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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무 그리고 불교 / 박진영
박진영 미국 아메리칸 대학 철학과 교수
[22호] 2005년 03월 10일 (목) 박진영 jypark@american.edu

1. 들어가는 말

“도대체 왜 무(無, Nichts)가 아니고 존재자(Seiendes)가 존재하는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1)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입문(Einfu쮐rung in die Metaphysik, 1935)》 첫머리에서 묻는다.1)

하이데거에게 이 질문은 ‘모든 질문 중 첫 번째’의 질문이며, ‘형이상학의 근본적 질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말한다.

“무가 아닌 모든 것이 이 질문에 포함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 그 자체도. 그것은 무가 존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중략) 무가 존재(ist)하기 때문이다.”2)

‘존재자’와 무의 ‘존재’를 구분함으로써 하이데거는 무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근본 존재론의 범위 안에서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이데거는 또한 무에 관한 질문을 형이상학의 첫 번째 문제로 상승시켰다. 그러나 “왜 무가 아니고 존재자가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다. 이 질문을 하는 동시에 무는 이미 ‘있는’ 그 무엇으로 변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무를 존재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담론의 행위를 헤겔의 불교 해석에서 살펴보았다. 헤겔은 그의 《종교철학강의》에서 불교의 무를 ‘실체’로 해석함으로써 무를 유에 종속시키는 담론을 형성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불교의 무를 해석함으로써, 무는 존재의 부재, 존재의 결핍으로 이해되고, 그러한 무를 근본으로 삼는 불교는 절멸의 종교로 이해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무에 대한 질문에서 우리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무에 대한 이해가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의 잔재를 만난다. 유(있음)에 의한 무(없음)의 종속화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를 성적 차별, 인종적 차별, 사회적 차별과 같은 맥락에서 ‘형이상학적 차별’ 혹은 ‘철학의 차별’이라고 부른 바 있다.3) 다른 차별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차별은 실체론적 사고양식의 산물이며, 인간이 각 실체에 부여한 가치를 고착화하여 위계질서 하에 놓음으로써 현실화된다. 철학은 구체적 현실을 보편화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기에 철학의 차별은 다른 차별들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철학의 차별’의 한 예로 형이상학과 불교에서의 무의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특히 하이데거가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하에 전개한 그의 무에 대한 사상을 검토하며, 무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서구 형이상학의 밑바탕을 차지하는 실체론적 사고양식과 불교의 비실체론적 사고양식에서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며, 이는 서구의 불교이해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철학하기와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하이데거와 무(無, Nichts)

하이데거 철학에 미친 노자의 《도덕경》의 영향을 논하는 저서, 《하이데거의 숨겨진 근원: 그의 저서에 미친 동아시아의 영향(Heidegger’s Hidden Sources: East Asian Influences on His Work)》에서 저자 라인하트 메이는 하이데거의 무의 개념은 “무에 관해 서구철학이 생각해 오고 논의해 온 모든 것들과 궁극적으로 구별된다.”고 말한다.4) 사실상 무에 대한 하이데거의 담론은 그가 자신의 철학의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는 형이상학의 극복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 자체가 형이상학의 극복을 시도하며 동시에 형이상학 전통 안에 남아있듯이 그의 무에 관한 사색에서 역시 우리는 형이상학의 잔재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무는 어떠한 맥락에서 형이상학의 무와 결별하며, 또한 어떠한 점에서 형이상학적 전통의 무와 그 맥락을 같이하는가?

무에 관한 하이데거의 논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으로 하이데거가 1929년 프라이버그 대학으로 영입되면서 맡았던 강연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를 들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형이상학 입문》의 첫 문장, “도대체 왜 무가 아니고 존재자가 존재하는가?”는 바로 이 강연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그만큼 무에 관한 질문 그리고 사색은 하이데거에게는 형이상학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며 사색이기도 한 것이다.

