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숙 주부

사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자꾸 꾀를 내고 요령을 피우고 싶다. 조금 덜 움직여도 큰 표가 나지 않는 법을 알아가고 남들 눈치 못 채게 게으름 피우는 방법도 터득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어떻게 속이겠는가? 꼿꼿하게 중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곧추세우던 분들의 모습이 새삼 그립다.

대학시절 은사님인 김 교수님은 까다롭다 못해 무서운 분이셨다. 가르칠 때나 글을 쓰실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용모도 늘 단정하고 반듯한 데다 걸음걸이까지 곧고 똑발라서 그 앞에서는 늘 눈이 내려지고 목이 움츠러들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내주는 과제 중에는 좀 별다른 것이 있었다.

무엇을 읽고 정리하고 써오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 가서 도서목록 카드를 베껴 오는 것이었다. 지금은 도서관의 모든 자료가 전산화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도서관까지 가지 않아도 내가 필요한 자료를 검색해볼 수 있지만 당시는 도서관의 모든 정보가 카드에 수기(手記)로 정리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어떤 주제를 정한 뒤 도서관에 가서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고 그 내용을 링 카드에 일일이 베껴 써오는 것이 과제였던 것이다.

처음 그 과제를 들었을 때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초등학생, 중학생도 아니고, 카드를 얼만큼이나 베껴 써 왔는지가 대학생들의 과제라니 우습다 못해 타과생들한테는 얘기하기도 부끄러운 과제라고 여겨졌다. 카드 박스를 몇 개씩 들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아는 처지끼리 모여 이 어처구니 없는 과제에 대해 성토하던 우리는 이런 일을 4학년 선배, 심지어 석사 과정 선배들까지 하고 있음을 알고는 조용히 카드 정리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논문을 써야 할 때가 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과 친구가 논문 주제를 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시간을 보내는 사이, 우리과 친구들은 도서관 자리마다 목록카드를 내놓고 앉아 착착 자료 수집과 정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김 교수님의 그 말도 안 되는 과제의 위력을 느끼게 되었다. 초등학생용 과제라고 툴툴대던 목록 카드 베껴쓰기는 결국 자료를 어떻게 찾기 시작하고 정리해야 하는지를 터득하게 해주는 비책이었던 것이다. 공부에는 요령과 왕도가 없다던 말씀, 무식하고 무모하게 시작한 사람은 결국 두려움이 없어져 어떤 것에도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다던 말씀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후 꼬장꼬장하고 까다롭다고만 생각했던 교수님의 생각과 생활을 닮아보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공연 및 무대예술의 대가인 신선희 선생님의 작품집을 만든 적이 있다. 목소리, 말투, 몸가짐이 꼿꼿하던 선생님은 환갑을 넘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한 분이었다. 책의 디자인이나 편집상태가 어딘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치지 않고 고치고 다시 생각하고 또 다르게 해 보는 분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분임이 분명하건만, 하루를 28시간쯤으로 만들어 사는지, 편집자가 책을 위해 어떤 요구를 해도 결국 그것을 해오는 분이었다. 원고의 보충, 보완은 물론이려니와 10년이 지난 무대작품의 러프 스케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에 밤을 새서 그 그림을 다시 그려오신 분이었다.

편집을 책임진 나와, 우리 디자이너는 처음에는 까다로운 필자를 만나서 생고생을 한다고 투덜거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는 어느덧 선생님의 태도와 스타일에 동화되어 함께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전문 영역이 아닌 책의 편집과 디자인에서도 이렇게 장인 기질을 발휘하는 분이니, 본연인 무대 작업에서는 얼마나 까다롭게 구실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제자들에게 선생님이 작업에서 얼마나 철저하실지, 그러므로 주변 스태프들이나 제자들에게 얼마나 까탈스럽게 구실지 넌지시 물었다.

답은 당연히 “말도 마세요……”였다. 그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다 들려주자면 날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라는 투였다. 하지만 그 말끝이 돌아온 자리는 결국 “그래도 저희는 선생님을 닮고 싶어해요. 흉보면서 닮는다던데, 우리는 흉만 봤지 닮지는 못했나 봐요. 선생님 따라가려면 어림도 없거든요……”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그것이었다. 늘 따져보고 다시 생각해보고 더 나은 무엇이 없을지를 고민하다가, 꿈에서까지 해결책을 찾으려 고심했던 초심자의 마음을 잠시 돌려주셨던 선생님의 철저함과 열정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인터뷰 차, 범패(梵唄)와 작법(作法)의 명인인 한동희 스님을 뵌 적이 있다. 불교 음악인 범패와 불교 무용인 작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터라 여러 가지를 느끼고 배웠지만 무엇보다도 동희 스님이라는 분을 알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분의 세계를 설핏 엿보았던 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범패와 작법에 대한 훌륭한 설명, 공연장에서 보여주셨던 춤사위와 소리,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가 보여주는 겸손함 같은 것들보다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아직도 가사나 장삼을 손수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해서 입으신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 대해 스스로는 괴각스러운 것이 아닌가 한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것은 괴각이 아니라 한결같음이자 중심이었다. 세탁기와 스팀 전기 다리미, 나아가 세탁소까지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풀 먹인 옷감을 이리 저리 손질해서 올들이 각각 제자리를 찾게 한 뒤 두드려 모양새를 고정시켜야 자연스럽기도 하고 옷도 상하지 않는다는 말씀에 턱 하니 숨이 막혔다. 매번의 공연마다 쓰이는 장식물이나 의상들은 사소하지만 차이를 두어 모두 새로 만들고 장만하신다니 다듬이질에 비하면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스님 문하의 제자들 역시 스님의 철저함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며 닮고자 애쓰고 있었다.
후학(後學)들의 본이 되고 있는 스승들의 모습에는 늘 스스로에게 철저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때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난스러워 보이고 심지어 괴팍하지 않느냐는 소리까지 듣게 하지만 그것은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요령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대충 하고 싶고 자꾸 게을러지고 싶을 때면 자신에게 철저했던 그분들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들이 닮고 싶어하는 사람까지는 못 되더라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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