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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珍景) / 심재관
―고기먹기와 마누라 꿰차기
[22호] 2005년 03월 10일 (목) 심재관 phaidrus@empal.com

1. 근대성을 재고(再考)하며

한국불교의 근대화는 언제부터였을까. 또는 한국불교 근대화의 지표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는 근대성이라 규정할 수 있는 서구(유럽)의 생활양식(또는 그것을 등장시킨 철학적 관념들까지)의 항목 전체를 한국불교에 대비시키고, 인위적으로 여러 항목들을 뽑아내려 할지 모른다. 가령 이성적 주체, 단일화된 시공간, 과학적 세계관, 정교분리, 개인의 자유, 자본주의, 계량적 산업화, 그리고 그것들을 연계된 온갖 제도적 장치 속의 징후를 근대라 불리는 어느 시기(개항이나 승려의 도성출입자유)부터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 근대성은, 대체로 성스러운 종교영역에서 분리되어 나온 ‘세속화된 서구사회’의 가치와 현상들의 총체이며, 그 현상들은 그것이 탄생한 역사로 인해, 그 서구 사회 내에서만 적합한 일관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서구 근대성의 징후들을 서구 근대성이 갖는 계몽주의 프로젝트(보편적 인간성과 기독교의 확장)에 의해 전파되고, 이 과정을 통해 동양과 아프리카의 식민지인들은 열등한 인종과 야만의 문명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식민지인들에 의해 다시 내면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타인’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비유럽세계의 식민지 경험과 근대성의 경험은 함께 노정된 것이며, 서구(일본 포함)의 것과 나의 것을 구분하게 되는 ‘차이’의 인식이 뒤따른다. 만일 우리가 한국불교의 근대성을 찾는다면, 우리 자신과 타자를 갈라놓는 이 차이의 인식이 발생하는 지표에서 추적하면 될 듯하다.

그런데 비서구 세계인 한국에서, 그것도 ‘속세’의 한국사회가 아닌 한국불교 내에서 근대성의 징후를 찾는 것은 분명히 조선에서 세속의 좌표와 불교의 좌표는 달리 놓여 있었으므로, 두 개의 돌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당연히 불교의 근대 경험은 세속과 달리 진행되었으며, 지금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한국불교 근대성의 여러 징후들 역시 동시에 진행되지 않으며, 시기도 서로 달리한다. 가령 교리와 의례 같은 장기 지속적 요소들은, 그럴 기회도 변변히 없었을 뿐더러(물론 그것에 대한 논의들이나 의식/주장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논의 자체가 근대적 경험을 말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교단의 행정제도나 교육제도보다 더 오래 간다. 이와 같이 불교의 근대 경험은 불연속적인 여러 변동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쉽사리 한 특정 시기를 가지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징후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서구 근대화의 지표를 그대로 불교에 포개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무의미하기도 하다.