이 강연의 서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학문 활동이 존재자의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존재자가 아닌 것, 무는 무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당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연구는 바로 존재자가 아닌 것에 대한 질문을 하며,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에 의해 존재자의 의미 역시 밝혀진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묻는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 무는 어떤 상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하며, 하이데거는 무에 대한 논의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처음 접근부터 우리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점이 있음을 본다. 즉 이 질문을 함으로 해서, 우리는 이미 무를 이렇게 저렇게 ‘있는(ist)’ 무엇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무를 ‘존재자(Seiendes)’로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무가 다른 것과 다른 것이다. 무에 대해 질문하는 것―그것, 즉 무가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있는가 묻는 것―은 질문되어지는 것을 그 반대로 바꾸어 버린다. 이 질문은 질문의 대상을 그 자신으로부터 빼앗아 버린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어떠한 답도 처음부터 이미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답은 이미 무는 이것 혹은 저것 ‘이다(ist)’ 하는 형태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무에 관한 한, 질문과 대답이 모두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5)

이 짧은 문구에서 하이데거는 기존 형이상학 전통이 무를 다루는 데 있어서 직면하게 되는 근본적 문제를 집어 내고 있다. 즉 ‘있음’에 근거한 기존의 형이상학 안에서 ‘없음’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다. 형이상학적 전통은 존재와 무 사이의 이러한 본질적 차이에 대한 고려 없이 무를 취급해 왔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하이데거가 지적한대로, 있음, 존재자만을 보아 왔기에, 무는 그것이 어떠한 상태이든, 존재자의 반대편으로 이해되어 왔고, 존재자의 그늘에 있었다. 무에 관한 숙고는 존재자에 대한 숙고와는 다른 방식으로 행하여져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형이상학 전통 전체에 대한 재 고찰을 요구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이런 점에서 무에 관한 문제는 형이상학의 여러 문제 중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근본을 건드리는 문제라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생각한 무와 형이상학의 관계를 우리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형이상학의 근원에 관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본문제는 존재의 밑뿌리, 근원을 묻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의 근원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개별 존재자들을 연구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 즉 존재 자체를 보아야 하는데, 이 존재와의 대면은 무에 대한 사색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나중에 더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둘째는 형이상학-하기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형이상학-하기의 근저를 이루는 것은 논리학이라는 철학하기의 방법론이다. 하이데거는 무에 대해 논의하는 한, 우리는 형이상학적 철학하기의 근간인 철학의 논리를 배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모든 사고의 보편적 논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무에 대한 논의는 모순율, 동일률, 배제율의 논리를 지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만일 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에도 모순이 될 수가 없으며, 자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동일률을 따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무를 모순율, 동일률, 배제율이라는 논리체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비존재를 존재자로 가정하지 않는 한, 그럼으로써 무를 유에 종속시켜 제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즉 논리학이 형이상학의 근간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하이데거에게는 형이상학은 존재자에 대한 사색에 그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존재자의 근원에 관한 사색이라면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넘어서 존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곧 존재자의 개별성을 넘어서 존재를 생각하는 무에 대한 사색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존 논리학의 한계는 하이데거에게는 곧 기존 형이상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현존하는 서구의 무의 개념의 근거를 제공한 두 가지 근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첫째는 전통 형이상학으로 “무에서는 아무것도 창출되지 않는다.”(WIM 38; “WI” 107)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무는 비존재이며, 무는 “존재를 형성할 능력이 없는 무정형의 물질이며, 따라서 그 자체의 나타남을 보여 줄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출현과 더불어 무는 “최고 존재의 반대”로 여겨지게 된다. 서구사상이 망각해 왔던 것은 이와 같이 무와 유를 이원론적으로 보는 시각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라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만일 신이 무에서 창조를 했다면, 신 자신이 바로 그 무와 연결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은 신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은 무를 알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절대는 무를 배제하기 때문이다.”(WIM 39; “WI” 107) 신, 즉 절대존재와 무의 관련성에 관한 논리적 문제점을 지적함이 없이 철학은 존재자에 절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무를 그에 종속시켜 왔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무는 존재의 반대편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무는 단지 유를 제거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무엇이 아니며, 또한 존재에서 존재성을 부정한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무는 ‘무엇이 아니다’ 즉, ‘부정(否定)’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중략) ‘무엇이 아니다’ 나 ‘부정’이라는 것이 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인가? (중략) 우리는 무가 ‘무엇이 아니다’나 ‘부정(否定)’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한다.”(WIM 28; “WM” 97)

