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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법회(遺敎法會)의 전개 과정과 그 성격 / 김광식
김광식 부천대 교양과 교수
[35호] 2008년 06월 10일 (화) 김광식 jiher7@yahoo.co.kr

   

김광식 교수
부천대 교양과

1. 서언

1941년 3월 4일부터 3월 13일까지 열흘간,1) 서울 종로의 안국동에 자리잡은 선학원(禪學院)에는 각처에서 올라온 40여명의 승려들이 비장한 각오로 유교법회(遺敎法會)를 거행하였다. 그들은 전국 각처의 사찰, 선원, 토굴 등지에서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였던 청정비구, 수좌, 율사들이었다. 법회는 열흘간 《범망경(梵網經)》, 《유교경(遺敎經)》, 조계종지(曹溪宗旨)를 대중들에게 강의하고 자비참(慈悲讖)도 공개하면서 진행되었다. 유교법회를 마친 승려들은 선학원에서 수좌대회를 갖고 현안사항을 토의하였으며, 법회의 기념사업으로 습정균혜(習定均慧)하는 비구승을 중심으로 하는 범행단(梵行壇)을 조직하여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기로 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개요를 갖고 있는 유교대회는 일제하 불교사에서 기념비적인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분야 연구에서 연구자 및 종단차원에서의 큰 주목은 받지 못하였다. 필자는 근대 불교사를 연구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각처의 사찰 및 승려들을 탐방하였는데, 원로 승려들에게서 유교법회의 역사성과 의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유교법회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선학원의 창건, 변화, 재건, 재단법인으로의 전환, 조선불교선종의 창종 등 유교법회 이전의 선학원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지난 15년 간 관련 자료를 수집, 분석하여 그에 대한 대강의 역사를 정리하였다.2)

이제 시절 인연의 섭리를 새삼 재인식하면서3) 유교법회의 전모와 성격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정리하려고 한다. 유교법회의 개최의 시대적 배경에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 일본불교 유입으로 인한 대처식육의 보편화, 전통불교 관행(산중공의제 및 원융살림)의 상실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에 이 같이 변모된 불교의 현실을 바로잡고, 이전 선불교 전통을 수호하면서, 청정과 수행의 불교를 지향한 일단의 승려들이 있었거니와 바로 선학원 계열의 수좌들이었다. 그 수좌들은 1921년에 선학원을 창건하였으며, 1922년에는 수좌 조직체인 선우공제회를 결성하고, 선원 및 수좌들을 보호하기 위한 자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수좌들의 그러한 행보 자체가 지난한 길이었기에 선학원과 선우공제회는 적지 않은 난관을 겪었다.

그러나 수좌들은 1934년에 이르러서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이라는 기반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1935년 3월에는 수좌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 선종을 창종하고, 자생적인 규약을 제정하면서, 중앙에 종무원을 출범시켜 선을 불교의 중심에 놓으면서 기존 교단과는 차별적, 독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선, 수좌, 선원을 일체화시켜 전통불교 수호, 계율 수호를 통한 한국불교의 재건의 기반을 강구할 그즈음 일제는 황민화 정책, 황도불교 구현이라는 구도에서 한국불교를 더욱더 구속하고, 통제하였다. 특히 1941년에 접어들면서 불교계 내부의 통일운동을 일제의 교묘한 불교정책의 구도에서 견인하려는 목적에서 구현되었던 조선불교 조계종의 출범이 기정사실화 되었다.4)

바로 이때, 선학원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재정비하고, 계율 수호를 통하여 불교의 정체성을 기하려는 법회가 열렸으니, 그것이 바로 유교법회였다. 그러므로 유교법회는 저절로 민족불교, 계율 수호, 비구승단 수호 등의 성격을 담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교법회에 참가한 승려들은 법회 종료 후 자기가 수행하고 있었던 터전으로 돌아가 매서운 수행을 지속하였다. 그들은 계율을 수호하면서, 수행을 지속하며, 미래의 불교를 꿈구며 비구승단 재건과 민족불교의 구현을 준비하였다. 이들이 8.15해방 이후 해인사의 가야총림, 봉암사 수행결사,5) 불교정화운동 당시 비구승대표자 대회에6) 참여하였음은 당연한 발걸음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에 의하여 정화운동이 추동되고, 조계종단이 재건되었던 것이다.

이에, 필자는 본 고찰에서 유교법회의 배경, 전개과정, 성격 그리고 역사적인 의의를 정리하려고 한다. 관련 문헌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논지 전개에 무리가 따를 것으로 추측되는바, 이 점은 지속적인 자료수집과 연구로 보완하겠다.

2. 유교법회의 배경

1) 선학원의 창건과 그 변동


유교법회가 개최된 장소는 선학원이었다. 그리고 유교법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승려들은 각처의 선방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었던 수좌들이었다. 이 수좌들은 선학원 초창기에 조직되었던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의 회원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에도 선학원 변동의 구도에 직접, 간접적으로 관여되었다. 즉 일부 수좌들은 선학원에 있었던 전국 선원 및 수좌들의 조직체인 종무원,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에서 소임을 보았으며, 여타 수좌들은 선리참구원이 관할하는 선원에서 수행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연결성이 희박하였던 수좌나 율사들도 선학원을 선원 및 수좌의 연락처, 중앙본부 등으로 인식하였다. 때문에 유교법회의 배경으로서는 선학원의 기반, 변동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선학원의 기반과 정체성이라는 배경에서 유교법회는 개최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기에서는 유교법회 개최 이전의 선학원의 전개 과정을 요약하고자 한다.

