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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정치의 시녀 혹은 잔소리꾼 / 최재목
특집-종교와 정치권력
[35호] 2008년 06월 10일 (화) 최재목 choijm@yuncc.yeungnam.ac.kr

“도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씀이 없다.” ― 이 황

1. 들어가는 말

역사 속에서 정치권력 옆에는 항상 철학자, 지식인, 예술인, 그리고 종교인이 붙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를 가르쳤고, 불교 사회의 왕 옆에는 고승이 붙어 다녔다. 유교 사회에서는, 만년의 이황이 17세의 소년왕 선조를 가르쳤듯이, 유학자들이 대거 정치권력 곁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화가, 문학가들이 일제를 도왔다. 박종홍은 박정희 정권을 도와 〈국민교육헌장〉 만들기 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어떤 지식이든 권력과 친했고, 가끔은 등도 돌리며 일희일비를 겪었다. 권력은, 자신을 유지하는 수단·도구로써, 최고급의 지식을 수혈하며 체력 유지해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조직화, 체계화되어 합리적인 성향을 지닌 지식이면 지식일수록, 권력의 도구로써 활용되기가 쉬웠다. 이 점에서 불교, 도교에 대항하여 ‘합리적’ 사유와 문화체계를 지향했던 유교(儒敎, Confucianism)1)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정치권력 지향성’이 높다. 중국과 한국과 같은 유교 사회에서 유지되었던 ‘과거(科擧)’는 유학자(儒學者, Confucian)들을 정치권력에 목을 매게 한 ‘달콤하면서도 쓴’ 합법적 도구였다. 그 올가미의 몸통은 ‘앎(knowledge)’이 ‘힘(power)’으로 변환되는 시스템, 이른바 유교적인 지식-권력의 합일 구조물이었다. 배움에 의해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일종의 ‘희망’·‘환상’은 유교 사회의 교육열(敎育熱)·출세욕(出世欲)을 일구는 바탕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상적인 유학자는 ‘학자’인 동시에 ‘정치관료’였다. 그들은 ‘자기 수양〔修己〕’을 토대로 권력의 핵심(중앙권력)에 진입하여 ‘지배계층으로서 살아가는 것〔治人〕’을 최종 목표로 한다. 이러한 유교적 학자관료(Confucian scholar-officials, scholar bureaucrat)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말이 ‘사대부(士大夫)’이다. 사대부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벼슬로서, 천자(天子)와 제후(諸侯) 다음에 위치하는 ‘사(士)’와 ‘대부(大夫)’를 합쳐 만든 개념이다.2)

유교 사회에서 유학자들은, 마치 공자가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데 섭섭함을 느끼지 않으면 군자 아닌가(人不知而不툘, 不亦君子)’라고 맘을 달래며 여러 나라를 떠돌았듯이, 정치권력의 옆에서 수신(修身)이란 걸 한다. 알고 보면 수신의 본질은 정치권력용 ‘해바라기 신체 만들기’이다. 따라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은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실제 구별이 힘들었고, 딱히 선을 긋기도 힘들었다.

정치권력과 사이가 좋아지면 그 곁에 다가가 수발을 들었고, 불화가 생기면 물러난다. 대개 유교사회에서 이런 행위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요즘 새 정부가 들어서면 학자(대학교수)가 대거 정치권에 보란 듯이 관료로서 영입되듯이 말이다.

유교는 정치의 시녀이거나 심지어는 권력에 옷 벗는 창녀 노릇을 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유학자들은 특정 정권을 옹호하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충실한 이데올로그로서 살아가기 일쑤였다. 일제는, 우리 유학자들(원로유림, 양반 등)의 ‘정치권력―명예―돈’이란 유착관계와 그런 지향성을 파악하여 그것을 교묘히 식민통치에 활용하기도 한다.

일제의 ‘남진론(南進論)’을 위한 조사보고서로서, 중의원의원(衆議院議員) 죽월여삼랑(竹越與三朗)이 쓴 《남국기(南國記)》에는 “(통치에 있어서) 양반 이하 토관(土官), 토사(土司)의 힘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이용함에, 큰 이익〔巨利〕를 주고, 그 욕망을 이루어주며, 명예를 주고 허영심을 채워주어, 그들을 기쁘게 하면서 우리들의 목적대로 활용해야 한다. 양반은 어떠한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조선을 움직이는 정신 기력의 근본이 되기에 이들을 무시하고서 일본이 직접 통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통치 방책을 건의한다.3)

