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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차불교의 역사와 성격 / 한지연
한지연 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2호] 2005년 03월 12일 (토) 한지연 ruralhen@hanmail.net

1. 들어가면서

불교의 전파경로로는 육로를 통한 인도-중국-한국에 걸친 경로와 해로를 통한 인도-스리랑카 등지로 이어지는 경로가 있다. 이 가운데서도 인도-중국 간 가교역할을 했던 서역(Silk Road) 지역은 현재 중국 신강성 위그르 자치구에 속하며, 지금도 사막이 펼쳐진 넓은 땅에 드문드문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타클라마칸 자체가 3면이 세계 최고봉의 산맥들에 둘러싸여 있고 다른 한 면은 고비 사막에 의해 막혀 있기 때문에 그 일대 옛 오아시스 국가에서 형성되었던 사상·문화·교류 등 여러 방면에 대해서 신비스러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때문에 20세기 초반에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럴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미국의 워너 등을 중심으로 한 탐험대의 연구 활동과 그들의 저서를 통해 서역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고고학적, 미술사학적 측면에서의 접근방법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성과물 가운데서 불교가 거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상과 종교로서의 불교가 전파되며 파생된 유품을 통해 불교의 사상을 추측해 보는 방법 이전에, 여러 곳에 산재되어 연구되어지지 않는 문헌들을 통해 일차적 접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구자국(龜玆國, Kucha)에 대한 일차적 접근과 더불어 이차적으로 미술사학적 측면에서의 논의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2. 쿠차의 역사

서역은 천산을 중심으로 북로와 남로, 그리고 사막을 중심으로 한 사막북도와 사막남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인도에서 간다라 지역(현재 파키스탄 일대)을 거쳐 중국 땅으로 들어오는 길은 천산북로 혹은 남로, 사막남도의 세 갈래 길을 선택하여 들어올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장안(현 서안)을 시작하여 감숙성의 하서주랑을 통과, 돈황에서 옥문관을 통과하여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인 천산남로에는 하미―투르판―카라샤르―쿠차―악수―툼슉―카쉬가르로 통하는 길이 있다. 그리고 남쪽길은 미란―엔데레―니야―케리야―호탄―야르칸드―카쉬가르로 통하는 길이 된다. 위의 두 경로 가운데서 천산남로는 남쪽의 사막남도보다 오아시스 국가가 잘 형성되어 있었고, 그나마 험준함이 덜 하기 때문에 그 옛날 상인이나 구법승려들의 이용이 가장 잦았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천산남로에 위치한 쿠차(현재 신강성 위그르 자치구의 쿠차현)는 천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향하는 남쪽으로 더 흘러내려가 탑리목하(塔里木河)를 이룰 정도로 주변의 다른 오아시스와는 차원이 다른 지형을 갖고 있다.

투루판의 카레즈처럼 땅을 파서 설산의 물을 흐르게 하여 얻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천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도시 곳곳을 흘러 부족의 형태이든, 소국가 형태이든 이 지역에서의 국가건립은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쿠차에 관한 언급은 중국 사료 중 《한서(漢書)》에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다.

왕이 (도읍지) 연성(延城)을 다스리며, 장안으로부터는 7,480리이다. 가구는 6,970호이며, 인구는 81,317명이고, 승병은 21,716명이다.……1)

위와 같은 기록은 기원전 138년, 장건의 서역 공략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장건의 서역 착공의 목적은 대월지와의 협공을 통한 흉노토벌이었으므로 쿠차국에 관한 기록은 지극히 단순한 자료에 그칠 수밖에 없다. 즉, 한(漢)의 장안(長安)으로부터의 거리, 가구수, 인구, 병사의 숫자, 군대의 구성을 기록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그친 것은 당시 한나라에서 바라보는 서역 각국에 관한 주요 관심부분만을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구자국(龜玆國)’이라는 명칭으로 《한서(漢書)》에서 언급된 것이 쿠차국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이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에는 이미 국가형태를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에도 ‘구자국(龜玆國)’2)으로 명명되고, 그 밖에 굴자(屈茨),3) 구이(拘夷),4) 굴지(屈支),5) 구자(丘玆)·굴자(屈玆),6) 고선(苦先)·고차(苦叉)7)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후한대(後漢代)에 이르러 흉노가 세워 놓은 쿠차왕은 흉노의 세력을 믿고 의지하여 소륵(현재 카쉬가르 지역)을 격파하고 쿠차인을 왕으로 세워 소륵을 지배하게 할 정도로 천산남로에서의 영향력이 대단했다.8)