선학원은 1921년 11월 30일,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민족불교 지향, 선불교 옹호를 기하기 위한 목적에서 창건되었다.7) 선학원을 창건한 정신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일제의 사찰령체제 구도의 저항정신, 한국불교의 수호 정신, 전통적인 선 수행의 회복 정신, 민족적 자각 정신 등을 거론할 수 있다.8) 즉 거기에는 수좌들의 계율 수호와 일본불교에 대한 저항, 식민지 불교체제를 거부하면서 수좌들만의 독자적인 수행공간 및 연락처를 두려는 자생성과 정체성을 견지하려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면을 그 전개과정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선학원은 1921년 초반 수덕사의 선승 송만공, 범어사 포교당(서울, 사동) 포교사 김남천, 석왕사 포교당(서울, 사간동) 포교사 강도봉 등이 사찰령에 구속받지 않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창건되었다. 이들은 1921년 5월 15일 서울의 사간동 석왕사 포교당에서 선학원 건립 자금을 모으기 위한 보살계 계단을 개최하였다. 이날 회의를 주관한 송만공의 발언은9) 조선총독부의 통치 범위를 벗어난 즉 사찰령 체제와는 무관한 조선승려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선방으로서의 사찰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석왕사 포교당 모임에 참석한 범어사 오성월은 인사동에 있었던 범어사 포교당을 처분하여 건립 자금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10) 이때 건립에 동참한 대상자는 김남천(2,000원), 강도봉(1,500원), 김석두(2,000원), 재가신도인 조판서(6,000원)을 비롯한 서울의 신도(15,500원) 등이었다. 이렇게 승려, 신도들이 제공한 지원금으로 8월 10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 30일에 준공되었다.11)

한편 선학원이 1921년 10월 4일에 올린 상량문에는 선학원을 건립한 이유와 선학원 건립에 동참한 대중 명단이 자세히 전한다. 건립의 이유로 여타 종교에 비해서 불교의 미약한 포교에 대한 책임의식을 거론하였다. 상량문에 나온 대중은 백용성, 오성월, 강도봉, 김석두, 한설제, 김남천, 이경열, 박보선, 백준엽, 박돈법 등이다. 이들의 성향은 불교 천양의식의 투철, 일제의 사찰정책에 비판, 항일불교에 연관 등이다.
이렇게 선학원은 1921년 12월에 준공이 완료되어 서울 안국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창건 직후 선학원에서는 수좌들의 조직체가 가동되었으니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이었다. 그리하여 1922년 3월 30일~ 4월 1일, 선학원에서는 선학원의 창립 정신에 동의한 각처의 수좌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 나아갈 방향을 수립하였다. 당시 그 총회에 참여한 수좌는 송만공, 오성월, 백학명, 이설운, 임석두, 이고경, 박고봉, 기석호, 김남천, 황용음, 윤고암 등 35명이었다. 이들은 회의를 갖고 다음과 같은 선우공제회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去聖이 彌遠에 大法이 沈淪하매 敎徒가 曉星과 如한 中에 學者는 實노 麟角과 如하여 如來의 慧命이 殘縷를 保存키 難하도다. 多少의 學者가 有하다 할지라도 眞正한 發心衲子가 少할 뿐아니라 眞膺이 相雜하야 禪侶를 等視하는 故로 禪侶 到處에 窘迫이 常隨하야 一衣一鉢의 雲水 生涯를 支持키 難함은 實노 今日의 現狀이라. 그러나 人을 怨치 말고 己를 責하야 猛然反省할지어다. 元來로 生受를 人에게 依함은 自立自活의 道가 아닌즉 學者의 全生命을 人에게 托하여 他人의 鼻息을 矣함은 大道活命의 本意에 反할지라. 吾輩禪侶는 警醒鬪勵하야 命을 覩하여 道를 修하고 따라서 自立의 活路를 開拓하야 禪界를 勃興할 大道를 闡明하야 衆生을 苦海에 구하고 迷倫을 彼岸에 度할지니 滿天下의 禪侶는 自立自愛할지어다.
발기인; 백용성, 송만공, 오성월, 백학명, 한용운 등 82명12)

이렇듯이 수좌들은 철저한 수행을 위해, 선풍을 진작하기 위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립자애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피력하였다. 이는 일본불교 침투, 식민지 불교정책에서 빚어진 불교의 현실을 자주, 자립의 정신으로 극복하겠다는 발로이다.

이러한 취지서를 발표한 수좌들은 창립총회에서 선우공제회 운영의 틀을 정하였다. 우선 선우공제회 본부는 중앙인 선학원에 두고, 중앙조직으로 서무부, 수도부, 재정부를 두었다. 그리고 지방의 지부는 선원이 있는 19처 사찰에 두었고, 공제회의 진로를 의결하는 의사부를 설치하였다. 다음으로는 임원 선거를 하여 집행부를 조직하였으며 공제회의 운영 방침도 정하였다.13)

그리하여 선학원, 선우공제회는 창립정신 및 선 진작의 구현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 갔다. 1924년 경에는 통상회원 203인, 특별회원 162인 합계 365인의 회원이 소속된 수좌 및 선원의 중심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선우공제회는 설립 초창기부터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이런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어도 1924년 4월에는 선우공제회의 본부가 직지사로 이전되었다. 1926년 5월 1일에는 중앙의 선학원이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되었다.14) 이러한 선학원의 변질은 곧 선우공제회(선원, 수좌) 활동의 좌절이었다.

선학원은 1926년 5월에 범어사포교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지만 그 건물은 존속되었다. 그후 1931년 1월 21일 김적음에15) 의하여 인수, 재건되었다. 재건된 선학원에서는 백용성, 송만공, 이탄옹, 한용운, 유엽, 김남천, 도진호, 백용성 등이 나서서 대중들에게 참선, 교학을 가르치면서 불교대중화에 주력하였다. 신도들을 상대로 한 선우회가 조직되었고, 선의 대중화를 위해 《선원(禪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31년 3월 23일에는 선학원에서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를 개최하여 위상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재건한 선학원은 이전 역사를 계승하면서 재정 확립과 불교대중화를 통한 기반 확립에 나섰다. 재정 확립을 위해 범어사와 교섭을 하여 매년 200원의 지원을 받기로 하였고, 선학원의 부대 사업체인 제약부도16) 운영하였다. 선학원의 견실한 운영은 1920년대 중반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만 재정 확립이 관건이었다. 이에 선학원 계열의 수좌들은 재정 확립의 문제를 고민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는 1933년 3월의 수좌대회에서 논의되었다. 즉 송만공, 이탄옹, 김적음을 비롯한 9명의 수좌들은 수좌대회에서 선우공제회를 재단법인 선리참구원(禪理參究院)으로 전환시키겠다는 발기를 하였고, 정혜사 선원을 비롯한 5개처 선원은 재원을 기부하였다.17)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시 선학원을 운영하였던 실무진도 고민한 과제였다.18)

