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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권력과 정치권력, 그 만남과 갈등의 역사 / 이진구
특집-종교와 정치권력
[35호] 2008년 06월 10일 (화) 이진구 jilee80@freechal.com

1. 들어가며

얼마 전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세인들의 관심을 끈 현상의 하나는 종교정당의 출현이다. ‘사랑 실천’을 강령으로 내세운 ‘기독당’과 ‘가정 회복’을 기치로 내건 ‘가정당’이 각각 개신교와 통일교라는 종교를 배경으로 선거운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유권자들과 매스컴의 시선을 끌었다. 비록 두 정당 모두 국회 진출에는 실패하였지만 이번 총선을 계기로 종교정당의 존재를 유권자들에게 알리는 데는 나름대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교가 개신교를 모태로 하여 등장한 신종교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번 종교정당의 출현은 한국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몇 달 전에 치러진 2007년 대선과정에서도 기독교계의 정치화를 보여주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장로대통령론’이 교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입과 몸짓을 통해 교회 안에 급격히 확산되었다. 물론 ‘장로대통령론’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가진 교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자유당 시절부터 선거철만 돌아오면 이 구호는 단골 메뉴처럼 등장해 왔다.

기독당과 같은 종교정당의 모습은 아니지만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 단체들이 지난 대선과 총선 과정에서 활약했다. ‘기독교사회책임’이나 ‘기독교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기독교 NGO들이 그것이다. 이 단체들은 ‘정치운동’이 아니라 ‘시민운동’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지난 선거 국면에서는 우파정권 창출을 위해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지난 대선과 총선 국면에서 기독교계는 매우 정치화된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독교계의 정치세력화는 사실 그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참여정부의 출범 직후부터 서울역이나 시청과 같은 도심의 광장에서 수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시국집회를 여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는데 거기에서는 반공, 반북, 반김, 친미 등과 같은 정치적 구호들이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의 출범 직후부터 기독교계는 ‘좌파 정권’ 타도를 외치면서 정치세력화해 왔고 마침내 ‘우파 정권’의 탄생에 한몫을 담당하였다. 이명박 당선자가 제일 먼저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한 곳이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었다는 사실은 지난 대선과 기독교계의 깊은 관계(connection)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한국 기독교는 초기부터 정치권력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스스로의 역사를 형성해 왔다. 식민지하의 독립운동과 부일협력,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맹목적인 정권 지지, 군사정권 시절 진보진영의 민주화 운동과 보수진영의 정교유착, 그리고 노무현 정권하에서 보여준 ‘광장의 정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몸짓을 보여왔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나타난 이러한 기독교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기독교사의 지평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세계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독교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라고 하는 고전적인 주제 하에서 다루어 왔다.1) 현재 이 분야의 연구성과는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짧은 지면에 그 전모를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2천년 기독교사에 나타난 교회권력과 정치권력의 관계를 시기별 특성에 따라 역사적으로 스케치하는 방식을 택하고자 한다.

2. 박해와 순교의 시대: 정치권력과 거리두기

기독교는 2천년 전 로마제국의 한 변방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예수라는 유대인이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면서 시작된 종교이다. 예수가 전개한 ‘하느님 나라’ 운동은 민중으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에 위협적인 힘으로 비쳤다. 유대교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공모하였으며 이는 마침내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 운동은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통해 ‘교회’라는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탄생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라고 불리는 ‘세계종교’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그것은 정치권력과 어떠한 관계에 있으며 예수는 당시 로마제국과 같은 정치권력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를 먼저 볼 필요가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2)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리새파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를 곤경에 처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던진 질문 즉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예수가 답한 구절이다.