무에 대한 숙고가 기존 형이상학의 논리를 넘어서고, 부정의 법칙 역시 무에는 적용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 무를 만나고 무에 대해 생각하며, 무에 대해 숙고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무는 현존재가 ‘불안(Angst)’을 느낄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물론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은 일반적인 근심, 걱정과는 다른 일종의 불편함 혹은 스산한 느낌(Unheimlichkeit)이라고 표현된다.

즉 존재자가 존재 그 자체와의 거리감을 느낌으로써 오는 생경함이다. 존재와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생경한 느낌은 존재자로 하여금 멈칫하게 만든다. 이러한 멈칫거림, 스스로로부터, 그리고 스스로로 향하는 뒷걸음질은 존재자로 하여금 자신을 단지 개별체로 보는 것을 넘어서 존재 자체와 직면하게 한다. 개체인 존재자가 개별 존재자 모두를 포괄하는 존재를 만나는 이 현상을 하이데거는 무의 무화(無化)라고 부른다. ‘무의 무화’에 의해 현존재는 단지 일상적 삶에 매몰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성을 인식하는 순수 존재가 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의식을 통해서만 존재자는 진정한 자아, 그리고 자유를 획득하고 허무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무가 ‘불안’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하는가? 현존재가 느끼는 이불안의 근거는 현존재가 개체의 소멸, 즉, 죽음과 만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만일 무가 궁극적으로 존재의 소멸, 죽음의 실체와 다르지 않다면 하이데거의 무는 무를 존재의 부재로 보는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

이 맥락에서 하이데거의 ‘불안’의 개념을 불교의 무상과 연결시킨 김형효의 해석은 하이데거 철학의 불교사상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김형효는 하이데거의 불안의 개념은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그의 존재론적인 자각이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친숙한 세상과 그 세상이 가르쳐 주는 공식성의 세론에서부터 자기 일탈을 감행하는 단독적인 고독의 행위에서 존재론적인 본래성이 회복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6) 불안은 걱정이나, 공포와 다를 뿐 아니라, 근본적 마음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느끼는 불편한 감정과도 다르다.

즉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가 느끼는 불안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감정이 아니다. 이 감정은 현존재가 마음의 본래적인 자각에로 회귀하려는 회심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매우 귀한 것이다.”라고 김형효는 말한다.7) 그리고 이 귀한 불안의 느낌은 무의 무화(無化, Nichtung) 작용에 의해 존재자가 존재의 무상성을 느낄 때 일어나는 실존적 경험으로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의 무, 무화, 불안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현존재가 존재 상태의 실체, 즉 존재를 만나는 획기적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김형효는 하이데거에게 “불안과 스산한 감정과 고요함의 평안, 그리고 무는 서로 등가적인 의미상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한다.8) 그렇다면 무의 무화는 어떻게 불안이면서 동시에 평안함인가. 김형효의 해석을 조금 길게 인용해 본다.

‘무가 무화한다’와 ‘불안이 불안케 한다’의 언표는 결국 불교적인 의미에서 ‘제행무상’의 감정을 갖도록 하는 그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와 불안의 개념이 단순한 지식의 수준에서 우리에게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사건으로 와 닿는 생기의 수준으로 어떤 깨달음을 일러주기 때문에 저 개념들이 제행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중략)