즉 수좌들이 안심하고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드는 것을 급선무로 인식하였다. 이에 선학원은 수좌 및 신도들이 재산을 출연하고 그를 법적으로 보호하고, 그로부터 나온 재원으로 수좌들의 수행을 후원할 기관을 출범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선학원은 1934년 12월 5일부로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전환되었다.19) 당시 재단으로 등록된 재산은 17명의 승려 및 신도들이 제공한 전답과 건물 등의 액수인 82,970원이었다. 선학원에서 선리참구원으로의 전환은 창건 초기 역사에서의 교훈을 얻고, 나아가서는 수좌 보호를 통한 전통불교를 지키려는 원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렇듯이 선학원은 선리참구원으로 전환되자 그 즉시 이사회를 열고 이사진을 구성하였다. 이사장에 송만공, 부이사장에 방한암, 상무이사에 오성월, 김남천, 김적음 등이었다. 한편 이사진은 재단법인으로의 전환을 계기로 선풍진작, 선종의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하려는 준비를 하였거니와,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35년 3월 7~8일의 수좌대회였다.20)

마침내, 수좌대회 준비위원회21)의 철저한 준비를 거쳐 1935년 3월 7일 오전 10시, 선학원 법당에서 비구 69명, 비구니 6명 등 총 75명의 수좌가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 대한 수좌들의 의도는 당시 그 대회의 개회사를 하였던 송만공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송만공은 적자가 얼자로 바뀌면서, 정법이 질식되는 시점에서 선종 수좌대회를 개최함은 의의가 깊다고 개진하였다. 이어서 그는 신라, 고려시대와 같이 동양문화의 중심이었던 조선불교가 위미부진한 상태로 전락된 근본 원인은 불법의 진수인 선법(禪法)의 침체에서 기인하였다고 진단하고, 진실한 의미에서 불교의 부흥을 의도하려면 형해만 남은 선종을 흥성케 해야 한다고 소신을 피력하였다.

이에 노덕 수좌 몇 사람이 수년간 노심초사하면서 노력한 결과 재단법인인 선리참구원을 완성하고, 재단 확충과 기부행위 시행세칙 및 선원 법규를 제정하기 위해 수좌계 중심인물을 초청하여 그 기초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위법망구하는 순교적 정신에 불타는 기초위원회의 위원들이 수좌대회를 소집하여 선종의 근본적 자립 발전책을 토의, 의결하자는 발의를 수용한 결과로 대회가 열린 경과를 개진하였다. 그리고 대회에 참석한 수좌들에게 성실, 진실의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대회에 임하여 선종 종규를 비롯한 기타 법규를 충분히 토의하여 대회의 목적을 달성케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대회는 임시 집행부를 정하고, 의장인 기석호가 대회의 선서문을 낭독하였다. 이 선서문은 수좌대회의 정신을 가늠하는 잣대이기에 그 전문을 제시한다.

【 宣 誓 文 】

〔우러러 告하옵나이다.〕
〔本師 釋迦世尊 밋 十方 三寶慈尊이시여〕
世尊께옵서 靈山會上에서 拈花하시오니 迦葉존자 ― 微笑하심으로 붙어 以心傳心하신 祖祖相承의 正法이 일로붙어 비롯하와 컅三祖師로 乃至 歷代傳燈이 서로서로 繼承하와 今日의 法會를 일우웠나이다. ?念하오니 世尊이 아니시면 拈花가 拈花 아니시며 迦葉이 아니시면 微笑가 微笑아니심니다. 拈花와 微笑가 아니면 正法이 아니외다. 正法이 없는 世上은 末世라 일넛나이다. 世尊이시여 邪魔는 날이 熾盛하며 正法은 時時로 破壞하는 이 - 末世를 當하와 弟子 等이 어찌 悲憤의 血淚를 뿌리지 아니 하오며 어찌 勇猛의 本志를 反省치 아니 하오리까 오직 願하옵나이다. 大慈大悲의 三寶께옵서는 慈鑑을 曲照하시와 弟子 等의 微微한 精誠을 살피시옵소서 世尊의 弘願을 效則하와 稽首發願하오니 聖力의 加被를 나리시와 拈花와 微笑의 正法眼藏이 天下叢林에 다시 떨치게 하시오며 如來의 慧日이 四海禪天에 거듭 빗나게 하시옵소서. 世尊이시여 獅子는 뭇 짐생에 王이외다. 그를 當適할 者 ― 그 무엇이리까 그러나 제털 속에서 생긴 벌네가 비록 적으나 사자의 온몸을 다 먹어도 제 어찌 하지 못하나이다. 天下無適의 大力도 用處가 없나이다. 그와 같히 이제 如來 正法이 그 목숨이 실끝 같은 今日의 危機를 當한 것도 그 누에 허물이겟슴니까. 업디려 비나이다. 正法을 獅子라면 弟子 等이 벌네가 아니리까. 이제 天下 正法이 今日의 危機에 陷한 것이 오로지 弟子 等이 如來의 軌則을 奉行치 아니한 不肖의 罪狀은 뼈를 뿌시고 골수를 내여 밧쳐 올니여도 오히려 다 하지 못할줄 깊이 늣기와 이제 懺悔大會를 못삽고 弟子 等이 前愆을 懺悔하오며 後過를 다시 짓지 아니코저 깊이 맹세하오며 發願하오니 이로붙어 本誓願을 등지며 三寶를 欺瞞하야 上으로 四重大恩을 저바리며 下으로 三途極苦를 더하는 者 잇삽거든 金剛鐵 槌椎로 이 몸을 부시여 微塵을 作할지라도 敢히 엇지 怨망을 품싸오리까. 차라리 身命을 바리와도 맛침내 正法에 退轉치 아니하겠사오니 오직 원하옵나이다.
〔大慈大悲의 本師 釋迦牟尼佛과 밋 十方 三寶慈尊께옵서는 慈鑑證明하시옵소서〕
갓이 업는 衆生을 맹세코 濟度하기를 願하옵나이다. 다함이 업는 煩惱를 맹세코 除斷 하기를 願하옵나이다. 한량이 업는 法門을 맹세코 배우기를 願하옵나이다. 우가 업는 佛道를 맹세코 成就하기를 원하옵나이다. 이 因緣功德으로 널니 法界衆生과 더부러 한가지 아욕다라삼약삼보리를 일우워지이다.
昭和 十年 三月 七日
朝鮮佛敎禪宗首座大會 告白

