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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수행의 근본 원리 -원효 스님 시대와 관련하여
신규탁 연세대 교수
[36호] 2008년 10월 10일 (금) 신규탁 ananda@yonsei.ac.kr

1. 수행을 생각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둔 사람이면 누구나 수행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을 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출가를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마침내 실제로 출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과연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흔한 주제이면서도 막상 자신이 몸소 실천해 보려 하면 막막한 것이 이것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참선 수행, 그것도 간화선 수행을 떠올린다. 또 108배 내지는 3,000배 절을 하면서 예불참회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석가모니불’이나 ‘관세음보살’ 등의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의 이름을 부르는 정근 수행도 있다. 또 《금강경》이나 《지장경》등의 소위 경전을 독송하는 경우도 있다. 또 관세음보살 ‘모다라니주’ 또는 ‘대비주’를 비롯한 각종 주력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정성껏 공양물을 마련하여 불공을 드리는 것도 수행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남방 상좌부의 수행법도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는 모두 수행의 겉모습이고, 그것도 아주 부분적이다. 대승의 수행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대승 수행의 근본 원리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헌적으로 밝혀내는 것이다.

흔히 불교의 가르침이 잡다하게 많은 이유는 중생들의 번뇌와 근기가 잡다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들 한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교의 수행이라 하면 그 다양한 속에서도 무엇인가 공통적인 원리는 있을 법한데,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이런 의심을 가지고 그 의문을 해결할 요량으로 경전을 읽다 보면, 또 경전에서는 경전마다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참선 수행만 해도 묵조선과 간화선이 양립하고, 간화선 내에서도 화두의 점검 방법을 둘러싸고 오매일여가 어쩌니저쩌니 참으로 종을 잡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결국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 결단을 위해서는 교학의 분류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교학의 분류 이론으로 동북아시아 불교계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법성종(法性宗), 법상종(法相宗), 공종(空宗)의 3종 분류를 들 수 있다. 물론 이 중에서도 한국불교에 긴 세월에 걸쳐 오늘에까지 전승되는 것은 법성(法性; dharmatā)의 상주불멸을 믿는 법성종(法性宗)이다.

 법성 사상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종파는 화엄종이다. 화엄종의 이런 전통은 신라시대 때부터 당시 중국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확립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화엄의 전통을 운운함에 있어 원효 스님(617~686)의 철학은 매우 중요하다. 화엄철학의 완성자로 현수(賢首, 643~712) 스님을 꼽는데, 신라의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을 매개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원효 스님을 비롯한 법성종(法性宗) 계통에서는 어떤 수행을 제시하는지를 특히 ‘원리적인 측면’에서 요약 정리해 보기로 한다. ‘원리적인 측면’이라 함은, 위에서 거론한 정근, 주력, 간화, 3천 배, 독송, 불공 등의 겉으로 드러난 행법(行法)의 원리를 말한다. 원효 스님은 위의 3종 분류에 의하면 당연 법성종(法性宗) 계통의 스님이다.

수행과 관련하여 원효 스님의 저서 중에서 한국의 출가 승려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저술은 《발심수행장》이다. 그러면 이 책에서 원효 스님이 우리에게 무슨 수행을 권하고 있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다 할 만한 대목을 찾기가 어렵다. 물론 이 글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를 보면 ‘염불수행’의 색깔이 농후하다. “메아리가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당으로 사용한다.”라는 구절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다가 원효 스님께서 《유심안락도》와 《무량수경종요》 등의 책을 지으신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이 두 책을 가만히 살펴보면, 요즈음의 ‘염불수행’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요즈음에는 그저 불보살의 명호를 소리 내어 반복적으로 외우는 외형적인 행법을 주로 말하는데, 원효 스님은 특히 《유심안락도》에서 법성종 철학의 ‘원리적인 측면’을 논술하고 있다. 결국 무늬만 염불하여 정토로 왕생하는 수행이지 실제의 내용은 수행 자체의 원리에 대한 논의가 핵심을 이룬다. 그러면 원효 스님이 말하는 ‘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법성의 철학이다.