한국불교라는 영역을 놓고 생각할 때, 단지 일방적으로 구획된 특정 시간의 지표로서 근대라는 말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근대’ 또는 ‘근대성’이라는 생활양식, 또는 가치체계의 항목들을 열거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우리가 단지 한국불교의 과거처럼, 주변의 인문학적 논의에 휩싸여 ‘기생적인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특히 어문학계, 사회학계, 역사학계 등에서 경쟁적으로 꽃피우는 근대성 논의(그래서 마침내 학자들이 20세기 초의 신문사설들을 놓고 브리꼴라주를 만드는 지경에 이른)에 어떤 심리적인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정말 우리의 문제인식이 이러한 사정을 갖는 것이라면, 우리는 단지 특정 시간의 구획으로만 사용했던 ‘근대’라는 어정쩡한 단어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한국불교의 근대 체험을 다시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찾는 것은 가까운 시대에 일어났던 불교적 사건들로서의 근대가 아니라, ① 과거 전통과 확연히 분리되어 새로이 ‘경험’(주장이 아니라)되는 불교이면서, ② 타자(서구/일본)로부터 분리해 우리를 주체화시켰던 불교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정직하게 말할 때, 정말 그런 것이 근대 한국불교 내에 존재했던가, 존재했더라면 그것이 ‘지금 현재의 우리’와 연결될 정도로 지속적인 변화였던가. 앞서 말한 바대로 불교 내의 어떤 근대적 특성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므로, 이 포괄적인 질문에 대해 나는 다소 회의적이지만, 최소한 몇몇 주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대처식육과 승가교육의 변동은 한국불교의 ‘지금’과 가장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과거 전통’과의 분절을 떠올리게 하는 확실한 근대성의 지표가 된다. 그 실천이 현재까지도 성공적으로 지속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전자는 불교의 전통적인 종풍에 대한 이반(離反)이며, 현대 5, 60년대의 교단 정화운동을 통해 지금의 불교 모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후자는 인문학 도입을 통한 불교 스스로에 대한 자기이해 과정의 변모이자, 지금도 역시 모색과정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의 사회적 실천은 불교사상이나 의례 등에서 쉽게 찾아지지 않는 근대적 변모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특히 대처식육의 문제는 전통과 근대의 갈등, 조선불교라는 주체와 일본불교이라는 타자를 형성해 냈다(그리고 만들고 있다).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하고픈 이 주제는 일제나 교단정화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돌이키는 현대 연구자들의 푸닥거리가 과거의 ‘자기’와 ‘타자’를 끊임없이 다시 불러일으킴으로써 여전히 현재의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을 ‘만들어’나가는 근대의 한 징표다. 이 글은 그 푸닥거리에 대한 간단한 반성이다.

2. 대처식육: 우연한 공명이 금지곡이 된 사연

근대 한국불교에서 대처식육의 주장은 아마도 우리 자신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우연히 때를 같이 한 일본불교의 목소리와 공명을 같이했다. 울림이 커지자 잘 구분이 되지 않았고, 국내에서 비교적 소수였던 그 목소리는 타인의 목소리로 인식되었다. 곧 타인이 불렀던 노래는 양측의 여흥과 관계없이 금지곡이 되었다.

한일합방 전후에 고영표, 한용운(1910년 전), 이혼성, 홍진혁 등(1920년대)이 대처식육을 공식적으로 옹호했다. 고기를 먹고 결혼할 수 있는 자유를 승려에게도 허(許)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이 동일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표면적인 사연은 독신생활로 인한 인구의 감소(고영표, 한용운), 유교적 가정윤리의 파괴(후손이 없는 것; 한용운, 홍진혁), 불교의 대중화(포교의 어려움; 한용운, 홍진혁, 이혼성), 인간적 욕망의 억압(사찰의 풍기문란; 한용운), 종교윤리의 자유(한용운, 이혼성) 등이다. 이러한 대처식육의 근거들이 다소 구차한 변명처럼 보이지만, 눈에 띄는 것은 불교의 대중화다. 이는 조선조 동안 굴욕적인 처지에 놓였던 불교와 승려의 위상을 개선하기 위한 강한 열망 때문이었다. 조선불교계의 사정은 메이지(明治) 초기 굴욕적이었던 일본불교의 위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들도 대중화의 열망으로 세속화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당시 대처식육의 주장들 속에 나타나는, 세속으로의 지향, 인간적 욕망과 자유의 확대, 종교윤리의 개인적 자유 등의 상투화된 서구 근대성의 유사문구만으로 우리가 이 문제 속에서 소위 불교의 근대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장과 실천이 전통적 불교의 가치와 충돌하면서, 전통적인 ‘우리’를 형성하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이다.

백용성을 비롯하여 1926년 전후로 대처식육론을 비판하는 수많은 목소리와, 그 소리를 현대에 다시 받아 유사한 울림으로 만드는 불교연구자들 역시, 전통적인 ‘우리’를 만드는 주역들이다. 전통적인 ‘우리’ 모습의 확인은 그 맞은편에 서 있는 근대적 ‘일본(서구)’의 타자를 설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전통적인 청정비구의 모습은 ‘우리’이며, 대처식육의 파계(破戒)는 근대적 ‘일본(서구)’의 모습으로 이분화된다. 그러한 구분이 고착되자, 대처식육을 주장했던 국내의 일부 목소리는 일본의 주장으로 바뀌었고, 그 목소리를 달리 해석할 수 있었던 가능성도 깡그리 배제되었다.