조선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 또한 이러한 유학자들의 특성을 잘 알고서 조선의 양반 유림‘원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4) 이들을 충분히 활용하고자 한다. 그는 친일파를 앞세워 친일 유림 단체인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만들어 거액의 자금을 대는 등 이를 배후 조종하는 형태로5) 유림계를 활용한다.
여기서는 주로 유교와 정치권력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관련되는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2. 유교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용하는 유교(儒敎), 유학(儒學), 유가(儒家)란 말은 이 유(儒)를 기본으로 해서 후대에 발전한 개념들인데, 보통 유학(儒學), 유교(儒敎), 유가(儒家)는 구별되어 사용된다. 여기서는 이것을 정리해두고 다음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 ‘유(儒)’의 글자 뜻

‘유(儒)’는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비롯한 여러 자전(字典)을 보면 유(儒)는 ‘유(柔)’, ‘유(濡)’, ‘윤(潤)’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유(柔)는 ‘부드럽다’는 뜻이고, 유(濡)는 ‘스며들다’, ‘젖다’의 뜻이고, 윤(潤)은 ‘(물에 젖어) 붇다’, ‘윤택하다’는 뜻이다.6) 모두 물〔水, ?〕이나 비〔雨〕와 관계된다.7)

유(儒)는 ‘인(헮(=人)) + 수(需)’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需)는 ‘길게 자라 밑으로 늘어진 수염(콧수염·턱수염) 모양’을 본 딴 것으로 ‘(물이나 비에) 젖어 부드럽게 된 수염’의 뜻이다. 그래서 유(柔), 유(濡), 윤(潤)과 통한다. 그리고 수(需) 자는 ‘雨 + 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而)는 인간의 형(大)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수(需) 자는 ‘(가뭄 등에) 비가 내리도록 하늘에 비는 사람’으로 해석이 된다.8)

이런 뜻들을 종합하면, 유(儒)라는 집단은 ‘사람’〔=헮〕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 ‘수요가 있는, 필수적인’〔=需〕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禮), 특히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와 같은 사자의례(死者儀禮)를 관장·전승하거나, 가뭄일 때 비를 부르며 무속, 점술에 능한 전문가 그룹을 포괄적으로 말한 것 같다.

따라서 유(儒) 그룹은 종교적인 의례, 제사와 관련이 깊다. 더욱이 유(儒)의 사상적 전통에서 사용하는 주요 개념인, 살신성인(殺身成仁) 등에서 쓰이는 ‘인(仁)’, 유화(柔和) 등에서 쓰이는 ‘화(和)’,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예(禮)’ 자 등도 본질적으로는 종교성을 상징하는 개념들이다.9)

● ‘유가(儒家)’라는 말

'유가(儒家)’라는 말은 전국시대의 도가, 묵가, 법가와 대비되는 용법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학파와 대립 개념으로서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즉, 한대(漢代) 초기의 유가는 극히 정치적인 색채를 띤 도가(道家)인 황노학파(黃老學派)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정한 이후에는 유가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사상집단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후한(後漢) 말 동란의 발생으로 분열기에 접어들면서 유가는 다시 노장사상, 불교사상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유가는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한다. 당대(唐代) 중기부터 불교를 의식한 끝에 유가는 다시 각광을 받는다. 이후 송대를 통해 불교와의 대항 관계에서 벗어나 인간을 사회적 존재(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실현해야 할 존재)로 파악하려는 유가 본연의 자세를 깨닫게 된다.

● ‘유교(儒敎)’라는 말

‘유교(儒敎)’라고 할 때는 (1) ‘유(儒)의 가르침〔敎〕’, 즉 윤리적·정치적 규범 혹은 교설·교리의 뜻이 되어 사람들을 억누르는(억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2) ‘종교적’(종교가 아니고) 성격도 풍긴다. 사실 한대(漢代)의 유교에는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일시적으로 ‘종교화되었다(혹은 종교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보통 유교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이 경우에도 주로 (1)의 뜻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1)과 (2)의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2)쪽이 강하다.

●‘유학(儒學)’이란 말

‘유학(儒學)’이란 말은 유교의 전통적인 고전(古典, 六經과 같은 경전)을 공부한다(즉 탐구한다)는 성격이 짙다. ‘학(學)’이란 말에는 합리성, 객관성, 논리성, 체계성 등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고전 즉 연구학습의 대상으로 삼는 문헌이 진리〔道〕 자체임을 전제하고 인정하고 나서 성립한 것이다. 여기서는 종교적이라는 뜻보다는 성현의 진리를 담고 있는 문헌을 연구·학습한다는 학문성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에서는 보통 유교라는 말보다는 유학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나 성균관을 중심으로, 혹은 민간에서도 유학을 종교로서 보려는 움직임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10)

● 유교는 종교인가?