그러나 곧 중국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어 후한 명제 영평(永平) 18년(AD. 75), 명제가 붕어하자 주변의 언기(焉耆)·위수(危須)·위리(尉犁) 등의 국가와 더불어 중국 국상(國喪)에 참여하며 중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9) 후한 화제(和帝) 영원(永元) 3년(AD. 91)에는 반초가 쿠차왕인 우리다(尤利多)를 폐위시키고 백패(白覇)10)를 왕으로 추대하고, 더불어 도호부를 설치하였다.11) 그러나 반초가 죽은 이후에는 다시 서역 도호부가 폐지되고 독립왕국으로 성립된다.

그 후 중국의 계속되는 공략으로 인해 쿠차는 독립왕국으로서, 혹은 중국 복속국가로서의 위치를 지속하며, 중국 사료에서 꾸준히 서역전에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중국과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리고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측천무후대에 안서도호부가 설치되고, 중국은 쿠차를 중심으로 서역 전역에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고구려 유장인 고선지(高仙芝) 장군 역시 이 쿠차를 중심으로 서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독립국가로서는 그 영향력이 상당했고, 중국 복속국가로서는 도호부 설치가 이루어질 정도로 과거 군사적으로나 문화교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쿠차. 이곳의 왕궁 역시 그 장대함이 신의 거처 같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12) 웅장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 ‘구자성(龜玆城)’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정도로 성벽의 극히 일부가 여느 가정집의 흙벽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서역 오아시스 국가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했던 호탄, 투루판, 쿠차. 그러나 지금은 투루판의 교하고성·고창고성과 같은 당시 강력한 왕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왕성을 찾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쿠차이다.

이러한 쿠차의 사회는 어떠했을까. 전진(前秦) 건원(建元) 연간에 중국에서 역경활동을 했던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번역한 《아육왕식괴목인연경(阿育王息壞目因緣經)》에 쿠차국과 아육왕과의 관련 내용이 나오고 있다. 아육왕이 오해로 아들 법익(法益)의 눈을 빼내었는데 이후 안식, 강거, 오손, 구자, 우전 등지를 물려 주어 법익이 통치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13)

이 경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은 현장의 《대당서역기》나 티베트장경에서 설하고 있는 ‘우전 건국설화’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현장은 우전국 건국설화를 기록함에 있어, 아쇼카왕이 여행 도중 아들을 낳았는데 점을 쳐보니, 왕이 죽기 전에 왕이 된다는 점괘가 나와 두 눈을 빼앗고, 우전국에 버렸다. 그때 버려진 아이가 우전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아육왕식괴목인연경》은 서역 각국이 중국의 서역점령 이전에는 주로 인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려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14) 또 인도와의 관련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교의의 기준은 인도의 것을 따르고, 그 읽는 것은 인도문이다. 아직은 점교에 머무르고 있으며, 식사는 세 가지 정육을 섞고 있다.15)

이는 앞에서의 《아육왕식괴목인연경》에서와 같이 인도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이른 시기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인도의 언어·풍습·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이른 시기부터 불교가 전파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좀더 살펴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어쨌거나 BC. 21년, 그러니까 반초가 서역 각국을 한(漢)에 복속시키기 이전까지는 인도 지배권 아래 있었고, 그 인종 또한 인도계임을 추측케 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쿠차국에 언제 불교가 유입되었고, 어떠한 성격의 불교가 유행되고 있었는가?

3. 불교의 전래 시기와 대·소승의 공존

쿠차국에 언제 불교가 유입되었는지에 관해 입증할 만한 뚜렷한 근거자료는 없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중국의 주영영(朱英榮)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을 기원 전후의 시기로 잡고, 적어도 중국으로의 전래 시점보다는 빠르다고 보아야 하므로 기원전 2∼1세기라고 보고 있다. 또 이 시기에 인도의 아쇼카왕이 8만 4천 탑을 건립하였으므로 인도 영향권 안에 있는 쿠차에는 이 시기 무렵에 불교가 전파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16)

그리고 이유군(李裕群)은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 대에 정식으로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불교의 영향력을 키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략 기원후 1세기 초 무렵이 되면 중인도 문화가 서역지역에 정착하며 상호교류가 일어나게 되며, 더불어 중원지역까지 전입된다고 보고 있다.17)

또 기원후 2세기 설이 있다. 현재 키질 천불동의 연구소 소장인 조리(趙莉)의 경우 기원후 1세기 즈음에는 상업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며 그에 따라 승려들이 따라왔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본격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시점은 기원후 2세기라 단정 짓고 있다.18)

이러한 많은 학설 가운데 최근에는 주로 기원후 1∼2세기 학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서역의 다른 고대 국가들과 같이 불교전래 설화가 없는 가운데,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한 학설들이기 때문에 아직은 이에 관한 고찰이 좀더 필요한 실정이다. 더욱이 이 가운데서도 기원후 2세기 설은 중국불교 전래전설(후한 명제 영평 13년 설)에서 말하고 있는 시점과 시기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다.