이때 예수가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답하면 그는 로마의 법을 거역하는 것이 되어 당장 체포될 것이고 이와 반대로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대 민족주의 세력을 배반하는 결과가 된다. 예수는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당시 유통되던 동전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거기에 무엇이 그려져 있느냐고 물었다. 카이사르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고 답하자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대답을 한 것이다. 이 대답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는 로마의 황제가 지배하는 영역과 하느님이 통치하는 영역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심문할 때에도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3)라고 답변하였는데 여기서도 예수는 이 세상과 하느님의 나라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이러한 대답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을 교회의 정치참여 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군사정권에 의한 폭압적 통치가 행해질 때 대다수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침묵’을 선택하였는데 이들의 ‘정치적 침묵’에 성서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그렇지만 이와 반대로 해석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이들에 의하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매몰되어 있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나라(not of the world but in the world)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해 교회의 정치참여의 근거를 찾는다.

이 구절과 함께 많이 인용되는 성서 본문은 사도 바울의 편지인 <로마서> 13장이다.4) 이 본문의 요지는 세상의 권위가 모두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통치자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므로 기독교인들은 모두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고 통치자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통치자에게 거역하는 자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구절 역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군사정권 시절 보수적 기독교 지도자들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진보 진영의 기독교 인사들을 공격할 때 이 구절을 무기로 삼았으며, 군사정권 역시 이 구절을 들이대며 기독교인들의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한다. 그들은 이 본문에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의 의무’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통치권력에 대한 불복종의 권리’를 동시에 읽는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관련되어 자주 언급되는 또 하나의 구절은 <요한계시록> 13장이다. 이 본문에는 두 마리의 사악한 ‘짐승’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짐승들은 로마제국의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다.5) 로마를 악의 화신으로 묘사하는 이러한 표현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인 박해 직후였다는 사실을 주목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이 구절은 정치권력의 절대화 즉 우상화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정치신학자들에 의해 특히 주목받아 왔다.6) 그러나 〈요한계시록〉 자체는 사악한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반란보다는 신자들의 ‘인내’를 권하고 있다. 순교의 모티브를 암시하는 ‘수난의 항거’가 교인의 덕목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세 본문 이외에도 성서에는 교회와 국가의 문제와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는 표현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앞에 언급한 세 본문이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문제를 논의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어 온 구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 본문이 보여주듯이 성서 자체에 이미 국가권력에 대한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고, 더 중요한 것은 동일한 본문이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색깔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의 역사 속으로 직접 발을 들여 놓고 교회가 정치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 왔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기독교는 로마 제국 시기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을 규정한 것은 로마의 정치권력이었다. 당시 로마는 종교적 관용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 복속된 민족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신을 숭배할 수 있었고, 기독교인들 역시 그들 나름의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황제 숭배를 도입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황제 숭배는 명백한 우상숭배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국의 관리나 군인과 같은 공직에 진출한 기독교인들이 문제가 되었다.

이들은 황제 숭배와 국가의 공식의례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기독교인들의 공직 진출이 현저하게 줄었는데 이는 군인이나 공무원으로 활동하던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피하기 위해 공직을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했기 때문이다.7)

황제 숭배가 공직자에게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모든 신민에게 강요되면서부터는 박해와 순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피하기 위해 카타콤이라는 지하묘지에 은거하면서 신앙 집회를 가졌지만 발각되는 경우에는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갔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은 배교하기는커녕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다. 당시 순교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서머나 지역의 주교였던 폴리캅(Polycarp, 69~125)은 순교의 길을 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86년 동안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섬겨왔소.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한 번도 잘못한 일이 없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 당신이 내가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라고 쓸데없이 생각한다면 …… 똑똑히 들으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8) 라틴 신학의 대표자였던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6~220)도 박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잔인함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을 수 없소. 우리가 베어버림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의 수는 그만큼 늘어나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기 때문이오.”9)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순교자가 많이 배출된 데에는 종말론적 분위기의 확산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하였으며, 세상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넘어 순교자의 대열에 설 수 있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가 국가권력에 의해 불법화되어 지하신앙으로 존재하고, 기독교인의 공직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박해로 순교자가 양산되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신학이 나오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 시기의 기독교는 정치권력에 대한 ‘냉소적 무관심’과 ‘수난의 항거’를 축으로 하는 ‘정치와의 거리두기’를 기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3. 제국의 교회: 정치권력에의 복속