이 선서문에서는 정법과 전등이 계승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마(邪魔)가 극성하고 정법이 파괴되는 말세를 당하여 참회와 반성을 하는 수좌들의 현실인식이 극명하게 개진되어 있다. 수좌들은 정법이 위기에 처한 현실에 처하여 정법과 여래의 궤칙을 받들어 그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나아가서는 참회하는 정신으로 삼보를 기만하는 삿된 무리들을 제거하겠다는 굳은 서원을 다짐하였다. 이에 수좌들은 정법을 받들지 못하였던 자신들의 허물을 자인하며서 신명을 바쳐 정법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맹서를 하였다. 추후에는 중생제도, 번뇌 단절, 불법의 수행, 불도의 성취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마침내 대회에서는 조선불교 선종 종규를 비롯하여 종정회 규칙, 선의원회 규칙, 선회 법, 종무원 원칙, 선원 규칙 등을 정하였다. 또한 선리참구원 기부행위 정관, 기부행위 정관 시행세칙도 제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종규, 규칙 등을 정한 연후에는 선종 및 종무원, 선의원 등의 임원 선거를 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종정 ; 신혜월 송만공 방한암
원장 ; 오성월
부원장 ; 설석우
서무부 이사 ; 이청담
재무부 이사 ; 정운봉
교화부 이사 ; 김적음
보결이사 ; 박대야 윤서호
심사위원 ; 김일옹 이백우
보결 심사위원 ; 현원오
선의원 ; 기석호 하동산 황용음 이석우 김경봉 이춘성 김홍경 최원허 유종묵 김덕산 김대우 최송파 이선파 김시암 전설산
순회포교사 ; 기석호 하동산 이운봉

이렇듯이 당시 전국 선원 45개소, 수좌 200여 명을 기반으로 한 조선불교 선종은 출범하였고, 그 중앙 기관인 종무원이 등장하였다. 이로써 종무원에서는 지방 선원과의 연락, 선포교, 선원보호 및 수좌의 대우 개선 등을 통한 선의 재흥, 선종의 독자적 발전을 위한 행보로 나갔던 것이다.

2) 유교법회의 개최 계기

1935년 3월에 출범한 선리참구원, 조선불교 선종 종무원은 정상적인 행보를 나갔다. 그런데 현재는 그 행보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관련 자료가 부재하여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전보다는 수좌의 증가,22) 선리참구원의 재산 증대 등이 이루어져 진일보한 단계로 나간23) 것으로 보고자 한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1939년에도 수좌대회, 즉 조선불교선종 정기 선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초참납자의 지도를 위해 금강산 마하연 선방을 모범 선원으로 지정하겠다는 논의를 하였다. 다음으로는 모범총림을 위해 지리산, 가야산, 오대산, 금강산, 묘향산 등 5대산을 지정하여 당시 교단측과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나아가서는 전국 선원의 수좌들의 소식을 민활하게 하기 위해24) 수행 결과인 방함록을 수합하여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 선회 이후에는 더욱 더 선학원을 중심으로 전국의 수좌와 선원이 유기적인 관계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25)

그러면 이러한 선학원의 변동과 발전이라는 배경하에서 어떤 연유, 계기로 인하여 1941년 3월, 선학원에서 유교법회가 열렸는가? 이를 설명해주고 그 전후사정을 알려주는 관련 문헌자료는 없다.26) 다만 1966년경 《한국불교 최근 백년사》 편찬27) 실무를 보았던 정광호가 그 당시까지 현존하였던 〈유교법회 회의록〉을 보고, 그 일부를 자료로 활용한 것이 주목된다.

일본과의 합방이란 것이 이루어진 뒤로 한국의 청정한 승풍은 시들어만 가고 있지마는, 그래도 이 가운데 애써 한국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고승들이 있으니 이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아 보자.28)

한국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고승을 한자리에 초청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1941년 3월이었던가? 그리고 그런 기획, 아이디어를 낸 것은 선학원 내부의 승려였는가 등등에 대한 의문점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유교법회에 참석하였던 강석주와의 대담을 기초로 유교법회의 개최에 일제측의 개입이 초기 단계에 있었음을 설명하는 박경훈의 해석을 잠시 보자.

이 법회는 전국의 훌륭한 禪匠들이 모여서 10일간 계속했는데 모이게 된 동기가 종 엉뚱한 데 있었다.
春園 李光洙가 우연한 기회에 총독부 학무국장 도미니가(富永)를 만난 일이 있다.

이때 도미니가는 춘원에게 “한국불교가 이 같이 무질서 하고 지리멸렬해서는 안되겠다. 교단을 맡아서 잘 해나갈 사람이 없겠는가. 지금까지는 교종에 교단을 맡겨 왔는데 선종에 그런 인물이 없겠는가. 선종의 고승들을 만나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춘원은 곧 사촌형인 李耘虛스님을 찾아가 도미니가 학무국장의 뜻을 전하고 “적당한 기회에 고승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법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였다.

이운허스님은 元寶山스님과 이 일을 상의하였다. 두 스님은 춘원의 말과 같이 고승법회를 여는 것도 좋으나 우선 총독부 학무국장을 만나 그의 黑心이 무엇인지 직접 들어 본 연후에 결정하기로 하였다. 박문사가 총본산을 하겠다는 흉계를 가지고 있고, 우리 쪽에서 총본산을 짓고 있는 이 때에 학무국장이 그런 말을 했으므로 총독부의 저의를 헤아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두 스님은 춘원의 소개로 총독부의 학무국장을 만났다. 그런데 도미나가는 고승법회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춘원의 말에 의하면 고승법회의 경비까지도 대주겠다고 했다는데 전혀 말이 없자, 두 스님은 총독부의 의사와는 무관한 법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두 스님은 춘원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두 사람만 알기로 하였다. 耘虛스님은 直旨寺로 靑潭스님을 찾아가서 이 일을 상의하였다. 靑潭스님은 곧 쾌락을 했고 이어 滿空스님을 찾아가서 고승법회 개최를 상의하였다. 또한 운허스님은 朴漢永스님과도 상의하였으며 송광사까지 가서 曉峰스님과도 상의하여29)

이와 같은 박경훈의 서술은 대략 다음과 같은 초점을 갖는 것이다. 우선 일제는 춘원을 통하여 선종 계열, 선학원 승려들에 대한 호기심을 개진하였는데,30) 그는 단순히 사상, 인품 차원이 아닌 교단 통제와 연관된 것이었다. 춘원을 통해 그 사정을 전해 들은 이운허와 원보산은 순수한 차원에서 고승법회를 개최한다는 마음으로 일제 당국자를 만났으나 상호간에 의중을 노출하지 않은 해프닝으로 마감되었다.