또한 기원후 1세기라는 연대를 추정해 보더라도 서역 한가운데 있는 쿠차에서 바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고 본다. 중국불교 전래 때의 상황에 불경과 불상이 함께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이럴 경우 불상의 출현연대와 이의 전파과정이 모두 생략된다면 쿠차에 언제 불교가 전래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쉽게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전파되는 시기만이 아니라 중국불교의 시작 시기도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므로 상당한 재고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기록 면에서나 유물 면에서 모두 3세기 이후부터는 불교 기록이 보이지만 분명 그 이전에 이미 불교가 전파되었을 것이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현재 쿠차의 키질 천불동이나 쿠무툴라 천불동, 소파십 고대유적지 등에서 나타나는 석굴사원은 가장 이른 시기가 3세기로 추정되는데, 거대한 석굴사원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이미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인도의 불교가 전파되어 있지 않으면 건립되기 힘든 여건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3세기 이후의 불교는 어떠한가. 《고승전》과 《개원석교록》에 따르면 “백연(帛延)이 위나라 감로(256∼260) 중에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등 6부의 경전을 번역했다.”19)고 한다. 백연의 경우 《무량청정평등각경》뿐만 아니라 지겸, 축법호 등이 한역했던 《수능엄경(首楞嚴經)》을 한역하기도 하였다.20) 또한 진(晋) 무제(武帝) 태강(太康) 5년(284) 축법호가 돈황에서 구자(龜玆) 부사(副使)로부터 《아유월취차경(阿惟越致遮經)》의 호본(胡本)을 얻었다고 하고 있다.

진나라 때 활동했던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는 본래 쿠차국 국왕의 아들이었는데 출가하여 진나라 땅에 들어 왔다. 그는 주술을 뛰어났고, 더불어 《공작왕경(孔雀王經)》을 한역하며 신주(神呪)를 밝혔다. 또 제자에게 범패를 가르쳐 주었다는 기록21)이 있다. 이 기사를 통해 당시 쿠차에는 대승경전뿐만 아니라 밀교경전까지도 유입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서역지역의 음악은 쿠차음악이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음악과 악기의 발전이 활발한 만큼 당시에도 범패의 유행이 있을 정도로 음악의 발전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22)

중국 역경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구마라집(鳩摩羅什)도 쿠차국 인물이다. 그가 번역한 경전의 대부분이 대승방등부 경전들임은 굳이 목록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구마라집이 쿠차에서만 수학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쿠차가 그의 영향권 안에 있어 그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했을 것은 아니지만 당시 쿠차국에 대승방등부 경전의 유행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대승방등부 계통의 경전뿐만 아니라 계율과 관련된 경전이 유행했음도 알 수 있다. 석승순(釋僧純)이 진 간문제(簡文帝, 371∼372)에 《비구니대계(比丘尼大戒)》 1권을 구자국에서 호본을 구해 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23) 또 《비구대계이백육십사(比丘大戒二百六十事)》 2권을 서역 구자국에서 그 호본을 구해 왔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24) 그리고 진 효문제(孝文帝, 373∼396) 때에 역출된 《비구니계본소출본말서(比丘尼戒本所出本末序)》에는 구자국에 절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더불어 승순(僧純)이 이 계본(戒本)을 서역의 구자국에서 얻어왔다는 기록이 있다.25)

물론 소승의 유행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예로 담무참(曇無讖)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구자국은 대부분이 소승학을 배우고 있고 열반을 믿지 않는다.26)

담무참의 예가 아니더라도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도 역시 소승 가운데서도 설일체유부가 유행하고 있다고 하고 있으므로 이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더라도 쿠차국에서의 소승의 유행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6세기 무렵까지도 대승과 관련된 기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속고승전(續高僧傳)》 〈달마급다(達摩핞多)〉 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구자국에 이르러 역시 이곳에서도 2년 동안 왕사에 머무르며 그 곳의 스님들을 위하여 여실론(如實論)을 강의 해석하였다. 그 곳의 왕도 대승을 무척 좋아하였으므로 인도하여 깨우쳐 준 것이 많았다.……27)