로마제국에 의한 지속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교세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박해가 거듭될수록 교인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났으며 로마 전역으로 기독교가 확산되어 갔다. 특히 원형경기장에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히 맞이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당시의 정치권력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기독교의 이러한 ‘저력’을 간파한 로마의 정치세력 중 일부는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로마의 장군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가 된 직후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는 300여 년 만에 피해자의 종교에서 가해자의 종교로 탈바꿈하였고 성직자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군사적, 법적,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종교사의 자리에서 보면 기독교의 국교화는 기독교에 의한 로마의 정복이지만, 정치사의 자리에서 보면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의 활용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개인적 신심의 발로보다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다. 거대한 제국의 통합을 위해서는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이러한 요구에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신, 하나의 황제’라는 보편주의의 전략 속에서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기독교의 국교화 이후 교회가 정치권력에 복속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독교 제국이 된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신으로 추앙되지는 않았지만 세속적 종교적 영역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나는 황제이고 나는 사제이다(I am emperor and I am priest).”10)라고 말했다. 로마의 황제들은 교회회의를 주재하고 고위 성직자들을 임명하였으며 다양한 법령의 제정을 통해 교회재산을 관장하였다. 황제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궁중 교회사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하느님의 친구’이자 ‘하느님의 말씀의 해석자’로 칭송하는 등 국가교회를 정당화하였다.11)

물론 이 시기의 교회가 황제를 예찬하는 ‘어용신학(official theology)’만 생산한 것은 아니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양민 학살 사건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그의 공개적인 죄 고백을 받아 낸 이후에야 비로소 성찬을 허락하였다. 어떤 황제가 성당 하나를 아리우스파에게 양도하라고 명령했을 때도 그는 이를 교회 간섭으로 간주하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논리에 의하면 “궁전은 황제에게 속하고 교회는 사제에게 속한다. 따라서 교회와 신앙의 문제에서는 황제가 감독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교황 겔라시우스 1세(Gelasius I)도 황제의 교회 간섭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494년 비잔티움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Anastsius)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세상을 지배하는 두 권력이 있는데 하나는 사제의 신성한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주권적 권력이다. 공적 질서의 영역에서는 주교가 황제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성례의 집행과 관련해서는 황제가 주교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처럼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주교나 겔라시우스 같은 교황이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투했지만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에 복속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도 이러한 역학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기독교로 개종한 게르만족의 왕들은 과거와 같은 신적 지위는 상실했지만 자신들의 왕국에서는 교회의 통치자로서 군림했다.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나 앵글로 색슨의 왕 알프레드(Alfred the King, 849~899)와 같은 인물은 특히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는 교회가 황제의 세속적 권력에 도전할 만한 정치적 힘을 키우지 못했다. 여기에는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까지 기독교의 지배적 세계관은 타계지향적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에 따르면 이 지상에서의 삶은 과도기적인 것이며 기독교인은 지상의 나그네이자 순례자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궁극적 관심은 이 지상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도시 즉 내세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타계적 신앙의 분위기 때문에 당시 교회는 스스로를 정치적 법적 기구로 확립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 결과 정치권력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교황 혁명과 양검 이론

중세 후반기에 접어들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급진적인 변화가 초래된다. 11세기 중엽에 성직자들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화를 추진하였고, 12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드디어 가톨릭교회가 독자적인 정치적-법적 실체(political-legal entity)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황 혁명(papal revolution)’으로서 저 유명한 ‘서임권 논쟁(Investiture Controversy)’을 불러 일으켰다. 이 혁명을 주도한 교황 그레고리(Gregory) 7세는 <교황의 명령>(Dictates of the Pope, 1075)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황제와 왕은 교회에 대해 권위를 갖지 못한다. 로마의 주교만이 주교를 임명하고 감시시키고 파문하고 재임용할 권한을 지닌다. 교황만이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중재할 수 있다. 교황만이 수도원을 건축할 수 있고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교황의 법정이 기독교세계의 법정이다. 교황은 황제를 해임할 수 있으며 모든 군주는 그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한다.12)