대처식육 옹호론 가운데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건 당연히 한용운이다. 한용운은 근대 불교사상가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불교혁신안을 내놓았던 사람이었고, 항일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때문에 그의 주장을 단순히 일본의 근대적 풍속을 따르고자 했던 식민지적 노예 근성의 발로였다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또는 조선불교의 전통적 풍속을 해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에 비판적이지 못했다는 해석 역시 석연치 않다.

이제까지 이 식육대처 문제에 대한 연구들의 결론은 대체로 일본불교를 내세운 일본제국주의의 종교책략의 하나라는 관점으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그 논의의 끝에, 만해가 일본의 종교정책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로서, 만해의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한 비판의식의 한계를 들곤 한다.

이러한 단순한 결론들로 치닫게 되는 이유는, 연구자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처식육을 일본불교의 기호로 전제하고, 만해가 그 왜색의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구자들은 이러한 심플한 결론에 스스로도 불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잘 알다시피 만해는 이회광(李晦光)의 원종(圓宗)에 반대하여 임제종운동을 주도할 정도로 원종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강력히 일본불교의 침투에 대항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해가 대처식육을 주장하다니. 그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대처식육을 주장하는 논의의 발원지가 한국불교의 재산을 탈취, 혹은 예속하고자 했던 일본불교의 토대에서 기인했다는 인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 같은 정황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대처식육의 문제가 거론되었던 한일 양국의 불교계 사정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등식관계에 다소 의문점을 갖게 만든다.

일본의 경우를 보자. 일본불교에서 대처식육은 한국과 유사한 시기에 만들어진 풍습이었는데, 이는 메이지 초부터 지속되던 불교 탄압 속에서1) 불교계가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불교계는 메이지 정부에 인적관리의 효율성과 민심의 획득이라는 명분을 제공하고, 승려신분의 존속과 불교배척의 방지라는 실리를 얻은 것이다. 당시 상황을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2)

일본불교의 대처식육 풍습은 조동종의 설조청졸(雪爪淸拙)의 건백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막부말기에서 메이지유신 시기에 활약하였던 승려로 1868년 55세 되던 해 세속으로 환속하여서 정치문제 해결에 투신하였다. 1871년 설조청졸은 메이지유신 정부의 상국(上局) 의장을 역임하였다. 동년 그는…… 승려들의 대처식육을 허용해 줄 것을 관할 관청인 좌원(左院)에 건의하였다.

당시는 신불분리와 불교배척정책이 시행되던 때였다. 좌원은 기독교의 만연을 방지하고, 공화제 정치의 배제를 목표로 국내 인심의 안정을 도모하던 곳이었다. 좌원의 창설을 계기로 지금까지의 신불분리와 불교배척의 정책에서 벗어나서 교화능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신궁(神宮)을 대신해 승려를 이용한 교도정책(敎導政策)으로 크게 전환되고 있었다. 설조청졸이 불교계의 많은 반발을 감수하고서 대처식육을 공인해 줄 것을 주장한 동기는 다음과 같다. 메이지 정부는 배불론이 팽배해 있었다. 계율을 잘 지키는 승려는 근소한 실정이었다.

설조청졸은 대처식육을 허용함으로써 승려의 세속화를 촉진시켜 승려신분을 존속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건의는 메이지 정부의 종교정책에 반영되었다. 승려신분은 호적에 편성되었고, 불교배척을 방지하는 구체적인 대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872년 4월 25일 태정관달(太政官達) 33호로 승려의 대처식육은 각자의 임의에 맡긴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런데 이 조동종의 승려가 대처식육을 건의했던 1871년, 일본에서는 매우 특이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궁중의 육식금지령이 풀린 것이 그것이다. 중세까지도 갖가지 야생고기나 가축의 고기를 구하던 일이 도시에서 가능했지만, 점차 육식은 불교와 신도에 의해 일반인들에게도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에도시대에는 고기와 도축 자체가 꺼림칙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고기 먹는 일이 불결하고 공식적으로 금기시되는 수세기 동안 이들의 밥상은 대부분 생선과 야채, 쌀로 채워졌다.