이어 이 같은 전후사정을 직지사에서31) 전해들은 이청담은 송만공을 만나 고승법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상의하였으며, 이운허도 박한영과 이효봉을 만나서 고승법회 개최를 상의하였다는 것이다.32) 즉 송만공, 박한영, 이효봉과의 상의 단계에서는 일제의 교단통제33)에 대한 대응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와 연관하여 유교법회가 열린 1년후 일제의 선학원에 대한 다음과 같은 보도는 그 정황을 파악하는 단서로 삼을 수 있다.

조선의 종교 통제문제는 다년간의 현안으로서 총독부 사회교육과에서는 이미 착착 실시하야 오는 중인데 우선 조선인 관계의 불교를 일원적으로 통제하야 불교의 내선제휴를 강화한 다음 국제본의 투철을 중심으로 하는 황민화의 힘찬 심전개발운동을 일으킬 터이며(중략)

여기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조선인측의 불교엿다. 전선 각처에 잇는 사찰 총수 실로 이천수백에 그 교도는 삼십만명이나 된다. 그러나 몇해 전만 해도 이가튼 사찰과 각 종파를 일원적으로 통제 지도할 기관이 업섯다. 죽 중앙불교무원과 중앙선리참구원의 두가지가 중앙에 잇서 가지고 제각기 지도적 역할을 해 왓든 것이다.

중앙교무원은 전선불교관계의 연락과 부내 혜화전문의 경영을 마터 보았고 중앙선리참구원에서는 《선》(禪)을 하는 사람과의 연락 연구기관으로 각기 존재했지만 두 기관이 다 가치 전 사찰에 대하야 관계를 가지고 잇섯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작년 4월 사찰령의 개정과 동시에 조선불교도의 총의에 따라 《선》과 《교》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태고사를 맨들고 전선 31본산의 총본산으로 하야 전선불교의 중앙지도기관으로 햇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교무원과 선리참구원은 존재하야 만흔 폐해가 잇섯슴으로 금년 3월에 총독부에서는 이 두가지 단체를 통제하고자 결심하고 그 제일 착수로 금년 삼월에는 중앙교무원을 조계학원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총본산태고사의 통제하에 두게 되엿다. 이와 동시에 혜화전문학교를 경영하는 재단의 역원도 태고사의 간부로 하야금 겸임케 하야 실질적 통제를 완성식힌 것이다. 여기서 남은 문제는 존립할 아모런 가치가 업는 중앙선리참구원을 어떠케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통제가 완성되여 가는 현재 과정에 잇서서 이것은 당연히 발전적 해소를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선리참구원이라는 것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모런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데 암(癌)으로서의 존재밧게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지금 그 내용과 구성 인원 등 자세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다. 조사가 끝나는대로 이것도 그 통제될 단게에 이른 것만으로 명확한 일이다. 여기서 조선의 종교통제 문제는 불교의 일원적 통제로부터 시작하야 기독교 등에도 미치게 될 터이다.34)

1942년 후반 경, 일제의 선학원 통제의 원칙을 알 수 있는 보도기사이다. 이 《매일신보》는 일제의 기관지였던 사정을 고려하면 여기에서 나온 저간의 사정은 신뢰할 수 있다. 이 내용에서도 선리참구원이 당시 선원의 지도, 통제를 하면서 선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제 당국은 선리참구원을 불교통제상에 있어서 골치아픈, 껄끄러운 존재였기에 암적인 대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일제 당국이 1941년 2월, 그 당시는 총본산 건설운동, 불교계 통일운동으로 시작되었던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로서의 태고사가 일제의 승인을 받아 출범하기 직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교종계열에게35) 한국불교의 교단을 맡기기 직전에 우연적으로 나온 발언에서 유교법회가 촉발되었다고 이해된다. 혹은 교종계열이 교단 운영을 맡는다 해도, 그 수뇌부(종정)는 선종 승려가 해야 된다는 평소의 단상이 노출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춘원과 학무국장과의 사이에서 나온 선종 고승에 대한 대화가 법회의 단초는 되었지만, 그 기회를 오히려 고승의 수행 가풍이 살아 있음과 정법 수호, 계율 수호, 선학원의 정체성 천명 등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선학원 계열 승려들의 탄력적인 현실인식이 법회의 과감한 추진을 추동하였다고 보고자 한다.

이에 이청담과 이운허는 고승법회의 개최를 위한 여러 준비를 신속하면서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당시는 준전시체제이었기에 행사, 법회를 할 경우에는 일제 당국에 집회계를 내고, 집회 개최의 허락을 받아야만 되었다. 그래서 이청담 등 법회 주최진은 화계사, 봉선사 등의 장소에서의 법회신청을 냈으나 거절당하고, 종로경찰서와 상의하여 선학원에서 법회를 할 수 있다는 장소 사용허가를 가까스로 얻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선불교 조계종 출범을 목전에 두었던 교종계열에서36) 은근한 반대가 대두되었다. 반대의 명분은 고승법회라는 법회의 명칭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총본사, 조계종 출범에 자칫 악재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기인한 것이다. 기존 교단에서의 법회 반대의 사정은 법회에 참가한 김지복의 회고가 참고된다.

준비위원에 이종욱씨, 이종욱스님이 방한암스님, 종정스님을 모셔오려고 초청을 했었죠. 근데 방한암스님이 참석을 안해셨는데(중략) 근데 처음에는 박대륜스님이나 이종욱스님이나 다 같이 하기로 합의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금방 말씀드린 대로 이종욱스님은 그런데 참석하는 것이 총독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고 해서 후퇴를 하고, 그러니까 박대륜스님도 참석을 안했지요.37)

위의 회고와 같이 교단측에서 같이 추진하기로 하였지만, 교단측에서 신뢰하였던 방한암이 참석하지 않는 것이 결정되자, 자연 법회의 공동 주관에서 후퇴하였다고 한다. 그는 조선불교 조계종과 총본산 태고사를 일제당국이 공인(1941.4.23)하기 직전이기에 총독부와의 불편한 관계를 자제하려는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방한암의 불참은 법회 참석을 부탁하던 그 무렵, 방한암의 지근거리에 있었던 범룡38)의 증언도 참고된다.