불안의 무상감 속에 현시된 무는 분명히 어둠이다. 왜냐하면 그 무에는 캄캄해서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무가 어둠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비쳐 주는 그런 ‘밝은 어둠‘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새로운 차원의 현시는 제행무상의 빛이다. 이 제행무상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계시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마음이 제행무상을 느낄 때, 마음은 존재자를 이제 어떤 이용 가능한 기구(Zeug)나 또는 대상 가능한 사물(Ding)로서가 아니고, 저런 모든 일상적 관심의 ‘분별적 헤아림(Umsicht)’이 무의미해지면서 존재자를 오직 그 자체로서 바라보고자 하는 평안의 감정을 낳게 된다.9)

즉, 존재자의 무와의 대면은 불교적 맥락에서 보면, 존재자가, 혹은 중생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성격인 무상성, 변화성을 접하는 순간이며, 따라서 이 경험은 무와의 만남을 평온함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형효의 해석은 하이데거의 무에 관한 사색이 얼마나 기존 형이상학적 사고와 차이가 나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는 또한 하이데거의 무와 불안에 대한 철학은 기존 형이상학적 체계 내에서는 제대로 이해되기 힘들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3. 하이데거의 무와 불교

이전의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무에 대한 담론과 논리학을 문제화한 하이데거의 논의는 동양철학 특히 불교에 대한 서구의 오해를 밝히는 길을 열고 있다. 서구에서 불교를 ‘철학’이라는 분류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고, 결국 동양사상을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요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동양사상은 철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불교와 관련해서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둘째로 동양사상은 논리적 구조를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철학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리적 구조란 물론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 배반율, 모순율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존재자의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로 설명될 수 없다. 개체의 정체성은 관계성에 의해서 형성되며 그런 의미에서 불교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의 모형 안으로 깨끗이 맞아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불교적 사고의 구조에서 이원론적 대립은 속제(俗提)적인 상황에서 그리고 각 상황의 특수한 맥락이 결정될 때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순율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양식 자체가 이미 모순율과 배제율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무에 대한 진정한 논의는 전통 논리학의 논리를 위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하이데거의 논의, 그리고 무에 대한 사색은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근본을 다루는 문제라는 그의 주장은 동양과 서양의 사유양식의 차이에 다리를 놓고 있다. 이 다리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강연 ‘후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1929년 강연을 정리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가 출판된 후 10여 년이 지난 1943년 판에 ‘후기’를 첨부했다. 이 ‘후기’에서 하이데거는 무를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자신의 해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음을 지적하고, 그 오해를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사람들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는 것이다.

① 이 강의는 ‘무’를 형이상학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무란 없어지는 것 그 자체이므로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은 무이다. 따라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끈다. ‘무의 철학’은 완벽한 ‘허무주의’다.

② 이 강의는 고립된 두려움의 감정, 즉 불안을 유일한 근본 기분이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불안은 걱정이 많은 사람, 그리고 겁이 많은 사람들의 감정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는 용기라는 고양된 마음가짐을 제어한다. ‘불안의 철학’은 행동의 의지를 마비시킨다.

③ 이 강의는 논리학에 결정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지성은 셈하고 정리하는 모든 기능의 기준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러한 사고는 진리에 관한 판단을 우연적인 기분에 떠맡긴다. ‘단지 감정에 의지한 철학’은 정밀한 사색과 행위의 확실성을 위태롭게 한다.(WIM 45쪽)

하이데거가 요약한 자신의 무의 철학에 대한 이 비판이 19세기 유럽 정신이 불교를 만났을 때 불교에 대해 했던 비난과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이데거 철학의 비난자들처럼 일세대 유럽의 불교학자들은 무상, 무아 등 무를 이야기하는 불교를 끔찍한 허무주의의 종교, 철학이라고 규정했다.10)

또한 하이데거 철학의 비난자들처럼, 헤겔은 무아, 무상을 근거로 하는 불교는 나약한 여성적 고립의 종교라고 해석했고, 불교를 그 자신이 제시한 세계 종교 발전사의 유년기에 불교를 위치시켰다.11)