그런데, 유교는 종교인가? 한마디로, 유교는 종교이다! 이 물음에 답한 글들이 이미 여러 편 있다. 최재목(1997), 고건호(1999), 황필호(2001)의 글이 그것이다.11)

유교는 종교, 윤리 체계 또는 정치 철학으로서 다원적 성격을 지니며, 뚜렷한 교단 조직이나 사회 제도 대신에 유교만의 신성한 공동체를 ‘가(家)’라는 구상적(具象的)인 사회·정치상의 광범위한 조직을 발전시켜 왔다.12)

아울러, 근대기에는 유교가 여러 사회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서구 종교’에 맞춰 해석되는 모습도 있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황필호의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글 가운데 일부를 인용13)하는 것으로 그칠까 한다.

고건호는 ‘한국 유교 1600여년 역사에 남을 특별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95년 11월 28일 성균관 유도회는 유교 제도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종헌을 제정했는데, 그 골자는 ‘유교의 종교화 선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새로 제정된 종헌에서는 종단 명칭을 〔종전의 ‘성균관 유도회’ 대신에〕‘성균관 유교회’로 하며, 공자를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붓다에 비견할 수 있는 종사(宗師)로 삼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성경》이나 《코란》에 비견할 수 있는 경전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이 개혁안은 유교를 윤리 규범·전통 사상·통치 철학 등으로 이해하는 일반의 경향을 반박하면서, 유교는 ‘공자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윤리가 바로 서고 도덕이 실현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창시한 종교’라고 주장했다. 또한 개혁안은 “이제까지 유교를 단순히 사상·철학·문화적 관습으로 여겨 왔으나, 유교는 원래부터 종교였으며, 그러나 지금까지는 종교로서의 성격이 약했던 것이 사실이므로 이제부터라도 종교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화해나가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14)

예상했던 대로 이 개혁안은 유교인들의 찬반양론에 부딪쳤으며, 결국 최근덕(崔根德) 성균관장의 석연치 않은 퇴임으로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하고 그냥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유교를 종교로 만들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실제로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물음과 논쟁은 이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도 등장했으며, 특히 이 논쟁은 중국에서 1898년 이에 공교회 운동(孔敎會運動)과 유교교회화 운동(儒敎敎會化運動)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벌어지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89년에 유교계 안팎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금장태는 이렇게 말한다.

유교 전통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추구한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종교란 국민의 뇌질(腦質)을 주조(鑄造)하는 원료이며, 실로 한 나라의 강약흥망이 여기에 걸려 있다”라는 신념을 밝히면서, 양명학적 입장에서 유교 개혁 이론서인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저술한 박은식(朴殷植, 1859~1926)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세워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유교 개혁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서 청말·민국 초에 강유위(康有爲, 1857~1927)의 주도로 일어났던 공자교 운동(孔子敎運動)의 영향을 받아 유교 개혁 운동을 전개한 인물들도 있다. 이승희는 한주 이상진의 아들로 전형적인 도학의 수련과 신념을 가졌던 인물이지만 만주를 망명하여 1913년 ‘동삼동 한인공교회’를 창립하여 활동했다. 그리고 이병헌은 전통 유교와 개혁 유교를 각각 ‘향교식 유교’와 ‘교회식 유교’로 부르면서 유교 개혁에 기독교적 요소를 받아들였으며, 또한 그는 《유교의 종교 집중론(儒敎爲宗敎集中論)》이라는 저술에서 유교는 서양 종교인 기독교의 범위를 넘어서 철학·과학·종교를 집합하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유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15)

이런 상황에서 고건호는, 현재 우리가 토론해야 할 문제는 “유교는 종교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차라리 “왜 우리는 이 질문을 하는가?” 혹은 “이런 질문이 전제하고 있는 인식 체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 사람과 사람 ‘사이(間)’에서 사는 가르침

유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 즉 인륜(人倫)을 지향한다. 이것은 공자의 어록이 남아 있는 유교의 성전 《논어(論語)》에 잘 제시되어 있다.

《논어》의 첫머리 〈학이편(學而篇)〉 첫 구절은, ‘배워서 때 맞춰 이를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로 시작한다. 공자 당시에 배우던 필수 교양과목인 육예(六藝) 즉 예절〔禮〕·음악〔樂〕·활쏘기〔射〕·말타기〔御〕·글씨 쓰기〔書〕·셈하기〔數〕를 배우는 기쁨을 제일 먼저 내세우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갖출 기본교양을 닦아 사람의 도리를 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서 향유할 수 있는 기쁨을 제시한 것이다. 배움을 통한 자기완성은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바로서는 기쁨’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묻고 배움〔學問〕과 자기수양〔修己〕의 과정으로 드러나는 사람임·사람됨의 무늬〔人文〕는 인륜(人倫)·윤리(倫理)를 성립케 한다.

