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규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불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하면서 선진사회와 고급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는 많은 고승들이 불법의 홍포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리고 나아가 목숨까지 내놓는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과 세상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례는 신라 청년 검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검군은 자기의 잘못이 없었음에도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버린 낭도(郎徒)였다.1) 이처럼 우리의 사회와 문화의 중심에는 국가나 민족,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불교 교리상 연기법에 맞지 않으나 불가피하게 목숨을 내놓거나 빼앗기는 것은 순교라고 할 수 있다. 본시 순교는 신앙이나 명분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며, 서구 기독교에서 고대부터 사용했던 martyrium(martydom, martyr)이다. 근대에 일본인이 순교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은 대개 ‘치명(致命: 見危致命)’ ‘순도(殉道)’를 사용했고 중국에 들어온 천주교가 위주치명(爲主致命)이라는 의미의 치명(致命)을 사용했으나 기독교가 우위권을 주장하기 위해 순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정착되었다.2)

불교계에도 진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한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의 실천자들이 적지 않았다.3) 이들이 바로 순교자들이라고 생각하며 본고에서는 우리의 불교사에 있어서 목숨까지 내던진 고승들의 흔적을 찾아 그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자 한다.

2. 고대 불교 수용기 고승―정방(正方)·멸구비(滅垢玭)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는 불교의 수용과정에서 마찰이나 알력을 보인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라는 이차돈(506~527)의 순교가 있고서야 불교에 대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이미 신라에는 불교가 상당히 유포되어 있었고 7명의 고구려 전도승이 신라에 불법을 전파하려다가 순교하기도 하였다.4)

古記를 살펴보니 梁大通元年 三月十一日 阿道가 一善郡에 들어오니 천지가 진동했다. 스님은 왼손에 금고리의 주장자를 짚고 오른 손에는 옥바루를 들었으며, 몸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입으로는 화전을 외우면서, 처음으로 信士 毛禮의 집에 왔다. 毛禮는 나가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지난날에 고구려의 승려 正方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군신들이 괴상히 여기고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의논하여 그를 죽여버렸고 滅垢玭가 그의 뒤를 따라 다시 왔을 때 먼저와 같이 죽여버렸는데 당신은 더구나 무엇을 구하러 여기에 왔습니까? ….”5) 

즉 527년(법흥왕 14) 아도(阿道)가 신라 일선군에 들어와 모례에게 포교하려 하였다. 한국 최초의 재가신자로 알려진 모례는 그 이전에 고구려의 승려 정방과 멸구비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아도에게 말해주면서 경계하였다.6) 아도 역시 고구려 승려로서 신라에 불법을 전파하다가 몇 번의 참해를 받았거나7) 자절하였다8)고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에는 불교가 수용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염촉은) …눈물을 뿌리며 북쪽을 향하였다. 有司가 곧 모자를 벗기고 그 손을 뒤로 묶은 다음 官衙의 뜰로 끌고 가서 큰 소리로 劍命을 고하였다. 斬首할 때 목 가운데에서 흰 우유가 한 마장이나 솟구치니, 이 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사람과 물건이 애통해 하고 동식물이 불안해하였다. 길에는 哭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서는 발길을 멈추었다. 눈물을 흘리며 葬禮를 치렀다.9)

위의 인용한 글에서 보듯이 이차돈(506~527)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로소 불교가 국가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10) 그리하여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가 창건되었고 이 터를 비롯하여 7곳이 과거불(過去佛) 시대부터 불국토의 인연이 있었다는 믿음이 생겼다. 법흥왕의 조카인 진흥왕(眞興王)은 스스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인 인도의 아쇼카왕이라 자부하는 등 불교국가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11)

 3. 고려말 삼화상(三和尙) 나옹혜근(懶翁惠勤)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은 태고보우(太古普愚)·백운경한(白雲景閑)과 더불어 여말(麗末) 삼화상(三和尙)으로 숭앙받고 있고, 그의 사제(師弟) 지공선현(指空禪賢)과 무학자초(無學自超)와 더불어 여말선초 3화상이라 불린다. 때문에 그를 포함한 3화상은 사찰의식에서 가장 영험한 증명법사(證明法師)로 존숭되고 있다.