김광식 ; 1941년 서울에서 개최된 고승 유교법회에 한암스님이 초청을 받았지만 가시지는 않으셨지요?

범룡 ; 처음에는 고승법회로 하려고 한 것인데, 한암스님께서 “중이 자칭하여 고승법회라고 하면 말인 안된다”고 지적하여 유교법회(遺敎法會)로 바뀐 거야. 그때 내가 한암스님 옆에 있었어요. 한 명은 청담스님이고, 또 한 사람은 원보산스님인 것 같았습니다.

김광식 ; 혹시 시봉하는 상좌들이 대회에 참가하라고 권유하지는 않았나요?

범룡 ; 탄허스님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상좌들이 선학원의 유교법회에 참가하라고 권유하였지요. 그러나 스님은 “내가 한 번 나가면 두 번 나가게 되고, 두 번 가면 세 번 가게 되고, 그러면 자주 나가게 된다”면서 가절했지요.39)

그래서 채서응이 고승법회라 해도 무방하지만, 굳이 비난을 받아가면서까지 고승법회라 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유지를 받들어 행하는 무리이므로 그 점을 따서 유교법회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법회 명칭을 유교법회로 전환시켰다.40)

3. 유교법회의 전개

한국 전통 선의 수호, 계율 수호를 종지를 내걸었던 선학원에서 1941년 3월에 개최된 유교법회는 일제 당국의 선종 승려에 대한 호기심 노출에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그 출발은 우연이었으로되, 법회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법회의 성격은 정법 수호, 계율 수호라는 대의명분이 깔려진 채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를 음미해 보자. 그는 법회에 참석한 강석주가 법회의 주관자인 이청담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스스로 결단을 내려 선택한 일이면 누가 뭐래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는 그 대범성 앞에서는 도전의 깃발을 들고 설치던 상대방도 제 풀에 꺽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한 실예로 대동아전쟁 직전인 41년으로 기억되는 고승 초대 법회인 유교법회(遺敎法會)에서의 일이다.

그때 선학원에서는 만공큰스님을 모시고 그때까지 10년간 말없이 수도 정진한 고승들을 초대하여 불교정화의 기조이념을 다짐하는 법회를 봉행하는 중이었는데, 뜻밖의 행패자들이 출현한 것이었다. 몇몇의 알만한 승려들이 자신의 스승을 그 고승법회에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행패자들의 난동이 워낙 기세 등등하여 어지간한 심장이면 주저 앉고도 남을 판인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범성에 도리어 난동자들이 혀를 내두르고 말 지경이었다.

이러한 대범성과 끈질긴 추진력이 결국 그분으로 하여금 불교정화 이념을 현실화시켜 성취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유교법회가 정화불사의 시초는 아니었다.41) 오랜 역사와 전통의 뿌리깊은 한국불교를 말살하려는 일제 식민정책의 잔꾀로 부처님 도량에 대처승의 활약이 허용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부처님 도량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식되어 가는 안타까운 처지에 봉착한 그 시절, 만공큰스님의 격려 속에서 불교정화를 위한 의기상통하는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그 분은 전국의 심산유곡의 찾아 헤매곤 하신다는 풍문을 나 역시 들은 바였다.(중략)

어떠한 외부의 압력이나 방해공작에도 결코 굴함이 없이 전진을 거듭한 그 추진력은 결과를 향해 한발 두발 전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1941년 3월 13일로 기억되는 선학원에서의, 부처님의 유교를 호지하고, 승풍의 정화를 재차 다짐하는 기틀이 된 고승법회도 그러한 난관에 굴함이 없이 전진을 거듭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42)

위의 회고에 나오듯이 유교법회는 “만공스님을 모시고 그때까지 10여년간 말없이 수도 정진한 고승들을 초청하여 불교정화의 기조 이념을 다짐하는”, 혹은 “부처님의 유교를 호지하고 승풍의 정화를 재차 다짐하는 기틀이 된 고승법회”였던 것이다. 이렇게 유교법회는 우연한 계기에서 출발하였으나, 법회가 본격화되면서는 불교정화와 승풍의 정화를 다짐하는 법회로 전이되어 전개되었던 것이다. 강석주는 유교법회를 1981년에 위와 같이 회고하고,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89년의 《법륜》지에서도 다음과 같이 자신이 지켜본 그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부분은 해방 이전에도 활발치는 못하였지만 서서히 진행되어 왔는데 《전국 고승법회》라 하여 청담, 운허, 운경스님 등이 주축이 되어 준비를 했다. 당시 총무원측에서는 굉장히 반대가 심했고 방해를 많이 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고승법회에서는 불교는 범행단(梵行壇)이라 하여 청정하게 계율을 잘 지키고 종단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했으니 처자권속을 거느린 총무원의 당사자들은 당연히 반대한 것이다. 그래서 《고승》부분에 대한 반대가 너무 심하여 유교(遺敎)법회라 하여 대회를 진행하곤 했다.43)

그러면 이런 배경, 계기에서 나온 정화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유교법회의 내용의 일부를 전하는 관련 자료, 《불교시보》를 제시한다.

十日間 府內 安國町 禪學院에서는 雲水衲僧 高德禪師의 遺敎法會를 열고 朴漢永 宋滿空 金霜月 河東山 諸 禪師의 梵網經 遺敎經 曹溪宗旨에 대한 說法이 잇섯다고 한다.44)

즉, 1941년 3월 4일부터 10일간 선학원에서 법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면 어떤 대상자를 초청하고, 몇 명의 승려가 참여하였는가? 위의 기록에서는 그 대상자를 운수납승 고덕선사라하였는바, 즉 수좌이면서 덕이 높은 선사라 하였다. 강석주가 회고한 10년 간 말없이 수도정진한 고승들과 그 맥락이 통하고 있다. 그 대상자는 10년 이상을 수행정진한 수좌, 선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초청한 대상자는 몇 명이었고, 초청을 받아 참여한 선사는 몇 명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공식적, 문헌 기록에 분명하게 전하지 않는다. 법회에 대해서 이미 서술한 바가 있는 박경훈은 “老·壯層 禪匠 40여 명”이라고 하였고,45) 정광호는 “전국의 청정비구 중 34명을 초청했던”이라고 표현하였다.46)

한편 강석주는 생존 당시인 1991년 1월 《운허선사 어문집》의 재판47) 편집 과정시 유교법회의 기념 사진에 나오는 해당 승려들을 확인하였다. 《운허선사 어문집》 화보에는 그 승려들을 40명으로48) 보고 그 인물들을 판독한 내용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선우도량, 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회와의 증언 인터뷰(1997.1.7)에서도 유교법회 사진(1941년 3월 13일 촬영)을49) 보고, 그 해당 인물들을 다시 판독하였다.