2. 수행론의 원리, 법성 철학

법성 철학의 핵심 개념은 두말할 것 없이 ‘법성’이다. 중생의 심신 작용에는 불생불멸하며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본바탕이 있는데 이 본바탕을 법성(法性, dharmatā)이라 한다. 중생의 본바탕인 법성에는 불가사의한 영험과 청정한 지혜의 기능이 있다. 이런 본바탕이 펼쳐지는 세계를 화엄 교학자들은 법계(法界), 진여(眞如), 본각진심(本覺眞心), 여래장(如來藏), 또는 진계(眞界)라 표현하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한편 남종선의 선사들은 그 법성을 ‘주인공’ 또는 ‘부모가 낳아 주기 이전의 나의 본 면목’ 또는 ‘당체(當體)’라 이름 하기도 한다. 물론 그 내용은 같다.

《화엄경》에서는 ‘한마음[一心]’이라 한다. 본바탕인 ‘한마음’ 위에서 소위 12지(支) 연기가 펼쳐진다. 12연기의 각 지(支) 하나하나는 모두 공(空)하고 무상하지만, ‘한마음’은 본래의 바탕이므로 영원하다. ‘한마음’에는 인연과 결합하여 변하는 작용과, 어느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작용이 있다. 인연과 결합하여 변화하는 ‘한마음’의 작용에 의해 중생들의 번뇌의 차별상이 현실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불변하는 ‘한마음’의 작용성은 불생불멸한다. 그리고 ‘한마음’을 가리는 번뇌는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그 자체는 무상하다. 그것은 결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공하다.

‘한마음’은 행위·언어·사유의 규정방식에 따라 우리에게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타자(絶待他者)라기보다는 연기에 의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규정방식에 매개되어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규정방식이 무수한 만큼 ‘한마음’이 드러나는 양태도 무한하다.

이런 ‘한마음’에는 인연에 호응하여 변하는 성질 즉 수연성(隨緣性)과 그렇지 않은, 즉 불변성(不變性)이 공존한다. 이것을 《대승기신론》에서는 ‘한마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진여(眞如; tathataā)적 측면을 지칭하여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 했고, ‘한마음’의 생-이-주-멸적 측면을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 지칭했다. 그리고는 이 둘의 유기적 관계를 논증적으로 해명한다. 물론 여기서 말한 ‘한마음’이란 곧 다름 아닌 ‘중생의 마음’이다.

그러면 본바탕인 ‘한마음’을 어떻게 하면 체험할 수 있을 할까? 그것은 ‘무심’해야 한다. ‘무심’해야만 본바탕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선행된 인상’을 가지고 사물을 인식한다. 이런 인식 방법으로 인해 생긴 지식에는 대상 즉 경계가 있다. 이 대상인 경계는 선행된 인상과 매개되어 우리의 의식 활동 속에 표상된다. 이런 원초적인 순환 구조 때문에 본바탕은 ‘인식의 방법’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 없이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 본바탕을 개별적 ‘존재자’ 내지는 ‘존재 현상’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대상화하는 동시에, 선행된 인상의 구성체인 만들어진 ‘이성’을 매개로 또는 수단으로 하여 본바탕을 인식하려고 한다. 잘못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본바탕인 ‘한마음’은 ‘존재’ 그 자체이지 개별적 경계 즉 ‘존재자’는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경계를 경계이게 해 주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우리가 ‘무심’할 때에 무매개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체험하는 게 아니라, 체험되는 것이다. 이런 체험 위에서 각종 연기 현상이 무상한 줄을 알아, 거기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무심’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화엄의 교학과 육조혜능의 남종선이 갈라진다. 남종선의 전통에 있는 당나라 선사들은 ‘관조(觀照)하라’ 하고 송나라 선사들은 ‘화두(話頭)에 집중하여 일체의 사량분별을 쉬라’고 한다. 반면 법성의 교학에서는 ‘관행(觀行) 즉 관찰하는 수행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목표하는 궁극적 지향점은 모두 ‘무심’이다.