혜근은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법을 인가받았으나 인도승 지공선현(指空禪賢)에게 법을 다시 인가받고 그의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었다. 혜근은 지공이 전해 준 삼산양수(三山兩水)라는 수기(授記)를 가지고 와서 그의 제자 무학자초(無學自超)와 함께 불교를 흥성시키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혜근은 마침 1370년(공민왕 19) 지공의 영골(靈骨)사리가 개경에 오는 것을 계기로 하여 왕사로 책봉되었고, 천태종의 신조(神照), 화엄종의 천희(千熙), 조계종의 환암혼수(幻庵混修) 등 교계의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여 불교계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는 지공선현의 유훈을 받들어 회암사(檜巖寺)를 중창하고12) 그 곳을 중심으로 흥법하고자 하였다.

… 공사를 마치고 병진년(1376) 4월에 낙성식을 크게 열었다. 임금은 具官 柳之璘을 보내 行香使로 삼았으며 서울에서 지방에서 사부대중이 구름과 바퀴살처럼 부지기수로 모여들었다. 마침 臺評이 생각하기를 檜巖寺는 서울과 아주 가까우므로 사부대중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아 생업에 폐해를 주지 않을까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명으로 스님을 塋源寺로 옮기라고 하고 출발을 재촉하였다.

스님은 마침 병이 있어 가마를 타고 절 문을 나왔는데 남쪽에 있는 못가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가마꾼을 시켜 다시 涅槃門으로 나왔다. 대중은 모두 의심하여 목 놓아 울부짖었다. 스님은 대중을 돌아보고 “부디 힘쓰고 힘쓰십시오. 나 때문에 중단하지 마시오. 내걸음은 驪興에서 그칠 것이다.”13) 
 
회암사 1차 낙성시 사부대중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이를 우려한 정부는 그를 밀양 영원사로 가도록 명을 내렸다.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주살되었던 것이다.14)

高麗 말엽에 紀綱이 흐트러졌어도 오히려 懶翁을 귀양보냈다가 誅戮하여 여러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던 것을 쾌하게 하였는데, 더구나 堂堂한 聖朝에서 한 사람의 요망한 중을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聖化의 ??이 되게 하시겠습니까?15)

나옹혜근은 당시 동방도량인 송광사 주지로 임명받고 그 사세를 몰아 지공이 지정한 흥법의 땅인 회암사를 중창하고자 하였다. 그의 사리는 국내외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입적처 신륵사는 부처가 입적한 ‘사르나트’라고 하였으며, 흥법(興法)의 땅인 회암사는 ‘쿠시나가라’라고 하였다. 더욱이 무학자초의 제자인 심지허융(心地虛融) 진산(珍山, ? ~1427)과 함허기화(涵虛己和, 1376~1433) 등 문도들에게 그의 숭고한 뜻이 계승되면서 조선초 불교계를 주도하였다.16)

4. 마지막 천태종 고승 행호(行乎)

행호(行乎)는 해동(海東)의 공자(孔子)라고 자부했던 문헌공도(文憲公) 최충(崔?)의 후손으로,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천태종 신조(神照)나 조구(祖丘)의 문도였다고 추정된다.

그는 억불군주인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태종의 원찰인 원주 각림사(覺林寺)나 고양 대자암(大慈庵, 태종의 4자인 誠寧大君의 陵寢寺刹)의 주지로 머물렀고 세종대 판천태종사(判天台宗師)를 제수받았다. 그는 세종 12년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고려후기 천태종의 백련결사(白蓮結社)의 도량이었던 백련사(白蓮寺)를 중창하는 등 천태종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그가 선종의 도회소(都會所)인 흥천사(興天寺) 주지에 오른 것에 대해 유생들의 비난은 매우 거셌다. 