위의 기사 내용과 같이 대승은 6세기까지도 꾸준히 성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쿠차에는 이미 소승에서부터 대승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격의 경전이 유입되었다고 보여 진다. 《대당서역기》의 내용으로 인해 지금까지 쿠차국의 불교 성향은 주로 소승만이 거론되어 왔는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소승이 함께 공존하며 불교가 대단히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 있는 쿠차의 석굴사원은 이러한 불교사상을 어떤 형식으로 뒷받침하고 있는가?

4. 석굴사원에 나타난 쿠차불교

   
키질 석굴과 쿠무툴라, 커즈얼가하 등이 석굴사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불당굴(佛堂窟)과 승방굴(僧房窟)의 두 형태가 공존해 있으므로 석굴사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불당굴에는 불상과 더불어 돈황 막고굴과 같이 수많은 벽화가 남아 있다.

키질 석굴의 경우 계곡 서쪽으로 있는 석굴과 동쪽으로 있는 석굴로 양분되는데, 서굴(西窟)에는 주로 3세기에서 4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굴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반대로 동굴(東窟)에는 대다수의 석굴이 6세기에서 7세기 가량으로 추정되는 굴이 밀집해 있다.28) 대부분의 굴 안에는 불상을 안치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실제 불상은 유럽 각 지역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남아 있지는 않다.

전·후실로 나뉘는 굴 내부는 전실 중심부에 불상이 놓여지고, 좌우로 통로를 만들어 후실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후실에는 대부분 열반상이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천장부는 말각조정(抹角藻井)이 보이는데, 이는 돈황을 중심으로 키질 및 바이얀 등지에 나타나는 ‘하늘을 상징하는 돔’이다.

그리고 전·후실 모두 불상을 제외한 모든 곳에 벽화를 그려 넣고 있다. 그리고 그 벽화의 주된 내용은 본생도(本生圖)이다. 본생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나, 보살도를 그린 벽화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점은 투르판이나 돈황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러운 느낌의 인물상이 아니라 이목구비가 매우 뚜렷하고, 인체에서 표현되고 있는 강한 느낌이다.

이는 불상조각의 측면에서 간다라 조각에 비해 깊이 대신 채색으로 표현하는 특이한 점이 있다는 점29)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채색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조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면 이는 벽화를 그림에 있어 팔자수염을 그려 넣거나, 미간에 선을 그려 넣는다거나, 눈을 위로 치켜뜨는 모습, 혹은 눈꺼풀을 두껍게 표현함으로써 좀더 강한 인상의 보살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생도를 중심으로 해, 달, 바람, 불과 관련된 여러 신의 모습이 천장화로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주로 푸른색 계통의 안료를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조류가 그려져 있다. 그 새들 가운데 가루다도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또한 키질 석굴의 동쪽 굴 178굴 벽화는석가모니 부처님의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달려 있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천장화 및 벽화와 더불어 정토경전의 설법내용을 그린 벽화가 나타나고 있어 사막 지역에서의 척박함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뇌를 이런 벽화를 통해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30)

쿠무툴라 천불동 역시 본생도가 중심인 벽화가 그려져 있고, 석굴 구조 역시 키질 천불동의 불상 배치 형식과 비슷하다. 지리적으로는 천산의 눈이 녹아 사철 물이 흘러내려 그 물이 강을 이룰 정도로 그 환경이 쿠차의 어느 곳보다 좋은 곳이다. 때문에 현장이 ‘아기리이가람’을 설명할 때 ‘회장의 서북쪽에서 강을 건너면……’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31) 그리고 석굴사원 자체는 키질 천불동과 마찬가지로 산 자체에 굴을 파서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고 벽화를 그린 형태를 갖추고 있다.

소파십 고대 유적지 역시 키질 천불동과 같이 키질 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서쪽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고, 그 안에 승방과 불당, 그리고 3개의 탑이 남아 있다. 현장은 이곳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산 어귀에 접하여 하나의 산 속에 두 개의 가람이 있다. 똑같이 소호리라는 이름으로, 그 위치에 따라 동소호리, 서소호리라 부르고 있다. 불상의 장엄함은 거의 인공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승도는 계율이 맑고 잘 정려하고 있다. 동소호리 불당 안에 옥석이 있는데 그 면의 너비는 2척이고 색은 황백색을 띠고 대합조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위에 불타의 족적이 있고, 길이는……”32)

   
지금은 장엄한 불상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아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서쪽 사원지의 4개의 문이 놓인 위치를 보았을 때, 상당한 규모의 사원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은 할 수가 있다.