법성 철학에서는 이 법성을 의인화(擬人化)하여 ‘부처님’이라고 인격적 요소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부처님은 모양이나 색깔이나 음성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법(法; dharma)을 몸으로 하는 법신(法身)이기 때문이다. 법신으로 잘 알려진 부처님이 비로자나불이고 아미타불이다.

법신을 믿는 불제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재가 보살이고, 또 하나는 출가 보살이다. 법성의 철학을 실천하는 점에서는 두 보살 모두 같지만, 절에 살면서 보살행을 하느냐, 가족과 함께 살면서 보살행을 하느냐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사람들 각자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생명운동의 긴 역사’ 속에 놓인 과정상의 차이이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다. 원효 스님도 이 점을 분명하게 하여 《유심안락도》에서 《무량수경》에서 제시하는 16종의 관(觀) 중 뒤의 3종의 관행에서 상근기인 출가사문의 수행과 재가자의 수행을 구별하여 논하고 있다.

법성 철학에서 주장하려는 형이상학이나 인식론 또는 윤리학은 원천적으로 대승의 경론에 그 근원이 있다. 어떤 대승 경론이냐? 그것은《화엄경》과《대승기신론》이다.《화엄경》 중에서도 특히 <십지품>과 <입법계품>이다. 이 경과 논 속에서는 법성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언어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이런 책들에 따르면, 무엇보다 법성을 체험하라고 가르친다. 법성 체험을 전제로, 그 체험을 바탕으로 1) 보시하고, 2) 지계하고, 3) 인욕하고, 4) 정진하고, 5) 지관 수행을 하라고 한다. 이것이 소위 대승의 수행이다. 이런 대승에 대한 믿음과 수행은 《대승기신론》에서 논증적으로 집약 정리되어 있다.

위의 다섯 종류의 수행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보시란, 우선 재물을 자신의 힘닿는 대로 남에게 베푸는 것이고, 또 액난이나 위협이나 핍박을 받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을 거기에서 구해 주는 것이고, 또 법을 구하는 이에게는 자기가 아는 대로 방편을 설하되 명예나 이익이나 공경 받기를 탐내지 말고 베푸는 수행이다.

둘째로 지계란, 재가 수행자의 경우는 열 가지 악행을 멀리 여의고 열 가지 선행을 추구하는 것이며, 출가 수행자의 경우는 시끄러운 장소를 멀리 떠나 항상 고요한 데서 살면서 금욕 수행을 하면서 여래께서 금지하신 계율을 지키는 수행이다.

셋째로 인욕이란, 남이 괴롭히더라도 참아서 마음에 보복할 생각을 결코 품지 않으며, 손해나 수치와 명예 그리고 칭찬과 비방이나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을 참고 견디는 수행이다.

넷째로 정진이란, 착한 일을 실천함에 있어 마음속으로 게으르거나 주저함이 없어서 굳세게 마음먹어 겁약함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서 자리와 이타를 실천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중생들은 비록 금생에 비록 선행을 하여도 저마다 전생의 무거운 죄업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밤낮으로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부처님께 예배하고 참회하고 권청하고 수희하여 끝내는 깨달음으로 회향해 가는 그런 수행을 해야 한다.