그러던 메이지의 식단에, 그것도 갑자기 위로부터, 고기를 먹는 일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 흥미로운 일본의 근대 풍경 속에서 고기는 문명화된 ‘타자’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육식으로 단련된 서양인들과 접하면서 쌀과 야채의 식생활을 하던 일본인들에게 고기를 먹는 일은 여전히 국내의 ‘타자’가 되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화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므로 육식을 환영하게 된 것이다.3)

이 사건은 일본불교 내에서 대처식육을 제안한 것과 동년의 일이었고, 여전히 상당수의 일본 대중에게는 그것이 낯선 문명의 식탁이었기 때문에,4) 세속화를 통해 불교의 입지를 염려해야 했던 조동종의 입장에서는 비록 그것이 문명의 기호였을지라도 충분히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실제적인 조동종의 대처육식의 생활양식은 육식보다 가족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더 구체적인 변화를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조동종 내부의 의기소침한 변모와는 달리, 조동종이 조선불교와 관계 속에서 보인 모습은, 물론 이 사이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변동과정 속에서 그 맥락을 짚어야겠지만,5) 결과적으로 그것은 일제의 국가주의에 충성 맹약을 하는 적극적 모습으로 변한다. 1910년 한일합방을 틈타 이회광의 원종과 연합(실지로는 예속)한 조동종은 조선 불교계 장악을 꿈꿀 수 있는 호기를 맞게 된다. 조동종의 한국포교 관리로 임명되었던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의 계획으로 1910년 10월 원종과 조동종 사이에 연합조약이 맺어진 것이다.6) 그리고 이에 대해 한국선종을 일본 조동종에 팔아먹은 사실에 격분한 박한영, 진진응, 한용운 등이 반대투쟁을 벌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해 3월과 9월 한용운은 중추원과 총독부 앞으로 각각 〈헌의서(獻議書)〉와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승려의 결혼을 청원하게 되며, 역시 같은 해 작성한 그의 《조선불교유신론》에도 동일한 취지를 담는다.

초기의 대처식육 문제는 만해가 제기하였으므로 그를 중심으로 논의를 축소시켜 보자. 한국근대불교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만해의 이 대처식육 주장에 대해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만해 자신의 표현대로 너무 ‘파괴’적이거나, 친일적이라거나, 아니면, 일본의 속셈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결론 등등이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결론은 만해 등의 대처식육론이 친일적, 또는 일본불교의 모습을 모방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다.

이 문제에 관한 현대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처식육론을 처음 본격적으로 끄집어낸 이는 정광호(1991)이다.7) 정광호는 한국불교의 계율과 일본의 그것을 간단히 대비한 후, 근대에 이르러 한국불교의 계율관(여기서는 대처육식으로 한정함)이 전반적으로 변질된 계기를 일제 침략으로 보았다. 근대 일본불교의 계율은 다소 느슨한 상태였고, 게다가 일제 정략의 수단이 된 일본불교가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해 주었던 호의로 인해, 일본의 대처식육의 풍습에 대해서도 너그러웠다는 요지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계율관 변질에 만해의 대처식육론도 한 몫을 거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양국의 대처식육에 대한 기존 계율의 비교도 작위적인 인상을 지울 수 없을 뿐더러(중세 일본불교의 사소한 대처사례가 한국에 없었단 말인가) 막연히 대처왜승의 유입과 만해의 대처식육론만으로 계율관이 변질되었다는 결론은 논리적인 비약마저 느끼게 한다.