成均生員 李永山 등 6백 48명이 상소하였다. … 신들은 듣건대, 前朝의 말기에 승려 懶翁의 虛無寂滅의 가르침으로서 어리석은 무리들을 유혹하였습니다. 당시에 이를 추대하여 生佛이라고 지목하여서 千乘의 존귀한 몸을 굽혀서 천한 匹夫에게 절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  이제 승려 行乎가 興天社에 머물면서 옛날의 전철을 생각하여 보지 않고 스스로 나옹의 짝(懶翁之?)라고 이르며 세상을 유혹하고 백성을 속여서 풍속을 바꾸려고 하는데, 백성들은 우러러 사모하기를 나옹과 다름없이 합니다.

비록 종친과 貴戚이라 할지라도 명예와 지위의 중요함을 생각하지 않고 몸소 절에 나아가서 공손히 제자의 예를 행합니다.… 이제 營繕하는 승도들을 보게 되면 새로 받은 度牒이 한 해 동안 거의 수만 명에 이르렀으니 인류가 멸망할 조짐입니다. 이는 이들 승려로부터 일어난 것이 반드시 아니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前朝의 쇠퇴한 말기에도 懶翁을 목베어 죽여서 요약한 무리를 씻어 없앴거늘 하물며 聖世에서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기에 의심하지 마시고 약한 것을 없애고 근본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有司에 영을 내려 승려 행호의 머리를 끊어서 요사하고 망령된 근본을 영구히 없애면 국가에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17)

위의 인용한 글에서 보듯이 행호는 천태종계 고승이었지만 선종계의 나옹혜근과 비견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세종 20년부터 1년여 동안 선종의 총본산인 흥천사의 주지를 하면서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불법을 펴다가 유생들의 탄핵에 의하여 세종 28년(1446) 무렵 제주도 유배에 처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은 성종 대 죽임을 당하는  고승들이나, 특히 명종대 나암보우(懶庵普雨)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18) 
   
5. 조선 성종대 억불기 고승들―절암해초(絶菴海超), 일암학전(一菴學專), 각돈(覺頓), 설준(雪峻)

조선초 유교시책의 강화와 더불어 시작된 유생들의 불교 탄압시책에 승려들은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종 7년, 왕의 친정체제가 시작되면서 사림파들이 성리학의 예제(禮制)를 본격적으로 시행함으로써 불교계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따라 참형된 승려들이 속출되었다. 이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즉 성종 5년 설산(雪山)·월심(月心)·계엄(戒嚴)·성명(性明) 등이 왜승 신옥(信玉)·사노 기금동·정병 이계산 등과 더불어 불법을 홍포하다가 참형당하였고19) 성종 6년 고부(古阜)의 승려 성명(省明)·상금(尙岑)·설의(雪義)가 승사(僧舍)를 빼앗았다고 참불대시(斬不待時)에 처해졌다.20) 그리고 성종 8년 성주(星州)의 승려 옥봉설은(玉峯雪誾)은 주인의 학대를 못이겨 도망갔다가 위서(僞書)를 만들었다고 능지처사(陵遲處死)되었고21) 성종 15년 화장사 주지 지성과 상명·의철·학선·죽변 등의 승려들이 태조와 태종의 도서(圖書)를 위조하였다고 하여 참형이나 장형에 처해졌다.22)