다섯째로 ‘지(止)’와 ‘관(觀)’이란, 범어 ‘사마타(śamatha)’와 ‘비파사나(vipaśyanā)’를 각각 한자로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사마타’는 하나의 경계에 의식을 집중하는 행위이다. 그래야만 마음의 산란이 사라진다. ‘비파사나’는 인연 따라 생성 소멸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중생의 본바탕인 ‘한마음’과 그 ‘한마음’ 위에서 일어난 무상한 연기 현상이란 공하여 자성이 없는 줄을 명확하게 체험하는 수행이다. 즉 법성의 세계 즉 ‘법계’를 관찰하는 수행이다. 이때에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사람마다 형편에 따라 상호 유기적으로 번갈아 가면서 닦아야 한다. 즉 ‘사마타’만을 수행하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서 선행을 실천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대비심을 잃어버린다. 이래서는 대승의 수행이 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곧바로 ‘비파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한마음’ 즉 ‘법성’은 무슨 방법으로 체험하는가? ‘법성’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중생의 본바탕인 ‘한마음’과 그 ‘한마음’ 위에서 펼쳐지는 각종 연기현상의 공성(空性)과의 관계를 관찰하는 수행을 하라고 한다. 이 수행이 바로 삼매 수행이다.

3. 수행의 방법, 삼매

원효 스님은《금강삼매경》을 기본으로 하여 ‘삼매’ 수행에 관한 방법들을 정리하고 있다. 삼매(三昧; samādhi)를 한자로는 정(定) 또는 선정(禪定)으로 번역한다. 각 경전이나 논서마다 용례가 다양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금강삼매경》자체에서는 이 말뜻을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원효 스님의 해석을 소개하면 이렇다.

옛 스승이 말씀하기를 “그 이름을 삼매라고 함은 정사(正思)라는 뜻이다.”라고 했는데, 지금도 이것을 말하는 것은 문의(文義)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定)에 들었을 때에, 관계되는 경계[所緣境]를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는 까닭에 정사(正思)라고 한다. 《유가사지론》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삼마지(三摩地)란 관련되는 것[所緣]에 대하여 자세히 그리고 바르게 관찰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계에 집중된 성품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원효 스님은 《금강삼매경》에서 나온 ‘삼매’의 뜻을 정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자 번역어인 정사(正思)라는 표기법을 수용하고, 내용상으로는 《유가사지론》의 입장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것이 《금강삼매경》의 문맥상의 의미에 들어맞는다고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삼매란 수행자가 명상에 들었을 때에 나타나는 경계 대상들을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금강삼매경》에서는 경(境)과 식(識)이 모두 무상하고 공(空)하고 환(幻)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언어나 사량분별을 개입하지 말고 무심하게 관찰하라는 것이다.

그 과정을 《금강삼매경》의 각 품에서 전개해 간다. 즉 <무상법품>에서는 모든 형상은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게 했고, <무생행품>에서는 관찰하는 행위[能觀]가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게 했고, <본각리품>에서는 중생교화라는 실천 행위를 함에 있어 본각의 이익으로 실천함으로 해서 ‘한마음’ 속에 생멸을 관찰하게 했고, <입실제품>에서는 중생 자신이 ‘한마음’ 속에 있는 진실한 마음속으로 들어감을 관찰하게 했고, <진성공품>에서는 참된 성품이 결국은 공(空)한 이치 속에서 생성되는 것임을 관찰하게 했고, <여래장품>에서는 유위(有爲)를 비롯한 무위의 일체법이 모두 여래장 안으로 포섭됨을 관찰하게 했다.

그런데 이《금강삼매경》은 《원각경》과 더불어 ‘삼매’ 수행의 원리와 방법에 대하여 당시 중국에 유행하던 수행법을 체계화한 것으로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초기 선종의 문헌이나, 천태 스님의 《천태소지관》이나, 두순(杜順, 557~640) 스님의 관법에 관한 언설인 《화엄법계관문》이나, 《금강삼매경》과 《원각경》이나, 모두 중국인들이 인도불교를 소화하여 자신들의 방식으로 수행법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금강삼매경》과 《원각경》은 그 내용이 매우 유사하며, 거기에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나라 시대에까지 이르는 중국불교계에서 거론되었던 거의 모든 교리, 학설이 총 망라되어 있다. 이하에서는 두 경을 대조해 가면서 ‘삼매’ 수행의 ‘원리적 측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공성(空性)의 관찰