주제에 대한 훨씬 성의 있는 논의는 김광식(1997)인데,8) 20년대 전후의 대처식육을 둘러싼 불교계의 목소리를 꼼꼼히 들려 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대처식육의 문제에 대한 기존의 전제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그는 “대처식육의 만연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이 수호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대처식육을 행하고 있는 승려들의 반불교적인 행태도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처식육의 주체가 일본불교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한국침략과 통치라는 구도하에서 나온 부산물”이라고 단정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광식은 일련의 논문을 통해서, 대처식육 풍조의 원인에서 유독 만해의 대처식육론을 배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위의 논문에서 만해에 대한 논의는 빗겨 나간다. 그리고는 다른 곳에서 곧장, “승려의 대처는 일본불교의 영향이며”(1998a),9) 만해가 대처를 “일본불교의 매개체이자 식민지 불교의 대명사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1998b).10) 이러한 김광식의 의문은 뒤에 나온 글(2003)11)에서 다시 제기된다. “일제하의 (대처식육)불교가 만해의 논리에 의거 집행되었는가, 아니면 그 결혼의 요인이 일본불교의 모방에서 나온 것인가?…… 여기에는 일제의 교묘한 불교정책이 개입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만해는 일제하의 이 같은 승려 결혼에서 비롯된 부정적 모순을 일체 언급치 않았다. 식민지 불교 정책의 비판, 자주불교의 지향, 불교개혁의 강조는 강렬하게 하면서도 승려의 결혼에 대한 모순은 일체 취급치 않았다.” 어쩌면 이 기본적인 질문 속에서 김광식은 무언가 만해에게서 다른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김순석(2003)12)도 대처식육의 풍습이 일본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란 전제하에, 이러한 풍습을 “한용운이 불교의 근본 계율을 수정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정치적인 힘을 빌려서 관철시키려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용운이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 결론짓는다.

그 외에 대처식육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일제하 또는 근대 한국불교를 평가하는 논문들에서 이 문제를 보는 학자들의 시각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대처식육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보이지 않으며, 대체로 일본의 영향에 의한 한국 전통불교의 퇴락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다.

허남린(1999)13)도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 사상과 관습이 변질되었다고 보고, 그 예로 1910년대의 대처식육 주장을 언급한다. 그러나 당대 일본불교의 대처식육 풍습에 대한 언급이나, 그것이 얼마만큼 일본불교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혹은 한국불교가 그렇게 변질된 것이 진정 일본불교의 영향이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은 전혀 없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일본불교의 다른 문화시책이 갖고 있던 정치적 배경을 열거한 후에 온 정황적 판단일 뿐이다.

이는 최병헌이 느끼는 것과 동일하다. 최병헌(2001)14)은 대처식육론을 놓고, 만해와 같은 선각자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고, 승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재삼 주장하였던 데 비하여 일본의 정치적 침략과 일본불교의 침투에 대한 문제에는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하였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최병헌에게 만해는 “1910년 합일합방이 이루어지던 당시에…… 승려의 대처를 허용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일본불교의 침투에 대하여 뚜렷한 비판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나, 그의 문제의식이라는 것은 한계성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심재룡의 경우(2003)15)도 마찬가지다.

3. 계속되는 근대의 지도(地圖) 그리기

확실히 논의들은 일방적이다. 이는 당시 왜색(倭色)불교의 특징들이라고 단정하는 것들을 다양한 맥락에서 분석하지 못한 탓일는지 모른다. 승려의 결혼과 육식에 대한 만해의 청원이, 조동종의 조선불교 침탈에 동조적 자세를 취한 것이라거나, 설사 우연한 일치였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일제의 책략에 도움이 되는 무비판적 언동이었다는 결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만해가 주장했던 다른 혁신적 주장들, 참선의 방법과 염불당폐지, 포교장려, 승려의 노동 등을 고려할 때, 차라리 대처 옹호는 주술적이고 구태의연한 사제적 불교에서 반(反)사제적(anti-clerical) 거사불교의 선언과 운동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지로 그는 대중강연에 《유마경(維摩經)》 강의를 자주 했는데, 이러한 사실도 그의 대처옹호 주장을 이해하는 데 일말의 단서를 준다. 뒤에서 간단히 첨언하겠지만, 이 경전의 서사적 전개는 거사불교를 상징하는 유마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흥미롭게도, 대처식육의 주장을 가능케 하는 대승의 특이한 윤리관을 보여 준다.