 그 사진에 나오는 인물 전체 40명중에서 판독한 대상자는 29명이었다.50) 강석주가 선우도량 관계자와 판독을 하고 3년이 지난 후인 2000년 민족사에서는 김광식을 편자로 발간한 사진 화보집 《한국불교 100년, 1900~1999》51)의 1940년대 부분에서 유교법회 사진을 게재하였다. 여기에서는 그 사진에 나오는 인물 40명에게 번호를 부여하고, 그중에서 판독이 가능한 인물 37명을 제시하였다.52)

이는 《운허선사 어문집》에 게재된 것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행사에는 법회에 초청받아 온 고승들의 시자도 있었으며53) 법명은 모르지만 직지사 수좌가 있었다.54) 그러면 여기에서 박한영의 시자로 당시 법회에 참석했던 김지복의 회고를 제시한다.

해방전인 1941년 유교법회가 선학원에 있었는데 그때 한국불교의 유수한 스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셨습니다. 내가 대원암에 있을 때인데 3명이 차출되어 시자로 참석했었습니다. 우리는 시자로서 차도 따라 드리고 심부름을 했었지요. 석주스님이 그때 선학원 원주를 했었고 운허스님, 적음스님, 청담스님이 준비위원이었어요. 그때 유명한 스님들을 많이 뵈었습니다.55)

영호(필자주, 박한영)스님이 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그때가 2월 말이니까 개학을 하기 전이여. 그런데 대원암 강원에 있던 사람중에서 좀 나이가 적은 사람들 그때 나는 나이(필자주, 22세)가56) 비교적 적은 셈이었어. 그러고 백준기라는 사람은 영호스님 직계 시봉이여. 또 박영돈이라는 사람은 백양사에서 와서 대교는 마쳤는데 수의과로 염송을 공부하거든요. 염송을 공부하느라 못 내려가고 있었어. 그러니까 나하고 나이가 다 비슷해요. 나이가 많은 사람은 가서 다각을 못하거든.57)

위의 김지복의 증언을 고려하면 당시 법회에는 고승들의 시자가 10명 이상은 참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 기념사진의 촬영시에 동참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사진 촬영에 응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면, 법회에는 40명 이상의 승려가 참여하였다. 그런데 그중에서 정식 초청을 받은 대상자도 있고, 초청받은 대상자의 시자로서 온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법회에 초청을 받아 참석하였던 대상자(34명)로 추정되는58) 승려를 제시한다.

송만공, 박한영, 채서응, 장석상, 강영명, 김상월,
하동산, 김석하, 원보산, 국묵담, 하정광, 김경권
이운허, 이청담, 김적음, 변월주, 강석주, 박석두
남부불, 박종현, 조성담, 김자운, 윤고암, 정금오
도 명, 이화응, 김지복, 박봉화, 귀 암, 민청호
청 안, 박재운, 박본공, 곽 ?

이러한 고승 납자들이 선학원에 모여 법회를 하였던 것이다.59) 그러면 당시 법회는 어떤 숨서로 진행되었으며, 법문은 어떤 고승이 하였는가 등등 법회의 전체적인 개요를 《경북불교》에 나온 기사를 통해 살펴 보자.

半島佛敎의 新體制로서는 未久에 總本寺의 實現을 앞두고 잇는 此際에 오렛동안 보지 못하든 佛敎의 眞正한 修養法要會가 去般 中央敎界에서 會集되엿는데
卽이 修養法要會란 것은 我 半島의 全敎界를 通하야 高僧大德을 총동원한 所謂 ‘高僧修養法會’란 名目으로 去 二月60) 四日부터 京城府 安國町 四十番地 中央 禪學院에서 위엄스럽고 嚴肅한 가운데서 開幕되엿는데 當 法會에는 忠南 禮山 定慧寺 宋萬議師, 江原道 五臺山 月精寺 方漢巖師, 忠南 俗離山 法主寺 張石霜師 等 三大禪師를 招致하야 證明으로 모시고 會主에는 朴永湖師, 金霜月師, 姜永明師, 蔡瑞應師로 하야 會第一日인 四日부터 仝 六日까지 遺敎經, 十二日까지 慈悲讖의 公開를 한 후 十三日 要 特히 我 皇軍武運長久, 戰歿將士의 慰靈大法要가 이 僧大德의 執法으로 如法 且 嚴重히 擧行되고 法會는 圓滿히 回向되엿는데 一般은 時局下 民衆 心身修養上 가장 意義잇들 法會엿음에 無限한 法悅을 感하게 되엿든 바라 한다.61)

이렇듯이 대회는 경전에 대한 법문, 자비참 공개, 위령법회62) 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법회의 참가자 중에서 증명, 회주라는 직책이 있었다고 전해 우리의 주목을 받는다. 증명에는 송만공, 방한암, 장석상이 회주에는 박한영, 김상월, 강영명, 채서응으로 나온다. 추정하건대 증명은 법회의 상징적인 고승으로 내세운 인물이고, 회주는 법회의 실질적인 주관자가 아닌가 한다.

4. 유교법회의 성격 및 의의

본장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유교법회의 배경, 개요, 진행 과정에 나타난 여러 내용을 음미하여 그에 나타난 성격 및 의의를 제시하려고 한다. 이는 유교법회에 담긴 역사성, 교훈 등을 추출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 하겠다.