《금강삼매경》: 저 중생들로 하여금 법집과 아집을 떠나게 해야 하는 것이니, 모든 법과 나(我)는 공적한 것이다. 만약 마음이 공하게 되면 마음이 헛되이 변화하지 않을 것이요, 환상과 변화가 없어지면 생멸 없음을 얻을 것이니, 생멸 없는 마음이 환화 없는 그곳에 있다.

《원각경》: 일체여래의 본기인지(本起因地)는 모두가 청정원각을 원만히 비춤에 의하여 무명을 영원히 끊은 뒤에 불도를 이루셨느니라. 어떤 것이 무명인가? (필자 임의 생략) 4대(大)를 잘못 알아 자기의 몸이라고 하고, 6진(塵)의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이라 하느니라.

위 경문에 대하여 원효 스님은 《금강삼매경론》에서 명정관(明正觀; 정관을 밝히는 부분)이라고 과목(科目)을 붙이고, 종밀 스님은 《원각경대소》에서 표시진종(標示眞宗; 참된 주장을 제시하는 부분)이라고 과목을 붙인다. 이렇게 과목을 붙인 이면에는 두 스님 모두 몸과 마음이 무상함을 관찰하는 수행이야말로 각각의 경이 대전제로 삼고 있다는 이해가 깔려 있다.

이 두 경전에서는 어느 쪽이든 중생들이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깨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여래의 경지가 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다만 《금강삼매경》에서는 “아집과 법집을 떠난다.”라고 표현을 한 반면, 《원각경》에서는 “무명을 끊는다.”라고 표현은 서로 달리했으나 그 의미하는 내용은 같다.

《금강삼매경》에서는 관(觀)의 대상이 되는 법(法)은 물론 관(觀)하는 수행 자체도 모두 무상하다고 관찰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의식의 활동성이나 감각소여의 무상성에 대한 관찰은 중관사상으로 전승되는 전통 교학의 이론으로서, 교학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화엄의 교학자들이 이 문제를 집요하게 거론하고 있다. 화엄 초조로 불리는 두순 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진 《화엄법계관문》이 전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진공관(眞空觀)이라는 개념을 빌려 이법계(理法界)의 공함을 서술하고 있다. 관(觀)의 대상인 법(法), 즉 사법계(事法界)가 공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사법계’가 드러나 움직이는 그곳에 즉하여 ‘이법계’가 드러나는데 그 ‘이법계’도 역시 공하다고 한다. 이 두 경전은 교학의 전통에서 논의되는 공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런 공사상은 수행의 방법에도 직결된다. 다음 문단에 그것이 잘 드러난다.

2) 일체가 공하면 수행의 주체는 누구인가?

《금강삼매경》: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중생의 마음은 성(性)이 본래 공적하고 공적한 마음은 체에 색상이 없는데 어떻게 수습(修習)하여야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원하옵건대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온갖 마음의 모습은 본래부터 근본이 없으며 근본자리가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함이 없다. 마음에 생함이 없으면 곧 공적에 드는 것이요, 공적한 마음 바탕에서는 마음의 공적함이 얻어진다.”

《원각경》: 보현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중생들이 그의 몸과 마음도 환이거늘 어떻게 환(幻)으로서 환을 닦을 수 있습니까? 만일 온갖 환이 멸했다면 몸과 마음마저 없어지리니 무엇으로 수행하겠기에 환(幻) 같은 삼매를 닦으라 하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환(幻)을 멀리 여의려는 마음을 굳게 먹기 때문에 마음이 환(幻) 같은 것도 멀리 여의어야 하며, 환을 멀리 여의었다는 생각을 다시 멀리 여의어서, 여의었다는 생각까지 또한 멀리 여의어서 더 여읠 것이 없게 되면 모든 환(幻)이 없어지느니라.”