나아가 서구 전통 논리학에 거스르면서도 그리고 거스르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근본으로 갈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철학체계로서 불교사상이 서구 전통에서도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논리학의 법칙을 따르는 가장 ‘정밀한’ 사색이 가장 ‘엄밀한’ 사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학은 “사고의 본질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WIM 47)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무의 개념은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형이상학의 잔재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는 유(있음)로의 회귀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 나타난 형이상학과 무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본질을 알고자 해왔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형이상학하기의 방법으로는 이 존재자의 존재성을 밝힐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자의 근본은 존재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 더 깊은 그 무엇, 존재 자체에 있으며, 존재는 무에 의해 드러난다. 일상에 매여 있는 존재자가 무와 대면하는 순간, 존재자는 스산한 느낌, 편안하지 않은 느낌을 갖게 되지만, 이를 통해 존재자는 존재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무의 무화 작용은 왜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를 만나게 하는가? 즉, 왜 무와의 만남은 존재자의 개체성의 무의미성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고 존재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의 근본인 존재와 만나게 하는가?

불교에서 모든 존재의 항상 됨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불교가 세계의 구조를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즉 존재자는 개체가 불변의 실체(實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규정이 불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중적 인과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의 법칙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중도의 세계관인 것이다.

불교의 무상의 개념이 세계의 근본에 고정불변의 실체를 상정하지 않고도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는 것은 불교는 세계의 근본을 무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세계는 실체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구조 자체가 고정불변의 실체에 근원을 둔 것이 아니라 연기적 변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의 만남 자체가 곧 중생으로 하여금 깨침을 얻게 하지는 않는다. 연기적 구조의 세계 현실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또한 물질적, 정신적으로 형성된 고착화에 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상정한 무는 어떠한 구조를 통해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의 무상을 인식하게 하는가? 불안이 평안함으로 바뀐다는 것은 하이데거에게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이데거에게 이는 무의 무화작용을 통해 개별 존재자가 존재의 총체성 즉 존재와 만나게 됨으로 이루어진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나 존재자 없이 존재가 있을 수 없으며 존재 없이 존재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존재자는 많은 경우 존재를 망각한다.

따라서 무의 존재는 존재자를 개별적 개체 지향적 사고에서 개별자를 넘어선 총체적 존재로 이끈다. 무를 통해 존재자가 이르는 곳은 결국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모든 존재자 가운데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존재의 목소리에 불리어 경이로움 중의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즉 존재자는 ‘있다’.” (WIM 46-7)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유와 무의 관계의 아이러닉한 전환을 발견한다. 결국 기존 형이상학에서 유가 무를 종속시켰다는 그의 설득력 있는 논설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의 무는 존재자의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긴긴 우회였다. 나아가 이 존재자의 ‘있음’은 그 궁극적 근원으로써 존재의 ‘있음’을 무라는 수단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형이상학이 상정한 존재자와 무엇이 다른가.이것이 형이상학이 규정해온 절대적 존재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무는 결국 총체적 존재로서 존재를 밝히기 위한 중간매체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하이데거에서도 무는 결국 그가 존재라고 명한 절대유(絶對有)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으며, 유에 대한 무의 종속이라는 형이상학 전통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 이유를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이 이전의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실체론적 사고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4. 불교와 무 그리고 공

무는 존재론적 범주도 아니며, 인식론적 범주도 아니다. 무는 어떠한 철학적 구조로도 구체화될 수 없으며 무에 대한 담론은 수사학적 장치로써만 정당화될 수 있다. 무를 유에 종속시키지 않기 위하여 이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렇다면 무는 철학적 언표로써가 아니라 수사학적 장치로써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무엇보다 무는 어떠한 정체성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문제화함으로써, 개체의 정체성이 근본으로 삼는 동일성의 규칙을 배반함으로써만 무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무는 존재의 부재라기보다 존재의 닫혀져 있음의 한계를 지적해 준다. 무를 이렇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를 존재의 규칙 내에 가두려는 우리의 의도를 계속적으로 배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시도는 현실을 재현하는 언어의 능력을 끊임없이 문제화하여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는 노력을 포함한다. 무는 그 무엇으로도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는 어떠한 긍정적인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실체론적 언어관에 도전을 하는 상황적 언어(contextual language)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상황적 언어는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과 배경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에 비해 형이상학의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재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존재의 철학에 무를 희생시키지 않고 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곧 무를 ‘전략적’ 부재로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다.무는 존재와 비존재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무의 부재나 부정 모두 전략적일 뿐이다. 불교 담론에서 무, 그리고 무의 존재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리는 형이상학 담론에서 이들을 다루는 것과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불교에서 무의 담론의 한 예로 《반야심경》의 구조를 살펴보도록 하자. 대승경전의 일원으로 《반야심경》에서 존재는 공(空)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존재는 각각 독립적 실체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공의 개념은 그러나 그 자체가 비실체이기에 실체론적 가정 하에서 작용하는 언어구조, 그 언어에 근거해서 형성되는 관념의 구조를 통해 재현될 때 일정의 고착화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고착화된 개념을 문제화하는 것 자체에 의해 《반야심경》은 공사상을 논한다.