이어서 둘째 구절에서는,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하겠는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라고 말한다. 자기완성을 위해 힘쓰는 자에게는 그 뜻을 알아주고 서로 어울려 사는 모습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서로 무리 지어 어울려 사는 즐거움’의 무늬가 바로 친구들의 찾아듦일 것이다. 덕(德) 있는 인간의 윤리와 덕이 있는 정치(=德治)도 여기서 성립한다.

마지막 구절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아니하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툘, 不亦君子乎)’이다. 사람은 남들의 이목에 이끌려 살기 쉽다. 다시 말하면 남에게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하고 불만이 생겨 화나기 마련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이목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할 일’ ‘가치 있는 일’ 그 자체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할 때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초연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인간’인 군자(君子)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원리인 ‘인(仁)’과 생명보다 귀한, 생명을 넘어선 가치인 ‘의(義)’도 여기서 성립한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은, 군자(君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이 부여한 길(=하늘의 뜻)을 알아야 하며〔知命〕’, 사회에 몸을 뚜렷이 세우기 위해서는 예를 알아야 하며〔知禮〕, 사람이 어떠한가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 관계맺음의 기본인) 말을 알아야 한다〔知人〕는 말로 장식된다.

《논어》에는 ‘인간의 냄새’로 가득하다. 모든 시선은 ‘인간의 현실’ 그 자체로 향해지고, ‘무엇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절실히 캐묻고 반성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논어》에는 ‘사람이 희망임’을 말한다.16)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권력에 가려 사람이 희망이지 않았던 시대의 ‘그늘’을 함께 읽게 해준다.

3. 유교와 정치권력

‘수기안인’, ‘수기치인’ 등의 대의명분에서 드러나듯이,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유교는 정치권력과 동거를 자원하는 편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정치적 수양론, 신체론, 공부론이 나타난다. 유학자들은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우환의식(憂患意識)을 가진 ‘유교 이데올로그’로서 살고자 한다.

● 유교의 대주제: 내외합일지도(內外合一之道)라는 고뇌

‘수기안인(修己安人, 자신을 수양하고 타자를 평안히 함)’, ‘수기치인(修己治人,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통치함)’, ‘내성외왕(內聖外王, 내면적으로는 도덕적 성인이 되고 외면적으로는 최고통치자가 됨)’, ‘성기성물(成己成物, 자신을 완성하고 타자(남)를 완성함)’ 모두 유교의 대의명분을 나타내는 개념이거나 슬로건이다.
유교라는 종교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間〕’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일상적 삶과 행위에서 성립할 수 없다. 나(=안/內)와 타자(남)(=밖/外) 사이의 일, 즉 나의 몸〔身〕에서 출발하여 가(家)-국(國)-천하(天下)의 일들로 충만해 있다. 나의 내면의 긴장은 늘 바깥 풍경이었다. 그 근본은 ‘정치권력’의 풍진(風塵)이다. 풍진에 시달리며, 나의 덕성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유교, 신유교를 영위한 유학자들의 앎〔知〕은 앎 자체로서 독립한, 순수학문이나 순수학술이 아니었다. ‘나’와 ‘타자(만인 만물)’를 일치시키기 위한 부단한 내적(심리적·도덕적) 긴장17) 속에서 영위되고 있었던 것이다. 메쯔거( T.A. Metzger)는 그의 유명한 저서 《고뇌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Predicament)》18)에서 중국의 신유학자(new-confucian)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현실과의 긴장(tension), 즉 ‘심리적·도덕적·형이상학적’인 ‘내적 긴장’과 ‘정치적·경제적’인 ‘외적 긴장’ 속에서 깊은 ‘고뇌(predicament)’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서 그들은 결국 자기와 사회를 변혁함으로써 복잡하게 뒤얽혀서 형성된 고뇌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고 본다.

안과 밖을 통일하려는, 그 긴장감을 가진 고뇌는 구체적 시공간 속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중국(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전반)의 근세-근대기 유학자들은 이러한 고뇌로부터 도피하려는 노력 속에서 다양한 삶과 실천의 행태를 보여준다.