이처럼 승려들에 대한 탄압을 계속 강화되고 있었는데, 세조에 의해 삼화상이라 불리면서 숭앙되었던 신미(信眉)와 두 제자 학열(學悅)과 학조(學祖) 마저 성종 대에 이르러 유생들의 탄압을 받았다.23) 이 삼화상에 버금가는 해초(海超)·각돈(覺頓)·학전(學專)·설준(雪峻)과 같은 고승들도 순교를 당하였는데 이들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절암해초는 당호는 송월헌(松月軒), 호는 절암(絶菴)이었으며, 정인사 주지 판교종사 설준·기화의 제자이며, 교종판사를 거쳐 판교종도대사(判敎宗都大師)에 오른 고승이었다. 그는 왕실의 능침사찰인 개경사(開慶寺) 주지 설우(雪牛)와 각림사의 주지 중호(中晧)와 함께 탄핵의 대상에 올랐었다. 그런데 성종 7년 이전 신행(信行) 등과 역참(驛站) 소속의 역승(驛丞) 신분으로 전락하였다가 성종 8년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였다.24)
한편 그 무렵 진관사(津寬寺) 간사승(幹事僧)이었던 각돈(覺頓)도 탄압을 받아 시해되었다. 각돈은 과천 청계사(淸溪寺)와 진관사 주지로서 진관사 수륙사를 중창하였다.25)

그는 선사 신호(信浩)와 더불어 화엄경판 1470판을 완성하여 광주(廣州)의 청룡산(靑龍山) 청계선사(淸鷄禪寺)에 집을 짓고 수장하는 등26) 왕실의 존경을 받았지만 유생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27) 유생들은 그가 재산을 축재하고 사통하였다고 하여 하옥시키고자 하였다.28) 결국 그는 사통하였다는 죄명으로 성종 8년 12월 사형을 당하였다.29)

태조의 능침사찰인 개경사 주지였던 일암학전(一菴學專)도 탄압을 받았다. 학능(學能)은 흥덕사(興德寺)를 중창하고자 귀근(貴近)한 자들을 모집하고, 학전도 흥천사를 중창하고자 하였다. 당시 성균관 생원 김경충을 비롯한 유생 460명은 학전을 비롯하여 당시 고승들을 요승으로 몰아 부치면서 저자거리에거 공개적으로 죽이라고 하였다.30)

설준(雪峻)은 기화(己和)의 제자이자 세조의 삼화상 신미(信眉)의 도반이었고 설잠 김시습의 스승이기도 하였는데,31) 그도 역시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정인사(세조의 아들 의경세자 장璋의 능인 경릉敬陵의 능침사찰) 주지와, 판화엄대선사로서 교종의 도회소인 흥덕사 주지가 되어 교종을 통솔하자 신미와 두 제자 학열과 학조, 그리고 해초와 더불어 탄핵의 표적이 되었다.

당시 유생들은 설준이 승려로서는 자질이 없다고 매도하면서, 특히 정업원 주지인 해민(海敏)을 추천하였다는 것을 문제삼았다.32) 그들은 설준을 율(律)에 의거하여 과죄(科罪)한 뒤에 충군(充軍)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미 장 80대에 처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이제는 설준의 머리를 잘라서 모든 저잣거리에다 매달 것을 요구하였다.33) 결국 설준은 1479년(성종 10) 변방인 회령지방에 충군되었다가 1489년(성종 20) 회령의 갑사(甲士)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34)

6. 조선중기 불교부흥 고승 나암보우(懶庵普雨) 

보우(普雨, 1506?~1565)는 법호가 나암(懶庵), 당호는 허응당(虛應堂)이라 했다. 그는 금강산에서 수륙재를 설행할 당시 승려나 신도로부터 ‘살아 있는 부처님’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 하지만 당시의 사림파 유생들은 그를 고려말 신돈보다 더 심한 요승이나 괴승으로 몰아붙였다.