《반야심경》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개체적 실체적 매체란 이목구비(耳目口鼻) 같은 구체적이고 물질적 실체나, 언어와 같은 비물질적 현실적 매체 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양식에 의해 형성된 개념의 실체화, 고착화를 포함한다. 《반야심경》은 고착화된 정체성의 비정체성을 불교의 전형적인 전술을 통해 보여 준다. 전술은 동일 대상에 대해 부정과 긍정을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부정되고 긍정되는 대상의 실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존재(色)를 공(空)과 동일화하면서 시작된다. 붓다는 사리불에게 말한다. “사리불이여, 존재는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존재와 다르지 않다. 존재가 공이요, 공한 것이 바로 존재다.”12) 존재가 공하다고 한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붓다가 존재를 공하다고 했을 때 붓다가 부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반야심경》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붓다가 불교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 하나 하나를 모두 부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 가운데에서는 존재도 없고, 형상도, 감각도, 인식도, 정신작용도 그리고 의식도 없다.귀, 눈, 코, 혀, 몸, 그리고 마음도 없다.색깔도, 소리도, 냄새도 맛도, 감각도 없다.시각계도 없고, 내지 의식계도 없다.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다.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의 다함도 없다.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다.

위에서 붓다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한다. 그리고 십이연기가 부정되고 나아가 사성제가 부정된다. 사성제의 부정은 곧 붓다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성제의 존재를 부정한 후 《반야심경》은 “반야도 없고, 깨침의 얻음도 없다.”고 말한다. 부정은 여기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불교의 깨침과 관련된 모든 개념과 단계가 부정되었을 뿐 아니라 깨침 자체도 부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부정의 절정은 아이러닉한 전환점을 마련한다. 《반야심경》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한 후, 이제 긍정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말한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거하여, 마음은 걸림이 없으며, 마음이 거침이 없으니,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을 얻는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는 더할 것 없는 완전한 깨침을 얻었다.” 《반야심경》은 모든 사람이 보살과 부처들과 같이 반야바라밀을 실행하여 깨침을 얻을 것을 권한다. 만일 보살과 붓다가 지혜의 도움으로 깨침을 얻었다면, 그리하여 삶의 고통에서 헤어났다면, 지혜(般若)는 ‘있는’ 것이고, 극복되어야 할 고통도 ‘있는’ 것이며, 또한 깨침도 ‘있고’ 열반도 ‘있다’. 《반야심경》의 전반부에서 붓다는 존재와 깨침의 모든 조건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반야심경》의 후반부에서 붓다는 이 모든 것을 긍정한다. 이처럼 분명한 논리적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일면 논리적 모순으로 보이는 《반야심경》에서 붓다의 논리 전개는 이 경에 나타난 존재와 무, 혹은 형상(色)과 공(空)의 관계를 살펴보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반야심경》의 전반부는 부정의 수사(修辭)가 지배한다. 오온,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 반야, 그리고 깨침이 모두 부정된다. 그러나 이들을 부정하는 것은 이들을 존재의 영역에서 제거하여 비존재의 영역으로 합류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반야심경》이 어떤 것을 부정했을 때, 이때의 부정은 우리가 흔히 부정법을 쓰듯 그렇게 그 요소의 ‘결손’ 혹은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부정은 독립적, 개별적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수사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만일 존재자의 성격은 공이라면, 감각이건, 감각기관이건, 정신작용이건, 그 존재의 정체성은 부정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은 존재의 독립성을 부정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긍정’의 수사와 같이 쓰이는 맥락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같은 맥락에서 존재의 부정은 존재의 긍정, 즉 공의 부정에 의해 상쇄된다. 이처럼 부정과 긍정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반야심경》은 존재도 공도 모두 고착화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반야심경》의 “존재인 것은 곧 공이다.”라는 구절은 따라서 즉각적으로 “공인 것은 또한 존재다.”라는 그 역을 통해 균형을 이룬다.이 경우, 부재는 기능적인 부재이며 존재론적 부재가 아니다.존재자체가 기능적 성격을 갖기에 부재 역시 기능적 성격을 갖는다.