● 삼간(天地人)의 패러다임과 인간의 영장성( 靈長性) - 정치 권력의 철학적 정당화

전통적으로 유교에서는 천지인(天地人) 삼간(三間)을 중시하였다. 천(天)은 시간성(temporality)을 말하며 추상성(abstraction)을 상징하고, 지(地)는 국부성(locality)을 말하며 구체성(concreteness)을 상징한다. 천지인 삼간의 천간(天間)은 시간(時間)이며, 지간(地間)은 공간이며, 인간(人間)은 지의 국부성(공간)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도 천의 보편성(시간)에 따른다.19)

‘인간은 천과 지를 포섭하며(人參天地, 人參兩間)’, 또한 ‘지는 천과 인을 포섭하며(地參天人20), 地參兩間21))’, ‘천은 지와 인을 포섭한다(天參地人, 天參兩間).’ 여기서 ‘포섭’이란 말은 ‘상호침투’와 ‘소통’ 혹은 감통(感通)을 내용으로 하는 ‘상생적 화해’로서 ‘서로 제자리를 잡고서 편히 길러짐=위육(位育)’22)이다.

천의 시간성, 지의 공간성 속에서, 인간의 ‘시간(←시간적 이력=‘생노병사’ 등)’이 있고, ‘공간(←공간적 배치=‘주거’ 등)’이 있다. 또한 인간은 그 시간·공간의 ‘사이〔間〕’(즉 기억·추억·목적·장래· 순간·퇴행·원근 등)를 구조화하여 꿈 등의 ‘상상(想像)’(像의 드러남·형성, 기도·瞑想 등)을 보여준다.23) 유기적이고 전일적인 천일합일(天人合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상(思想)은 이렇게 해서 탄생된다.

여기에 우주의 탄생, 만물의 생성, 인간의 우월성/빼어남(靈長性), 기질의 차이, 인간의 삶과 죽음의 우주적 의미, 만물의 유기적·전일적 결합과 관계성, 보편성/동일성〔一〕과 다양성/차별성〔多〕, 이 태극-음양-오행-만물의 도식을 통해 체계적으로 설명된다. 북송 시기 주돈이(周敦헊, 자 茂叔, 호 濂溪, 1017~1073)의 태극도(太極圖)와 그 설명(태극도설)은 이러한 내용을 잘 디자인한 것으로 보여진다.24)

중국 고대 이래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위의 주돈이의 태극도(太極圖)에서 볼 수 있듯이 음양오행(陰陽五行)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된다는 해석 아래 인간과 우주 만물과의 차별이 설정되고, 인간은 다른 사물에 비해 우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인간은 오행의 기(氣)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기운을 얻어 탄생되었기에 신령한 존재라고 설명된다.25)

물론 이러한 인간의 우위를 인정하는 사고는 주렴계의 분석적 사색에서 처음 발견되는 사상은 아니다. 중국 고대로부터 인간을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보려는 사상26)이 있어 왔고, 단지 주렴계가 그것을 음양·오행의 구성 요소에 의해 합리적으로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그는 여기서 인간의 지위를 확정하고 인간인 이상 누구나 배움에 의해 이상적인 인간, 즉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27)고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완성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기 완성이 가능하다28)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인간에 내재된 가능성 내지 잠재 능력을 문자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탁월한 인식 및 행위 능력’인 ‘밝은 덕=명덕(明德)’이다.

인간이 만물을 리드해가는 능력은 갖춘 이상, 만물들의 어그러짐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 ‘천지(天地)도 모르고 날뜀’에 대한 경계

이황(李滉. 호 退溪. 1501~1570)은 68세 되던 해 17세의 선조를 위하여, 중국의 유학 및 성리학적 언설들을 창의적으로 편집하여 지적 재산권을 획득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하였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학문을 체계화한 만년의 지형도(知形圖)이다.

퇴계는 〈성학십도를 올리는 글〉(〈진성학십도차(進聖學十圖箚)〉) 제일 앞머리에서 “중추부 판사 신 이황은 삼가 두 번 절하고 임금님께 말씀을 올립니다(判中樞府事臣李滉謹再拜上言)”라고 말한 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도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씀이 없습니다’(道無形象, 天無言語).

라는 매우 중요한 발언을 한다. 이것은 공자가 “사시가 운행되고 온갖 것들을 생성해도 하늘이 어디 말을 하더냐(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論語》〈陽貨篇〉)고 말한 것29)과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하늘과 땅의 룰에 따라 산다. 하늘〔天〕은 인간을 통제하는 의지나 주재력을 가진 ‘인격적, 주재적, 종교적’인 것이었으나 차츰 ‘자연적, 원리적, 이법적, 철학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30) 아동용 문자교재인 《천자문(千字文)》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 천(天)과 ‘땅’ 지(地)는 일상의 지평에서 인간과 소통하는 것이다. 천지는 ‘가물玄, 누루黃’에서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바라보는 질감과 색감을 넘어선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는 시공간의 세계이다. 이 점에서 존 레논(John Lennon)의 〈이메진(Imagine)〉이란 노래에 나오는, “천국도 지옥도 없는, 오직 머리 위에서 푸른(Imagine there's no heaven. ……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있는 그대로의 창천(蒼天)에 가깝다.