요컨대 교황이 성직 임명권과 황제 해임권을 동시에 갖는다는 주장이다. 원래 성직 서임권은 교황과 교회에 속한 것이었으나 그 동안 세속 군주들의 권력이 강했기 때문에 군주나 황제가 관행의 차원에서 서임권을 행사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교회쇄신 운동을 통해 교황권의 강화에 성공한 그레고리 7세가 서임권을 되찾기 위해 이러한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 교황의 이러한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였다.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간파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머무는 카노사 성으로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그는 눈 덮인 성문 앞에서 3일 낮과 밤을 참회하면서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카노사의 굴욕’(1077년)으로 알려진 것으로서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이 시기 교황권의 강화를 위해 등장한 신학적 담론이 ‘양검 이론(two swords theory)’이다. 원래 양검 이론은 5세기에 겔라시우스가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사제의 권위를 해방시키기 위해 제창한 이론이었는데 이 시기에 와서 새롭게 변형되었다. 성 베르나르(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는 교황이 ‘영적 검’과 ‘세속적 검’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적 검은 사제의 권한을 의미하고 세속적 검은 왕의 권한을 의미한다. 그런데 교황이 대관식을 통해 황제에게 세속적 검을 위임한 것이기 때문에 제국의 지배권은 교황으로부터 유래한다는 논리였다.13) 비유하자면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지만 달은 해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1115~1180)은 양검 이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교황을 대리자로 지명하고 그에게 신적 힘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교황은 신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체를 분배하고 구원에 필요한 영적 법과 전례를 제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은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성스럽지 못한 세속적 검을 휘두를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세속적 통치자를 임명했고 교황은 그에게 세속적 검을 위임하였다. 이처럼 세속적 통치자는 교황으로부터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교황의 신민이다.

중세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 역시 이와 비슷한 논리를 보이고 있다. 아퀴나스는 초자연과 자연의 이분법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설정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가 국가 위에, 교황이 황제 위에 존재한다. 요컨대 국가와 황제는 교회와 교황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교권’이 ‘속권’을 압도했지만 구체적 현실 속에서는 양자가 서로 협조하였다. 교회가 불신자 응징을 위한 십자군을 요청했을 때 세속 당국은 군대를 파견하였고 교회가 이단 선고를 내린 자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사형을 집행하였다. 교황과 주교는 왕과 영주의 군대를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세속법과 질서를 대체로 존중하였다.

5. 두 왕국설과 국가교회

중세 후기, 근대 초기로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서는 다시 세속 군주의 힘이 증대하는 반면 교황권이 쇠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아비뇽의 유수’와 ‘대립 교황’이라는 용어에서 잘 나타나듯이 중세 말기는 교황들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유폐되거나 교황이 난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교황권의 급속한 추락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상들이며 이러한 교황권의 약화를 틈타 세속 군주들의 힘이 급격히 증대한 것이다.

급진적 왕실주의자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sa, 1275~1342)는 전례, 교의, 교회 조직 등의 문제에서도 평신도 군주가 우월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시기스문트(Sigismund, 1368~1437)는 일련의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황제가 교회정치와 교회법에 대한 권위를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16세기에 시작되는 종교개혁은 바티칸을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세계를 내부로부터 분열시킴으로써 교황의 위상을 더욱 추락시켰다. 종교개혁이 가톨릭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적 법적 관할권을 행사하는 가시적이고 위계적이고 실체적인 교회 개념의 붕괴였다.