그는 명종 3년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연산군 이전의 선교양종과 승과를 부활시키고 판종사도대선사 봉은사 주지를 맡아서 불교를 중흥하고자 하였다. 당시 매일같이 빗발치는 유생들의 그의 선교양종 부활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약 지금 내가 없다면 영원히 불법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하며 불퇴전의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국의 300여 사찰을 국가 공인사찰로 지정하여 보호하였고 2년간 승려 4000여 명을 선발하는 등 불교중흥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1559년(명종 14) 봉은사 주지를 다시 맡고 중종의 능인 정릉을 옮기는 데 참여하면서 봉은사를 불교계의 중흥의 메카로 삼으려 하였다.35) 또한 사월 초파일 회암사에서 무차대회를 개최하였는데 8도의 승려와 백성들이 분주히 몰려들었다고 한다.36)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유생들의 상소는 더욱 빗발쳤고 보우는 그해 6월 25일 제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는 유배길에 이전에 주석하였던 한계산에 들렸다가 제주도로 향하였는데37) 수령들이 연도에 나와 서로 뒤질세라 공경히 접대하였고 정2품에 나이 80인 이순형 같은 유생은 그를 극진히 대우하기도 하였다.38) 그는 다음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장살로 순교당하였다.

보우는 일이 어그러진 뒤에 몸을 한계사 바위굴 속에 숨겼다가 수색을 당해 붙들려 제주로 유배되었다. 제주목사는 보우에게 객사를 청소시키고 날마다 힘이 센 무사 40명에게 각각 한 대씩 늘 때리도록 하니 보우는 마침내 주먹으로 맞아 죽었다.39)

본래 의금부에서 보우에게 내린 최종형벌은 장형과 전가사변(全家徙邊)이었지만40) 유생들의 집요한 참소가 이어졌다. 그는 나옹혜근이나 행호처럼 참수된 것이 아니라 장살로 죽임을 당하였다.41) 제주도 목사 변협(邊協)은 보우에게 객사의 청소 등 궂은 일을 시키면서 매일 장사로 하여금 구타를 자행하여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42)

그는 중세 이후 최초의 순교자라고 할 나옹혜근이 송광사의 사세를 몰아 회암사를 흥법의 메카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처럼 명종 7년 회암사 주지를 겸임하면서43) 그 사세를 몰아 봉은사를 불교 중흥의 메카로 만들고자 하였다.

1566년(명종 21) 4월 20일 양종(兩宗)과 승과(僧科)가 폐지되면서 불교계는 다시 무종단의 산중 불교가 되어 버렸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나 값진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불교계와 한국사상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상적 기반위에서 추진된 나암보우와 문정왕후의 흥불운동은 비록 16년간에 불과하지만 청허휴정과 사명유정과 같은 고승을 배출함으로써 향후 불교의 명맥을 잇게 하였다.44)

7. 조선후기 화엄종장 환성지안(喚惺志安)

조선후기 대표적인 화엄종장인 선승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도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이름은 지안(志安), 자는 삼낙(三諾), 호는 환성(喚惺)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상봉(霜峰: 雙峰淨源)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월담성제(月潭雪霽, 1632~1704)의 법을 계승한 휴정의 5대 적손이다.

그는 27세 되던 1690년(숙종 16) 화엄종의 모운진언(慕雲震言, 1622~1703)이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강석을 물려받았을 만큼 도가 높았다.45)

乙巳年(1725) 金溝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때 모인 대중이 무려 천 사백 명이나 되었다. 스님이 당에 올라 拂子를 세우고 대중들을 위해 법을 설하자 대중 모두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환희심을 얻게 되었다.

己酉年(1729) 마침내 이 화엄대법회의 일로 인한 모함이 들어가서 지리산에 거하던 중에 체포가 되어 호남의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나게 되었으나 도의 관리들이 고집을 부려 마침내 제주도로 유배를 가기에 이르렀다.46)