우리가 여기서 기능적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을 불교에서는 흔히 방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존재는 기능적, 혹은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불교의 무아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의 독립적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존재의 현상적 현실은 그 존재를 있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필요로 하기에 현상계에서 보이는 존재의 개별성은 기능적인 개별성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공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득함이다. 불교적 존재자는 본질로서 실체는 없지만, 존재자 자신은 모든 것의 연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야심경》의 공의 개념을 하이데거의 무, 그리고 헤겔의 무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앞에 언급했던 《하이데거의 숨겨진 근원: 그의 저서에 미친 동아시아의 영향》에서 저자 메이는 하인리히 페젯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64년 가을 방콕에서 온) 한 승려가 “무성(無性, nothingness)은 무(無, nothing)가 아니다. 차라리 완전히 그 정반대, 즉 충만함(fullness)이다. 누구도 그것에 이름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무(nothing)이며 모든 것(everything)―은 완성이다.”라고 말하자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응했다. “내가 내 평생 동안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거다.”13)

하이데거 자신은 자신이 무에 대한 숙고를 통해 보이고자 했던 것이 바로 불교의 공이라고 확신을 했을지 모르지만, 하이데거의 무와 불교의 공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불교에서 역시 하이데거에게처럼, 존재와 무, 혹은 존재와 공은 공속(公贖)한다.

불교에서 존재와 공이 공속하는 이유는 그러나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는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 자체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불교에서 존재와 공은 항상 변화하는 존재현실을 나타내는 두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공속한다. 즉 존재라는 이름이나 공이라는 이름 역시 가명(暇名, prajn쁝pti)이며 언설이기에 공속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에서도 하이데거에서처럼 무는 무화한다. 그러나 무의 무화는 존재자에게 존재를 볼 수 있게 하는 매개가 아니며, 공 역시 공하기에 공은 공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근본적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자의 근원으로서 존재는 기존 형이상학에서 상정한 것과 같은 실체적 본질은 아닐지 몰라도 여전히 그 자신을 공화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존재는 존재자의 근거 아닌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불교의 공은 존재의 근거일 수 없다. 존재는 곧 공이기 때문이다. 공은 연기이기에 공을 대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존재자, 즉 주체는 근본적으로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유와 무, 서양과 동양 그리고 철학의 차별

지금까지 논의한 무, 공, 존재 그리고 형이상학의 문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어떻게 우리의 철학의 차별에 관한 담론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동양과 서양에서의 무의 개념의 차이를 논하는 논문 〈비존재와 무-동양과 서양에서 부정성(否定性)의 형이상학적 성격(Non-Being and Mu- the Metaphysical Nature of Negativity in the East and the West)〉에서 쿄토학파의 아베 마사오는 동양과 서양에서 무가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는지 논의하고 있다. 아베는 존재와 무를 이원론적 구조하에서 이해해 온 서양사상에서 존재는 무의 반대에 서 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대적 개념이 아닌 절대적 개념으로서 제3의 개념 설정이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긴장의 해결은 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제3의 개념을 통해 양극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아베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제시한다.
이원론적 대립이 형성되었을 때 양극은 등가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존재와 무의 이원적 구조에서 보면, 서구에서는 존재가 무보다 존재론적 우위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아왔으며 따라서 무는 존재가 ‘결여’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우리도 앞에서 논의했다.