본질적으로 유교는 하늘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 문제는 ‘인간’ 자신에 있다. 하늘 탓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인간 속에서 어떻게 ‘천지’의 룰을 알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가가 중시된다.

● 공부(工夫)의 정치성: 유교적 교판(敎判) 주희의 《사서(四書)》

유교의 정치권력 지향은 그들의 텍스트 확정에도 매트릭스되어 있다. 즉, 신유교(新儒敎, Neo-Confucianism)로서 송학(宋學)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탄생시킨 최대의 공헌자 주희(朱熹)는 사서를 ① 《대학(大學)》→ ② 《논어(論語)》→ ③ 《맹자(孟子)》→ ④ 《중용(中庸)》의 순서로 읽을 것을 주장하였다.31) 이것은 유교적 의미의 새로운 ‘교상판석(敎相判釋)’ 즉 ‘교시(敎時)’의 작업에 해당한다.

먼저 《대학》을 통해 학문의 규모를 정하고 뜻을 정립하며, 다음으로 《논어》를 배워서 학문하는 근본을 세우고, 《맹자》를 읽어 학문의 발전과 의리를 분별하는 법을 배우며, 《중용》을 통해서 우주의 원리를 터득한다는 것이 주희의 ‘사서 읽기의 철학’이다. 이렇게 주희가 사서독해의 순서를 정한 이후 이것이 일반화되었다.

주희가 《사서》의 처음에 《대학》을 둔 것은, 거기에는 학문의 총괄로서의 삼강령(三綱領)과 그 분석인 팔조목(八條目)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교의 이상 즉 공자의 가르침의 골격(규모)을 알 수 있다고 보고, ‘초보자가 덕성함양에 들어가는 문〔初學入德之門〕’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주희는 《사서(四書)》 가운데서도 《대학》을 가장 중시하고, 《대학》 가운데서도 격물(格物) 두 자를 중시하였다. 이것은 정이(程헊)의 사상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대학》의 다음에 《논어》를 둔 것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유교의 이상인 《대학》의 도를 어떻게 실천했나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맹자》가 세 번째로 오는 것은 맹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이론화·철학화하여 심오한 경지로 끌어올렸으며, 또한 송대 신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의 심성론(心性論)에 대항할 만한 인간 마음에 대한 이론적 논거 마련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맹자》에서는 인간의 본성문제를 다루어 성선론(性善論)을 전개하고 있으니 그것은 불교의 불성론(佛性論)에 대응할 만한 주요 논거(재료)가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맹자》에는 위아주의자(爲我主義者)(=극단적 이기주의자)인 양주(楊朱)와 겸애주의자(兼愛主義者)(=박애주의자)인 묵적(墨翟)과 같은 이단(異端)의 사설(邪說)을 비판·배척하여 유가의 별애(別愛)(=차등적·원근법적 사랑)라는 유가적(儒家的) 논조가 담겨 있어 도통(道統)의 확립에 지대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중용》을 둔 것은 성(性)·도(道)·교(敎)의 관계를 천명(天命)과 결합시켜 설명하고 있어, 유학의 최종 결론격인 천인합일지도(天人合一之道. 우주와 인간의 합일의 원리), 그리고 하늘의 운행 원리를 언표한 형이상적인 개념인 성(誠) 등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용》은 인간과 사물의 근저에 있는 추상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기에, 다른 경전을 먼저 읽고서 이것을 제일 마지막에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학》은 인간과 사물을 정면(正面)에서 바로 서서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라면, 《중용》은 그것들의 이면(裏面)에서 거꾸로 뒤집어서 성찰하도록 한 것이라 할 것이다.32)

유교, 특히 신유교의 텍스트 읽기는 매우 합리적으로 조정된다. 맹자가 말하는 대로, ‘나도 좋고’(=獨善)-‘남도 좋고’(=兼善)의 합일을 지향하는 읽기이다. 여기서 ‘수기치인적(修己治人的)’ 신체론, 공부론을 낳는다.