두 경전 모두 마음은 무상한 것이니 그저 무심(無心)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원효 스님은 이런 상태를 《금강삼매경론》에서 “생(生)을 얻지 아니할 때에 능히 관찰하는 마음도 또한 생기지 않으니, 이때에 곧 본래의 공적(空寂)으로 들어간다.”라고 주석을 하고 있다. 《원각경》본문에서는 “환인 줄 알면 곧 환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따로 방편을 쓸 필요는 없다. 환에서 벗어나면 바로 깨닫는 거지 결코 점차적인 것은 없다.”라고 명료하게 설해져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부분 때문에 위에서 인용한 두 경전이 선 관계 경전의 범주에서 논의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논의를 하는 이들은 이 부분을 돈오(頓悟)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돈오 사상은 선종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른 인식이 드러나는 곳에 바른 지혜가 제 기능을 발휘한다. 인도의 초기불교에서 소개되는 각종의 관법이 말해 주듯이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인 줄 모르는 데서 집착이 생긴다. 미혹이 업(業)을 형성하게 하고, 업이 괴로움의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불교 교학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이런 원리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이 제시된다.

《금강삼매경》: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여, 일체 중생 가운데 아집에 사로잡힌 자와 법집에 사로잡힌 자를 무슨 법으로 깨닫게 하며 그 중생들로 하여금 그 결박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12인연을 관하게 하라. 12인연은 본래 인과를 따라 나는 것이며, 인과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마음이 도무지 있지 아니하니 어찌 몸이 있을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유견(有見)을 없애게 하라. 또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무견(無見)을 없애게 하라.”

《원각경》: 보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보살의 수행할 점차를 말씀해 주옵소서.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머무르리까?”
그때 세존께서 보안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먼저 여래의 사마타의 행에 의하고, 계행을 굳게 지니고, 대중과 함께 살고,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않아서 항상 생각하되 지금 나의 이 몸은 대로 화합된 것이니, (필자 임의 생략) 4대(大)가 각각 흩어지면 지금의 허망한 몸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이 몸은 끝내 실체가 없거늘 화합해서 형상이 이루어진 것이니 진실로 환(幻)이나 허깨비와 같음을 곧 알게 되리라.”

이 두 경전 모두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일체가 모두 연기이고 무상이고 공인 줄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5온이 무상함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중국의 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일체가 허공꽃[空華]처럼 무상한 것임을, 여러 측면에서 그리고 여러 학승들이 거론하고 있다.

화엄종의 청량 스님의 《오온관》은 물론 그의 스승인 현수 스님 그리고 천태종의 천태 스님도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 천태 스님의 경우는 《법계차제초문》에서 온(蘊), 처(處), 계(界) 등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모두 자성이 없음을 관찰하는 수행인 공관(空觀)을 통해서 중도관(中道觀)을 실천하는 데에 그 취지가 있다고 한다. 한편 현수 스님은 《반야심경약소》에서 위와 같은 작업을 했고, 유식의 문헌인 《대승백법명문론》, 그리고 《화엄경》의 <광명각품>, <보살문명품>, <승수미산정품>, <승야마천궁품>, <승도솔궁중게찬품>, <십회향품>의 게송 등에서도 5온으로 대표되는 일체의 존재가 모두 무상하고 공한 것임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게 했다.

그런데 이런 무상성을 설하는 점은 반야의 여러 경전과 일치하면서도, ‘여래장’을 논하는 점에 있어서 《금강삼매경》은 그 입장을 달리한다. 다음에서 그 단적인 사례를 들어 보기로 한다.

4) 여래장의 설정

《금강삼매경》: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여, 마음에 주(住)함이 없는데 수행 공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실천수행을 해야 합니까? 안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보살아, 생(生)함이 없는 마음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다. 본래 여래장(如來藏)이므로 그 본바탕이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 수행할 것도 아니고 수행을 안 할 것도 아니다.”