쿠차에 남아 있는 석굴사원은 모두가 천산을 끼고 있으며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물이 넉넉지 않은 쿠차국에서 이와 같이 강을 중심으로 사원을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불교에 대해 국가적인 뒷받침과 국민들의 열렬함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쿠차국의 불교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에는 왕가에서의 뒷받침이 있었음은 문서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진서(晋書)》에는 왕의 봉불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구자왕이 구마라집을 맞아 들여 환국하고, 널리 경전을 설파하니 사방의 학자들이 이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33)

이 기록에서 쿠차에서는 불교에 대한 지속적인 왕실의 후원이 있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앞서 본 것과 같이 왕이 대승을 좋아했을 정도로 불교사상에 대한 쿠차 왕실의 적극적인 자세를 엿볼 수가 있다. 이는 현장이 쿠차에 들러 그곳 상황을 묘사한 내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대성(大成) 서문 바깥 양쪽으로 90척의 입불(立佛)이 있다. 이 불상 앞에 오년일대회(五年一大會) 회장을 세운다. 매년 추분 때 수십일 동안 나라 안의 승려가 모두 이곳에 모인다. 위로는 군왕으로부터 아래로 병사, 서민에 이르기까지 세속의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재계(齋戒)를 지키며 경을 받고 설법을 듣는다. 오랫동안 날을 보내도 오히려 피로를 잊을 정도이다.

많은 가람의 장엄한 불상은 진귀한 보석과 비단으로 장식하고 이를 가마에 싣고 간다. 이를 행상(行像)이라 하는데, 천명이 넘게 회장에 구름처럼 모여든다. 보통은 보름과 그믐날에 국왕과 대신이 국사를 논의하고 고승을 찾아 물은 다음에 처음으로 선포한다.34)

   
대성 문 바깥쪽에 90척, 그러니까 9m 높이의 불상이 세워졌고, 이 불상 앞에서 5년에 한 번씩 무차대회(無遮大會)가 열리는데, 군왕부터 서민까지 설법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쿠차국이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위의 기사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불교가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 불교 승려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진서》에 당시 쿠차의 불교가 유행한 모습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묘사가 있다.

구자국은 낙양으로부터 서쪽으로 8,280리 떨어져 있는데, (사원이 아닌 곳에) 성곽이 삼중으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 불탑과 사원이 천여 개가 있다.35)

사원 자리가 아닌 곳, 다시 말해 도시의 일반 거리에서조차 불탑과 사원이 이렇게 많이 세워져 있었다면 불교의 융성함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서민들의 돈독한 신앙심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후원에 의해 더욱 융성하게 발전한 쿠차불교는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지금까지도 쿠차 특유의 ‘서역불교문화’가 남아있으므로 천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축적되어 왔던 쿠차불교는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중국불교를 거론하면서 《대당서역기》 등을 통해 쿠차국의 불교는 대체적으로 소승불교적인 색채가 강하고, 그러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소승교의 설일체유부를 학습하고 있다.”고 하여 거의 단정적으로 부파불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쿠차국에서는 소승불교가 우세를 점하여 주로 소승적인 교리와 수행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거론한 것과 같이 소승불교만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여러 사상 역시 쿠차국에 존재했음을 알 수가 있다. 소승불교적인 성격이 부각된 것은 오히려 사막 남북로의 끝지점에 위치한 카쉬가르 지역이 설일체유부가 강성했던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거쳐 동쪽으로 들어오면서 첫 번째 마주치는 대표적인 국가가 쿠차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재고 없이 현장의 기록을 더해 쿠차불교의 성격을 단정 지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만일 인도와 중국을 오가는 서역의 주요 길목 중의 하나인 천산남로에서 가장 융성했던 오아시스 국가였던 쿠차에서 대승불교의 유행이 없었다면 중국에 전파된 불교의 색채가 주로 소승불교적인 성격을 띠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고대 쿠차국 불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쿠차국의 불교 전래 시점 역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본문에서도 거론했다시피 중국불교의 전래 시점과 불상의 발생 시점 등을 통합적으로 연구하여 쿠차불교의 시작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서역 지역의 불교전래 시점뿐만 아니라, 중국불교의 시작점을 규명하는 데도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

한지연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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