● 효 - 유교의 ‘정치적 몸’의 근원

다시 말해서 ‘내 몸은 내 몸만이 아니라 남과 관련된 몸이다’라는 말을 성립케 한다. 나의 몸은 사회적, 정치적 컨텍스트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효경(孝經)》의 첫 장 〈개종명의(開宗明義)〉 앞머리에는 효의 시작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이며, 그 완성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33)

유교적 몸(身體)은 개체적인 의미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정치권력적’임을 명시한다. 따라서, 출세하여 명예를 얻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부모를 위한 것이다. 항상 정치적 문맥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효도의 삶이다.

우리 속담에 ‘사람의 자식은 서울로 보내고, 마소의 새끼는 시골로 보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중앙의 정치권력에 눈길을 돌리지 않으면 ‘마소의 새끼’가 되는 것이다. 유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이러한 현실 사회의 본질을 잘 간취하고 있었다. 예컨대, 유배 중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남한강 근처 양수리에서 성장하던 아들에게 보낸 〈서울에서 살도록 하라〉는 편지에서 “너는 사정이 어지간해지면 한양 사대문 밖에 살지 말고 어떻게 해서라도 사대문 안에서 살거라. 그것도 힘들거든 사대문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보고 듣는 게 많고 기회들이 많다.”34) 라고 하였다.

정약용의 이 편지는 조선시대 유교 지식인들의 내면을 솔직히 드러내 보이는 말 같기도 하고, 유교 이데올로그들이 정치권력 주변에 서성거린 풍경을 잘 그려준다.

● 유교 이데올로그의 철학 - 〈선우후락〉의 우환의식

《주역(周易)》에 “역을 지은 자는 우환(憂患)이 있었을 것이다.”(〈계사하(繫辭下)〉)라고 하였다. 이것은 문왕이 유리라는 곳에 7년 동안 유폐되어 있을 때 역(易)의 사(辭, 해설)를 지었다는 이야기와 통한다. 역(易)의 우환의식(憂患意識) 때문에 역에는 ‘신중함’이 중요한 덕목으로 논의된다. 만사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 역의 가르침이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역(易)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중국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학자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는 선우후락(先憂後樂)이란 멋진 말이 나온다.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 세상 사람들이 기뻐한 뒤에 기뻐하라(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는 슬로건은, 만물·만사에 따뜻한 사랑을 가진 자〔仁者〕가 언제 어디서나 세상에 대해 근심하는 일종의 우환의식(憂患意識)이다.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운 후에야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 공자,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세상에 나아간다!"

《논어(論語)》〈미자편(微子篇)〉의 다음 이야기는 유교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초나라의 은자인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함께 밭을 가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다가 제자인 자로(子路)35)에게 나룻터〔津〕를 묻게 하였다. 자로가 말고삐를 공자에게 넘기고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에게 가서 나루를 물었으나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다음의 이야기는 내용이 좀 심각해진다. 공자의 기본 이념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장저는 자로에게 “천하가 어지러워 도도한 흐름이 이와 같은데, 그대들은 누구와 더불어 그것을 개혁하려 하는가? 그대는 (공자와 같이) 나쁜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과는 어울리면서 어찌 (우리와 같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는 사람은 따르지 않는가?”라고 하고는 씨앗 덮는 밭일을 계속하였다.

자로가 돌아와 공자께 고하니, 공자께서 실망스런 듯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새나 짐승과는 한데 어울려 살 순 없을진대,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는다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구태여 세상을 개혁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니라.(天下有道, 丘不與易也)”.36)

여기서 보듯이, 천하에 도가 있으면 도를 따라 살고, 도가 없으면 도를 바로잡으러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 자신의 몸 하나를 깨끗이 하고자 큰 인륜을 어지럽히는(欲潔其身而亂大倫)37)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서 ‘수신(修身)’의 ‘홀로 좋음〔獨善〕’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斯人之徒與〕’‘치인(治人)’적 삶을 지향하였다.

● 맹자, ‘독선과 겸선의 균형’을

《맹자(孟子)》에서는 이것을 ‘겸선(兼善, 같이 좋음, 共同善)’이라 하였다.
즉, 맹자는 “곤궁하게 되면 혼자서 자신을 선하게 하였으며, 영달하게 되면 자신과 천하를 선하게 하였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는 옛 현인의 말을 인용한다.

맹자가 송(宋)나라 유세객 구천(句踐)에게 말했다.

“그대는 유세(遊說)를 좋아하시지요? 제가 유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세라는 것은 남이 자기의 말을 알아주어도 만족해야 하고, 자기 말을 알아주지 않아도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어떻게 해야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덕(德)을 존중하고 의(義)를 즐거워하면 만족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비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의리를 잃지 않으며, 영달(榮達)할지라도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 옛날의 현인(賢人)들은 뜻을 이루면 그 덕택(德澤)을 백성들에게 보태었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을 수양하여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곤궁하게 되면 혼자서 자신을 선하게 하였으며, 영달하게 되면 자신과 천하를 선하게 하였습니다.”38)

‘나도 좋고’(=獨善)-‘남도 좋고’(=兼善)의 전략은, ‘수기안인-수기치인-내성외왕-성기성물’이라는 내외합일의 틀을 잘 말해준다.