대처식육의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말하기 위해, 다시 이 놀라운 근대의 풍경을 상상해 보자. 어느 날 고영표와 한용운이라는 스님 등이 승려도 고기를 먹고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할 때, 그냥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동네 절에서 시주받고 땅 팔아 시자 유학 보내니, 귀국하자마자 결혼 후 취직해 버렸다 한다. 옆 동네에도 그런 일이 생겼으나 결혼은 해도 계속 승려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런 이가 한둘도 아니고 거의 태반이자, 용성 스님이란 분이 총독부에 금지를 요청하는 백서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농간으로 이는 무시되었고, 몇 년 후 대처식육의 절간 풍습은 전염병처럼 전국을 휩쓸게 된다.

생각해 보면, 학자들의 논의가 오히려 너무 쉽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만해와 같이 항일 혈기가 들끓었던 사람이 청춘의 힘을 못 이겨서 승려로서의 본분을 잠시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후, 절반이 넘는 승려들이 전부 신분을 망각하고 대처식육을 했는데, 아니 그 당시 승려들이 고기 못 먹고 결혼을 하지 못해 다 미쳐야 하는 그런 광증에라도 걸렸던 것일까. 그리고 그 전염병이 일본유학을 한 학승들에게서 옮은 것이라고? 지금 가톨릭 신부들 과반수가 실은 자신에게 부인이 있노라고 ‘커밍아웃’하여 변명하기를, 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걱정되고, 결혼과 출산장려의 정부정책에 감화되어 결혼했다고 말한다면, 납득이 되는 것일까. 또는 나치 포로 수용소의 경험 이후, 유대인들이 갑자기 삼겹살을 즐겨 먹기 시작했다고 보도된다면 과연 그것이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어야 했던 수용소의 상황만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문제일까.

단지 일제에 대한 호의에서, 또는 은밀한 일제의 책략에 의해서 도모되었다고 하더라도, 승려가 한 순간에 본분을 망각하고, 강압적이지도 않은 대처식육의 풍습을 받아들인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일일까. 직접적인 강압은 아니지만, 단지 그냥 외부의 어떤 영향에 의해서 불교의 기본적인 계율을 쉽사리 포기한다는 것이 정치적인 이해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물론 대처식육이 왜색이라는 판단을 내리게끔 만드는 일본불교의 의도와 그에 응했던 친일적 불교인들의 명백한 ‘정치적’ 정황들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딱히 대처식육에 겨냥되어 있지는 않다. 그냥 그것을 여러 왜색적인 종교문화적 침투의 부수적 영향으로 단정해 버리고, 그러한 판단의 커튼으로 가려 버린다. 그러나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현재까지도 배제되고 있는가. 당대 승려들의 출가배경, 가난과 학업의 동경, 유학 시 학업분위기, 학생들의 일본불교 인식상황, 수업교과목, 유학자금의 형태, 당대 자유연애의 물결, 은사 스님과 관계, 교계 내 사회 인력의 상황, 유교적 가족관, 대처승과 비구 사이의 개인적 친분 혹은 연대, 기타 등등. 이것은 하찮은 문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대 승려에 대한 사회의 인식, 일본의 정교(政敎)관계, 대처식육의 일본불교 내 수용과 인식, 한일 양국의 근대 계율관 등등. 이런 문제들이 이 주제와 함께 거론되어야 할 텐데, 이런 미시적인 문제들이 모두 무시된 채로, 그냥 거두절미, 일제에 대한 호의와 일제의 농간으로? 그러니 문제의 답안지가 이상해져 버린 것이다. 최소한 김광식의 그것처럼, 만해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이상한 주장을 한 것이란 판단은 그래도 정직한 것이다. 나머지 연구자들에게, 만해는 일본의 침략의도를 읽지 못한, 덜떨어진 주장을 외치고 다닌 위인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위의 여러 미시적인 논의의 필요성까지도 무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상기인들의 역사학적 논의에는 중요한 종교학적 논점들이 빠져 있는데, 하나는 그것이 불교사 내부에는 규범으로부터의 일탈(transgression)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대승의 논리가 함축되어 있음을 잊고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비구의 생활양식이 함축하고 있는 두 차원, 순결(chastity)과 고립생활(monasticism)을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정조를 지키는 것, 섹스를 하지 않는 것과 가정을 떠나 고립의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불교에서 반드시 같이 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비구로서의 정조관념은 타종교의 그것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흥미롭게도 인도사상 속에서 나타나는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은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수행의 수단이 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종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일탈에 대한 대승의 논리는 《유마경》에서 잘 볼 수 있는데, 사리불과 유마 사이의 대화에서 연좌(宴坐, 좌선)는 “마음과 몸이 삼계에 얽혀서 나타나지 않도록 주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또는 “번뇌를 끊지 않았지만 그러나 열반에 드는 것”으로 표현된다.