지안은 1725년 금산사에서 1,4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대법회를 크게 개최하였는데,47) 이와 관련한 모함으로 인하여 1729년 제주도로 유배당했다가 그곳에서 세수 66세, 법랍 51세를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가 모함을 받은 것은 전근대 양반이 주도하여 일으킨 초유의 난이라고 평가를 받는 이인좌(?~1728)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즉위로 몰락한 소론파와 정희량(鄭希亮) 일파가 규합하여 이인좌와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1728년(영조 4) 난을 일으켰다. 그는 삼남대원수(三南大元首)라고 자칭하며 금산사, 남원 지리산의 연곡사(燕谷寺)와 쌍계사(雙溪寺) 등지에 모여 난을 일으켰고 청주를 함락시키는 등 승세를 잡기도 하였으나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였다.48)

지안이 지리산 일대에서 하옥되어 제주에 유배된 것은 경성일선(慶聖一禪, 1488~1568)이 무고로 하옥된 것과49) 청허휴정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던 것처럼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것이었다. 마치 행호, 나암보우가 흥법을 일으키다가 옥사를 당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 때문인지 행호, 나암보우, 환성지안 이 세 고승은 제주에 유배되어 순교를 당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현재까지 제주도 사람들에게 나암보우를 포함한 세 인물이 삼성(三聖)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는, 제주도의 삼성은 조선시대 삼대 순교승 조선초 행호(行乎)와 조선중기 나암보우(懶庵普雨) 그리고 조선후기 환성지안(喚醒志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50)  

8.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계에는 산중에서 묵묵히 수행한 고승들도 있었지만 불교계를 탄압하려는 세력에 맞서 적극적으로 불교계를 보호하려고 애쓴 고승들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 승려들은 신라에 불법을 전파하고자 100여년 간 노력하였는데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 정방(正方), 멸구비(滅垢玭), 아도(阿道) 그리고 이차돈과 법흥왕의 사신(捨身)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초인 성종 대 고려 10사찰 가운데 하나인 왕륜사(王輪寺)의 고승 거빈(巨賓)은 금강산에서 분신하여 불사를 성대하게 마치게 하였다.51) 이처럼 그의 성스런 죽음으로 말미암아 고려가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려말 나옹혜근(懶翁惠勤)은 부처님의 큰 아버지의 108대 후손인 지공선현(指空禪賢)의 계승자였으며, 당대 생불이라 불리웠다. 그의 상수제자인 무학자초(無學自超)와 더불어 회암사를 날란다사처럼 불교 중흥의 메카로 만들려다가 유생들에 의하여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다.52)

억불운동이 본격화되는 세종 때 천태종 고승 행호(行乎)도 역시 나옹(懶翁)의 무리라고 존경을 받으면서도 유생들에 의해 제주도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조선조 유교시책이 본격화되어 억불시책을 강화하였던 성종대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승려들이 탄압과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절암해초(絶菴海超), 일암학전(一菴學專), 각돈(覺頓), 설준(雪峻) 등의 고승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명종 때 불교중흥을 이루었다가 역시 제주도에 유배된 허응당(虛應堂) 나암보우(懶庵普雨)도 고초를 받다가 장살되었고, 조선후기 환성지안(煥惺志安)도 제주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여말선초 3화상 가운데 나옹혜근(懶翁惠勤)은 억불기 그의 문손들이 조선초 불교계를 주도하게 하였다. 조선중기 나암보우는 불교를 중흥하였고 승과에서 청허휴정과 그의 제자 사명유정을 선발하여 그들의 문도들이 조선후기 불교계를 건재하게 하였고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순교고승이라 할 만하다. 억불시책이 전개되었던 조선초의 행호(行乎), 조선중기 나암보우(懶庵普雨), 조선후기 환성지안(煥惺志安)은 제주에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조 순교 3화상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1700년 불교의 역사 속에 수많은 고승들이 탄압을 받았고 심지어는 목숨조차 내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와 문화 속에 불교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

 

황인규 / 동국대 역사교육과 및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현재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저서로 《고려말·조선전기 불교계와 고승 연구》 《고려후기·조선초 불교사 연구 》《무학대사연구-여말선초 불교계의 혁신과 대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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