루터는 교황권주의자들의 신학적 무기로 원용된 ‘양검 이론’을 ‘두 왕국설(two kingdoms theory)’로 대체하였다. 두 왕국설에 의하면 교회는 두 종류이다. 하나는 천상에 있는 비가시적 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지상에 있는 가시적 교회이다. 천상의 교회는 의인들로만 이루어진 참된 교회인 반면, 지상의 교회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타락한 교회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지상의 타락한 교회는 세속 군주의 통치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이다. 루터는 세속 군주에게 국가에 대한 법적 정치적 권력만이 아니라 지상의 교회에 대한 법적 정치적 권위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자신의 영토 안에서 교회를 보호하며 교리와 전례의 제정에 개입하고 사악한 가르침과 잘못된 성례를 규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관을 지닌 루터교는 정치적 법적 실체로서 교회를 이해하는 가톨릭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교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은 아우구스부르크화약(1555년)에 의해 해결되었는데 이 화약에 따라 각 군주는 자신의 영토에서 가톨릭이나 루터교를 국교로 삼을 수 있었다. 여기서 “군주의 종교가 백성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이 생겨났다. 이후 유럽 각지에서는 국가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교회(state church)’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성공회(Anglican Church)가 국가교회로 탄생했는데 ‘수장령(Acts of Supremacy, 1534)’을 통해 왕이 국가교회의 대표자로 되었다.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은 로마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그 자체의 예배의식, 교리, 성례를 확립하고 자국어로 <공동기도서>를 간행했다. 이러한 왕실의 종교정책에 대한 반항은 모두 반역행위로 간주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Huguenot)라 불린 칼뱅주의자들이 등장하여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절대군주의 권력을 동시에 비난했다. 이들은 ‘위그노 전쟁’의 산물인 ‘낭트칙령’(1598)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얻었지만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군주들은 로마 교황과 대립하는 ‘민족적 가톨릭교회’를 조직했다. 이것이 알프스 산맥 너머에 있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수호하려고 하는 가톨릭 세력(Ultramontanes)과 대결하는 고올주의(Gaullicanism)이다. 고올주의는 프랑스 군주의 치하에 존재하는 국가교회의 형태를 취하면서 교회재산, 교회법정, 성직 임명 등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철저하게 제거하였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Fontainebleau, 1685)칙령을 통해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모든 개신교 교회와 학교의 철거명령을 내리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고올주의에서 벗어난 모든 의식과 신학을 금지시켰다.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움직임들이 나타났는데 독일 지역에서 등장한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가 그 하나이다. 이 주의는 교회의 최종 권위는 교황이 아니라 주교들의 회의에 있다고 하면서 국가주의와 결합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조셉 2세가 전통적인 수도원들을 폐쇄하고 새로운 교회들을 세우는 과정에서 성직자들의 교육을 국가가 담당하는 국가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조셉주의(Josephism)이다.
이처럼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절대주의 시대는 세속 군주가 종교를 강력한 국가통합의 엔진으로 적극 활용하는 시대였다. “종교 통일 없이 국가 통일 없다”는 표현이 이 시기의 구호이며 이 시대의 국가종교를 특히 에라스티아니즘(Erastianism)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이 시기의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제국교회’와 매우 유사한 ‘국가교회’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6. 정교분리와 종교자유

17세기 전반 유럽 대륙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초토화되었는데 이러한 참화의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아우스부르크화약과 낭트칙령의 원리를 확증하면서 각 지역의 군주가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중 어느 하나를 국교로 설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교 이외의 집단들에게도 사적인 집회와 예배,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종교교육의 자유가 허용되었으며 그들은 더 이상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박탈당하지도 않았다. 교황청의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조약은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는 1806년까지 유럽의 근본적인 종교법으로 유지되었다.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을 통해 모든 개신교 교파에게 관용정책이 펼쳐졌다. 이 정책은 1660년 성공회의 재국교화 이후에도 그대로 지켜졌다. 1689년 권리장전과 관용령에서 의회는 모든 개신교 종파에 결사와 예배의 자유를 부여했다. 다음 10년 동안에는 개신교에 대한 나머지 시민적 정치적 자유에 대한 제한이 대부분 철폐되었다. 이처럼 영국은 성공회라는 국교제도를 유지했지만 사실상 모든 국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했다.

프랑스에서는 1801년 교황 비오 7세와 제1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협약(Concordat)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교황에게 성직자 임명 및 관리권이 부여되고 교구 획정과 교회 재산, 종교교육에 대한 교황의 권리도 인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교로 남아 있었으며 19세기 내내 국가의 총체적 감독하에 있었다. 성직자들은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았고 교육 프로그램과 교구도 정부의 재정에 계속 의존했다. 190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교분리령’이 선포되면서 국가교회가 폐지되고 국가에 의한 교회 통제 혹은 교회 지지가 완전히 철회되었다.