《원각경》: 선남자야, 여래의 인지(因地)에서 원각을 닦는 이가 이러한 허공 꽃을 알면 헤맴이 즉시에 없어질 것이며, 생사에 윤회할 몸과 마음도 없으리니, 짐짓 애써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라. (필자 임의 생략) 있고 없음을 모두 물리쳐야 이를 일러 청정원각을 수순(隨順)한다고 하느니라. 왜냐하면 허공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항상 요동치 않기 때문이며 여래장(如來藏) 안에는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원효 스님은 《금강삼매경론》에서 이 단락을 무심주(心無住; 무심하게 마음을 내다)라고 과목을 붙였고, 종밀 스님은 《원각경대소》에서 전전불적(展轉拂迹; 자취를 거듭하여 모두 없애다)이라고 과목을 붙였다. 여래장성(如來藏)의 본바탕이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하여 《금강삼매경론》본문에서는 “여래장이란 생멸하는 분별망상의 모습이 이(理)를 숨겨, 드러나 있지 않음을 말한다. 그 본바탕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있다. 두 경전 모두 무상관을 주장하는 점에서도 공통적이고, 나아가 생성소멸의 운동이나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른바 ‘무생(無生)’의 ‘법인(法印)’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 두 경전에서는 그것을 모두 ‘여래장’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이 여래장은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다만 번뇌와 망상으로 인해 그것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여래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원각경》에서는 ‘체험’이라는 용어 대신 ‘수순(隨順)’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유나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수행을 안 해서도 안 된다. 수행을 안 하면 영원히 범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래서 수행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삼매’라는 관찰 수행이다. 《금강삼매경》과 《원각경》에서 바로 이런 ‘삼매’의 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4. 맺음말

수행의 문제는 불교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만큼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수행을 강조한다. 그런데 수행이란 결국은 유한하고 욕망을 가진 구체적인 삶 속에 사는 인간이 하는 행위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인간에 대한 철학적 내지는 종교적인 해명을 수반하게 된다. 그 결과 수행에 관한 논의를 하자면 자연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서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의 수행에 관한 이론은 어렵다는 인상을 우리 모두에게 주고 말았다.

원효 스님이 활동하던 7세기 말엽 신라에서는 남종선이 아직 유행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와 동시대에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현수 스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두 스님은 《대승기신론》이라는 대승불교의 논서를 매개로 학문적 공감대를 형성했는데, 그 학문의 바탕에는 기본적으로 법성(法性)의 사상이 깔려 있다. 이런 철학적인 기본 입장은 각 경전을 주석하고 강론할 때에 거의 기하학의 공리(公理)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기본 입장은 뒷날 중국이나 한국의 교학 방면에도 강력한 전통으로 작용한다.

현장 스님의 경전 번역으로 인하여 이 지역에 일시적으로 법상(法相)의 철학이 유행한 바가 있기는 하지만, 한자 문화권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뒷날 남종선이 유행하더라도 역시 법성 사상을 바탕에 깔고 전개된다.

선불교가 유행하기 이전에 활동하던 스님들이 어떤 수행을 했는가를 살펴보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법(行法)은 제각기 양상을 달리할지라도, 수행의 ‘원리’ 나아가서는 깨달음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때에는 역시 법성의 철학을 활용한다. 즉 발심해서, 그리고 수행해서, 결과적으로 깨침을 얻는 과정을 설명함에는 기본적으로 법성의 철학 체계를 도입한다.