이와 같은 차별적 가치에 근거한 이원적 구조는 총애를 받지 못한 쪽의 부정적 가치가 절대적 가치를 가진 제3의 개념의 형성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나 부정성에 의해 위협을 당하기 때문이다. 부정은 결손이고 결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손, 결핍은 결국 죽음이다. 이것이 헤겔이 본 불교의 절멸이론이며, 하이데거의 불안이다.

이 절대적 가치의 제3의 개념은 그러나 이원적 구조의 양극을 융합해서 탄생된 것이 아니라 이원적 구조에서 총애를 받은 쪽의 가치를 절대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사상에서 이원론적 구조는 그 자체로서 서열의 구조이며 차별의 구조라는 것을 반영한다. 아베는 이러한 사고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설명한다.14)

위의 도식의 첫 번째 경우인 존재와 무의 경우, 왜 존재가 무보다 특권을 가지고 결국 존재와 무의 절대화가 절대적 존재로 귀결되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 삶이 죽음보다 더 가치 있으므로 특권을 갖고, 선이 악보다 더 가치를 갖는다는 가치판단은 언뜻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절대적 제 삼의 개념인 영원한 삶, 최고선은 자연적 논리적 귀결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원구조의 양편에 선 개념의 가치를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이원적 구조 자체가 숨기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바로 이원적 구조 자체는 그 구조를 형성하는 양편에 선 각 개념이 마치 독립적 개체로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이 구조자체가 양편에 부과한 가치를 자연화, 본질화한다는 것이다.

삶이 과연 죽음 없이 이해되어질 수 있는가? 선이 악의 개념을 그 안에 담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밝히려는 것은 위의 도식에서 보여주는 이원론적 구조 안에서 절대적인 제3의 개념 형성은 사실상 자연적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반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형이상학의 차별, 혹은 철학의 차별이라고 부른 것이기도 하다.

무를 존재의 부재로 보는 서구의 사상에 대한 대안으로, 아베는 이 논문에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그러면서 “상대적 무와는 구별되는 절대적 무”인 공의 개념을 제시한다.15) 아베는 이 경우의 무는 “유와 무의 이원론의 밖에 서서 이원론을 단순히 뛰어넘는 제3의 개념”이 아니고 제 삼의 개념으로써 무 역시 언표(言表)라는 것을 이해하는 무라고 말한다.16)

이 무, 혹은 공은 공 그 자체까지도 공하기에 존재와 무, 삶과 죽음, 선과 악은 이원화될 수 없고, 따라서 그 가치에 의해 단순 서열화될 수도 없음을 말하는 공이다.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정한도 가치의 서열화는 불가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치의 서열화는 서열화된 가치의 본질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이는 기존사회에서 권력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자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철학에서 유와 무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차별의 관계는 단순히 추상적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남녀의 성차별, 종족간의 차별, 계급간의 차별 등 현실사회의 차별의 이론적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유와 무의 관계를 밝히고, 그 안에서 불교의 공의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은 형이상학의 차별을 넘어서는 새로운 윤리학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불교의 공이 제시하는 윤리학이 유무의 종속관계에 근거한 형이상학적 차별의 윤리관과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현실화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사색은 이 시대의 불교사상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

박진영

미국 아메리칸 대학 철학과 교수. 편저로 《불교와 해체철학(Buddhisms and Deconstructions)》(근간), 논문으로 〈선과 선의 언어철학(Zen and Zen Philosophy of Language)〉 〈우리 시대에 있어서 선의 언어: 보조 지눌의 화두선의 경우(Zen Language in Our Time: the Case of Pojo Chinul’s Huatou Meditatio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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