이처럼 유럽 각국에서 ‘종교의 관용’을 넘어 ‘종교의 자유’로 패러다임이 이행한 것에는 이신론(Deism)과 합리주의의 영향이 컸다. 종교적 관용은 지배종교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 타종교들의 활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인 반면, 종교의 자유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전제한다. 종교의 자유는 특히 개인의 자유에서부터 출발한다. 볼테르와 같은 철학자들이 개인의 자율성,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 자신의 의견과 의지를 표현할 개인의 권리를 강조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종교의 자유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라는 추상적 명제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제도적 차원에서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요청된다. 따라서 근대 국가들은 종교의 자유를 확립하기 위해 국교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는데 이것이 정교분리원칙으로 표현되었다. 정교분리원칙은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념들과 제도들이 가장 먼저 구현된 국가가 미국이다.

미국 헌법 수정1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의회는 국교 수립에 관한 법을 제정할 수 없고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이 조항은 학자들 사이에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통한 종교자유의 보장을 의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근대 국가들의 종교자유 문제를 논할 때 누락시키면 안 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소련은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 즉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미국의 경우와는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정교분리가 국가의 종교 간섭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반면, 소련의 경우는 러시아정교회로 대변되는 교회의 정치 개입을 봉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자리잡은 정교분리 원칙은 각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7. 나오며

지금까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축으로 기독교 2천년사를 스케치해왔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서 시작된 교회는 초기에 로마 제국의 황제숭배와 충돌하면서 박해와 순교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은 생존 자체가 문제되는 상황이었으므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체계적인 성찰을 할 여력이 없었다. 단지 황제숭배를 피하기 위해 공직을 포기하는 행위에서 잘 드러나듯이 국가권력과 거리두기 전략을 취하였다.

4세기에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이후의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다른 관계를 맺었다. ‘제국교회’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이 이 시기의 교회는 제국의 번영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었다. 요컨대 황제가 교황 위에 군림하는 시기였다. 11세기 중반에서 12세기 중반에 걸치는 약 1백년간의 시기는 교황이 황제 위에 군림하는 역사상 유일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교회는 거대한 정치적 법적 기관으로서 세속 권력들에 대해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전성시대는 한 세기도 안 되어 막을 내리고 다시 세속 군주들이 교회를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다양한 교파들은 세속 군주들의 소왕국 내부를 강력하게 통합하는 도구 역할을 하였다. 교회가 국가의 부속기관으로 전락하는 국가교회의 시대가 된 것이다. 종교전쟁의 종료 이후 종교적 관용이 사회적 가치로 자리잡았지만 종교자유가 제대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국가교회의 해체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관습적 차원에서 국교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현대국가는 종교자유의 보장을 위해 교회와 국가를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그러나 과연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아니오가 될 것이다.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는 이념적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구체적 현실 속에서는 양자의 완전한 분리가 불가능하다. 교회와 국가의 역할이 현실 속에서는 중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회가 예언자적 정신에 입각하여 인권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에 종사할 경우 국가권력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국가권력의 도덕적 정당성이 결여된 경우 충돌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는 70~80년대 한국 사회가 증명하고 있다. 이와 달리 교회가 자신의 ‘제도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종교권력화하는 경우에도 국가권력과 충돌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 당시 보수 교회가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면서 보여준 몸짓은 예언자 정신의 발로가 아니라 기득권 수호를 위한 처절한 몸짓이었을 뿐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국가’ 혹은 ‘국가교회’ 하에서 억압되어 왔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요청되었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양자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는 ‘정교분리’라고 하는 추상적 이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활동영역을 유지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건전한 감시의 시선과 비판적 충고를 하는 긴장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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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수(1)  
명법사
2009-05-08 11:46:21
과거가 중요한게 아니라 현실을 말해주세요
왜요 현실은 입장이 난처 합니까?
님은 권력에대한 욕망을 없앴습니까?
그것이 과거보다 중요 합니다
전체기사의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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