완전 하다. 같이 대화하여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서로 보완하기로 하자.
(4) 독립주의: 너는 네 종교를, 나는 내 종교를, 서로 다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서 배울 것을 배우자.

이런 네 가지 태도를 폴 니터(Paul Knitter)는 최근에 낸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분류하고 있다.

(1) 대체유형(replacement model): 네 종교를 버리고 내 종교로 대체하라
(2) 충족유형(fulfillment model): 네 종교도 좋은 면이 있지만 모자라니 나의 종 교로 그것을 채우라.
(3) 보완유형(mutuality model): 우리 종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성이 있으 니 서로 이해하고 보완하자.
(4) 수납유형(acceptance model): 서로의 다름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 배울 것은 배우자.

신학자들 중 상당수는 세 번째 다원주의 태도 혹은 네 번째 수납유형을 선호한다. 다원주의 태도는 마치 여러 장님들이 각각 코끼리를 만지고 자기들만의 단편적 생각을 가지게 되지만 이들이 같이 앉아 서로 자기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나누면 코끼리의 실재에 더욱 가까운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과 비슷하다. 수납유형은 종교 간의 공통성보다 다름을 더욱 강조하며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고, 그러기에 대화가 의미 있을 수 있음을 부각시키는 태도다.

물론 이런 일반적 흐름에 반대하고 20세기 신정통주의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의 영향 아래 배타적 태도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도 있다.

그 외에 생태계의 위기를 두고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생태신학’이 태동하기도 했다. 이는 흔히 생태계에 대한 태도가 여성에 대한 태도와 병행하는 점이 많다고 하여 여성신학자들이 많이 다루는 분야이기도 하다. 여성신학자 중에는 스스로를 생태-여성신학자(eco-feminist theologian)이라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상이 20세기 중반에 대두된 신학적 흐름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상당수 그리스도인은,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절대다수는, 18세기나 19세기 신학으로 만족하고, 더러는 그 당시 특수한 환경에서 생겨난 특수 신학만이 유일한 진리라 주장하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살펴본 이런 신학 사조와 여러 형태의 신학적 체계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이 눈뜬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변화되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시도에서 생겨난 결과라 볼 수 있다. 한국 불교도 현 사회에서 일어나는 급변한 변화에 새롭게 대처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으리라 믿는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학위논문은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 저서로는 《길벗들의 대화》(1983), 《도덕경》(1995),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1996), 《장자》(1999), 《예수는 없다》(2001),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2002), 《세계종교 둘러보기》(2003)가 있고,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기독교서회, 1993),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1997), 《귀향》(2001), 《예언자》(2003) 등이 있다. 제17회(1987) 코리아 타임스 한국현대문학 영문번역상(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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