● 정권의 정당성 평가와 ‘진퇴’의 어려움

나라에 ‘도(道)가 있고 없고’에 따라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논어》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공자가 말했다. “참으로 곧은 사람이다. 사어(史魚)는! 나라에 도가 있어도 화살같이 곧았으며, 나라에 도가 없어도 화살같이 곧았다.” “참으로 군자다운 거백옥(퀒伯玉)이로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거두어 숨길 수 있더라.”39)

나라에 도가 없으면 벼슬하지 않고, 지혜와 재능을 감추고 물러나 몸을 숨긴다는 거백옥(퀒伯玉) 식의 전략, 그리고 도가 없을수록 오히려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구한다는 사어(史魚) 식의 전략이 서술되어 있다. 공자는 ‘거백옥’의 태도를 ‘군자답다’고 칭찬하였고, 사어의 태도를 ‘대쪽 같다’고 칭찬하였다. 둘 다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닐 것이다.
공자는 다른 곳에서,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을 각오로 도를 잘 닦는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가고, 도가 없으면 숨을 것이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유하고 귀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40)

라고 하였다. 이것은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가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는 거백옥 식의 전략이다. 여기서 은둔은 정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가 없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이다. 은둔도 하나의 ‘정치’인 것이다. 은둔은 도피가 아니다. 실제로 해당 정권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효과적인 정치이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정권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평가에 기인하지만, 그것을 평가하는 당사자의 태도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공자는 “우리가 새나 짐승과는 한데 어울려 살 순 없을진대,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는다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구태여 세상을 개혁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니라.”고 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그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어지러운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간다고 하였다. 은둔만이 능사가 아니라, 사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다가 사람 속에서 죽어가기를 원했다. 사람들 속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만을 진정한 희망으로 여기며, 사람 속에서 살고자 하였다.

자! 그렇다면, 정치권력도 ‘사람의 일’이 아닌가? 사람이 사람 사는 곳의 정치권력에 밀착하는 것이 왜 나쁜가? 이렇게 유교는 우리에게 반문할 수 있다.

4. 나오는 말

역사 속에서 보면, 유교는 이런 세속적인 욕망을 인간과 사회의 본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현실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끈질긴 생명력, 탄력성, 자기 정화력을 발휘해 왔다. 이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잘 보면 세상에 역동적으로 잘 대응한 것이고, 잘못 보면 세상에 타협하고, 영합한 것으로 보인다. 순결주의를 기준으로 결론짓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거친 평가처럼 보인다.

유교에서는 세상이 좋아도 정치에 가담하고〔進〕, 세상이 어지러워도 그 세상을 구하려 정치에 가담하는 것을 합리화한다. 물론 세상을 떠나 은둔할 때도 무작정 떠나지 않고, 현실을 우려하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로서 ‘재야로 물러남〔退, 山林隱居〕’을 택한다. 나아감도 철학적 행위이고, 물러남도 철학적 행위이다. 어느 쪽이든 정치권력의 해바라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모두 부정할 수도 없고, 무조건 모두 긍정할 수도 없다.

조선시대의 구체적 역사에서 본다면, 정치적 진퇴(進退)에서 약간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도가 있어도 나아가고, 없어도 나아가는’ 사어 식의 태도와, ‘도가 있으면 나아가고 없으면 물러나는’ 거백옥 식의 태도에 비긴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의 태도가 옳은 것인가? 청음 김상헌의 주전론(主戰論)과 지천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겠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계에 맞춘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줄곧 세계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애쓴다. 결국 모든 변화는 비합리적인 사람에게 달려 있다.(The reasonable man adapts himself to the world; the unreasonable one persists in trying to adapt the world to himself. Therefore, all progress depends on the unreasonable man.)”고 했을 때, 유학자는 어느 쪽이라 할 수 있는가? 대개의 유교인은 권력의 세계에 자신을 맞추는 ‘합리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보면, 유교인은 세계에 영합하지 않고, 세계를 자신의 철학과 가치판단대로 이끌어 가려는 완고한 ‘대쪽 같은 선비’의 ‘비합리적’ 면도 갖는다.

모두가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어느 한 쪽만이 옳을 수도 있다. 문제는 정치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유교인의 태도, 나아가서는 정치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들의 판단력이나 가치관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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