비록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논함에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는 이런 실례를 원효 스님의 《유심안락도》에서 아주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으로 《관무량수경》과 《미륵발문경》과 세친의 《왕생론》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정토에 왕생하는 수행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교학의 지위설에서는 ‘여래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남종선에서는 ‘견성성불한다'고 표현하지만, 정토신앙에서는 ‘극락왕생한다’고 표현을 좀 달리할 뿐이다. 그러면서 다만 정토 계통에서는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를 문학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원효 스님이 인용하는 세친의 《왕생론》만 보더라도, 부처님께 몸뚱이를 사용하여 예경하고, 입을 사용하여 부처님을 찬탄하고, 사마타를 닦는 발원을 하고, 비파사나를 수행하는 관법을 닦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워서 그것을 회향하는 그런 수행을 하면, 극락세계에 간다고 한다. 결국 정토에 왕생하는 수행 방법도 결국은 화엄교학의 중심 경전인 《화엄경》<보현행원품>에서 제시하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수행과 내용상 일치한다.

남송 시대의 화엄교학승 정원(淨源, 1011~1088) 스님이 《화엄보현행원수증의》에서 보현보살의 10대 행원을, 예경, 공양, 참회, 발원, 지송으로 요약한 것을 보면 그렇다. 즉, <보현행원품>에서는 ‘보현행의 원력’이라는 법력에 입각한 열 가지 보살의 실천수행을 제시했고, 《화엄보현행원수증의》‘비로자나 부처님의 법계를 깨닫는 것’에 입각한 다섯 가지 보살의 실천 수행을 제시했다. ‘보현행의 원력’이나 ‘비로자나 부처님의 법계를 깨닫는 것’이 전제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보시 지계 등의 수행은 아무 소용이 없다.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또 극락왕생하기 위해서는 근본 원인[正因]으로서는 발심이 있어야 하고, 보조 원인[助緣]으로서는 열 가지를 항상 생각[十念]하라고 한다. 열 가지란, 첫째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내어 불도 수행을 방해하지 말 것, 둘째 중생을 가엾이 여겨 해치지 말 것, 셋째 불법을 옹호하고 비방하지 말 것, 넷째 인욕할 것, 다섯째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명리를 탐하지 말 것, 여섯째 지혜로운 생각을 할 것, 일곱째 중생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겸손하게 할 것, 여덟째 세속적인 일을 즐기거나 탐하지 말 것, 아홉째 깨침을 위해 착한 인연을 지을 것, 열째 바른 생각으로 부처님을 관하여 모든 의심을 없앨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수행법들은 결국은 《대승기신론》에 집약된다. 이 책에 따르면 ‘발심해서 도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라고 한다. 그런 다음에 ‘믿는 마음을 내어서 수행을 하라.’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 책에서 말하는 ‘발심취도(發心趣道)’이고 ‘수행신심(修行信心)’이다.

‘발심취도(發心趣道)’란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도를 향하여 발심하는 것이다. 그 발심에는 처음에는 믿음이 쌓여서 나오는 발심을 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해서 나오는 발심을 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도를 체험해서 나오는 발심을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행신심(修行信心)’이란, 우선 ‘신심’이란 법성을 믿고 불법승 3보를 믿는 것이다. 3보만 믿어서는 안 되고 법성을 믿어야 한다. 불법승 3보에 귀의하더라도 법성을 믿지 않으면 대승이 아니다. 법성을 믿고 나서 또는 동시에 3보를 믿어야 한다. 이것이 법성 철학의 기본이다. ‘수행’이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을 실천하는 수행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남종선이 유행하기 이전까지의 약 7세기경에는 법성의 철학에 입각한 수행이었다. 《아미타경》에 입각한 수행을 하든, 아니면 《화엄경》에 입각한 수행을 하든, 아니면 《법화경》에 입각한 수행을 하든, 근본이 되는 철학은 법성사상이다. 이런 법성 철학은 《대승기신론》에 집약적으로 논증되고 분석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졸업. 문학박사(동경대, 1994년). 현재 연세대 철학과 교수이고, 역서로는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화엄의 법성철학》《벽암록》등이 있다. 논문은 화엄와 선에 관하여 40여 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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