계율을 어긴 두 비구를 훈계하던 우빨리(Upa-li)에게 유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빨리야, 너 그 두 비구의 죄가 무겁다고 그렇게 책망하면 되겠니. 즉시 그 죄를 덜어 주고, 그 마음이 죄진 것이라고 혼동하게 하지마. 왜냐하면 죄라는 거, 그건 알고 보면 바탕이 없는 거잖아. 죄라고 부를 만한 게 어디 있어. ……마음의 본바탕이 어디 있냐고? ……(파계해서 죄가 있다 없다 하는 거) 그런 혼동이 바로 번뇌지. 그런 잘못된 이해가 없는 것이 바로 깨끗하다고 하는 거지.”

유마의 입장은 초월적이다. 여기서 계율과 파계, 세속과 성스러움, 청정함과 타락의 분화는 사라진다. 이러한 대승의 초월의 논리는 고정화된 소승의 계율관과 상반되며, 수많은 대승경전이나 고승들의 일화 속에서 묘사되는, 일탈에 대한 해석의 계기를 마련한다.16) 물론 초월적 실체(힌두 철학에서), 또는 양극단의 상대적 인식에 대한 무차별(불교에서)을 전제로 함으로써 빚어진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ism)은, 현실세계에서, 힌두 철학에서의 계급 이데올로기나 불교에서 승려의 막행막식과 난행(亂行) 등을 은폐하는 변명거리로도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저자거리에서 일부 불교계의 승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대승윤리의 이해가 대처식육의 주장을 관통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불교의 사상적인 논의를 삭제하고 대처식육을 논한다는 것은 다소 의아하며, 일제의 불교책략만큼이나 불교의 종교적 이해는 중요하다. 일제 종교정책의 영향으로만 당시 조선불교의 대처식육 풍토를 논한다는 것은, 당시 근대적 변모를 꾀했던 여러 비구/대처승이 가지고 있었던 불교적 사고들마저도 역사 속에서 텅 비우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청정비구의 전통을 갖는 주체로서의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또 대처라는 근대적 타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현대학자들의 주장은 이미 백여 년 과정 속에서 형성된 ‘주체화’된 전통의 목소리(‘청정비구는 한국불교의 특징이다’)를 반복하는, 먼 시간 뒤의 에코(따라서 말하기)일 뿐이다. 대처식육은 소수의 근대적 타자(일본불교)였으며, 타자이며, 그리고 거세되었다.

우리와 일본, 주체와 타자를 형성해 가는 과정의 1920년대 논의와, 오랜 후 그것이 내면화되어 울리는 2000년대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중요한 하나의 차이점을 남긴다. 1920년대의 논의에서 전통적인 ‘주체’의 모습은, 사원경제의 파탄이나 계율파괴를 가져온 국내의 타자, 즉 1920년대 일본에서 귀국한 근대화된 유학승들에 맞서 형성된다. 이 근대적 불교의 주체 형성과정 속에 일본의 모습은 즉각적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반면 2000년대에 이루어진 논의들은 한결같이 대처식육의 최종적인 원인을 일본에 돌림으로써, 우리 불교의 모습을 그것과 계속 이격(離隔)시킨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를 계속 타자(일본/대처식육)와 의식적으로 멀리 떨어뜨림으로써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뜨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점은 대처식육의 문제가 갖는 근대성의 의미가 현재까지 진행중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21세기까지 지속되는 이 논의를 통해, 우리 불교의 ‘현재’ 모습은 형성과정에 있는 중이다. ■

심재관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강릉대 강사. 논저서로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오리엔탈리즘과 유럽의 브라만교 형성〉 〈비판불교란 무엇인가〉 〈19세기 근대 불교학의 탄생에서 문헌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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