첫째, 유교법회의 전개에는 비구승들의 투철한 현실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일제의 비구승에 대한 통제정책의 일단을 파악하고, 사전에 그를 차단하려는 저항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법회의 개최 공간이 선학원이었고, 법회를 주도하고 참여하였던 승려 대부분이 선학원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수좌들이었음을 고려하면 당연한 이해이다. 즉 선학원 및 선우공제회, 선리참구원, 조선불교 선종, 수좌대회 등에 일관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은 전통 선불교 수호, 비구승단 수호, 일제 불교정책에 저항88) 등이었거니와 이는 유교법회의 투철한 현실의식, 정체성 정비 정신의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 법회에는 계율수호 정신, 참회 정신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이해된다.89) 그는 중국, 한국불교의 대승불교권에서 보편적인 대승불교의 계율, 대승보살계의 소의경전으로 수용되었던 《범망경》이90) 강설되었음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따르고 지키겠다는 차원에서 《유교경》을91) 강설한 것도 동질한 구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아가서 법회에서는 자비참법의 실시가 공개된 것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계율이 파괴되고, 원융살림인 승가 공동체가 이완되었으며, 전통의 의사결정 구조인 대중공사도 사라진 것에 대해 참회하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92) 자비도량 참법은 참회하고, 원한을 풀고 나아가서는 부처님께 예배하고, 그 덕을 회향하려는 구조라는93) 점을 유의할 때에 법회는 계율 및 청정 승풍의 회복에 대한 다짐이 간단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94)

셋째, 유교법회에는 선학원 계열의 수좌만 참여한 것이 아니고 강백, 율사도 참여하였음에서 즉 선교 분야의 대종장이 동참한 것에서 승가의 화합, 원융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선사라기보다는 강백, 교학의 대가라고 칭할 수 있는 인물인 박한영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선사와 강사를 확연하게 경계를 지을 수 없는 대가의 면모도 있었으니 이 경우는 장석상이었다.95) 그리고 선사이면서도 계율에 대하여 해박하고, 율맥을 전수받은 경우도 있었으니 그는 김상월, 강영명,96) 하동산, 김자운이 그 실례이다.97)

넷째, 유교법회에 흐르고 있었던 정신은 불교정화 정신이다. 이는 선학원의 창건 정신, 조선불교 선종 창종 정신, 수좌들의 계율 수호정신, 그리고 송만공의 발언 등에서 확인이 된다. 나아가서는 1955년 불교정화가 본격화 되던 즈음에 김일엽의 범행단을 회고하는 대목에서도 거듭 나온다. 그리하여 이 법회에 참가한 하동산, 이청담이 1950~60년대에 불교정화운동의 최일선에 서고, 조계종단을 재건하여, 종단의 책임자(종정, 총무원장 등)로 있었음은 당연한 행보일 것이다.98)

다섯째, 유교법회에 참가한 승려들은 법회 참가 이전에도 철저한 수행을 하였지만, 법회가 종료된 이후에는 각처의 주석처로 복귀하여 지속적인 수행을 하였다. 그리고 유교법회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음이 주목된다. 대부분은 선원으로 복귀하여 수행을 하면서 불조혜명을 잇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에 ‘우리 공로자의 표창은 우리 손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경허집》을 선학원에서 주관하여 1942년에 발간한 것도 단순히 지나칠 것은 아니다.99)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 선원 및 토굴 등지에서 수행을 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해인사 가야총림, 봉암사 결사 수행, 불교정화 운동에 동참하였다.

여섯째, 이상과 같은 유교법회에 나타난 성격 및 의미를 종합해 보면 유교법회는 일제 식민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일제 말기, 선학원 및 수좌들의 자기 정체성을 적극 구현한 법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정체성은 비구승단 수호, 계율 수호, 현실과 사회에 적극 대응하려는 대승선이었다. 작금의 불교계에서 수좌들이 비판받는 은둔적, 비현실적, 성찰의식의 상실 등의 체질은 찾기 어렵다.

5. 결어

유교법회의 지속적인 연구, 선학원 및 수좌 등 선분야 연구에서 필자, 여타 연구자들이 유의할 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맺는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유교법회에 대한 자료수집을 강구해야 한다. 40년 전에는 존재하였던 〈유교법회 회의록〉을 찾아내고 법회의 배경, 진행 등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유교법회가 선학원의 공식적인 결정에 의해서 진행된 것인지, 나아가서는 유교법회 전후의 선학원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관련 자료도 수집하고 그를 선학원 역사 복원에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불교사, 조계종단사 복원에 일익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둘째, 유교법회에 나타난 정신, 사상, 성격 등을 선학원 역사, 근대불교사 차원에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지금껏 선학원 역사는 재단법인 선학원 안의 테두리에 갖힌 면이 적지 않았다. 추후에는 선학원 역사를 비구승단사, 조계종단사 속에서 그 위상을 재정립해야 할 것으로 본다.

셋째, 유교법회에 참가한 승려들의 행적을 이전과 이후로 대별하여 정리해야 한다. 무릇 역사는 인간이 활동을 하면서 남기는 기록, 그리고 그를 재인식하는 서술이기에 법회에 참가한 승려들의 고뇌, 지향, 수행 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에 임해야 한다.

넷째, 유교법회가 한국 현대불교사에 끼친 영향을 검토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유교법회의 계승의식에 대한 점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해방공간의 가야총림, 봉암사 수행결사, 50년대 정화운동 등은 그 단적인 예증이다.

다섯째, 유교법회와 같은 유사 사례를 발굴, 분석, 재평가하여 역사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어야 할 것이다. 유교법회는 법회가 있은 지 무려 67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역사적 평가, 재인식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근현대 불교의 격랑 속에 방치된 역사, 사건, 승려, 고뇌가 없는가를 성찰해야 한다.

여섯째, 유교법회를 근현대 불교사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한국 불교사, 혹은 한국 근대사 차원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재인식되어야 한다. 이럴 경우 유교법회, 선학원, 조계종단의 역사가 보다 큰 보편성, 탄력성을 갖게 될 것으로 본다. 예컨대 유교법회와 선학원을 비구승단 수호, 계율 수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불교 근대화, 불교 사회화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의 문제도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유교법회, 유교법회와 관련된 후속 연구에 참고할 측면을 대별하여 제시하였다. 이같은 지적, 제언이 이 분야 연구에 하나의 돌다리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김광식 /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부천대 교양과 교수,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용성》《근현대불교의 재조명》 《새불교운동의 전개》 《만해 한용운 평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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